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가며(자료)

[고구려고분벽화] 벽화의 비밀(덕흥리고분, 강서대묘, 강서중묘)

Gijuzzang Dream 2007. 11. 6. 20:47

 

 

 

 

 

 

 

 

동북아 覇者 역사비밀 풀어줄 '블랙박스' 

 

 

 

 

고구려 고분벽화의 비밀

668년 9월, 평양성의 문이 열리고 고구려의 왕과 대신 98인이 죄인의 모습을 한 채 밖으로 나왔다.

적국에 대한 항복 의식을 거행하기 위함이다. 70여 년에 걸친 고구려와 수당(隋唐)전쟁은 이렇게 끝났다. 신라와 연합한 고구려 부흥군과 당군 사이의 전투로 고구려의 옛터는 한 차례 더 고함과 말발굽 소리, 창칼이 부딪치는 빛과 소리로 뒤덮이지만 역사는 돌이켜지지 않았다. 동방의 강국 고구려는 멸망했고, 동북아시아의 정치·문화 중심 평양은 버려졌으며, 옛 수도 국내성(현재의 지안)은 미래를 기약할 수 없는 변경도시가 되었다. 옛 고구려의 중심도시들은 이제 서서히 역사의 기억 속으로 자신의 자리를 옮겨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

1906년 대한제국의 강서군수 이우영은 가까운 몇몇 사람들과 함께 강서 삼묘리에 있는 오래된 두 기의 무덤 안에 들어갔다. 무덤 안은 넓고 서늘했으며, 벽과 천장에는 여러 가지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특히 큰 무덤 속 안벽에 그려진 신수(神獸)는 뱀과 거북이 얽혀서 꿈틀거리는 모습이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이 느껴졌다. 유명한 고구려 강서대묘의 현무가 1,300여 년 만에 대한제국의 관리에 의해 공개적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순간이다.

고구려 고분벽화는 3세기말이면 제작되지만 읽을 수 있는 그림을 남기기 시작하는 것은 4세기 중엽부터이다.

357년(고국원왕 27) 제작된 안악 3호분 벽화는 초기의 가장 뛰어난 작품 가운데 하나이자 역사의 수수께끼를 담고 있는 유적이다. 250여 명에 달하는 인물이 등장하는 회랑 대행렬도의 주인공은 과연 누구인가. 묵서명(墨書銘)의 주인공 동수인가. 고구려의 왕인가. 고구려의 왕이라면, 미천왕인가. 고국원왕인가. 같은 시기의 중국이나 동아시아의 다른 어느 지역에서도 비교될 만한 작품을 찾아볼 수 없는 뛰어난 수준의 표현기법을 구사한 벽화제작 화가들은 과연 누구인가. 고구려 사람인가. 낙랑 사람인가. 외국에서 초빙된 사람인가. 고구려의 귀족들은 지붕을 기와로 올린 커다란 고기창고를 만들어 유지하고, 우차(牛車)를 두 대 이상 운영할 정도로 잘 살았는가. 아니면 이런 시설이나 기구는 왕과 왕실의 사람들에게만 허용되었는가. 고구려의 귀족이나 상류층 여자들은 정말 벽화의 인물들처럼 턱이 겹칠 정도로 살쪄 있었는가. 아니면 살찐 얼굴이 화가에 의한 의도적 표현의 결과일 뿐인가.

1976년 관개수로 공사 도중 발견된 덕흥리고분의 벽화고구려 사회 및 문화에 대한 생생한 실증자료를 더하여 주는 동시에 고구려사에 대한 새로운 논쟁거리를 던져주었다.

408년(광개토왕 18년) 만들어진 벽화고분의 주인공이 유주자사를 지냈던 진(鎭)이라는 사람임은 묘지명을 통해 확인됐지만, 진이 자신의 일생에서 가장 자랑스럽게 여겼던‘유주자사’재임이 사적 사실인지 아닌지, 고구려의 관리로서 유주자사를 지냈다는 것인지, 요동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두고 고구려와 경쟁관계에 있던 전연(前燕)과 같은 나라의 유주자사를 지냈던 것인지가 확실하지 않았던 까닭이다.

요동지역 대부분과 하북 평원 일부를 포함한 땅 유주의 자사였다고 하는‘진’은 처음부터 고구려 사람이었는가. 아니면 광개토왕 시대 고구려로 망명 온 전연의 장군이었는가.

