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끼며(시,서,화)

다산 정약용의 '하피첩' - 노을빛 치마에 적은 시첩

Gijuzzang Dream 2008. 5. 23. 14:24

          

 

 

다산 정약용 - 노을빛 치마에 써준 '하피첩'     

 

 

내가 강진 귀양지에 있을 때, 병든 아내가 낡은 치마 다섯 폭을 부쳐왔다.

시집올 때 입었던 붉은 색 활옷이었다.

붉은 빛은 이미 씻겨 나갔고, 노란 빛도 엷어져서 글씨를 쓰기에 마침 맞았다.

마침내 가위로 잘라 작은 첩을 만들어, 붓가는대로 경계하는 말을 지어 두 아들에게 보냈다.

바라기는 훗날 이 글을 보면 감회가 일 것이고,

두 어버이의 아름다운 은택이 느꺼워 뭉클한 느낌이 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피첩(霞帔帖)'이라고 이름 붙였는데, 붉은 치마를 돌려 말한 것이다.

가경 경오년(1810) 초가을 다산의 동암에서 쓴다.

 

강진 유배 시절 다산 정약용의 글이다. 그는 이곳에서 19년을 귀양 살았다.

초로의 병든 아내는 무슨 마음으로 시집 올 때 입었던 빛 다 바랜 치마를 천리 먼 길에 보냈던 걸까?

남편은 그 속을 헤아려, 자를 대고 치마를 자르기 시작했다.

조각조각 치마를 잘라 공책을 만드는 동안, 다산의 머리 속에 휘돌아 나가던 상념은 어떤 것이었을까?

치마 조각 위에는 아들에게 보내는 아버지의 당부를 적었다.

벌써 여러 해 째 가족과 떨어져 살던 아버지의 아비 노릇하는 슬픈 광경이다.

배접을 해서 책으로 묶고, 표지에는 '하피첩(霞帔帖)'이라고 썼다.

하피(霞帔피=<巾+皮>)는 '노을치마'다.

 

그 붉고 선명하던 치마는 이제 노을 빛만 남았다. 우리 두 사람의 사랑도 이제는 저녁 노을 같구나.

그리움에 애가 타기는 해도 조바심은 차분히 가라앉았다. 젊은 날의 열정도 이젠 빛이 다 바랬다.

사각사각 가위질은 차라리 무념무상에 가깝다.

아들에게 주는 글을 쓰고도 치마 한 폭이 더 남았던 모양이다.

시집간 딸 생각이 났다. 이번엔 좀 크게 자른다. 그림을 그려 줘야지.

매화 가지에 꽃이 피었다. 봄이 왔다. 둥치는 그리지 않고, 빗겨 나온 가지만 그렸다.

새 두 마리가 앉아 있다. 가만 보니 꾀꼬리다. 두 마리 꾀꼬리는 몸을 포개고 한 가지에 앉았다.

한 녀석은 먼 데를 보고 있고, 딴 짓 하던 한 녀석도 무슨 일인가 싶어 문득 고개를 돌려

제 짝과 눈길을 맞춘다. 그림 아래 여백에 시를 한 수 짓고, 곁에다 이렇게 썼다.

 

가경 18년 계유(1813) 7월 14일, 열수(洌水) 늙은이는 다산의 동암에서 쓴다.

내가 강진서 귀양산 지 여러 해가 지났다. 홍부인이 낡은 치마 여섯 폭을 부쳐왔다.

세월이 오래어, 붉은 빛이 바랬길래 이를 잘라 네 첩으로 만들어서 두 아들에게 주었다.

그 나머지를 이용해서 작은 가리개로 만들어 딸에게 보낸다.

(余謫居康津之越數年 洪夫人寄敞裙六幅 歲久紅 剪之爲四帖 以遺二子 用其餘 爲小障 以遺女兒)


처음 아내가 보낸 치마를 받고 위〈하피첩序〉를 쓴 것이 1810년이었다.

그리고 딸에게 준 이 그림은 1813년이니 둘 사이에는 3년 이상의 거리가 있다.

아들을 위해 네 개의 첩을 만들어 훈계하는 말을 적어 보내고는 치마 생각은 까맣게 잊었겠지.

다시 몇 해의 세월이 흐른 뒤, 집안을 정리하다가 그때 자르다 남은 치마가 나왔던 모양이다.

앞에서는 아내가 부쳐온 것이 다섯 폭이라 했는데, 여기서는 여섯 폭으로 적은 걸 보면,

생각지 않았던 치마 한 폭을 뒤늦게 찾아냈던 걸까?

마지막 남은 치마 한 폭은 시집 간 외동딸에게 주기로 작정을 했다.

 

매화 가지 아래 적은 시는 이렇다.

