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가며(자료)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는 기존지도 편집으로 제작 - 새로운 주장

Gijuzzang Dream 2007. 11. 6. 20:09

 

 

 

"대동여지도 기존지도 편집해 제작"

 

 

 

 

 

조선의 지도학을 집대성한 고산자(古山子) 김정호(金正浩, 1804-1866 추정)

대표작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보물 850호)’를 직접 전국을 답사해 제작한 것이 아니라

기존의 지리서와 지도를 편집해 만들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기봉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은

서울대 인문주간 행사로 9월29일 열리는 규장각 학술대회를 앞두고

9월28일 발표한 ‘조선의 고지도와 김정호’라는 강연록을 통해 주장했다.

 

강연문에서 “김정호가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대동여지도’를 제작했다는 통설은 잘못됐다”며

 

“그는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문헌비고(文獻備考)> 등 조선시대 지리지와

정상기의 <동국지도(東國地圖>, 신경준 주도로 제작된 <군현도(郡縣圖)> 등

당시 지도들을 참조해 자신의 집에서 각종 지리 정보를 취합해 <대동여지도>를 제작했다”

고 주장했다.


그는 이에 대한 근거로

▲ 대동여지도에 나오는 1만8천여 개의 지명위치를 혼자 직접 측량할 수 없다는 점,

▲ 당시 조선은 각 지역에 대해 상당히 자세한 지리정보를 확보하고 있었던 점,

▲ 다른 지역에 비해 위치 정보가 부족했던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이

    상대적으로 부정확한 점 등을 들었다.

 

 

 

 

실제 가보면 쉽게 알 수 있는 잘못된 지리정보가 계속 등장하는 문제에 있어서,

실례로 김정호가 제작한 청구도나 동여도, 대동여지도에는

충청도 해미현(海美縣) 근처의 서면(西面) 지역이 잘못 표기돼 있고,

한양에서 아주 가까운 곳의 지명도 수십년간 잘못 기재돼 있는데,

이는 기존의 잘못된 지리지와 지도를 참조했기 때문에 잘못을 답습했다는 방증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대한지리학회 학회지에도 김정호가 백두산을 여러 차례 오르고

전국을 돌아다녔다는 내용이 실릴 정도로 잘못된 학설이

일제시대 이후 수십 년 동안 사실로 받아들여졌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그는

“정확한 고증 없이 일제시대에 등장했던 전국답사설 등의 통설을 그대로 받아들여선 안 될 것”

이라고 하면서, 김정호의 '전국답사설' 등이 사실이 아니라고 해도

그의 업적이 축소되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김정호는 대중에게 정확한 지리정보를 제공하겠다는 일념으로 평생을 바친 위대한 학자”라며

 “김정호는 남북 6.6m에 이르는 조선에서 가장 큰 ‘대동여지도’를

민간 수요자도 쉽게 접할 수 있도록 목판본 지도로 제작해 조선의 지도를 집대성했다는데

그 위대함이 있으며, 그는 지도 범례를 표로 따로 만들어 예시하거나

찾기 쉽게 색인표를 제시하고 큰 지도를 엇갈리게 2권으로 나눠 출간하는 등

지도제작의 선구자이자 우리 문화의 자랑” 이라고 강조했다.




- 2006년 10월, 경향, 서울, 연합, 조선, 국민, 한국 등의 기사정리

 

 

 

 

 

 

김정호 ‘대동여지도’

현재 서울대 규장각 전시실을 방문하는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대표적인 작품은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이다.
 
이 대동여지도는 ‘단순한 지도’가 아니다.
책자 형태의 지도첩이 모여 완성된 것이다.

실제 ‘대동여지도’는 1책에서부터 22책에 이르는 책자가 모여져 그것을 모두 펼치면

우리나라 전도(全圖)가 되는 절첩식(접었다 폈다 할 수 있는 책자의 형식) 지도의 형태를 띠고 있다.

