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끼며(시,서,화)

미쳐야 미친다

Gijuzzang Dream 2008. 5. 23. 16:45
 
 
 
 

 

 미쳐야 미친다

 

 

 

명나라 때 오종선(吳從善)은 그의 《소창자기(小窓自紀》에서 이렇게 말했다.

"평생을 팔았어도 이 멍청함[痴]은 다 못 팔았고,

평생을 고쳤어도 이 고질[癖]은 못 고쳤다.

탕태사(湯太史)도 `사람은 벽(癖)이 없을 수 없다`고 했고,

원석공(袁石公)은 `사람은 치(痴)가 없을 수 없다`고 했다.

그럴진대 멍청함은 팔 필요가 없고, 고질은 고칠 필요가 없다."

 

따지지 않고 좋아하는 멍청함과

무언가에 외곬수로 빠지는 고질을 고칠 생각이 전혀 없다는 말이다.

명말의 문장가 장대(張岱)도〈오이인전 서문(五異人傳序)>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람이 벽(癖)이 없으면 더불어 사귈 수가 없다. 깊은 정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흠[疵]이 없으면 더불어 사귈 것이 없다. 참된 기운이 없는 까닭이다."

 

무언가에 병적으로 미친 사람만이 깊은 정과 참된 기운을 갖추고 있다는 뜻이다.

청나라 때 장조(張潮)는 《유몽영(幽夢影)》에서 또 이렇게 말한다.

"꽃에 나비가 없을 수 없고, 산에 샘이 없어서는 안된다.

돌에는 이끼가 있어야 제격이고, 물에는 물풀이 없을 수 없다.

교목엔 덩굴이 없어서는 안되고, 사람은 벽이 없어서는 안된다."

세 사람이 같은 말을 한 셈이다.

 

이때 벽(癖)이니 치(痴)니 자(疵)니 하는 것은

모두 병들어 기댄다는 뜻의 녁()자를 부수로 하는 글자들이다.

모두 무엇에 대한 기호가 지나쳐서 억제할 수 없는 병적인 상태가 된 것을 뜻한다.

매니아 예찬론이라 할 수도 있을 이러한 언급들은

당시 지식인들의 내면 성향을 잘 보여준다. 불광불급(不狂不及)이라고 했다.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는 말이다.

 

남이 미치지 못할 경지에 도달하려면 미치지 않고는 안된다.

미쳐야 미친다. 미치려면(及) 미쳐라(狂).

 

이번 글은 18세기 조선 지식인의 내면 풍경 속에서 자주 등장하는 이른바

이런 종류의 매니아들에 대해 소개하려고 한다.

 

사람이 벽이 없으면 버린 사람일 뿐이다.

대저 벽이란 글자는 병이란 글자에서 나온 것이니, 지나친 데서 생긴 병이다.

비록 그러나 홀로 걸어가는 정신을 갖추고 전문의 기예를 익히는 것은

왕왕 벽이 있는 자만이 능히 할 수 있다.

 

바야흐로 김군은 꽃밭으로 서둘러 달려가서 눈은 꽃을 주목하며

하루 종일 눈도 깜빡이지 않고, 오두마니 그 아래에 자리를 깔고 눕는다.

손님이 와도 한 마디 말을 나누지 않는다.

이를 보는 사람들은 반드시 미친 사람 아니면 멍청이라고 생각하여,

손가락질 하며 비웃고 욕하기를 그치지 않는다.

그러나 비웃는 자들의 웃음소리가 채 끊어지기도 전에

생동하는 뜻은 이미 다해 버리고 만다.

김군은 마음으로 만물을 스승 삼고, 기술은 천고에 으뜸이다.

그가 그린《백화보》는 병사(甁史), 즉 꽃병의 역사에 그 공훈이 기록될 만하고,

향국(香國) 곧 향기의 나라에서 제사올릴 만 하다.

벽의 공이 진실로 거짓되지 않음을 알겠다.

아아! 저 벌벌 떨고 빌빌대며 천하의 큰 일을 그르치면서도

스스로는 지나친 병통이 없다고 여기는 자들이 이 첩을 본다면 경계로 삼을만 하다.

