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끼며(시,서,화)

단원 김홍도의 예술과 삶

Gijuzzang Dream 2008. 5. 19. 22:18

 

 

 

 단원 김홍도의 예술과 삶

 

 

안산에 온지 5년이 지났다. 아마 특별한 일이 없다면 안산에서 뼈를 묻게 될 것 같다.

이곳 안산이 단원 김홍도 선생의 고향인 줄 몰랐다.

작업실이 안산 초지동에 있는데 이곳이 당시에는 경강이라 이르렀던 한강,

김포와 화성 남양만의 요충지로 이를테면 지금의 해군사령부가 있었던 장소이다.

이곳이 제1초지진이었으나 숙종 이후로 강화도로 옮겨 갔으며 강화도를 제2초지진이라 했다.

안산, 남양 땅은 조선 시대부터 아주 글로벌한 땅이었다.

특히 중국을 갈 때면 압록강을 건너 산동반도를 지나는 육로길이 있었겠지만

어찌 중국을 가는데 사람 몸 하나만 달랑 가겠는가?

주로 바닷길 하이웨이를 이용하여 배로 단동이나 산동, 연경 등 청나라로  들어갔는데

그 대부분 출발의 거점이 안산 땅이었고 화성 남양만 뱃길이었다.

 

군사적 전략적 요충지인 초지진과 함께 조선의 공물(公物)들이 한꺼번에 모이는 주요지역이었는데, 남쪽 호남평야, 김제평야의 세곡선이 우마차로 올라올 수 없어서 배로 안산바다로 들어왔다.

 

당시 영광 법성포, 고창, 군산 등의 세곡선이 이곳으로 와서

바로 경강인 한강나루와 마포로 들어갔다. 그러다 보니까 이를 노리는 수적들과 해적들이 많았다.

수적은 조선 민중들로 구성되기도 했지만 아주 큰 수적들은 외부의 왜구들도 포함하고

중국인들까지 관계한 규모로 그 세력들이 컸다. 수

적들 간에도 세력 판도가 있었고 나라간 그리고 세력간의 싸움들이 빈번했었다.

 

단원 김홍도

단원 김홍도와 이들이 결코 무관하지 않다.

단원이 살았던 시대의 흐름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단원은 영조와 정조, 순조 초기까지 살았다.

영·정조 시대는 조선 시대 급격한 변동기였다.

그 연대적 흐름을 보면서 단원이 살았던 시대적 상황을 접근해야 한다.

 

단원은 출생기와 죽은 해가 정확하지 않다.

도화서(圖畵署) 화원은 중인계급으로 대부분 그 기록이 없다.

하지만 전적을 비교하면 1745년(영조 21)에 태어나 정조가 죽은 후 1806년(순조 6)까지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영조는 조선의 왕들 중에서 가장 길게 56년간 집권했다. 정조도 24년간 길게 집권하여 사학자들은 조선 영·정조대가 태평성대한 시기였다고 하는데 사실은 굉장한 사회적 변혁기였다.

단원이 1745년(영조 21)에 태어나서 정조가 죽은 후 1806년(순조 6)에 죽어 62세로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그 시대상을 살펴보면, 숙종 때 우리나라 최초 전국인구 조사를 했는데

1720년 전국 인구가 680만 8백8명이었다.

인구조사를 할 만큼 왕권이 강화되었고 권력이 공고해졌다고 볼 수 있는데,

그 이듬해 1721년 전국 각지에서 민란(民亂)이 발생한다.

그 민란들을 잠재우기 위해 노론계 네 대신을 귀향 보내고 보름 안에 그 네 대신들을 숙청한다.

 

1724년에 영조가 집권하고 1727년 전라도 각지에서 민란이 발생한다.

1728년 난 중에 가장 큰 이중자 난이 발생하고,

1730년 황해도, 1742년 강원도, 이어 1745년 단원이 탄생하고

단원이 7살일 때인 1752년에는 안산 인근 군포에서도 큰 민란이 났으며,

1753년에는 이중환의 『택리지』가 저술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모티브다.

 

이중한의 『택리지』는 우리나라 최초의 인문지리학 저술이다.

이중환에 의해 백두대간 1대간과 13정맥으로 파악되어

바야흐로 우리 인문학의 원전이 탄생된 것이다.

일제 시대에 들어 일제 어용학자들이 서양식 기법에 의한 산맥 개념을 도입하면서

우리 식의 인문지리가 사라져 버렸는데 이 『택리지』 저술은 비로소 조선식으로

우리 땅을 분석하고 이를 배경으로 하여

후에 <청구도>와 세계 지리사에 기리 남을 고산자의 <대동여지도> 등이 발간된다.

<대동여지도>는 거대한 한반도 지도로 매우 크며 거의 정확하다.

 

나는 화가 활동 이외에 풍수학(風水學)이 이를테면 부전공이다.

풍수를 공부할 때 실제 기존 우리나라 지도를 가지고 실측하는 것보다

이 <대동여지도>를 보고 지경(地境) 등을 파악할 정도로 매우 정확하다.

이 모든 지도들의 철학적 근거가 된 것이 바로 이중한의 『택리지』이며

이로써 우리 땅이 우리식으로 해석된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단원 살아생전에 이루진 일들이다.

 

1758년에 해서 · 관동지방에 천주교가 크게 보급된다.

천주교는 자기 조상의 제사를 폐하는 면이 있어서 나라에서 이를 엄금했다.

천주교 전래는 단원과 상관관계가 있다.

 

1762년 사도세자가 뒤주 속에서 굶어 죽는다. 궁궐 안 도화서의 단원이 이 사건을 겪는다.

도화서 화원은 날마다 궁궐로 출퇴근해야 하니까

다음 왕이 될 사도세자가 죽은 그 엄청난 상황을 절실히 목격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 역시 단원의 예술혼과 관련해 또한 중요한 모티브가 된다.

아울러 우리가 단원의 정신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풀어야 할 과제이기도 하다.

 

창경궁 영춘헌에서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위해 지은 정조대왕의 시.

“어머니 위해 경사스런 자리를 크게 여니 전보다 빛나고 / 색동옷 입고 헌수(獻壽)하는 모임을 다시 여네. / 탁 트인 영춘헌에서 봄을 맞이하니 봄이 떠나지를 않아 / 삼가 이 모임을 해마다 열리라.”(번역 임재완)

어머니 혜경궁 홍씨에 대한 정조의 효심이 잘 드러나 있다. 리움 소장

 

1776년 드디어 정조가 즉위한다. 우리는 정조를 흔히 ‘철의 군주’라고 한다.

