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끼며(시,서,화)

강세황 <벽오청서도>

Gijuzzang Dream 2008. 5. 19. 23:11

 

 

 

 

 

 강세황 <벽오청서도>  

 

 

 

  

강세황, 벽오청서도(碧梧淸署圖). 종이에 수묵담채, 30.5×35.5cm, 개인 소장

 

강세황의 유명한 <벽오청서도(碧梧淸暑圖)>는 그의 대표작의 하나로 너무나 잘 알려진 그림이다.

「개자원화전」의 심석전(심주) 벽오청서도를 충실하게 방(倣)한 것으로

이 때문에 오히려 방작이 얼마나 훌륭한 창작인가를 보여 주는 좋은 예가 된다.

또 이것은 그가 몰두했던 남종문인화풍을 얼마나 격조 있게 구사했는지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직접적인 자료로서도 중요하다.(변영섭의 <표암강세황회화연구>에서 발췌)

 

화면의 오른편 앞으로 얕은 언덕이 있고

몇 개의 피마준이 변형된 짧은 선들이 윤곽과 함께 질감을 이루고 있다.

미점에 가까워 보이는 발묵의 점들을 찍어 언덕과 언덕의 골의 윤곽을 보다 분명히 해주고

아울러 그 중엔 노란색을 섞어 써 얕게 풀들이 나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나게 한다.

 

그 언덕 위로는 주제의 중요한 부분인 오동나무가 바로 서있다.

오동나무 역시 간결한 윤곽선과 청색과 노란색을 섞은 소담스런 발묵점들로 표현되었다.

오동나무의 줄기는 하늘까지 거의 곧게 이어진다.

오동나무 뒤로 또한 주제의 중요한 부분인 초가집이 오동나무 가지에 가려진 채 있다.

 

초가집 앞으로 한 겹의 그늘막이가 늘어져있고 그 아래로 맑은 공기를 쐬려는 듯 마루에 나와 앉은

선비가 몇 개의 간단한 선으로 그려졌고 저고리에는 담담한 선염이 되어있다.

 

뒷편 방 안에는 역시 소담스런 서안이 놓여있다. 집 뒤에는 넓지 않은 대나무 밭이 가꿔져있고

그 오른편으로 아직은 다 자라지 않은 듯한 파초가 역시 발묵과 몇 개의 윤곽선으로 그려져 있다.

 

파초와 대나무가 섞인 앞으로 속세로 통하는 듯한 사립문이 서있다.

초옥의 왼편으로는 넓은 마당이 깨끗하고 반듯하게 마련되어 있는데 동자가 있어서 비질을 하고 있다.

마당은 매우 깨끗하고 또한 주변만 약간의 선염을 하여 상당히 맑은 느낌을 준다.

 

너른 마당의 왼편으로 높은 바위산이 모나고 구불구불한 짧은 선들과 금세 이루어진 듯 이루어져 있다.

미점에 가까운 태점이 군데군데를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경물들 뒤로 노란선염의 원산과 그 뒤로 청색의 원산 무리가 펼쳐져 있다.

상단의 가운데에서 약간 왼쪽으로 첨재가 관서되어있고 그 아래로 백문방인이 찍혀 있다.

 

각각의 경물들이 매우 간소하게 이루어져 있고 전체적으로도 매우 간소하여

조선 선비의 간일하고 맑은 향취가 느껴진다.

 

첨재(添齋)는 강세황이 초년에 썼던 호이다.

여기서 초년이라 함은 그림이 한참 무르익는 중년 이전으로

79세까지 산 표암으로 보면 40대 중반 이전 까지가 된다.

 

보다시피 「개자원화전」에 실린 <심석전벽오청서도>를 방작한 것인데(倣沈石田)

화보의 딱딱하고 마르고 다소 답답한 구성의 그림을 방했으면서도

탁 트인 공간감과 정물들의 배치가 짜임새 있고 발묵과 선들이 부드럽고 자신감이 어려있으면서도

다소 조심스럽게 베풀어져 있다.

특히 노랑, 녹, 청 들의 색채를 담담하게 썼는데 그림 전체의 분위기를 상당히 살려주고 있다.

표암의 맘이 일어 금세 화면을 이루어낸 초년의 득의작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 강세황

자는 광지(光之). 호는 표암(豹庵), 첨재(添齋) 이다. 첨재는 초년의 호이다. 본관은 진주.

녹문 조위봉의 외손이며 백각 강현의 아들. 숙종 39년 계사(1713)생. 음관으로 참봉을 지냈으며,

영조 52년 병신(1776)에 기로과에 합격하고 벼슬은 한성판윤을 지냈다. 1791년 79세로 돌아갔다.

 

글씨와 그림에 뛰어났으니 아버지 강현과 외조부 조위봉이 모두 글씨 잘 쓰리고 이름이 났다.

(국조문과방목)

 

일찍이 연경에 사신으로 갔을 적에 청나라 황제가

그의 글씨를 감상하고 친히 "米下董上"(미불보다는 아래요 동기창보다는 위이다)이라는 네 글자를 써서

편액으로 만들어 하사하였다.

글씨와 그림에 모두 뛰어나서 만년에 스스로 자랑하기를,

"문장에는 퇴지(退之: 한유)요, 글씨에는 희지(羲之=왕희지)요, 그림에는 개지(凱之=顧愷之, 고개지)니,

광지(光之)가 이것을 모두 겸했다."고 했다. (해동호보)

 

난과 대를 잘 그렸다. (진단인물)

 

스스로 난초 그림에 쓰기를,

"우리나라에는 본래 난초가 없어서 옛부터 그린 사람이 없었다.

우연히 옛 그림을 보고서 모방해 그렸으니 그것이 진짜인지 아닌지는 알 수가 없다."

스스로 매화와 대 그림에 쓰기를,

"무릇 그림을 그릴 적마다 배치하고 공간을 매우기가 가장 어려웠고,

매화와 대를 그릴 때는 특히 빈 공간을 시원하게 마들기가 어려웠다."(표암화첩)

 

이상 <근역서화징>에 정리된 내용이다.

 

강세황은 알려져 있다시피 정조 때의 예원의 총수로

삼재 중 하나인 현재 심사정, 강희언 등과 교유하고 김홍도 등의 화원을 양성하고 교유하는 등

매우 활발한 활동을 펼쳤고 당시 큰 영향을 미쳤던 인물이다.

특히 김홍도와의 인연은 매우 유명한데 신분이 다름에도 안산시절 같은 동네의 스승이었고

김홍도의 초년에는 상관으로 김홍도의 중년으로는 예술에 관한 벗으로 교유하였다.

 

또한 청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뒤 서양화법에 관심을 매우 보였고

그것을 수묵화에 적용시키려고 한 흔적도 보인다.

또한 그의 글들을 보면 그는 매우 다재다능한데 또한 유머러스한 면이 인상적이다.

곧고 깊은 성정 또한 그를 존경하게 만드는 한 이유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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