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느끼며(시,서,화)

홍길주의 기행문 - 천하의 지극한 문장

Gijuzzang Dream 2008. 5. 23. 16:46
 
 
 
 
 

 

 천하의 지극한 문장

 - 홍길주의 이상한 기행문

 

 

 


 나는 일찍이 논하였다.

"문장은 다만 책 읽는데만 있지 아니하고, 독서는 단지 책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山川雲物과 鳥獸草木의 볼거리 및 일상의 자질구레한 일들이 모두 독서인 것이다."

 

그 사이에 이런 뜻은 여러 차례 저술에서 펴보였으므로 간혹 글 속에 들어 있다.

지난번 여행 뒤 노닐며 즐긴 나머지에 우연히 그 만나보았던 바를 서술하여

위의 주장을 증명하였으나, 자못 너무 지리하고 시시콜콜함을 병통으로 여겨

文稿에는 기록하지 않았다. 이제 그 조금 자세한 것을 베껴 여기에 남겨둔다.

그 말은 다음과 같다.

 

기축년(1829년, 44세) 4월 3일에 형님을 모시고 아우와 함께 通津에 성묘갔다가

하루밤을 자고서 돌아왔다.

7일에 또 형님 아우와 水落山에 놀러가기로 약속하여 內院庵에서 자고 이튿날에 돌아왔다.

이 두 번의 여행은 천하의 지극한 문장이었다.

그 출발은 모두 새벽이었고, 돌아온 것은 모두 이튿날 석양 무렵이었다.

같이 간 사람은 모두 형님과 나와 아우, 3형제였다. 세 사람이 탄 것은 모두 가마였다.

길에서는 두 번 다 비를 만났으니 대개 같지 않음이 없었다.   

그렇지만 통진에 간 것은 성묘를 위해서였고,

수락산에 간 것은 勝景을 구경하기 위해서였다.

통진에 간 것은 성묘를 위해서였는데, 도중에 용금루(湧金樓)의 빼어난 경치와 만났고,

수락산에 간 것은 승경을 구경하기 위해서였는데, 길에서 興德大阮君의 산소를 배알하였다.

 

용금루의 승경은 갈 때와 올 때 두 번 만났고,

대원군의 산소는 돌아오는 길에 한 번만 배알하였다.

용금루는 처음엔 만나볼 수 없을 거라고 여겼는데 뜻하지 않게 이를 만났고,

대원군의 무덤은 처음부터 지나는 길에 들르려고 마음먹어, 배알하여 살펴봄이 이와 같았다.

 

금루는 두 번 만났는데

파원루(把元樓)가 그 가운데 자리잡고 있어서 용금루가 외롭지 않았다.

그러나 파원루를 오르는 길은 계단이 끊어져 위험하였다.

 

대원군의 산소는 한 번 배알하였는데

판돈(判敦)의 묘를 앞에 두고 하원(河原)의 묘를 뒤에 두어 양 날개로 삼았다.

그러나 판돈의 묘는 그 비문만 읽고 봉분은 보지 않았고,

하원의 묘는 그 비문을 읽고 봉분도 보았지만 절을 올리지는 않았다.

통진 길에는 형님과 나, 아우 외에 하인 하나가 노새를 타고서 따라왔다.

수락산 길에는 3형제 외에 조카 세 사람이 노새와 나귀를 타고, 하인은 걸어서 따라왔다.

그밖에 또 두 손님이 있어 모두 가마를 탔는데,

한 사람은 앞서고 한 사람은 뒤쳐져, 갈 때엔 못 만났지만 돌아올 때는 함께 왔다.

 

통진 길에는 이튿날 돌아올 때 비를 만나 가마꾼이 흠뻑 젖었지만,

수락산 길에는 첫날 산에 들어가 절에서 쉰 뒤에 비를 만나 힘들지 않았다.

그러나 도리어 돌아오는 길에는

큰 바람과 모래 먼지가 일어 두 눈을 치는 바람에 눈을 뜰 수가 없었다.