 

펄펄 나는 저 새가   
우리 집 매화 가지에서 쉬는구나.  
꽃다운 그 향기 짙기도 하여  
즐거이 놀려고 찾아왔도다.  
여기에 올라 깃들어 지내며  
네 집안을 즐겁게 해 주어라.   
꽃이 이제 다 피었으니  
열매도 많이 달리겠네.  

 

翩翩飛鳥  息我庭梅(편편비조 식아정매)
有烈其芳  惠然其來(유열기방 혜연기래)
爰止爰棲  樂爾家室(원지원서 락이실가)
華之旣榮  有賁其實(화지기영 유분기실)

 

꾀꼬리 한쌍이 매화 향기를 따라 내 집 마당으로 날아 들었다. 추운 겨울이 다 끝난 것이다.

새들은 향기에 취해 나뭇가지를 떠날 줄 모른다. 즐거운 노래가 그치지 않는다.

쓸쓸하던 마당이 갑자기 환하다. 다산은 새들에게 말을 건넨다.

"여기가 그렇게 좋으냐? 나도 너희들이 좋구나. 다른 곳에 가지 말고 우리 집에서 함께 살자꾸나.

네 짝과 더불어 이곳에서 즐겁게 지내보렴. 매화꽃이 이렇게 활짝 피었으니,

조금 있으면 매실(梅實)이 주렁주렁 매달리겠지. 그때는 함께 매실을 따먹으며 재미있게 놀아보자꾸나."

하지만 새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멀리서 달려오는 봄빛만 바라보고 있다.

네 글자로 된 시경(詩經)풍의 고체시다. 그래서《시경》에 나오는 시와 비슷한 구절들이 많다.

그 중에서도〈아가위꽃(常 )〉이란 시는 분위기가 서로 비슷하다.

〈아가위꽃〉은 옛날에 형제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잔치하면서 부르던 노래였다.

 

이 가운데 한 대목은 다음과 같다.

 

아내와 자식이 정답게 지내는 것이 
마치 금슬을 연주하는 것 같아도,  
형님과 아우가 화목해야만  
즐겁고 기쁘다고 할 수가 있다.  
네 집안을 화목하게 하고  
그대의 처자식을 즐겁게 해주어라. 
이렇게 하려고 애를 쓴다면  
정말로 그렇게 될 수 있을 것이다. 


妻子好合  如鼓琴瑟
兄弟其翕  和樂且湛
宜爾室家  樂爾妻帑
是究是圖  亶其然乎

 

가족과 형제가 화목하게 지낸다면 그것보다 기쁜 일이 없겠다.

그러니 집안을 화목하게 하고 아내와 자식을 기쁘게 하려고 노력한다면

그 소망이 정말로 이루어 질 수 있다는 내용이다.

다섯째 구절에 '네 집안을 화목하게 하고. 宜爾室家'란 말이 나온다.

다산의 여섯 번째 구절의 '네 집안을 즐겁게 해 주어라. 樂爾家室'란 말과 비슷하다.

다산이 일부러 《시경》의 표현을 빌려와서 담으려 했던 뜻도 여기에 있다. 

네가 보고 싶지만, 아비는 너와 함께 지낼 수가 없구나. 미안하다.

하지만 매화 가지를 찾아온 저 멧새처럼 함께 지내고 싶은 소망을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다면

언젠가는 꼭 그렇게 될 수 있지 않겠니.

너도 지금은 한 사람의 아내요, 자식을 기르는 어머니가 되었다.

형제간에 우애롭고 가족간에 화목하게 지낼 수 있도록 네가 더 노력하렴.

그러면 저 예쁜 꽃이 진 자리에 알찬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리듯

네 집안에 기쁘고 즐거운 일이 언제나 가득할게다. 

다산이 딸에게 이 그림을 그려 주며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은 이런 것이었다.

딸은 아버지가 치마에 그려 보내준 그림을 보고, 멀리 계신 아버지가 너무 보고 싶어 울었을 것이다.

어머니가 시집 오시던 날 입었던 빛바랜 치마 위에 아버지가 써 주신 훈계의 말씀을 받아 들었을 때,

자식들의 가슴은 얼마나 뭉클하였을까?

딸을 위해 그려준 그림과 시는 지금도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그대로 남아 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정약용, 매조도, 1818년, 비단에 수묵 담채, 45×19 cm, 고려대박물관

 

다 떨어져서 입을 수 없게 된 치마가 이렇게 해서 훌륭한 예술 작품이 되었다.

이 그림과 시가 참으로 아름다운 까닭은

그 안에 가족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따뜻한 마음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유배지에서 다산은 끊임없이 자식들을 훈계하는 편지를 보냈다.

행여 그릇될세라, 학문을 게을리 할세라 노심초사를 그치지 않았다. 

 

네가 양계를 한다고 들었다. 닭을 치는 것은 참 좋은 일이다.

하지만 닭을 기르는 데도 우아한 것과 속된 것, 맑은 것과 탁한 것의 차이가 있다.

