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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고분벽화] 세계문화유산 고분벽화

Gijuzzang Dream 2007. 11. 6. 20:38

 

 

◆ 인류의 문화유산, 고구려 고분벽화

 

고구려는 한국 고대사의 주역 가운데 하나이자, 동북아시아 고대 정치, 문화를 이끌었던 나라였다. 5세기의 고구려는 동북아시아 전체에 정치, 사회, 문화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제국으로 동아시아의 세력균형을 좌우하는 4강의 일원이었다. 고구려는 개발적, 진취적인 자세로 중국뿐 아니라 대륙아시아, 중앙아시아의 여러 나라들과 교류하면서 새로운 사회, 문화요소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고유의 문화에 불교와 서아시아 및 인도문화, 유교 및 도교와 중국문화의 여러 요소를 더하여 보편성과 독자성이 잘 어우러진 새롭고도 독특한 풍미의 범 고구려 문화를 만들어냈다.


고구려문화의 실체는 현재까지 107나 발견된 벽화고분 안에 잘 남아 있다.

고분벽화는 1500여 년 전 고구려인의 삶의 현장에 대한 보고서이기도 하고, 고구려인이 꿈꾸던 내세 삶의 설계도이기도 하다. 살아서 누리던 삶이 내세에도 계속되기를 기원하며 그렸던 생활풍속의 여러 가지 모습, 불사(不死)의 신선으로 살기를 바라며 묘사했던 선계의 풍경, 불교적 낙원에서의 새 삶에 대한 소망을 담은 연꽃 장식, 청룡, 백호, 주작, 현무에 의해 지켜지는 새로운 우주의 모습을 고분벽화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도 이런 까닭이다.


고구려인이 지역의 제한을 넘어서고 시대를 뛰어넘는 문화를 남겼으며, 이것을 고분벽화 안에 담았음은 2004년 7월, 북한과 중국의 고구려 벽화고분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됨으로써 다시 한 번 확인되었다. 



◆ 고구려고분 축조


돌방무덤이 주류인 벽화고분의 축조방식은 시기와 규모에 따라 다르다.

무덤칸의 벽과 천장부는 초기와 중기에는 벽돌 크기의 돌들을 쌓아 올린 뒤 회죽으로 돌틈을 메우고 다듬는 방식으로 처리하였다.


후기의 대형 돌방무덤에는 잘 다듬은 커다란 석회암이나 화강암 판석을 축조 재료로 사용하였다.

보통 무덤칸의 바닥은 회죽으로 마감하기에 앞서 흙과 숯, 강돌, 모래, 회 등으로 두텁게 덮고 다졌으며, 바닥에 무덤 안으로 흘러든 빗물 등을 배수하기 위한 시설을 마련하였다.


널방에는 1개에서 3개 정도의 돌로 만든 관대를 놓았으며, 중기까지는 관대에도 회를 바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여러방 무덤일 때에는 널방과 다른 공간을 구분하기 위해 널방 입구나 널방 둘레에 돌기둥을 세웠다. 돌기둥을 널방 가운데에 세우는 경우도 있는데, 이런 돌기둥은 널방 천장부를 지탱하는 기능도 지니고 있었다.

무덤칸 안에는 돌로 제상을 만들어 놓거나, 돌상을 만들어 놓기도 했으며, 널방의 한쪽 벽에 돌관대를 놓고, 다른 벽에는 돌아궁이를 설치하기도 했다.

 

대개의 경우, 무덤칸의 입구에는 외짝이나 두 짝으로 된 돌문을 달았다. 무덤으로 들어서는 널길 입구는 보통 회와 막돌을 섞어 다지면서 쌓아 막는다. 때로는 회와 막돌로 통로를 막은 다음, 그 안쪽을 두꺼운 화강암 판석으로 막기도 했다.

