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가며(자료)

[고구려고분벽화] 안악3호 묵서명, 덕흥리 묘지명

Gijuzzang Dream 2007. 11. 6. 20:42

 

 

 

 

 고구려 고분벽화 묵서명  

 

 


◆ 안악 3호분 묵서명(安岳三號墳 墨書銘)

357년(고국원왕 27) 

소재지 : 황해남도 안악군 오국리 (구 황해도 안악군 용군면 유설리) 

           



            

永和十三年十月戊子朔卄六日」

癸丑使持節都督諸軍事」

平東將軍護撫夷校尉樂浪」

相昌黎玄?帶方太守都」

鄕侯幽州遼東平郭」

都鄕敬上里冬壽字」

□安年六十九薨官」

 

영화(永和) 13년 초하룻날이 무자(戊子)일인 10월 26일

계축(癸丑)에 사지절(使持節) 도독제군사(都督諸軍事)

평동장군(平東將軍) 호무이교위(護撫夷校尉)이며 낙랑상(樂浪相)이며

창려(昌黎)ㆍ현토(玄?)ㆍ대방(帶方)태수(太守)요

도향후(都鄕侯)인 유주(幽州) 요동군(遼東郡) 평곽현(平郭縣)

도향(都鄕) 경상리(敬上里) 출신 동수(冬壽)는

자는 □안(□安)인데 나이 69세에 관(官)으로 있다가 사망하였다.

 

 

서측실(西側室) 서벽   : 記室, 小史, 省事, 門下[拜]

전실(前室)   서벽우측 : 帳下督 

전실      서벽좌측 : 帳下督 

전실      남벽동쪽 : 戰吏 

전실      남벽서쪽 : □吏

동측실(東側室) 서벽북쪽 : 

동측실     북벽   : 井 阿光

동측실     동벽   : 阿婢, [京屋], [犢車]

회랑(回廊)         : [聖]上幡


- 서체: 해서(楷書)

- 출전:『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Ⅰ(1992) 

 

 

안악 3호분은 북한의 황해남도 안악군 오국리(일제시기의 황해도 안악군 용순면 유설리)에 있다. 무덤은 357년(고국원왕 27)에 쌓았는데, 고구려의 전형적인 돌방흙무지[석실봉토분]무덤으로 널길과 앞방, 곁방(감), 널방을 가진 구조이다.


천장과 각 돌방의 벽면에 인물과 풍속을 주제로 하는 다양한 벽화를 그렸는데, 특히 앞방의 오른쪽 곁방 벽면의 무덤 주인공 부부의 초상화와 주인공의 행차장면을 그린 회랑의 대행렬도가 유명하다. 이밖에도 방앗간, 우물, 부엌, 고깃간, 차고, 외양간, 마구간 등을 그려 4세기 중반 고구려인의 생활 모습을 생생하게 전달해준다.


묵서는 앞방 서벽 좌측 장하독(帳下督) 위에 있는데, 7행 68자이다.

그 내용은 동수(冬壽)라는 인물의 사망일자, 작위, 관직, 고향과 나이 등을 기술한 것이다.

묵서 이외에 벽화의 군데군데에 붉은 글씨로 벽화에 그려진 인물의 이름이나 관직[주인공의 속관으로 추정] 등을 적은 것들이 발견된다.


안악 3호분은 무덤을 쌓은 연대를 알 수 있어 고분벽화 연구의 가장 중요한 자료로 이용되고 있다. 그리고 벽화의 내용은 고구려인의 생활 모습을 생생하게 엿볼 수 있는 시각자료로서 적극 활용되고 있기도 하다. 


- 문제점 -                 

1. 영화(永和)는 東晋의 연호로서 12년으로 마감했으며, 이어 승평(升平)이 쓰였다. 그런데 이 묵서명에서는 이미 연호를 사용하여 영화 13년이라 기록하고 있다. 이 연도를 서력으로 바꾸면 357년으로 고구려 고국원왕 27년, 동진 목제(穆帝) 13년. 승평 1년에 해당한다.

연호의 착오, 여기서 작은 의문이 시작된다.