철인개혁정치, 조광조, 그리고 화성 등이 생각난다. 정조가 즉위하고, 즉시 규장각이 설치된다.

규장각은 대단한 기관이다. 요즘으로 말하면 국회도서관이다.

당시 조선 땅에서 나온 모든 서책과 자료들을 아카이브하고 정리하여 논쟁하고

전국적인 담론을 이끌어가는 기관이었다.

 

정조를 개혁정치, 철인군주라 하지만 나는 감히 ‘예인군주(藝人君主)’라고 말하고 싶다.

예술에 대한 탁월한 식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국립박물관에 가면 정조대왕의 그림과 글씨가 있다.

한번 그것을 보면 그 다음 글과 그림이 확연히 정조대왕 것인지를 누구나 쉽게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그 솜씨가 탁월하였다. 당시 도화서 궁궐화가가 약 30여 명 되었는데

그 중에서 단원을 정조대왕이 특히 총애했다.

임금이 감히 중인(中人)인 화가를 직접 거론한 예가 없는데 《정조실록》에 따르면

단원 김홍도를 몇 차례 언급하고 있을 정도이다.

그런 면에서 단원을 ‘민중의 숨결을 그린 화가다’라고 보는 견해는 꼭 맞는 얘기가 아니다.

단원은 기본적으로 대왕의 총애를 한몸에 받는 궁중화가였던 것이다.

 

1784년에 최초 천주교 세례자가 나온다. 이승훈이 중국 연경에서 세례를 받은 것이다.

그러나 그 이듬해인 1785년 천주교도 1,400명 순교를 당한다.

그후로도 천주교에 대한 박해와 천주교도들의 순교가 이어지는데

가위 한국 천주교의 수난의 역사라고 할 만하다.

개신교와 다르게 천주교는 수천 명이 죽은 순교의 역사로 점철되어 있다.

1787년 프랑스 함대가 제주도와 울릉도에 나타나고 그 후로도 한반도는 결코 고요한 땅이 아니라

포르투갈, 네덜란드 함대가 자주 출몰하는 그야말로 서세동점(西勢東占)의 공간이었다.

지정학적으로 한반도는 러시아, 중국, 일본에 이르는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1792년 정약용이 기중기를 발견하고 이를 통해 화성(華城)이 건설된다.

1799년에는 우리나라 최초로 안경을 쓴 사람이 나온다.

그렇듯이 서양문물이 마구 들어온 것이다.

최초로 공식적으로 정조가 책을 읽는데 안경을 쓴 것이 《정조실록》에 나온다.

그것이 이제는 궁궐에 들어와 감히 임금의 옥안에 안경을 킬 정도가 되었으니

당시 얼마나 충격적이고 개혁적이었는가?

그리고 정조가 급서하고 1800년 순조가 즉위하였고 1806년 단원 김홍도가 죽은 것으로 보인다.

 

나는 개인적으로 단원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나는 1980년 광주항쟁 이후 이른바 ‘민중미술’로 문화운동을 하면서

이러한 활동이 과연 우리 식의 미술과 한국적 양식을 한국의 민중적 양식을 어떻게 만드느냐가

가장 큰 고민이었다. 한국의 양식, 한국의 민중적 양식은 예술에서 매우 중요하다.

왜냐면 우리 한반도의 삶을 고호나 고야처럼 했다면 정말 곤란하지 않겠는가?

 

서구식으로는 한국의 삶과 생활을 그릴 수 없다.

소설가 황석영 또한 노벨문학상 등을 놓고 여러 가지 양식 실험을 하고 있다.

『오래된 정원』과 『손님』 등에서 황석영은 그 실험을 계속하고 있다.

예컨대 소설 『심청』의 경우,  조선에서 중국, 대만을 거쳐 오끼나와와 오사까를 경유해

다시 인천으로 설정하여 ‘동아시아’를 뺑 돌고 있는데

그러면 그 양식이 되는가 하는 물음이 여전히 남는다.

 

예술에서 양식은 대단히 비밀스럽다.

1980년대 민중 예술가들이 과연 한국 양식이 무엇인가를 고민할 때,

나는 조선 500년 서민의 미적 보편성을 찾아야 했는데

그것이 고려의 불화, 고구려 벽화, 조선 시대 참으로 모던한 미술이었던 민화(民畵)

 ― 그 민화는 지금 세계 어느 미술시장에 내놔도 가장 경쟁력 있고 모던하다 ―

그리고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이다.

이런 것을 섭렵하면서 소위 1980년대 민중예술의 양식화를 꾀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고 1987년 정치적 민주화가 이루어지고,

내가 다시 그림을 공부하면서 예술가적 직관으로 단원 김홍도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오늘 이 자리는 1987년에 그 양식화의 꿈 속에서

동물적인 예술적 직관으로 단원을 살피고자 했던 내용이다.

다시 안산으로 돌아와 안산은 어업과 염업(鹽業)을 중심으로 특히 소금업이 활발했던 곳이다.

그때는 지금 같은 천일염이 아니다. 천일염은 일제 근대화의 산물이다. 그때는 자염, 화염이었다.

그때는 바닷물을 직접 거대한 무쇠솥에 붓고 밑에서 엄청나게 불을 때서 증발시켜 만들었다.

그래서 도깨비가 인간이 하는 모든 일을 흉내 낼 수 있지만

감히 소금 만드는 일을 도저히 따라 할 수 없다는 옛말이 있을 정도였다.

 

소금 한 가마를 내기 위해서는 땔감으로 엄청난 나무가 필요했고

소금은 모든 음식 맛을 낼 수 최고의 물품으로 상당히 비싸고 나라해서 전매한 품목이었다.

아무리 나라에서 전매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관리들과 커넥션에 의해 소금을 빼가는 경우가 많았고

그 빼가는 양에 따라 소위 자본축척이 이루어진다.

또한 염업은 그 인근의 산악지대를 초토화시켰는데 그래서 염업은 바닷가뿐만 아니라

나무를 조달하기 좋은 섬 지방에서 활발했다.

당시 육지는 그린벨트 개념이 있어서 벌목을 할 수 없는 제약이 많았던 데 비해

섬 지역은 남벌 등이 이루어졌다.