두 벽화고분 주인공의 정체를 둘러싼 논쟁은 계속되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안악3호분 벽화보다 50년 늦게 그려진 덕흥리고분 벽화에서 등장인물들은 얼굴과 복식에서 고구려적인 특색을 보다 강하고 뚜렷하게 드러낸다는 사실이다. 행렬도에 등장하는 기사들은 말과 무사 모두 갑옷과 투구로 무장했다고 전하는 고구려 철기(鐵騎)를 연상시키며, 귀부인의 우차 곁에 늘어선 갸름한 얼굴의 시녀들은 하나같이 주름치마를 걸쳤다. 덕흥리고분 벽화보다 늦은 시기에 제작되는 쌍영총 및 수산리고분 벽화 등장인물들에게서 확인할 수 있는 전형적인 고구려인의 얼굴과 복식이 덕흥리고분 벽화에서 이미 준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의 초기 고분벽화가 생활풍속을 주제로 삼았음은 평양권을 대표하는 안악 3호분, 덕흥리고분 벽화뿐 아니라 씨름무덤(각저총)을 비롯한 집안권 고분벽화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고구려인 특유의 점무늬 저고리와 바지, 주름치마를 걸친 갸름한 얼굴, 소박한 머리모양의 인물들이 씨름무덤 벽화에 모습을 보인다. 내세에도 현세처럼 귀족의 권위와 여유를 지니고 살고자 했던 고구려 귀족의 모습을 지안 고분벽화의 주인공 초상을 통해서도 살펴볼 수 있다. 그러나 불교를 국교로 삼았던 5세기 고구려의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하듯이 씨름무덤 곁에 만들어진 춤무덤(무용총)의 무덤주인은 정면을 향한 초상으로 그려지지 않고 옆으로 비스듬히 앉아 승려의 설법을 듣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무덤방의 천장고임은 하늘세계로 떠오르는 연꽃으로 채워지고, 신선들조차 연꽃줄기를 붙잡고 하늘을 날아가는 존재로 그려진다. 연꽃만으로 장식된 벽화고분들이 옛 수도 국내성의 평야지대와 산기슭에 잇달아 만들어진다.

서방의 중국왕조들, 북조, 남조로 불리던 나라들에서는 제작되지 않는 독특한 주제의 고분벽화가 고구려에서는 연꽃을 통해 정토에서 태어나 새 삶을 누리고자 하던 고구려 귀족들에 의해 한 시대를 풍미하는 사조가 된다. 어느 사이에 중국왕조들의 것과는 구별되는 고구려적 유형의 고분벽화가 동북아시아의 패권국가 고구려에서 성립한 것이다.

새로운 문화요소에 대한 자유로우면서도 선택적인 수용, 소화, 고구려적인 형태와 내용을 지닌 문화요소로의 재창조라는 ‘고구려식 문화소화법’이 고분벽화라는 외래의 장의미술 장르에 적용되었고 눈에 뜨일 만한 성과를 거두기에 이른 셈이다.

5세기 후반의 늦은 시기, 장수왕 시대의 말년에 이르면서 고구려 고분벽화는 사신(四神)의 시대로 접어든다.

생활풍속도, 연꽃장식도 더 이상 주제의 자리에 있지 못하고 청룡, 백호, 주작, 현무만이 벽화의 주인공으로 자리매김되는 새로운 흐름이 고분벽화의 세계를 지배하게 된 것이다. 역시 중국의 남북조나 수·당 고분벽화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현상이다.

별도 사람도 보이지 않는 깊은 허공을 내닫는 청룡과 백호, 우주질서의 조화와 회복을 꿈꾸며 양기(陽氣)와 음기(陰氣)의 합일을 시도하는 현무, 새로운 우주의 출현을 반기는 듯이 날개를 활짝 펴고 비상하려는 순간의 암수 한 쌍 주작이 무덤 방 네 벽을 지키는 고구려만의 독특한 사신도 고분벽화가 대동강이 바라다 보이는 산자락 끝 곳곳의 무덤 방안에서 그려지게 된 것이다.

대한제국 말 강서군수 이우영의 일행이 본 것은 동아시아 안에서도 동북아시아를 독자의 세계, 고구려 중심의 개별 문화권으로 인정받게 만들었던 힘의 바탕이자, 힘 그 자체였다.