 

통진 길에는 돌아오는 길에 밤섬[栗嶼]을 건너 마포의 하목정(霞鶩亭)을 올라가기로

약속했으나 비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하는 바람에

음식을 장만해 놓고 마중나와 기다리던 자들이 모두 헛걸음치고 돌아갔다.

수락산 길에는 돌아올 때 갑작스레 길을 바꿔 梧山에 있는 李氏의 별장을 찾는 바람에

먹을 것을 차려 놓고 마중나와 기다리던 자들이 모두 분주하게 그리로 대왔다.

 

무릇 이 모든 일이 또한 한 가지도 같은 것이 없으니,

천하의 지극한 문장이 아니라면 그 누가 능히 이것에 참여할 수 있겠는가?

또 통진 길에서는 두 번을 물과 만났는데 모두 큰 강이었다.

양화도(楊花渡)에서는 가까웠고 용금루에서는 멀리 보였다.

그러나 陽川과 金浦의 사이에서는 멀리 길 오른편에서 당기어 보이는 것이 끊이지 않았다.

 

양화도 뒤편에는 또 보통 깊이의 작은 나루가 하나 있어 양화 나루를 보좌하고 있다.

수락산 길에서도 또한 두 번 물과 만났는데, 모두 기이한 폭포였다.

玉流洞에서는 가까웠고 金流洞에서는 멀리서 보였다.

그러나 德陵과 內院의 사이에서는 산길을 끼고 가는 것이 또한 끊이지 않았다.

두 골짝의 밖에는 또 유채(留債)의 은선대(隱仙臺)가 있어 두 골짝을 비추고 있다.

이를 두고는 아주 같다고 해도 안되고, 같지 않다고 해도 또한 안될 것이다.  

 

통진 길에는 김포의 여관에서 밥을 먹다가 군수의 예방을 받았는데

기약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수락산 길에는 이씨의 墳庵에서 밥을 먹다가 山僧의 예방을 받았는데,

미리 약속이 있던 것이었다.

이를 두고는 아주 같다고 할 수도 없고, 같지 않다고 말할 수도 또한 없다.

 

통진 길에는 가고 올 때 모두 양천 읍내 길을 지났지만 들어가지는 않았고,

수락산 길에는 갈 때에 흥국사를 지났으나 들어가지 않았고

돌아올 때는 점심을 여기서 지어 먹었다.

이를 일러 아주 같다고 할 수도 없지만 같지 않다고 말할 수도 또한 없다 하겠다.

모두 천하 문장의 기이한 변화를 지극히 한 것이다.

그렇지만 두 번 행차한 일이 제각금 하나의 단락을 이루어 서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문장가의 끊어졌다 이어지는 기이함을 잃었다 할 것이다.

 

통진 길에서는 돌아올 때 비를 만났는데, 비록 잠시 젖는 것이 괴롭긴 했지만

집에 돌아온 뒤에 비가 더욱 심해져서 사흘 만에야 겨우 개었다.

이 때문에 폭포 볼 것을 생각하게 된 것이니,

이 수락산 길은 원래 통진에서 돌아오는 길에 말미암은 것이다.

 

그러나 옥류동과 금류동 兩洞의 폭포가 기운차게 쏟아져내렸던 것은

실로 또한 통진에서 돌아오는 길에 만났던 비가 바탕이 되었던 것이다.

한줄기 맥락이 암암리에 이어져 정취의 기이함이 거나하였다.

보며 유람하는 장쾌함을 이미 비의 힘에 힘입었으니,

세상에 다 좋기만 하고 나쁜 점이 하나도 없는 일은 있지 않듯이,

 

또한 다 꽉채워 가장자리조차 없는 글은 있지 않은 법이다.

절에서 쉰 뒤에 비가 조금 내렸고, 돌아오는 길에는 바람 먼지가 크게 일었는데

이번 일의 작은 흠이요, 문장으로 치면 餘波, 즉 여운이라 하겠다.  

