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끼며(시,서,화)

소치 허련의 <채씨효행도>

Gijuzzang Dream 2008. 6. 30. 18:00

 

 

 

 효자와 도깨비  

 

 

 

소치 허련의 탄신 200주년=2008년

 

2008년은 추사 김정희의 제자로

조선 말기의 서화계를 그의 자서전 제목처럼 “꿈같은 인연(夢緣)” 속에 주유한

직업적 화가 소치 허련(1808-1893)의 탄신 200주년이 되는 해이다.

탄신 200주년을 맞이하여 허련의 일생과 작품세계에 대한 재조명이 시도되고 있으며,

국립광주박물관의 특별전 “남종화의 거장 - 소치 허련 200년”(7.8-8.31) 등

여러 행사가 개최될 예정이다.

 

이 글에서는 소치 허련 탄신 200주년 기념전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발굴된 여러 작품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작품 가운데 하나인 개인 소장의 ≪채씨효행도≫를 살펴보고자 한다.

 


채씨효행도

≪채씨효행도≫는 평강(平康) 채씨(蔡氏) 채홍념(蔡弘念)의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채홍념의 손자 동훈(東勳)과 증손자 경묵(敬묵)에 의해

1882년(고종 19)에 모두 15장으로 성첩(成帖)한 화첩이다.

 

조선시대의 효행도는

판화이거나 효자도 병풍 또는 민화 등으로 제작되었기 때문에 작자를 알기 어려운 경우가 많은데,

≪채씨효행록≫은 효행의 내용, 작자, 제작연대 등이 정확하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이 크다.

 

표지의 크기는 31.5×19.8㎝, 화면의 크기는 23×31.7㎝이다.

맨 앞쪽에 조선 후기의 문신 조석우(曺錫雨, 1810-?)의 글 등이 있고

허련의 <효행도> 5장 등의 순으로 되어 있다.

 

조석우는 「효행정려찬」에서 채홍념의 여러 효행을 열거하였는데,

그 가운데 허련이 그린 내용은 다섯 가지이다.

 

허련은 1868년(고종 6년) 그의 나이 62세에 ≪채씨효행도≫ 삽화를 그렸다.

① 저잣거리에 나가 행상을 하고 쌀을 짊어지고 와 공양하다(販市負米) (도 1)
② 부친이 돼지고기를 즐기셨으므로 아침저녁마다 반드시 준비하다(常進猪肉)
③ 부친이 병이 들자 대변 맛을 보며 증세를 관찰하고 하늘에 자신으로 대신해 줄 것을 빌다(嘗糞禱天)
④ 부친이 위태로운 상황에 처하자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물려드리다(斫指灌血) (도 2)
⑤ (악천후로) 忌日에 맞추기 어렵게 되자 도깨비불이 나와 길을 인도하다(鬼火前導)


 

부드럽지만 선명한 담채로 그려진 ≪채씨효행도≫ 삽화는

채홍념의 효행이 이루어진 초가가 화면의 중심을 이룬다.

화면의 중간 아래쪽에 널찍이 자리 잡은 초가는 <상진저육>,

<판시부미>에서는 오른 쪽에 배치하였고 나머지 그림에서는 모두 왼쪽에 배치하였는데

위치와 방향 등에서 미묘한 차이가 있다.

효행의 내용과 그림 표현효과에 따라 가옥의 형태와 방향, 위치 등을 조금씩 달리 한 것인데

산의 모양 물, 길, 나무 등도 모두 변화를 주었음을 알 수 있다.

 

<판시부미>에서는 화면 왼쪽 위 강 너머에 마을을 그려 넣어 채홍념의 고생을 짐작할 수 있게 하였고

<귀화전도>에서는 집까지 오는 길이 멀고 험난했음을 강조하기 위하여

‘之’ 자로 여러 차례 구부러진 길을 그렸다.(도 3)

 

허련의 용의주도함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작지관혈>에서 쓴 세로글씨는 산의 높이를 강조함과 아울러

튀어나온 산봉우리가 무너질 듯한 과도한 긴장감을 상쇄시키는 역할을 하도록 하였다.

노년기에도 사라지지 않는 허련의 회화 감각이 아닐 수 없다.

≪채씨효행도≫ 삽화는 피마준으로 표현된 나지막하고 여유로운 원산(遠山),

넓고 편안한 구도, 울타리로 둘러싸인 초가, 이를 적절히 표현한 풍부한 색감의 담채는

그가 일생동안 지향한 남종화풍의 진수를 보여준다.