 

2. 게다가 무덤 주인공의 직급인 도독제군사(都督諸軍事)는 군사를 도독하는 자를 말하므로 그 구역이 함께 분명히 적혀 있어야 할 텐데 그렇지 않다.


3. 또한 중국에서 郡 규모 정도 되는 왕국에서는 장관을 289년 이전에는 상(相), 이후에는 내사(內史)라 일컬었는데, 낙랑내사(樂浪內史)가 아닌 낙랑상(樂浪相)이라 표기한 것도 의문스럽다.

 

한편 안악 3호분에서 나오는 묵서명의 주인공 동수(冬壽)는 

336년 요동의 전연(前燕)에서 고구려로 망명한 동수(?壽)와 같은 사람으로 추정된다.

동수는 전연의 왕 모용황(慕容?) 밑에서 사마(司馬)로 있던 인물로, 모용황이 왕위를 계승한데 불만을 품은 모용인(慕容仁)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진압하러 나갔다가 패하고 오히려 모용인의 부하가 된다. 훗날 모용황이 다시 군대를 일으켜 모용인 세력을 무너뜨리자 동수는 곽충(郭充) 등과 함께 고구려로 망명하였다. 이후 동수의 행적은 문헌에서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안악 3호분의 동수(冬壽)와 전연(前燕)에서 고구려로 망명한 동수(?壽)를 같은 사람으로 보는 근거는,

1. 묵서명의 출신지가 요동(遼東) 평곽현(平郭縣) 도향(都鄕) 경상리(敬上里)로 기록된 점,

2. 생존 시기와 이름이 비슷한 인물이 요동에서 고구려로 망명한 점,

3. 고구려에서 전연으로 송환된 인물 명단에 동수가 있지 않은 점 때문이다.

 

 

 


◆ 덕흥리고분 묘지명· 묵서명(德興里古墳 墓誌銘 墨書銘)

408년(광개토왕 18)

소재지 : 평안남도 남포시 강서구역 덕흥리(구 강서읍) 무학산 서쪽기슭

 


            

 

<묘지명>

 

□□郡信都縣都鄕中甘里」

釋加文佛弟子□□氏鎭仕」

位建威將軍國小大兄左將軍」

龍?將軍遼東太守使持」

節東夷校尉幽州刺史鎭」

年七十七薨焉永樂十八年」

太歲在戊申十二月辛酉朔?五日」

乙酉成遷移玉柩周公相地」

孔子擇日武王選時歲使一」

良葬送之後富及七世子孫」

番昌仕宦日遷位至?王」

造○萬功日煞牛羊酒?米粲」

不可盡掃旦食鹽○食一?記」

之後世寓寄無疆」


□□군(郡) 신도현(信都縣) 도향(都鄕) 중감리([中]甘里)사람이며

석가문불(釋迦文佛)의 제자(弟子)인 □□씨(氏) 진(鎭)은

역임한 관직이 건위장군(建威將軍), 국소대형(國小大兄), 좌장군(左將軍),

용양장군(龍?將軍), 요동태수(遼東太守), 사지절(使持節),

동이교위(東夷校尉), 유주자사(幽州刺史)였던 진(鎭)은

77세로 죽어, 영락(永樂) 18년

무신년(戊申年) 초하루가 신유일(辛酉日)인 12월 25일

을유일(乙酉日)에 (무덤을)완성해서 영구(靈柩)를 옮겼다. 주공(周公)이 땅을 보고,

공자(孔子)가 날을 택했으며 무왕(武王)이 때를 정했다. 날짜와 시간을 택한 것이

한결같이 좋으므로 장례 후 부(富)는 7세(七世)에 미쳐 자손(子孫)이

번창하고 관직도 날마다 올라 위(位)는 후왕(侯王)에 이르도록 하라.

무덤을 만드는 데 만 명의 공력이 들었고, 날마다 소와 양을 잡아서 술과 고기, 쌀은

먹지 못할 정도이다. 아침 식사로 먹을 간장을 한 창고 분이나 보관해 두었다. 

기록해서 후세에 전하며, 이 무덤을 방문하는 자가 끊이지 않기를.

