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끼며(시,서,화)

청노새 타고 산천 누비는 조선의 산악인 - 정란

Gijuzzang Dream 2008. 6. 30. 20:50

 

 


20세기 이전에 여행가로 손꼽을 만한 사람에는 누가 있을까?

대부분 김정호 같은 지도학자를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그도 지도를 제작하기 위한 목적에서 여행을 한 사람이다.

 

진정으로 여행을 자신의 삶으로 생각하고 즐긴 여행가는 누구일까?

18세기 후반에 창해일사(滄海逸士)란 호를 사용한 정란(鄭瀾, 1725~1791)이 바로 그런 인물이다.

종(縱)으로는 백두산에서 한라산까지, 횡(橫)으로는 대동강에서 금강산까지,

산천에 자신의 발자국을 남기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천생 여행가였다.


정란은 경상도 군위 사람으로 동래 정씨 명문가 출신이었다.

고조부 이래로 큰 벼슬을 하지는 못했지만 사대부가의 지체를 이어간 가문 출신이었다.

이런 사대부가 젊은이가 전국토를 샅샅이 뒤지는 여행가가 된 동기는 무엇일까?

 

그도 처음에는 다른 사대부들처럼 경서와 문학 공부에 전념하였다.

스승은 당시 경상도가 배출한 최고의 문사인 신유한(申維翰)이었다.

그의 문하에서 문학을 공부하던 정란은 나이 서른에 접어들자 공부를 접고 여행길을 떠났다.

스승 신유한이 죽은 지 3년 뒤의 일이다.


정란은 세속적 성공에 관심이 없었고, 주어진 틀에 안착하여 살기를 거부했다.

기질적으로 자유분방한 정신의 소유자인 그는

온통 과거에 눈이 멀고, 이욕(利慾)에 이전투구(泥田鬪狗)하는 악착같은 세상을 떠나

드넓은 세계를 동경하였다. 여행가로서의 삶은 그에게 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당시 누구도 선택하지 않은 인생이었다.

사람들은 제 둥지만 돌아보는 새와 같이
떠나려다가도 다시 망설이며 빙빙 돌건만
그대는 절세(絶世)의 용맹함 지녀서
단칼에 세상에 묵인 그물 끊고 벗어났네.

수만의 베개 위에서 함께 코를 골며
한창 부귀를 꿈꾸는 사람들,
그대 등반한단 말을 듣고선
되레 흉보네. “무리와 다른 짓을 하는군.”

이용휴(李用休)가 백두산으로 떠나는 정란을 배웅하며 써 준 연작시의 일부다.

 

부귀와 공명을 위해 주어진 인생을 꾸려가는 것이 조선조 선비의 길이었지만

정란의 인생목표는 달랐다. 정란에게 여행은 무엇이었을까?

 

채제공은 여행에 몰두한 정란을 두고 “천하 만물 어떠한 것도 그의 즐거움과 바꿀 수 없다.”고 평했다.

여행의 즐거움! 그것이 처자를 버리고, 벼슬도 버린 채 전국을 주유(周遊)한 동기이다.

 


타박타닥 먼 길 오르는 세 개의 그림자

 

정란은 서른 살부터 20여 년간

조선 팔도를 구석구석 탐방했다.

남으로는 낙동강, 덕유산, 속리산, 월출산, 지리산을 엿보고,

서로는 대동강을 굽어보고,

동으로는 태백산과 소백산, 금강산을 올랐다. 지리산이나 금강산을 그저 앞마당으로 간주할 만큼 조선의 산천을 돌아다녔다.

 

그가 여행한 행적의 백미는 백두산과 한라산의 등반이다.

쉰다섯 되던 해, 정란은 백두산과 한라산 등반계획을 세워 등반하였다.

당시 백두산은 오지 중의 오지로 등산이 아니라 탐험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정도였다.

개인의 의욕만으로는 오를 수 없는 산이었다.

 

백두산과 한라산 등반은 여행가로서 그의 삶을 완성하는 목표였다.

