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아가는(문화)

한국 전통 목가구 - 황칠

Gijuzzang Dream 2007. 11. 3. 15:26

 

 

 

 

(1) 경주에서 신라의'황칠(黃漆)' 확인

 

 

문화재청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소장 지병목)는 경주 계림북편에 위치하고 있는

황남동 123-2번지 유적에서 검출된 유기물질에 대한 분석을 통해, 신라의 ‘황칠(黃漆)’을 확인하였다.

이번에 확인된 황칠은 유적에서 출토된 인화문 토기의

바닥에 남아있는 유기물질 덩어리에 대한 지방산 분석을 하기 위해

일부시료를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실에 분석 의뢰하여 밝혀지게 되었다.

 

분석결과에 의하면, 황남동 123-2번지 유적에서 확인된 유기물질은

변환 적외선 분광분석(FT-IR) 방법과

질량분석기부착 가스크로마토그래피(GC-MS)분석 방법을 이용하여 분석하였다.

그 유기물질은 목질계 수지(resin) 성분류로 추정되며,

분자량 204인 쌍환성 정유성분인 베타 셀리넨(β-selinene)과 쌍환성 정유성분에서 유도된 것으로

알려진 방향족화합물(cadalene, C15H18)이 주성분인 것으로 파악되었다.

특히, 주성분이 쌍환성 정유성분인 우리나라의 해남산 황칠의 파장범위가 유사하여,

경주의 것이 해남산 황칠일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으로 분석되었다.

 

황칠이란, 생칠 또는 주칠, 흑칠과 같이 여러 종류의 공예품 표면을 칠하는 공예의 한 기법으로

황금빛이 나는 천연도료이다.

높이 약 15m의 두릅나무과에 속하는 황칠나무에서 채취한 액체를 정제하여 사용된다.

빛깔이 화려한 금빛이며, 내구성을 강화시켜 제품의 수명을 연장시킨다.

뿐만 아니라, 안식향(安息香)이라는 독특한 향기를 가지고 있어서 사람의 신경을 안정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나무는 난대성 활엽수로

우리나라에서는 완도와 보길도, 거문도 등 전남 서남해안지역과 제주도 등에 자생한다.

또한 나무에서 채취 · 가공된 황칠은 금속과 목재, 종이 등의 도색을 위해

삼국시대부터 고급제품의 외장에 널리 사용되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제9권 보장왕 4년(645년)에는

“백제가 금칠을 한 갑옷(명광개, 明光鎧)을 바쳐왔는데,  . . . 갑옷의 광채가 하늘에 빛났다.” 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조선후기 역사가인 한치윤이 저술한 『해동역사』에는

“(황칠나무는) 백제 서남해에 나며, 기물에 칠하면 황금색이 되고, 휘황한 광채는 눈을 부시게 한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신라 관직명 중에는 칠전(漆典)이라는 특별한 관청명이 있는 것으로 보아

칠의 수요와 공급을 국가기관에서 관장하였음을 암시한다.

이를 통해 황칠은 부와 권력의 상징으로 삼국시대에 유행하였던 장식문화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황칠은 조선시대 중국의 지나친 조공요구, 조정의 공납요구 및 일제강점기를 거침에 따라

원목뿐만 아니라 가공기술마저도 그 명맥이 유지되지 못하였다.

 

조선후기의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의 『다산시선』에 “황칠(黃漆)” 이라는 한시에

“공납으로 해마다 공장으로 옮기는데 서리들 농간을 막을 길 없어

지방민들이 이 나무를 악목(惡木)이라 여기고서 밤마다 도끼 들고 몰래 와서 찍었다네”

라는 대목을 보면, 당시 황칠나무에 대한 남획이 얼마나 심하였는지를 단적으로 알 수 있다.

 

이러한 여건으로 인해 황칠은 그 실체를 밝히기 어려웠으나

이번 분석결과로 기록으로만 남아 있던 황칠에 대한 역사성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황남동 123-2번지 유적에서 황칠이 담겨진 토기는

건물지의 기둥을 세우기 위해 조성한 건물의 적심주변에서 발견되었는데,

토기는 의도적으로 파묻은 것으로 보인다.

이 회청색의 둥근 사발모양 토기는

말굽모양의 작은 인화문이 외면에 시문되어 있고, 저부에는 낮은 굽이 붙어 있다.

