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끼며(시,서,화)

연암 박지원 - 누님을 보내며

Gijuzzang Dream 2008. 5. 23. 16:40
 
 
 

 

 박지원 - 누님을 보내며

 

 

 

 

孺人의 이름은 아무이니, 반남 박씨이다. 그 동생 趾源 仲美는 묘지명을 쓴다. 

 

유인은 열 여섯에 德水 李宅模 伯揆에게 시집 가서 딸 하나 아들 둘이 있었는데,

신묘년 9월 1일에 세상을 뜨니 얻은 해가 마흔 셋이었다.

지아비의 선산이 아곡(鵝谷)인지라, 장차 서향의 언덕에 장사 지내려 한다.

 

백규가 그 어진 아내를 잃고 나서 가난하여 살 길이 막막하여,

어린 것들과 계집종 하나, 솥과 그릇, 옷상자와 짐궤짝을 이끌고

강물에 띄워 산골로 들어가려고 상여와 더불어 함께 떠나가니,

내가 새벽에 斗浦의 배 가운데서 이를 전송하고 통곡하며 돌아왔다.

 

아아! 누님이 시집가던 날 새벽 화장하던 것이 어제 일만 같구나.

나는 그때 막 여덟살이었다. 장난치며 누워 발을 동동구르며 새 신랑의 말투를 흉내내어

말을 더듬거리며 점잖을 빼니, 누님은 그만 부끄러워 빗을 떨구어 내 이마를 맞추었다.

나는 성나 울면서 먹으로 분에 뒤섞고, 침으로 거울을 더럽혔다.

그러자 누님은 옥오리 금벌 따위의 패물을 꺼내 내게 뇌물로 주면서

울음을 그치게 했었다. 지금에 스물 여덟 해 전의 일이다.

말을 세워 강 위를 멀리 바라보니,

붉은 명정은 바람에 펄럭거리고 돛대 그림자는 물 위에 꿈틀거렸다.

언덕에 이르러 나무를 돌아가더니 가리워져 다시는 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 강 위 먼 산은 검푸른 것이 마치 누님의 쪽진 머리 같고,

강물 빛은 누님의 화장 거울 같고, 새벽 달은 누님의 눈썹 같았다.

그래서 울면서 빗을 떨구던 일을 생각하였다.

유독 어릴 적 일은 또렷하고 또 즐거운 기억이 많은데,

세월은 길어 그 사이에는 언제나 이별의 근심을 괴로워하고

가난과 곤궁을 근심하였으니, 덧 없기 마치 꿈 속과도 같구나.

형제로 지낸 날들은 또 어찌 이다지 짧았더란 말인가.

 

떠나는 이 정녕코 뒷 기약을 남기지만     

오히려 보내는 사람 눈물로 옷깃 적시게 하네.         

조각배 이제 가면 언제나 돌아올꼬                  

보내는 이 하릴 없이 언덕 위로 돌아가네.  

          

去者丁寧留後期
猶令送者淚沾衣
扁舟從此何時返
送者徒然岸上歸

 

 

죽은 누님을 그리며 지은 묘지명이다.

 

번역만으로는 원문의 곡진한 느낌을 십분 전할 수 없는 아쉬움이 있지만,

이것만으로도 애잔하고 가슴 뭉클한 한편의 명문이다.

연암과 죽은 누님과는 여덟살의 터울이 있었다.

어려서 그는 누님에게 업혀 자랐을 터이다.

 

열 여섯에 시집간 누이가 마흔 셋의 젊은 나이에 고생만 하다가 병을 얻어 세상을 떴다.

아내를 잃자 살 도리가 막막해졌다고 했으니,

그나마 그간의 생계도 누님이 삯바느질 등으로 꾸려왔음이 분명하다.

자형 백규는 선산 아래 땅뙈기라도 붙이고 살아볼 요량으로

상여가 나가는 길에 아예 이삿짐을 꾸려 길을 떠나고 있다.

그런데 그 세간이라는 것이

겨우 솥 하나, 그릇 몇 개, 옷 상자와 짐 궤짝 두어 개가 전부라니,

그 궁상이야 꼭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런데도 연암은 그 비통함을 말하는 대신,

전혀 엉뚱하게도 누님이 시집 가던 날 새벽에 자신과의 사이에 있었던

절로 미소를 자아내는 한 에피소드를 떠올리고 있다.

신부 화장을 하고 있던 누님 곁에서,

허공에 대고 발을 동동거리며 새신랑 흉내로 누이를 놀리던 여덟살 짜리 철 없던 동생.

