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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초상화 - 조선시대 어진(御眞)에 대하여

Gijuzzang Dream 2008. 4. 28. 12:04

 

 

 

 

 조선시대 어진(御眞)에 대하여

 

 

 

- 조 선 미(성균관대교수)

 

어진(御眞)이란 왕의 초상화를 말하는데,

왕의 초상화는 어용(御容), 수용(晬容), 진용(眞容), 성용(聖容), 왕영(王影), 진(眞), 영자(影子), 영정(影幀), 왕상(王像), 어영(御影) 등 다양하게 일컬어져 왔다.

1713년(숙종 39) 숙종어진을 그릴 당시 어용도사도감도제조(御容圖寫都監都提調)였던

이이명(李頤命)의 건의에 따라

‘어진(御眞)’이라는 명칭이 가장 적합하다는 결정을 내렸다.

 

당시의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영자(影子)'는 왕이 지칭하는 것이므로 신하로서는 감히 칭할 수 없고,

'영정(影幀)'은 그 뜻이 회화를 열어 펼친다는 뜻이니

족자(簇子)로 꾸며진 것이 아니면 칭할 수 없는 것이다.

'수용'이란 단순히 모습을 지칭하는 것이니 부를 바가 못 되며,

'어용(御容)' 역시 거칠고 투박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릇 전신(傳神)이란 '사진(寫眞)'으로 불려왔으며,

또한 왕의 초상화를 봉안하는 처소를 '진전(眞殿)'이라 하므로

왕의 화상 역시 '어진'이라 부르는 것이 타당하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이때부터 '어진'이라는 용어가 본격적으로 사용되었으나,

'어용' 역시 조선말기까지 빈번히 병용되어 왔다.

 

 

우리나라의 초상화는 ‘터럭 한 올이라도 틀리면 그 사람이 아니다’라는 생각에서

실제모습과 같게 그리려 노력하였으며

외모뿐만 아니라 ‘정신의 전달[傳神]’과 ‘마음의 닮음[寫心]’까지 요구하였다.

 

왕의 초상화를 일컫는 명칭을 어진으로 확정하게 된 것 역시

‘전신(傳神)’이 ‘실재를 그대로 그려낸다’는 ‘사진(寫眞)’으로 불려 왔고

왕의 초상화를 봉안하는 처소를 진전(眞殿)이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어진 제작은 도사(圖寫) · 추사(追寫) · 모사(模寫)의 3종류로 나누어진다.

도사(圖寫)는 국왕이 생존해 있을 때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리는 경우이며,

추사(追寫)는 왕의 생존 시에 그리지 못하고 돌아가신 후에 그리는 경우로

흡사하게 그리는 것이 가장 어렵다.

한편 모사(模寫)는 이미 그려진 어진이 훼손되었거나 새로운 진전에 봉안하게 될 경우에

기존에 그려진 어진을 본 떠 그리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1713년 이전에는 도사와 모사가 모사(摹寫)라는 용어로 구분 없이 함께 사용되었다.

 

어진은 단순한 초상화가 아니라 왕 자체로 생각되었으며 국가를 상징하는 의미도 가지고 있었으므로

어진의 제작을 위해서는 국왕 이하 여러 대신, 그림을 그리는 화원과 공장(工匠)에 이르기까지

많은 인원과 세심한 배려가 따랐다.


어진 제작을 체계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주로 도감(都監)이 설치되었지만,

왕실의 종친들이 주도하는 종부시(宗簿寺)가 관장하거나 몇몇 대신들 감독 하에서 행해지기도 하였다.

또한 ‘유화(儒畵)’라 하여 기술적인 부분까지 화원에게 조언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이 참여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화사 곁에서 지켜보고 있다가 미진한 부분이 발견되면 충고하는 역할을 하였다.


제작을 직접 담당하는 화원, 즉 어진화사(御眞畵師)들은

대개 도화서 화원 가운데 초상화 제작 실력이 뛰어난 사람들을 선정했지만,

마땅한 사람이 없을 때에는 민간의 화가 즉 외방화사(外方畵師) 가운데에서 선발하기도 하였다.

선발된 화원들은 집필화사(執筆畵師) 즉 주관화사(主管畵師)와

임금의 몸 중 주요하지 않은 부분을 그리는 동참화사(同參畵師),

그리고 물감 섞는 일을 돕는 수종화사(隨從畵師)로 나뉘어졌으며

대개 6명이었지만 13명에 이를 때도 있었다.

이밖에 첩장(帖匠: 장황인), 침선노(針線奴 : 바느질하는 노비), 부금장(付金匠 : 금박기술자) 등

많은 인원들이 어진제작에 동원되었다.

어진의 초본(草本)을 완성하면 비단 위에 먹으로 초본을 옮겨 그리고[상초上綃] 채색을 한다.

채색이 끝나면 뒷부분을 종이로 배접[後褙]하여 잘 말린 후

영정의 네 가장자리를 두르는 장황(四邊回粧)을 하고 뒷부분을 비단으로 배접한다.