진실로 농서를 숙독해서, 좋은 방법을 골라 시험해 보렴.

빛깔에 따라 구분해보기도 하고, 횟대를 달리 해보기도 해서 닭이 살지고 번드르하며

다른 집보다 번식도 더 낫게 해야지. 또 간혹 시를 지어 닭의 정경을 묘사해보도록 해라.

사물로 사물에 얹는 것, 이것은 글 읽는 사람의 양계니라.

만약 이익만 따지고 의리는 거들떠보지 않는다거나, 기를 줄만 알고 운치는 몰라,

부지런히 애써 이웃 채마밭의 늙은이와 더불어 밤낮 다투는 자는

바로 세 집 사는 마을의 못난 사내의 양계인게다.

너는 어떤 식으로 하려는지 모르겠구나.

기왕 닭을 기른다면 모름지기 백가의 책 속에서 닭에 관한 글들을 베껴 모아 차례를 매겨

《계경(鷄經)》을 만들어 보는 것도 좋겠구나.

육우의 《다경(茶經)》이나 유득공의 《연경(烟經)》처럼 말이다.

속된 일을 하더라도 맑은 운치를 얻는 것은 모름지기 언제나 이것을 예로 삼도록 해라.

 

1805년 유배 4년만에 맏아들 학연이 강진으로 아버지를 뵈러 왔다.

그 편에 작은 아들 학유에게 보낸 당부의 편지다.

공부하는 사람의 양계는 보통 사람의 양계와는 달라야 한다.

옛 전적에서 닭에 관한 기록을 모아 목차를 세워 정리하고, 닭을 관찰하여 시로 짓도록 해라.

이것을 한 권의 책으로 엮는다면, 얼마나 훌륭하겠니?

그는 지금 아들에게 양계를 통해 학문하는 방법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 귀한 것은 성실함이다. 어떤 것도 속여서는 안된다.

하늘을 속이는 것이 가장 나쁘다. 임금을 속이고 어버이를 속이거나, 농사꾼이 이웃을 속이거나,

장사꾼이 동료를 속이는 것 모두 죄에 빠지는 것이다.

한 가지만은 속여도 괜찮으니, 바로 자기 입이다.

모름지기 거친 음식으로 잠시 지나가는 것, 이것이 좋은 방법이다.
올 여름에 내가 다산에 있을 때 일이다. 상치에 밥을 싸서 움켜쥐고 이를 삼켰다.

손님이 내게 물었지. "쌈 싸 먹는 것이 절여 먹는 것과 다를까요?"
내가 말했다. "이는 내가 입을 속이는 방법일세 그려."
매번 밥 한 끼를 먹을 때마다 이런 생각을 갖도록 해라.

정력과 지혜를 쥐어짜 더러운 뒷간을 위해 충성을 바칠 것 없다.

이런 생각은 당장 눈 앞에서 가난함에 대처하는 방편만은 아니다.

비록 부귀가 하늘에 닿을 정도라 해도 사군자가 집안을 거느리고 몸을 다스리는 방법에

근면과 검소를 버리고는 손댈 만한 곳이 없을 것이니라. 너희들은 꼭 명심하도록 해라.

경오년(1810) 9월 다산 동암에서 쓰노라.

 

상치 쌈은 왜 싸는가? 장을 찍어 주먹만하게 밥을 싸서 먹는다.

겉모습만 보면 푸짐해 보여 좋지만 속엔 밥 뿐이다. 이것으로 식욕을 돋궈 입을 속인다는 것이다.

입에 들어가기만 하면 더러운 똥이 되고 말 음식을 위해 정력과 지혜를 소모하지 말아라

그것은 화장실에 충성을 바치는 일이다.

근면과 검소, 그리고 성실, 이것은 선비가 어떤 처지에 있더라도 결코 잊어서는 안될 것이니라.

글 제목이〈두 아들에게 주는 훈계(又示二子家誡)〉이고,

쓴 시점으로 보아, 아내의 치마에 써준 글의 한 부분이었던 듯 하다.

그 사이에는 가슴 아픈 사연도 있었다.

다산이 강진에 유배 온 것은 1801년 겨울이었다.

막내였던 농아(農兒)는 아비가 귀양 올 때 세 살 짜리 어린아이였다.

이듬해인 1802년 연말에 다산은 농아의 사망 소식을 듣는다.

농아 이전에도 그는 이미 자식 다섯을 땅에 묻었었다. 농아도 홍역을 앓다가 마마로 번져 죽었다.

아버지는 이미 캄캄한 언 땅 속에 무서운 줄도 모르고 차갑게 누워 있을 어린 아들을 위해 글을 지었다. 

 

농아(農兒)는 곡산에서 잉태하였다. 기미년(1799) 12월 2일에 태어나 임술년(1802) 10월 30일에 죽었다.

발진이 나서 마마로 번지더니, 마마가 악창이 되었던 까닭이다.