 

가마에 앉아서는 참으로 책 보기가 좋은데,

통진 길에서는 책을 지니고 가지 않은 것을 유감스레 여겼다.

그래서 수락산을 찾아 갈 때는 위응물(韋應物)과 유종원(柳宗元)의 시 몇 권을

하인 하나에게 맡겨 따라오게 한 후에 도중에 여러번 기다렸으나 오지 않았다.

어떤 사람은 `틀림없이 술취해 자빠져 있을게야`라 하고,

`그 녀석은 술을 마실줄 몰라` 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길을 잃은 게지`라고 말하기도 했는데,

아우는 `녀석이 몹시 멍청하니, 분명히 잘못 도봉산 길로 찾아들었을 게야`하였다.

나는 아우의 말이 사실에 가까울 것으로 생각했다.

 

內院에 도착하여 한참 지나 해는 저물려 하는데 빗방울이 뚝뚝 듣는다.

하인 녀석이 그제서야 비로소 숨을 헐떡이며 이르렀길래, 물어보니

과연 아우의 말처럼 거의 백리 길을 돌아왔다고 말한다.

이것이 이번 길 도중에 한가지 포복절도할 만한 기이한 일이었으니,

문장가가 하나의 別境으로 파란을 일으키는 것에 해당한다.

 

그러나 가마에 앉아 책 보는 흥취는 이 때문에 또 잃고 말았다.

앞서의 행차에서 책을 가져 가지 않은 것과 맥락이 미세하게 이어지니

조화의 묘가 이에 이르러 지극하다 하겠다.

 

먼저번 행차에서는 용금루 위에서 《규장전운》등 몇 권의 책을,

나중 행차에서는 절 가운데 있던 佛書 및 《화동정음》과

이씨 별장에 있던 攷事와 新書의 부류를 또 여러 종 읽었다.

책을 가져간 것과 더불어 책을 가져가지 않은 것이 서로 비추어,

문득 韋柳의 시집으로 하여금 쓸쓸하지 않게 하였다.

이 절세의 기이한 문장을 벗삼음은 좌구명과 사마천도 뒤에서 눈을 동그랗게 뜰 터이다.

내가 이 두 번의 행차에서 천하의 기이한 문장을 읽은 것이 몇 십 백편이었으므로

나도 몰래 손과 발이 너울너울 춤을 추었다.

반드시 책에 임하여 몇 줄의 먹글씨가 낭랑하게 목구멍과 어금니 소리를 낸 뒤에야

책을 읽었다고 여기는 자에게야 어찌 족히 이를 말하겠는가?

 

 

洪吉周(1786-1841)의 《睡餘放筆》 앞머리에 나오는 글이다.

隨錄의 형식을 취하고 있어 따로 제목은 없다.

 

글은 어떻게 쓰고, 책은 어떻게 읽을 것인가?

독서에도 산 독서가 있고 죽은 독서가 있다.

책을 읽을 때는 알 것 같다가도

막상 책을 덮고 나면 아마득히 하나도 생각나지 않는 독서는 죽은 독서다.

 

하나를 들으면 열가지가 떠오르고, 막상 처음 대하는 사물도 전혀 생소하지 않게 만드는

독서야말로 살아있는 독서라 할 것이다.

 

또 진정한 의미의 독서는 꼭 문자로만 고정되지 않는다.

독서의 본질의미는 천지만물이라는 살아 숨쉬는 텍스트를 읽어내는 것이다.

그래서 그전에는 나와 아무런 관련이 없던 사물들 위에 더운 호흡을 불어넣고,

그것들로 하여금 마침내 내 삶의 일부가 되도록 만드는 것이다. 

홍길주는 이 글에서 두 차례의 비슷한, 그러나 전혀 다른 여행을 이야기하면서

엉뚱하게도 문장 쓰는 방법에 대해 말하고 있다.