축적은 약 16만분의 1.

각 책은 세로 30.2㎝, 가로 20.1㎝ 크기이며 8폭으로 접을 수 있다.

전체를 펼치면 세로 6.7m, 가로 3.3m의 크기로

실물을 본 사람은 우선은 그 방대한 크기에 압도된다.

거기에다가 보급을 위하여 그것을 목판으로까지 새겼으니

김정호는 정말 대단한 인물임에 틀림이 없다.

그럼 김정호는 왜 자신의 일생을 바쳐가며 그토록 지도 제작에 매달렸던 것일까?

무엇보다 김정호가 지도 제작을 위해 백두산에 여러 차례 올라갔다는 일화가 전해지듯

김정호는 우리 국토의 모습을 지도에 담으려는 열정을 가진 ‘지도 마니아’였다.

그리고 이러한 지도 제작 배경에는 조선후기 상업의 발달이라는 시대적 상황이 맞물려 있었다.

상업의 발달로 성장한 상인들에게는 전국을 권역별로 자세히 파악할 수 있는 정보,

곧 지도가 필요했을 것이고, 김정호는 이를 위해 절첩식의 형태로

상인들이 휴대하기에도 편리하게 지도를 만든 것으로 여겨진다.

대동여지도에 각 고을의 거리를 10리마다 표시한 것이나

역이나 원 등 상업과 관련된 정보가 자세한 것도 이를 입증한다.

그리고 목판으로 지도를 제작하여 대량 보급을 꾀한 것은

그만큼 이 시기에 지도 수요가 광범위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대동여지도’에는 산과 산줄기, 하천, 바다, 섬, 마을을 비롯하여

역참, 창고, 관아, 봉수, 목장, 진보(鎭堡), 읍치, 성지(城址), 온천, 도로 등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또한 범례에 해당하는 읍치, 진보, 창고, 역참 등의 지도표를 만들어

훨씬 용이하게 지도를 볼 수 있게 하였다.

‘대동여지도’의 정밀도는 20세기 초 일본 해군이 보유한 근대식 지도보다

더 정밀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한편 규장각에는 ‘대동여지도’의 모본(母本)으로 추정되는 ‘동여도’ 23첩도 소장되어 있다.

‘대동여지도’가 목판본인 데 비해 ‘동여도’는 채색 필사본으로

그 모습은 ‘대동여지도’보다 훨씬 화려하고,

목판에는 새길 수 없었던 내용까지도 넣어 7,000여 개 이상의 정보가 더 들어 있다고 한다.

 

‘동여도’는 우리나라 고지도 가운데서 가장 많은 정보를 담고 있는 전국지도이다.

그 가치는 ‘대동여지도’와도 견줄 만하다.

아마 김정호는 필사본 ‘동여도’를 제작하고 상인과 같은 실수요층에 널리 보급하기 위해

‘대동여지도’를 제작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외에 김정호는 ‘동여도지’ ‘여도비지’ ‘대동지지’ 등 3대 지리서를 편찬하면서

지도제작자로서의 소임을 다했다.
그러나 위대한 업적에 비해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부정확하게 알려진 설들도 많다.

이것은 무엇보다 그가 중인 출신으로서 그에 관한 공식 기록이 거의 없는 것에 연유한다.

그러나 김정호는 중인이라는 신분적 한계를 극복하고

평생을 지도제작에 전념하며 치열한 장인 정신을 구현하였다.

평생을 지도와 지리서 제작에만 매달린 한 명의 선각자로 인해

우리는 150여년 전 조선의 산하를 생생하게 살펴볼 수 있는 행운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산업화와 경제 논리에 밀려 전통의 유산을 지켰던 장인들이 거의 사라져 가고 있는 지금의 시대에

김정호와 같은 장인의 탄생을 기대해 보는 것은 너무나 지나친 것일까?
- 신병주 서울대 규장각 학예연구사

- 경향 [샘이깊은물] 2004년 06월 2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