옥축(玉軸), 홍사유소(紅紗流蘇 : 붉은 비단실을 묶어 만든 장식 끈),

봉안색환(奉安索環: 봉안용 고리) 등이 부착되고

마지막으로 표제(標題) 작업이 끝나면 어진 제작이 완성된다.

 

표제란 어진이 어느 왕의 것 이며, 언제 제작되었는지를 알려준다.

표제를 마친 어진은 좋은 때를 택하여 진전에 봉안하였다.

진전 내에서 어진은 그 왕이 등극하면 궤에 넣어 안치하고 승하하면 펴서 봉안하는 것이 통례였으나,

경복궁 선원전(璿源殿), 숭은전(崇恩殿), 의묘후전(懿廟後殿) 등은 궤에 넣어 봉안하였음을

조선왕조실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어진'은 단순한 예술작품으로서의 초상화가 아니라

왕 그 자체로 인식된 어진을 통해서 불멸의 존재인 조선의 왕을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어느 시기에 처음 '어진'이 제작되었는지는 확실히 말하기 어렵다.

삼국시대에 왕의 초상화가 그려졌을 가능성이 보이는 기록이 있지만,

(<唐書> 禮樂志 高麗伎條의 ‘畵國王形’ 및 <삼국유사>의 金首露王眞)

어진제작이 명백한 것은 통일신라시대에 들어와서이니,

<삼국사기> 궁예조에 보이는 ‘부석사 新羅王像’이나

<창암집>에 보이는 ‘원주신라경순왕영전중수기(原州新羅敬順王影殿重修記)’는

왕의 진영이 사찰에 벽화형식으로 그려졌음을 말해준다.

 

고려시대에는 어진제작이 영전제도의 발달과 더불어 진행되었으니,

즉 도성 내에는 경영전(景靈殿)을 두어 태조 및 역대 군왕의 진영을 5조씩 순환식으로 봉안하고,

도처(대개 개성부근)에 각 왕 및 후비의 원찰(願刹)을 두고 여기에 영전을 부설하여 지어

진영을 봉안케 하는 방식이 취해졌다.

 

그러나 고려시대의 어진은 현재 태조왕건의 소략본(근래 제작)이 전해오고 있으나

원화의 흔적을 찾기 어려우며, 또한 공민왕 및 노국공주 초상 복식사적 부면에서는

려말선초의 양식을 보여주지만, 사실 위주의 핍진성은 결여되어 있다.

고려의 31대 임금 공민왕(1330-1374)과 그의 부인인 노국공주를 종이바탕에 그린 이 그림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종묘(宗廟) 창건(1395, 태조 4) 당시

경내의 신당(神堂)에 봉안(奉安)했던 것인데

임진왜란(1592-1598)으로 불타버리자 광해군 때 건물을 복원하면서 이모(移模)한 것이라고 한다.

그림에는 공민왕과 왕비가 마주보듯 앉아 있으며,

공민왕은 복두(幞頭)를 쓰고 홍포단령(紅袍團領)에 홀을 들었다.

 

 

조선시대에 들면 태조로부터 순종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숫자의 어진이 제작되었다.

또한 조선 왕조는 국초부터 태조 진전(眞殿)을 무려 6곳에 세우고,

(한양의 문소전, 영흥의 준원전, 평양의 영숭전, 개성의 목청전, 경주의 집경전, 전주의 경기전)

 

선왕선후의 진영(眞影)은 선원전(璿源殿, 경복궁)에 봉안하는 등 진전체제의 윤곽을 잡아나갔다.

그러나 임진왜란 등으로 인해 진전에 모신 영정이 거의 산일되고 진전건물도 차버려 폐기되는 등

진전의 개폐가 심했으나 어진봉안지로서의 진전의 존재와 필요성 자체가 경시되지는 않았다.

따라서 국말까지 태조진전으로서는 준원전, 경기전,

그리고 열성어진 봉안처로서는 영희전(永禧殿), 선원전(창덕궁내) 등이 그 명맥을 이어갔으며

그 밖에 소규모의 어진봉안처소를 궁(宮)이나 각(閣)에 두었다.

 

그러나 이처럼 활발한 어진제작봉안에도 불구하고 현존 어진은 소수에 불과하여,

전주 경기전의 태조어진, 국립고궁박물관 소장의 영조어진(보물 932호),

6 25동란시 부산보관창고의 화재로 인해 일부분이 소실된

영조 연잉군 때(1714년, 보물 1491호)의 초상화 및 철종(1861년, 보물 1492호)과 익종어진,

그리고 고종어진 몇 폭과 순종어진초본이 전해올 뿐이다.

 

 

 

<현존 어진>

 

(1) 태조 어진

조선 태조(1335-1408)는 일국의 시조인 만큼 특별한 예우를 받아서, 상당한 수의 어진이 제작되었다.

신숙주가 찬술한 <영모록(永慕錄)>을 보면

당시 선원전이라는 경복궁 내의 열성어진(列聖御眞) 봉안처에서 받들던 태조어진이

무려 26축이었다하며, 그 중에는 마좌영(馬坐影, 말을 탄 모습의 어진)도 있었다한다.

