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끼며(시,서,화)

세검정 구경하기

Gijuzzang Dream 2008. 5. 23. 15:53
 
 
 
 

  

 세검정 구경하는 법

 - 茶山의 遊記 두 편


 

 

세검정의 빼어난 풍광은 오직 소낙비에 폭포를 볼 때 그때 뿐이다.

그러나 막 비가 내릴 때는 사람들이 옷을 적셔 가며 말에 안장을 얹고

교관(郊關) 밖으로 나서기를 내켜하지 않고,

비가 개고 나면 산골 물도 또한 벌써 조금 수그러들고 만다.

이 때문에 정자가 저편 푸른 숲 사이에 있는데도

城中의 사대부 중에 능히 이 정자의 빼어난 풍광을 다 맛본 자가 드물다.

신해년(1791) 여름 일이다.

나는 韓 甫 등 여러 사람과 함께 명례방(明禮坊) 집에서 조그만 모임을 가졌다.

술이 몇 순배 돌자 무더위가 찌는 듯 하였다. 먹장 구름이 갑자기 사방에서 일어나더니,

빈 우레소리가 은은히 울리는 것이었다. 내가 술병을 걷어 치우고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이건 폭우가 쏟아질 조짐일세. 자네들 어찌 세검정에 가보지 않으려나?

만약 내켜하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벌주 열 병을 한 차례 갖추어 내길세."

모두들 이렇게 말했다. "여부가 있겠나!"

마침내 말을 재촉하여 가서 창의문(彰義門)을 나서자 비가 몇 방울 하마 떨어지는데

주먹만큼 컸다. 서둘러 내달려 정자 아래 수문에 이르자

양편 산 골짝 사이에서는 이미 고래가 물을 뿜어내는 듯 하였고, 옷자락도 얼룩덜룩하였다.

정자에 올라 자리를 벌여놓고 앉았다. 난간 앞의 나무는 이미 뒤집힐 듯 미친 듯이 흔들렸다.

상쾌한 기운이 뼈에 스미는 것만 같았다.

이때 비바람이 크게 일어나 산골 물이 사납게 들이 닥치더니

순식간에 골짜기를 메워 버렸다. 물결은 사납게 출렁이며 세차게 흘러갔다.

모래가 일어나고 돌멩이가 구르면서 콸콸 쏟아져 내렸다.

물줄기가 정자의 주추를 할퀴는데 그 기세가 웅장하고 소리는 사납기 그지 없었다.

난간이 온통 진동하며 능히 편안치 못함을 두려워하는 듯 하였다.

 

내가 말했다. "자! 어떤가."

모두들 말했다. "여부가 있나!" 술과 안주를 내 오라 명하여 돌아가며 웃고 떠들었다.

잠시 후 비는 그치고 구름이 걷혔다. 산골 물도 점차 잦아들었다.

석양이 나무 사이에 비치자 물상들이 온통 자줏빛과 초록빛으로 물들었다.

서로 더불어 베개 베고 기대 시를 읊조리며 누웠다.

조금 있으려니까 沈華五가 이 소식을 듣고 뒤쫓아 정자에 이르렀는데

물은 이미 잔잔해져 버렸다. 처음에 화오는 청했는데도 오지 않았던 터였다.

여러 사람들이 함께 골리며 조롱하다가 더불어 한 순배 더 마시고 돌아왔다.

같이 갔던 친구들은 洪約汝와 李輝祖, 尹无咎 등이다.

 

다산 정약용(1762-1836) 선생의〈遊洗劍亭記〉이다.

 

푹푹 찌던 지난 여름 내내 나는 소낙비가 막 쏟아지려 할 그때를 기다리며 보냈다.

멀리서 마른 번개가 쿵쿵 울리며 먹장 구름이 뒤덮혀 올 무렵

세검정으로 달려가볼 작정을 하며 지냈다.

마음 속에 이런 작정을 두어 두고 있는 것만으로도 상쾌하였기에

정작 실행에 옮기지 못한 것은 개의할 것이 못되었다.

후덥지근한 무더위에 실없이 앉아 술 사발을 돌리며 시간을 죽이고 있던 벗들.

멀리서 먹장 구름이 몰려들더니 난데없는 마른 번개가 하늘을 가른다.

주인은 뜬금없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세검정 구경을 종용하고,

영문을 모르며 눈만 껌뻑이던 벗들도 군말 없이 따라 나섰다.

나귀를 재촉하고 신들을 찾아 신고, 한 차례 부산을 떨었을 그 모습이 눈에 선하다.

창의문을 나서서 지금 상명여대 앞 홍지문 아래 수문에 당도하자

이미 빗방울은 후득이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못 감동적인 세검정 놀이를 거나하게 마쳤던 것이다.

뒤늦게 들이닥친 심화오 때문에 그들은 더 통쾌했을 게다.

후득이는 빗방울에 옷자락을 적실 각오 없이는 세검정의 진면목은 구경할 수가 없다.

정말 좋은 것은 싫은 일을 감내한 뒤라야 맛볼 수 있다.

하지만 뒤늦게 헐레벌떡 달려온 심화오처럼 우리네 하는 일은 언제나 한발이 늦는다.

 

그렇지만 나는 이 글을 읽다가, 마른 우레 쿵쿵대는 찜통 더위 속에서

엉뚱하게 세검정으로 달려갈 생각을 하고 있는 다산의 그 마음자리를 그리워 한다.

