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더듬어보고(전시)

<흥선대원군과 운현궁사람들> 이준용 ===> 이우

Gijuzzang Dream 2007. 11. 4. 21:16

 

 

■   <매일신보> 1917년 3월 25일자

 6세의 이우(李鍝), 1917년에 운현궁의 새 주인이 되다

 

 

△ 고 이준공 전하 최근의 초상

이는 작년에 평양화가 김관호(金觀鎬, 1889~1958)씨의 손으로 그리운 바 전하의 초상인데

전하께서는 항상 서재에 걸어두시고 보시던 사랑하시는 초상화이더라.

 

 

 이준공 후사(李埈公 後嗣)의 어내의(御內議)

   --- 이강공 제2공자로 결정되실 듯

 

이준공 전하는 전취부인 홍씨 재세시에 공자 한 분을 낳으신 일이 있었으나 즉시 돌아가시고,

그 뒤 금일까지 공자의 탄생이 없으셨으므로,

이번 훙거하신 뒤에도 후사를 이으실 공자가 계시지 아니하신 고로,

궁가에서도 이에 대하여 협의한 일이 있었다 하며, 양구에서 처분이 계셨다 함을 배문하고,

24일 오후 공전하의 근친되는 씨를 방문한즉 씨는 위연히 탄식하며,

 

"이준공 전하의 훙거에 대하여 자기는 다시 무슨 감개를 말할 수 없노라.

기위 대사를 당한 뒤에는 전하의 장례와 함께 후사 문제가 제일 중대한 고로,

우리 근친이 운현에 모여 공비전하를 뫼시고 협의도 하였고 양궁의 특별하신 처분을 물어서,

이강공 전하께서 제2공자를 이준공 전하의 양사자로 출계시키시기로 내정하옵신 일이라.

그러나 이는 다만 내정에 지나지 못하는 일이오, 아직 상당한 절차도 마치기 전인즉

금일에 이것을 공번되이 발표된 것이 아님은 물론이라.

 

이강공 전하의 제이공자는 금년 6세이며, 함자는 우(鍝)자인 줄로 들었으며,

지금 경성유치원에 통학하는 중이라.

공전하의 후사로 결정되어 발표한 이상에는 상복을 입으실 것은 물론이오,

다만 아직 8세 이전인 고로,  

제목 같은 것은 여막에나 소교 안에 준비만 하여놓을까 하고 의론하였노라.

 

장례일에는 상주로 수상케 할 예정이오.

아직은 그대로 이강공저에 있을는지 알 수 없지만은,

차차 공식으로 발표도 되고 장례를 마친 이후에는

운현궁에 와서 공비전하의 슬하에서 양육하시도록 될 줄로 생각하노라.

 

그러나 금년 6세의 어린 공자인 고로 상주로 제례를 집행할 수는 도저히 능치 못하여

삼년상은 대전관 네 사람을 정하여 집상케 할 것이오,

대원군의 봉사는 공 전하의 재종되는 이달용(李達鎔)씨가

공자의 장성하기까지 섭사하게 될 줄로 생각하노라"  말하더라.

 

 

■   <매일신보> 1917년 3월 29일자

운현궁의 어린 주인 / 주임선생의 칭찬


 

고 이준공의 후사로 내정된 이강공 제이공자 우(鍝)씨는 지금 경성유치원에 다니는 중인데,

요사이는 운현궁에 솔양될 문제가 내정되어 이준공의 장례안인고로

유치원에 오지 아니하고 이강공저에 있어 28일의 졸업식에 그 영리한 얼굴을 보지 못하였더라.

 

유치원에서는 경구 선생으로부터 동무 아해까지 "적은 아씨 적은 아씨" 하며

적은 아씨도 선생을 사모하며 동무와 정숙하기가 아주 평민적이라.

 

이 적은 아씨에 대하여 유치원의 주임되는 경구 선생은 말하되

"이강공 제이공자는 참으로 날 나신 아씨올시다.

이 유치원에는 작년 4월부터 다니시다가

7월부터 연령이 차서 원아로 여기서 보육을 받으시는데

어떻게 영민하신지 벌써 항용 가정에서 쓰는 일본말을 반이나 알으셨습니다.

그 재주이라든지 위엄아리든지 그 풍채이라든지

한 군데나 나무랄 수 없는 훌륭한 귀공자이시지요."

 

 

■ <매일신보> 1917년 5월 29일자

  이준공가(李埈公家)에 영석영전(榮錫永傳)

  공비 전하는 비상히 기꺼하심


 <매일신보> 1917년 4월 5일자에 소개된 이우(李鍝)의 모습이다.

 설명문에는 "오늘 장식에 상주로 수상한게 된 공자 우씨"라고 되어 있다.