을사년 5월에 소비당 주인은 짓는다. 

 

박제가의 〈백화보서(百花譜序)〉다.

 

그의 이 글에도 예외 없이 벽에 대한 예찬이 나온다.

벽이란 낭비벽(浪費癖), 도벽(盜癖)이란 말에서도 보듯

어떤 것에 대한 집착이 정상에서 훨씬 지나칠 때 쓰는 말이다.

병적인 집착 상태가 벽이다.

그런데 이런 병적인 집착이 없는 사람은 쓸데가 없는 인간이라고 했다.

 

《백화보》라는 책은 꽃에 미친 김군이란 사람이

일년 내내 꽃밭 아래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계절에 따라 피고 지는 꽃술의 모양,

잎새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 놓은 책이다.

그는 아침에 눈만 뜨면 꽃밭으로 달려간다.

꽃 아래 아예 자리를 깔고 드러누워 하루 종일 꽃만 본다.

아침에 이슬을 머금은 꽃망울이 정오에 해를 받아 어떻게 제 몸을 열고,

저물녘 다시 오무렸다가 마침내는 시들어 떨어지는 과정을 쉴새없이 관찰하고

그림으로 그린다. 그리는 것만으로 부족해서 글로 옮겨 쓴다.

 

손님이 찾아와도 혹 꽃피는 모습을 놓치게 될까봐 말도 시키지 말라는 표정으로

꽃만 바라보고 있다. 그의 이런 행동을 보고 사람들은

`저 사람 완전히 돌았군! 미친게 틀림없어`하며 혀를 차거나,

`젊은 사람이 어쩌다가 실성을 했누`하며 안됐다는 표정을 짓기 일쑤다. 

 

하지만 그런가?

"홀로 걸어가는 정신을 갖추고 전문의 기예를 익히는 것은 왕왕 벽이 있는 자만이

능히 할 수 있다"고 박제가는 힘주어 말한다.

미치지 않고는 될 수 없는 일이라고 한다.

 

홀로 걸어가는 정신이란 남들이 손가락질을 하든 말든 출세에 보탬이 되든 말든

혼자 뚜벅뚜벅 걸어가는 정신이다. 이리 재고 저리 재고,

이것저것 따지기만 해서는 전문의 기예, 즉 어느 한 분야의 특출한 전문가가 될 수는 없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힘이 바로 벽이다.

 

《백화보》라는 책!

남들 하는대로 하고, 주판알을 튕기는 사람은 결코 할 수 없는 일을 그는 해냈다.

미쳤다는 손가락질, 멍청이라는 놀림에도 아랑곳 않고,

손님이 와도 시간이 아까워 말 한 마디 나누지 못하는 열정 끝에 그는 이 책을 완성했다.

그를 손가락질 하던 사람은 훗날 자취조차 없겠지만,

꽃을 사랑해 그 모습을 그림으로 남긴 그의 이름은 후세에 길이 남을 것을

나는 의심치 않는다. 그를 미쳤다고 비웃던 자들,

저 전전긍긍하면서 아무 하는 일도 없이 무위도식하면서도

스스로는 지나친 병통이 없다고 만족하는 자들의 비웃음이야 한 줌 값어치도 없는 것이다.

 

김군은 시간만 나면 꽃을 그렸던 모양이다.

박제가의 친구 유득공의 문집에도

<제삼십이화첩(題三十二花帖)〉이란 글이 한 편 더 실려 있다.

 

초목의 꽃과 공작새나 비취새의 깃털, 저녁하늘의 노을, 아름다운 여인,

이 네 가지는 천하에 지극히 아름다운 것이다. 그 중에서 꽃은 빛깔이 다양하다.

 

이제 저 미인을 그리는 사람은

그 입술을 붉게 그리고, 눈동자는 검게 칠하며, 그 뺨에는 엷은 홍조를 그리고는 멈춘다.

 

노을을 그리는 사람은

붉지도 않고 푸르지도 않게 어둑어둑 희미하게 그리고 만다.

