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병자호란 다시 읽기]

(35) 명과 후금의 정세, Ⅲ

Gijuzzang Dream 2008. 7. 20. 20:47

 

 

 

 

 

 

 (35) 명과 후금의 정세, Ⅲ

 

1626년(인조4, 천계6) 1월23일 누르하치는 영원성으로 들이닥쳤다.

그가 이끄는 병력은 20만이라는 설도 있고, 13만이라는 설도 있다.

어쨌든 누르하치의 대병력이 나타나자 영원성의 전면에 머물던 명의 관민(官民)들은

경악했다. 대릉하(大凌河), 소릉하(小凌河), 행산(杏山), 탑산(塔山) 등지의

명군 지휘관들은 가옥과 곡식을 불태우고 도주했다. 

 

 

영원대첩(寧遠大捷)의 실상

 

누르하치는 영원성에 대한 공격에 앞서 자신이 데리고 온 한인(漢人) 포로를 풀어

성안으로 들여보냈다. 그를 통해 누르하치는 원숭환에게 항복할 것을 요구했다.

“우리는 20만의 대군이다. 성은 분명히 함락될 것이다.

여러 관인들이 항복한다면 높은 관작을 주겠다.”고 했다. 원숭환의 회답은 간단했다.

“그대는 무슨 까닭으로 갑자기 공격해 왔는가? 나는 성을 사수할 것이다.”

 

1월23일, 누르하치는 공격을 명령했다.

후금이 자랑하는 철기(鐵騎)의 돌격이 시작되었다.

방패를 손에 쥔 경보병(輕步兵)들을 비롯하여 후금군 병사들이 성을 향해 개미 떼처럼 몰려들었다.

20만이라고 큰 소리치는 대병력이었다.

영원성의 원숭환 병력은 대략 1만 정도에 불과했다. 중과부적(衆寡不敵)이었다.

병력 수만 보면 승패는 이미 끝난 셈이었다.

성으로부터 홍이포의 포격이 시작되었다.

사격은 정확했다. 포탄은 벽력같은 굉음을 내며 돌격해 오는 누르하치 병사들의 대열 중간으로 떨어졌다. 사방으로 피가 튀었다. 성벽을 기어오르던 병사들도 쏟아지는 화살 앞에 나가 떨어졌다. 후금군의 사상자가 속출했다.

1월24일, 누르하치는 전차(電車)를 투입해 다시 총공격에 나섰다. 포격을 피하기 위해 참호를 파야 했지만 날은 춥고 땅은 꽁꽁 얼어 있었다.

다음날에도 후금군은 희생을 무릅쓰고 돌격을 계속했지만 성과가 없었다.

 

누르하치는 흥분했다.

그는 병사들의 선봉에 서서 전투를 독려했다.

홍이포의 포탄은 누르하치라고 해서 피해가지는 않았다. 굉음이 들리는가 싶더니 누르하치는 부상을 입고 쓰러졌다. 스물 다섯부터 전장을 주유했던 누르하치였다. 그동안 누르하치는 명군보다 몇 배나 많은 병력을 집중시키는 방식으로 연전연승했다.

거기에 철기의 기동력이 더해지면서 명의 오합지졸들은 후금군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1619년 사르후 전이 그러했고, 이후 줄곧 마찬가지였다.

 

이번에는 달랐다.

홍이포의 가공할 위력 앞에서는 후금군의 신속한 기동과 병력의 집중 전략이 통하지 않았다.

더욱이 원숭환은 그동안 상대했던 명군 지휘관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인물이었다.

그 스스로 영원성을 점찍어 성벽을 수축하고 군량을 비축해온 ‘준비된 지휘관’이었다.

그는 전투가 시작되기 전, 여러 장수들과 혈서를 써서 수성(守城)을 맹세했다.

원숭환의 탁월한 영도 아래 만계(滿桂), 조대수(祖大壽) 등 부하 장수들도 선방했다.

연이은 공격에도 함락되지 않자 누르하치는 병력을 거둬 심양으로 철수 길에 올랐다.

청실록에서는 유격(遊擊) 2명, 비어(備禦) 2명이 전사하고 500명의 병사들이 죽었다고 적었다.

 

영원성의 승리가 남긴 영향은 컸다. 이후 후금은 함부로 산해관을 넘보지 못했다.

1641년(崇禎 14) 홍승주(洪承疇)가 송산과 행산전투에서 무너질 때까지

산해관 앞의 영원을 거쳐 금주(錦州)에 이르는 요새와 성채들은 후금의 서진(西進)을 차단했다.

 

 

전투 부상 후유증으로 누르하치 사망

 

1626년 8월, 누르하치는 영원성에서 입은 부상의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윽고 후금의 버일러(貝勒)들은 홍타이지(皇太極)를 새로운 한(汗)으로 옹립했다.

그는 누르하치의 여덟번째 아들이었다.

우여곡절이 없지 않았지만 여덟 번째 아들이 최고 권력자로 즉위했다는 사실 자체가

명이나 조선의 눈으로 보면 이채로운 것이었다. 무조건 장자가 계승하는 관행으로 보면 말이다.