집을 나선 창해가 동반한 것은 청노새 한 마리, 어린 종 한 명, 보따리 하나, 이불 한 채였다.

18세기에는 명산을 등반하는 열풍이 불어 등산하는 인구가 많이 늘었다.

그들의 등산은 호사롭고 떠들썩하기 그지없었다. 친구를 불러 모으고, 때로는 기생과 악공까지

대동하며, 말을 타거나 남여뚜껑 없는 가마를 타고 산을 올랐다.

그러나 정란은 단출한 여장으로 고독하게 자연과 대면했다.

 

남경희의 <정창해전>에는 정란이 전국을 여행할 때 타고 다닌 청노새 이야기가 등장한다.

이 충직한 청노새는 주인을 태우고 금강산을 오르고 관동팔경을 두루 구경하며 내려오다가

그만 삼척 땅에서 병들어 죽었다. 정란은 가던 걸음을 멈추고 길가에 묻고 제문을 지어 애도했다.

그 제문은 처절하여 읽을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의 여정을 동반한 벗 중의 벗이 바로 이 청노새였으니 그럴 법도 하다.

사람들은 청노새가 죽어 묻힌 곳을 청려동(靑驢洞)이라 불렀다.


그의 쓸쓸하고 지루한 여행길을 함께 한 것은 청노새 한 마리와 종 한 명이었다.

야윈 청노새를 타고 다녔다는 사실에서 그의 여행의 멋을 엿볼 수 있다.

타박타박 먼 길을 걷는 세 개의 그림자가 눈에 선하다.

자동차로 순식간에 산 바로 밑, 절 코앞까지 들이닥치는, 오늘날 여행객의 행태와는 큰 차이가 있다.

 


가정까지 포기한 산수벽(山水癖)

 

정란은 여행가이지만 본래 시와 문장을 잘한 문인이었다.

그는 여행의 의미를 예술적으로 담는 일에도 주목하여 각지에서 산수유기를 썼고,

화가와 문장가들로부터 자신의 산행을 묘사한 그림과 글씨를 받았다.

 

그리고 썩어 없어지지 않는다는 뜻을 지닌 ‘불후첩(不朽帖)’ 이라는 이름을 달았다.

 

또한 그는 예술적 심성의 소유자였다.

그가 교유한 화가는 강세황, 최북, 김응환, 허필 등이었다.

 

화가 김홍도와 맺은 인연은 특별하다.

김홍도의 그림 가운데 대표작인 <단원도(檀園圖)>는 사실 정란을 위해 그린 그림이다.

서른 이후 정란이 본격적으로 여행에 빠지면서 그는

세속적 성공을 포기했을 뿐만 아니라 가정까지도 거의 버린 듯하다.

 

채제공(蔡濟恭)은 화첩을 들고 찾아온 정란을 평하여

“처자식을 버리고 명산대천을 여행하기를 좋아한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정란의 사돈인 조술도는 정란에게

“쓸쓸한 방에서 눈이 빠지게 기다리는 아내가 가슴을 치며 장탄식하고,

과부가 된 며느리가 벽을 등지고 몰래 한숨 쉬는 것을 생각하여”

빨리 돌아오라는 편지를 내기도 할 정도였다.

 

가정에 무책임한 정란을 대신한 사람은 외아들 정기동(鄭箕東, 1758~1775)이었다.

아들은 18세 소년 시절에 요절하였다.

소년으로 죽었으니 그에게 기록할 만한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다만 이용휴가 쓴 묘지명에 “슬프다! 산길에 사람의 발길 끊어지고 숲에 걸린 해가 저물어갈 때면

문에 기대어 아버지를 기다리는 아들의 모습이 떠오를 것이다.”라고 하였다.

가정을 돌보지 않으며 여행을 즐긴 정란의 삶은 시대를 앞서는 것이었다.

 

성대중은 한 가지 삽화를 들어 정란이 불후의 이름을 남길 것을 예언했다.