무덤칸 외부는 막돌로 쌓고 크고 작은 깬돌로 큰돌 사이를 메운 다음 진흙에 회와 숯을 섞어 다져 덮었다. 그런 다음 흙에 회를 섞거나 석회덩어리를 넣어 흙무지를 쌓아 무덤칸을 덮는다. 흙무지에 자갈을 섞고 흙무지 위에 자갈 및 기와를 덮는 것은 흙무지를 보호하는 동시에 습기와 빗물이 가능한 한 적게 무덤칸 안으로 흘러들게 하기 위함이다.



◆ 고분벽화 제작방법과 재료, 특징


벽화를 제작하는 방법으로는 벽이나 천장 면에 별다른 물질을 덧입히지 않은 채, 그 면에 직접 그림을 그리는 조벽지법(粗壁地法)과 회를 고르게 입혀 잘 다듬어낸 면을 화면으로 사용하는 화장지법(化粧地法)이 있다. 화장지법은 다시 면에 입힌 회가 마르기 전에 그 위에 그림을 그리는 습지벽화법(濕地壁畵法)과 회가 마른 뒤 그 위에 그림을 그리는 건지벽화법(乾地壁畵法)으로 나뉜다.


초기와 중기로 분류되는 대부분의 고구려 고분벽화는 습지벽화법으로 그려졌다. 중기에 속하는 고구려 고분벽화 가운데 일부는 습지벽화법과 건지벽화법이 모두 적용된 상태로 제작되었다.

화장지법으로 제작된 벽화는 일반적으로 보존상 온도, 습도 변화에 약하다. 초기와 중기에 제작된 상당수의 고구려 고분벽화가 고분의 조사를 통해 벽화를 담은 백회층이 무덤칸 바닥에 떨어졌거나, 떨어져 나가고 있음이 확인되었는데, 벽화가 무덤칸의 벽이나 천장 면에 덧입혀진 벽화층 위에 그려졌던 까닭이다.


후기로 분류되는 대부분의 고구려 고분벽화는 석면을 잘 다듬은 뒤 그 위에 직접 그림을 그리는 조벽지법으로 그려졌다. 조벽지법으로 벽화를 제작할 때에는 목필(木筆)이나 죽필(竹筆)에 접착제가 거의 혼합되지 않은 무기질의 비수용성(非水溶性) 안료를 묻혀 석면에 찍어 누르다시피 그림을 그리게 되므로 안료의 대부분이 요철(凹凸)이 있는 석질의 입자 사이에 박히다시피 하여 채색층과 바탕층이 사실상 일체가 된다. 이런 까닭으로 조벽지법 벽화는 고분벽화의 보존환경이 나빠지더라도 화장지법 벽화에 비해서는 비교적 오랜 기간 제모습을 잃지 않고 견디어낼 수 있게 된다.


고분벽화는 성격상 장의미술(葬儀美術)에 속하므로 공예화적인 요소를 짙게 지닌다. 때문에 고분벽화를 그릴 때에는 습지벽화법의 경우, 벽면에 점성이 높은 붉은 점토를 주요 성분으로 하는 묽은 소석회 반죽을 얇게 발라 초벌층을 이루게 하고, 그 위에 볏짚이나 갈대류를 잘게 썰어 넣고 모래를 더하여 반죽한 회를 두 세 차례 두껍게 발라 재벌층을 만든 다음, 순도가 매우 높은 소석회를 묽게 반죽하여 얇게 덧입힌 마감층을 만들고 그 위에 미리 준비된 모본(模本)을 덧댐으로써 실질적인 벽화제작 작업에 들어간다. 보통 모본(模本)의 형상에 맞추어 화면에 먹이나 목탄, 먹바늘 등으로 회벽 마감층 위에 밑그림을 그린 다음 채색을 하게 되므로 밑그림이 어설프거나 그림주제의 변경이 필요하게 되면, 다시 얇게 회칠을 더한 다음 밑그림을 새로 그릴 수도 있다.