 

 

<묵서명>

 

전실 서벽(西壁) 상단(上端)   ① 此十三郡屬幽州部縣七十五

                 州治廣?今治燕國去洛陽二千三百

                 里都尉一 部幷十三郡

                 ② 六郡太守來朝時通事吏

               ③ 奮威將軍燕郡太守來朝時

               ④ 范陽內史來朝論州時

               ⑤ 魚陽太守來論州時

               ⑥ 上谷太守來朝賀時

               ⑦ 廣寧太守來朝賀時

               ⑧ 代郡內史來朝□□□

전실 서벽(西壁) 하단(下端)   ① 諸郡太守通使吏

               ② [北平]太守來朝賀時

               ③ 遼西太□□朝賀時

               ④ 昌黎太守來論州時

               ⑤ 遼東太守來朝賀時

               ⑥ 玄兎太守來朝□□

               ⑦ ?浪太守來□□□

               ⑧ □□□□□□□□

전실 남벽(南壁) 서측(西側)   鎭□[府長]史[司]馬

               參軍典軍錄事□

               曺僉史諸曺職[吏]

               故銘記之

전실 남벽(南壁) 동측(東側)   ?縣令捉軒弩

전실 동벽(東壁)         ① 鎭□[刺]史司馬

               ② 御使導從時

               ③ 治中別駕

               ④ 使君出遊時

전실 천정(天井) 북측(北側)   ① 地軸一身兩頭

               ② 天馬之象

               ③ 天雀之象

               ④ ?毒之象

               ⑤ 博位之?頭生四

                 耳□有[得]自明在於右 

                 ⑥ 賀鳥之象學道

                 不成背負藥□

                 ⑦ 零陽之象學道

                 不成頭生七□ 

                 ⑧ 喙遠之象

전실 천정(天井) 서측(西側)   ① 千秋之象

               ② 萬歲之象

               ③ 玉女之幡

               ④ 玉女之?

               ⑤ 仙人持幢

전실 천정(天井) 남측(南側)   ① 仙人持蓮

               ② 吉利之象

               ③ 牽牛之象

               ④ □□之象

               ⑤ 富貴之象

               ⑥ 猩猩之象

전실 천정(天井) 동측(東側)   ① 飛魚□象

               ② 靑陽之鳥 一身兩頭

               ③ 陽光之鳥 履火而行 

현실(玄室) 동벽(東壁)     ① 此人爲中裏都督典知

                 七寶自然音樂自然

                 飮食有□之燔□□□□

                 ② 此人與七寶

                 俱生是故

                 儉喫知之

                 ③ 此二人大廟作食人也

               ④ 此二人持刀侍[衛]

                  七寶□時

               ⑤ 此二人持菓□食時

현실(玄室) 서벽(西壁)      ① 此爲西?中馬射戱人

               ② 射戱注記人

현실(玄室) 남벽(南壁)     此是□前廐養馬子

연도(羨道) 서벽(西壁)     太歲在己酉二月二日辛酉成關此?戶大吉吏

연도(羨道) 동벽(東壁)     童□□端?□道者□□□笑


- 출전 : 『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Ⅰ(1992)


 

덕흥리 벽화고분은 북한의 평안남도 남포시 강서구역 덕흥리 무학산 기슭에 있다.

전형적인 고구려의 돌방흙무덤[석실봉토분]으로 408년(광개토왕 18)에 만들었다.


고분의 벽면에서 56개소 600여 자의 묵서명이 발견되었는데, 그것은 크게 무덤 주인공의 묘지문과 벽화설명문으로 나누어진다.

묘지문은 돌방 전실에서 후실로 들어가는 통로 입구 위에 공간을 마련하고 기술하였다.(가로 49.7-50.5cm, 세로 21.5-22.8cm)

그 내용은 무덤의 주인인 유주자사(幽州刺史) 진(鎭)의 고향, 역임한 관직, 나이, 무덤에 묻힌 날자, 후손의 번영과 안녕을 기원하는 내용으로 모두 14행 154자이다.