당시 대부도, 형도, 덕적도, 광덕산, 수리산 인근의 산과 섬들은 벌거숭이였다.

 

그 염업이 수도권에서 가장 발달한 곳이 시흥, 안산이었다.

그리고 담배 농사 또한 화성 남양만 일대에 많아서 아주 질 좋은 담배산업이 발달하였다.

앞서 이곳에 해군사령부가 있어서 경강과 수도권 해역을 지키고 있었으며

중국과 남도 땅으로 가고 들어오는 무역선과 배들이 정박한 무역항과 어항이었다.

그렇듯이 이 안산 지역은 역마와 역사가 발달했고

군사기지로서 관기와 찰방, 객사들이 즐비한 지역이었다.

 

이 곳 해군사령부 퇴역군인 중 무사 한 명이 있었는데 그 부인인 ‘명우지’가 있어

둘 다 중인으로 당시 유명한 검객들은 거의 다 중인계급들이었다.

특히 ‘명우지’는 한양에서 소문난 바느질쟁이였다.

명우지는 밝은 ‘明’자, 비 ‘雨’자, 손 ‘脂’자로

여기에 기녀와 기생이 많아 늘 패션너블하여 이렇듯 뛰어난 침쟁이의 활동이 가능했을 것이다.

앞서 수적 얘기를 했는데 수적들이 세곡선을 털어 이곳에서 팔아먹지 못하니까,

당시 오끼나와 등 해외 도서 등을 거점으로 거래를 했다.

 

우리나라 3대 도적이라 하는 임꺽정, 홍길동, 장길산 등을 성호 이익 선생도 언급했는데

홍길동이 오끼나와 율도로 들어가는 것으로 나오는데,

이것은 홍길동이 이미 율도와 인연이 있어서 간 것으로 봐야 한다.

그 장물들과 획득물을 유통하러 오끼나와까지 들어간 것이다.

수적들은 사실상 바다를 장악하고 있었으며

큰 무역상끼리는 서로 연결되어서 움직인 것으로 봐야 한다.

대부분 수적들의 형성은 이인좌 난이나 큰 민란이 평정되면 도망가서 수적이 된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규모가 큰 수적들 간에서는 서로 안면이 있어 소통과 교류를 하고 있었다.

 

행세께나 했던 대감이나 남쪽으로 내려온 지방의 현감들은 임금이 불러주기를 기다리며

북쪽(임금)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면서 늘 중앙권력의 실세(實勢)로 들어갈 꿈을 꾼다.

그리고 엄청난 민중 수탈을 해서 이를 임금이나 정권 실세에 받쳐 판서를 얻고 관직을 얻는다.

지방의 현감이나 목사들의 1년 농사는 민중들을 수탈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창고를 터는 수적들이 많았다. 수령들이 ‘1년 농사’를 해서 배를 태워서 경강으로 마포로 보내는데 이를 바다 한가운데서 터는 것이다.

 

이 곳 초지진에는 조선 최대의 무사들과 퇴역군인들이 많았고 인근 수적들을 서로 잘 알기 때문에

이들이 와서 도움을 청하면 해결사 노릇을 하기도 했다.

그래서 수적과 정당히 협상을 하여 물건을 다시 내 놓기고 하고 타협을 해주기도 한다.

나라에서 토포령이 떨어지지 않는 한, 수적들과 전면전이 일어나지 않는다.

서로를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서로 먹고 사는 방편이었던 것이다.

대부분 민란 주모자들의 경호무사로 있었던 사람들이 관군에 의해 평정될 때

도망가거나 수적이 된다.

 

그런데 이 하급무사가 이인좌 난으로 검거된 수적과 역모를 했다 쫓기다가

광덕산 아래에서 죽게 되었다. 이미 부인은 만삭이 되어 퇴기의 집으로 가서 몸을 피하고 있다가

아기를 낳고 결국 죽었는데 그 아이가 단원 김홍도이다.

 

단원 김홍도는 관기 집에서 기녀들 손에 의해 자랐으며

안산 주변 장시(場市)들을 돌아다니며 장돌뱅이로 컸다.

기생 밑에서 커서 춤도 잘 추고, 젓대와 비파도 잘 부었다.

당시 기생은 조선 최고의 예인 집단이었다.

조선 문학을 보면 황진이, 명월 등의 예에서 보듯이 대부분 기생문화였다.

 

전적에 따르면, 김홍도는 아주 기골이 장대했고 아버지가 무사 집안이었던 것으로 나와 있다.

그렇게 장돌뱅이로 돌아다니는 김홍도를 시장바닥에서 표암 강세황 선생이 유심히 보았다.

 

여기서 표암 강세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표암은 명문사대부 출신이다.

부친이 64세 때 강세황을 낳았는데 기질이 밝고 아주 해악적인 인물로 유명하다.

옛날 한양에서는 안산에 가면 일동에 성호가 있고

부곡동에는 표암 강세황이 있다고 할 정도로 알려져 있었으며

강세황은 조선 시대 예원의 총수였다.

어쩌다 안산이 고향이어서 지금 평가를 제대로 받지 못한 것 같아 참으로 안타깝다.

강세황은 당시 중국에서 유행하는 남종산수화 (南宗山水畵)를 가져와서

이를 한국적 산수화로 정리한다. 그에 의해 비로소 한국적 그림이 만들어진 것이다.

중국것을 그냥 베낀 것이 아니라 ‘진경산수화’를 유행시킨 인물이다.

진경실경 산수화를 전반적으로 유행시켰을 뿐만 아니라

최초로 풍속화와 인물화를 널리 전파하였고

서양화법에 따른 입체감과 원근법을 적극적으로 주장한 인물이었다.

 

원래는 서울 장충동에 태어났으며 조부가 예조판서, 아버지는 대제학까지 지낸 명문세족인데

친형과 장인이 이인좌에 난에 연유되면서 벼슬길이 막히고

밥 먹을 것을 걱정할 처지가 되어 32살에 처가인 안산으로 이주했다.

옛날에는 처가살이가 당연시되었다. 화법과 서법을 철저히 독학으로 하였고,

그림을 감상하는 방법 또한 독특해서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평론가이기도 했다.

그 이후 추사 김정희가 있지만

그는 중국 그림을 흉내 내는 ‘새끼 중국인’으로서 지금 식으로 말하면 오렌지족이었다.

