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대한 성, 수천년 전 韓민족을 증거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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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의 성일 가능성이 많은 싼줘뎬 석성 안에 있는 원형건축물 흔적.
조상신·하늘신에 제사 지낸 제단일 가능성이 높다. |
7월28일. 짜증이 치밀어 오르는 오후였다.
36도 불볕더위 속에 츠펑(적봉, 赤峰) 인근 청쯔산(성자산, 城子山) 유적을 찾아 나선 길. “일정에 없다”며 몽니를 부리는 버스 기사와 한바탕 큰소리가 오간 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가도가도 끝 없는 길. 아는 길이라고 자신했던 안내인이 연방 고개를 갸웃거린다. 길을 묻느라 가다 서다를 반복하기를 무려 10여차례.
천신만고 끝에 쓰다오완쯔(사도만자, 四道灣子)역에 닿았다. ‘다 왔나’ 싶었더니 아니란다. 안내원이 뭔가 흥정을 하더니 다시 마을 6인승 승합차에 타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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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雉)가 13개나 되는 싼줘뎬 석성의 위용. |
# 위험천만 역주행
황토먼지를 일으키며 10여분 달리더니 어라 이상한 곳으로 들어간다. 츠펑~퉁랴오(통료, 通遼) 간 고속도로 공사구간이다. 아직 공사가 한창인 미개통 도로라 출입금지 팻말을 달아놓았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휙 진입해버린다.
‘어어!’ 탐사단은 비명을 질렀다. 역주행길이다! 고속도로를 역주행하고 있는 것이다. 모골이 송연하지만 돌이킬 수 없는 길. 그냥 소름 돋는 스릴을 즐길 수밖에. 20여분 ‘역주행’의 경험을 맛본 뒤 역시 고속도로 갓길에 차를 세웠다. 그리곤 등산이다. 발목까지 올라오는 수풀 가득한 청쯔산. 뛸 듯이 단숨에 올라갔다. 1분1초라도 빨리 올라야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다는 그 놈의 욕심 때문에.
과연 그랬다. 서요하 상류, 평원을 조망할 수 있는 정상, 그리고 수풀 사이로 펼쳐지는 끊임없는 돌, 돌의 흔적.
10여개의 작은 산들이 둘러싸고 있는 청쯔산의 전체 유적 규모는 6.6㎢다. 아(亞)자 형태인 주봉 유적만 해도 총 면적이 15만㎡나 된다. 주위에는 성벽 같은 반원형의 마면식(馬面式 · 치) 석축이 있다. 찬찬히 뜯어보니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200기에 달하는 적석총과 석관묘, 그리고 하늘신과 조상신에 제사를 지냈다는 돌로 쌓은 제단터와 사람들이 살았거나 공무를 보았을 대형 건물터…. 많은 적석총과 석관묘…. 외성과 내성으로 잘 조성된 성벽…. 여섯구역에서 확인된 원형석축건물지만 무려 232개나 된다니….
# 청쯔산 정상에 선 나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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싼줘뎬에서 수습한 덧띠무늬 토기편.
<츠펑/김문석기자> |
이형구 선문대 교수와 윤명철 동국대 교수는 “거대한 무덤터이자 제단터이며, 유적의 규모와 내용으로 보면 국가단계의 사회조직일 수밖에 없다”고 입을 모았다.
“내성에서는 최고위층이 거주한 것으로 보이는 건물지 10개가 확인되었습니다. 중국 학자들의 말처럼 고국(古國)의 형태가 분명합니다.”(이형구 교수)
탐사단의 눈을 끄는 것은 우리와의 친연성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샤자뎬(하가점, 夏家店) 하층문화의 대표적인 유적 가운데 하나라는 점이다.
그런데 샤자뎬 하층문화는 학자들 간 논란이 있지만 늦춰 잡아도 대략 BC 2000~BC 1200년 사이의 문화이다. 눈치 챘을 테지만 고조선의 연대와 비슷하다는 점에서 관심을 끈다.
“적석총과 석관묘, 제단터는 물론이고, 성벽의 축조 방법을 보면 고구려·백제와 비슷합니다. 할석으로 한 면만 다듬어 삼각형으로 쌓고, 다음 것은 역삼각형으로 쌓는 형식 말입니다.”