벽화의 안료로는 송연(松烟)먹, 석청(石淸), 석록(石綠), 석황(石黃), 자황(雌黃), 백록(白綠), 자토(紫土), 금(金), 연분(鉛粉)과 같은 광물질가루를 투명성이 높고 점액성이 낮아 수화성(水化性)이 높은 접착제, 곧 높은 습도를 견디어낼 수 있는 해초(海草)를 달여 만든 태교(苔膠)나 동물성 아교(阿膠)에 개어 썼다.

색채는 갈색(褐色)조를 바탕으로 흑색, 황색, 자색, 청색, 녹색 등을 자주 써 무덤의 내부가 화려하면서도 부드럽고 차분한 분위기를 자아내게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갈색은 벽사(?邪)와 재생(再生)이라는 장의(葬儀)의 기본 목적에 가장 부합하는 색깔이기도 하다.



◆ 안악1호분(安岳一號墳)

황해남도 안악군 대추리 / 4세기 말


황해남도 안악군 대추리(옛지명: 황해도 안악군 대원면 상사리)에 있다. 안악1호무덤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대추리 산지마을 뒤 언덕 위에 있는 2기의 흙무지돌방무덤 가운데 앞의 것이며, 뒤의 것이 안악2호분이다.

1949년 3월 석재 채취를 위한 공사 도중 발견되어 조사가 진행되었으며, 1957년 추가 조사가 이루어졌다.

 

무덤 방향은 서쪽으로 2° 치우친 남향이다. 널길과 널방으로 이루어진 외방무덤이며, 널길과 널방의 길이×너비×높이는 각각 2.47m×0.97m×1.55m, 2.85~2.88m×2.53~3.35m이다.


널방 입구에 본래 두 짝 돌문이 설치되었으나 현재는 두 개의 문확만 남아 있다.

널방 천장 구조는 3단의 평행고임 위에 2단의 삼각고임을 얹은 평행삼각고임이다. 무덤 안에 회를 바르고 그 위에 벽화를 그렸으며, 주제는 생활풍속이다.


널방 네 벽에 자색으로 기둥과 두공, 들보를 그려 널방 안이 목조가옥의 내부처럼 보이게 하였다. 남벽과 동벽 상부에 무덤주인의 우차가 포함된 행렬을 묘사하였고 서벽 상부에는 사냥장면을 나타냈다. 북벽 상부에는 대규모 전각을 표현하였다. 널방 벽 하부의 벽화는 회가 떨어져 나가 남아 있지 않다.


천장 평행고임 1층에는 둥근 돌기들이 달린 운기문을 나타냈고, 제2층에는 가운데와 좌우 모서리에 삼각불꽃무늬, 삼각불꽃무늬 사이에 기린(麒麟), 천마(天馬), 비어(飛魚), 사람머리의 짐승 등 상서로운 새, 신비한 짐승들을 표현하였다. 제3층에는 제2층과 같이 삼각불꽃무늬를 묘사하고 사이사이에 수레바퀴를 연상시키는 동심원문을 그렸다.

 

삼각고임 제1층 밑면에는 와당문을 연상시키는 도안 처리된 연꽃문을 넣었고, 측면에는 사람머리의 새, 짐승머리의 새를 포함한 신비하고 상서로운 새들을 배치하였다.

 

삼각고임 제2층 밑면은 제1층 밑면에 넣은 것과 같은 장식문과 해, 달을 나타냈고, 측면은 북두칠성을 비롯한 별자리로 장식하였다. 천정석 벽화는 남아 있지 않으나 천장부 삼각고임 밑면을 연꽃과 관련된 무늬들로 장식한 것으로 보아 활짝 핀 연꽃이 묘사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천장고임에 표현된 상서롭고 신비한 새와 짐승들은 덕흥리벽화분 앞방 천장고임에 별자리들과 함께 표현된 신이한 존재들과 형상과 내용에서 겹치는 것들이 많다.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 걸친 고구려 사회와 문화적 흐름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부분이라고 하겠다.