새 깃털을 그리는 사람은 금빛으로 무리진 가운데 초록빛을 점찍어 마무리 한다.

 

하지만 꽃을 그리는 사람은 도대체 몇 가지 빛깔을 써야 할지 내가 잘 모르겠다.

김군이 그린 32가지 그림은 모두 초목의 꽃들로, 천 백 가지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오색으로는 능히 다 표현할 수가 없다.

이런 면에서 깃털이나 노을이나 미인이 도저히 미칠 바가 못된다.

 

아아! 이름난 정자를 하나 세워두고, 미인을 머물게 하며,

화병에는 공작새 비취새의 깃털을 꽂아두고, 뜨락엔 꽃을 심어,

난간에 기대어 저녁 하늘의 노을을 바라보는 것이야

천하에 누릴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하지만 미인은 금세 아름다움이 스러져 버리고, 오래된 깃털은 금세 빛이 바래며,

산 꽃은 얼마 못 가 시들고, 남은 노을은 바로 사라져 버린다.

나는 김군에게서 이 화첩을 빌려다가 근심을 잊겠다.

 

이 글을 통해 보면, 김군의 꽃 그림 책은 단순한 소묘에 그치지 않고

꽃잎과 잎새의 빛깔까지 묘사한 채색화였던 것을 알 수 있다.

복사기가 있던 시절도 아니니, 그의 꽃 그림 책은

오로지 한 부 밖에는 만들어질 수 없는 책이었다.

 

세상에서 빛깔이 아름답다고 하는 네 가지 것으로

꽃, 공작새나 비취새의 깃털, 저녁 노을, 미인을 꼽는다.

하지만 새의 꽁지에서 떨어져 나온 깃털은 금세 추레해지고,

저녁 노을은 얼마 못가 밤의 권세에 압도되고 만다.

한 때 뭇 남성의 찬사를 한 몸에 받던 아름다운 여인도

얼마 되지 않아 눈가에 주름살이 앉고 기억 속에서 잊혀져 버린다.

아침 이슬 머금은 싱그런 꽃 떨기도 저물녘엔 이미 시들고 없다.

변치 않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그 아름다움이 꿈이었다고 말하지는 말라.

지금 눈앞에 없지만, 언젠가 분명히 존재했던 것.

그것들의 아름다움과 그 아름다움이 우리에게 가져다 준 설레임을 기념하기 위해

사람들은 미인도를 그리고, 저녁 노을의 풍경을 그리고, 공작새의 깃털을 그린다.

여러 가지를 다할 수 없어 김군은 그 중에서 오늘도 꽃만 그린다.

여러 가지라니, 사실 꽃만 두고 보더라도 그 종류가 너무도 많고

그 빛깔은 이루 헤일 수가 없다.

같은 꽃도 망울이 벌기 전과 갓 피어날 때와, 활짝 피었을 때와, 시들어 질 때의 모습이

다 다르다. 김군은 그 모습의 변화에서 인간의 영고성쇠를 또 읽는 모양이다.

세상은 부질없고, 모든 것은 변해가는데,

그의 꽃 그림 책 속에서 그 꽃들은 새 생명을 받아 늘 변치 않고 절정의 순간을 보여준다.

세상은 부질없지 않다고, 변치 않는 것도 있다고 내게 일러준다.

그가 한 일을 어찌 미친 놈 멍청이의 짓이라 하랴.

나는 그가 친구도 마다하고, 출세도 마다하고, 오로지 꽃을 관찰하고

그것을 그림으로 그려 준 것이 너무도 고맙다.

그가 꽃 그림에 채색을 얹고, 꽃술의 모양과 잎새의 빛깔을 관찰하면서 느꼈을

그 무한한 감사와 경이와 희열을 함께 누리고 싶다.

하여 티끌 세상을 건너가는 이런 저런 근심을 잊고 싶다.


하지만 정작 그는 박제가의 글에서나 유득공의 글에서나 김군으로만 남아있을 뿐

제 이름조차 남기지 못했다. 그의 책도 지금에 와서는 볼 수가 없게 되었다.