 

강세황이 61살이라는 노령에 영조의 부름을 받고 출사했다.

66세에는 동지사로 북경에 가게 되는데 그 글과 그림이 뛰어나서

당시 청나라의 유명한 문예가들에게 칭송이 자자했으며,

예술담론 또한 뛰어나서 그들과의 논쟁에서 지지 않아

중국화단을 1년2개월 만에 싹쓸이하고 홀연히 돌아온다.

  

강세황, <자화상>, 1782년, 비단에 채색, 88.7×51cm, 개인 소장, 보물 590호

 

표암 강세황의 그림은 중국의 남종문인화를 한국적으로 정리한 그림이다.

강세황 선생이 그림을 그릴 때가 32살에 안산에 내려와서 처가살이하면서 바닷가에 돌아다니면서 주로 그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서양화법 등 당시로는 파격적인 그림이었고, 당시 자기 얼굴을 그린  최초의 초상화를 그렸다.

자화상을 보면 매우 해학적인 아주 낙관적인 밝은 면모를 보이고 있다.

 

래서 강세황이 안산에서 바닷가들을 소회하면서 그림도 그리고 자주 장터를 구경나가게 되는데 그곳에서 재주가 있어 보이는 단원 김홍도를 만나게 된다.

그 때가 단원의 나이 7살 때의 일이다.

 

그 이후로 강세황 집으로 단원이 들어가면서 새 인생이 시작되는데 단원의 정신적·물질적 최고 후원자는 표암 강세황, 앞의 예인군주 정조대왕, 한양 최고 갑부인 안산의 소금장수 김완태였다.

 

단원은 얼굴이 잘 생겨서 시쳇말로 ‘얼짱’이었다.

풍체 또한 마치 신선과 같고 키가 훤칠하고 술도 잘 먹고 해학에 능했다.

그래서 단원 호중에 간혹 술 취한다는 ‘(醉)’자로 ‘취화사’라는 호가 있다.

 

표암이 전적에 그 제자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대목을 보자.

“찰방 김홍도는 자가 사능이다. 어릴 적에 내 집에서 컸다.

눈매가 맑고 용모가 뛰어나 익힌 음식을 먹는 세속 사람 같지 않고 신선과 같다.”

스승이 제자를 이런 정도로 칭송한 것을 보니 참 대단한 사람이다.

 

“단원은 음률에 밝았고 거문고 젓대며 시와 문장 등 그 묘(妙)를 다하였으며,

풍류가 호탕했으며 (중략) 매번하였으나 단원의 마음을 스스로 아는 이만 안다.

단원이 사는 거처는 책상이 바르고 정돈되어 있었으며

집안에 있으면서도 곧 세속을 벗어난 듯하다.

세상의 용렬하고 옹졸한 이들은 사능이 어떤지 알지 못 하더라.”

 

단원이 청나라의 동지사행에 갈 때 실록을 보면 단원이 군관 직함으로 참여한다.

왜 도화서 화가 직함이 아니고 군관 직함으로 갔느냐 하는 점이 좀 의아하다.

하나는 말 그대로 단원이 기골이 장대하여 검객 자격으로

당시 세상의 중심인 연경을 보고 싶었을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화가는 못 들어오게 하니 군관 직함으로 따라나섰다는 견해가 있다.

단원은 아마도 검술과 무술에 뛰어났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박제가, 이덕무가 지은 동양 최대의 무보지,

즉 『무예도보통지』의 무보(武步) 그림을 단원이 그렸다.

이미 단원이 무술을 알고 이에 뛰어났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싶다.

무보지 삽화는 그림도 알고 무술도 알았던 단원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단원이 군관 직함으로 갈 수가 있었다.

 

두 번째는 요즘 말로 최초의 간첩들이 화가들이었다는 점을 이유로 꼽을 수 있다.

고려 충렬왕 때 화가를 중국에 보내 중국 지도를 그려오게 했는데 간첩죄로 걸렸다는 기록이 있다.

외국에 갈 때 화가들이 몰래 따라가 그 나라의 지도과 그림을 그려온다.

우리는 전략적으로 중국 지도와 그림 등이 필요했고,

중국에서는 그런 화가들을 못 들어오게 했던 것이다.

그래서 도화서 화가 중 김홍도가 선정될 수 있었으리라.

 

드디어 표암이 60세 넘어 출사하면서 단원을 도화서로 천거하고

21세 때 도화서 최고의 화가가 된다.

약관 21세에 한양의 예원을 정리해버린 작품이 바로 8폭짜리 병풍으로 그린 <신선도>이다.

기독교의 이데올로기화는 예수 궤적을 그리는 성화(聖畵)이다.

앞서 얘기한 남종문인화는 군신(君臣) 운운하는 유교를 이데올로기화한 일종의 종교화이다.

 

남종화가 ‘유교의  종교화’라는 것을 말하자면 아마도 한 학기 강의 내용이 될 것이다.

그렇듯 남종화는 유교가 이상향이라고 보는 내용을 그린 종교화인 셈이다.

이 <신선도>는 도교적 이상화이다. 이 <신선도> 필체를 보면 대단하다.

풍속화 등에 보이지 않는 대단한 것으로 이 팔폭 <신선도>를 가지고

이미 21살에 거의 조선 한양 화단을 평정해버렸다.

당시는 유교 정통사관과 왕이 지배하던 시대였는데

이 도교풍의 <신선도>가 유교적 이데올로기 시대였던 조선 시대를 바로 부정한 것이다.

그것도 작게 그린 것이 아니고 팔폭 병풍을 그렸다.

감히 21살에 이런 야심만만한 필체를 썼다는 것뿐만 아니라

이런 필치로 유교의 반대편에 있는 도교의 이상주의적 신성화를 그렸다는 점이

당시로서는 센세이셔널했다.

 

단순히 그림을 잘 그렸다는 이유로 남종화를 그렸다면 누가 깜짝 놀랐겠는가?

그러나 이는 문화적 반향이다.

당시 최고 이데올로기인 사대부 이데올로기를 유교에 대해 직선적으로 공격한 것이다.

이를테면 1970년대 반공 이데올로기가 전사회적으로 유포된 박정희 시대 때

북한 주체미학의 보천보 전투를 그린 것과 똑같다. 이 그림의 시대적 의미를 봐야 한다.

필체와 그 그림이 함유하고 있는 엄청난 정신적 의미 때문에 그야말로 한양이 발칵 뒤집힌 것이다.