 

남종화풍은 17세기 이후 조선 화단에서 ‘정통’ 화법으로 부각되었는데,

대개 예찬식 구도에 의거해 성근 나무 숲 아래의 띠로 엮은 고적한 정자(疏林茅亭)와

강물을 사이에 둔 평담(平淡)한 먼 산을 근 · 원경으로 설정하는 등의 방식으로 작품화되었다.

 

허련의 작품세계 역시 이러한 경향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지만

≪채씨효행도≫ 삽화에서는 문인들의 아취있는 생활을 그린 것이 아니어서인지

이러한 방식이 직접적으로 반영되지는 않았다.

한편으로는 평담하고 부드러운 먼 산이 허련의 고향인 호남지방의 거칠거나 위압적이지 않은 토산 등의

물색을 반영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호남지방의 화단에서 아직도 허련이 정신적 지주가 되고 있는 것은

이처럼 호남지방의 풍광을 잘 반영한 작품을 제작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은 것이다.

 


처음 나온 도깨비, 도깨비그림

<판시부미>, <상분도천>, <작지관혈> 등은 효행의 전형적인 예로서

『삼강행실도』 등 행실도류 판화에서는 물론 여러 효행고사 등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예이지만,

<상진저육>은 그 예를 쉽게 찾아보기 힘들고

특히 <귀화전도>는 채홍념의 효행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내용이다.

 

<귀화전도>는 채홍념이 부친의 기일에 맞춰 돌아오는 산길에서

“비바람을 만나 갈 수 없게 되자 하늘을 우러러 통곡하니 갑자기 나타난 ‘도깨비불(鬼火)’의 인도에 따라

길을 걸어 제사를 무사히 지낼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그린 것이다.

<귀화전도>는 결국 제사를 지내기 위한 후손의 갸륵한 정성과 노력을 보여주는 예이다.

확대해 보면 인간보다 작은 희끄무레한 모습의 도깨비가 등불을 높이 치켜들어

뒤따라오는 채홍념이 앞을 잘 볼 수 있게끔 안내하는 듯한 동작을 하고 있다. (도 4)

흐릿하지만 도깨비의 얼굴에 눈과 입이 표현된 것도 볼 수 있다.

전통시대 중국과 우리나라에서 귀신이나 유령그림은

민화 또는 민속화 등에서 발견되며 이름 있는 화가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일본의 경우는 귀신이나 요괴 등에 대한 관심이 대단하고 그 연구도 많이 진전되어 있다.

귀신이나 요괴에 대하여 일본은 중국이나 한국과 워낙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갖기 때문에 논외로 하면,

중국의 경우 유명화가가 현실 비판적 의미에서건 풍자적 의미에서건 귀신 그림을 그린 예는 거의 없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조선 후기의 화원(畵員)인 김덕성(金德成, 1729-1797)의 <종규도> 등을 제외하면,

전통시대에 이름이 알려진 화가가 귀신이나 유령 또는 도깨비를 그린 작품은 찾아볼 수 없다.

 

따라서 <귀화전도>에서 그려진 도깨비 형상을

허련과 같은 당대 제일의 명성을 가진 화가가 그렸다는 사실만으로도 회화사적 중요성은 크다.

 


직업적 화가 허련

 
허련의 나이 62세에 그린 ≪채씨효행도≫ 삽화는

지금까지 알려진 것처럼 그가 산수와 묵모란 만을 잘 그린 화가가 아니라

인물 · 풍속에도 뛰어난 화가였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허련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로 유명한 <완당초상>과 <완당선생해천일립상>을 통해

그가 초상화에도 뛰어난 솜씨를 가졌음을 알 수 있지만

인물화나 풍속화에서 주목할 만한 작품이 거의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점에서 ≪채씨효행도≫ 삽화는

허련 회화세계의 폭과 깊이를 더해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채씨효행도≫ 삽화는

전통시대 직업화가 또는 직업적 화가들의 작품 제작능력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예가 된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허련 정도의 직업적 화가는 주문자의 신분 또는 대가의 경중(輕重)에 따라

필치를 바꿀 수 있었음을 전제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채씨효행도≫ 삽화에서는 노년의 화가에게서 흔히 찾아 볼 수 있는

이른바 ‘노필(老筆)’의 느낌이 아닌 원숙하고 노련한 표현력을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연령과 필치를 기계적으로 대입하여 제작시기를 추론하는 것은 무리가 있음을

알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 문화재청 인천국제공항 문화재감정관실 김상엽 감정위원

- 문화재칼럼, 2008-06-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