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듬어보고(전시)

<흥선대원군과 운현궁사람들> 초상화

Gijuzzang Dream 2007. 11. 4. 22:06

 

 

 

 

 흥선대원군과 운현궁사람들 특별전

 

 


       전시장소 : 서울역사박물관 기획전시실

        전시기간 : 2007. 2. 27(화) - 4. 15(일)

 

 


 

이번 전시회에는 <흥선대원군과 운현궁사람들>이라는 주제 하에

운현궁에서 서울역사박물관에 기증한 6,500여 점에 달하는 귀중한 유물 중

역사적으로 가치가 큰 보물 1499호 흥선대원군 이하응(興宣大院君 李昰應, 1820-1898)의 초상화

중심으로 고종(高宗)을 포함한 후손들의 초상화가 최초로 시민들에게 소개되는 전시회이다.


□ 이번 전시는

모두 임금의 초상화를 그렸던 당시의 대표적인 어진화가들의 작품들이 전시된다는 특징이 있다.

헌종과 철종어진을 그렸던 이한철, 철종과 고종어진을 그렸던 유숙, 태조어진을 그렸던 이창옥,

고종어진을 그렸던 채용신, 순종의 반신상 어용(御容)을 그렸던 김은호 등

당대의 최고의 초상화 화가들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 전시실은 크게 흥선대원군, 운현궁 사람들 및 고종의 공간으로 구분하였다.

입구부는 운현궁의 담을 지나 문을 통과하면 운현궁 사람들을 만날 수 있도록 하였고

운현궁 가계를 쉽게 볼 수 있게 영상이 가미된 패널로 만들어 좀 더 생동감이 넘치게 기획하였다.

출구부에는 “흥선대원군”관련 영상물을 통해 흥선대원군과 근대사를 살펴볼 수 있도록 하여

교육적으로 중요한 전시가 될 것으로 생각된다.


□ 조선 제26대 왕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조선말기 격변기를 풍미했던 대표적인 정치가이면서 또한 예술가이기도 했다.

흥선대원군의 초상화는 그의 생애동안 여러 점이 그려졌는데,

이번 전시에서는 총 6점이 전시되며 흥선대원군의 모습을 여러 각도에서 살펴볼 수 있다.

흥선대원군의 초상화는 조선말기 최고의 어진화사(御眞畵師)였던 이한철과 유숙 등이 그린 것으로

예술적 가치 면에서도 조선말기 초상화의 진수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걸작들이다.


□ 또한 운현궁에서 태어나고 자란 왕실가 후손들의 영정이 한자리에 모두 전시되어

우리의 근대사를 돌이켜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흥선대원군을 이어 운현궁을 물려받은 후손인 이재면(1880년작), 이준용(1918년작),

이우(1965년작)의 처음 공개되는 초상화를 통해

조선 말기에서 근대로 이행하는 초상화의 특질을 살펴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흥선대원군 이하응 초상(금관조복본) (1820-1898)

興宣大院君 李昰應 肖像(金冠朝服本)

 


보물 제1499-(1)호

이한철(李漢喆, 1812-1893 이후) / 유숙(劉淑,1827-1873), 1869년

비단에 채색, 130.8×66.2cm,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좌안8분면(左顔八分面)의 전신좌상(全身坐像)이다.

그림 오른쪽에 대원군이 직접 써넣은 표제를 통해

1869년에 이한철과 유숙의 합작으로 제작된 초상화임을 알 수 있으며,

화사(畵師)와 함께 장황인(粧황人)의 이름이 적혀 있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이 초상화에서 대원군은 문무백관들이 조복(朝服)에 착용하던 금관(金冠)을 쓰고 있는데,

세로로 5량이 묘사되어 있어 품계가 1품임을 나타낸다.

이 금관조복본 초상화는 이한철이 얼굴 부위를, 유숙이 몸체 부위를 그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안면 표현은 전체적으로 짙은 갈색 톤을 주조로 하고,

얼굴 윤곽선 및 이목구비를 짙은 갈색 선으로 표현했다.

조복의 주름 묘사에 있어서는 외곽선과 대표적인 주름 선을 보다 짙게 그린 후

굴곡진 부분에 선염기(渲染氣)를 가하는 방식이 사용되었다.

바닥에 깔린 돗자리는 사선(斜線)으로 처리하여 안정적인 공간감을 연출했으며,

족좌대 위에는 수자(壽字)문양의 화문석이 깔려 있고 목화를 신은 발 모습은 자연스럽게 표현되었다.



** 余年五十己巳肇夏自題 畵士 李漢喆 劉淑 粧황 韓弘迪

내가 50세 되던 기사년 초여름에 스스로 제하다.

화사 이한철, 유숙, 표구 한홍적.

 

 

***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 1820-1898)

자는 시백(時伯), 호는 석파(石坡)이다.

영조의 현손으로 남연군(南延君) 이구(李球)의 아들이며 조선 제26대 임금인 고종(高宗)의 아버지이다.

1863년에 철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그의 둘째 아들이 12세의 나이에

조선 제26대 국왕으로 지목되면서 대원군으로서의 그의 정치 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후 1873년에 고종이 친정을 선언하기까지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과감한 개혁정책을 실시하면서 대외적으로는 쇄국정책을 고수했다.

흥선대원군은 정치적 활동 외에 예술가로서도 주목할 만한 인물이었는데,

추사 김정희가 칭찬했던 그의 글씨와 더불어 난(蘭)을 그리는 탁월한 솜씨는

뛰어난 서화가로서의 그의 면모를 보여준다.


