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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남산의 또다른 발견 - 열암곡 마애여래입상

Gijuzzang Dream 2007. 11. 2. 16:11

 

 

 

 

 

경주 남산 열암곡 마애여래 입상

 

 

(1)

2005년 10월 경주시 노곡리 열암곡(列岩谷) 계곡에서

석불좌상(경북도문화재 113호)의 사라졌던 불상머리를 발견하여

불상머리를 복원하고 정비사업 일환으로 근처 지표조사를 하던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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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견된 석불좌상의 불상머리 - 오른쪽사진은 컴퓨터그래픽으로 합성한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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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 열암곡 제3寺址의 모습

지난 5월 22일 석불좌상이 있는 위치에서 약 20m 떨어진 곳에서

거대한 마애불의 몸통과 발, 연화대좌를 발견하였다.

발견당시 마애불은 왼쪽 다리를 제외한 모든 부분이 흙에 덮인 상태였다.

 

5월 22일, 부처님오신날 이틀 전,

경주 남산 열암곡의 통일신라시대 대형 마애불을 발견한 주인공은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박소희(26ㆍ여) 연구원이다.

3월까지 분황사발굴현장에 근무했던 박씨는

목 없는 부처로 유명한 석불좌상이 있는 열암곡 발굴에 자원했다.

박씨는 "이틀 전 소주병을 따다가 경품에 당첨된 꿈을 꾸고

뭔가 일이 잘 풀릴 것 같다는 생각을 했는데 엄청난 발견을 하게 됐다"며

"그 날도 석불좌상이 있는 절이라면 금당지도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에

주변을 기웃거리다가 발견하게 됐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문화재청은 박씨에게 불상발견의 공로를 인정해 표창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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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견 당시 머리를 아래로 한 채 쓰러져 있는 마애불이 조각된 암석은

원래 위치에서 경사면을 따라 앞쪽으로 넘어진 상태였기 때문에

그냥 커다란 너럭바위처럼 보인다.

서 있던 자리에서 앞으로 넘어져 불상을 조각한 정면이 땅에 닿아 있기 때문에

불상의 자세한 모습은 알 수 없었으며,

특히 쓰러진 불상의 얼굴(相好) 부분 밑에는 암반이 있어 기대조차 하지 않았으나,

불상의 육계가 먼저 땅에 닿아 얼굴 부위와 불과 5㎝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암반과 충돌하지 않고

1300년전 통일신라시대, 제작당시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완벽한 모습으로 발견된 열암곡 마애여래입상 !!

 

 

(2)

열암곡 마애여래 입상은

화강암 (약 250×190×620㎝, 무게 약 70t)의 한 면을 이용, 고부조(高浮彫: 돋을새김)하였는데,

불상 머리에서 발끝까지 460cm, 발아래 연화대좌가 100cm로,

전체 높이가 560cm에 이르는 대형 마애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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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견당시 조각된 면이 땅에 닿아 있어 어깨와 손 일부를 제외한 나머지는 볼 수 없었다.

이에 따라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추가 조사 작업을 통해

불상의 대좌와 양 다리, 가슴 및 어깨를 확인,

마침내 경주 남산 열암곡(列岩谷) 450m 고지 8부 능선에 엎어져 있는

마애여래입상의 상호(相好)와 전체 모습을 9월10일 공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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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2일 발견 당시에는 발과 옷의 끝자락만 보였으나

문화재청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발견 후 꾸준히 흙을 파내,

지금은 얼굴, 불상의 가슴 및 어깨와 목 부분까지 기우뚱하게 드러나 있다.

연구소는 암반층에 45도 경사로 엎어져 있어

사람이 허리를 굽히고 기어 들어가다시피 해야만 제대로 볼 수 있는

이 열암곡 마애여래입상은 새긴 뒤 얼마 지나지 않아 화강암 받침이 붕괴,

불상을 새긴 면이 땅에 묻힘으로써 완벽한 상태로 보존될 수 있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5m가 넘는 대규모 불상인 데다 땅속에 거의 묻혀있는 형태로

1300년의 세월을 지나면서도 얼굴이 완벽한 상태로

원형에 가까운 모습을 지닌 마애불이라는 점은 이 불상의 가치를 높여주고 있다.

 

이마로 바윗돌을 받치며 쓰러져 있었던 덕에 풍화를 입지 않았다.

특히 우뚝한 콧날은 암벽 바닥에서 단 5cm 떨어져 있어

아슬아슬하게 보존돼 왔음을 그대로 보여 줬다.

 

 

(3)

불상의 머리는 산비탈 아래쪽에 파묻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엎어진 마애불을 보려고 땅바닥에 누워 안쪽을 살펴보면,

가슴에 얹은 왼손의 엄지손톱과 목의 세 줄 가로 주름,

배 아래로 떨어지는 U자형의 옷 주름이 뚜렷하다.

