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끼며(시,서,화)

그림으로 망국을 개탄한 어진화사, 채용신

Gijuzzang Dream 2008. 6. 30. 19:14

 

 

국운이 스러져간 19세기말,

혼란한 정치 · 사회적 상황으로 문화적 역량 또한 저하되어

조선의 미술은 양식과 기법 면에서 퇴락하는 경향을 보인다.

 

‘초상화’ 또한 사실성을 확보하면서도 절제된 단아함을 보여주었던 조선후기의 초상화에서

그 정점에 달하였다가 조선말에 이르러 점차 쇠락해가고 만다.

하지만 스러져가는 촛불의 마지막 타오름처럼, 구한말 채용신이란 전문 초상화가가 등장하여

당대 나름의 독자적 화풍을 구축하며 조선시대 초상화사의 마지막을 장식하였다.


석지(石芝) 채용신(蔡龍臣, 1850~1941)은 1886년 37세에 무과를 통해 관직을 시작하였다.

그 후 초상화에 뛰어난 그의 명성이 조정대신들에게 알려져

1900년 2월, 태조 이성계의 어진 모사 시 천거를 받아 주관화사로 발탁,

궁중에서 어진화사로 활발한 활약상을 보인다.

 

태조어진 봉안이후 같은 해인 8월, 화재로 선원전에 모신 역대 왕의 어진이 불에 타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리하여 채용신은 태조를 비롯한 숙종, 영조, 정조, 순조, 익조, 헌종의 어진을 모사하였으며

또한 고종의 어진과 12정승의 영정을 그렸다.

고종은 그에게 각종 배려와 포상을 하고 친히 ‘석강(石江)’이란 호를 내려주기도 하였다.


현전하는 채용신筆 초상화 가운데 가장 높은 화격을 보여주는 작품들은

주로 1910년 전후에 제작된 것으로,

이들 초상화의 대상인물 대부분이 ‘우국지사(憂國之士)’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을사조약과 한일합방으로 조선이 일본에 병합되어가는 암울한 시대적 상황을 지켜보면서

채용신은 이에 저항한 우국지사들의 초상화를 그림으로써 시대의 현실에 대항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채용신이 남긴 이들의 초상화 덕분에 100여 년이 지난 현재 우리는

역사 속 여러 인물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으며,

그의 뛰어난 필력을 통해 우국지사들의 굳센 기개를 엿볼 수 있다.

 

 

그가 남긴 우국지사(憂國之士) 들의 초상화

 

채용신은 1904년 정산군수에 임명되었을 때 최익현을 만나 교류하였다.

면암 최익현(勉庵 崔益鉉, 1833-1906)은 강직한 성품의 전통성리학자(巨儒)로,

대원군의 정책을 비판하는 여러 상소를 올린 것으로 유명하지만,

그보다도 적극적으로 일본에 저항하여 후세의 귀감이 된 인물이었다.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 단행 이후 항일척사운동에 앞장섰으며,

을사조약 체결 후에는 의병활동을 전개하다 체포되어 대마도에 유배되고 단식 중 사망하였다.

면암 최익현선생초상(73세상) - 관복(당상관 흉배)본

 

 

좌측 하단의

“勉庵崔先生七十四歲像 毛冠本” 

"면암최치원선생 74세상으로 털모자본"

“乙巳孟春上澣定山郡守蔡龍臣圖寫”

“을사년(1905) 1월 상순에 정산군수로 있던 채용신이 그리다”라고 적힌 글을 통해

정산군수 시절 최익현과 교류하던 당시, 그의 초상을 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최익현 초상>  51.5 x 41.5 cm

 

이 초상은 털모자를 쓰고 심의를 입고서 두 팔을 아래로 가지런히 모으고 있는 반신상인데,

털모자(毛冠)를 쓰고 있는 점이 이채롭다.

심의는 그가 위정척사에 노력한 전통 성리학자임을 잘 전해주고
털모자(毛冠)은 의병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던 최익현의 애국적 풍모를 잘 보여준다.

심의(深衣)는 안에 두터운 솜을 넣은 듯 부풀려진 모습을 하였는데 털모자와 함께

그려진 시기가 혹한의 겨울임을 암시해준다.

얼굴안면에 명암을 부여하기 위해 거듭 잇대어 세밀한 붓질을 반복하여 피부결을 표현하고

다시 몇 개의 갈색선으로 섬세하게 주름진 부위를 묘사하여 실체감을 살려내었다.

특유의 화필이 무수한 붓놀림을 통하여 얼굴은 면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기본적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다.

따라서 마치 살아 있는 얼굴을 대하는 듯한 실재감이 느껴진다.

의복 처리 및 옷주름 역시 선이 아닌 면으로 처리함으로써 음영의 구사를 통해

질감이 느껴질 정도로 실물의 현실감(실체감)을 그 굴곡을 나타냈다.

또한 화면의 뒷배경도 어둡게 처리하여 3차원적 공간성을 인식하고 시각화하였음을 알 수 있다.

 

 

입을 굳게 다물고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최익현 초상 - 보물 제 1510호>은

강직하면서도 굳센 기개를 지닌 노학자의 꼿꼿한 품성을 잘 담아내고 있다.

채용신의 초기 작품에서 풍기는 조심스럽고 근실한 화법과 소박한 화격이

최익현의 우국지사적인 분위기를 더욱 잘 살려주고 있다.
  

 

한편, <황현 초상>은 대한제국기 전후 초상화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탁월한 묘사력으로 채용신의 여러 초상화 중에서도 백미로 꼽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황현이 1910년 한일합병으로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자 통분하여

절명수 4수를 남기고 자결한 다음해,

개화파 서화가이자 한국 최초의 사진가인 해강 김규진의 천연당 사진관에서 찍은 사진을 토대로 그린 것.

초상화 제작에 있어 사진을 참조하여 그리는 새로운 경향이 등장하였음이 주목된다.

 

그런데 채용신은 사진을 참조하면서도 이를 변용하여 사진보다 더 사실적으로 황현을 재현했으며,

강직하면서도 꼬장꼬장한 황현의 기상까지 표출해내고 있다.

그는 유학자로서 황현의 모습을 강조하고 사진 속 구도상의 답답함을 없애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했다.

두루마리에 갓을 쓴 모습은 심의에 정자관을 입은 모습으로,

양손에 쥐었던 부채와 책의 위치는 새롭게 변형해 변화를 주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 작품은 채용신의 정치한 필력과 사실적 묘사력이 돋보이는데

능수능란하게 음영이 구사된 의복의 표현은 유화 그림을 보는 듯 재질감이 살아 있으며,

세밀한 붓질로 이루어진 얼굴의 묘사는 마치 살결의 촉감이 느껴질 정도로 치밀하다.

 

 

 

이렇게 그려진 <황현초상>은

황현의 학자적인 풍모와 함께 쇠락해가는 조국을 바라보며

끝내 망국의 책임을 통감하며 자결한 애국지사적 면모를 더욱 부각시켜준다.

- 손명희 문화재청 동산문화재과 학예연구사

- 문화재청, 월간문화재사랑, 2008-06-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