누이는 부끄러움을 못 이겨 "아이! 몰라."하며 머리 빗던 빗을 던졌고,

그 빗에 이마를 맞은 동생은 "때렸어!"하며 악을 쓰고 울었다.

그래도 누이는 "흥!"하며 야단하는 대신, 패물 노리개를 꺼내 주며 동생을 달래었다.

아! 착하고 유순하기만 한 누이여.

이제 누님의 상여를 실은 배가 떠나가고 있다.

자형, 그리고 조카 아이들과 하직의 인사를 나누고, 배는 새벽 강물 위로 미끄러져 간다.

바람에 펄럭거리는 붉은 명정, 돛대의 그림자를 흔드는 푸른 물결,

그나마도 언덕을 돌아가서는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었다.

"처남! 세월이 좋아지면 내 수이 돌아옴세"하며 떠나던 자형의 말이 귀끝에 맴돈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음을 알기에 그 허망한 기약은 외려 가슴 아프다.

이제 누님의 모습은 다시는 볼 수 없는가. 그러나 보라.

강물의 원경으로 빙 둘러선 새벽 산의 짙은 그림자는

마치 시집가던 날 누님의 쪽진 머리 같고,

배 떠난 뒤 잔잔해진 수면은 내가 침을 뱉어 더럽혔던 그 거울 같지 아니한가.

또 저 너머 초승달은 화장하던 누님의 눈썹만 같다.

그러고 보면 누님은 떠난 것이 아니라, 강물로 달빛으로 먼 산으로 되살아나

나의 아픈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것만 같다.   

필자는 이 글을 강독할 때마다 나도 모르게 눈자위가 촉촉해 짐을 느끼곤 한다.

지난 번 강의에서는

연신 눈물을 훔치다 못해 흐느끼는 한 학생 때문에 강의실 전체가 우울해지고 말았다.

학생들에게는 반드시 감상문을 요구하였다.

 

다음은 그 중의 몇 대목을 추린 것이다.

"오히려 절제된 문장에 누이를 잃은 슬픔이 절절히 배어있는 듯 하다.

몇 백년을 뛰어넘어 글로써 지금 사람의 마음을 흔들 수 있다면

가히 대단한 문장가라 아니할 수 없다."

 

"무능한 매형에 대한 원망, 어린 조카들에 대한 연민, 행복했던 어린 시절이

이제는 더 이상 돌아올 수 없음을 깨닫는 아쉬움,

이런 감정들이 너무도 진하게 문장 전체에 녹아들어 있어

누님을 애도하는 박지원의 마음을 더욱 절절하게 표현해 주고 있다."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는 글이다.

내 눈 앞에 글의 내용이 영화처럼 지나가는 것도 같았다.

좋은 영화를 보고 난 후에 한참동안 자리에서 일어설 줄 모르는 것처럼,

글이 끝났는데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이별은 슬프지만 너무도 아름다운 것이다."

 

"처음에는 묘지명이라는 제목이 으시시하고 메말라 보이는 인상을 풍겨,

그냥 수업의 일부로써 읽지 않으면 안되는 글이라는 선입견을

이 글은 무참히도 박살내 버렸다.

아름다운 글은 정직한 글이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身土不二라더니, 역시 우리나라 글이 우리 정서에 잘 맞는 것 같다."

 

"떠나는 이의 뒷 기약을 믿을 수 없는 보내는 이의 하릴 없는 마음,

돌아 볼수록 새록새록 다가드는 옛 기억의 처량함을 등뒤로 업고,

말 머리를 돌려 언덕으로 올라서는 연암의 뒷모습이 보이는 듯 하다."

 

또 어떤 학생은 김지하 시인의 시 〈호랑이 장가가는 날〉의

"누님/ 누님/ 누님/ 부름은 마음 속에서만 울다 그치고/

빗방울은 얼굴 위에 눈물로 그저 흐르고"를 적었고,

다음과 같은 글로 필자를 감동시키기도 했다.

 

죽은 누이에 대한 너무나 애절하고 정이 넘치는 글이다.

사실, 하마터면 울어버릴 뻔 했다. 국민학교 3학년 때 큰 누나가 시집을 갔다.

그 동안 내 연필을 깎아주던 누나가 시집 간다 하니 걱정이 되어 어느날,

"누나! 누나가 시집 가면 내 연필은?" 며칠 뒤 매형 될 분이 연필깎기를 사다주었다.

그때만 해도 그런 것은 가진 아이가 극히 드물었다.

결국 누나와 연필깎기를 맞바꾸게 된 셈이다.