 

육계(肉髻: 부처의 정수리에 불룩 솟아오른 부분)가 높고 민머리(소발, 素髮)이며,

타원형의 얼굴에는 오뚝하게 솟은 코와 도톰한 뺨,

아래로 내려뜬 길고 날카로운 눈매가 평면적으로 처리되어 있는 등

유사한 예를 찾기 어려운 특이한 모양이어서 주목된다.

불교조각사에서 볼 때, 이 마애불의 볼륨있는 상호(相好)와 날카로운 눈매에서 느껴지는 엄숙함은

통일신라 불상의 전형적 특징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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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는 발제선(髮際線: 머리털이 난 끝선)에서 어깨에 이를 정도로 매우 크며

목에는 삼도(三道)가 입체적으로 표현돼 있으며

어깨는 넓고, 가슴은 펴고 있어 매우 당당한 모습이다.

 

또 불상의 수인(手印)

왼 손등을 바깥으로 해 손가락을 가지런히 펴서 가슴 위에 얹었으며

오른손 역시 손등이 밖을 향한 채 엄지손가락을 안으로 감싼 채

네 손가락을 가지런히 하복부에 대고 있는 특이한 형식이다.

 

왼손은 가슴에 대고 오른손은 늘어뜨린 이러한 수인(手印)도 통상적인 정형과 달라

지금까지 남산 왕정골(석조여래입상)을 비롯,

동국대소장 마애불 등 몇 예에서만 확인된 바 있다.

최성은 덕성여대 미술사학과 교수도

“통일신라 때인 8세기부터 유행한 전형적인 불상”으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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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의(法衣)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발목까지 길게 내려오는 우견편단(右肩偏袒) 형식으로,

아래로 내려올수록 간격이 넓어지는 옷 주름이 9개 표현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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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두발은 발끝이 밖으로 향하게 벌리고 있으며

연화대좌는 5장의 꽃잎을 낮게 조각했다.

 

이 마애여래 입상은 약 4등신(等身)으로 몸에 비해 머리부분이 크게 표현돼 있어

예불하는 사람이 마애불을 우러러 볼 때의 비례감을 고려해

시각적인 효과를 잘 나타내려고 한 점이 돋보인다.

 

정은우 동아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는

열암곡 마애여래입상이 맨 처음 발견된 5월 당시에

“불상의 얼굴이 완전히 드러나야 정확한 연대를 알 수 있겠지만,

U자형의 평행한 옷 주름과 대충 뭉툭하게 처리한 발모양 등 표현 양식으로 보아

8세기 중후반부터 9세기 초에 만들어진 것 같다”며.

“전체적으로 양감이 뚜렷하고 우람한 모습을 하고 있어

훌륭한 불상임에 틀림없다”며 “감동적”이라고 말했었다.

 

그런데, 정은우 동아대 교수는

"5월 불상이 처음 공개됐을 당시 옷주름과 발 모양만을 근거로

9세기 불상으로 추정했으나 측면 얼굴의 양감이 매우 뛰어난 점에서

8세기까지 제작연대를 올릴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최성은 덕성여대 교수 역시

"얼굴 측면의 양감은 매우 훌륭해 8세기께 통일 신라 불상으로 평가할 수 있으나

옷주름이나 발의 새김이 단순하고 형식화된 감이 있다"며

"현재로서는 8-9세기 정도로 제작연대를 폭넓게 잡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 임남수 영남대 교수는

열암곡 불상이 일반적인 수인을 하고 있지 않다는 점을 지적하며

"드문 경우이기는 하나 열암곡 불상과 같은 수인을 취한 불상은 주로 산지에서 발견된다"며

"특별한 영력을 갖춘 서상(瑞像)으로 조성됐을 수 있다"고 추정했다.

 

이상의 특징으로 보아 남산 열암곡 마애여래입상은 8세기 후반 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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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열암곡 마애여래 입상은,

 

첫째, 원래 어디 있었을까.

현재로선 주변에 병풍처럼 둘러선 암벽의 일부였다가

지진 등 천재지변이나 다른 어떤 요인으로 암벽에서 떨어져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둘째, 왜 이제 발견됐을까.

존재가 전혀 알려지지 않았고 관련 기록도 전무한 상태에서 평소 사람이 다니지 않는 숲 속에서

땅에 엎어진 채 있어서 발견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천년고도(千年古都) 경주(慶州) 남산은

‘천불천탑불국토’라는 말에 걸맞게 불상이 널려 있다.

지금까지 확인된 것만도 마애불 50점, 석불 300점이 넘는다.

