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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재 윤증 초상 제작과 『영당기적(影堂紀蹟)』

Gijuzzang Dream 2008. 5. 3. 12:02

 

 

 

 

 명재 윤증(尹拯) 초상 제작과 『영당기적(影堂紀蹟)』

 

국립고궁박물관에서는 2006년부터 2007년까지

문화재청 동산문화재과에서 조사하여 보물로 일괄지정한 조선시대 초상화를 대상으로

‘화폭에 담긴 영혼, 초상(肖像)’ 특별전을 2007년 11월 27일부터 2008년 1월 13일까지 개최하였다.

전시된 많은 초상 가운데

보물 제1495호로 일괄 지정된 1744년 장경주필 측면전신좌상 1점,

1788년 이명기필 측면전신좌상 2점과

이들 초상의 제작과정을 상세히 기록해 둔『영당기적』을 통해

일반사대부가에서 이루어졌던 초상 제작의 의미를 알아본다.

지난 2007년 11월 국립고궁박물관은

전관개관을 기념하는 특별전으로 조선시대 초상화 전시를 개최하였다.

현존하는 조선시대의 초상화 전체를 놓고 볼 때

조선 신하들의 정장 관복인 사모관대(紗帽冠帶)에 짙은 녹색의 단령포(團領袍) 차림의 초상화들이

단연 우세하여 조선 초상화의 대표격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전시된 많은 초상화들 중,

다소 딱딱하고 형식적으로 느껴지는 관복 초상들 속에서 미색이나 호분과 같은 은은한 채색을 절제적으로 사용하되, 가는 먹선과 고운 명암을 더해 그린 평상복 차림의 명재(明齋) 윤증尹拯, 1629~1714년)의 초상들이 유독 눈길을 잡아끈다.

 

언뜻 보면 온화하고 여유로운 인품의 소유자로 보이지만, 예리한 눈매 등에서 풍겨지는 전체적인 분위기에서는 결코 간단치 않은 깊이와 복잡한 삶의 역정이 포착된다.


윤증은 인조 · 효종 · 현종 · 숙종 · 경종 5대에 걸친 86년간,

조선이 중기에서 후기로 넘어가는 과도기를 살았던 인물이다.

 

그는 향촌에 묻혀 평생 효를 실천하고 학문에 힘쓰고 나아가 후학을 키워 국가의 동량을 길러 낸

재야의 대학자요, 사림의 스승이었다.

동시에 그는 대외적으로 명ㆍ청 교체를 당해 조선 내부의 변혁이 요구되던 시대에

스승 송시열(宋時烈)이라는 권력 실세에게 한 치 양보함 없이

그리고 마침내 배사(背師)라는 패도의 길을 분명히 하면서까지

주자학적 명분론의 수정을 제시했던 인물이다.


윤증의 이와 같은 행보는 그의 가족사와 긴밀히 연결되어 진행되었고

한편으로는 가학(家學)으로 시작한 학문 및 그의 대성, 그 결과로 얻어진

선구적 현실인식의 필연적 결과였고 마침내 소론의 영수로 추대되는 근본적 이유가 된다.


200년 이상 이어졌던 윤증의 초상 제작


윤증 초상이 제작된 사례에 대해서는 종가에 전해지는 『영당기적』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윤증 생전 1711년(83세)에 변량이란 화사에 의해 처음으로 그려진 후,

사후인 1744, 1788, 1885년에 장경주, 이명기, 이한철에 의해

각각 변량본을 원본으로 한 세 차례의 개모(改模)가 있었다.

 

또한 『영당기적』에는 이외에도

초상을 모신 영당의 의례와 중수 기록, 낡은 초상의 세초 기록, 영당의 관리 기록 등도

포함되어 있어, 조선시대 향촌의 일반 사대부가에서 초상을 제작하고 관리하였던 실태를

상세히 전해 준다.
또한 책의 말미에는 세 차례의 개모시 부조기(扶助記)가 게재되어 있어

윤증의 초상을 후손들을 포함한 소론의 당인들이 공동으로 제작하고

소론의 행사처럼 치른 모습을 알 수 있다.


현재 윤증의 초상은 장경주가 그린 측면전신좌상(1744년)과

이명기가 그린 신·구법의 측면전신좌상(1788년)이 남아 있고

이와 함께 작자는 알 수 없는 가슴 위까지 그린 초본으로 여겨지는 정·측면 상반신상이 전한다.

 

한편 역시 작자미상인 1919, 35년에 제작된 정면상 2점도 남아 있다.


전신상 5점은 화면 오른편 상단에 표제를, 왼편 하단에 제작년을 밝히는 형식이 모두 동일하다.

기록에서 알 수 있듯 최초에 정면상, 측면상을 각각 제작하고 이 원본을 토대로 지속적으로 개모를 거듭함으로써 사방모에 도포 차림새가 모두 동일하고 앉음새와 손모양이 두 유형별로 동일하다.

다만 장경주본과 이명기 구법본이 선 위주의 표현을 하고 있는데 반해

나머지 초상들은 음영을 가하면서 입체 표현에 집중하고 있는 점이 다르다.


『영당기적』의 네 차례 초상 제작과 세 차례 세초 사실을 고려하면

이한철본이 없는 것 빼고 윤증 초상의 남은 상황이 대체로 일치한다.

최초 변량이 그렸던 1711년부터 1935년 마지막 제작 시점까지 2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한 가문, 한 당파의 스승의 초상 제작이 집단적 움직임으로 거듭되었고

제작도 장경주나 이명기와 같이 어진 주관화사(主管畵師)나

당대 국수(國手)라 하는 이들에게 맡겨졌다.

물론 맨 처음 윤증 생전에 이루어졌던 변량 제작의 경우

이미 고령에 이른 스승의 사후를 대비할 절박함에서 촉발되었을 것이지만,

이후 노론의 반대 정파로서 소론의 결집이 표면화됨에 따라

윤증 초상의 제작 동기는 또 다른 국면으로 접어든 것을 볼 수 있다.


즉 거듭되는 윤증의 초상 제작은 한 당파의 결집의 구심점이자

그 집단의 건재함을 보여주는 의도도 함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초상의 제작은 이제 돌아가신 선현을 기리고 제향 드리고자 하는 목적 이외에

또 다른 목적이 추가되고 있음을 윤증의 초상 제작과 그 관련기록인 『영당기적』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 김경미 국립고궁박물관 학예연구사

- 문화재청, 월간문화재사랑, 2008-05-01

 

 

 

 

 

 

 

- La Vida Es Bella (인생은 아름다워) / Ernesto Cortaza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