- 전호태/ 울산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 경향신문 2004년 2월11일

 

 

 

 

 



벽화에 담긴 고구려


 

1998년 8월 하순, 필자는 제주의 강요배 화백과 함께 북한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졸고,『조선미술사 기행』1, 다른세상, 1999) 그 때 내금강과 외금강, 해금강의 명승과 유적을 답사하고, 고구려 벽화고분을 둘러볼 기회를 가졌다. 7박 8일의 일정을 마치고 평양을 떠나기 하루 전날, 덕흥리고분과 강서대묘와 중묘를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미술사 공부를 시작한 이래 늘 꿈에 그리던 고구려 벽화고분, 세 고분의 벽화들이 지금도 눈에 생생하게 아른거린다.

 

 

고구려 회화의 최정상 벽화고분, 강서대묘와 중묘


강서대묘(江西大墓)와 중묘(中墓), 그리고 벽화가 없는 고분 소묘(小墓)는 대안시 무학산(舞鶴山)의 서쪽 능선을 따라 이어진 구릉지 아래로 나란히 무덤군을 이루고 있다. 대동강 하류의 광활한 들판을 조망하는 위치이다. 삼묘리의 마을 앞 들녘에 봉긋봉긋 자리잡은 세 고분은 솔밭과 어울려 있었다.


먼저 강서대묘를 들렀다. 봉분의 크기는 높이가 9m, 지름이 51m 가량으로 외모가 신라나 백제의 고분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한 바퀴를 둘러보니 무덤의 아랫단은 정방형이었고, 그 위에 주발을 엎어놓은 형태의 반원형 봉분을 쓴 것이었다.


잘 짜여진 판석의 묘실 내부는 사신도와 황룡, 그리고 천정의 벽화가 화려한 색감의 웅혼한 형상미로 별세계를 연출하고 있었다. 도저히 고구려 시대의 옛 그림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내가 고분 안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고구려의 화가가 막 벽화에서 붓을 뗀 듯 생생했다. 잘 다듬은 판석에 직접 그린 벽화는 고분 내부의 습기를 머금고 원래의 형상미와 색채감을 선명하게 유지하고 있었다. 묘실 안은 1400년 동안의 시간이 멈춘 듯, 그 간격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렇게 나는 고구려 고분벽화와 첫 대면을 가진 것이다.


섬세하고 치밀한 묘사의 먹선과 적황록의 다채로운 색채는 탄력이 넘치는 형상들에 기를 불어넣어 주는 듯하였다. 특히 붉은색은 이전에 경험해 보지 못한 마력을 내뿜었다. 여기에 녹색과 황색과 갈색의 명랑한 어울림과 흰색의 마감은 절묘했다. 고구려 사람들이 그 대지에서 겪었던, 그리고 우리가 지금 여전히 만나는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의 맑고 투명한 원색을 그렇게 녹여낸 것 같았다.


힘차고 간결한 형상에 치밀한 선묘와 화사한 색채의 조화. 그것은 보편적인 회화미와 미학적 상식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화려하다고 할 때, 힘차다는 표현을 같이 쓰지 않는다. 또 기운찬 형상이 화려하다거나 치밀하다고 말하기 어렵다. 허나 강서고분의 벽화는 대조적인 미감을 그토록 절묘하게 결합시켜 내었다. 색채가 형상을 이처럼 완벽하게 만드는 사례가 또 있을까. 세계미술사에서 그 유래를 찾기 힘든 회화미일 게다.


마음을 진정하고 고분 내부를 찬찬히 살폈다. 벽화를 잘 보존하기 위한 장치라는 걸 알면서도, 유리를 통해 그림을 확인하자니 아쉬움도 일었다. 그런데 강서대묘의 묘실 남쪽 통로와 연결된 부분이 한 뼘쯤 유리 밖으로 드러나 있어, 벽화기법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주작도의 가장자리로 빙 둘러진 당초무늬 부분이다. 랜턴을 비추어가며 손으로 만져보니 밋밋한 석면에 채색만 한 게 아니고, 무늬 부분이 약간 도드라지게 처리되어 있었다. 그 위의 채색은 붓질을 했다기보다 얕은 부조 위에 안료를 먹였다는 느낌이 들었다. 화사한 색채감이 웅혼한 형상과 어울리게 하는 기발한 착상이구나 하는 생각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새로운 발견이었다. 이전의 강서대묘에 대한 어떤 글이나 발굴보고서에서도 읽지 못했던 방식이었다. 그리고 다른 어느 지역의 벽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독창적인 화법이라는 생각이 스쳤다. 지난해 10월 고구려연구회의 국제학술대회에서, 필자는「삼국시대 후기 사신도 벽화의 표현방식」(고구려연구회편,『고구려 벽화의 세계』, 학연문화사, 2003)에 대하여 발표하면서 이를 ‘석면저부조화법(石面底浮彫畵法)’이라고 이름을 지어 보았다.