7세기대에 유행한 것으로, 출토 당시 뚜껑이 덮여 있고

적갈색 유기물 덩어리가 바닥에 말라붙어 있었다.

이 유기물질 덩어리가 분석 결과, 바로 황칠로 밝혀진 것이다.

 

이번에 황칠이 확인된 경주 황남동 123-2번지 유적은 계림 북편에 위치하고 있으며,

2006년 8월에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유적에는 7세기에서 8세기대에 이르는 대형 건물지가 밀집되어 있다.

특히, 이곳에서는 잡석(雜石)으로 공들여 다진 흙 속에 6개의 구덩이를 파고

5개의 구덩이 안에 지진구(地鎭具)로 보이는 5개의 뚜껑항아리(圓低短頸壺)가 매납되어 있었다.

바닥이 둥글고 아가리가 짧게 벌어진 높이 40cm 내외의 대형 항아리가 묻힌 이곳의 건물지가

특수한 성격을 띠고 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파악된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발굴한 토기 내부의 유기물질이 황칠성분이라는 것이 밝혀짐에 따라,

황남동 123-2번지의 대형 건물유적이 신라국가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시설이었다는 점을

추정할 수 있다. 따라서 황칠이 확인된 대형 건물지와 근거리에 위치한 월성이

신라의 궁성이었을 가능성이 보다 높아졌다.

 

특히 땅의 악한 기운을 누르고 선한 기운을 북돋우기 위해

건물 기둥자리에 의도적으로 매납(埋納)한 지진구(地鎭具)로 추정되는 토기에

황칠 덩어리를 담아두었다는 사실은

이 황칠이 고대사회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 물질로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 2007년 2월 15일, 문화재청

 

 

경주 계림 북편 황남동 '신라제사' 유적에서의 발굴 출토상태(2006년)

잡석으로 공들여 다진 흙 속에 6개의 구덩이를 파고 5개의 구덩이 안에

지진구(地鎭具)로 보이는 5개의 뚜껑항아리(圓低短頸壺)가 묻혀있었다.

 

 

  황칠이 담겨진 토기의 출토상태

 

 

 

   토기 바닥에 남겨진 황칠덩어리

    

  

   '전설의 금빛 도료' 라고 칭하는 황칠(黃漆)을 생산하는 황칠나무.

 

  

 

 

 

(2) 경주에서 신라의 ‘황칠(黃漆)’ 확인

 

 

 

 

 

신라 토기의 바닥에 눌러붙은 덩어리가 황칠이다(左).

우(右)는 현대의 황칠 공예품. 황칠연구소 정병석 소장이 만든 보석함이다. <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신비의 금빛 천연도료로 알려진 신라의 황칠.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15일

"지난해 경주 계림 북쪽 황남동 유적에서 토기에 담긴 채 발견된 유기물 덩어리를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실에 의뢰해 성분을 분석한 결과 신라의 황칠임을 확인했다"고 발표했다.

첨단기기로 측정한 결과

전남 해남에서 자라고 있는 황칠나무의 황칠과 성분이 거의 동일한 것으로 나타났다는 내용이다.

황칠이란 황칠나무 줄기에 상처를 내서 뽑아낸 수액을 정제한 도료.

화려한 금빛이 특징이다. 황칠은 나무나 쇠에 칠하면 좀과 녹이 슬지 않고 열에도 강해

'옻칠 천년 황칠 만년'이란 말이 있을 정도다.

뿐만 아니라 안식향이란 독특한 향기를 풍겨 사람의 신경을 안정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다만 '아름드리 나무에서 겨우 한 잔 넘칠 정도'(다산 정약용의 시 '황칠'에서) 밖에 나오지 않을 만큼

귀했다고 한다. 한국의 특산품으로 고대로부터 중국까지 널리 알려졌고 여러 문헌에 기록이 남아 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는 "백제가 금칠을 한 갑옷을 바쳐왔는데, 갑옷의 광채가 하늘에 빛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 후기 '해동역사'는 "(황칠나무는)백제 서남해에 나며,

기물에 칠하면 황금색이 되고, 휘황한 광채는 눈을 부시게 한다"고 쓰고 있다.

또한 신라에 칠전(漆典)이라는 특별한 관청명이 있는 것으로 보아

칠의 수요와 공급을 국가 기관에서 관장하였음을 암시한다.