전체 글은 단지 두 차례의 여행이 어떻게 같았고, 또 어떻게 달랐는가를 설명하는데

모두 할애되어 있다. 글쓴이의 말대로 그 설명은 너무 지리하고 시시콜콜하기까지 하다. 

형님을 모시고 아우와 함께 통진으로 성묘갔다가 하루밤 자고 돌아온 것이

첫 번째 여행이었고,

사흘 뒤 또 삼형제가 수락산에 놀러갔다가 이튿날 돌아온 것이 두 번째 여행이었다.

 

두 번 다 삼형제가 동행했고, 두 차례 모두 가마를 타고 갔으며,

두 번 모두 비를 만났고, 두 차례 다 새벽에 출발해 이튿날 석양 무렵에 돌아왔다.

 

그렇지만 똑 같은 두 차례의 여행은 판이하게 달랐다.

통진 길은 성묘를 하러 갔다가 중간에 아름다운 경치를 만나 놀았고,

수락산 길은 勝景을 구경하러 갔다가 생각지 않게 성묘를 하게 되었다.

 

처음부터 그리 하리라고 작정한 것은 실제로는 그리되지 않았고,

때로는 생각지 않았던 것들과 마주하게 되어 뜻밖의 기쁨을 누리기도 하였다.

 

수락산 길에서는 두 개의 누각과 세 개의 산소를 만났다.

같은 두 개를 같이 만났지만, 하나도 같은 것은 없었다.

용금루는 오가면서 두 번 만났고, 흥덕대원군의 무덤은 한 번만 만났다.

또 흥덕대원군의 무덤 앞에 있던 판돈의 묘는 비문만 읽고 봉분은 못 보았고,

뒤에 있던 하원의 묘는 비문을 읽고 봉분도 보았다. 그렇지만 절은 올리지 않았다.

그런데 흥덕대원군의 묘는 비문도 읽고 봉분도 보고 절도 올렸다.

세 개의 무덤 앞에서 한 행동은 우연찮게도 모두 달랐다.

통진 길에서는 가마를 탄 우리 삼형제 외에 노새를 탄 하인 하나가 있었다.

수락산 길에서는 삼형제 외에 노새와 나귀를 탄 조카 세 사람이 있었고,

걸어서 따라온 하인이 있었다. 그밖에 가마를 탄 두 사람의 손님이 더 있었는데,

갈 적에는 따로 갔다가 올 적에는 함께 왔다.

 

통진 길에서는 돌아올 때 비를 맞았고, 수락산 길에서는 절에 들어가 쉰 뒤에 비가 내렸다.

정작 돌아올 때는 비 대신 큰 바람과 모래 먼지 때문에 눈을 뜰 수 없어 큰 고생을 했다.

 

통진 길에서는 비 때문에 노정을 변경하게 되어 마중 나온 사람들이 헛걸음을 쳤고,

수락산 길에서는 돌아올 때 갑자기 길을 바꾸는 바람에

마중 나온 사람들이 그리로 대어 오느라고 힘들었다.

이 모두 같지 않은 것이 없었으나 같은 것 또한 하나도 없었다.

그 다음 단락에서는 기술의 방법을 바꾸어,

`謂之純同不可, 謂之不同亦不可`로 결속되는 구문이 세 차례 이어진다.

 

번의 행차에서 모두 두 번씩 물과 만났다.

그렇지만 한번은 두 번 다 큰 강물이었고 다른 한 번은 두 번 다 폭포였다.

한 번은 길 옆으로 물을 보며 갔고, 한 번은 양편으로 산을 끼고 왔다.

 

두 번 다 밥 먹는 도중에 손님의 방문이 있었는데,

한 번은 미리 약속이 되어 있던 것이고 한 번은 사전에 약속이 없던 방문이었다.

두 번 다 같은 곳을 지나쳤으나 한 번은 오갈 때 모두 들어갔고, 한 번은 올 때만 들어갔다.