강서중묘는 대묘에서 북쪽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워낙 대묘의 벽화가 주는 감동과 충격이 컸기에 흥분을 채 가라앉히지 못하고 중묘에 들어서게 되었다. 두 무덤의 동일한 사신도 벽화들이 오버랩 되어 마음을 진정하기까지 한참이 걸렸다. 무덤의 외형은 대묘보다 조금 작았지만, 묘실의 넓이는 한 변의 길이가 3m 남짓하여 큰 차이가 없었다. 묘실로 들어가는 통로가 대묘보다 2배가량 긴 대신, 천정은 축조방식이 달라 대묘보다 1m 가량 낮은 정도였다.


묘실를 둘러보며 대묘에서와 마찬가지로, 돌 다루는 솜씨와 정밀한 축조방식에 놀라움이 일었다. 한 벽면에 하나의 대형 판석을 세워 네 벽을 조성했다. 대묘가 두세 층의 판석을 짜맞추어 벽면을 이룬데 비하여 발전된 축조술인 것이다.


천정의 짜임새는 네 모서리를 삼각형 받침으로 모줄임하는 강서대묘나 일반적인 벽화고분의 말각조정식(抹角操井式)이 아니었다. 평행받침을 2단으로 좁혀들게 얹고, 넓은 화강암 개석(蓋石)으로 정교하게 마무리한 평천정이다. 헌데 그냥 평평한 하나의 너른 돌을 얹은 것이 아니라, 종이 상자의 뚜껑을 접듯이 네 모서리에 각을 주어 내반되게 한 점이 돋보였다. 단순한 짜임새이지만 상당히 진전된 석조 기술로, 치밀한 구조설계 없이는 불가능한 공간이었다.


강서대묘와 중묘는 고구려 후기, 6세기 후반-7세기 전반의 고분벽화로 사신도를 주제로 삼는다. 다실이나 양실, 단실 등 다양한 구조의 석축 묘실이 단실로 정착되면서, 실내의 네 벽에 동서남북 혹은 좌우전후의 방향에 맞추어 각각 청룡, 백호, 주작, 현무를 장식하는 묘제가 자리잡힌 것이다. 악귀를 막는 벽사(辟邪)와 수호(守護)의 상징이었던 방위신으로 사신이 일상적인 생활신앙과 함께 내세신앙의 대상으로 자리잡았다고 볼 수 있다. 이들 무덤의 사신도는 당대 동아시아미술사를 대표할 만한 조형미를 과시하고 있다.


그리고 고구려 후기의 사신도는 4-6세기 전반 고분의 묘주인 초상화를 비롯해서 인물풍속도, 장식문양, 사신도 등 다양했던 내용이 6세기 중엽 이후 소략하게 변화된 결과이다. 이는 당시의 새로운 문화지형과 사회 환경의 변화를 반영한다. 곧 사신도의 주제선택과 그 회화성은 삼국의 패권 다툼과 수(隨), 당(唐)의 통일로 이어지는 중국 대륙의 정세 변화 속에서 여러 차례 전쟁을 치루면서 멸망하기 직전까지 승리를 자축하곤 했던 고구려 후기의 시대형식이자 시대정신인 셈이다. 고구려는 패망하기 직전까지 그렇게 독자적인 문화의 절정기를 유지했었다고 볼 수 있다.

 

 

광개토왕이 파견한 요동지방관의 무덤, 덕흥리 벽화고분


강서삼묘에서 10여분 차로 움직여 도착한 덕흥리(德興里)벽화고분 은 무학산 기슭의 남쪽자락 솔밭 언덕에 오롯하다. 무학산을 등지고 대동강 하류의 시원스레 전개된 공간이 장쾌하여, 그야말로 산, 내, 들을 낀 최고 명당의 무덤자리답다. 도타운 구릉의 이름도 옥녀봉(玉女峰)이라 한다.

 

덕흥리 벽화고분은 1976년 8월에 발굴되었다. 유주자사(幽州刺史) 진(鎭)이 77세 때인 ‘영락18년(408)’에 죽었다는 내용을 포함하여 각종 벽화장면에 먹으로 글을 써놓고 있어, 해방 후 우리 고고학사에서 두드러진 성과로 꼽힌다. 이 같은 벽화고분의 묘지명(墓地銘) 관련 문자기록은 1949년에 발굴된 안악 3호분(357년, 冬壽)에 이어 두 번째이다.