이를 통해 황칠은 부와 권력의 상징으로 삼국 시대에 유행하였던 장식문화임을 알 수 있다.

황칠은 중국에서도 탐냈다. 북송시대 문헌인 '책부원구(冊府元龜)'엔

"당 태종(이세민)이 백제에 사신을 보내 의전용 갑옷에 입힐 금칠(金漆: 황칠)을 요청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고대 동아시아 최고의 도료로 인정받던 황칠은

그러나 임진왜란을 전후해 한반도에서 그 맥이 단절돼버렸다.

나무도 멸종된 것으로 알았으나 1990년대 초 전남 해남 해안가에서

우연히 야생 황칠나무가 자생하는 것이 발견됐다. 이후 이를 이용한 현대 황칠 공예품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옛 황칠은 공예품도 실물도 전혀 알려지지 않은 '전설의 금빛 도료'였다.

경주문화재연구소 이주헌 학예사는

 "그동안 실체를 밝히기 어려운 것으로 알려진 황칠이 실물로 확인된 것은

고대 문화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 중앙일보, 2007년 2월 16일

   

 

 

(3) 황칠(黃漆)나무  

 

황칠나무라는 이름은 한자 그대로 노랑색 칠(黃漆)을 생산하는 나무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것으로

"노랑옻나무"라고도 한다.

그러나 정확히 표현하면 노랑색 칠이라기보다는 황금빛을 내는 칠이라는 표현이 더욱 가까울 것이다.

 

순금으로 착각을 일으킬 정도의 황금빛 비색과 상상을 초월하는 내열성(200℃)과 내구성,

내습성, 빛깔의 우수성, 벌레를 쫓아내고 정신을 맑게 하는 안식향(安息香),

중풍, 오십견, 항암제로도 사용되는 약용 성분 등 각종 문헌들에서 밝혀진 황칠의 역사적 효능은

나무의 국제학명조차도 덴드로-파낙스(Dendro Panax),

라틴어로 만병통치약을 지칭하는 인삼나무를 의미하는 말이다.

 

1. 일반적 특성

 

우리나라 특산식물로 상록활엽교목(常綠闊葉喬木)으로서

강진, 장흥, 해남, 완도 등의 서남해안과 제주도를 비롯한 섬에 자생하며 큰 것은 높이가 15m에 달한다.

 

지리적으로 가장 북쪽에 분포하는 지역은 보령군 외연도이며,

서쪽은 신안군 소흑산도, 남쪽은 제주도 한라산, 동쪽은 여천군 금오열도에 분포하고,

수직적으로는 50∼700m에 나타나고 있다.

주로 토양습도가 높고 비옥한 산복(山腹)하부와 계곡부에 자생하고 있다.

 

그중 완도 황칠목은 1994년 1월 31일 전라남도기념물 제154호로 지정되었다.

밑둥 둘레는 137㎝, 가슴둘레는 102㎝, 높이 15m이다.

보길도에서는 상철나무, 황철나무라고도 부른다. 황칠나무의 자생군락지 내에서 최대 수목이다.

마을 사람들은 신들린 나무라 하여 땔감으로 베지 않고 지금까지 귀히 여겼다.

수간은 단립으로 올라가 원추형의 수형을 이루고 어린 가지는 녹색(綠色)이며

털이 없고 윤채(潤彩)가 있다.

 

잎은 서로 어긋(互生)나며 길이 10∼20cm의 란형(卵形) 또는 타원형(橢圓形)이고 첨두(尖頭)이다.

거치가 없지만 어린나무에서는 3~5개로 갈라지거나 톱니가 있다.

예저(銳底) 또는 넓은 설저(說底)이며 양면에 털이 없다.

엽병(葉柄)은 길이 3~10cm로서 표면이 편평하거나 홈이 있다. 전체적으로 광택이 좋다.

 

동아시아, 말레이 반도, 중앙. 남아메리카에 약 75종,

우리나라에는 1종이 분포하는 한국 특산식물이다.

수피에 노란색의 수액이 나오는데 이 수액을 황칠이라 하며

수액이 묻으면 옻이 옮기 때문에 주의를 요한다.

어릴 때의 생장이 빠르다. 민속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수종이며,

남부지방 조림용으로 이용이 증대되어야 할 나무이다.