내가 강진에서 귀양살고 있었으므로, 글을 지어 그 형에게 보내 곡하게 하고,

그 무덤에 읽어주게 하였다. 농아를 곡하는 글은 이러하다.

네가 세상에 왔다가 세상을 떠난 것이 겨우 세 해였는데, 나와 헤어져 지낸 것이 두 해가 된다.

사람이 60년을 산다 치면 40년을 아비와 헤어져 지낸 셈이니, 슬퍼할만 하다.
네가 태어났을 때 내 근심이 깊었기에 네 이름을 '농(農)'으로 지었다만,

뒤에 집 형편이 나아지면 어찌 너를 농사나 지으며 살게야 했겠느냐? 하지만 죽는 것 보단 나았겠지.

내가 죽었더라면 장차 기쁘게 황령을 넘어 열수를 건넜을테니, 나는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낫다.

나는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나은데도 멀쩡히 살아 있고,

너는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나은데도 죽었으니,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로구나.

내가 네 곁에 있었다해도 꼭 살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네 어머니의 편지에,

네가 "아버지가 내 곁에 돌아오셔도 발진이 나고, 마마에 걸릴까?"라고 했다더구나.

네가 무슨 헤아림이 있었던 것은 아닐텐데도 이런 말을 했다니,

네가 아비가 돌아오면 의지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겼던 게로구나.

네 소원이 이뤄지지 않았으니 가슴 아프다.   

신유년(1801) 겨울, 과천의 객점에서 네 어머니가 너를 안고 나를 전송했었다.

네 어머니가 나를 가리키며, "저 분이 내 아버지시다"했더니, 너도 따라서 나를 가리키며,

"저 분이 내 아버지"라고 했었지.

아버지라 했지만 아버지의 의미를 너는 아직 몰랐을테니 슬프기만 하다. 

이웃 사람이 가는 길에 소라 껍질 두 개를 부쳐 네게 주도록 했었다.

네 어머니의 편지에 네가 강진에서 사람이 올 때마다 소라 껍질을 찾다가 얻지 못하면 풀이 푹 죽곤

하더니, 죽을 때가 되어서야 소라 껍질이 왔더라고 썼더구나. 아! 마음 아프다.

네 모습은 깎아놓은 듯 예뻤다. 코 왼편에 작은 점이 있었지. 웃을 때면 양 어금니가 뾰족했었다.

아아! 나는 오직 네 모습만 생각하며 거짓없이 네게 알린다.

- 집에서 온 편지를 보니, 생일 날 묻었다 한다.

 

농아는 다산이 곡산부사로 있을 때 그곳에서 잉태하여, 서울서 낳았다.

당시 다산은 천주교 신봉 문제로 극심한 곤경에 처해 있었다.

농아가 태어난 뒤 바로 다산은 자신을 참소하고 시기하는 사람이 많은 것을 알고 칼날을 피하려고

처자식을 이끌고 마재로 돌아오고 만다. 아들의 이름을 '농(農'`으로 한 것은 어지러운 세상에서

글 배워 우환을 만들지 말고 그저 농투성이 농사꾼으로 살아가는 것이 좋겠다 싶어서였다.

자식이 아비를 찾다 죽어도 가볼 수조차 없는 아비의 노릇이 참담했던지, 죽었어야 할 것은

정작 자신이라고 했다. 헤어질 당시 뜻도 모른채 아버지라고 말하던 어린 것은

인편에 부친 소라 껍질 두 개로 못난 애비를 기억했을 것이다.

농아는 고작 세 해를 살고 제 생일날 흙에 묻혔다. 

마마로 죽은 아들이 못내 가슴 아팠던 아버지는

뒤에 천연두를 치료하는 방법을 정리한 《마과회통(麻科會通)》이란 책을 지어, 안타까움을 달랬다.

절망을 극복하는 다산다운 방법이었다.

- <노을빛 치마에 써 준 . . . >, 정민 지음

  

 

 

 

 

 

 

다산, 유배지서 아내 치마 잘라 만든 '하피첩'

 

실학을 집대성한 대학자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1762~1836)은

각별한 가족 사랑으로 유명하다.

다산의 가족 사랑을 대표하는 유산이 유배지에서 아들에게 보낸 가계(家戒: 집안의 가르침)다.

그 가운데서도 부인이 시집올 때 가져온 붉은 치마에 쓴 것이 유명하다.

기록으로만 전해오던 그 가계가 석 점의 하피첩(霞帖)으로 약 200년 만에 발견됐다.

"하늘이나 사람에게 부끄러운 짓을 저지르지 않는다면

자연히 마음이 넓어지고 몸이 안정되어 호연지기(浩然之氣)가 우러나온다."

 

"전체적으로 완전해도 구멍 하나만 새면 깨진 항아리이듯이 모든 말을 다 미덥게 하다가

한 마디만 거짓말을 해도 도깨비처럼 되니 늘 말을 조심하라."