 

 

다음 글은 표구에 미친 방효량(方孝良)에 관한 이야기다.

 

벽이란 병이다. 어떤 물건이든 좋아하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좋아함이 지나치면 `즐긴다(樂)`고 한다.

즐기는 사람이 즐김이 지나치면 이를 `벽`이라고 한다.

 

동중서(董仲舒)나 두예(杜預)는 학문에 벽이 있던 사람이고,

왕발(王勃)과 이하(李賀)는 시에 벽이 있던 사람이다.

사령운은 유람에 벽이 있었고, 미불(米불)은 돌에 벽이 있었으며,

왕휘지(王徽之)는 대나무에 벽이 있었던 사람이다.

이밖에도 온갖 기예에도 벽이 있다.

궁실이나 진보(珍寶), 그릇 나부랭이에도 벽이 있다.

심지어는 부스럼 딱지를 맛보거나 냄새나는 것을 쫓아다니는 종류의 벽도 있는데,

이는 벽이 괴상한데로까지 들어간 사람들이다.

내가 평소에 달리 좋아하는 바가 없지만, 오직 그림에 대해서는 벽이 있다.

옛 그림으로 마음에 차는 것을 한번이라도 보면,

비록 화폭이 온전치 않고 장정이 망가졌더라도 반드시 비싼 값에 이를 구입하여,

목숨처럼 이를 애호하였다.

아무개가 좋은 그림을 지녔다는 말을 들으면 문득 심력을 다해서 반드시 찾아가

눈으로 보고 마음에 녹여들어 아침 내내 보고도 피곤한줄 모르고,

밤을 새우고도 지칠 줄을 모르며, 밥먹는 것도 잊고 배고픈 줄도 알지 못하니,

심하도다 나의 벽이여!

앞서 말한 부스럼 딱지를 즐기거나 냄새를 쫓아 다니는 자와 아주 흡사한 부류라 하겠다.

오래된 그림은 흔히 썩어 문드러진 것이 많아 이따금 손을 대기만 하면 바스라지곤 한다.

내가 매번 장차 오래되어 없어질 것을 염려하곤 했다.

방효랑은 평소 그림에 대한 안목을 갖춘 사람이다.

벽에 있어서도 또 보통 사람과는 다른 데가 있다.

옛 그림의 종이가 손상되고 비단이 문드러진 것을 보기만 하면

반드시 손수 풀을 쑤어 묵은 장황을 새로 고치느라 애를 써 마지 않는다.

바야흐로 눈대중으로 가늠해서 손으로 응하면 규격이 절로 들어맞아 조금의 어긋남도 없다.

평소 생활함에 있어서도 풀 그릇 곁을 벗어나지 않았다.

장황을 할 때는 비록 큰 재물을 준다고 해도 그 즐거움과 바꾸러 들지 않았다.

신기하고 교묘한 솜씨는

거의 포정이 소를 잡는 것이나, 윤편이 바뀌를 깎는 것과 서로 아래 위를 겨룰만 하였다. 

그래서 내가 소장한 옛 그림 중에 썩거나 손상된 것은

모두 그의 손을 빌어 낡은 것을 새롭게 하고 수명을 오래 연장할 수 있게 되었다.

 

심하도다, 방군의 벽이여!

또 나에게 비할 바가 아니로다.

 

나의 그림에 대한 벽이 방군의 장황에 대한 벽을 얻어,

옛 그림의 문드러진 것이 모두 온전하게 되었다.

매번 한가한 날에는 그와 더불어 책상을 마주하고 함께 감상하곤 하였다.

어리취한 듯 심취하여 하늘이 덮개가 되고 땅이 수레가 되는 줄도 알지 못하였으니

온통 여기에만 세월을 쏟더라도 싫증나지 않을 듯 하였다.

 

심하구나! 나와 방군의 벽이여. 인하여 벽에 대한 글을 써서 그에게 준다.

 

정조의 사위였던 홍현주(洪顯周)가 장황벽(裝潢癖)이 있던 방효량을 위해 써준 글이다.