그런 뒤 나는 예쁘게 깎여 나오는 연필깎기가 좋다는 생각보다는

연필 깎는 누나의 손이 보고 싶어 누나집을 찾아 나섰다가 길을 잃어 버린 적이 있다.

이제 누나도 40살이 넘었다. 건강하시길 빈다.

 

예전부터 묘지명이나 비문은 유묘지문(諛墓之文), 즉 귀신에게 아첨하는 글이라 하여

포(褒)는 있어도 폄(貶)은 없는, 다시 말해 좋은 말만 잔뜩 늘어 놓는 것이 상례이다.

 

그리고 글의 짜임새 또한 규격화 되어 있어,

심지어 한유(韓愈)가 지은 여러 묘지명을 놓고는

사람 이름만 바꿔 넣으면 아무라도 괜찮다는 `衆人同祭之文`의 비난까지 있어 왔다.

 

그런데 연암의 위 묘지명은 그 구상이나 내용이 파격적이다.

오늘날도 누님의 묘지명에다 동생이 자형의 궁상과 거울에 침뱉으며 장난치던 내용을

써서 새긴다고 한다면 모두 펄펄 뛸 것이다.

실제 연암의 글은 당대는 물론 후대에까지 금서로 낙인 찍혀

드러내 놓고 읽혀지지 못했다.

하물며 연암의 손자로, 초기 개화파의 선구였던 박규수 조차도

그가 평양감사로 있을 때 《연암집》을 간행하자는 동생의 말에

공연히 문제 일으킬 것 없다고 묵살했을 정도였다.

 

연암의 처남이자 벗이었던 李在誠은 이 묘지명을 읽고 다음과 같은 평문을 남겼다.

 

마음의 정리에 따르는 것이야 말로 지극한 예라 할 것이요,

의경을 묘사함이 참 문장이 된다. 글에 어찌 정해진 법식이 있으랴!

이 작품은 옛 사람의 글로 읽으면 마땅히 다른 말이 없을 것이나,

지금 사람의 글로 읽는다면 의심이 없을 수 없으리라.

원컨대 보자기에 싸서 비밀로 간직할진저.

 

葬儀 절차를 성대히 함이 지극한 예가 아니다.

망자를 떠나 보내는 곡진한 마음이 담길 때 그것이 지극한 예가 된다.

있지도 않았던 일을 만들어 적고, 상투적 치레로 가득한 글이 참 문장이 아니다.

가슴 아픈 사랑의 마음이 실릴 때라야 읽는 이의 마음을 울리는 참 문장이 된다.

그렇다. 묘지명에 무슨 정해진 법식이 있으랴!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꾸만 정해진 법식만을 가지고,

무슨 묘지명을 이따위로 쓰느냐고 욕을 해댈 터이니

혼자만 읽고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 말라고 했다.

이 말이 또 한 번 읽는 이를 슬프게 한다.

정작 연암 자신은 이 묘지명에 대해 큰 애착을 지녔던 모양으로,

중국 사신길에 오르는 벗에게 중국에 가거든 글씨 잘 쓰는 이에게 부탁하여

이 묘지명을 한벌 써다 달라고 했다는 傳聞도 있다.

 

 

다음은 〈燕巖憶先兄〉이란 시이다.

먼저 세상을 떠난 형님을 그리며 지은 것이다.

 

형님의 모습이 누구와 닮았던고               

아버님 생각날 젠 우리 형님 보았었네.            

오늘 형님 그립지만 어데서 본단 말가           

의관을 갖춰 입고 시냇가로 가는도다.   

          

我兄顔髮曾誰似
每憶先君看我兄
今日思兄何處見
自將巾袂映溪行

 

돌아가신 아버님을 꼭 닮아, 마치 아버님을 보는 듯한 착각마저 들게 하던 형님,

그 형님조차 이제는 세상에 안 계시다.

그리운 형님의 모습을 이제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쓸쓸한 마음에 시냇가로 가서 그 물에 내 얼굴을 비춰 볼 밖에.

연암은 이렇듯 덤덤한 듯 감정의 미묘한 구석을 꼭 꼬집어 내는 마술사이다.

이제 연암 뒷 세대의 고문가인 洪吉周가

《연암집》을 읽고 느낀 소감을 피력한 글 한편을 읽어 보기로 하자.

원제목은〈讀燕巖集(속연암집)〉이다.

                 

 

     어제의 나는 이미 내가 아니다

 

새벽에 일어나 세수하고 머리 빗고 상투를 짜고 이마에 건을 앉히고는

거울을 가져다가 비춰보아 그 기울거나 잘못된 것을 단정히 하는 것은

사람마다 꼭 같이 그렇게 하는 바이다.