 

2. 고문서에 등장하는 황칠

 

고전인 <해동역사(海東繹史)>에서도

'백제 서남해 바다 속에 3섬이 있고 그곳에 황칠수(黃漆樹)가 있는데 칠이 황금빛과 같다.' 

'황칠의 주산지는 전라도 완도...' 라고 하는 구절이 있어

우리 조상들에 의한 황칠의 이용이 삼국시대 이전부터였음을 알 수 있게 한다.

 

"황칠나무는 적어도 천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우리 고유 수종이다.

삼국이 정립한 이래, 백제는 활발한 무역을 통하여

인삼과 황칠, 모시저포를 중국과 일본 등지에 수출하였다." (홍사준, 1972)

 

통일신라 때 해상왕 장보고의 교역상품 중 최상품이 황칠액 이었다고 전한다.

<고려도경>, <고려사절요>, <임원경제>, <통전>, <지봉유설> 등에는

'세상에 이보다 더한 보물이 있겠느냐?' 하는 기록이 나오며,

<임원십육지>에는 '천금목(千金木)이라 하여 그 진은 안식향(安息香)으로 쓴다' 라고 적고 있다.

 

옻칠에만 익숙한 우리에겐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중국의 역사가들은 이를 한결같이 한반도 서남 해안에서만 나는 ‘신비의 도료’라고 적고 있다.

<중국 25史>와 <책부원구(冊府元龜)>, <영파사지(英坡寺誌)> 등 각종 박물지에는

진시황제가  ‘불로초’ 라 믿으며 해동국에서 가져온 나무가 바로 ‘황칠나무’이다 라고 전한다.

 

중국의 사서(四書) 가운데 하나인 <주역(周易)>의 서문(序文)에도

'황칠판(黃漆板) 위에서 이 책을 명상하라’고 쓰여 있을 정도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는 ‘칭기즈칸 테무진은 황금마차를 타고 황금 갑옷과 투구를 쓰며,

천막은 황금색으로 빛나고 있는데, 이는 백제국에서 나는 '황칠'이라는 비기(秘技)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궁전과 집기류 등 황제의 것이 아니고는 사용치 못했으며

불화살로도 뚫을 수 없는 신비의 칠로 황제가 아니면 쓰지 못하며

황제가 쓰는 모든 기물은 이 황금칠로 칠하였다' 라고 하였다.

 

조선시대에 황칠나무는 수액(水液)과 수지(樹脂)를 분리하여 수액은 금칠로 이용하였고,

수지는 안식향(安息香)으로 이용하였다.

순조 때 유희는 여러 사물을 설명한 <물명고(物名攷)>라는 책에서 황칠나무를 설명하면서

“기름같이 맑은 것은 수안식향(水安息香)으로 삼고,

말려서 덩어리된 것은 건안식향(乾安息香)으로 삼는다”라 하였다.

안식향은 사람 몸을 편하게 하고 여러 종류의 역기(疫氣)를 억제시키는 효과가 있어

안식향이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이를 향으로 피우면 피로가 풀리고

남성에게는 신장을 강화시켜주고 여성에게는 생리불순 등을 해소해주며,

갑작스런 심장병이나 어린이 복통, 어린이가 놀랐을 때, 관절통 등에 효과가 있다고

<본초강목>에서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효과로 인해 안식향은 많은 약재로도 사용되었는데

명나라 때 주숙은 그의 저서 <보제방>에서

안식향으로 만들 수 있는 약재를 무려 100여 가지가 넘게 소개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숙종 대에 이미 안식향으로 ‘지보단(至寶丹)’을 만들었는데,

이 약재는 열을 내리고 정신을 안정시키는

세 가지 보약인 온병삼보(溫病三寶 ; 우황안궁환, 지보단, 자설단)에 들 정도이다.

이 약재는 효과가 현저하고 약품이 귀중하여 ‘지극한 보배(지보 ; 至寶)로 불리게 되었는데,

열을 내리고 독을 없애는데 사용되었고 안정제의 효과가 있으며

뜨거운 기운이 가슴에 들어가 답답한 경우나 어린아이의 경기, 중풍, 더위먹은 데 효과가 크다 하였다.