또한 덕흥리고분은 연대를 알 수 있어서 고구려 고분벽화 양식 변천 연구의 기준 자료로 활용되고 있기도 하다. 

 

무덤의 주인공 유주자사 진의 국적에 대하여 고구려인이라고 보는 설과 중국인으로 보는 설이 있다. 나아가 고구려의 유주진출 여부를 둘러싸고 진이 유주자사(幽州刺史)란 관직을 중국에서 수여받은 것인지, 고구려에서 수여받은 것인지에 대하여 학자들 사이에 견해가 엇갈리고 있다.

 

묘지명에 나오는 영락 18년 무신년은 408년이지만, 초하루가 신유일은 12월 25일, 을유일은 양력으로 409년 1월 26일이다. 이때는 광개토대왕의 시대,

391년 19세에 왕좌에 오른 광개토대왕 담덕(談德)은 부친 고국양왕(故國壤王)의 뒤를 이어 재위 20년 동안 펼친 정치ㆍ군사ㆍ문화 활동에 힘입어 5세기 중엽부터 중국 남조와 북조, 초원지대의 강자 유연(柔然)과 함께 고구려를 동북아시아의 패자이자 동아시아 4대 강국의 하나로 떠오르게 하였다.


5세기 전후 동아시아에서 고구려와 주로 겨루던 상대는 선비족(鮮卑族) 모용씨(慕容氏)가 세운 연(燕)이었다. 4세기 초부터 갈족(?族)의 후조(後趙), 저족(?族)의 전진(前秦)과 적절히 교섭 관계를 이어 갔지만, 모용씨가 세운 전연ㆍ후연 등과는 주로 요동 지역 쟁패를 들러 싼 갈등이 계속되고 있었다.

 

요하(遼河) 유역을 근거로 서쪽으로 중원 진출을 도모하던 연으로서는 요동으로 뻗어 나오려는 동방의 강국 고구려가 걸릴 수밖에 없었고, 요동을 손아귀에 넣어 서방을 안정시키려던 고구려로서는 연이 계속 세력을 확장해나가자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충돌은 피할 수 없었고, 전투마다 그 결과가 두 나라에게는 흥망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어 정예군까지 동원해 대규모 전투를 거듭 치렀다. 


336년 전연에서 고구려로 망명한 송황ㆍ곽충ㆍ동수도 같은 운명이었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전연의 요구로 347년 송환되지만, 동수는 끝까지 고구려에 남았다. 이후 392년 거란을 친 고구려는 거란인을 포로로 잡아오는데 그치지 않고 거란에 붙잡혀 갔던 백성 1만명을 되찾아 왔으며, 400년 후연은 고구려 땅 700리를 쳐서 빼앗은 뒤 그곳의 민호(民戶) 5,000여 호를 요서로 옮기게 했다. 전쟁과 잦은 영역 바뀜, 인적 이동이 극심하던 당시 상황을 잘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덕흥리 벽화분의 주인공 유주자사 진은 이러한 시대를 산 광개토대왕시대 인물로 이곳 묘지와 벽화는 이미 현대 한국사 연구에서 풍운아로, 시대의 수수께끼로 자리매김한 지 오래다.


진은 □□군 신도현 도향 □감리 사람이다. 신도현 위치를 북한 연구자들은 『고려사』「지리지 3」의 ‘가주(嘉州) 본고려신도군(本高麗信都郡)’이라는 기사를 근거로 평북 운전ㆍ박천 일대로 본다.

 

반면 중국 연구자들은 『진서(晉書)』「지리지(상)」에 보이는 ‘기주(冀州) 안평국(安平國) 신도현(信都縣)’에 관한 기사를 근거로 신도현이 河北의 安平(284년 이후의 長樂)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출신 郡의 이름을 확인할 수 없는 상태여서, 어느 설에 무게를 두는가에 따라 주인공 진에 대한 이해가 달라지게 된다.


북한 연구자들이 내세우는 견해대로라면 고구려 땅에서 태어나 성장한 인물이 되는 반면, 중국 연구자들 해석대로라면 16국시대 前燕 땅에서 태어나 선비족 모용씨 정권에서 관료를 지낸 사람이 된다.