그러나 현재 전해오는 어진은 전주 경기전의 태조어진 1본뿐인데,

이 어진도 고종 9년(1872) 당시 경기전에서 받들던 어진이 오래되어 낡고 해어짐에 따라

영희전(永禧殿)에서 받들던 태조어진을 범본으로 하여

화사 박기준, 조중묵, 백은배 등 8명으로 하여금

4월 2일부터 5월 4일까지 이모(移模)케 한 이모본(移模本)이다.

 

  

 

태조어진은 익선관을 쓴 청포차림으로서

정면관(正面觀)에 공수(拱手) 자세를 취하고 의자에 앉은 전신좌상이다.

 

전체적인 상용형식은 현재 대만 고궁박물원에 수장되어있는 明태조상과 흡사한데,

明태조상 쪽이 자세가 좀 더 자유롭고 손이 나와 있으며, 의자의 형태가 다르다.

 

 

그런데 이 태조어진은 비록 이모본이기는 하지만

조선초기의 초상화법을 대체로 반영하고 있으니

이를테면 곤룡포의 상당히 각진 윤곽선과 양쪽 트임새로 삐져 보이는 답호의 형태는

<장말손상>을 비롯한 조선초기의 공신도상에서 익히 살필 수 있었던 특색이다.

또한 아래에 깔린 채전(彩氈, 채색카페트)은 숙종조에 이르기까지 어진도사시 사용되었던 것인데,

채전의 화면 위의 높이가 상당히 올라가 있어서 양식상 고식(古式)을 보인다.

그러나 익선관은 앞으로 튀어나온 부분과의 경계에 발색효과가 보이며,

안면처리 역시 정면상임에도 불구하고 오목한 부위에 살짝 음영이 깔려있는 점 등은

이모 당시의 화법을 보여준다.

 

 

한편 옷주름 처리의 기조는 곧은 선으로서 고식을 보이지만,

역시 선염효과가 선 둘레에 조심스럽게 나타나있다.

하지만 이 태조어진은 전체적으로 볼 때 원본에의 충실함이 잘 드러난 작품이며,

어진은 임조시(臨朝時)의 위용(偉容)을 나타내기 위해 정면관이 제일 바람직하지만,

또한 사출하기가 가장 난해하다는 <승정원일기>의 기록 등을 참조해 볼 때

이 어진은 정면관을 훌륭히 소화해 낸 작품이라 할 수 있으며,

보(補) 및 어깨부분 용(肩龍)의 이금(泥金) 효과에 의해 그 엄숙한 기상이 더욱 앙양되어 있다.

 

 

(2) 영조 어진 - 보물 932호

영조(1694-1776) 이금(李昑)은 재세시(在世時) 매10년마다 7차례나 초상화를 그려서

모두 13본의 어진(御眞)을 제작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의 51세眞과 21세眞(연잉군 때의 수용)이 전해올 뿐이다. 

 

    

 

그중 51세 어진은 좌안7분면(左顔七分面)까지 내려오는 반신상으로서

익선관에 홍색 곤룡포를 입고 있다.

이 영조어진 역시 이모본으로서 대한제국 광무 4년(1900)에

임금의 어진을 모셔 두었던 경운궁(慶運宮)의 선원전(璿源殿)에 화재가 발생하여 잃어버린

태조 · 숙종 · 정조 · 순조 · 문조 · 헌종의 어진을 대대적으로 모사할 때 함께 제작한 것으로

조석진(趙錫晉), 채용신(蔡龍臣)  등 당대 초상화의 일급화사가 그린 것이다.

당시 육상궁(毓祥宮) 냉천정(冷泉亭)에 모셨던 영조 20년에 그린 어진을 본 떠 그린 것. 

비단에 채색하였고, 크기는 그림 61.8×110.5㎝, 전체 73.0×169.2㎝ 이다.

 

고개와 몸을 약간 오른쪽으로 틀고 날카로운 눈매로 한 곳을 응시하고 있는 모습에서

영조의 예지와 통찰력을 엿볼 수 있다.

영조가 입고 있는 붉은 곤룡포의 황금색 용과 익선관은 대표적인 왕의 복식이다.

얼굴에는 붉은 기운이 돌고 있고 두 눈은 치켜 올라갔으며

높은 콧등과 코 가장자리, 입의 양끝은 조각처럼 직선적으로 표현되었다.

가슴에 있는 각대 역시 위로 올라가 있고,

옷의 외곽선을 따로 긋지 않는 등 조선 후기의 초상화 양식이 보인다.

 

영조는 조선조 22대 임금으로 1725년부터 1776년까지 52년간 재위하였다.

기록상 영조의 어진은 모두 13점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고,

이 가운데 1900년(광무 4년)에 조석진(趙錫晋)과 채용신(蔡龍臣)이 함께 모사하여

창덕궁의 선원전에 모신 것이 이 어진이다.