창해옹이 일찍이 내 집을 찾았는데 손님 가운데 옛일에 해박한 사람이 있어

그를 보고 내게 얼굴을 돌리며 말했다.

“자네는 이마두(利馬竇=마테오 리치)를 본 적이 있는가? 저 노인이 그와 흡사하네그려!”

 

그 손님은 한 번도 창해옹을 본 적이 없는 분인데도 창해를 그렇게 보았다.

창해옹은 그 말을 흔쾌히 받아들이며 좋아하였다.

이마두는 천하를 두루 구경하였고, 창해옹은 동국을 두루 구경하였다.

크고 작음에서 비록 차이가 있으나 두루 구경한 점은 같다. 그들의 모습이 비슷한 것이 마땅하다.

 

                  <참고>

                 신국빈(1724-1799)의 <태을암집(太乙菴集)>에는

                 ‘제정창해백두산도발(題鄭滄海白頭山圖跋)’이라는 글이 있는데,

                 여기에는 정란이 최북으로 하여금 <백두산도>를 그리게 했다는 내용도 보인다.

                 ". . . 창해 노인이 동으로 금강산에 노닐고 서로는 묘향산에 노닐며, 압록강에 이르러

                 북으로 백두산 정상에 올라, 우리나라와 북쪽의 황량한 땅을 굽어보고 길게 휘파람 불며

                 시를 짓고 돌아와서 七七 최북으로 하여금 그림을 그리게 하였으니,

                 아마도 기거하며 식사하는 중에라도 그 산을 접하고자 함이었다 . . . " 

 

                 성대중(1732-1812)은 <청성집(靑城集)> ‘서창해일사화첩후(서창해일사화첩후)’에서

                 정란이 여행가로 워낙 유명해서 “그가 바다를 바라보고 산에 들어가는 모습을 그린 그림”을

                 소장하고 자랑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적었다.

                 또 그의 얼굴이 당시 항간에 전하던 서양신부 <이마두상(利瑪竇像)>과 닮았으며,

                 눈썹이며 광대뼈가 늙을수록 기고(奇古)해 우사이인(羽士異人)같다고 했는데,

                 <단원도>에 보이는 인상이 과연 그러하다.


 

진실 여부는 판명하기 어렵지만

사람들은 정란의 풍모에서 마테오 리치와 같은 위대한 여행가의 모습을 찾아내었다.

정란은 여행에 인생을 바친 선비다.

온 나라 안의 어린아이들과 종들조차 그를 ‘창해선생’이라 불렀다고 한다.

현대적인 개념으로 보자면 여행가, 산악인이라 이름 지어 부를 만큼 열정적 산수벽의 소유자로

18세기 문화계에 한 마니아로 기억될 인물이다.

- 글·사진 : 안대회 성균관대 문과대학 한문학과 교수

- 문화재청, 월간문화재사랑, 2008-06-30

 

 

 

 

 

김홍도가 자신의 집 ‘단원(檀園)’을 그린 ‘단원도(135×78.5㎝)’

 

  

 

제발(題跋)에 따르면,

창해(滄海) 정란(鄭瀾, 1725-1791)과 담졸 강희언((姜熙彦, 1738-1784)이

김홍도 나이 37세인 1781년(辛丑) 4월1일 청화절(淸和節)에, 김홍도의 집 사랑방 들마루에서

‘질소하며 예절에 거리끼지 않는 술자리모임=진솔회(眞率會)' 라는 아회(雅會)를 가졌다.

 

들마루에서 무릎 위에 거문고를 올려놓고 이를 뜯고 있는 이가 김홍도이며,

무릎을 세운 채 부채질을 하며 거문고소리를 감상하고 있는 이가 화가 강희언,

그 옆에 장단을 맞춰 시를 읊고 있는 이가 창해 정란이다.

 

이들 뒤로 쌓여있는 책과 문방사우, 공작깃털이 꽂혀있는 백자, 벽에 비파가 걸려있는 방이 보인다.

멀리 뒤로는 성벽이 보이고 암벽 아래는 석상이 놓여 있다.