 

두 번 다 어쩌면 그리도 공통점이 많고 또 그러면서도 어쩌면 그리도 같지 않단 말이냐? 

그렇다면 이 두 차례의 행차는

서로 아무런 연관이 없이 그냥 우연히 그렇게 같고도 다르게 되었던 것일까?

둘 사이에는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일까?

통진 길에서 돌아올 때 우리는 비를 만났었다.

집에 돌아온 뒤엔 비가 더욱 심해져서 사흘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개었다.

그러니까 비가 그친 뒤에 우리가 수락산 길을 나서기로 했던 것은

사흘 계속 내린 비로 수락산의 폭포가 볼만 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전혀 상관없는 듯 보여도,

통진 길에서 만난 비가 결국은 수락산 길을 떠나게 부추겼던 셈이다.

 

통진에서 돌아오는 길에는 비 때문에 가마가 젖고 옷이 젖는 것이 괴로웠는데,

막상 그 비 때문에 사흘 뒤에 수락산에서 우리는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좋은 점이 있으면 나쁜 구석이 있게 마련이고, 당장에 나쁜 것이 좋게 변하는 수도 있다.

 

통진 길에서는 돌아오는 길에 비를 맞았는데,

수락산에서는 절에서 쉰 뒤에 비가 내려 참 좋았지만,

정작 돌아올 때는 비는 안 왔지만 바람 먼지 때문에 애를 먹었다.

비가 안온 것은 좋았는데, 바람먼지는 나빴다.

가마에서 책을 읽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다만 통진 길에서는 책을 안 가지고 가서 그 즐거움을 누리지 못했다.

그래서 수락산 길에는 하인을 시켜 책을 가지고 따라오게 하였는데,

정작 이 녀석이 엉뚱한 길을 헤매는 통에 역시 책 읽는 즐거움은 누릴 수 없었다.

오지 않는 하인을 두고 보인 동행들의 반응도 제각금이다.

술 취해 자빠져 있을거라고도 했고, 술 마실 줄 모르니 그렇지 않을거란 사람도 있었다.

그냥 길을 잃었을 거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더 구체적으로 도봉산 길로 잘못 들어 헤매고 있을거라고 말한 사람도 있었다.

같은 현상을 두고도 이를 해석하는 태도와 방법은 제각금 달랐다.

더욱이 하인 녀석이 길을 잃고 헤매다 뒤늦게 헐떡이며 달려온 일은

전혀 예상에 없던 것이라 일행에게 한 바탕의 웃음을 선사했다.

그렇지만, 나는 그깟 책 때문에 그 소동이 일어난 것을 생각하매

책 읽고 싶은 마음이 싹 가시고 말았다.

 

결국 두 번의 행차에서 모두 가마에서는 책을 읽지 못했다.

한 번은 책이 없어서였고, 한 번은 있기는 있었지만 흥미를 잃어서였다.

 

또 따지고 보면 앞서 통진 길에 책을 안가져갔기에 수락산 길에서의 책 소동이 벌어졌다.

그러니까 앞뒤의 행차는 전혀 무관하지 않게 자꾸 서로 알게 모르게 간섭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책을 전혀 안 읽은 것은 아니다.

책을 가져가지 않았던 통진 길에서도 용금루 위에서 책을 몇 권 읽었고,

책을 가져갔던 수락산 길에서도 절과 이씨의 별장에서 거기에 있던 책을 읽었다.

정작 가져갔던 시집은 읽지 않았는데 말이다. 

참 이상하구나.

같은 사람들이 같은 가마를 타고 같은 1박 2일의 일정을 가지고 같이 놀러 가서

같이 승경을 보고 같이 성묘도 하고 같이 비를 맞고 같이 마중나온 사람들도 있었고,

같이 책을 읽었고, 같이 방문 온 사람이 있었는데도

어느 것 하나 똑 같은 것이 없으니 말이다.