◆ 덕흥리벽화분(德興里壁畵墳)

남포시 강서구역 덕흥동 / 408년경


남포시 강서구역 덕흥동(옛지명: 평안남도 대안시 덕흥리)에 있다. 무학산 서쪽의 옥녀봉 남단 구릉 위에 자리 잡은 흙무지돌방무덤이다. 무덤의 방향은 남향이며, 널길, 앞방, 이음길, 널방으로 이루어진 두방무덤이다.


덕흥리벽화분은 무덤캄 벽과 천장부 하단에 목조가옥의 골조를 그려 넣은 다음 그 안에 생활풍속의 각 장면을 묘사함으로써 무덤칸 안을 무덤주인의 사후지택으로 상정하고 있음을 잘 나타낸 사례이다.

널길에는 괴물수문장, 연꽃 및 인물을, 앞방 벽에는 무덤주인 출행도, 13군태수배례도, 무덤주인의 막부업무도(幕府業務圖) 등을 배치하였으며, 이음길 입구 상단에는 묵서로 묘지명을 써넣었다.

이음길 벽에는 무덤주인부부의 출행도가 묘사되었으며, 널방 벽에는 연못, 무덤주인의 칠보공양행사도(七寶供養行事圖), 마사희도(馬射戱圖), 우차도, 무덤주인정좌도 및 마구간, 외양간, 누각, 고상창고 등의 가내시설도가, 널방 천장부에는 활짝 핀 연꽃과 구름이 표현되었다.


덕흥리벽화분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벽과 천장부에 그려진 인물과 시설, 행사 장면 앞에 안악3호분의 경우에서와 같이 설명형식의 묵서가 쓰여 있다는 사실이다. 무덤칸 안에서 발견된 묵서는 56곳 600여 자에 이른다. 특히 주목된 부분은 앞방 북벽 상단에 묵서로 쓰인 14행 154자의 묘지명이다.

무덤 주인의 출생지 및 주인공이 역임했던 관직, 죽어서 무덤에 묻히는 과정이 기록된 묘지가 이후 수십 년간 계속된 국제적 논쟁의 원인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 고구려 덕흥리 마을의 하늘과 천문도


가장 다채로운 별자리를 담고 있는 무덤은 남포시 강서구역 덕흥리벽화분(408년)이다.


앞방 천장부에 모두 63개의 별을 그렸다. 별은 둥근 원반으로 묘사되었다. 전체가 둥글다는 생각의 흔적일 것이다.

현재 우리에게 익숙한 별 표시는 고대 중근동 천문학에서 연원된 것으로, 근대시기 서양 천문도가 도래하면서 비로소 도입된 것에 불과하다.


덕흥리벽화분 별자리의 원반 크기는 여러 종류인데, 천체의 비중에 따라 어느 정도 비례한다. 가장 크게 그려진 것이 동벽과 서벽 천장에 자리한 세발까마귀의 해와 두꺼비의 달 그림이다.

그 다음 크기의 원반이 벽면에 모두 5개 그려진 오행성(五行星) 그림이다. 하늘에서 움직이는 천체적인 행성을 그림으로 표현하였다는 자체가 놀랍다. 동아시아 최초의 오행성 유물자료로 꼽힌다.


천장을 가로질러 하늘의 푸른 물결이 출렁이는 남벽의 은하수 그림도 인상적인데, 그 사이로 칠월칠석날 한 번 만나는 견우와 직녀의 설화가 묘사되었다. 직녀그림 위쪽으로 고구려인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던 남두육성(南斗六星)과 노인성(老人星) 별자리가 보인다.

반대편 북벽에는 북쪽 하늘의 주역인 북두칠성과 보성(輔星) 별자리 그리고 하늘로 오르내리는 사다리 별자리인 삼태육성(三台六星)이 그려졌다.