 

묘지가 발견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출신지역을 명확히 알 수 없는 진이 역임한 관직은 ‘건위장군, 국소대형, 좌장군, 용양장군, 요동태수, 사지절, 동이교위, 유주자사’다. 용양장군까지는 무덤 주인공이 획득한 위계이고 요동태수부터는 역임한 관직이다.

 

4세기 중국에서 통용되던 晉의 관위체계를 기준으로 삼을 경우, 건위장군은 4품, 좌장군과 용양장군은 3품이다. 국소대형은 덕흥리 벽화분에 처음 나오는 것으로 大兄에서 파생된 고구려 관등명이 확실하다. 요동태수는 요동군(遼東郡)의 장관을 가리키는 명칭이고 사지절은 州의 장관이나 장군에게 주는 칭호이다. 동이교위는 조위(曹魏) 때에 중국 북방과 동방의 이민족에 관한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설치된 관직이다. 유주자사는 유주(幽州)의 장관을 가리키는 명칭이다.

이러한 위계와 관직명은 덕흥리 벽화분의 주인공 진이 전연 혹은 고구려의 중앙 정부에서 비교적 높은 위계에 오르고, 외관으로서도 주요한 자리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佛弟子를 자임한 진의 성씨는 알 수 없다. 이미 372년 고구려에서 불교를 공인한 뒤 불교 신앙을 적극 장려하였음을 고려하면, 진이 불제자라 일컬은 것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질 수 있다. 그러나 무덤 터를 잡기 위해 상지(相地), 擇日, 선시(選時)했다는 기록에는 魏晉代 중국인의 葬地 선정과 관련한 관습 및 관념이 짙게 배어 있다.


이러한 관습과 관념이 위진에서 고구려로 소개되어 고구려 귀족인 진의 장의에 반영된 것인지, 아니면 전연과 후연의 관료출신인 진이 익히 알고 있는 대로 따른 것인지 현재로서는 알기 어렵다. 출신을 파악하는 보조자료이자 때로는 결정적인 정보가 될 수 있는 성씨 역시 묘지에서 확인되지 않기 때문이다.

77살에 죽어 408년 장사를 치렀다고 하니 빈(殯)의 기간 등을 고려하지 않은 채, 진이 408년 사망한 것으로 보고 태어난 해를 단순 계산하여 추정하면 332년 정도가 된다.

고구려 고국원왕 2년 고구려의 신도에서 태어나 3품 관위까지 오르고 고구려가 새롭게 개척한 광대한 유주의 자사를 역임한 한 사람이 생을 마치고 새 수도로 정비되던 평양에서 멀지 않은 남포의 산기슭에 묻힌 것이다.

 

혹은 중국 동진 성계 7년 전연의 신도에서 태어난 한 인물이 전연 모용씨 정권의 중심 관료로 성장하여 전연 혹은 후연에서 유주자사까지 차례로 지냈지만 나라가 망하자 동방의 고구려로 망명, 남포 근처에서 벼슬살이를 하다가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 중국 역사학계

1. 1982년 유영지(劉永智) : 덕흥리 벽화분이 주로 적석총인 고구려 묘제가 아니고, 다실(多室) 위주의 평면 구조와 삼각고임이 주된 천장짜임 등에서 위진대 중원 묘제와 닮았으며 묘지와 설명문의 형식이 중국 것과 같은 점, 그리고 370년에서 376년 사이 전진(前秦)이 유주 지역에서 활동한 기록이 보이는 점 등을 들어 ‘진=중국인설’을 제기.

2. 1986년 강첩 : 덕흥리 벽화분의 유주는 후연(後燕)의 유주라는 설을 내놓았다.


- 일본 학계

1. 1987년 사에키 아리키오(佐伯有淸) :‘진=중국인설’을 제기했다

덕흥리 벽화분 묘지명의 형식과 내용이 같은 시대 인물인 모두루(牟豆婁)의 묘지명과 다른 점 등을 들어 진이 망명객이라는 견해를 제시.