 

이준공 훙거후에 후사가 없으신 까닭으로

이강공 제2공자 우(鍝) 솔시를 양하시기로 양공가 사이에 의론이 결정되어

장의 장시에 임시상주로 주장하신 일도 이미 자세히 보한 바와 같거니와

사가와 달라 황족의 예우를 받는 공가의 일인 고로

후사를 정함에는 천황 폐하의 칙허를 묻지 아니하면 안되겠는 고로

기간 이준공가로부터는 절차를 밟아서 칙허를 품청중이더니

28일의 본사 동경 전보는

공자로써 이준공의 후사됨을 칙허하시고 영화로운 지위를 잇게하셨다 한즉

이로써 후사가 끊이려 하던 운현궁은 다시 영구히 계통을 계속하시게 되었더라.

 

이에 대하여 공자의 요사이 동정을 듣자온즉

공자께는 매일 이강공저에서 기거하시며 탑골공원 뒤의 경성유치원에 다니시는데

늙은 시녀가 항상 뫼시고 보호하여 드리며

유치원에서 노시는 여가에는 매일 혹 간일하여 운현궁에를 가시는데

이준공비 전하께서는 비상히 사랑하시며

또한 천성이 영리하신 공자께서는 비전하께 "어머니 어머니"하시며 매우 따르시는 고로

비전하께서는 요사이 공자로 인하여 매우 비희를 위로하시는데

이번에 아주 후사문제가 칙허되었으므로 더욱이 기꺼하실 줄로 생각한다고 모씨는 말하더라.

 

 

■ <매일신보> 1917년 5월 30일자

수운(愁雲)으로부터 환휘(歡輝)에 후사가 경정되신 운현궁의 희색,

배낭지고 총대메고 병대놀이하시는 이우 공자



 

수운에 잠겨 잇던 운현궁도

이번에 후사로 정하신 이우 공자가 영석을 잇게 되시는 기꺼움에 새로이 영광이 빛난다.

28일의 전보로 이번에 성지로써 이강공 제2공자로써 이준공 계자로 정하심을 보하매

경운동의 운현궁에서는 비전하를 위시하여 일문이 통히 희색이오,

관훈동의 의화궁에서도 기꺼운 기운이 넘치는 듯하더라.

 

운현궁에서는 흑기 사무관도 금일의 기꺼움에 웃음을 머금고 이야기하되

"새로이 결정된 이준공 전하의 계자는 지난번의 장의에도 상주가 되셔서 태도가 훌륭하셨는데

나이는 금년 6세이시나 매우 침착하고 영리하신 성질이올시다.

평시는 의화궁 안에서 형님되시는 용길 공자와 함께 어머니 전하와 유모 등에게 보육을 받으시며

학문의 편은 위주하여 경구 여사의 경성유치원을 위시하여

가정의 교사로 굴장씨와 정촉탁이 뫼시고 지내입니다.

 

의화궁에서는 요사히 일출소학교에 통학하시는 형님과 같이

각각 처소도 있고 공부 처소도 있지만은 아직은 운동을 위주하여 시키십니다.

그리고 작금은 유치원의 시간이 닥치면 즉시 운현궁에 오셔서

이준공비 전하를 "어머니, 어머니" 하고 부르면서 친생자와 다름없이 따르십니다.

일전에도 형님이 병대놀이 하시는 것을 보시고 나도 총을 가지고 싶다고 하셔서

얼른 어여쁜 총을 사가지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요사이는 또 배낭을 등에 지고 총을 메이고 병대놀음을 하십니다.

매우 활발하신 성질로 어떠한 때는 형님되시는 공자보다도 더욱 기운이 차게 보입니다." ......

 

또 경성유치원 경구정자 여사의 말을 들은즉

"이우 공자는 금년에 6세인 만 5세이신데, 매우 기운차고 침착하신 어른으로

유치원에 처음 들어오셔서는 교육하여 드리기에 매우 애를 썼습니다.

우리 유치원에서 일체히 궁녀의 따라다니는 것을 거절하고

다른 귀족의 자제와 같이 교육하여 드리는데

지금은 국어도 일상에 쓰는 말로 반분은 아시고 창가도 매우 잘하십니다.

여기는 처음에 형님되시는 용길 공자가 공부하셨는고로

제2공자는 세살 때부터 여기를 다니시며 형님과 같이 배우셨습니다.

평생에 매우 영리하시고 남에게는 결코 지지 아니하시려 하여

제1공자의 의복이 조금 길면 자기도 그와 같이 하시는 등 매우 굳세인 성미이시지만은

어린 아해들은 매우 정숙스러웁게 잘 보아주십니다. ......"
 