"근(勤.부지런함)과 검(儉.검소함), 두 글자는 좋은 밭이나 기름진 땅보다 나은 것이니

일생 동안 써도 다 닳지 않을 것이다."

"흉년이 들어 하늘을 원망하는 사람이 있다. 굶어 죽는 사람은 대체로 게으르다.

하늘은 게으른 사람에게 벌을 내려 죽인다."

다산이 아들에게 보낸 가계엔 엄격한 가르침과 따뜻한 사랑이 가득하다.

학문, 효도부터 재물.음식까지 세심하게 충고했다.

명분보다 실리를 주장했던 실학자 다산의 면모가 두드러진다.

다산은 모두 넉 점의 소책자(첩)를 만들어 멀리 떨어져 살던 두 아들에게 보냈다.

그중 이번에 석 점이 처음 발견된 것이다.

다산은 글씨를 쓴 작은 천 조각(12×20㎝)을 한지(16×25㎝) 위에 하나하나 붙여

하피첩을 만들었다. 1권 17장, 2권 15장, 3권 14장 등 총 46장으로 구성됐다.

 

다산은 첩을 만들고 3년 후 남은 치마 조각에 매화와 참새 그림이 있는 작은 족자를 만들어

딸에게 주기도 했다. 현재 고려대박물관에 소장된 '매조도(梅鳥圖)'다.

'매조도'에도 '하피첩'을 만든 경위가 실려 있다.

이를 감정한 서지학자 김영복(문우서림 대표)씨는 "행서체 글씨가 다산이 평소 간찰(편지)에 쓰던 글씨와 같다. 그리고 '하피첩'과 '매조도'의 재질을 비교한 결과 똑같은 명주로 확인됐다"며 "다산문집에 실린 가계와 하피첩 내용이 일치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름만 알려졌을 뿐 실물을 볼 수 없었던 '하피첩'은 아들에 대한 다산의 애틋한 사랑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복사본을 본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원우(미술사학) 교수는

“실물을 보지 못해 단정할 순 없지만 하피첩의 전서체 수준이 매우 떨어져

과연 다산이 아들에게 주는 글을 이렇게 썼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며

“행서도 다산 글씨체와 비슷하긴 하지만 세련미가 떨어져 누군가 흉내 냈을 가능성도 있다”

고 말했다.

 

다산연구소 박석무 소장은 "가족에 대한 애정이 없었다면 500여 권의 책을 남긴 다산의 학문도 존재할 수 없었다"며 "다산의 충고는 가치관이 혼란스러운 오늘날 더욱 유효하다"고 말했다.

'하피첩'은 4월 2일 KBS-1 TV 'TV쇼 진품명품'에서 공개된다.

'TV쇼 진품명품'에 유물을 의뢰한 개인사업가 이강석씨가 2년 전 고물상 할머니로부터 우연히 건네받았다. 이강석씨는 "2년 전 경기도 수원의 한 공사장에서 파지를 수집하는 할머니의 수레에서 물건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그는 "글씨를 보는 순간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공사장에 쌓여 있던 파지와 하피첩을 바꿨다"

고 말했다. 감정가는 1억원이다.
- 중앙, 2006년 3월28일, 박정호 기자 <
jhlogos@joongang.co.kr>

 

 

 

 

「제하피첩(題霞帔帖)」

 

 

참으로 짤막한 글입니다. 그대로 옮겨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내가 강진에서 귀양살이 하고 있을 때 몸져 누워있던 아내가 헌 치마 다섯 폭을 부쳐왔다.
아마도 그 치마는 시집 올 때의 활옷으로 여겨지는데, 붉은 색도 이미 바랬고
누른 색 또한 옅어져서 책자로 만들기에 딱 알맞았다.
그래서 잘라서 재단하여 조그만 첩(帖)으로 만들었다.
손이 가는대로 경계의 말을 지어서 두 아들에게 넘겨주었다. 아마도 뒷날에 글을 읽어보면
감회가 일어나 두 어버이의 꽃다운 은택에 유연한 감동의 마음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피첩’이라 이름한 것은 바로 홍군(紅裙: 붉은 치마)을 돌려서 표현한 말이다.
경오(庚午: 1810)년 첫가을(七月)에 다산의 동암에서 쓰다.”
 
이렇게 두 아들[학연(學淵1783~1859), 학유(學遊1786~1855)]에게 주었다고 기록되었을 뿐
그 첩이 어디에 어떻게 보관되고 있음은 전하는 글이 없었는데,
이번에 고물상의 폐지 처리장에서 발견되었다니 그 까닭은 알 길이 없습니다.
 