1820년          안국동(安國洞)에서 남연군(南延君) 구(球)의 넷째 아들로 태어남.

1843년(24세)  흥선군에 봉해짐.

1846년(27세)  종친부 유사당상 · 도총관 역임.

1863년(44세)  둘째아들 고종이 즉위하자 대원군에 진봉되고, 정책결정권을 받아 섭정을 맡음.

                   이후 집권기간 동안 인재등용, 비변사 폐지, 삼정의 개혁, 서원철폐 등의 개혁정책 실시.

1865년(46세)  경복궁 중건 시작(1868년 완성). 원납전 발행.

1866년(47세)  병인양요와 제너럴셔먼호 사건 이후 쇄국정책 고수.

1871년(52세)  신미양요 이후 전국에 척화비를 세움.

1873년(54세)  고종이 친정(親政)을 선포하자 운현궁을 떠나 양주 직곡에 은퇴.

1882년(63세)  임오군란(壬午軍亂)으로 정권을 잡았으나 청나라에 납치되어 4년간 유폐.

1885년(66세)  귀국하여 운현궁에 칩거.

1895년(76세)  을미사변 직후 정권을 장악했으나 곧 실각.

1898년(79세)  운현궁에서 세상을 떠남.

1907년          헌의대원왕(獻懿大院王)에 추봉.



흥선대원군 이하응 초상(금관조복본) (1820-1898)

興宣大院君 李昰應 肖像(金冠朝服本)


 

보물 제1499-(2)호

이한철(李漢喆, 1812-1893 이후) / 유숙(劉淑, 1827-1873) 추정, 19세기말,

비단에 채색, 113.7×66.2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덕수 1938)



금관조복(金冠朝服)에 홀(笏)을 들고 의자에 앉아 있는 좌안8분면(左顔八分面)의 전신좌상(全身坐像)이다.

금관조복은 백관복 중에서도 가장 화려한 옷으로서,

대원군 이전의 금관조복본초상화는 아주 소수의 작품만이 전해온다.


이 초상화에는 표제가 없으나

서울역사박물관 소장의 금관조복본 이하응 초상과

양관(梁冠)의 장식, 족좌대와 바닥에 깔린 돗자리의 문양, 옷 주름 처리에서 세부적 차이를 보일 뿐,

그림의 크기나 화격(畵格), 전체적인 상용형식, 재료, 표현기법 등에서 거의 동일하다.

따라서 서울역사박물관 소장본과 같은 본을 바탕으로 제작된 작품으로 추정되며

그림을 그린 화사(畵師) 역시 이한철과 유숙으로 추정된다.



흥선대원군 이하응 초상(흑단령포본) (1820-1898)

興宣大院君 李昰應 肖像(黑團領袍本)

 


보물 제1499-(1)호

이한철(李漢喆, 1812-1893 이후) / 유숙(劉淑, 1827-1873), 1869년

비단에 채색, 131.9×67.7cm, 서울역사박물관

  


오사모(烏紗帽)에 단령(團領)을 갖추고 의자에 앉아 있는 좌안8분면(左顔八分面)의

전신교의좌상(全身交椅坐像)으로서 공수자세(拱手姿勢)를 취하고 있다.

 

그림 오른쪽의 대원군의 친필표제(親筆表題)와 이 초상화를 보관했던 영정함의 별폭 표제를 통해

1863년(癸亥, 고종 1) 즉 대원군 44세 때 그려진 초본을 본으로 하여

50세가 되는 1869년에 옮겨  그린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초상화처럼 정장관복을 입고 의자에 앉아 있는 전신교의좌상의 형식은

조선시대 초, 중기에는 공신상(功臣像)에만 쓰였던 형식이었으나,

17세기 후반부터 일반사대부상 제작에도 택해졌으며 그 이후로는 크게 성행하였다.


오사모는 사모의 앞부분에는 발색효과를 넣어 앞으로 튀어나왔음을 표현하였으며,

흑단령은 검은 선으로 외곽 및 주름선을 나타내고,

우묵하게 들어간 부분에는 어두운 선염기를 집어넣어 굴곡진 부위를 지시하였다.

안면처리법에 있어서는 이한철 특유의 필법을 보여주고 있다.

바닥에는 화려한 문양의 돗자리가 깔려 있으며,

목화(木靴)를 신은 양 발은 족좌대 위에 자연스럽게 팔자형으로 벌어져 있다.



** 余年五十己巳肇夏自題 畵士 李漢喆 劉淑 粧潢 韓弘迪

내가 50세 되던 기사년 초여름에 스스로 제하다.

화사 이한철, 유숙, 표구 한홍적.


** 영정함 별폭표제 - 黑團領袍本 癸亥草本 己巳移摹

흑단령포본. 계해년에 그려진 초본을 본으로 기사년에  옮겨 그리다.

 

 

흥선대원군 이하응 초상(와룡관학창의본) (1820-1898)

興宣大院君 李昰應 肖像(臥龍冠鶴창(敞+毛)衣本)


 

보물 제1499-(1)

이한철(李漢喆, 1812-1893 이후) / 유숙(劉淑, 1827-1873), 1869년

비단에 채색, 133.7×67.7cm,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와룡관(臥龍冠)에 학창의(鶴 敞+毛 衣)를 갖추고 의자에 앉아 있는 좌안8분면(左顔八分面)의

전신좌상(全身坐像)이다. 1863년에 그려진 초본을 바탕으로

대원군의 나이 50세가 되는 1869년에 이한철과 유숙이 합작하여 그린 것이다.