서벽 월상(月像) 위로 그려진 W자 5성(星)의 별자리는 현대식 카시오페이아 별자리에 해당하는데, 위쪽의 오목을 퍼지게 그린 형태가 매우 관측적이다. 그런데 중국의 역사천문도에서는 W자 모양의 별자리가 일체 찾아지지 않기 때문에 천장부 서쪽의 이 별자리는 고구려의 비중국적인 관측천문전통을 제기하는 중요한 별자리가 된다.

동벽의 비어(飛魚) 5성(星) 역시 덕흥리 벽화분에서만 보이는 별자리 형태이다.


이렇듯 고구려 고분벽화 속의 별자리는 당시 동아시아 천문학사의 정립에 기여하는 바가 적지 않을 뿐만 아니라, 벽화의 천장부를 신비롭고 다채로운 신화공간으로 꾸려나갈 수 있도록 적절한 배경 역할을 겸하고 있다. 별자리그림들 사이로 하늘을 노니는 숱한 선인, 옥녀 그림들이 어우러져 있고, 온갖 기화이초(奇花異草)와 상금서수(翔禽瑞獸)들이 공존하는 천상세계의 이상향을 펼쳐놓고 있다.



◆ 쌍영총(雙楹塚)

남포시 용강군 용강읍 / 5세기 말


남포시 용강군 용강읍(옛지명: 평안남도 용강군 지운면 진지동)에 있다. 용강읍 북쪽의 구릉 위에 자리 잡은 흙무지돌방무덤으로 발견 당시에는 진지동1호분으로 불렸다.


무덤의 앞방과 널방 사이에 세워진 두 개의 팔각 돌기둥으로 말미암아 쌍영총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수산리1호분, 팔청리벽화분의 앞방과 널방 사이에 세워진 돌기둥은 1개이다.


무덤의 방향은 서쪽으로 치우친 남향이며, 널길, 앞방, 이음길, 널방으로 이루어진 두방무덤이다.

방과 널방의 천장은 평행삼각고임이며, 두 방 사이에 세워진 두 개의 돌기둥으로 말미암아 이음길이 넓어졌다. 무덤 안에 회를 바르고 그 위에 벽화를 그렸는데, 주제는 생활풍속과 사신이다.


앞방 동벽과 서벽에는 청룡, 백호를 그렸고 천장고임에 연꽃, 화병, 넝쿨무늬를 모티프로 한 여러 가지 장식무늬를 표현하였다. 천정석에는 커다란 연꽃을 묘사하였으며, 이음길의 두 돌기둥은 꿈틀거리는 용과 연꽃으로 장식하였다.

널방 동벽에 귀부인을 주인공으로 한 공양행렬, 서벽에 장방, 남벽에 주작, 북벽에 무덤주인부부와 쌍현무를 그렸고 천장고임에는 연꽃과 넝쿨무늬, 해, 달, 별자리를 묘사하였다. 해 안의 세발까마귀, 달 속의 두꺼비가 세련되고 힘있는 필치로 그려져 눈길을 끈다.

천정석은 앞방에서와 같이 커다란 연꽃으로 채워졌다. 이 연꽃은 고구려 남북문화권의 중심이던 국내지역 문화와 평양지역문화의 융화와 통합을 보여주는 시대적 표지 가운데 하나이다.

전형적인 두방무덤으로 천장구조가 안정된 점, 생활풍속, 장식무늬가 벽화구성에서 지니는 비중이 그리 낮지 않으면서 제재의 묘사기법이 대단히 세련된 점, 사신이 벽화의 중심주제로 부상하였지만 앞방과 널방에 나누어 표현된 점 등으로 보아 쌍영총의 축조 및 벽화 제작 시점은 5세기 후반의 늦은 시기일 가능성이 높다.



◆ 호남리사신총(湖南里四神?)

평양시 삼석구역 성문리 / 6세기 초


평양시 삼석구역 성문리(옛지역: 평남 대동군 사족면 호남리)에 있다.