 

풍속화 하면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을 드는데, 여기에 오원 장승업까지 하여

조선 시대 ‘삼원’ 운운하는데 그 중 오원은 한참 격이 떨어진다.

도화서 화원들은 대부분 아버지로부터 물려받는데 집안내림이었다.

그런데 단원 같은 경우는 특별한 경우였다.

 

단원은 족보에 그림 그리는 사람이 없다. 무인 집안이었다.

단원보다 13세 연하인 혜원은 아버지가 대단한 화가였다.

혜원 아버지가 영조 어진을 그릴 때 단원이 참여한다.

 

혜원과 단원 그림이 어떻게 다른가?

 

단원 풍속화는 농촌공동체인데 반해,

혜원 풍속화는 당시 한양 오렌지족들의 도시적 정서를 표현하고 있다.

혜원은 단원을 좋아했는데 그 좋아한 티를 안낸다.

예술가는 2등보다는 1등만 필요하다.

예술가들 사이에는 항상 긴장이 있고, 보이지 않는 위계(位階) 질서가 쫙 서 있다.

무엇보다도 예술 자체의 독특한 가치가 중요하다.

고흐 시대는 고흐처럼 그렸던 화가들이 200명이 넘었다.

어떤 그림은 고흐보다 더 잘 그렸다. 고흐가 유행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고흐만 남고, 나머지는 익명의 그림으로 역사 속에 다 사라져 버렸다.

혜원이 단원의 풍속화를 보고 굉장히 감동받았으나 혜원은 역시 고수(高手)였다.

 

그는 농촌 대신에 한양의 뒷골목과 도시적 정취에 파고들었다.

혜원과는 다르게 단원의 필치는 아주 부드럽고 정감 있는데 반해,

혜원의 필치는 선이 아주 모던하고 날카로워서 도시적 건달풍에 입각해 있다.

그러나 혜원이 단원을 따라간 부분도 있다.

단원이 우물가 내지는 개울가에서 남정네들이 아낙네들을 흠쳐보는 그림을

혜원이 도시적 풍경으로 그려냈던 것이다.

그리고 혜원의 풍속화 뒷배경의 나무와 산세는 단원의 풍경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혜원은 그만큼 단원 존경하고 경외했으면서도 단원과는 다른 세계를 펼친 것이다.

 

정조대왕의 어진을 단원이 세 번이나 그렸는데 역사적으로 하나도 남지 않았다.

정조가 단원을 현감으로 제수하는데 도화서 화원 중 가장 출세한 것은 현감이다.

겸재 정선이 현감이었고, 그 다음이 단원이었다.

단원은 48세에 연기 현감으로 제수 받는다.

21살에 도화서에 들어가서 궁중화가로서 유명세를 날리고

그 사이 어명으로 금강산을 네 번이나 갔다. 한 번 가는데 최소한 약 5-6개월이 걸렸다.

 

어명으로 수많은 궁중행사 그림을 그려야 했다.

창덕궁의 엄청나게 큰 벽화인 해군 성도를 그릴 사람은 단원밖에 없었다.

그는 어렸을 때 초지진 해군사령부를 봐 왔기에 가능한 일이었으나

이 역시 그림은 현재 남아 있지 않다.

그리고 좀 행세께나 했던 대감들과 권력께나 한 양반들은 단원에게 그림 부탁을 하면서

그려주지 않으면 엄청난 시기와 괴롭힘을 당했을 것이다.

허리가 휘어지도록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연기현감으로 내려가서 쉬엄쉬엄 놀면서 못했던 악기도 다루어가며 여유를 가졌을 법하다.

42세에 내려갔는데 그 나이 때는 인생에서 두 번째로 자신을 자각할 나이였다.

또 화가로서 유명세와 그 어지러운 궁궐생활을 늘 봐왔기에

이제 인생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할 즈음이다.  

그래서 연기현감으로 내려갔을 때 말에서 내려 연기 현청이 보이자마자

속적삼을 쫙 찢어 오른손을 둘둘 감고 내가 낙상하여 오른손을 다쳤노라고 말했다.

조선 최대 화가가 내려왔으니 그 곳에서도 그림 부탁이 오죽했겠는가?

그때마다 손을 다쳐서‘나는 그림을 못 그리네’라고 핑계를 댔을 것이다.

 

나도 예술가로서 그 심정을 십분 이해한다.

나는 아침마다 7시에 딱 일어나서 정확히 8시에 작업실에 들어가는데

어떨 땐 그야말로 작업실에 들어가기가 끔찍할 때도 많다.

내 어찌 이 지옥을 들어가야 하는가 푸념하면서 언제 그림 그리는 데에서 해방되나 하면서

그 작업실에 못 들어가고 문 앞에 쭈그리고 앉아 연신 담배만 피곤 한다.

그런 경험을 가져보니까 단원 김홍도가 왜 손을 광목으로 감쌌는가를 알겠다.

 

어떤 미술사학자들은 단원이 다쳤다고 하는데,

그때 다쳤다면 그 뒤에 그림풍이 달라져야 하는데 오히려 더 좋아진다.

그렇지 않고서야 무인의 집안으로 군관직함으로 동지사까지 갔던 검객이 어떻게 낙상을 했겠는가?

 

그 조용한 시골 땅에서 내려와 궁궐의 지긋지긋한 암투를 벗어나

그런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 김홍도가 내가 누구인가 내 인생이 무엇인가를 묻게 된다.

즉 자기 성찰의 기간인 것이다. 그때 나온 그림이 바로 ‘풍속화’이다.

 

풍속화는 그냥 그린 것이 아니다. 그냥 민중의 삶을 그리자고 작심해서 나온 것이 아니다.

세간에 풍속화가 단원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 무렵에 나온 풍속화는 고작 24점이 단원 풍속화의 전부이다.

나머지는 김홍도 작품으로 그림들이지, 화가 자신이 직접 낙관을 찍고 확인한 것은 24점뿐이다.

그 크기도 일반 노트를 펴놓은 정도 크기의 화첩이다.

 

이런 단원의 풍속화에 대한 맥락을 대부분 미술사학자들은 이해를 하지 못한다.

심지어 강연을 통해 단원의 바다 그림 하나 가지고 단원이 안산 사람이라고 하면서

안산시는 아파트나 청소차에서 단원 풍속화를 발라놨는데,

단원이 안산 사람이라는 전적이 어디에도 없다고 힐난하고 있다.