와룡관본 흥선대원군초상화에는 18세기 후반부터 유행했던 문방 청완(淸婉)이나 고동(古董) 취미가

하나의 화폭 속에 완벽하게 구현되어 있다.

즉 탁자위에는 서첩위에 놓인 청화백자 인주함, 탁상시계, 용문양의 벼루, 둥근 뿔테 안경이 등이

배치되어 있으며, 그 옆의 키 낮은 고동색 협탁 위에는 고동향로와 향 피우는 도구들이 놓여 있다.

대원군의 오른 쪽에는 환도(還刀)가 보이며,

그의 발 앞에는 화려한 비단 천으로 꾸민 장침(長枕)이 놓여 있다.


한편 이 초상화가 보여주는 인물 앞의 서탁(書卓) 배치 형식은 구도적으로 큰 의미를 갖는데,

이러한 구도는 화면 속 인물과 그림을 감상하는 사람 사이에 일종의 경계선을 그어

거리감을 유도함으로써 보는 이에게 안정감을 줄 수 있다.



** 余生於庚辰 模像於己巳 時年五十 畵士 李漢喆 劉淑 粧潢 韓弘迪

나는 경진년에 태어났는데 기사년에 초상화를 그리게 하니 그때 내 나이 50세이다.

화사 이한철, 유숙, 표구 한홍적.


** 영정함 홍지표제 - 臥龍冠鶴창(敞+毛)衣本 癸亥初本 己巳移摹

와룡관학창의본. 계해년에 그려진 초본을 본으로 기사년에 옮겨 그리다.

 


흥선대원군 이하응 초상(흑건청포본) (1820-1898)

興宣大院君 李昰應 肖像(黑巾靑袍本)

 


보물 제1499-(1)호

이한철(李漢喆, 1812-1893 이후) / 이창옥(李昌鈺), 1880

비단에 채색, 126.0×64.9cm,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흑건(黑巾)에 청색 포를 입고 공수자세(拱手姿勢)를 취하고 의자에 앉아 있는

좌안8분면(左顔八分面)의 전신좌상(全身坐像)으로,

이한철과 이창옥이 1880년에 합작하여 그린 작품이다.

이 초상화는 일찍부터 알려져 온 대원군초상화로서,

그 차림새가 현재 전해오는 초본형식 작품들과 같다.


얼굴은 윤곽선 주위에 짙은 선염을 가하고 살색의 필선을 가늘게 반복하여 굴곡을 나타냈는데,

전체적으로 경직된 표정을 띠고 있다.

의습은 청포의 외곽과 주름선을 짙은 청색선으로 칠하고 다시 먹선을 가했으며,

이러한 선묘를 따라 선염기(渲染氣)를 집어넣는 조선후기 초상화의 전형적인 묘법을 따르고 있다.

양 허벅지 사이의 옷주름 선의 묘사와 혜(鞋)를 신은 양 발의 묘사 부분이 어색한 편이나,

화려한 카페트의 질감 표현과 대원군의 앉음새가 확고하고 안정적으로 보이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 余年六十一周甲像 庚辰肇夏自題 畵士 李漢喆 李昌鈺 粧潢 韓弘迪

내가 61세 되던 환갑 때의 모습이다. 경진년 초여름에 스스로 제하다.

화사 이한철, 이창옥, 표구 한홍적.



흥선대원군 이하응 초상(복건심의본) (1820-1898)

興宣大院君 李昰應 肖像(幅巾深衣本)


 

보물 제1499-(1)호

이한철(李漢喆, 1812-1893 이후) / 이창옥(李昌鈺), 1880년경

비단에 채색, 113.7×66.2cm,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복건(幅)에 심의(深衣)를 갖추고 공수자세(拱手姿勢)를 하고 부좌한

좌안8분면(左顔八分面)의 전신좌상(全身坐像)이다.


그림 오른쪽에 대원군이 직접 적은 표제를 통해

대원군 나이 61세가 되던 해에 그려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복건에 심의를 입고 부좌한 형식의 초상화는

조선시대 사대부상에서 줄곧 나타나는 형식으로, 특히 조선후기에 성행하였다.

  

이 그림은 어두운 갈색이 나는 안색을 주조로 하고,

이목구비와 외곽선을 더욱 짙은 선으로 표현했으며,

협(頰: 뺨)과 법령(法令: 코의 옆 날개에서부터 볼 쪽으로 내려온 주름) 부분 역시

약간의 음영이 곁들인 짙은 갈색 선으로 처리하였다.

얼굴에 깔려 있는 어두운 토황기(土黃氣)와 깊어진 주름묘사,

탄력 없이 처져 울룩불룩하게 처리된 턱선의 처리는 노년기를 맞은 대원군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창옥이 그렸을 것으로 추정되는 의습 처리는 바탕색 보다 짙은 색으로 주름 선을 표현하고,

그 주위에 옅은 선염기를 집어넣는 조선조후기의 전형적 묘법을 보인다.

바닥에는 옅은 감색 문양이 있는 돗자리가 깔려있는데, 사선으로 무늬를 그려 넣어 공간감을 형성하였다.


** 余年六十一周甲像 庚辰肇夏自題 畵士 李漢喆 李昌鈺 粧潢 韓弘迪

내 나이 61세 되던 환갑 때의 모습이다. 경진년 초여름에 스스로 제하다.

화사 이한철, 이창옥, 표구 한홍적.