 

홍길주는

"무릇 이 모든 일이 한 가지도 같은 것이 없으니,

천하의 지극한 문장이 아니라면 그 누가 능히 이것에 참여할 수 있겠는가?"고 적고 있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천하에 지극한 문장`이란 무엇일까?

다 같건만 한 가지도 같은 것이 없다면 그것이 천하의 지극한 문장이 되는 것일까?

그렇다면 같다는 것은 무엇이고, 다르다는 것은 또 무엇인가?

다음 단락의 끝에 가서

그는 아주 같다고 해도 안되고, 같지 않다고 해도 또한 안되는 것이야말로

천하에 지극한 문장이라고 했다.

 

같고도 다르게, 이것은 尙同求異의 要決을 말한 것이다.

기실 문장의 형식이란 대동소이하다.

그것이 특히 묘지명이라든가 서문과 같이 정형화된 것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그렇다면 이러한 대동소이한 것 가운데서 그것만이 지닌 개성을

어떻게 발휘할 것인가 하는데서 그 글의 생명력이 좌우된다.

모든 것이 같지만 결코 한 가지도 같을 수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같지만 다르다.

여기서 같다는 것은 외재적 형식이거나, 표층의 내용일 터이고,

다르다는 것은 그것이 놓인 자리나 내재적 의미가 결코 같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겉보기에는 대동소이하다.

그러나 찬찬히 살펴보면 하나도 같은 것이 없다.

그런데 대부분의 글들은 겉보기에도 대동소이하고, 찬찬히 살펴보면 더 똑 같다.

이것이 천하의 지극한 문장과 일반의 저열한 문장을 구별짓는 가장 큰 차이이다.

 

다시 홍길주는 두 차례의 행차 사이의 연락(聯絡) 문제를

문장가가 문장 지을 때 或斷或連 하는 奇變과 연관짓는다.

 

한편의 글은 여러 개의 단락으로 이루어진다. 단락이란 생각의 덩어리이다.

여러 개의 생각들이 여러 개의 덩어리를 이루고, 그 덩어리들이 합쳐져서

하나의 총체적인 형상을 빚어낸다.

그러기에 하나 하나의 덩어리들은 각기 독립된 개체로 존재하고 있지만,

그것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긴밀한 연계가 있어야 한다.

 

통진에서 돌아오는 길에 만난 비가 사흘 뒤 수락산 폭포의 장관을 연출하게 되고,

또 그 비 때문에 수락산 행을 결심하게 된다.

통진 길에 책을 가져갔더라면

수락산 길에서 책 때문에 그 소동이 벌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앞에서 툭 던져 둔 한마디 말이 潛流三千 땅밑으로 흐르다가

불쑥 솟아 황하수를 이루듯, 뒤의 단락과 앞의 단락이 서로 호응하여

한편 글의 밀고 당기는 긴장과 이완을 연출해야만 한다.

또 글에는 한 줄기 맥락이 암암리에 보이지 않게 이어져야 한다.

사흘 전에 내린 비가 폭포의 流量을 증가시켜 목전의 장관을 연출한다.

그 비 때문에 아무 상관 없어 보이는 통진 길이 사흘 뒤의 수락산 여행으로 이어졌다.

막상 올 때 비맞는 것은 싫었는데, 결국 사흘 뒤 여행의 빌미를 주었으니

이것은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하다. 한편의 글도 이와 다를 바가 없다.

 

앞에서 읽을 때는 쓸데 없는 군더더기로 생각되던 것이

뒤에 와 마무리에서 호응을 이루자, 없어서는 안될 요긴한 말로 변화해버리는 것이다.

잘 나가던 글이 때로 우정 딴전을 부리거나 곁길로 새는 것은

뒷부분과의 호응을 배려한 것일 터이다.

이에 글은 아연 생기를 얻어 꽉 짜인 짜임새를 획득하게 된다.