 

‘영락(永樂)’은 광개토대왕 시절의 고구려 연호이다.‘유주’는 요동지방이고,‘자사’는 지방장관으로 지금의 도지사격이다. 벌써 5세기 초에 고구려가 요동지방을 지배하여, 광개토대왕이 진을 요동 지방관인 유주자사로 파견했음을 알려주는 고분이다. 또 그림마다의 글은 벽화에 대한 도상해석을 가능케 해준다.


반 지하에 조성한 묘실은 통로가 낮아 허리를 잔뜩 굽히고 들어서야 했다. 벽화의 상태는 양호했고, 앞 칸과 안 칸 두 개의 방에 고구려 사람들이 가득 차 있었다.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아준 고분 관리인 겸 안내자의 친절한 설명이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1600년 동안 벽화 속에 갇혔던 고구려 사람들이 나를 향해 마구 뛰쳐나오는 것 같아서였다.


앞 칸과 안 칸의 통로 부분은 유리로 막지 못해 회벽의 벽화상태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회벽은 단단했고, 벽화 수법을 정밀히 살피게 해주었다. 고구려 고분벽화는 주로 이런 회면(灰面) 화법이 활용되었다. 벽돌이나 잡석, 혹은 다듬은 돌로 묘실을 쌓고, 석회를 발라 평평한 화면을 만든 다음 그 위에 그림을 그리는 방식이다.

일종의 프레스코 기법으로, 동서양을 막론하고 가장 보편적인 벽화법이다.

 

덕흥리 벽화고분에서 확인한 대로 고구려는 석회 다루는 기술이 최고였다. 최근 고구려 회벽화의 분석에 따르면, 조선시대의 예보다 불순물이 적고 순도가 높은 석회 혼합기술을 가졌다고 한다. 그런 탓에 덕흥리 벽화고분은 물론 고구려의 회벽화는 회면이 떨어진 부분을 제외하면 적색, 황색, 녹색, 갈색 등 변색이 적고 보존상태가 좋은 편이다. 투명하고 명도 높은 채색에는 고구려인의 활달한 기질과 명랑한 심상이 배어 있었다.


무덤 주인은 귀면장식의 털부채를 들고 마치 부처님이나 도사처럼 평상에 앉아 계셨다. 그 앞에는 음식을 차릴 석상(石床)이 놓여있어, 앞 칸이 제사를 지낸 공간임을 알 수 있었다. 초상화의 서쪽 벽으로는 유주에 속한 열 세 고을의 수령인 태수들이 자사를 향해 상하로 도열해 있었다. 남벽에는 유주자사와 관리들의 회의장면을 그렸다.

동쪽 벽화는 질서 정연한 행렬도였다. 갑옷으로 무장한 기마병들이 묘주인의 소수레를 호위하고, 그 옆벽으로 행렬을 선도하는 악대가 보였다.

이들은 앞 칸 네 벽의 벽화들로, 모두 유주자사의 공적인 관청(官廳) 생활장면이다. 앞 칸의 크기는 대충 3m×2m 넓이의 장방형에 3m가 조금 못되는 높이이다.


궁륭식으로 좁힌 앞 칸의 천정에도 벽화가 정말 빼곡하였다. 천정의 밑 부분에는 산악과 사냥하는 사람들이 보이고, 그 위로 각종의 신선들과 동물들이 배열되어 있었다.

남쪽 하늘 긴 은하수를 배경으로 소를 끄는 견우(牽牛)와 검둥개를 둔 직녀(織女)를 비롯하여, 구름 속의 비천과 신선, 사람 얼굴을 한 네발 동물이나 조류, 소머리의 봉황, 머리가 둘인 새, 천마, 날개 달린 비어 등 장수와 부귀의 상서로움을 나타내는 영물(靈物)들은 해 달 별과 함께 고구려 사람들의 꿈이 서린 하늘신앙을 읽게 해주었다.


통로의 좌우벽 그림은 묘주인이 안 칸에서 앞 칸으로 나오는, 곧 저택에서 관아로 이동하는 행차인 모양이다. 시신을 모시는 안 칸의 벽화는 무덤 주인의 사적인 가정 생활상으로 채워져 있었다.