 

 

흥친왕 이재면 초상 (1845-1912)

興親王 李載冕 肖像


 

이한철 필 추정(李漢喆, 1812-1893이후), 1880년경

비단에 채색, 73.0×53.0cm,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사모(紗帽)에 단령(團領)을 입은 좌안8분면(左顔八分面)의 오는 반신상이다.

사모의 형태는 조선 말기의 모제(帽制)에 의거하여 모정(帽頂)이 짧고 양각(兩角)도 작다.


안면은 안색이 적갈색조를 띠고 있으며, 이목구비와 협, 법령 부위를 짙은 갈색선으로 나타냈다.

눈썹묘사나 눈의 처리법은 대원군을 그린 이한철의 필법과 동일하여

이 초상화가 이재면의 나이 36세 때인 1880년, 흥선대원군 61세 초상화 제작시 함께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쌍학흉배를 달고 학정금대를 두르고 있어 당상관에 문관 종2품임을 말해준다.

얼굴은 살짝 마마자국이 있었던 듯 파인 흔적이 여기저기 보이지만 살에 박힌 듯 자연스럽다.

웃는 듯한 모습의 온화한 인상이며, 입술색은 진한 연지가 시채(施采)되어 있다.

의습은 단령색보다 짙은 선으로 외곽선과 대표적인 주름을 그리고

굴곡진 부분에 선염기를 집어넣는 당대의 통상적인  방식으로 처리되어 있다.

 

 

*** 흥친왕(興親王) 이재면(李載冕, 1845-1912)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의 첫째 아들로 고종(高宗)의 형이며

영선군 이준용(永宣君 李埈鎔)의 아버지이다.

자는 무경(武卿), 호는 우석(又石)이며, 뒤에 희(熹)로 개명했다.

1864년(고종1)에 문과정시에 급제한 후 도승지, 병조판서, 이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910년에는 흥왕(興王)으로 책봉, 이후 흥친왕(興親王)이라고 불리어졌다.

 

 

1845년          서울 중부 사동(오늘날 인사동)에서 흥선대원군과 여흥 민씨(驪興閔氏) 사이의

                   장남으로 출생.

1864년(20세)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규장각시교 · 예문관검열 · 승정원주서 등을 거침.

1865년(21세)  동부승지 · 대사성 · 이조참의 · 부제학 등을 지냄.

1882년(38세)  정 1품 보국숭정대부(輔國崇祿大夫)에 오름.

                   6월 임오군란 때 무위대장(武衛大將)으로 사태수습에 힘씀.

1885년(41세)  1882년에 청나라에 호송되어 감금생활을 하던 아버지 흥선대원군을 3차례에

                  걸쳐 방문하며 봉양하다가 8월 흥선대원군이 환국할 때 배종하였으며,

                  그 뒤 약 10년간 운현궁에서 칩거.

1894년(50세)  6월 대원군이 집정하자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의 동문사당상경리사(同文司堂上經理事)가 됨.

                  제1차 김홍집내각(金弘集內閣)때 보국숭록대부로서 궁내부대신이 됨.

1900년(56세)  완흥군(完興君)에 책봉.

1910년(66세)  흥친왕(興親王)에 책봉.

1912년(68세)  운현궁에서 세상을 떠남.

 

 



영선군 이준용 초상 (1870-1917)

永宣君 李埈鎔 肖像


 

김은호 필(金殷鎬, 1892-1979), 1918년

비단에 채색, 140.0×81.0cm,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금관조복(金冠朝服)을 입고 의자에 앉아 있으며,

얼굴은 약간 오른쪽을 향하고 있지만 거의 정면관에 가깝다.

이 작품의 유지초본(油紙草本)이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1918년경 이준용의 사후, 이당 김은호(1892-1979)가 종중(宗中)에서 부탁을 받고 그린 것이다.

 

사진을 바탕으로 제작된 이 초상화는 안면을 전적으로 면적 처리에 의존했다.

눈은 검은 선으로 윗눈꺼풀을 긋고, 아래눈꺼풀은 아주 흐리게 처리했으며,

안두에는 약간 갈색기가 삽입되어 있다. 홍채부분에는 반사광의 광점이 묘사되어 있어,

사진에 나타난 반사점을 그대로 그려 넣은 것으로 추정된다. 입술에는 요철감과 질감이 잘 드러나 있다.


의자에는 호피가 깔려 있는데, 질감묘사 등이 다소 거칠며

바닥에 깔린 소박한 문양의 돗자리의 묘법 역시 공교하지 못하다.

 


*** 영선군(永宣君) 이준용(李埈鎔, 1870-1917)

 

흥선대원군의 적손으로 이재면의 아들이며 운현궁의 3대 종주이다.

자는 경극(景極)이며 호는 석정(石庭), 송정(松亭)이다.

1866년 문과에 급제한 뒤 두루 관직생활을 하였다.

한때 조부인 흥선대원군이 그를 왕으로 추대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을미사변 직후에 일본으로 갔다가 1907년에 귀국하였다.

순종 즉위 후 영선군(永宣君)으로 봉해졌으며,

1912년 부친의 사망 후에는 준(埈)으로 개명하였으며 이후 이준공(李埈公)으로 불리어졌다.

후사가 없어 의친왕의 아들인 이우(李우)를 양자로 삼았다.


1870년           운현궁에서 이재면과 풍산홍씨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남.

1884년(15세)   갑신정변때 세마(洗馬)가 됨.

1886년(17세)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 예문관 검열, 형조 참의, 성균관 대사성,

                   홍문관 직제학(直提學), 도승지에 오름.

1894년(25세)  법부협판(法部協辦) 김학우(金鶴羽) 피살사건에 연루, 교동(喬桐)에 유배되었다가 

                   2개월 만에 특전으로 석방됨.