뜰에는 연잎이 푸른 연못과 그 옆에 수석이 놓여 있고,

미끈한 오동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 앞마당에는 학이 노닐고 있다.

작품에 보이는 그의 하인과 노새 역시 주인을 닮아 매우 날랬다고 한다.

 

 

단원 김홍도가 안기(安奇) 찰방 시절에 그린 이 작품은

진솔회를 가졌던 뒤로부터 3년 뒤인 1784년 12월, 입춘이 이틀 지난 뒤였다.

진솔회를 가졌던 그 해에 46세로 요절한 강희언을 추억하며 김홍도가 그린 그림이다.

정란이 경상도 안기역(安奇驛)을 찾았을 때,

김홍도 집에서 강희언과 더불어 가졌던 조촐한 풍류모임을 김홍도가 회상해서 그린 작품으로

작별에 임해 정란에게 선사한 것이다.

 

김홍도는 그림을 그리고, 제발(題跋)을 쓰고, 정란은 그 위에 제시(題詩)를 남겼다.

 

- 단원도(檀園圖) 題跋

창해 선생께서 북으로 백두산에 올라 변경까지 다다랐다가

동편 금강산으로부터 누추한 단원(김홍도의 집)으로 나를 찾아주셨으니,

때는 신축년(1781) 청화철(淸和節, 4월1일)이었다.

뜰의 나무엔 햇볕이 따스하고 바야흐로 만물이 화창한 봄날에 나는 거문고를 타고,

담졸 강희언은 술잔을 권하고, 선생께서는 모임의 어른이 되시니

이렇게 해서 참되고 질박한 술자리를 가졌도다.

어언간에 해가 다섯 차례나 바뀌어 강희언은 지금 세상에 없는 옛사람이 되어

가을 측백 떨기에는 이미 열매가 열렸다. 나는 궁색하여 집안을 돌보지 못하고

산남(山南: 경상도를 가리키는 옛말)에 머물러 역마를 맡은 관청에서 먹고 자고 하면서

해가 장차 한 차례 돌아오게 되었다. 이곳에서 홀연히 선생을 만나게 되니

수염, 눈썹, 머리칼 사이에는 구름 같은 흰 기운이 모였으되 그 정력은 늙어서도 쇠하지 않으셨다.

스스로 말씀하시기를 올 봄에는 장차 제주도의 한라산을 향하리라 하니 참으로 장하신 일이다.

다섯 밤낮으로 실컷 술을 마시고 원 없이 이야기하기를 단원에서 예전에 놀던 것처럼 하였더니,

슬픈 느낌이 그 뒤를 따르는지라.

끝으로 <단원도> 한 폭을 그려 선생에게 드린다.

그림은 그 당시의 광경이고 윗면의 시 두 절구는 당일 선생께서 읊으신 것이다.

갑진년(1784) 12월 입춘(立春) 2일 후에 단원주인 사능(士能) 김홍도가 그리다.

 

- 단원도(檀園圖) 題詩

錦城東畔歇蹇驢   금성산 동편 물가에 지친 노새를 쉬게 하고

三尺玄琴識面初   석자 거문고로 처음 만남 노래했네

白雲陽春彈一曲   ‘잔설이 남은 따스한 봄’ 한 곡을 뜯으니

碧天寥廓海天虛   푸른 하늘 넓고 고요해 하늘과 바다 빈 듯 하네

檀園居士好風儀   단원거사는 풍채가 좋고 자세가 바르며

澹拙其人偉且奇   담졸 그 사람은 장대하고 기이했네

誰敎白首山南客   누가 흰머리 늙은이를 영남의 나그네 되게 해서

拍酒衡琴作許癡   술잔 부딪히고 거문고 타며 미치광이 노릇하게 하나. - 滄海翁作(창해옹이 짓다.)

 

 

- <단원 김홍도>, 오주석, 열화당 미술선서,  p117-121,  p283

 

 

 

 

 

 

 

 

 

 

 

 

- IL DIVO / The Lord Pray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