이곳 마애불 중에는 키가 10m에 이르는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3~4m 정도여서 이번에 발견된 것은 매우 큰 편에 속한다.

 

열암곡 마애불은 삼화령 삼존불, 배리 삼체불, 석굴암 본존불로 이어지는

신라 불상의 큰 흐름을 이어가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땅속에 거의 묻혀있는 형태로 약 1300년의 세월을 지나면서도 손상되지 않고

거의 원형에 가까운 모습을 지닌 마애불이라는 점 또한

이 불상의 발견이 지니는 중요한 의의라고 할 수 있다.

 

셋째, 어떻게 여래입상을 일으켜 세울 것인가.

70톤으로 추정되는 불상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일은 쉽지 않다.

 

군용 헬기를 띄워 와이어로 끌어당기려 해도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다.

연구소측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헬기는 보통 50톤 이하의 물건을 세울 때 쓰이기 때문에

70톤의 불상을 세우기에는 불가능한 것이다.

 

불상을 들어올리기 위해서는 대형크레인이 필요한데 문제는 열암곡 불상이 있는 현장은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정도의 좁고 가파른 비탈(길이 500-600m, 폭 2m)의

산중턱에 있는데, 등산로조차 나 있지 않다.

더구나 올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불상의 훼손을 예방하기 위한 작업이 필요한데

현재 불상이 쓰러져있는 땅이 사유지이다.

그리고, 경주 남산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어

길을 내려면 문화재위원회의 승인을 얻어야 하기 때문에 역시 크레인도 어렵다.

 

현재로서는 유압(油壓) 잭(jack)을 사용하는 게 불상을 들어올리는

유일한 해결책이다.

유압잭은 그리 크지 않은 것 여러 개를 이용해

100톤 가까운 물건도 들어올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불상을 세우기에 앞서서 풀어야 할 문제가 있다.

불상이 원래 서 있던 위치를 정확히 찾은 다음에 세워야 한다는 점이다.

불상이 45도 가까운 급경사에서 앞으로 쓰려졌으므로,

원래 자리는 현재보다 경사면 위쪽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한데 연구소측은 “불상 위쪽 지역을 조사했지만, 원래 자리를 찾지 못했다”고 했다.

지 소장은 “불상을 일단 옆으로 누인 뒤 그 자리를 조사하겠다”고 했다.

불상이 앞으로 쓰러지면서 그때 생긴 ‘탄력’으로

오히려 위쪽으로 밀렸을 가능성도 검토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연구소측은 “불상의 원래 자리를 찾게 될 때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이므로

일단 눕혀서 관람객이나 참배객을 맞은 뒤

원래 자리를 찾으면 그 때 세우겠다는 것”이라고 했다.

또한 “불상을 반시계 방향으로 90도 틀어서 눕힐 것”이라고 덧붙였다.

시계 방향으로 90도를 틀면 누일 만한 공간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문화재청은 입상으로 완전히 복원하기에 앞서

마애불의 조각된 부분이 드러날 수 있도록 11월 안에

불상을 90도 회전시켜 와불(臥佛)형태로 일반에게 공개하기로 결정했다.

 

“땅속에 거의 묻혀있는 형태로 있어

약 1300년의 세월에도 거의 원형에 가까운 모습을 지니고 있다”며

이처럼 완벽하게 보존된 신라 마애불은 처음이며,

특히 코가 완벽한 마애불은 드물다고 밝혔다.

“안존조치 이후 와불 형태로 돌을 들어 불상을 친견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 2007년 5월 31일 - 9월 10일

 문화재청, 불교신문, 기타 일간신문 등에서 기주짱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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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남산의 마애불

 

경주 남산 열암곡에서 엎어진 상태로 있던 마애불의 얼굴 모습이 공개되었다.

8세기 후반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이 마애불은

코를 비롯하여 이목구비가 전혀 손상되지 않은 상태이다.

마애불이 새겨진 바위 무게만 해도 70톤이다.

이 거대한 화강암이 쓰러진 상태로 있었기 때문에

마애불의 얼굴 모습이 손상되지 않았다고 한다.

 

한국은 화강암의 나라이다.

국토의 70%가 산이고, 이 산들의 대부분은 화강암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전국의 바위산에는 마애불이 새겨져 있다.

특히 경주 남산은

화강암에 새겨진 마애불과, 불탑, 불상이 가장 많은 산이다.

해발 500미터도 되지 않는 낮은 산이지만 산 전체가 화강암이다.

 

화강암 산은 광물질이 많이 함유되어 있어서 지기(地氣)가 강하게 흐른다.

지기(地氣)가 강하면 종교적 영험도 비례하여 강해진다.