 

모사할 때 범본이 된 원본은

영조 20년(1744)에 당시 최고 화사였던 장경주, 김두량 등이 제작했던 것으로

영조의 생모 숙빈 최씨를 받들었던 육상궁 영천정에 봉안했던 본인데,

6.25동란 때 소실되고 지금은 이 이모본만이 남아 있다.

 

다시 말해 이 어진은 원래 진전봉안용이 아니라

생모를 곁에서 모시고자 하는 용도를 염두에 두고 제작된 것이다.

따라서 전신상이 아니라 복부까지 오는 반신상이었던 것이다.

  

안면에는 분홍색을 엷게 칠해 도화색 홍기가 있는데

이것은 영조자신의 안색에 홍윤기(紅潤氣)가 짙었다는 <승정원일기>에 나타난 기록과 부합된다.

이런 안색을 바탕으로 한껏 치켜 올라간 눈매를 따라 짙은 갈색선과 윤곽을 그렸으며,

산근(山根)이 강조되고 콧날과 협(頰 : 뺨), 법령(法令 : 코 가장자리에서 입 양끝으로 이르는 부분)이

조각적이라 할 만큼 직선적인 선형으로 세워지고 그 옆에 자연스런 선염효과가 안배되어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수염을 그린 묘법이 탁월하다.

우리나라 초상화에서 수염은 대단히 중시되어왔는데

화사들은 수염은 안모(顔貌)의 연장으로 보았던 듯,

수염을 그리기에 앞서 그 부위에 살색으로 칠한 후,

그 위에 한 올 한 올 모(毛)의 성질을 달리하여 정성껏 그려나갔다.

 

또한 의습 처리에서 이 영조어진은 당대의 양식대로 외곽선을 나타내지 않았으며

앞가슴의 보(補)께로 올라간 대(帶) 역시 조선왕조 후기의 복제면에서의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다.

이 영조반신상은 이모본이기는 하지만

당시의 화상의 명수들의 손에 의해 원본에의 충실을 기해 제작된 것으로서

현존 어진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3) 연잉군(延礽君) 초상 - 보물 1491호

한편 영조초상화로서는 연잉군시절의 도사본(圖寫本)이 전해오고 있어 흥미롭다.

이 본은 화면의 오른쪽 1/3 전도가 소실되었지만

다행히 얼굴부분이 완전하고 복색 역시 참조해볼 수 있으며,

이모본이 아닌 원본이므로 초상화연구의 귀중한 자료이다.

 

이 초상화는 숙종 40년(1714) 영조 21세 때 그려진 것인데,

화면 좌측 상단에 ‘초봉연잉군고호양성헌(初封延仍君古號養性軒)’이라 한 것으로 보아

연잉군(延礽君) 시절 잠저(潛邸)시의 수용임을 알 수 있다.

 

사모(紗帽), 백택흉배(白澤胸背)를 부착한 녹포단령(綠袍團領),

서대(犀帶), 검은색 녹피화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 정장 관복차림에

공수자세로 앉아 있는 좌안8분면의 전신교의좌상이다.

흉배는 왕자인 관계로 백택(白澤)문양을 금사(金絲) 선(線)으로 수놓은 것으로 보이며

전체적인 상용형식은 숙종 말년의 양식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이를테면 사모의 높이가 상당히 높고 양옆으로 뿔(角)이 길게 뻗쳐 있다.

녹포의 형태 또한 양어깨부분은 풍성하지 않으며, 소매 역시 길게 되어

공수(拱手)함에 따라 밑으로 상당히 늘어져 있어 당시의 복제를 보여준다.

 

안면에 비해 몸체는 거의 정면을 향한 듯 돌려 있으며,

따라서 주름은 거의 대칭을 이루고 단령의 옆자락이 옆으로 뻗쳐있다.

또한 호피를 깔고 있는데 족좌대 위에는 화문석이 깔려있고,

배경은 당대의 특징대로 없으며, 바닥에는 채전도 돗자리도 깔려있지 않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안면처리로서 안색은 엷은 갈색계인데,

안면의 움푹 들어간 부분에는 먼저 약간 짙은 갈색 선염으로 칠한 후

짙은 갈색선으로 윤곽을 되그려서 입체감을 부여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그런데 여기서 윤곽선 및 이목구비의 형용을 위해 구사되는 갈색선은

같은 갈색이라 해도 농담의 차이를 두어 성격을 달리하고 있으니,

이를테면 윗 눈꺼풀은 보다 짙은 갈색선으로 나타내고 아랫 눈꺼풀은 옅은 갈색선으로 표시했으며,

동일한 안면의 외적 윤곽선도 차이를 두어

왼쪽 뒤에서 내려오면 내려오는 만큼 미약한 선으로 표현했다.

이에 비해 콧날은 단호하리 만큼 짙은 갈색선으로 긋고 입술의 외곽선 역시 확연하다.

 

그러나 이 像의 보다 중요한 특징은

이 짙고 옅은 선에 생기를 부여하고 형태감을 유도시켜주는 선염(渲染)효과이다.