 

홍타이지(1592~1643)는 잘 알려진 것처럼 훗날 제위에 올라 태종(太宗)이 되고,

병자호란을 일으켜 인조에게서 치욕적인 항복을 이끌어냈던 인물이다.

그의 모친은 몽골족 여자였다.

누르하치가 1615년 황(黃), 홍(紅), 남(藍), 백(白) 등 사기(四旗)를 확대하여

팔기(八旗)를 창설했을 때, 스물 두 살 홍타이지는 정백기(正白旗)를 관할하는 버일러가 되었다.

그는 이 무렵부터 다이샨(代善), 아민(阿敏), 망굴타이(莽古爾泰) 등 그의 형들과 더불어

‘사대 버일러(四大貝勒)’로 불리면서 정무에 공동으로 참여했다.

 

홍타이지는 누르하치를 수행하여 전장을 누비면서 탁월한 전공(戰功)을 쌓았다.

특히 1619년 사르후 전투에서 그가 세운 전공은 혁혁하여 누르하치는

‘내 아들 홍타이지는 사람들이 의지하기를 인체로 치면 마치 눈과 같은 존재’라고 찬양했다.

홍타이지는 무략(武略)을 갖추었을 뿐 아니라 여진족의 지도자로서는 드물게 한문에도 능통했다.

홍타이지가 개인적으로 탁월한 인물이고, 추대에 의해 한으로 즉위했지만

즉위 직후 그의 위상은 보잘것이 없었다.

일견 만장일치에 의해 옹립이 이루어진 것처럼 보였지만 속사정은 달랐다.

즉위 직후 당장 그의 사촌형 아민이 삐딱하게 나왔다. 아민은, 홍타이지를 한으로 인정하지만

자신은 소속 기인(旗人)들을 이끌고 독립하겠다고 통보했다. 홍타이지는 긴장했다.

아민의 독립을 허락하면 나머지 각 기들도 전부 이탈하려 들 것이고,

그럴 경우 후금의 연맹 조직이 붕괴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즉위 직후 그는 아민을 설득하는 데 진땀을 흘려야 했다.

 

 

권력강화를 위한 홍타이지의 노력

 

아민을 겨우 설득했지만 홍타이지의 앞길은 첩첩산중이었다.

누르하치 시대 만주족은 분권(分權), 합의제(合議制)에 기초한 전통적인 부족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누르하치의 권력이 강화될수록 각 버일러들은 자신의 권력이 왜소해지지 않을까

두려워했고, 당연히 누르하치를 견제하려 들었다.

부족제의 전통이 강한 상황에서 홍타이지는 더욱이 서열상 사대 버일러 가운데 맨 꼴찌였다.

나머지 버일러들이 누르하치의 후계자로서 막내인 홍타이지를 옹립한 것은 이유가 있었다.

한의 권력을 억제하고 전통적인 부족제 본래의 통치체제로 돌아가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즉위 직후 홍타이지는 백관들로부터 조하(朝賀)를 받을 때

세 명의 형들과 나란히 앉아 남면(南面)했고,

제례(祭禮)를 거행할 때도 그들과 동렬(同列)에 섰다. 그것은 사실상 공동 집정이었다.

홍타이지는 이름만 한일 뿐

실제 가지고 있는 권력 면에서는 세 명의 버일러와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홍타이지는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나섰다.

그 과정에서 그는 한인(漢人)과 몽골인들에게 주목했다.

당시 후금 사회에는 많은 한인과 몽골인들이 있었다.

정복 과정에서 포로로 획득하거나 귀순해 온 사람들이었다.

누르하치는 한인들을 좋게 봐주지 않았다. 그들을 복속시키려고 위해 탄압을 일삼았다.

만주인들이 그들에게 약탈을 자행해도 그다지 문제삼지 않았다.

자연히 만주인들과 한인들 사이에 갈등이 불거졌다.

한인들은 침학을 피해 도망치는 것은 물론,

만주인 관인들을 암살하거나 우물에 독을 풀기도 했다. 무리를 지어 반란을 일으켰다.

 

홍타이지는 한인들을 안정시키기 위해 정책을 바꾸었다.

만주인 귀족이나 관원들이 한인들을 함부로 약탈하는 것을 금지했다.

한인과 만주인들을 분리시켰다. 한인들의 거주 지역에 만주인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하고,

한인 관리들을 시켜 그들을 통제하도록 했다.

능력 있는 한인들을 발탁하여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 중앙집권 체제를 구축하려 했다.

홍타이지의 포용정책에 힘입어 많은 한인들이 관직에 진출했다.

한인 관료들의 경륜과 지식을 활용할 수 있게 됨으로써 홍타이지의 권력은 강화되었다.

1627년 무렵, 홍타이지는 산해관을 향한 서진을 잠시 멈추고 내실을 다지기 위해 힘썼다.

동시에 배후의 위협을 제거하려고 시도했다.

그것은 조선에게 위기가 다가오고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2007-09-05  서울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