호남마을 뒤 얕은 구릉 위에 자리 잡은 호남리고분군에 속한 흙무지돌방무덤의 하나로 무덤방향은 남향이다. 널길과 널방으로 이루어진 외방무덤으로 흙무지 밑부분에 돌기단이 있다.


널방의 천장구조는 평행삼각고임이다. 무덤 안에 회를 바르고 그 위에 벽화를 그렸으며 벽화의 주제는 사신(四神)이다.


널방 동벽의 청룡은 가만히 서서 고개를 돌려 자신의 꼬리부분을 바라보고, 꼬리 역시 몸체 쪽으로 구부러졌다. 외뿔이며 과장된 눈썹을 지니지 않았고 목 뒤로 척목(尺木)이 표현되지 않았다. 척목은 용이 하늘로 오를 때 필요하다고 하는 디딤목과 같은 것이다. 어깻죽지에서 뻗어 나온 날개털들은 불꽃모양임에도 불구하고 얼핏 가죽날개와 같은 느낌을 준다.


서벽의 백호는 동벽의 청룡과 같이 머리를 틀어 자신의 꼬리 쪽을 보고 있다. 머리 형태는 자연계 호랑이의 형태를 띠고 있으나 옆에서는 보이지 않는 반대편의 눈과 귀까지 표현함으로써 전형적인 고구려식 백호의 귀면형 얼굴로 이행하려는 흐름을 보여준다.


남벽에는 암수 주작이 널방 문을 사이에 두고 두 날개를 편 채 마주 보며 서 있다. 머리에 별다른 깃 장식이 없고 과장된 부리도 지니고 있지 않으며 꼬리 깃도 비교적 단순하다. 두 날개 가운데 바깥쪽의 것은 학의 날개처럼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나가면서 깃이 길어지는 데에 비해 안쪽의 날개는 볏새류의 날개처럼 깃의 길이가 비교적 일정하게 묘사됨으로써 두 날개의 형태가 다르듯이 느껴지게 한 점이 이채롭다.


북벽의 현무는 뱀이 거북의 몸을 귀갑의 앞부분에서 뒤로 나가면서 세 번 감은 후 몸을 위로 세우고 목을 역(逆) S자꼴로 제키면서 거북의 앞부분을 바라보는 자세를 취하였다. 거북은 머리를 쳐들어 위를 쳐다보고 있다. 따라서 이 벽화의 현무에서 뱀과 거북은 서로를 외면하고 있다. 다른 고분벽화의 현무에서는 볼 수 없는 모습이다.



◆ 강서대묘(江西大墓)

남포시 강서구역 삼묘리 / 6세기말


남포시 강서구역 삼묘리(三墓里, 옛지명: 평안남도 강서군 우현리, 평안남도 대안시 삼묘리)에 있다.

옛 강서읍 중심지에서 서북으로 4㎞ 떨어진 삼묘리 소재지 앞의 세 무덤 가운데 제일 남쪽의 흙무지돌방무덤으로 우현리대료로도 불렸다. 이 무덤 북쪽에 무학산이 펼쳐졌다.

강서중묘와 함께 1900년대 초반부터 벽화고분이라는 사실이 세간에 알려져 외부인들의 무덤 안 출입이 계속되었다. 1906년경부터 일본인학생 화가들에 의한 무덤 안 벽화의 모사작업이 여러 차례 진행되었으며, 1910년 이후 본격적인 내부조사가 이루어졌다.


흙무지의 직경이 51m, 높이가 9m이다. 무덤의 방향은 남향이며 무덤칸은 지상에 축조되었다.

널길과 널방으로 이루어진 외방무덤으로 잘 다듬어진 화강암으로 무덤칸의 벽과 천장고임이 축조되었다. 대형 화강암 판석을 수직으로 쌓아 만들어진 널방 벽체가 서로 만나는 곳의 상부는 끝 부분을 각이 지게 깎아내어 처음부터 약간 좁혀진 상태로 천장을 고일 수 있도록 하였다.