바꾸어 말하면 안면의 오목한 부분을 먼저 어두운 갈색 선염으로 시채한 후에

그곳에 때로는 짙게 때로는 옅게 선으로 보충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방법은 결국 조각적인 입체감에 근접해 간다.

눈에는 이미 안두(眼頭) 및 안초에 홍기가 삽입되어 있어 사실감이 부여되어 있다.

하지만 조선왕조시대의 초상화에서 중시되는 수염은 영조가 어린 탓인지

다만 몇 올만이 나타나 있을 뿐이다.

 

영조 21세(1714년) 때 진재해( ?-1735 이전)가 그린 것으로

영조 21년(1745)에 경희궁(慶熙宮) 태령전(泰寧殿)에 봉안되었다가

정조가 즉위하자 잠시 경현당(景賢堂)에 두었다가

정조 2년(1778년) 3월에 선원전으로 이봉되었다.

가장자리가 불에 타서 1/3이 결손되었으나

얼굴, 흉배, 관대, 족좌 부분이 완전한 상태로 남아 있어

당시의 초상화의 기법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영조는 숙종(재위 1674~1720)의 둘째 아들 이금(李昑)으로 1699년에 연잉군에 책봉되고

1721년 왕세제가 된 뒤, 1724년에 경종(재위 1720~1724)의 뒤를 이어

조선 제 21대 영조 임금으로 즉위하였다.

1714년(숙종 40) 영조의 연잉군 시절인 21세 때의 이 초상화는

왕자를 상징하는 상상의 동물 백택(白澤) 흉배를 금으로 화려하게 채색함으로써

신하의 초상과는 격을 달리하여 제작하였다.

조선 왕자의 정장관복 초상화로서 생전에 직접보고 그린 것으로는 유일하게 남아 있는 작품이다.

비단에 채색하였으며 크기는 그림 77.7×150.1㎝, 전체 90.2×214.6㎝.

 

 

(4) 익종 어진

익종(1809-1830) 어진은 화폭 좌측이 거의 반 이상이나 소실된 잔편으로 남아있어서

얼굴모습조차 살피기 어렵다.

 

 

그러나 화면 우측 상단에

'익종돈문현무인의효명대왕십팔세어진(翼宗敦文顯武仁懿孝明大王十八歲御眞)'이라는

표제가 화면 위에 직접 쓰여 있으며,

그 안쪽 옆으로는 ‘문조익황제어진(文祖翼皇帝御眞)’이라 쓰여진 홍첨(紅籤)이 붙어 있다.

 

익종은 나이 22세로서 세자 때에 승하하였으므로

실록에는 익종어진의 제작기록이나 봉안기록이 수록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선원계보에 의하면 익종은 무려 8본을 제작했음을 알 수 있다.  

 

 

 

 

 

 

현존하는 익종어진은 18세의 것으로 순조 26년(1826)에 도사(圖寫)한 것이다.

현재 얼굴모습은 전혀 확인할 수 없으며, 면류관을 쓰고 구장복(九章服)을 입은 전신교의좌상인데,

밑에는 화문석이 깔려있을 뿐이다.

그런데 돗자리의 높이가 상당히 낮아 조선시대 후기의 특색을 반영하며,

안모(顔貌)의 취각(取角)은 9분면 정도로 추정된다.

 

그러나 비레가 잘 맞지않은 듯하며, 면류관을 쓴 옆모습으로 돌려 표현한 점에서 볼 때

그다지 초상화의 고수(高手)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설채법은 상당히 훌륭하고 또 시대가 내려오는 만큼 색이 아직도 그대로 살아있어

정묘하고 섬세한 점은 충분히 감지된다.

 

 

(5) 철종 어진 - 보물 1492호

위의 익종어진에 비해 철종어진은 다행히 얼굴모습과 복색을 모두 살펴 볼 수 있다.

 

이 작품은 조선조 25대 임금이며 1850년부터 1863년까지 재위하였던

철종 임금의 31세 당시 초상이다.

오른쪽 1/3이 소실되었지만

남아 있는 왼쪽 상단에 ‘여삼십일세진(予三十一歲眞)’

‘철종희윤정극수덕순성문현무성헌인영효대왕(哲宗熙倫正極粹德純聖文顯武成獻仁英孝大王)’

이라 써 있다. 이 어진이 철종 12년(1861) 3월에 도사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규장각에서 펴낸 <어진도사사실(御眞圖寫事實)>에 따르면,

당시 도사를 담당했던 화원들은 이한철(李漢喆), 조중묵(趙重黙)을 주관화사로 하고

김하종, 박기준, 이형록, 백영배, 백은배, 유숙 등이 도왔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당시 이 군복본(軍服本) 외에도 강사포본(絳紗袍本)을 그렸는데, 현재 군복본만 현전한다.

강사포본이 전신에 뛰어나 가히 7분을 넘었다하며 지금 전해오지 않는 것이 유감이다.

여하튼 철종어진 두 본은 제작기간이 1개월여가 소요되었다 한다.