- 진사문(陳師文), <태평혜민화제국방(太平惠民和劑局方)>

 

다산 정약용 선생의 ‘황칠(黃漆)’이란 시(송재소 교수 번역) 일부 내용을 보면

 

그대 아니 보았는가,

궁복산(弓福-장보고의 호山) 가득한 황금빛 수액을

그 빛이 맑고 고와 반짝 반짝 빛이 나네

껍질 벗겨 즙을 받기 옻칠 받듯 하는데

아름드리나무에서 겨우 한잔 넘칠 정도

상자에 칠을 하면 검붉은 색 없어지니

잘 익은 치자물감 어찌 이와 견주리요

이 나무의 명성이 천하에 자자해서 박물지에 줄줄이 그 이름 올라있네.....

 

이로 보아 당시에도 채취하기가 매우 어려웠음을 알 수 있다.

 

다산의 황칠시에서 '아름드리에 겨우 한 잔'이라고 표현했듯이

수액채취량이 극소량으로 황칠의 희귀함에서 오는 민폐가 얼마나 심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며

황칠나무의 존재를 우리역사에서 증발시킨 원인이었기도 한다.

중국 자금성의 용상과 어좌를 비롯한 각종 집기류와 천장, 벽면을 모두 도장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황칠액이 필요했겠는가.

병자호란을 거친 후 청나라는 조선의 임금에게까지 황칠 사용을 금지한 뒤,

세계 유일의 황칠 생산지인 전남 해안에 대한 감시와 수탈을 강화한다.

 

<조선왕조실록> 정조 18년(1794) 12월 25일조를 보면

 

호남 위유사 서용보가 올린 글 중에 "완도는 바로 황칠이 생산되는 곳이기 때문에

본도의 감영, 병영, 수영 및 본도의 지방인 강진 · 해남 · 영암 등 세 읍에다 모두 연례적으로

바치는 것이 있고 왕왕 더 징수하는 폐단이 있습니다.

근년 이래로 나무의 산출은 점점 전보다 못한데 추가로 징수하는 것이 해마다 더 늘어나고,

관에 바칠 즈음에는 아전들이 농간을 부리고 뇌물을 요구하는 일이 날로 더 많아지니

실로 지탱하기 어려운 폐단이 되고 있습니다.

금년에 바람의 재해를 입은 후에 큰 나무는 또한 말라 죽은 것이 많고

겨우 어린 나무 약간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황칠은 또한 기물의 수요에 관계되는 것인 만큼

마땅히 배양하고 심고 가꾸어 국용에 대비하여야 할 것입니다.

지금부터 10년을 한정하여 영과 읍에 으레 바쳐오던 것을 아울러 감면하여

오래 자라는 실효가 있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비록 옛날 상태를 회복하여

규례대로 납부하게 된 뒤라도 과외로 징수하는 폐단은 엄격히 조목을 세워 일체 금단해서

영원히 섬 백성들의 민폐를 제거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라는 내용이 있다.

 

이처럼 농민들은 공물 수탈을 피하고자 나무를 베어내고 또 있는 곳을 감추었다고 한다.

그런 가운데 제주도와 완도, 보길도 등에 있던 황칠나무는 서서히 잊혀지게 되었던 것이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이러한 당시의 현실을 <茶山詩文集> 권4, 詩 黃漆에서 개탄하고 있다.

 

공물로 지정되어 해마다 실려가고〔貢苞年年輸匠作〕

징구하는 아전들 농간도 막을 길 없어〔胥吏徵求奸莫防〕

지방민들 그 나무를 악목이라 이름하고〔土人指樹爲惡木〕

밤마다 도끼 들고 몰래 와서 찍었다네〔每夜村斧潛來戕〕

  

'수탈을 견디다 못한 백성들은 황칠나무에 구멍을 뚫고 호초를 넣어 나무를 말라죽게 하거나

밤에 몰래 도끼로 아예 베어내 버렸다' (목민심서 '산림'편)

 

'갑인년 어느 날 소금비 내린 뒤로 모조리 말랐다.' (다산 탐진촌요 제 2수)

 

다산은 황칠나무의 '멸종'을 중국 황실의 횡포와 1801년에 내린 소금비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4) 전설의 갑옷 명광개(明光鎧)와 황칠(黃漆)  

 

 '전설의 금빛 도료'라고 칭하는 황칠(黃漆) 유물이 처음으로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2006년 경주 계림 북편 황남동 '신라제사' 유적에서 발굴한 도기 그릇에

담긴 채 확인됐다. 황칠나무는 다른 수종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독특한 분비구조를 갖는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권 제5 무왕(武王) 27년(626) 조 기록은 다음과 같다.