아직 드러나는 않은 사물의 핵심을 꿰뚫어 보는 그의 안목이 부럽다.

 

절정은 미리 알고 기다린 자를 위해서만 존재한다.

그것이 절정인줄 알았을 때는 이미 늦은 때이다.

속인들은 언제나 버스가 다 지나 간 다음에 난리를 친다.

그러나 지혜로운 이는 天機를 먼저 읽는다.

 

 

선생의 〈遊天眞菴記〉 한편을 더 감상해 보자.

 

정사년(1797) 여름에 나는 명례방에 있었다.

석류꽃이 막 망울을 터뜨리고 보슬비가 갓 개이자,

苕川에서 물고기를 잡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이 일었다.

이때 법제가 대부는 위에 아뢰어 고하지 않고서는 도성문을 나설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아뢰어 보았지 될 수 없었던지라, 마침내 그저 가서 초천에 이르렀다.

이튿날 截江網 그물을 가져다가 고기를 잡으니, 크고 작은 놈이 50여 마리나 되었다.

작은 배는 무게를 감당치 못하여 가라앉지 않은 것이 겨우 몇 치 뿐이었다.

배를 藍子洲로 저어가 즐거이 한바탕 배불리 먹었다.

먹고 나서 내가 말했다.
"옛날 張翰은 江東을 그리면서 농어와 미나리를 말했었는데, 물고기는 내가 이미 맛보았다.

지금은 산나물이 한창 향기로울 때이니 어찌 天眞菴에 가 놀지 않겠는가?" 
 

이에 형제 네 사람이 집안 사람 서너 명과 함께 천진암으로 갔다.

산에 들어서자 초목이 울창하고,

산 속엔 온갖 꽃들이 활짝 피어 그 꽃다운 향기가 매우 짙었다.

 또 온갖 새들이 화답하며 우는데 그 소리는 맑고도 매끄러웠다.

가다가는 듣고, 듣다가는 가면서 서로 돌아보며 너무들 즐거워 하였다.

절에 다달아 술 한잔에 시 한수를 읊조리며 하루 해를 보냈다.

이렇게 사흘을 놀다가 비로소 서울로 돌아오니, 무릇 얻은 시가 20여 수였다.

먹어본 산나물은 냉이와 도라지, 고비와 고사리, 그리고 두릅 따위 대여섯 종류였다.

 

 

명례방은 지금의 명동이다.

그 시절 그는 갇힌 사람처럼 답답했던 모양이다.

봄비 개이고 석류꽃 갓 피어난 어느 봄날 그는 갑자기

고향 능내 앞을 흐르는 초천의 쪽빛 강물이 그리웠다.

매운탕 끓여 먹겠다고 휴가를 신청할 수도 없는 노릇이기에

그냥 훌쩍 근무지 무단이탈을 감행하고 말았다.

조랑말을 타고 동대문을 빠져나가 덕소를 지나 능내로 향하는 나귀의 걸음이

얼마나 상쾌했을까? 멀리 양수리의 맑은 강물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을 때,

그의 마음은 얼마나 설레었을까?

 

갑자기 들이닥친 그를 보며, 반가우면서도 웬일인가 싶어 의아하게 바라보는 눈길들도

많았겠다. 그렇게 하루 해가 저물고 이튿날 아침 오래 주렸던 사람처럼 그물을 재촉하고

배 띄우기를 서둘렀을 때 곁에서 빙그레 웃었을 그 표정들도 정겹다.

둥그렇게 그물을 던져 묵직하게 당겨 올라올 때,

아마도 그는 세상 사는 맛이 이런 것인가 싶었을 터이다.

서둘러 그들은 근처 모래섬으로 건너가 회를 치고, 솥을 걸어 매운탕을 끓였겠지.

배가 둥글어지도록 먹었을 때의 그 포만감은 또 어땠을까?

 

어려운 걸음이니 예서 그만두고 말 수야 있나. 일행은 다시 천진암으로 걸음을 재촉한다.

넘실넘실 걷는 걸음 따라 산중에는 온갖 꽃들이 만발했구나.

그 향기는 마치도 출렁이는 물결과 같구나.

새들은 그 내음에 취해 까르르 그만 웃음을 터뜨린다. 도저히 그냥 갈 수가 없다.

취한 듯 바라보다 가만히 귀 기울이고, 그러다간 깜빡 생각났다는 듯이

다시 걸음을 재촉한다.

 

나도 몰래 걸음은 다시금 멈춰지고. 향기로운 냉이와 두릅, 부드러운 고사리를 캐어

국도 끓여 먹고 회도 쳐서 내오고, 나물로 무쳐도 먹었다.

아! 피가 제대로 돌고 답답하던 숨이 탁 트이는구나.  

 

 

 정민교수의 한국한문학 홈페이지

옛사람

내면풍경

 

 

 

세검정. 겸재 정선, 종이에 담채, 22.7×61.9㎝, 국립중앙박물관

 

 

세검정, 한양진경도첩, 권섭(1671-1759), 18세기, 지본담채, 각 41.7×25.7㎝, 개인소장

 

세검정, 유숙(1827-1873), 19세기, 지본담채, 26.1×58.2㎝, 국립중앙박물관

 
 
 
 
 
 

 

- Norah Jon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