 

이 철종어진은 좌안9분면의 전신교의좌상으로서

융복(戎服)차림, 즉 전립(戰笠)에 군복을 갖추고 있는데

바닥에는 용문석(龍紋席)이 깔려있으며 옆에는 칼이 놓여 있다.  

 

공작털이 꽂혀진 전립이나 용문이 수놓인 보(補)가 부착된 군복의 화려한 채색,

2층으로 된 족좌대, 정세한 용문석은 왕으로서의 위엄과 풍모를 과시하며

화폭에 나타난 철종의 용안 자체는 순수한 인품을 말해준다.

안면은 전체적으로 어두운 갈색으로 채색되어 있으며,

안면의 외적 윤곽선 및 이목구비의 구성은 짙은 갈색선으로 규정되어 있다.

  

눈은 정성들여 묘사하였으나, 위 눈꺼풀은 고동색 선으로 나타내고

눈동자에는 검은 동공 주위에 니금을 사용하여 어진 제작과정시의 배채(背彩)방식을 예시해준다.

아래 눈꺼풀에 난 속눈썹을 담묵으로 칠한 위에 검은 세선으로 처리하는 세심한 주의가 엿보인다.

 

 

코는 콧날은 음영의 삽입 없이 그대로 갈색 선으로 그었지만 그 높이가 살아나 있다.

수염 역시 특이하게 검은데, 이것은 철종의 나이가 젊기 때문으로 생각되며

화법은 짙은 갈색 선에 니금 효과를 섞어서 사용하였다.

 

의복의 화려함은 대단하지만 옷주름 처리는 선염처리를 강하게 집어넣어 질감을 묘출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철종어진의 특이함은 소매 밖으로 나온 손에 있다.

현존하는 화폭으로는 왼손밖에 볼 수 없으나

의자손잡이를 잡고 있는 손의 표현은 그다지 원숙한 기법으로 묘사되어 있지 못하여

군복의 다층적인 질감묘출을 그토록 훌륭히 소화해낸 것과 비교하면 상당한 대조를 이룬다.

 

이 철종어진은 임금이 구군복(具軍服)으로 입고 있는 어진으로는 유일한 자료이며,

군복의 화려한 채색, 세련된 선염, 무늬의 정세한 표현 등에서

이한철과 조중묵 등 어진 도사에 참여한 화원 화가들의 필력을 확인할 수 있는 점 등에서

중요성을 지닌다.

ㅇ규격 : 202×93㎝

 

  

(6) 고종 어진

고종어진은 현재 전주박물관과 원광대학교박물관 그리고 개인소장으로 수폭이 전해오는데,

대체로 동형동규(同形同規)의 형식을 보여준다.

 

기록에 의하면 원래 고종어진은

고종 9년(1872)에 군복대소본과 익선관본, 복건본, 면복본 등 모두 5본을 도사하였다 하는데,

현재 2본은 전해오지 않으며, 1910년 석지 채용신이 그린 고종어진의 모사본만이 전해온다.

 

당시 고종은 도사를 끝내고 화가인 석지가 초본을 가지는 것을 허용하였던 듯,

그 후 석지는 이 초본에 의거하여 고종어진을 여러 번 모사(模寫)해내었다.

문헌으로 확인된 것만 해도 1917년 도일(渡日)시 영친왕을 만나 고종어진을 바쳤다던가,

계화도에서 우국지사 전우(田愚)가 고종에 대한 사모의 정을 가누지 못하자

고종어진을 그려준 기록이 있다.

 

 

이처럼 여러 점의 ‘어진그리기’가 가능했던 이유는

이미 그 당시 조선조 내내 품어왔던 어진에 대한 전통적 관념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기존의 전통적 사고에서는 어진(御眞)이란 왕의 조종(祖宗) 그 자체로서

진전(眞殿, 어진봉안처) 이외의 외부로의 유출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고종연간 이후 이런 관념은 희박해진 듯하며,

일제강점기에 이르면 유명한 사람들의 초상화를 모으는 취미나,

혹은 지나간 옛 왕조를 못잊는 일부계층들이 어진 갖기를 소원한 듯,

설산(雪山) 등 다른 화가들에 의한 고종황제의 어진제작 역시 제법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외국인 화가 보스(Vos)의 유화, 고종 어진

또한 외국인 화가에 의한 어진제작 역시 행해졌는데,

이를테면 1899년 보스(Hubert Vos: 1855-1935)가 고종어진을 캔버스에 유화로 그렸으며,

   

 

일본인화가 사쿠마 테츠엔(佐久馬鐵園: 1850-1921) 역시 1908년 그렸다고 하는데

어떤 형식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테츠엔이 그린 초상화가 각 대신들에게 분사(分賜)되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즉석에서 간략한 필치로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또 1910년에 후쿠에이 케이비(福永耕美)가 내한하여 여러 달을 서울에 머물면서

태황제(고종)의 초상화를 제작하였다고 한다.

 

- 고궁박물관 소장본, 고종 어진

이 작품은 조선왕조 24대 임금인 고종의 어진으로 강사포(降紗袍)를 입은 전신좌상으로

얼굴은 정면관(正面觀)이다.