“(백제가) 당에 사신을 보내 명광개(明光鎧)를 바치면서

고구려가 길을 막고 상국(上國. 당나라)에 조공하는 길을 막는다고 호소했다.

이에 (당) 고조(이연. 李淵)는 산기상시(散騎常侍)인 주자사(朱子奢)를 백제로 보내어서는 조서를 내려

우리(백제)와 고구려가 맺힌 원한을 풀라고 달랬다.”

(二十七年, 遣使入唐, 獻明光鎧, 因訟高句麗梗道路, 不許來朝上國, 高祖遣散騎常侍朱子奢,

來詔諭我及高句麗平其怨)

 

명광개(明光鎧)가 도대체 무엇이기에,

백제는 당나라에 뇌물로까지 바치면서 당나라가 고구려에 압력을 가해달라고 부탁했을까?

명광개는 글자 그대로는 빛을 발하는 갑옷이라는 뜻이다.

명광개는, 어깨와 흉갑이 분리된 피박 분리형 갑옷으로,

어깨나 허벅지등의 보호구는 찰갑으로 되어있고 가슴과 등판은 철판으로 되어있는 갑옷이다.

 

 '개(鎧)'라는 글자는 쇠로 만든 갑옷이다. 

이 글자는 선진(先秦)시대 문헌인 관자(管子)의 지수편(地數篇)에

 “칼과 갑옷을 만들었다”(爲劍鎧)라는 표현에서 벌써 보인다.

 

나아가 이 글자를 합성어로 활용한

 ▲ 개갑(鎧甲, 삼국지 오서 제갈락전 <諸葛恪傳>)

 ▲ 개주(鎧胄, 구당서 토번전<吐蕃傳>)

 ▲ 개마(鎧馬. 진서<晉書> 왕준전<王浚傳>)  등의 말도 있고, 모두 갑옷과 관련된 말이다.

  

갑옷을 어떻게 하면 금빛이 나게 할 수 있을까?

가장 간단한 방법으로는 황금을 그대로 갑옷으로 주물하는 방법이 있겠지만,

금은 속성이 물러 갑옷으로 사용하기는 힘들다.

신라 금관만 해도 무엇인가로 지탱을 해 주지 않으면 힘없이 무너져 내린다.

따라서 갑옷에 광명(光明)을 주는 방법은 재료는 쇠로 하되,

그런 색깔을 내는 도료를 입히는 방식을 생각할 수 있다.

 

백제에서 당나라에 뇌물로 바쳤다는 광명개란 전설의 갑옷은

바로 쇠갑옷에다가 황칠(黃漆)을 입힌 것임은 이와 비슷한 내용을 전하는

다른 문헌기록에서 추측이 가능하다.

북송(北宋) 시대 왕흠약(王欽若)과 양억(楊億) 등이 편찬한

백과사전류인 <책부원구(冊府元龜)>라는 문헌에는

“당 태종(이세민)이 정관(貞觀) 19년에 백제에 사신을 보내 산문갑(山文甲. 의전용 갑옷)에 입힐

금칠(金漆. 황칠)을 요청했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정관 19년(645년)은 백제 의자왕 재위 9년째가 되는 해다.

 

<삼국사기> 무왕 조에서 말하는 연대와 20년 가량 차이가 있지만

본질은 같다는 사실을 단박에 알 수 있다. 이 두 기록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당나라에서는 무왕이 바친 명광개를 한참 탐내다가

의자왕때는 아예 사신을 보내서 황칠을 달라고 조른 것이다.  

 

황칠은 야생에서 자생하는 황칠나무에서 채취한 수액(樹液)을 가공한 칠을 말한다.

통상 칠이라면 붉은빛을 내는 주칠(朱漆)이나 검은색을 내는 흑칠(黑漆)을 생각하기 쉽고

실제 이런 칠이 가장 흔했으나, 황칠은 그 희귀성 때문에 중국에서도 이처럼 탐을 낸 물품이었다.