원래 제목은 〈벽에 대하여 써서 방효량에게 주다(癖說贈方君孝良)〉이다.

 

장황은 서화의 표구를 가리키는 옛말이다. 요즘 쓰는 표구란 말은 일본에서 들어온 말이다. 홍현주는 먼저 벽에 대해 설명한 뒤, 자신의 그림 수집벽에 대해 말하고,

그에 못지 않은 방효량의 장황벽에 대해 설명하였다. 

방효량은 이름 석자만 전해질 뿐, 본관도 생몰연대도 알 수 없는 인물이다.

다만 그가 정 6품인 장원서(掌苑署) 별제(別提)를 지냈다는 사실만 확인된다.

이로 보면 그는 아주 미천한 신분은 아니었다.

섬세한 안목과 고도의 기술을 요구하는 장황 기술을 그는 생활 속에서

아주 즐겼던 모양이다. 아무리 낡어 헐어진 옛 그림도 그의 손을 한번 거치고 나면

아연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

그가 장황에 몰두할 때는 어떤 큰 재물과도 바꾸려 들지 않을만큼 그 자체를 즐겼다.

그리고는 장황을 마쳐 새롭게 태어난 작품 앞에서 하루 종일 이리 보고 저리 보며

마음을 쏟는 것이 그가 느끼는 가장 큰 기쁨이었다.

 

치(痴), 즉 멍청이를 자처한 사람도 많았다.

이덕무는 자신을 책만 보는 바보라 하여

스스로 〈책만 읽는 바보 이야기(看書痴傳)〉을 지었다.

 

목멱산 아래 멍청한 사람이 있는데, 어눌하여 말을 잘하지 못하였고,

성품은 게으르고 졸렬한데다, 시무(時務)도 알지 못하고

바둑이나 장기는 더더욱 알지 못하였다.

 

남들이 이를 욕해도 따지지 않았고, 이를 기려도 뽐내지 않으며, 오로지 책보는 것만

즐거움으로 여겨 춥거나 덥거나, 주리거나 병들거나 전연 알지 못하였다.

 

어릴 때부터 21세 나도록 손에서 일찍이 하루도 옛 책을 손에서 놓은 적이 없었다.

그 방은 몹시 작았지만 동창과 남창과 서창이 있어,

해의 방향을 따라 빛을 받아 글을 읽었다.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책을 보게 되면 문득 기뻐하며 웃었다.

집안 사람들은 그가 웃는 것을 보면 기이한 책을 얻은 것인 줄로 알았다. 

두보의 오언율시를 더욱 좋아하여, 끙끙 앓는 것처럼 골똘하여 읊조렸다.

그러다 심오함 뜻을 얻으면 너무 기뻐서 일어나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는데,

그 소리는 마치 갈가마귀가 깍깍대는 것 같았다.

그러다 혹 고요히 소리 없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뚫어지게 바라보기도 하고,

혹 꿈결에서 처럼 혼자 중얼거리기도 하였다.

사람들이 이를 가리켜 `간서치(看書痴)`,

즉 책만 읽는 멍청이라고 해도 또한 기쁘게 이를 받아들였다.

 

아무도 그의 전기를 짓는 이가 없으므로

이에 붓을 떨쳐 그 일을 써서〈간서치전〉을 지었다. 그 이름과 성은 적지 않는다.

 

간서치는 누구인가?

목멱산 아래 사는 멍청한 사람이다. 그의 나이는 21세이고,

할 줄 아는 일이라고는 책 읽는 일밖에 없다. 말주변도 없고, 세상 돌아가는 물정도 모르며,

이렇다 할 취미도 없다.

남들이 손가락질을 하든 말든 그저 책보는 재미로 한 세상을 살아가는 위인이다.

그는 동쪽과 남쪽, 그리고 서쪽의 세 방향으로 창이 난 몹시 작은 방에 거처하는데,

아침에 동창으로 해가 들면 그 아래에서 책을 읽고,

저녁에 서창으로 해가 들면 그리로 옮겨가 책을 읽었다.