1896년(27세)  을미사변 직후 일본에 유학.

1907년(38세)  고종이 순종에게 양위 후 귀국.

1910년(41세)  영선군(永宣君)에 봉해지고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로 승진, 육군참장(陸軍參將)이 됨.

1917년(48세)  운현궁에서 세상을 떠남.

 


흥영군 이 우 초상 (1912-1945)

君 李 肖像

 

   
 

김은호(金殷鎬, 1892-1979), 20세기

비단에 채색, 155.7×66.5cm,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흥영군 이우의 초상화는 이당 김은호(1892-1979)가 그린 것으로,

사진을 바탕으로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얼굴의 외곽선을 비롯하여 이목구비가 전혀 선적인 특징을 보이지 않고 면으로만 처리되어 있다.

윗눈꺼풀은 선을 긋는 대신 음영기로 묘사했으며, 흰자위에도 그림자 처리를 하였다.

눈썹과 수염은 붓의 물기를 빼어 선을 그렸다.

  

붉은 조복은 주름을 검고 굵은 선으로 긋고 그 옆으로 옅은 선을 더 그었으며,

주름으로 인한 굴곡을 나타내려는 시도는 보이지 않는다.

의자에 깔린 호피 처리 역시 조야하며, 족좌대의 위치도 어색하다.

바닥에는 옅은 녹색 무늬가 있는 일종의 카페트가 깔려 있으며, 족좌대의 높이는 상당히 낮다.

이 그림은 너무 부드럽게 처리된 얼굴 부위와 강렬한 색채의 금관조복이 대비되면서,

화면상 얼굴과 몸체부분이 서로 유리된 결과를 초래했다.

 

 

*** 흥영군(興永君) 이 우( , 1912-1945)


고종의 다섯 번째 아들인 의친왕(義親王)의 차남으로 태어났으나,

당숙인 이준용이 후사 없이 1917년에 세상을 떠나자 6세 때 양자로 입적되어

운현궁의 4대 종주가 되었다.

11살의 어린 나이에 일본으로 건너가 교육을 받았으며,

1933년 일본 육군사관학교 본과를 졸업했다. 일본의 노골적인 감시 속에서도

조선황족으로서의 기개와 위용을 잃지 않았다고 하나, 34세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창현리에 묻혔다.

 

1912년          의친왕(義親王)의 둘째 아들로 태어남.

1917년(6세)    이준용이 후사 없이 사망하자 양자가 됨.

1922년(11세)  일본으로 건너가 학습원 초등과 3년생으로 들어감.

1925년(14세)  도쿄의 육군유년학교 입학.

1929년(18세)  육군사관학교 예과 입학.

1933년(22세)  육군사관학교 본과 졸업.

1935년(24세)  박영효의 손녀인 박찬주와 결혼.

1940년(29세)  육군대학 54기 졸업.

1945년(34세)  8월 6일 히로시마에서 세상을 떠남.


 

청 (李 淸, 1936-   )


흥영군 이우(興君 李)와 박찬주(朴贊珠) 여사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경기고등학교와 미국 마케트대학을 졸업하였고,

미국에서 거주하면서 엔지니어로 일하다가 귀국하여 운현궁에 거주하였다.

1992년에 운현궁의 소유권을 서울특별시로 이전하였으며,

1994년에는 흥선대원군 영정을 비롯한 황실 유품을 서울시에 기증했다.

2006년 석파학술연구원을 세웠으며,

동북아시아 역사자료를 종합한 사료집인 《흥선대원군 사료휘편》 4권을 출간했다.

현재는 서울시립대학교 경영대학원 외래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1936년                   4월 23일 일본 동경 출생.

1944년(9세)             귀국 후 운현궁 거주.

1954년(19세)           경기고등학교 졸업.

1960년(25세)           미국 위스콘신주 마케트대학교 토목공학과 졸업.

1960~64년(25~29세) 미국 테네시주 킹스포트, H.T. spoden & Associate 설계사무소 Engineer.

1965~69년(30~34세) 미국 테네시주 네쉬빌, Ross H.bryan 합동설계사무소  Engineer.

1970~71년(35~36세)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 드폴대학교 대학원 연구생.

1974년(39세)           동원 Engineering Consultant Ltd 부사장.

1998 ~  (63세~  )     현재 서울시립대학교 경영대학원 외래교수.


 

고종황제 어진 (재위 1864-1907)

高宗皇帝 御眞

 

  

 

    작자미상, 20세기 초, 비단에 채색

    162.5×100.0cm,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정면 초상화이며 홀을 들고 의자에 앉은 전신좌상(全身坐像)이다.

이 작품은 보기 드물게 통천관(通天冠)에 강사포(綱紗袍)를 입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이 <고종어진>은 고종말년의 모습을 담은 초상화로서,

화려한 색감은 물론 배경에 휘장을 드리운 형식으로서도 주목된다.

이 어진은 1907년 9월 순종과 순종비 윤씨와의 가례 당시 촬영된 사진을 범본으로 하여

그려낸 작품으로 추정되며, 초상화와 사진과의 관련성을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 작품은 원래 창덕궁 선원전 내에 소장되었던 것이 아니라

1966년 일본으로부터 국내에 들어온 것이다.

현재 이 그림을 소장하고 있는 고궁박물관측 자료에는 1966년 일본인이 기증했으며

남계(嵐溪)라는 일본인 화가가 그렸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한편으로는 고종이 1907년 볼모로 일본으로 떠나는 영친왕에게 주기 위해

한국의 최기(崔基)라는 화가에게 그리게 했다는 엇갈리는 증언이 있다.