아니, 왜, 어디에도 나타나 있지 않는가? 이미 표암이 단원을 수제자로 두었다고 밝히고 있다.

 

전적이 안 나와 있다 하더라도 그림을 보면 단원이 안산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반드시 텍스트나 기록이 나와야 하는가?

모든 사람의 역사가 전적과 기록으로만 남아야 한다면 그 엄청난 양을 어떻게 감당하겠는가?

역사는 생략의 과학이다. 그 생략된 부분을 어떻게 변증법적 상상력으로 연결하는 것이 중요하다.

과학은 어떻게 변증법적으로 이해하느냐 하는 것인데

우리 창작의 문제는 거의 이러한 상상력의 측면에서 한계를 갖는다는 문제가 있다.

이것은 나의 경험이기도 하고

또 아이를 예술가로 키우고자 하는 사람들이 한번 생각해봐야 할 문제이다.

누구든지 예술가들은 10살 이전의 모든 기억으로 돌아간다.

실제 나이를 들어 생각해보니 맞는 것 같다.

그 이후에 읽었던 책과, 성인이 되어 돌아봤던 세계 여러 박물관, 러시아, 몽골, 아프리카, 리비아, 이라크까지 세계 곳곳을 다 뒤져 봤는데,

사실 이렇게 나이 들어서 둘러본 것들은 거의 중요하게 남지 않는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진짜 무엇을 봤는지도 모르겠다. 억지로 생각해도 안 난다.

그것들이 내 예술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나는 결코 영향을 못 미쳤다고 본다.

오히려 어렸을 때 보고 살았던 목표 신안바다의 하의도 섬, 내가 중학교까지 나왔던 그 산천, 서당,

그 곳의 씸깃굿…… 이런 모든 것들이 내 예술의 뼈대를 이룬다.

 

나만 그런 줄 아시는가? 톨스토이의 어린 시절을 보라.

대부호의 아들로 태어난 톨스토이는 어릴 때 대저택의 정원에서 노란공을 갖고 놀다

그것을 잃어버렸다. 그후 나이가 들어 전쟁터로 나가고 산전수전을 다 겪은 후 60세 이후 늙어서

문득 정원을 거닐다가 그 노란공을 발견한다.

그래서 톨스토이는 이미 인생이란 “어렸을 때 잃어버렸던 노란 공을 60세 때 다시 찾는 것이다”

라고 말했다.

 

당대 최고의 화가인 김환기 선생이 나처럼 목포가 고향인데

1978년도 프랑스 파리에서 전시한 <달과 항아리> 등의 작품에서 청색이 기가 막힌다.

푸른색 톤이 각광을 받았는데 프랑스 기자가 인터뷰를 하며 그 푸른색이 어디서 나왔느냐 하니까

“어렸을 때 내 고향 목포 앞바다에서 봤노라”고 했다.

 

단원 김홍도 또한 자기 성찰을 하면서 되돌아간 곳이

바로 어렸을 때 안산에서 떠돌고 봐왔던 그 자리였다.

그래서 그린 그림이 바로 단원의 유명한 풍속화였다.

그래서 풍속화는 안산이라고 써 있지 않지만 단원 후배인 화가 홍성담의 경험에서 보건대

풍속화에 나온 사람 산천은 바로 안산이고, 여기 이 땅의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된다.

그것은 단원과 똑같이 고민한 화가만이 알 수 있다.

 

단원 그림을 직접 볼까요? 단원의 그림은 맑고 시작과 끝이 분명하다.

다른 산수화와 비교해보면, 시작과 끝이 정확하고 헛것이 개입해 있지 않다.

어영부영 흐릿하지 않다.

단원 김홍도의 마음을 참 잘 표현한 겨울 달밤 그림이다.

 

이제 풍속화를 보면, 이 작품은 기와를 올릴 때 끈으로 끌어올리고 있다.

그 동작이 참으로 실감난다. 김홍도 풍속화는 항상 두 개의 시선이 있다.

자기들이 부딪치는 시선과 함께 그것을 보는 제3의 시선이 있어 이렇게 부드러운 선으로 그렸어도

긴장감을 주고 전체적으로 팽팽하다.

이런 것들은 절대 나이 들어 분석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데,

경험컨대 바로 어렸을 때 봐왔던 정경을 그린 것들이다.

 

주막집 풍경 역시

두 개의 시선이 있고 자기가 그 경험을 하지 않으면 이런 아이의 시선을 넣을 수 없다.

바로 여기에 있는 아이가 김홍도 자신일 수 있는데 이는 그림 그리는 사람만이 안다.

 

가마니를 짜고 있는 가족이 있고, 한 아이가 공부를 하고 있다. 아이 태도가 참으로 재미있다.

 

혜원이 베낀 것으로 보이는 <단오>라는 그림이다.

숨어서 보고 있는 사람과 목욕하고 있는 아낙네들. 그 선과 필치가 정확하다.

 

대장간 풍경, 새참 먹고 있는 사람들 참으로 정확하다. 어김없이 제3의 시선이 있다.

이 모든 것을 볼 때, 단원 어렸을 적의 기억이 분명하다.

흔히 아동미술에 나타나는 발달심리 등과 관련된 내용들이다.

 

여기에 가장 사실적인 그림이 있다. 옛날에는 소가 매우 귀했다.

동네 모든 논을 갈아주어야 하는데 그 멍에가 달아 혹이 날 정도로 혹독했다.

소가 가장 힘든데 이 그림에서 소가 가장 힘들게 나와 있다.

소를 정면에 배치하고 올라가는 구도로 그린 것은 아동미술적인 기법으로

어른들 세계 속에서 나타나지 않는다.

그래서 풍속화는 바로 단원의 어렸을 적 안산의 기억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 유명한 서당 그림도 서당 경험을 해보지 않으면 절대 그려볼 수 없는 그림이다.

상상으로는 가능하지 않다. 서당 아이들의 모습이 아주 실감나게 나와 있다.

김홍도, <무동舞童>, 《단원풍속첩》 중, 종이에 수묵담채, 27×22.7cm, 국립박물관 소장, 보물527호

 

<무동>이라는 그림이 있다.

그 당시 왜 이런 사당패와 광대패가 안산에 많았겠는가?

아까 소금장수 얘기도 했는데 안산의 소금을 팔아 한양 최대 갑부가 된 김완태 얘기를 했다.