 

약 3m×3m넓이의 정방형 안 칸에 들어서면, 바로 맞은편 거대한 차일의 안에서 앞 칸과 같은 자세의 ‘진(鎭)’의 초상화, 말을 타고 활을 쏘아 과녁을 맞추는 마사희(馬射戱)장면, 불교의 칠보행사, 마구간과 외양간, 큰 나무 아래의 말과 마부, 연꽃이 활짝 핀 연못, 2층의 다락창고 등이 사방에 빙 둘러 배치되어 있었다. 당시 고구려인의 생활상과 풍습을 전해주는 회화적 기록으로 소중하게 다가왔다.


안 칸의 천정은 네 벽면 모서리에 그려진 기둥과 연결되게 목조건물의 뼈대와 불꽃무늬 등으로 치장하여 그렸는데, 앞 칸에 비해 단순한 구성이었다.

기둥에는 앞 칸과 마찬가지로 구름을 추상화한 S자형 운기문(雲氣文)의 적갈색 단청이 칠해졌다. 마치 목조 건물 안에 들어앉은 착각을 일으키게 하였다.

벽화는 피장자가 무덤 안에서 바깥 풍경을 보듯이, 생전의 생활상을 편안히 관망하도록 꾸민 것이다. 고구려 사람들은 육신이 죽더라도 죽은 게 아니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무덤은 그 혼백이 살아남아 영원히 안주하는 성스러운 기거처인 셈이다.


이렇듯 4-6세기 고구려인은 덕흥리 벽화고분처럼 자신들의 삶과 명예, 그리고 꿈을 무덤 안에 재현해 놓았다. 더욱이 중국의 그 시절과는 완연히 다른 고구려식 화풍으로 그린 복장과 풍습이 고스란히 고구려의 사회상을 보여준다.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벽화들이 누구도 왜곡할 수 없는 우리 고구려의 살아있는 역사를 증언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무명의 고구려 화가들은 또 얼마나 자랑스럽고 고마운지. 당대의 현실과 이상을 담은 덕흥리고분과 같은 고구려 벽화는 진정 리얼리즘 예술의 승리라 할 수 있겠다.

- 이태호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교수)

- 출처: 코리아헤럴드


 

 

 

 



                  北학자 "유주자사는 고구려 대신"


 

 

북한의 학자가 중국 랴오시(遼西) 지방을 통치했던 유주자사(幽州刺史)가 고구려가 파견한 장관이라고 주장,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한 북한의 대응과 관련해 주목된다.

북한 문화보존지도국 산하 조선문화보존사 리기웅 유적실장은 19일 재일본조선 인연합회(총련) 기관지 조선신보와 인터뷰에서 "고구려 덕흥리 벽화고분의 주인공인 유주자사 진(鎭)은 고구려 제19대 광개토대왕의 대신이었으며 그 당시의 북부 중국 일대를 차지한 유주(幽州)를 통치한 장관"이라고 주장했다.

리 실장은 지난 6월 28일부터 7월 7일까지 중국 장쑤(江蘇)성 쑤저우(蘇州)에서 열린 제28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WHC)에 북한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가했다.

덕흥리 벽화고분에서는 고구려가 오늘날 랴오허(遼河)를 경계로 발해만으로 둘러싸인 랴오시 지방으로 일컫는 유주(幽州)를 지배했음을 뒷받침하는 600여 자 분량의 묵서명이 발견돼 지난 1976년 고분 발굴 당시부터 학계에 상당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북한은 묘지명뿐만 아니라 유주의 태수들이 오늘날 도지사에 해당하는 진(鎭)을 문안하는 장면이 벽화에 등장하는 것을 근거로 고구려가 실제로 북부 중국을 지배했음을 입증하는 결정적 증거라고 주장해왔다.

반면 중국은 동천왕 때인 서기 246년 위나라의 유주자사 관구검이 고구려 환도산성을 함락시켰다는 역사적 사실 등을 근거로 유주에는 계속 중국의 통치권이 미쳤다고 반박하고 있다.

리 실장은 "무덤의 주인공과 축조연대(영락 18년ㆍ408년)가 밝혀진 덕흥리 고분은 세계적 파문을 불러일으켰으며, 고구려 강대성과 고유한 문화, 당시 동방 정세의 일단을 역사적으로 고증한 귀중한 문화유적"이라고 강조했다.

- 연합뉴스 2004년 8월19일 (서울=연합뉴스) 조계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