따라서 이 초상화의 작가문제는 아직 확단하기 어려우며 앞으로 좀 더 면밀한 검토가 필요한 부분이다.

    


고종황제 어진 (재위 1864-1907)

宗皇帝 御眞


(여기 올려진 채용신의 또다른 고종어진은, 1913, 개인소장인데, 참고 의미에서. . . )

 

채용신(蔡龍臣, 1850-1941), 1920년 이전

비단에 채색, 118.0×68.2cm, 국립전주박물관 소장



정면관(正面觀)에 익선관(翼善冠)과 곤룡포(袞龍袍)라는 상복(常服)을 입은

전신교의좌상(全身交椅坐像)이다. 익선관은 은은한 발색효과를 넣어 입체감을 살리고,

얼굴은 비교적 밝은 색으로 공들여 채색하였는데, 전체적으로 면적 처리를 하였다.


윗눈꺼풀은 먹선으로 가늘게 표현하였으며, 눈동자에는 홍채부분에 반사광이 그려져 있는데,

특히 왼쪽 눈이 더욱 또렷하다.

양 난대(蘭臺)와 정위(廷尉)의 외곽부분에는 확연하게 붓질이 가해져 있으며,

입술은 갈라진 주름까지도 세밀히 묘사되었고 입술외곽선은 약간 밝게 처리하였다.

각대는 위로 올라가 있으며, 견보(肩補)와 보(補)의 금분(金粉) 처리는 두터워서인지 박락부분이 보인다. 양 무릎에 얹은 손이 안정적이고 자연스럽다.

 ‘壬子生 甲子登國 ’ 이라 쓰인 호패(號牌)가 적갈색 술 사이로 보인다.


이 어진은 전체적인 형식이나 필치로 보아 석지필로 보이는데,

석지 채용신은 1901년 궁중에서 고종어진을 처음 도사했으며, 이후 화가자신이 초본을 가지고 있으면서

이를 범본으로 하여 고종어진을 여러 번 모사했던 것으로 보인다.

돗자리의 문양이 앞쪽과 뒤쪽 사이에 대소의 구별은 있지만,

비스듬한 모습은 아니어서 이 어진의 제작년대는 대략 1920년 이전으로 추정된다. 


** (호패) - 壬子生甲子登國

임자년에 태어나 갑자년에 임금 자리에 오르다.

 

 

고종황제 어진 (재위 1864-1907)

高宗皇帝 御眞

 

 

채용신(蔡龍臣, 1850-1941)

비단에 채색, 137.0×70.0cm, 광대학교박물관 소장


  

정면관(正面觀)에 익선관(翼善冠)과 곤룡포(袞龍袍)를 갖추고

의자에 앉은 전신교의좌상(全身交椅坐像)이며, 뒤쪽에는 일월병풍도(日月屛風圖)가 둘러져 있다.


이 상은 전체적인 형식에 있어서 석지(石芝)식이지만,

정성스럽지 못한 수염처리, 곤룡포의 용무늬와 견보(肩補)의 불명료한 외곽선 묘사,

기계적인 의습 처리, 일월병풍도의 조야한 시채(施彩) 등 기법 면에서는

석지필(石芝筆)로 보기에는 완성도가 떨어진다.

특히 왼손은 손가락이 뒤집혀진 모습이어서

석지필의 다른 초상화에서 보이는 손의 완벽한 표현기교와는 차이를 보여

다른 협력자의 솜씨가 가해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림 윗부분에 ‘광무황제의 49세 때의 모습(光武皇帝四十九歲御容)’이라고 적혀 있는 것은

채용신이 1901년에 제작한 고종 어진의 초본을 본으로 삼았기 때문인 것으로 여겨진다.


** 光武皇帝四十九歲御容

광무황제 49세 때의 모습이다.


** 호패 - 壬子生甲子元年登國

임자년에 태어나 갑자원년에 임금 자리에 오르다.

 

 

*** 고종 (高宗, 1852-1919, 재위: 1864-1907)

 

조선의 제 26대 임금이자 대한제국의 광무황제(光武皇帝)이다.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의 둘째아들이며,

어머니는 여흥부대부인 민씨(驪興府大夫人 閔氏)이다.

본명은 재황(載晃), 아명은 명복(命福), 자는 성림(聖臨), 호는 주연(珠淵)이다.

 

1863년에 12세의 나이로 철종(哲宗)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고 1873년에 친정을 시작하였다.

1897년에는 국호를 대한제국(大韓帝國), 연호를 광무(光武)라 정하고 황제로 즉위하였으며,

1907년에 황태자인 순종(純宗)에게 양위하고 태황제(太皇帝)가 되었다.


 

1852년          운현궁에서 출생.

1863년(12세)  조선 제26대 임금으로 즉위.

1873년(22세)  친정선포.

1876년(25세)  일본과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 체결. 수신사(修信使) 파견.

1881년(30세)  일본에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 파견. 청(淸)에 영선사(營繕司) 파견.

1882년(31세)  미국과의 수호조약 체결을 시초로 구미 각국과 수교.

1894년(43세)  갑오개혁(甲午改革) 시행.

1896년(45세)  아관파천(俄館播遷) 단행.

1897년(46세)  대한제국(大韓帝國) 수립을 선포하고 황제로 즉위.

1907년(56세)  헤이그 특사 파견이 발단이 되어 일본의 압력으로 황태자(순종)에게 양위.