그 글을 쓴 3년 뒤인 1813년 7월 14일에 쓰고 그렸다는
「매조도(梅鳥圖)」에 적힌 글은 간단합니다.
“계유(癸酉: 1813)년 7월 14일 열수옹(洌水翁: 다산)이 다산의 동암(東菴)에서 쓴다.
내가 강진에서 귀양사느라 몇년이 지났는데 홍씨 부인이 헌 치마 여섯 폭을 부쳐왔다.
세월이 오래되어 붉은 빛도 바래서 가위로 재단하여 네 첩을 만들어 두 아들에게 주고
그 나머지를 사용하여 조그만 가리개를 만들어 딸아이에게 준다”
라고 매화나무에 한 쌍의 새가 놀고 있는 그림을 그리고 또 아름다운 시를 지어서
반초체의 멋진 글씨로 써서 시집가는 딸에게 주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지금 이 ‘매조도’는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그 박물관에는 다산의 외손자인 큰 학자 윤정기(尹廷琦, 1814-79))의 시경(詩經)연구서가
함께 소장된 것으로 보아 딸의 시가인 윤씨 집에 소장되었던 것이
고려대로 흘러들어간 것으로 보입니다.  - 박석무 '다산연구소'

 

 

 

"전체적으로 완전해도 구멍 하나만 새면 깨진 항아리이듯,

모든 말을 다 미덥게 하다가 한마디만 거짓말해도 도깨비처럼 되니 늘 말을 조심하라."
조선 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대학자 다산(茶山) 정약용(1762~1836)이

유배지에서 두 아들에 대한 당부를 적어 가르쳤던 하피첩(霞피帖) 내용의 일부다.

이 첩(소책자) 넉 점 가운데 석 점이 지난달 말 발견됐다.

그리고 4월7일은 다산의 서거 17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최근 새롭게 조명되는 다산의 생애와 사상 등을 공부한다.

◆ 다산의 생애

= 정약용은 영조 38년 경기도 광주(지금의 남양주)에서 태어났다.

다산은 그의 호며, 여유당(與猶堂)으로 부르기도 한다.
16세에 실학자인 이익(1681~1763)의 학문을 접하면서

민생을 위한 경세치용(經世致用, 학문은 세상을 다스리는 데 실익을 증진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주장)에

뜻을 뒀고, 서학(西學, 천주교)에도 눈을 뜨게 됐다.
서학에 대한 흥미는 당시 부패한 유학의 유해성을 깨닫게 했고, 서구의 과학기술에 눈을 돌리게 해

자신의 실학사상을 발전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다.

정조 13년(1789년) 과거에 급제한 뒤 벼슬길에 올라 여러 관직을 거쳤다.

관리생활을 시작한 다산은 나라의 이익과 백성의 행복을 위한 사업에

자신의 과학 지식과 재능을 발휘했다.

또 규장각(1776년 궐 안에 설치한 국립도서관)의 편찬 사업에 참여해 많은 업적을 남겼고,

정조 16년에는 거중기(무거운 물건을 들어올리는 데 사용하던 재래식 기계)를 고안해

수원화성을 축조하는 데 크게 도움을 줬다.

33세(1794년)에 경기도 암행어사로 임명된 그는 지방을 순찰하며

농촌의 궁핍상과 지방행정의 부패상을 낱낱이 목격했다.

뒷날 농민을 위한 정치.경제 개혁안을 마련하는 학문적 기틀이 이때 다져졌다.

다산은 순조 즉위 원년(1801) 일어난 신유사옥(천주교 박해 사건)에 연루돼 경상도 장기로 유배됐다.

그리고 같은 해 '황사영 백서 사건'이 터져 천주교 탄압이 더욱 심해지는 바람에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지가 바뀌게 됐다.
이 백서 사건은 황사영(1775~1801)이 신유사옥의 전말과 천주교 박해 대책 등을 비단에 적어

베이징의 주교에게 보내려다 발각된 것이다. 다산은 그 뒤 18년 동안 귀양살이를 더 해야만 했다.

다산은 유배지에서 백성의 생활을 개선하기 위한 학문 연구와 저술에만 전념했다.

18년만에 유배지에서 풀려나 귀향한 뒤에도 여생을 오직 저술에 몰두해 500여 권의 저서를 남겼다.
그는 결국 17세기 후반부터 싹튼 실학사상을 집대성해 주자학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학문으로 체계화시키기에 이르렀다.

◆ 다산의 사상

= 다산의 학문은 공자와 맹자 유학의 근본 정신 재현에 뿌리를 뒀다.

따라서 그는 당시 정치이념이었던 성리학의 공리공담(空理空談, 아무 소용이 없는 헛된 말)을

비판하고, 주자학적 봉건제도의 각종 폐해를 바로잡기 위한 사회 개혁안을 제시했다.

이런 태도는 농민을 착취하는 사회체제를 분석 비판해, 전제(田制)부터 세제, 관제, 법제, 학제, 병제,

정치제도에 이르는 사회적 문제 해결을 위한 그의 개혁안에서 읽을 수 있다.