이형구 교수는 “할석과 삼각석(견치석), 그리고 역삼각형의 돌로 견고하게 쌓은 성벽은 인천 계양산성의 축성 방식을 연상시킨다”고 밝혔다. 기자를 비롯한 탐사단은 청쯔산 정상에 널려 있는 이른바 덧띠무늬 토기편을 수습했다. 이 역시 우리나라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문양이다.
그렇다면 혹 고조선? 기자는 솟구치는 의문점을 가슴에 담아둔 채 하산하고 말았다. 학자들도 기자의 구미에 맞는 속시원한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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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마어마한 석성의 실체는?
그런데 청쯔산 탐사는 그저 리허설에 불과했다. 다음날. 츠펑에서 북서쪽으로 40㎞쯤 떨어진 싼줘뎬(삼좌점, 三座店)으로 향했다. 역시 힘겨운 여정이었으나 탐사단은 소풍 가는 어린아이처럼 설레었다. 지난해 정식 발굴을 끝낸, 그래서 발굴보고서도 아직 나오지 않았고, 국내 언론에도 소개되지 않은 ‘싱싱한’ 싼줘뎬 유적을 찾아가는 참이니…. 유적은 2005년 인허(음하, 陰河) 다목적댐 공사 도중 발견되었고, 지난해 말까지 발굴을 끝냈다.
과연 댐 공사가 한창이었다. 오른쪽엔 야트막한 야산이 보였다. 청쯔산과 비슷한 입지다. 기자 일행은 메마른 산등성이를 서둘러 올라갔다.
“와!” 역시 1착으로 뛰어오른 기자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저 보이는 대로 카메라 셔터를 눌러댈 뿐. 마치 어제의 청쯔산 집터처럼 완연하게 드러난 집터와 적석총이 끊임없이 펼쳐져 있었고, 제사터와 그리고 도로 혹은 수로가 구획 사이에 조성돼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양념. 정상부에 오르자 거대한 성벽의 행렬이 꿈처럼 펼쳐지고 있었다. 학자들도 처음 보는 유적이라 흥분에 휩싸인 듯했다.
“치(雉 · 적을 제압하려고 성벽 밖으로 군데군데 내밀어 쌓은 돌출부)가 도대체 몇 개야?”(이형구 교수)
이교수가 성의 행렬을 더듬으며 세어보니 확인할 수 있는 것만 13개나 되었다.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성벽이다. 유적의 연대는 BC 2000~BC 1500년 사이(샤자뎬 하층문화)의 것이란다.
# 고구려 · 백제를 빼닮은 전통
“전형적인 초기 형식의 석성이네요. 기저석을 쌓고 수평으로 기저를 받친 뒤 ‘들여쌓기’를 한 모습…. 횡으로 쌓은 뒤 다음 단은 종을 쌓았어요. 4000년 전에 이렇듯 성벽이 무너지지 않게 견고하게 쌓았다니….”(이교수)
윤명철 교수는 “주거지에 샤자덴 하층문화 때의 토기편들이 널려 있다”면서 “치가 촘촘하게 있다는 것은 육박전 같은 대규모 전투를 염두에 둔 것”이라고 해석했다. 이교수가 실측해보니 치는 5m 간격으로 서 있었다. 대각선을 뚫은 문지(門址)도 발견되었는데, 이는 은신하면서 드나들 수 있는 출입문이다.
성이 무너지지 않게 견치석을 적절하게 배치한 석성의 또 다른 특징은 아군의 추락을 막고 적병의 침입을 방어하려고 여장을 쌓았다는 것이다. 유적의 전체 면적은 1만4000㎡였고, 건물지 수십기와 석축원형제단, 적석총, 그리고 석축 저장공(13개)이 확인되었다.
석성은 츠펑 지구를 포함한 발해만 북부지역에서 발전한 축성술이다. 이 전통은 고구려와 백제로 그대로 이어진다. 또한 조선시대에 쌓은 수원 화성의 공심돈(치의 역할)에서도 그대로 볼 수 있는 유서 깊은 우리 축성술의 전통이다.