1919년(68세)  1월 29일 덕수궁에서 세상을 떠남.

 

 

        

       

 


 

초상화를 그린 화가들



◆ 이한철(李漢喆, 1812-1893 이후)


조선말기 화원(畵員)으로 본관은 안산(安山)이며 자는 자상(子常),

호는 희원(希園, 喜園) 또는 송석(松石)이다. 화원(畵員)이었던 이의양(李義養, 1768- ? )의 아들이며,

1840년부터 1872년까지 32년간 규장각의 자비대령화원(差備待令畵員)으로 활동했다.

  

일찍부터 그림실력을 인정받아 19세인 1830년에 효명세자 장례 예장도감에 참여했으며,

1846년에는 헌종(憲宗) 어진도사(御眞圖寫)1)의 주관화사(主管畵師)로 활약하였다.

1852년에는 철종어진도사에, 1861년 철종어진 원유관본(遠遊冠本) 도사(圖寫)에,

그리고 1872년 고종어진도사에 참여하는 등

직업화가로서 최고의 영예라 할 수 있는 어진제작에 여러 차례 참여하면서

조선말기 최고의 어진화사로서 명성을 날렸다.


그는 김정희(金正喜)의 화평(畵評)을 통하여 그림지도를 받기도 하였는데, 그의 그림에 대하여

김정희는 비록 출진(出塵)의 상(想)이 모자라나 초초(楚楚)하여 풍치가 있다고 하였으며

또 묵법(墨法)이 몸에 익어있다고 하였다.

대표작으로 보물 제547호로 지정된 〈김정희 영정〉과

〈방화수류도(訪華隨柳圖)〉 · 〈의암관수도(倚巖觀水圖)〉 · 〈추림독서도(秋林讀書圖)〉 등이 있다.



◆ 유숙(劉淑, 1827-1873)

  

본관은 한양(漢陽)으로 자는 선영(善永) 또는 야군(野君)이며, 호는 혜산(蕙山)이다.

도화서(圖畵署) 화원으로 사과 벼슬을 역임하였으며,

1853년부터 1872년까지 자비대령화원(差備待令畵員)으로 활동했다.

1852년과 1861년에 철종어진(哲宗御眞) 제작에 참여하였으며,

1872년에는 고종어진도사(高宗御眞圖寫)의 수종화사(隨從畵師)로 종사하였다.

《예림갑을록(藝林甲乙錄)》에 의하면,

그는 전기(田琦) · 김수철(金秀哲) · 이한철(李漢喆) · 유재소(劉在韶) · 박인석(朴寅碩) 등

당대의 화가들과 교유하며 김정희(金正喜)의 지도를 받았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산수화와 함께 영모(翎毛) · 도석인물(道釋人物) · 풍속 등에도 능하였으며,

특히 풍속화는 그를 고비로 유행의 막을 내리게 된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무후대불도(武后大佛圖)〉 · 〈화외소거도(花外小車圖)〉 · 〈계산추색도(溪山秋色圖)〉

 · 〈미원장배석도(米元章拜石圖)〉 등이 있다.



◆ 이창옥(李昌鈺)

  

정확한 생몰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고종년간에 활동했던 화가이다.

1872년 태조어진(太祖御眞) 제작에 참여했으며,

1873년부터 1879년까지 자비대령화원(差備待令畵員)으로 활동했다.

이창옥의 현존하는 작품으로는

1880년에 이한철과 합작하여 그린 흥선대원군 61세 초상화 2점이 남아 있는데,

얼굴 부분은 이한철이 그리고 몸체 부분은 이창옥이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 채용신(蔡龍臣, 1850-1941)

  

초명은 동근(東根)이며, 호는 석지(石芝) · 석강(石江) · 정산(定山)이다.

초상화, 화조화, 인물화 등을 잘 그린 화가로 60여 점의 초상화를 비롯하여 10여 점의 작품을 남겼다.

벼슬은 칠곡군수와 정산군수를 역임한 뒤 종2품관까지 지냈다.

채용신 화법의 특징은 극세필을 사용하여 얼굴의 육리문(肉理文: 살결문양) 묘사에 주력한 점,

많은 필선을 사용하여 요철, 원근, 명암 등을 표현한 점,

정장관복초상(正裝官服肖像)인 경우 주인공의 오른쪽 어깨 위 등쪽으로 두 개의 볼록한 주름 같은

모습(단추)이 있는 점, 콧대 등 얼굴의 뼈가 나온 부분을 하얗게 칠하여 백광(白光)을 주는 점,

주인공이 깔고 앉아 있는 화문석의 문양과 각도가 시대적으로 변한 점 등이라 하겠다.


고종의 어진(御眞)을 비롯하여

이하응(李昰應) · 최익현(崔益鉉) · 김영상(金永相) · 전우(田愚) · 황현(黃玹) · 최치원(崔致遠) 등의 초상과

〈고종대한제국동가도(高宗大韓帝國動駕圖)〉 등을 그렸으며,

〈운낭자이십칠세상(雲娘子二十七歲像)〉 · 〈황장길부인상(黃長吉夫人像)〉 등 여인상도 그렸다.



◆ 김은호(金殷鎬, 1892-1979)

  

초명은 양은(良殷), 호는 이당(以堂)이다.

1912년 8월 서울의 서화미술회(書畵美術會) 화과(畵科)에 입학하여

조석진(趙錫晉) · 안중식(安仲植)의 제자로 전통회화의 여러 기법을 배웠다.

1915년에 화과(畵科)과정을 졸업하고, 1917년에는 서과(書科)과정도 수료하였다.