천정석은 도굴과정에서 세 조각으로 깨진 뒤 그 한 쪽이 떨어져 나간 상태로 방치되다가 복원되었다. 널방의 천장구조는 삼각고임이다. 무덤 안의 석면에 직접 벽화를 그렸으며, 주제는 사신(四神)이다.


널방 벽의 청룡, 백호, 주작, 현무는 아무런 배경 장식이 없는 벽면에 가득 차게 그려졌는데, 특히 북벽의 현무는 높은 회화적 완성도로 말미암아 조사보고 당시부터 내외의 이목을 끌었다. 백호의 머리가 귀면(鬼面), 용면(龍面)을 연상시키는 모습으로 바뀌었고, 남벽 동측과 서측에 배치된 암수주작의 발밑에는 산악이 표현되었다.


천장고임에는 연꽃, 서초(瑞草), 비선(飛仙), 기악천(伎樂天), 기린(麒麟)을 비롯한 여러 종류의 기금이수(奇禽異獸), 넝쿨무늬가 그려졌고 천정석에는 황룡(黃龍)이 묘사되었다.


집안의 오회분5호묘, 통구사신총 널방 천정석 벽화에서도 확인되는 황룡은 무덤주인이 왕임을 나타내는 표지로 이해되기도 한다.

전형적인 외방무덤구조, 사신을 중심주제로 삼은 벽화구성, 최고조에 이른 사신 묘사기법 등으로 보아 강서대묘의 축조 및 벽화제작 시점은 6세기말일 가능성이 높다.



◆ 강서중묘(江西中墓)

남포시 강서구역 삼묘리 / 7세기초


남포시 강서구에 삼묘리(옛지명: 평안남도 강서군 우현리, 평안남도 대안시 삼묘리)에 있다.

우현리중묘로도 불렸다. 삼묘리 소재지 앞의 세 무덤 가운데 서쪽의 흙무지돌방무덤이다.

강서대묘와 함께 1900년대 초반부터 내부에 외부인이 출입하였고, 1906년 이후 여러 차례 벽화가 모사되었다. 무덤방향은 남향, 무덤 축조 위치는 지상이다.


널길과 널방으로 이루어진 외방무덤이다.

대형 화강암으로 무덤칸의 벽과 천장고임이 축조되었으며 널방의 천장구조는 2단평행고임이다. 무덤 안의 석면에 직접 벽화를 그렸으며, 주제는 사신이다.


널방 벽의 사신은 아무런 배경 장식이 없이 벽면에 가득 차게 그려졌으며, 청룡과 백호의 묘사수준이 대단히 높아 우주적 신수(神獸)에 대한 ‘상상적 사실성’을 갖춘 상태이다. 반면 산악을 아래에 두고 허공에 떠 있는 듯이 표현된 북벽의 현무는 뱀과 거북이 어루어지면서 자아내는 운동감과 긴장감을 결여하고 있어 주목된다.


천장고임에는 연꽃과 넝쿨무늬가 묘사되었고, 천정석에는 중심에 연꽃, 둘레에 서조(瑞鳥), 해와 달이 그려졌다.


전형적인 외방무덤구조, 사신을 중심주제로 삼은 벽화구성, 회화적 후퇴를 보여주는 듯한 현무의 묘사 등으로 보아 강서중묘의 축조 및 벽화제작 시점은 7세기 초일 가능성이 높다.



◆ 고구려사 개관(高句麗史 槪觀)


고구려 성립의 주체인 예맥은 시조 동명성왕 주몽이 건국을 선언한 기원전 37년 이전부터 압록강 중류일대를 중심으로 여러 개의 소국(小國) 및 소국연맹체를 세운 상태로 존재했다.


고구려는 기원전 1세기말부터 1세기말에 이르는 동안, 오랫동안 만주지역의 패자를 자임하던 부여(夫餘)의 그늘에서 벗어나 만주와 한반도 일대의 새로운 국가세력으로 성장해간다.