그가 단원의 최대 후원자이기도 했다.

 

 영·정조 시대가 태평성대라고 하지만 사실 엄청난 기근이 들어 많아 한번 들면 3-4년 이상 갔다.

다산 정약용, 강세황, 이익, 단원 김홍도가 동시대인이었다.

그리고 그분들이 살았던 이 땅에 사는 우리들은 행복하다.

 

하지만 다산이나 이익 선생의 글을 보면 당시 3-4년 기근으로 먹을 것이 없어 도저히 살 수 없었고 물이 없으니 전염병이 들어 그 마을 사람들이 못 나오도록 봉쇄하였고 그 곳에서 탈출한 사람들이 유민(流民)을 형성하고 그 중의 일부는 도적이 되었다.

 

다산 글을 읽어보면 “내가 5박6일 걸어 마을을 30여 군데를 지나갔지만 사람 사는 데가 없더라”

하고 기록하고 있다. 보통 역병이 돌면 보통 100만 명씩 죽어갔다.

특히 도고상인 같은 독점상인들이 발생하는데 이것이 소위 영·정조 시대 자본주의 맹아인데

도고상인들이 양주, 송파, 해주, 안산 이런 곳에서 삼남(三南)에서 올라온 주요 물품들

즉 소금, 명태, 조기와 제삿상의 주요 품목들인 밤, 대추들을 매점매석해 버린 것이다.

 

유교 전통사회에서 조상제사를 못 올리면 난리가 난다.

그 제사 품목들이 씨가 말라 유기전에 들어오지 않고 가격이 오를 때까지 매점이 된 것이다.

당시 안기부인 비변사가 영조에게 상소를 수차례 올린다.

도고상인들이 삼남에서 올라온 물품을 매점매석하여 종로 유기전에 물품이 안 나오니

한양에서 제사를 지낼 수 없다는 것이다.

 

당시 장은 나라에서 지정해 5일, 7일, 4일장을 지정했는데

자기들 마음대로 사고파는 난장(亂場)은 법으로 엄금했는데

이 도고상인들이 상권을 틀어지고 난장을 튼다 하였다.

난장을 위해서 사람을 모이게 하기 위해 풍각쟁이가 나오는데

그네들이 탈패자 바로 연예인들이었다.

그래서 양주읍에는 탈패와 사당패가 모두 80패가 난장을 튼다.

그러면 제비, 출연자들, 기획자인 모각쟁이까지 포함해서 한 패에 10명이라 할 때

80패면 연예인이 800명이 모여 그야말로 드글드글했으니

주변에 엄청난 사람들이 모여 있다고 볼 수 있다.

 

해주장에 약 60패, 송파장에 약 80패, 안산장에 약 40패.

비변사 상소는 이런 도고상인이 물품을 독점하고 자기 마음대로 난장을 트니

법으로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광대패와 무뢰배들이 담합해서 장을 쥐락피락하니 엄히 다스려야 한다고 상소했다.

 

<무동>은 바로 그것이다. 어릿광대가 아니고 탈패가 아니고 사당패였을 것이다.

그 뒷자리에는 모각쟁이들과 사당 패거리들이 있었을 것이다.

 

이 산수 그림은 바로 안산의 실경(實景)일 것이다.

활 매는 광경도 이곳이 해군사령부가 있어 늘 주변 풍광으로 볼 수 있다.

 

그 유명한 목살 그림을 보자.

옛날에는 그물이 없어서 이렇게 목책이나 돌들로 괘서

물이 들러왔다가 나가면 고기를 걷어냈을 것이다.

이 역시 안산 어장의 실경일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편자를 박는 말을 한번 주의 깊게 보면 사진을 찍어도 이렇게 절묘하게 표현하게 어려울 것이다.

 

김홍도, <군선도群仙圖>(부분), 1776년, 종이에 수묵담채,

132.8×575.8cm, 호암미술관 소장, 국보139호

 

풍속화의 마지막 그림은 바로 <군선도>이다. 더 자세히 보면 각기 다른 신선들이다.

그 이름들이 다 있다. 단원이 40세를 전후에서 마지막 이 <군선도>를 가지고

풍속화 마지막 화첩을 쫘 벌려서 이 신선도를 그렸다.

이 신선도의 크기는 크지 않고 노트 펼쳐놓은 사이즈 정도였다.

40세를 전후로 연기 현감으로 간 김홍도가 손이 다쳐 그림을 못 그린다는 김홍도가

그 한적한 시골에서 자기 정체성을 찾았던 것이다.

내 인생의 의미를 찾아 끊임없이 어릴 적의 기억으로 침잠해 내려갔다.

그 40세 전후로 그렸던 그림이 풍속화이다.

 

그런데 그 풍속화 맨 마지막 가서 왜 저 <신선도>로 마감을 했느냐가 중요한 열쇠이다.

여기에 김홍도의 철학이 있다.

김홍도는 끝가지 유교 전통주의에 대항하고 자기를 키워 주었던 출사전의 안산,

그 곳에서 걸어다녔고 살았고 만났던 안산의 모든 산과 땅과 바다와 개천과 강과 사람들을 모습을

24폭 조그만 화첩의 풍속화로 그려내고, 드디어 맨 마지막에 이 <신선도>를 그렸다.

 

단원에게 있어서 <신선도>는 어떤 의미를 갖는가?

약관 20살에 한양 예원을 싹쓸이했던 자기를 조선 최고의 화가로 만들었던 <신선도>요,

두 번째는 유교 전통주의에 대한 저항이었다.

결국 자기가 어렸을 적에 만나왔던 모든 이들이 바로 신선이라는 것이다.

바로 이 풍속화 속에 등장하는 모든 이들,

씨름을 구경하고 아이를 회초리를 때리고 길쌈하고 쟁기질하는 사람들 즉 일하는 사람들과 엿장수

할 것 없이 모두가 신선들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유교 전통주의 과감한 도전이고 반항이다.

 

만약 당시 이것이 그려진 것을 알았다면

그것은 박정희 때 인혁당 같은 국가보안법으로 다스려야 할 위반 사례였을 것이다.

정조의 수원 용주사의 후불탱화 또한 김홍도가 그렸다.

그 탱화는 유일하게 서양화법 기법에 의한 것으로

당시 중국에 천주교 성화를 보고 김홍도가 배웠을 것이고,

김홍도가 그 기독교적 성화 양색을 받아들였다는 것은 대단히 모던한 의미이다.