내가 성인이 되어 건을 쓸 때, 눈썹 위로 손가락 두 개를 얹어, 이것으로 가늠하매

거울에 비춰 볼 필요가 없었다. 이로부터 혹 열흘이나 한달을 거울을 보지 않았으므로,

젊었을 때 내 얼굴은 이제 이미 잊고 말았다.

벗 삼을만한 사람이 있어 한 마을에 여러 해를 같이 살다가

얼굴도 알지 못한 채 떠나가도 한스럽게 생각되는데,

나와 나는 그 가까움이 어찌 다만 한 마을에 사는 것일 뿐이겠는가.

 

그런데도 이제 내가 내 젊을 적 얼굴을 알지 못하는 것을

한스럽게 여기지 않음은 어째서인가?

천년 전에 사람이 있어, 그 도덕을 스승으로 삼을만 하고

그 문장이 본받을만 하면 나는 그와 한 때에 살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 한다.

 

백년 전에 사람이 있어 뜻과 기운과 의론이 볼만하여도

나는 그와 한 때에 살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 한다.

 

수십년 전에 사람이 있어, 기운은 족히 육합(六合)을 가로지를만 하고,

재주는 천고를 능가할만 하며, 글은 온갖 부류를 거꾸러뜨릴만 하였다.

그가 세상에 살아 있을 때 내가 이미 인사를 통하였으나 미처 만나보지는 못하였고,

미처 더불어 함께 이야기를 나눠 보지도 못하였다.

그런데도 내가 한스럽게 생각하지 않음은 무엇 때문인가?


내가 이미 수십년 전의 나를 알지 못하는데 하물며 수십년 전의 다른 사람을 알겠는가?

이제 내가 거울을 꺼내 지금의 나를 살펴보다가 책을 들춰 그 사람의 글을 읽으니,

그 사람의 글은 바로 지금의 나였다.

이튿날 또 거울을 가져다 보다가 책을 펼쳐 읽어보니,

그 글은 다름 아닌 이튿날의 나였다.

이듬해 또 거울을 가져다 보다가, 책을 펴서 읽어보니 그 글은 바로 이듬해의 나였다.

내 얼굴은 늙어가면서 자꾸 변해가고, 변하여도 그 까닭을 잊었건만,

그 글만은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또한 읽으면 읽을수록 더욱더 기이하니,

내 얼굴을 따라 닮았을 뿐이다.

 

묘한 여운을 남기는 글이다.

어찌하여 그 사람을 만나보지 않았건만 그것을 유감으로 생각지 않는단 말인가.

그것은 그의 글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의 글을 읽노라면 그의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울려나오고,

그의 입김이 끼쳐 나오기 때문이다.

내 얼굴은 하루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데,

그의 글은 언제 읽어도 늘 새로운 감동이 살아 있다.

마치 하루도 같지 않은 내 모습처럼 그의 글은 언제나 한 모습으로 남아 있지 않다.


 

제목은 `연암집을 읽고`인데

한편 전체를 통털어도 연암이라는 글자가 단 한번도 나오지 않는다.

수십년 전에 있었던 어떤 사람,

마음만 먹었으면 인사를 나눌 수도 있었던 그 사람의 이야기만 나온다.

 

내가 읽은 글은 수십년 전 그의 글인데,

거기에 비친 모습은 영낙없이 내 모습이니 이상하지 않은가?

이것은 그의 생각과 지금의 내 생각이 같은 데서 오는 동류의식만을 말하지 않는다.

 

내 생각은 내 얼굴이 변하듯 수시로 변하는데, 어째서 그의 글은 변하지 않는가?

이때 변하지 않는다는 말은 단순히 그 글이 지닌 의미가 퇴색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그의 글에서 변하지 않는 요소란, 언제 어떤 상황에서 읽어도 가슴을 뛰게 하고,

태초의 그 감동을 그대로 지녀 있다는 바로 그점일 뿐이다.

언제 읽어도 새로운 글, 읽으면 읽을수록 낯설어지는 글,

그는 어떻게 그런 글을 쓸 수 있었을까?

홍길주는 《연암집》을 읽고 느낀 감동을 담담한 어조 속에 뭉클하게 담아 내었다.

그는 장광설로 연암 문장의 위대함을 찬양하는 대신,

거울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을 화두삼아 미묘하고 맛깔스럽게 느낌을 표현하고 있다.

연암! 내게 수십년 전 내 모습을 기억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게 한 사람.

어제의 나는 이미 내가 아님을, 우리는 언제나 새롭게 시작해야 함을,

정말 위대한 정신은 시간 속에서 빛이 바래지 않음을 알려준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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