사상적으로 다산은 유형원(1622~1673년)과 이익을 통해 내려온 경세치용적 실학사상을 계승했다.

여기에 영.정조대 이후 청의 학술과 문물을 배우려 한 북학파의

이용후생(利用厚生, 편리한 기구 등을 잘 이용해 살림에 부족함이 없게 함) 사상을 받아들였다.

그의 사상은 육경사서 등 경전 주석에 나타나는 경학 체계와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 등

일표이서(一表二書)에 나타나는 실학 체계로 나뉜다.


일표이서에는 다산의 정치.경제.사회사상이 녹아 있다.

그 가운데 '경세유표'는 국가 경영에 관련된 모든 제도와 법규에 대해 기준이 될 만한 내용을 담았다.

'목민심서'는 목민관인 지방관리들이 부임부터 물러날 때까지 지켜야 할 윤리강령이 담겨 있는데,

이를 통해 타락한 목민관의 정신적 자세를 바로잡으려 했다.

'흠흠신서'는 '경세유표'와 '목민심서' 중 형옥에 관한 부분을 보완하기 위해 썼다.

경전 주석에 있어 그는 훈고적 실증을 중시하는 한학과 청나라 고증학의 경전 해석 방법을

비판적으로 도입했다. 또 서학의 과학적 사고를 수용해

객관적 사실에 대한 분석적이고 실증적인 방법을 통해 실용의 목적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산은 또 민본주의적 사상을 가지고 있었는데, 자신의 논문인 '원목'과 '탕론'에서

주권 자체가 대중에게 있고 대중에 의한 통치자의 교체는 정당하다고 봤다.
- 2006-04-17, 중앙, 이태종 NIE 전문기자, 조종도 기자 taejong@joongang.co.kr

 

 


 

 
 
[여적] 하피첩
 

조선 실학자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은 9명의 아이 중 6명을 잃고 아들 둘과 딸 하나를 길렀다.

다산의 부인 홍씨는 1780년 학질을 앓은 끝에 팔삭둥이 딸을 낳았으나 나흘 만에 잃었다.

곧이어 학연과 학유 두 아들을 본 뒤 구장과 효순을 낳았지만 그 둘도 일찍 잃었다.

1796년에 낳은 삼동과 그 직후 낳은 아이,

그리고 1801년 다산이 유배가기 바로 전에 얻은 농장은 모두 마마로 세상을 떴다.

다산은 유배지 강진에서 보낸 한 글에서

“구장이와 효순이는 산등성이에다 묻었고, 삼동이와 그 다음 애는 산발치에다 묻었다.

농장도 필시 산발치에 묻었을 거다”라고 애통해 했다고 한다.

 

다산의 고달픈 삶만큼이나 그의 자식 사랑은 유별난 데가 있다.

다산 연구가 박석무씨가 다산의 편지를 모아 편역한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를 보면

아버지로서 다산의 다양한 풍모가 드러난다.

두 아들에게 보낸 가계(家戒·집안의 가르침)를 통해 다산은 공부를 하는 법에서부터

생계를 꾸리는 방식, 친구를 사귈 때 가려야 할 일, 친척끼리 화목하게 지내는 방법,

심지어 시를 짓는 의미에 이르기까지 소상하게 일러주고 있다.

 

다산이 오랜 세월 귀양살이를 하는 동안 부인 홍씨는 고향에서 혼자 논밭을 가꾸면서

집안 살림을 돌보았다. 다산은 그런 부인이 안쓰러웠던지

그의 글 곳곳에서 아내에 대한 미안함과 그리움, 그리고 연민의 정을 내비치곤 했다.

 

중앙일보 보도에 따르면 다산이 부인 홍씨의 붉은 치마에 가계를 적어 아들들에게 보냈다는

하피첩(霞피帖) 3점이 발견됐다고 한다.

하피는 원래 조선시대 왕실의 비(妃) · 빈(嬪)들이 입던 옷을 말하지만,

다산은 부인이 시집올 때 가져온 이 옷이 붉은 색이라 해서 이같이 이름을 붙였다는 것이다.

다산은 가계를 적은 작은 천조각(12×20㎝)을 한지(16×25㎝) 위에 하나씩 붙여 하피첩을 만들었

는데, 이 하피첩은 한 개인 사업가가 2년 전 고물상으로부터 우연히 구입했다고 한다.

다산이 하피첩 4점을 만들었다는 것은 그동안 기록으로만 전해졌으나,

이번에 3점이 발견됨으로써 200년의 세월을 두고 그 값진 유산의 존재 사실이 확인된 것이다.

- 경향 2006-03-28, 박노승 논설위원

 

 

 

[만물상] 하피첩

 

추사 김정희는 제주도에서 귀양살이할 때 아내를 잃었다.