그동안 창덕궁의 하명(下命)으로 순종의 반신상 어용(御容)을 그렸고,

시천교(侍天敎)측의 의뢰로 동학의 교조 최제우, 2세교주 최시형,

그리고 당시 시천교를 이끌던 김연국(金演局)의 전신좌상을 제작하였다.

1918년 서화협회가 창립되자 정회원이 되었으며,

1919년 3 · 1운동에 가담, 등사판 《독립신문》을 배포하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5개월간 복역하기도 하였다.

 

1920년에는 창덕궁 대조전의 벽화 〈백학도(白鶴圖)〉를 그렸다.

1921년 이후에는 서화협회전람회(약칭 協展)에 계속 출품하였으며,

조선미술전람회(약칭 鮮展) 동양화부에서 입상과 특선을 거듭하였다.

그의 작품은 새로운 표현감각의 세필채색화로

부드럽고 섬세한 필선과 맑고 우아한 채색의 사실적인 미인도(美人圖), 꽃, 새 등의 화제를

주로 다루었으나, 전통형식의 신선도 등에서도 독보적 경지를 펼쳤다.

1924년부터 고려미술원(高麗美術院)에서 후진을 지도하다가

1925년 동경에 건너가 3년간 머물면서 자신의 예술기량을 더욱 연마하고 시야도 넓혔다.

동경에서는 당시 가장 권위 있던 제국미술원전람회(약칭 帝展)에 입선하여 주목을 끌었다.

1928년에는 창덕궁 선원전에 봉안된 순종어진(純宗御眞)과 태조 · 세조의 어진을 봉사(奉寫)하였다.

 

1933년에는 서화협회 간사가 되었고,

1936년에는 양화가 박광진(朴廣鎭), 조각가 김복진(金復鎭)과 힘을 합쳐

조선미술원(朝鮮美術院)을 설립하고, 한때 후진 양성을 도모하였다.

 

그밖에도 1930년 이전부터 자신의 낙청헌(絡靑軒) 화실에서 독자적으로 문하생을 배출하였다.

백윤문(白潤文) · 김기창(金基昶) · 장우성(張遇聖) · 이유태(李惟台) · 조중현(趙重顯) · 김화경(金華慶) ·

안동숙(安東淑) 등이 그때 배운 제자들이다.

1937년부터는 조선미술전람회 초대작가 위치에 올랐고,

1939년에는 남원의 춘향사(春香祠)를 위하여 〈춘향상〉을 그렸다.

(당시의 그림은 6 · 25사변 중에 소실되었고, 현재 영정은 그 뒤에 다시 그린 것이다.)

 

1945년 조국광복 이후에는 대한민국미술전람회(약칭 國展) 초대작가 및 심사위원,

수도여자사범대학 명예교수 등을 역임했다.

 

한편, 1950년에 제작한 〈이충무공상(李忠武公像)〉의 모대본좌상(帽帶本坐像)은

순천 충무사(忠武祠)에, 갑주본입상(甲胄本立像)은 한산도 제승당(制勝堂)에 각각 봉안되었으며,

정부에 의해 공인영정(公認影幀)으로 인증되었다.

그 뒤 장수(長水)와 진주 촉석루(矗石樓) 옆의 논개사당(論介祠堂)에 봉안된 〈의기논개상(義妓論介像)〉,

강릉 오죽헌(烏竹軒)의 〈신사임당상(申師任堂像)〉과 〈이이상(李珥像)〉,

밀양 영남루(嶺南樓)의 〈아랑상(阿娘像)〉, 그밖에 서울 안중근의사기념관의 영정과,

전주 이영남장군사당(李英男將軍祠堂)의 영정 등 역사상의 주요인물상을 무수히 제작하였다.

 

미술창작과 후진양성에 끼친 공로로 1962년 문화훈장대통령장을 받았으며,

1965년에 3 · 1문화상, 1968년에 예술원상을 각각 수상하였다. 자서전적 저서로 《서화백년》이 있다.

대표작은 〈백학도〉(1920) · 〈춘향상〉(1960년 재제작) · 〈해학(海鶴)〉(1965) ·

〈백모란(白牡丹)〉(1968) 등이 있다.



◆ 자비대령화원(差備待令畵員)

  

조선시대 예조(禮曺)에 속해 있는 도화서 소속의 화원(畵員)들 가운데

어제(御題) 등서(謄書)와 인찰(印札) 등을 전담시키기 위해 특별히 차출된 화원으로,

본래의 의미는 ‘임시로 차출(差出)하여 임금의 명령에 대기하는 화원’이다.

자비대령화원 제도는 영조대에 임시로 운영되던 것을

정조가 1783년 창덕궁의 규장각에 정식으로 직제를 만들었고

이후 조선말기의 고종대까지 약 100여 년간 지속되었다.


공식적인 인원은 10명으로 도화서 화원들 가운에 3차에 걸친 시험을 통해 선발하였다.

자비대령화원의 일차적인 핵심 업무는 어제 등서에 필요한 인찰 작업이었으나

왕명으로 편찬되는 규장각 도서의 도설(圖說), 어진(御眞) 도사(圖寫) 등 일반 도화서 화원들에 비해

국왕 주변의 보다 중요한 업무를 담당했다.

때문에 이들은 도화서 화원으로서의 권위와 기회는 그대로 보장받으면서도

관직과 녹봉 면에서 일반 도화서 화원들보다 특별한 대우를 받았다.

 

 

 
 
 
- 아름다운 사람 / 나윤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