놀라운 석성과 제단터, 주거지, 무덤…. 어쩌면 이렇게 어제 본 청쯔산성과 오늘 확인한 싼줘뎬 석성이 빼닮았고, 이 전통이 고구려와 백제로 이어질 수 있었을까. 그렇다면 또 한번 생기는 궁금증…. 고조선의 체취가 물씬 풍기지 않나. 정녕 고조선의 성은 아닌가.
# 중원엔 하(夏), 동북엔 고조선?
중국학계의 분석에서 어떤 단서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랴오시(요서, 遼西)의 샤자뎬 하층문화는 하(夏)나라와 같은 강력한 방국(方國)이 존재했다는 증거이다.”(궈다순 랴오닝성 문물연구소 연구원)
“(청쯔산 같은) 유적은 초기 국가의 형태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며, 하(夏)~상(商)나라를 아우를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우한치 박물관 도록)
이형구 교수도 “중원의 하나라(BC 2070년 건국)와 동시대에 청쯔산과 싼줘뎬 같은, 수천기의 석성을 쌓은 국가권력을 갖춘 왕권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중국 학자들도 동의하듯 제사 공간, 주거지는 물론 거대한 적석총 · 석관묘까지, 여기에 행정 조직과 공장을 갖춘 왕권 말이다. 이교수는 “산 위에 이런 큰 규모의 돌들을 운반해서 성을 쌓고 건축물과 돌무덤을 조성할 정도면 전제권력을 갖춘 국가가 아니면 어림도 없었을 것”이라고 부연한다.
그렇다면 고조선이냐. 이형구 교수나 윤명철 교수는 확언하지 못하지만 뉘앙스는 짙게 풍긴다. 여러 증거로 보아 “중원 하왕조 시기에 섰던 동이족의 왕권국가”가 분명하며, 이것은 ‘4000년 전의 고구려성’일 가능성은 충분하다.
하지만 고조선의 경우 ‘내가 고조선 유물 · 유적이요’하는 명문(銘文)을 달고 나오지 않는 이상 100% 확인하기는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고구려의 것’을 빼다 박았지만 2000년의 시차가 있다는 점도 풀어야 할 과제이다.
# 고조선 연구의 밑거름
그러나 지난해 싼줘뎬 석성과 청쯔산 유적을 보았던 복기대 단국대 박물관 연구원은 “백암성 같은 고구려의 성과 너무도 똑같지 않으냐”면서 한가지 시사점을 던진다.
즉, 샤자뎬 하층문화 인골 134기를 분석한 주홍(朱泓) 지린대 교수는 “샤자뎬 하층문화 인골은 정수리가 높고, 평평한 얼굴의 특징을 갖고 있으며 이는 ‘고동북유형’이 속한다”면서 “이 같은 유형은 랴오시 지역과 전체 동북지역에서 가장 빠른 문화주민”이라고 분석했다.
허베이성(하북생, 河北省), 산시성(산서생, 山西省), 산시성(섬서생, 陝西省), 네이멍구(내몽고, 內蒙古) 중남부 지구에서 보이는 ‘고화북유형’과는 다른 인종이라는 것이다. 결국 샤자뎬 하층문화인들은 동북유형의 문화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지금까지 측정된 12곳의 샤자뎬 하층문화 유적 탄소연대측정값이 BC 2400~BC 1300년이라는 점이나, 고조선의 연대와 부합된다는 점도 심상치 않다는 것이다.
어쨌든 막 발굴을 끝낸 싼줘뎬 석성과 청쯔산 유적은 우리 고대사와 고대문화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는 점은 분명하다.
분명한 것은 이들 유적을 만든 이들의 문화전통은 동이의 것, 그 가운데서도 석성과 제단, 돌무덤의 전통을 쌓은 우리 민족의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전통의 흔적은 청쯔산, 싼줘뎬에서 그치지 않는다. 지금으로부터 8000년 전까지 소급된다. 아니 그 이상 장구한 세월 동안 이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가야 할 탐사단의 여정은 그 머나먼 세월의 발자취를 찾는 것이다. 처음부터 “고조선이 아니냐”며 끈질기게 물고 늘어진 기자의 조급함에 스스로 채찍을 가한다.
<츠펑 /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