그렇지만 글에는 여운이 있어야 한다.

통진 길에서 만난 비가 수락산 길을 재촉했고,

수락산 길에서는 절에 도착한 뒤에야 비가 와 비에 젖는 고생은 없었다.

이렇게 단순히 비교만 하고 끝난다면 여운이 남지 않는다.

그대신 수락산에서 돌아올 때는 바람 먼지가 심하게 불어 눈을 뜰 수 없어 고생을 했다고

적었다. 이것이 바로 문장의 여운이다.

제 할말을 다 했다고 해서 그쳐버리고 말면 글에 여운이 생기지 않는다.

여운이란 길게 남는 뒷맛이다. 한 번 더 음미하게 만드는 힘이 여기서 생긴다.

글에는 또 파란이 있어야 한다.

평면적인 설명이나 서술만으로는 안된다.

강물이 드넓은 벌판을 만나서는 잔잔히 흐르다가 구비친 골짜기를 만나면 여울을 이루듯이,

문장에는 변화와 곡절이 있어야 한다.

 

중간에 하인 녀석이 길을 잃고 헤맨 소동은

평면적으로 흘러가던 서사에 긴장과 활력을 불어 넣었다.

예기치 않았던 일이 늘상 여행의 잊지 못할 추억이 되듯,

생각지 못한 변화는 문장에 탄력을 넣어 준다.

물론 그 변화는 자연스러운 것이라야지 작위적이어서는 안된다.

또 나는 그 소동 때문에 가마에서 책을 읽으려던 당초의 흥취가 싹 가시고 말았는데,

이것은 모두 애초에 통진 길에 책을 가져 가지 않았기에 생긴 일이니,

이 사이에도 보이지 않는 맥락이 이어지고 있음을 놓쳐서는 안된다.

이렇듯 한편의 훌륭한 문장은 단락과 단락 사이에 긴밀한 유기적 연결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저 활자를 읽는 것만이 독서가 아니다.

글로 쓰는 것만 작문이 아니다.

글로 쓰여지지 않고, 문자로 고정되지 않은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

그럴 때 천하 사물은 명문 아닌 것이 없다.

 

박연암은 아침에 일어나 푸른 나무 그늘진 뜨락에서 우짖는 새들의 울음 소리를 듣다가

저도 몰래 부채로 책상을 치며, "오늘 아침 나는 책을 읽었다!"고 외친 일이 있다.

나도 이번 두 차례의 여행에서 수십편의 살아 숨쉬는 지극한 문장을 읽었다.  

 

 

 정민교수의 한국한문학 홈페이지

 

옛사람 내면풍경

 
 
 
 
 
 
 

 

 

 책 읽는 소리, 베 짜는 소리

 

사회생활이나 가정생활에서 집안에 어진 아내가 있고, 훌륭한 어머니가 계시다면

아무리 어려운 일도 쉽게 풀 수 있다는 것이 옛날부터 전해지는 말이다.

 

현모양처(賢母良妻)의 중요함이 그래서 강조되는 것이고,

오늘날처럼 세상이 복잡하고 모든 윤리와 신의가 붕괴된 세상에서는

더욱 아내와 어머니의 훌륭함이 돋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성들에게 ‘현모양처’의 단어처럼 천대받고 봉건적 논리라는 비판을 받고 있는 단어도

많지 않은 것이 오늘의 현실이지만,

옛 사람들의 기록을 읽다보면, 아무리 미움받아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는 단어가 바로 이 단어다.

 

조선 후기 순조 때의 뛰어난 문장가였던

연천(淵泉) 홍석주(洪奭周, 1774∼1842)라는 분의 어머니 일대기를 읽어보면,

이 단어가 그렇게 의미가 깊고 중요하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연천의 집안 풍산홍씨는 조선 중기부터 혁혁한 가문으로 떠올라

고관대작에 글 잘하는 문인들을 다수 배출한 당대의 명문집안이었다.