사도세자를 기리는 용주사에 바로 그 성화를 그렸다는 것은,

천주교 박해가 기세등등하던 그 시대에 그 서양화적 기법의 성화 불화를 그렸다는 것은,

정조와 단원의 예술적 혼을 느낄 수 있는 면모이다.

 

단원은 정조에게 가장 총애 받고 어명에 의해 가장 많은 그림을 그렸던 조선 최고의 궁중화가였다.

이를 발탁한 강세황,

한양 최고의 갑부 김완태의 든든한 후원을 받으며

평생을 살았어도 결국 자기 성찰을 통해 민중적 삶과 애정을 간직하였으며,

그리고 무엇보다 참으로 부드럽고 자상했던 김홍도 삶의 결실을 만들었던 것이 바로 풍속화이다.

 

그 풍속화의 배경이 바로 안산이라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하면서

이러한 견해는 어쩌면 그런 고민을 한 화가만이 감득(感得)할 수 있는 것이라는 점을 말씀 드린다.      

* 이 글은 2007년 8월10일 안산주민연대에서 한 홍 화백님의 강의녹취를 풀어 발췌한 내용입니다.

 

홍성담 / 화가. 1955년에 태어나 조선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했다.

1980년 광주 민주화운동 선전요원으로 활동하였다.

1980년 11월 첫 개인전 이후 국내외에서 수차례의 개인전을 열었으며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2007년 11월에는 일본 도쿄의 마키캘러리에서 <야스쿠니의 미망>전을 열었다.

 

경기문화재단

 

 

 

 

‘단원아집(檀園雅集)’과 ‘섬사편(剡社編)’

 

 

'취하지 않으면 미칠 수 없고/ 미칠 때에는 시를 지을 수밖에

시가 이뤄지면 초서로 쓰니/ 서법 또한 기이하다네

스스로 감상하고 스스로 대견해할 뿐/ 남이 알아주길 바라지 않는다네

이 말도 그냥 장난삼아 하는 말일 뿐/ 어찌 시구를 다듬겠는가?’

 

 

이 시는 조선 후기 시서화 삼절로 일컬어지는 표암 강세황이

충청도 예산의 탁천장에서 이루어진 시모임에서 지은 것으로 ‘섬사편(剡社編)’에 실려 있다.

술에 취해 시를 짓고 마음껏 초서로 흘려 쓰는 시모임의 광경이 눈에 선하다.

‘섬사편(剡社編)’의 시모임은
안산의 여주이씨 문인들이

예산의 탁천장에 머물던 이광휴 · 이철환 부자를 방문하면서 이루어졌다.

이 시집의 편찬자이기도 한 이철환은

여주이씨 근거지의 하나인 예산으로 아버지 이광휴를 모시고 낙향했다.

이광휴 부자를 비롯하여 이 모임에 참여한 여주이씨 인사들은

성호 이익에게 배운 집안 후손들이었으며, 강세황 역시 안산에 살면서 성호 문하를 드나들었다.

 

당쟁에서 패배한 후 중앙정치세력에서 소외된 채 안산에 살던 이들에게

시를 통한 교유와 유대강화는 현실을 잊을 수 있는 방편이었다.

안산과 예산을 오가며 청유(淸遊)하였던 것도

결국 현실을 일탈하고자 했던 이들의 선택이었던 셈이다.

1754, 1755년 두차례에 걸쳐 이루어진 시회(詩會)의 기록인 이 ‘섬사편(剡社編)’에는

위의 시를 비롯하여 모두 66수가 실려 있다.

이 시들에는 친족간의 정의와 함께 자유분방한 시모임의 분위기가 여실히 드러난다.

또한 편찬자인 이철환은 표지에 자신의 거처인 탁천장의 모습을 도장으로 새겨 찍고,

시뿐만 아니라 그림 두 폭을 수록하는 등 예술가적 기질을 드러냈다.

그 중 포구에서 시모임을 갖는 그림과 관련이 있는 또 한권의 시집이 최근 발견되어

흥미를 끌고 있다. 붉은 노을이 깔린 바닷가 소나무 숲에서 네 사람이 노니는 그림 옆에

시가 한편 씌어 있는데, 이 시모임이 ‘단원아집(檀園雅集)’의 시회로 추정된다.

‘단원아집(檀園雅集)’은

안산의 성고(聲皐)에서 여주이씨 사대부들과 강세황 등이 시회를 열고

그때 지은 시들을 엮은 것이다. 여기에는 모두 12명이 지은 29수의 시가 실려 있는데,

‘단원아집’을 편찬한 이재덕을 비롯한 이광환, 강세황, 이철환 등 7명은

‘섬사편’의 시회에 참여했던 인물들이다.

두 시모임에 참여한 인사들의 면면을 보건대

‘단원아집’은 대략 ‘섬사편’보다 한두 해 앞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 시집의 시들은 그들이 좋아하는 시구를 따고

각각의 글자를 운(韻)으로 삼아 시를 창작하는 방식을 썼다.

 

예를 들어 소동파의 ‘십팔대아라한송(十八大阿羅漢頌)’의

‘空山無人 水流花開(빈 산에 사람은 없어도 물은 흐르고 꽃은 피네)’라는 구절을 따고,

각각의 글자를 운자로 삼아 한시를 지었다.

 

이와 같은 분운(分韻)은 사대부들이 시모임에서 즐겨 쓰던 것으로

참여자들의 능력이 공통적으로 필요한 방식이었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학문과 벼슬을 근간으로 하였다.

학문에 전념하면 사(士)가 되고, 벼슬길에 나아가면 대부(大夫)가 된다.

그렇다고 사대부들의 삶이 학문과 벼슬을 오로지하는 무미건조한 모습만은 아니었다.

 

누구보다도 주위경물에 관심이 많았고 감성적이었던 사대부들은

틈틈이 자연을 완상하면서 시를 남겼다.

특히 어지러운 세태에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없었던 때는

뜻을 같이하는 인사들과 어울리며 시에 전념함으로써 답답한 마음을 풀기도 하였다.

 

- 박용만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장서각 전문위원

- 경향, [샘이깊은물]37. 2004년 08월02일


 

 

 

 

 

 

 

- 피아니스트 이루마 (Yiruma) - "Kiss The Ra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