<구당서(舊唐書)> 동이전(東夷傳) 백제 조에는

"백제에는 섬이 세 개가 있으니 그곳에서 황칠이 난다. 6월에 칼로 그어 수액을 채취하니,

색깔은 황금색이다"고 했다.
중국측에서 이렇게 백제산 황칠을 특별히 언급한 까닭은

그것이 중국에서도 구하기가 매우 힘든 특산품이었음을 암시한다.

이런 한반도산 황칠은 고려시대에 접어들어서도 중국에서 많은 관심을 기울인 듯하다.
12세기 초 고구려 숙종
무렵에 송(宋)나라에서 보낸 사신단 일원으로

고려를 방문한 적이 있는 손목(孫穆)이 지은 <계림유사(鷄林類事)>에는

당시 통용된 고려말을 사전처럼 풀어놓았는데

그 중에서 "칠을 (고려사람들은) 황칠이라 부른다(漆曰黃漆)" 라고 했다.

나아가 같은 송나라 사신으로 고려를 다녀간 서긍(徐兢)이 남긴 <고려도경
(高麗圖經)>에는

"황칠이 나주(羅州)의 조공품이다"고 했다. 여기서 나주는 지금의 전라도 나주일 듯도 하지만

나주라는 지방에서 중국에다가 직접 조공하기는 힘든 까닭에

신라(新羅)를 지칭할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고려에서 "황칠은 섬에서 생산되는데 6월에 수액을 채취하니 그 빛깔은 금과 같으며

볕에 쬐어 건조시킨다. 본래는 백제에서 났으나

지금은 (중국의) 절강 사람들은 이를 일러 '신라칠(新羅漆)'이라 한다"고 했다.

이로써 삼국시대에 황칠은 한반도에서는 백제의 도서 지역 생산품이 널리 알려졌다가

그곳을 나중에 신라가 점령하고는 중국에다가 특산물처럼 바치거나 팔았으며,

그런 전통이 고려시대까지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고대 동아시아 세계에서는 오직 한반도 남부 해안지대에서만 생산되던 '전설의 도료' 황칠은

이후 멸종되다시피 했다. 중국의 연이은 황칠 조공 요구에 시달린 주민들이 못살겠다며,

황칠나무들을 뽑아버리고 베어 없앤 것이다.
그러다가 20여 년 전, 전남 해남에서 기적적으로 야생 황칠나무가 발견됨으로써

재생의 길을 열었으며, 그에 더해 경주 황성동 계림 북편 신라시대 제사 유적에서

그런 황칠 안료를 담은 유물까지 출현하기에 이르렀다.

황칠이 백제만의 특산이 아니라

신라 또한 생산했을 가능성을 유력하게 뒷받침하는 증거라 할 수 있다.
- 2007년 2월 9일, 연합 뉴스, 김태식 기자

 

 
 참고 - (철갑옷 : 황칠나무 수액으로 황칠한 갑옷 명광개)   

 

        

 

                 (사진 : 일본의 명광개 )

 

                            (중국 무사의 명광개)

                                                                              

      

명광개는 방어 범위가 넓어 방어력이 보다 우수했다.

가슴 부분과 등에 호심(護心)이라는 판을 넣어 해당 부위의 방어력을 비약적으로 높인 것이 특징으로,

이 호심이 햇빛이 반사되어 거울과 같이 빛났기 때문에 명광개라 하였다고 한다.

이것의 높은 방호력을 입증해 주는 일화가 전해지는데,

북주의 장군 채유가 명광개를 입고 전장에 나갔을 때 적들이 도저히 그를 감당할 수 없어

그를 철맹수라 부르며 두려워했다 한다.

명광개와 같은 우수한 개갑의 발명은 당조 중장기병의 전력을 한층 강화시켰던 것이다. 

 

이 명광개는 고구려에서도 제작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중국의 명광개와 같은 형태의 갑옷이 고구려 벽화에선 전혀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중국과 고구려, 백제 등의 명광개는 형태의 차이가 있을 수도 있다.

신라의 경우 동으로 찰갑을 만들거나 철갑 위에 동을 도금한 방식의 갑옷을 제작하였는데,

이것이 철로 된 것보다 훨씬 화려하게 빛났다고 한다.

때문에 고구려, 백제의 명광개도 이런 식으로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 연주 Orientango(아르헨티나 교포) /  "고향의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