땅 기운이 혈관을 타고 들어와 인간의 뇌세포 어딘가를 자극하기 때문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지기가 강한 곳에는 반드시 종교 시설물이 자리잡고 있는데,

경주 남산은 신라 1000년 동안의 불교유적이 총합(總合)된 곳이다.

남북 8km, 동서 4km 크기의 경주 남산은 산 전체가 불교유적지이다.

200여개의 불상과 탑, 그리고 절터만 150여 군데가 있다.

이 정도면 남산 자체를 ‘불교만다라’로 볼 수 있다.

 

필자가 그동안 답사해본 불교 유적지 가운데, 인상에 남는 곳이 3군데다.

그 중 하나는 미얀마의 ‘바간’이다.

사방 42km의 넓은 평원에 약 2500개의 탑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서 있다.

벽돌로 만든 이 탑들은 크기가 다양하다.

네모형도 있고, 원추형도 있는데,

나무만 듬성듬성 서 있는 대평원에서 석양 무렵에

고색창연한 탑들이 서 있는 모습을 보면 장엄과 엄숙을 느낀다.

시간이 정지해 있는 고요함 속에 들어와 있다는 느낌을 주는 곳이

미얀마의 바간이다.

 

둔황(敦煌)의 석굴도 대단하다.

사막 위의 돌산에다가 700개가 넘는 굴을 파고,

그 속에다가 불화들을 그려 넣었다.

1000년의 세월이 여기에 투자되었다. 미얀마 바간이 ‘탑’이라고 한다면,

둔황은 ‘석굴벽화’이고,

경주 남산은 화강암에 새겨진 ‘마애불과 불상’이 압권이다.

 

세계 3대 불교 유적지에 포함시켜도 전혀 손색이 없는 유적지가 바로 남산이다.

- 조선일보, 2007-09-12, 조용헌살롱

 

 

(6) 마애여래입상

 

‘절은 별처럼 총총, 탑은 기러기처럼 줄줄이!’

천년 왕국 신라의 옛 도읍 경주를 일컫는 말이다.

삼국유사를 지은 고려의 승 일연이

당시 경주 모습을

‘사사성장 탑탑안행(寺寺星張 塔塔雁行)’이라고

기록한 데서 유래했다.

얼마나 절이 많았으면 하늘의 별에 빗대었고,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탑이 널려 있었으면

날아가는 기러기 떼에 비유했을까.

그래서 경주는 도시 전체가 살아 있는 박물관이라 할 만하다.

 

경주에서도 가장 많은 유물이 있는 곳은 남산이다.

남북 8㎞ 동서 4㎞에 해발 468m의 그리 크거나 높지 않은 산으로

겉으로 보기에는 여느 산과 다를 바 없지만,

우리 선인들의 크나큰 꿈이 고스란히 서려 있는 성지이다.

 

한 구비 돌면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부처상이 맞이하고

골골이 남아 있는 수많은 절터와 석불·석탑은 아름답고 애틋한 전설도 지니고 있다.

정교한 불상이 많은 남산은 가시적으로 만들어 놓은 도솔천, 곧 극락세상이다.

 

누구든지 욕심과 성냄·어리석음의 3독(三毒)을 멀리하는 도를 닦아

깨닫고 자비를 베풀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서원(誓願) 신앙을 펼쳐 놓은 곳이다.

부처의 형상을 새기고 불탑을 곳곳에 쌓은 것은 대단한 공덕이다.

부처를 닮기 위함이다.

 

도법스님은 시 ‘내가 본 부처’에서 이렇게 읊고 있다.

“우리의 꿈인 평화로운 사람, 그는 붓다이다. /    …    /

천년 전 꿈이 바로 오늘의 꿈이다. /     …    /

싯다르타가 걸어간 길이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이다.”

 

세월을 뛰어넘어 오늘 이 시대에도

부처를 닮고자 하는 노력이 연면히 이어지고 있다.

신라시대나 지금이나 있는 이들은 번듯한 사찰과 탑을 세워 공덕을 쌓고,

가난한 사람들은 간절한 서원을 하거나

손수 망치와 끌을 갖고 정성을 다해

바위나 동굴 등에 자신의 미래 모습을 불상으로 조각했던 것이다.

마애불이다.

 

경주 남산 열암곡에서 8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국보급 마애 여래입상이 흙 속에 묻혀 있다가 지난 5월

국립 경주문화재연구소 발굴팀에 의해 발견됐다.

완벽한 형태로 1300여년 만에 잠에서 깨어난 부처이다.

한민족의 진운과 평화세계를 여는 부처님의 가피력이 나투시길 합장재배한다.

- 세계일보, 2007-09-12, 설왕설래, 황종택 논설위원

 

 

                             

                                                       ... 박강수 / 바람아 ...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