그러다가 간혹 읽고 싶었으나 구할 수 없었던 책을 손에 넣기라도 할라치면

그저 입이 함박만큼 벌어져 좀체로 다물어지지 않았다.

그가 특히 좋아 하는 것은 두보의 시, 그중에서도 오언율시이다.

비맞은 중처럼 꿍얼거리며 시를 읽다가 회심의 글귀나 쾌재의 구절을 만나면

미칠 듯 좋아서 가만 앉아 있지 못하고 좁은 방안을 미친 듯 이리저리 돌아다닌다.

그럴 때에는 무어라고 쉴새없이 떠들어대는데 그 소리는 마치

갈가마귀의 깍깍대는 소리 같았다.

그러다 더 미치면 마치 넋이 나간 사람처럼 눈동자를 한 곳에 고정시켜 두고 있다가,

알아듣지도 못할 말을 잠꼬대처럼 중얼거리기도 하였다.

 

그런 그를 두고 사람들은 `간서치`, 즉 책벌레라고 놀려도 보지만

애초에 그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간서치전〉은 어째서 지었는가?

나 아니고서는 아무도 그의 일을 적어줄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간서치의 이름은 누구인가? 그는 바로 이 글을 쓰고 있는 바로 그 사람이다.

그의 이름은 이덕무다. 

 

정철조(鄭喆祚, 1730-1781)는 벼루를 잘 깎기로 이름났다.

그래서 그의 호는 석치(石癡)다. 

그는 당당히 문과에 급제하고 정언 등의 벼슬까지 지냈던 인물인데,

당대에 그가 깎은 벼루를 최고로 쳤다. 예술에 안목이 있다는 사람 치고

그의 벼루 한 점 소장하지 못하면 아주 부끄럽게 여겼을 정도였다고 했다.

 

《병세재언록(幷世才彦錄)》에는 그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죽석(竹石) 산수를 잘 그렸고, 벼루를 새기는데 벽이 있었다.

벼루를 새기는 사람은 으레 칼과 송곳을 갖추고, 새김칼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그는 단지 차고 다니는 칼만 가지고 벼루를 새기는데,

마치 밀랍을 깎아내는 듯 하였다. 돌의 품질을 따지지 않고,

돌만 보면 문득 팠는데, 잠깐 만에 완성하였다.

책상 가득히 벼루를 쌓아두었다가 달라고 하면 두말 없이 주었다.

 

그에게서도 매니아적인 특성은 여지없이 드러난다.

돌을 깎아 벼루를 만드는 일 그 자체가 좋아서 하는 것이지,

그것으로 생계의 수단을 삼지 않는다.

또 돌의 재질을 가리지 않고, 보이면 보이는 대로 파서 그것으로 작품을 만드는 것이다.  

 

이렇듯 꽃에 미친 김군이나 장황에 고질이 든 방효량,

책에 미친 이덕무, 벼루에 빠진 정철조 말고도 18, 19세기로 접어들면

어느 한 분야에 미쳐 독보의 경지에 올라선 매니아들이 자주 등장한다.

 

칼 수집에 벽이 있어 칼마다 구슬과 자개를 박아 꾸며서 방과 기둥에 주욱 걸어 놓고,

날마다 번갈아 가며 찼지만 1년이 지나도록 다 찰 수 없었다는 영조 때 악사 김억(金檍).

 

매화에 벽이 있어 매화 수십 그루를 심어 놓고

당대의 시에 능한 사람 수천 명에게 매화시를 구해,

시에 능하다는 소문만 있으면 신분의 높고 낮음을 가리지 않고 달려가 시를 받아와

비단으로 꾸미고 옥으로 축을 달아 간직하여 `매화시광(梅花詩狂)`으로 불렸던

김석손(金 孫) 같은 인물들이 그들이다.

 

앞서 책에 미쳤던 이덕무만 해도 매화에도 심취하여,

밀랍으로 만든 조매(造梅)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래서 스스로 매화탕치(梅花宕癡)라 하여 이를 줄여 매탕(梅宕)이란 호로 불려지기도 했다.