배경을 휘장으로 장식한 것이 특징적이며,

발 아래에도 화문석 대신 휘장과 비슷한 무늬의 천을 깔았다.

남계(藍溪)라는 화가가 그렸다고 전해오며, 사진을 범본으로 한 작품으로 추정된다.

   

 

 

 

 

 

 

  

 

 

- 전주박물관 소장본, 고종 어진

현재 고종어진으로서 가장 주목할 만한 작품은

석지가 그렸다고 전해오는 전주박물관소장 <고종어진>이다.

이 어진을 살펴보면, 정면관에 익선관, 곤룡포라는 상복(常服)을 입은 전신교의좌상이다.

 

   

  

 

 

 익선관은 은은한 발색효과를 넣어 입체감을 살리고,

얼굴은 비교적 밝은 색으로 채색했는데, 전체적으로 면적처리를 하였다.

위 눈꺼풀은 먹선으로 가늘게 형용하고,

눈동자에는 수정체부분에 반사광이 그려져 있는데, 특히 왼쪽눈이 더욱 또렷하다.

 

고종은 살피듬이 좋았던지 주름이 별로 없고 양 난대(蘭臺: 왼쪽 콧방울)와

정위(廷尉: 오른쪽 콧방울을 말하며, 좌우 콧방울을 통칭하여 콧날개라 한다)의 외곽부위에는

또렷하게 붓질이 가해여 있다.

입술은 갈라진 주름까지도 세밀히 묘사되어 있고, 입술외곽선은 약간 밝게 처리하였다.

 

각대(角帶)는 위로 치켜 올라가 있으며,

견보(肩補)와 보(補)의 니금처리는 두터워서인지 박락부분이 봉니(封泥)다.

양 무릎에 얹은 손의 형용은 안정적이고 자연스럽다.

‘임자생 갑오등극(壬子生甲午登極)’이라 쓰인 호패가 적갈색 술 사이로 보인다.

 

용상 전체의 각도와 방석모양은 부감하듯 처리되어 있으며,

족좌대 역시 45도 각도로 내려다본 듯한 시점으로 형용되어 있는데

이것은 앉음새가 안정적으로 보이도록 배려한 것이다.

바닥에 깔린 돗자리의 문양은 앞쪽과 뒤쪽 사이에 대소의 구별은 있지만 비스듬한 형용은 아니어서 이 어진의 제작년대는 대략 1920년 이전으로 추정된다.

 

- 원광대박물관 소장본, 고종 어진

이 밖에도 석지가 그렸다고 전해오는 원광대박물관과 개인소장 고종어진들은

모두 49세상으로 되어있는데,

이것은 앞서 말했듯이 석지가 고종을 도사할 당시(고종 49세)의 초본을

석지가 가장(家藏)하고 있으면서

이모(移模)가 필요할 시에는 이 초본을 초(抄)로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7) 순종 어진

조선조 마지막 제27대왕인 순종(1874-1926) 어진은

현재 이당 김은호가 그린 군복본 초본이 전해온다.

원래 이당 김은호가 어명을 받고 처음 어진을 제작한 것은 1912년이며,

당시 그가 처음으로 그린 어진은 대원수 군복을 입은 반신상이었다.

그러나 이 어진은 왕실의 재정사정으로 중단되었다가 1916년 연말쯤 완성을 보았고,

1917년에는 창덕궁의 화재로 인해 소실되었다.

 

현재 고려대에 소장되어있는 이 <순종어진 유지초본(油紙草本)>은

1912년 어진제작시의 초본으로 보이지는 않으며,

아마도 이 유지초본은 마지막으로 그린(1923-1928년 사이) 것으로 보인다.

 

이당 김은호는 순종 어진을 3번 그렸는데, 1912년, 1923년, 1923-28년이다.

<순종어진 유지초본> 국립현대미술관 소장본(1923년작)보다 더 늙어보이면서

의습처리법, 음영법, 입체화법 등에서 서양화적 요소가 보이기 때문이다.(75x59cm)

 

1923년 봄에 그린 것도 유지초본이지만 고려대박물관 소장본보다는 젊어보이는 모습이다.

두 그림 모두 정면관의 군복정장 그림이며,

고려대 소장본에는 제작년도, 주인공이름, 작가이름 등이 하나도 없다.(46×62㎝)

 

이 유지초본은 비록 정본은 아니지만 이당 김은호의 초상화법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당은 대상인물의 얼굴을 그릴 때 전체적으로 부드럽게 칠한 후

오목하게 들어간 부위를 가는 붓질을 이용하여 얼굴의 주름선을 따라 빈틈없이 메꾸어 나갔다.

세선(細線)은 채용신보다 더욱 가느다란 선묘를 사용하여

보는 이는 세선이 사용되었다는 의식을 거의 못한채 단지 부드러운 면만을 보게 된다.

이러한 방법은 그의 스승인 조석진으로부터 물려받은 기법으로 생각된다.