 

연천의 선조에는 선조 임금의 부마, 즉 정명공주의 남편인 홍주원(洪柱元)이 있었고,

그 아들에 예조판서를 지낸 홍만용(洪萬容),

홍만용의 손자에 또 예조판서를 지낸 홍상한(洪象漢)이 있으며,

홍상한의 아들이 홍낙성(洪樂性)으로 영의정에 올라 가문을 크게 빛냈으니,

바로 연천의 할아버지였다.

 

연천의 아버지 홍인모(洪仁謨) 또한 승지(承旨)를 역임하면서 가문의 명성을 이었지만,

홍인모의 부인 달성서씨(達成徐氏)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홍석주, 홍길주, 홍현주 3형제와 두 딸이 이룩한 업적 때문에

그 가문은 더욱 번창하여 천하에 이름을 날린 집안이 되었다.

 

홍석주는 대제학에 이조판서를 거쳐 좌의정이 되었는데,

그런 벼슬보다는 문장과 학문으로 한 시대를 대표하여, 이른바 ‘여한 10대가’의 한 사람,

즉 고려와 조선의 10대 문장가의 한 사람으로 추앙받고 있다.

 

홍길주는 어머니의 만류로 큰 벼슬에는 오르지 않았으나 학자와 문장가로 이름이 높았다.

막내아들 홍현주는 정조의 외동딸에게 장가들어 부마 ‘영명위’에 봉작되었고,

글 잘하고 시를 잘해 대선배인 다산 정약용 등과도 교류하면서 문명을 날렸던 귀인이었다.

 

시집간 딸 유한당(幽閒堂) 홍씨 또한 오빠들의 어깨너머로 글을 배워 뛰어난 여류시인으로

시집을 전해준 문인이었다.

 

어진 아들딸을 기르고 가르친 어머니 달성서씨는

관찰사를 지낸 서형수(徐逈修)의 딸로

당대의 학자이던 미호 김원행(金元行)의 외손녀이자

대제학에 예조판서로 학자이자 문장가이던 농암 김창협의 외증손녀였으며,

‘영수합’이라는 당호로 불려진 여인이었다.

 

친가 · 외가 · 시가가 모두 뛰어난 명문의 따님과 며느리로서

“차면 넘친다”라고 말하며 둘째 아들에게는 과거시험을 보지 않도록 권했고,

그렇게 글을 잘하면서도 시집와서 10년이 넘도록 글 잘하는 며느리임을 알지 못하게 하면서

큰아들 석주를 밤에만 몰래 가르치면서 자기를 낮추고 자랑할 줄 몰랐던 여인이었다.

 

여자는 글보다는 베 짜고 밥 짓고 술 빚으며 가족들을 보살피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하여,

아들들은 글을 읽고 며느리나 딸은 베짜기에 여념이 없어야 한다면서,

“집안에서 책 읽는 소리와 베 짜는 소리가 들리면 그 집안 흥한다”라는 명언을 남긴 분이

바로 연천 홍석주의 어머니였다.

 

단 한 차례도 지은 시를 글로 쓰지 않았지만,

남편과 아들들이 듣고 외운 것만으로도 책을 만들어 ‘영수합시집’이라는 책을 역사에 남겼다.

근면 · 검소 · 겸허한 서씨의 인품과 덕행이 그 집안을 더욱 빛나게 하였으니

얼마나 멋지고 훌륭한 일인가. 현모양처도 천대만 할 수 없지 않은가.

- 박석무(한국고전번역원장), 국민일보 2008년 4월 23일 [문화산책]

 

 

 

 

 

 

 

 

'느끼며(시,서,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가환 - 한밤중의 생각  (0) 2008.05.23
이덕무 - 지리산의 물고기  (0) 2008.05.23
미쳐야 미친다  (0) 2008.05.23
연암 박지원 - 누님을 보내며  (0) 2008.05.23
세검정 구경하기  (0) 2008.05.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