2. 1989년 다케다 유키오(武田幸男) : 진이 역임한 직위 가운데 일부는 망명 전의 것이며 대부분 자칭한 것이고, 고구려가 요동에 진출한 때는 385년에서 395년 사이이므로 그 이전에 유주에 진출했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주장.

 

- 북한

1. 손영종 : ‘진=고구려인설’

묘지명이나 벽화에 보이는 외래 요소는 활발한 문화교류의 결과이며, 고구려에 분화된 장군호(將軍號)가 있을 가능성이 높고, 370년 전진이 평주(平州)를 다 차지하지 못했음을 시사하는 기록을 들었다.

2. 1991년 손영종 : ‘진=고구려인설’

遼河 이동의 요동군은 370년 이전에 고구려 영역에 속하며, 봉건시대에 국왕 밑에 있는 신하가 허호ㆍ허직을 자칭하기는 어렵다는 점, 그리고 4세기 남평양을 세우게 되어 평양 남방에 중국인 망명객이 중심인 반독립 세력이 존재하기 힘든 점.

 

- 한국 

1990년에는 한국의 공석구 : 묘지명 분석을 바탕으로 ‘진=중국인 망명객설’을 지지

 

 

이처럼 의견이 분분할 뿐 논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진이 고구려 사람임을, 혹은 중국 사람임을 논증하는 글들이 앞으로도 계속 발표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논쟁 가운데 몇 가지 짚고 넘어가야할 부분이 있다.

우선 유주자사를 포함한 여러 관직을 진이 자칭한 허구의 관직이라고 하기에는 벽화에 나오는 유주 13군 태수 賀禮圖가 전하는 기록화적 성격이 너무 강하다는 사실이다. 13군 75현으로 구성되었다는 유주 관련 묵서명의 내용도 사실이나 허구 가운데 하나로 단정짓기보다는 동아시아 역사에서 ‘교치(僑治)’라는 형태로 흔히 나타나는 실제 영역과 관념의 영역을 조합시키는 태도를 염두에 두고 이해할 필요가 있다. 중국 남북조시대에 남북 왕조들이 상대국 영역까지 포함해 반 허구, 반 실제를 바탕으로 행정체계를 짰던 사실도 참고할 수도 있다.

 

덕흥리 벽화분 무덤 주인 진의 성씨는 무엇이며, 출신지가 어디인지만 밝혀진다면 진의 삶이 그 실체를 드러낼 수 있을까?


회화적 측면에서 덕흥리 벽화분 벽화의 제재ㆍ구성ㆍ기법을 살펴보면

안악3호분 벽화 이래 50여 년 동안 진행된 ‘고구려화’의 흔적을 짚어낼 수 있다.

안악3호분 벽화가 정제된 제재들을 짜임새 있게 배치한 뒤 세련된 기법으로 표현했다면,

덕흥리 벽화분 벽화는 가능한 한 많은 제재를 곳곳에 펼쳐놓으려 하되 상대적으로 거칠고 투박한 표현으로 마감하였다.

 

안악3호분과 비교할 때, 덕흥리 벽화분 벽화의 등장인물들은 행렬 속에서 상대와 겹쳐 보이지 않으며, 더 말랐고, 똑같은 가면을 쓴 듯 표정이 없다.

부드러운 질감을 가진 소재로 풍성하게 만든 옷을 걸치는 대신 소매가 좁고 아래 단이 허리 아래까지 내려오는 긴 저고리와 좁은 주름치마를 입었다.

상대적으로 소박하고 건실한 분위기가 벽화 전체를 휘감고 있다.

 

안악3호분 벽화 제작에 적용된 기법과 제재 구성방식을 그대로 계승ㆍ발전시키기보다는 회화적인 측면에서 후퇴로 비쳐질지라도 재검토ㆍ재구성을 거친 결과일 것이다.

 

 


참고자료 출처 :

『한국미술의 자생성』, 최몽룡, 한길아트, 1999년

『고려사의 제문제』, 손영종, 신서원, 2000년

『고대로부터의 통신』, 한국역사연구회고대사분과, 푸른역사, 2004년, pp.120-1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