2세기 후반부터 4세기 전반 사이에는 주변 군소세력을 통합(統合)하고, 만주 남부와 한반도 중북부 일대에 남아 명맥을 유지하던 중국계 군현세력을 완전히 소멸시킨다.

4세기 후반에서 6세기 초에 걸쳐 고구려의 영역은 이전에 비해 크게 확장된다.


5세기에 고구려의 영역은 서(西)로는 요하(遼河) 좌우, 북(北)으로는 동류 송화강유역, 동(東)으로는 연해주 남단, 남(南)으로는 한반도 중부일대까지 확장된다. 이와같이 영역을 크게 넓히면서 고구려는 동북아시아의 패자(覇者)로서 중국의 패권을 다투던 남조(南朝)와 북조(北朝), 내륙아시아 스텝유목지대의 패자 유연(柔然)과 함께 동아시아의 국제질서를 좌우하는 4강(强)의 하나로 떠오른다.


6세기 중엽부터 고구려는 통일중국 중심의 국제질서 재정립을 시도하는 수당(隋唐)과 정면충돌하게 되고, 70여 년 뒤인 668년 다시 한 번 펼쳐진 나단(羅唐)연합군의 협공을 받자 이를 견뎌내지 못하고 역사무대에서 사라지게 된다.

고구려가 멸망하자 옛 고구려 땅의 일부는 신라와 당의 영역에 편입되고 이외의 지역은 30년 뒤 고구려 계승을 선언하며 건국한 발해(渤海)의 영토가 된다.



◆ 고구려인의 복식(服飾)


고구려인은 남녀 모두 저고리와 바지를 기본복식으로 삼았다.

저고리는 아랫단이 엉덩이까지 이르는 긴 것으로 집안지역에서는 깃을 왼쪽으로 여미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평양 일원에서는 오른쪽으로 여미거나 앞에서 마주치게 하는 경우가 많았다.

저고리 깃을 왼편으로 여미는 것은 ‘좌임(左?)’ 이라 하여 내륙아시아 유목민족이 선호하던 방식이며,  ‘우임(右?)’ 이나 ‘합임(合?)’ 은 중국의 한족(漢族)에게 일반화된 관습이다.


저고리 소매의 너비는 신분에 따라 달라, 귀족이 입은 저고리의 소매가 평민의 것보다 넓었다.


바지통의 너비 역시 신분에 따라 차이가 있어 신분이 높은 사람은 대구고(大口袴)라 하여 통넓은 바지를, 낮은 사람은 궁고(窮袴)라 불린 통좁은 바지를 입었다.


저고리와 바지 위에는 기본 형태와 구조가 저고리와 같으나, 길이가 발목에 이를 정도로 긴 두루마기를 덧입기도 하였다. 여자복식에는 저고리와 바지 외에 치마가 더해졌다. 고구려 여인들은 보통 치맛단에 저고리처럼 선이 더해진 치마를 입었다. 여자들은 저고리와 바지 위에 치마를 덧입고 그 위에 두루마기를 덧입는 경우가 많았다.


고구려 전기의 수도였던 집안지역에서는 비교적 밝고 단순한 색상의 바탕천에 점무늬, 마름모무늬, 꽃무늬를 간결하게 반복하여 장식한 옷이 선호되었다. 반면, 후기의 수도인 평양지역에서는 보다 다양하고 화려한 색상의 바탕천에 구름무늬, 물결무늬, 넝쿨무늬, 각종 기하무늬 등을 복잡하고 화려하게 장식한 옷이 유행하였다. 이것은 고유색이 강하였던 집안지역과 중국문화의 수용에 적극적이었던 평양지역의 문화전통상의 차이에 말미암은 것이다.

그러나 5세기 후반에 이르면 평양을 중심으로 한 문화통합이 성과를 거두어 고구려 고유의 점무늬옷에 세련미를 더한 복식이 등장하여 지역에 관계없이 널리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