 

■  <매일신보> 1917년 5월 31일자

 

총명(聰明)한 이공자(二公子),

형은(이건公) 인자하고 아우(이우公)는 활발하심, 재미있는 여러 가지 사실

 

이강공 전하의 제1공자는 그 동안 경성유치원을 졸업하시고 진고개 일출소학교에 입학하신 일과

아직도 그 유치원에서 공부하시는 제2공자는 일전에 고 이준공 전하의 사자가 되시기로

발포된 일은 모두 이미 본보에 게재한 바어니와

이제 그 두 공자를 여러 해 동안 모시어 훈도의 책임을 맡은 굴장 촉탁의 이야기를 들은즉

두 공자는 모두 총명혜힐하신 천질이 보통 아해들의 미칠 바 아니며

두 공자의 성질은 서로 다른 점이 있어

 

제1공자는 매사를 주의하시는 것과 동정심이 많으신 터이라.

공자는 금년 9세인데 수년 전 내가 운동 차로 공자를 모시고 전차로 청량리를 향할새

전차궤도 안에 한 마리의 개가 있는 것을 보시고 급히 소리 지르시며

저 개가 치여 죽겠으니 어서 저 개를 쫓으라고 발을 구르며 애를 쓰심으로

그 옆에 있던 사람이 그 개를 쫓아버렸더니 공자는 비상히 만족하여 하셨으며

또 하루는 또한 전차로 서대문 밖을 향할새

한 명의 지게군이 전차궤도 안에 서 있음을 보시고 위태하다고 무한히 애를 쓰시다가

필경은 전차에서 뛰어내려 그 지게군을 끌어내이시니

지게군은 염문도 모르고 벙글벙글 웃으며 간 일도 있었고

혹 날이 매우 추운 때에 내가 어디를 갔다가 오면

감기가 들 터이니 어서 더운 차를 마시라고 지성으로 권하시는 등

온갖 일에 동정심과 주의하는 힘이 많으시며

학과 중에 즐기시는 것은 도화이오,

 

제2공자께서는 형님과 매우 달라 호걸의 기상이 있으며 사물을 이해하시는 힘이 강하여

이제 6세에 지나지 못하시는 터이지만은 그 과단하신 행동이

이따금 우리들로 하여금 크게 놀라게 하시나니

 

전례를 들어 말하면

이 공자는 여간하여서는 남의 말을 듣지 아니하는 고집이 있으나 한번 깨달으면 곧 실행하시나니

작년 5세시에 일찍이 형님되시는 제1공자와 한 가지 교실 칠판 위에 그림을 그릴새

칠판 한가운데에 획을 긋고 각각 한 부분씩 맡아서 그리게 하나

항상 그 맡은 부분을 지나 형님의 부분까지 침로하므로 교사와 및 우리는 그리하지 말라고 권하나

처음에는 잘 듣지 아니하다가 여러 말하면 스스로 머리를 숙이고 한참 생각하다가

분필을 집어던지고 선생의 앞에 엎디어 잘못하였습니다 하며 곧 사과하신 일도 있었고

하루는 마차로 용산강변에 나아가 형제분이 낚시질을 하여 생선을 잡았는데

두 공자가 매우 좋아하여 각각 들고 오고자 하나

마침 생선 담을 그릇을 하나밖에 가지지 아니하였으므로 제2공자가 먼저 이것을 가지고 갈새

제1공자도 또한 손수 가지고 가고자 하시는지라,

우리는 이에 그것을 형님께 드리라고 권한즉

또한 한참 생각하다가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면서

그러면 이것은 형님의 것이라고 마차에 먼저 타고 있는 형님께 드린 일도 있으며

 

성질은 극히 활발하여 어느 날은 비가 심히 오므로 교실로부터 거실로 들어가실새

제1공자는 시녀에게 업히어 가셨으나 제2공자는 나는 업는 것이 싫다고 걸어서 가시는 등

감탄할 만한 곳이 많으며 이 공자가 이번 운현궁의 주인이 되신 것은

운현궁을 위하여 크게 치하할 만한 일이라고 말하더라.

 

 

■  <매일신보> 1918년 5월 1일자

이당 김은호가 그린 이준(李埈=이준용) 초상화

 



이당 김은호가 그린 앞서 소개된 이준용의 초상화는 김관호가 생전에 그린 초상화에 비해, 

이준용이 죽은 뒤에 사진을 보고 다시 그려낸 것이 다르다.

 

고 이준공의 초상 - 김은호 畵

운현궁 고 이준공의 초상을 요사이 이당 김은호(金殷鎬)씨로 하여금 그리게 하여

사진과 같이 훌륭하게 그려내었는데,

운현궁에서는 그 초상화를 보고 훙거한 어른을 면담함과 다름없다 하여

가족과 기타 근시하던 사람들까지 눈물을 흘렸으며

장차 이 화본을 사우에 봉안하여 영구히 존안을 대함과 같이 뵈올 터이라 하며

김은호씨의 교묘한 화법을 막불칭찬하더라.

 

- 출처 : 2006.8.19, 이순우 다음카페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