그것도 부음(訃音)이 바다를 건너오느라 한 달 뒤에야 소식을 들었다.

추사는 아내가 아플 때 약 한 첩 달여주지 못한 죄책에 괴로워했다.

 

‘월하(月下)노인 시켜 명부(冥府)에 하소연하길/

내세(來世)엔 우리 부부 운명 맞바꿔달라 하리다/

나는 죽고 당신은 천 리 밖에 살아남아/

당신이 내 슬픔 맛보게 하리다.’ 추사는 차라리 자기가 죽기를 바랐다.

 

▶ 무뚝뚝한 선비들도 안으론 아내 사랑이 극진했다.

조선 초 문인 김종직의 아내는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증조모와 외조모 아래서 컸다.

시집와서는 7남매를 연달아 잃고 결국 아이를 낳다 얻은 병으로 떠났다.

김종직은 박복(薄福)한 아내의 영전에서 통곡하며 긴 제문(祭文)을 바쳤다.

‘당신 아버지는 정정히 계시는데 아름다운 날이면 누가 술을 마련할 것이며,

어린 두 딸 시집갈 땐 누가 짐을 꾸려주겠는가….’

 

▶ 강진에서 10년째 귀양 살던 다산 정약용에게 병석의 아내가 치마를 보내왔다.

시집올 때 입었던 헌 치마였다. 아내의 마음을 헤아린 다산은 치마를 알맞은 크기로 잘라

첩(帖) 몇 권을 만들고 두 아들에 대한 당부를 적어 보냈다.

노을처럼 빛 바랜 붉은 치마에 썼다 해서 ‘하피첩(霞피帖)’이라고 했다.

다산은 문집에 하피첩을 만든 사연을 남겼다.

‘형제가 이 글을 보면 감회가 일 것이고 두 어버이의 은혜를 뭉클하게 느낄 것이다.

 

▶ 3년 뒤 다산은 시집간 외동딸이 눈에 밟혔던지 남은 치마폭을 꺼내 들었다.

매화에 멧새 두 마리를 그려넣고 시 한 수를 보탰다.

 

‘펄펄 나는 저 새/ 매화가지에 쉬는구나…거기 머물고 깃들여/ 네 집안을 즐겁게 해주어라.’

시집 사람들과 화목하게 지내라는 당부를 치마 그림에 실어 보낸 것이다.

고려대 박물관에 소장된 이 ‘매조도(梅鳥圖)’가 아름다운 것은

아버지의 애틋한 딸 사랑이 담겨 있어서다.

 

▶ 하피첩은 존재했다는 사실만 다산문집에 남긴 채 내용과 행방을 알 수 없었다.

전서체(篆書體)로 된 '하피첩'이 TV 감정 프로그램에 등장한다.

한 수집가가 고물상에서 찾아냈다고 한다.

다산이 전서를 쓴 적이 없고 수집과정이 분명치 않다며 의심하는 전문가도 적지 않다.

이 ‘하피첩’이 진짜로 밝혀져 지아비와 아버지의 뜨거운 속사랑이

지금 ‘아버지 부재(不在)시대’의 각박함을 적셔주면 좋겠다.

- 조선. 2006-03-28 김기철 논설위원

   

김민영 부산2상호저축은행 대표이사가 얼마 전 동국대학교 출판부를 통해

'불서를 통해 본 조선시대 스님의 일상'이라는 제목의 소장품 도록을 발간했을 때(11월 15일자 21면 보도),

거기서 특히 눈에 띈 것이 다산 정약용(1762~1836)의 '하피첩(霞피帖)'이었다.

2006년 4월 한 방송사의 TV 프로그램에 어느 사업자가 내놓아 세간의 화제가 됐던 것인데,

어느 새 김 대표의 소장품이 돼 있었던 것이다.


하피첩의 사연은 꽤 로맨틱하다. 다산이 강진에 유배돼 있을 때인 1810년의 일이다.

당시 병중이던 부인 홍 씨가 천리 타향에서 고생하는 지아비를 그리는 마음에

시집올 때 입고 온 치마를 보내왔다. '하피'는 붉은 노을빛 치마란 뜻이다.

부인의 애틋한 정을 짐작한 다산은 서글픈 마음을 억누르고 치마를 마름질해 세 개의 서첩을 꾸미고는

그 안에 두 아들과 손자들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갔으면 좋겠다는 심정을 솔직담백하게 표현했다.

서지학자들은 다산의 필체를 골고루 볼 수 있다는 점에서 하피첩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지만,

김 대표는 "구세제민(救世濟民)을 고민하던 사대부가 귀양살이라는 고독한 환경 속에서

처연한 일개 자연인으로 되돌아가는 모습을 엿보는 것도 꽤 쏠쏠한 재미"라고 일러줬다.

- 2007. 12.01, 부산일보

 
 

 

 

 

 

 

 

 

 

- 'Snow Fl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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