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끼며(시,서,화)

인각사 보각국사 비

Gijuzzang Dream 2008. 6. 30. 12:07

 

 

 

 

 인각사 보각국사 비석 

 

 

인각사와 보각국사 일연스님

 

인각사(麟角寺)는 경상북도 군위군에 있는 사찰이다.

신라 선덕왕 11년(642)에 의상대사가 창건하였다고 하는 인각사는

활동이 많은 큰 사찰로서 대법회가 자주 열렸으며, 승려와 일반 신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으나,

조선 중기 이후 점차 쇠락해져 갔다.

 

인각사는 일연스님(師 釋一然, 1206-1289)과 관련이 깊은 사찰이다.

일연스님은 고려 충렬왕 10년(1284)에 인각사를 중창하였고,

또한 이곳에서 <삼국유사(三國遺事)>를 저술하였다.

 

일연스님은 열네 살 때 출가하였고, 스물두 살 되던 해인 고종 6년(1227) 승과(僧科)의 최고시험인

선불장(선불장)에서 장원인 상상과(上上科)로 급제하였다.

그 후 수행과 국가 차원의 불사, 강론 등 수많은 활동을 하였다.

특히 일연스님의 강론과 설법은 많은 사람을 크게 감화시켰다고 했다.

스님은 어려서부터 용모가 준수하고 몸가짐과 예절을 잘 갖춘 단정한 인물로,

품성 또한 가식이 없었으며, 매사에 매우 차분하고 진지하였다고 한다.

군중에 둘러싸여 있어도 그들과 어울리지 않고 마치 홀로 있는 것처럼 처신했고,

신분이 높아질수록 더욱 겸손할 줄 알았으며,

'불유사훈 자연통효(不由師訓 自然通曉 : 스승의 가르침 없이 자연히 통해 깨닫는다)'라는 말처럼

학문과 진리를 터득했다고 할 정도로 고매한 인품의 인물이었다고 전한다.

 

일연스님은 그가 이룬 수많은 업적과 그의 인품과 학문적 깊이, 불심 등으로

세상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아, 나라의 최고 스승인 국사(國師)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늙으신 어머니의 봉양을 위해,

왕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모든 자리를 놓고 대궐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갔다.

속세의 늙으신 어머니를 지극히 봉양했던 일흔 여덟살의 노스님 일연스님의 효성은

오늘날까지 이야기되고 있다. 노모가 돌아가시자 고려 조정에서는 일연스님을 중심으로

인각사를 중창하게 했고, 이렇게 수리된 인각사에서 국사 일연스님이 만년을 편히 머물도록 돌보았다.

일연스님은 이곳에서 큰 강론을 진행하고, 쉼 없이 불교 연구를 계속하였으며

<삼국유사> 다섯 권을 저술하였다.

 

일연 스님은 충렬왕 15년(1789), 세수 84세, 법랍 70세로 입적(入寂)하였다.

시호(諡號)는 보각(普覺), 탑호(塔號)는 정조(靜照)이다.

 

 

인각사 보각국사 비석

  

인각사에는 일연스님을 모시고 기리는 탑과 비석이 있다.

보각국사 탑(普覺國師塔)과 보각국사 비석(普覺國師碑)으로 모두 보물 제 428호이다.

원래 있던 자리는 절에서 2㎞ 정도 떨어진 부도골에 있었는데,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의 도굴로

넘어져 있던 것을 면사무소로 옮겼다가, 1962년 인각사 경내로 옮겨왔다.

 

보각국사 탑은 일연스님의 사리탑(부도, 浮屠)으로,

전하는 말에 의하면 아침에 해가 뜰 때 이 탑에서 광채가 나와

멀리 않은 곳에 있는 일연스님 어머니의 묘를 비추었다고 한다.

 

보각국사 비석은 부도탑의 비석으로 비석에는 일연스님의 행적과 그의 삶을 기록해 놓았다.

비석의 문장은 당시 최고의 문장가인 민지(閔漬)가 왕명을 받들어 지었는데,

비문 작성이 늦게 되어 일연스님 입적 후 6년 뒤인 충렬왕 21년(1295) 8월에 와서야 세워지게 되었다.

충렬왕 19-21년(1293-1295)동안, 스님의 문인(門人), 사문(沙門) 죽허대사(竹虛)가

서성(書聖) 왕희지의 행서를 집자한 대표적인 집자비석이다.

(인각사 보각국사비/ 보물 제428호/ 왕희지 행서 집자, 고려 1295년)

 

그러나 보각국사 일연스님의 큰 덕과 지혜를 왕희지의 글자를 집자하여 큰 정성으로 세운 이 비석은,

천하의 명필을 집자했다는 이유 때문에 이후 엄청난 수난을 겪으며 훼손이 될 수밖에 없었다.

비석은 임진왜란 때 크게 파손되었는데, 왜병들이 이 비석이 왕희지 집자비라는 것을 안 순간부터

너도나도 탑본을 하느라 큰 소란이 벌어졌다고 했다.

비석이 더욱 훼손된 것은 이후 계속되는 탑본과 함께 이 비석의 글씨를 가지고 있으면

장원급제를 한다고 하여 너도나도 떼어가기 시작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손상이 심한 비석은 역시 탑본을 너무 많이 하여 글씨 면이 마멸되었다.

현재 앞면에 약 150여 자, 이면에 약 100여 자 만이 남아있으며, 비각을 세워서 보호하고 있다.

 

다행히 오대산 월정사에 비문의 사본이 남아있어,

뜻있는 탑본 소장자들을 비롯하여 여러 연구자들이 합심하여 자료를 조사하고 정리하여

2006년 일연스님 탄신 800주년을 기념하여 비석이 복원되었다.

- 국립중앙박물관 미술관 서예실 학예연구사, 박성원

- 국립중앙박물관 큐레이터와의 대화, 제 88회(2008년 5월 1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