 

박지원은 이런 매니아들의 세계를 이렇게 묘사한다. 

 

비록 작은 기예라 해도 잊는 바가 있은 뒤라야 능히 이룰 수 있거늘,

하물며 큰 도이겠는가?

 

최흥효(崔興孝)는 온 나라에 알려진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이다.

일찍이 과거를 보러가서 답안지를 쓰는데, 한 글자가 왕희지와 비슷하게 되었다.

앉아서 하루 종일 뚫어지가 바라보다가 차마 능히 버리지 못하고 품에 안고서 돌아왔다.

이는 얻고 잃음을 마음에 두지 않았다고 말할만 하다.

 

이징(李澄)이 어려서 다락에 올라가 그림을 익혔는데,

집에서는 있는 곳을 모르다가 사흘 만에야 찾았다.

아버지가 노하여 매를 때리자 울면서 눈물을 찍어 새를 그렸다.

이는 그림에 영욕을 잊은 자라고 말할만 하다.

 

학산수(鶴山守)는 온 나라에 유명한 노래 잘하는 자이다.

산에 들어가 연습할 때 한 곡조를 부를 때마다 모래를 주워 신발에 던져

신발이 모래로 가득차야만 돌아왔다.

일찍이 도적을 만나 장차 그를 죽이려 드니, 바람결을 따라 노래하자

뭇 도적이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는 이른 바 삶과 죽음을 마음에 들이지 않은 것이다.

내가 처음 이를 듣고는 탄식하여 말하였다.

"대저 큰 도가 흩어진 지 오래 되었다.

나는 어진이 좋아하기를 여색 좋아하듯 하는 자를 보지 못하였다.

저들이 기예를 함을 가지고도 족히 그 목숨과 바꾸었으니,

아아!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은 것이다.

  

<형언도필첩서(炯言挑筆帖序)〉의 앞부분이다.

 

우연히 왕희지와 같게 써진 글씨에 제가 취해서

과거 답안지를 차마 제출할 수 없었던 최흥효.

아버지에게 매를 맞는 와중에서도 저도 몰래 눈물을 찍어 새를 그리던 이징.

모래 한 알로 노래 한 곡을 맞바꿔, 그 모래가 신에 가득찬 뒤에야 산을 내려온 학산수.

이들은 모두 예술에 득실을 잊고, 영욕을 잊고, 사생을 잊었던 사람들이다.

잊는다[忘]는 것은 돌아보지 않는다는 뜻이다. 따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것을 해서 먹고 사는데 도움이 될지, 출세에 보탬이 될지 하는 따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냥 무조건 좋아서, 하지 않을 수 없어서 한다는 말이다.

 

붓글씨나 그림, 노래 같은 하찮은 기예도 이렇듯 미쳐야만 어느 경지에 도달할 수가 있다.

그러니 그보다 더 큰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깨달음에 도달하려면 도대체 얼마나 미쳐야 할 것인가?

순 가짜들이 그럴듯한 간판으로 진짜 행세를 하고,

근성도 없는 자칭 전문가들이 기득권의 우산 아래서 밥그릇 챙기기에 여념이 없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풍경이다.

그러나 진짜는 진짜고 가짜는 가짜다.

진짜 앞에서 가짜는 몸 둘 곳이 없다. 설 땅이 없다.

그것이 싫어 가짜들은 패거리로 진짜를 몰아내고, 자기들끼리 똘똘 뭉친다.

한 시대 정신사와 예술사의 발흥 뒤에는 자신이 좋아하는 어느 한 분야에 이유없이 미치는

매니아 집단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들은 역사에 뚜렷한 이름 석자조차 남기지 못하고 스러질 때가 더 많다.

하지만 한 시대의 열정이 이런 진짜들에 의해 안받침되고,

우연히 남은 한 도막 글에서 그들의 체취와 만나게 되는 것은

한편의 슬프고 또 한편으로 다행한 일이다.     

 정민교수의 한국한문학 홈페이지

옛사람내면풍경

 

 <미쳐야 미친다>, 정민(한양대 국어국문과교수), 푸른역사,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