 

 

어진의 의미

 

현재 전해오는 어진은 이처럼 수폭에 불과하지만

조선시대 태조에서부터 순종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수효의 어진이 제작되었고

진전(眞殿)에 봉안되었으며, 어진제작과 봉안에는 거국적인 관심이 뒤따랐다.

 

<승정원일기>에 나타난 어진제작과정을 보면

우선 임시관장기구가 설치되고, 어용화사(御容畵師)가 선발된다.

어용화사는 대개 도화서 화원 가운데 초상화란 화목에 가장 뛰어나다고 정평이 난 화사들을

선정하지만, 마땅한 자가 없을 때에는 대신들의 추천(천거)에 의해

도화서 화원이 아닌 외방화사(外方畵師)들 가운데서 선발하기도 했다.

재주를 겨룰 때는(試才) 때로 대궐 내의 공신상을 그리게 함으로써

공개경쟁을 통해 뽑는 경우도 있었다.

선발된 화원들은 세 부류로 나뉘는데,

첫째는 집필화사(執筆畵師) 즉 주관화사(主管畵師)로서 용안(龍顔)을 담당했으며,

둘째는 동참화사(同參畵師)라 하여 용체(龍體)의 주요하지 않은 부위를 담당했으며,

셋째는 수종화사(隨從畵師)라 하여 채색할 때의 작업을 도왔다.    

참여하는 화사의 수는 대략 6인 정도였지만, 때로는 13인에 이르기도 했다.

이밖에도 작업을 돕는 장인들, 표구사, 바느질하는 노비 등 많은 인원이 어진제작에 참여했다.

     

어진제작의 구체적인 과정을 보면,

초본(草本) 완성, ➃상초묵화(上초墨畵 : 초본 위에 비단을 대고 본을 뜨는 일),

➄설색(設色 : 채색작업), ➅후배(後褙 : 배접대기), 표제(標題), 진전봉안(眞殿奉安),

논상(論賞) 의 순으로 진행되었다.

 

각 단계마다 길일길시(吉日吉時)가 택해지고, 왕과 대신들의 봉심(奉審)이 행해지는 등

어진제작에 쏟은 국가적 배려가 지대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어진제작이란 물론 여염에서와 마찬가지로

왕가에서 자손이 조상을 추모하려는 뜻에서도 행해졌지만

한편에 제작된 어진을 진전에 봉안함으로써

그 조종(祖宗)이 영구하기를 꾀하려는 사회적 기능도 지대했음을 알 수 있다.

 

어진이 지닌 상징적 의미는

물론 진전봉안 시 동원되는 인원이나 엄격한 의례절차를 통해서도 알 수 있지만,

전쟁 시 미천한 신분의 참봉이 어진을 보전하기 위한 얼마나 피나는 노력을 했으며,

피난 시 왕 이하 관료들이 어진을 앞에 두고 얼마나 통곡하며 비탄에 빠졌던가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또 진전에 화재가 났을 때 왕은 소복하고 3일간 곡하고

자전, 내전, 빈궁 역시 아울러 3일간 소복했는데

이러한 사후조치는 능상(陵上) 실화(失火)의 경우보다 더욱 엄중한 것이었다.

심지어 진전 근처에서 실화나 벌목사건이 있거나

큰 비나 큰 눈이 내린 경우에도 위안제를 지냈던 것이다.

우리는 어진을 둘러싼 이러한 의례행사 및 처리책을 통해

조선시대의 어진이 지닌 사회적 기능과 상징적 의미가 어떠했는가를 충분히 엿볼 수 있다고 생각된다.

 

 

 

- 내용 중의 모든 자료사진은 Gijuzzang Dream 정리한 것입니다 . . . . .

 

 

 

 

 

*** Tip  1 *** 

먼저 어진은 세 가지로 나누어진다.

임금이 살았을 때 직접 그 모습을 그리는 도사(圖寫),

임금이 돌아가신 뒤 근친과 신하들로부터 설명을 듣고 상상하여 그리는 추사(追寫),

그리고 초상화가 낡아서 그것을 보고 새로이 옮겨 다시 그리는 모사(模寫)가 있다.

 

그리고 어진의 종류에 따라 제작을 관장하는 본부가 설치된다.

어진을 도사할 때는 어진도사도감(御眞圖寫都鑑)을,

모사할 때는 어진모사도감(御眞模寫都鑑)을 구성하였다.

도감은 총 13인으로 구성이 되는데

도제조, 제조, 도청 등 7단계의 어진 제작을 감독하는 단계로 구성이 되어 있고,

이들이 어용화사를 선발하여 본격적으로 어진 제작에 돌입하게 된다.


한편, 어용화사들은 합숙을 하며 몸과 마음을 정결히 하고

복장은 정복이 아닌 소례복(일반적인 관복)을 입었다.

허리띠는 그림에 손상을 주는 불상사를 피하고 제작 편의를 위해

뿔로 만든 각대 대신에 비단으로 된 허리띠를 착용하고 제작에 임하게 된다.

  

 

 

 

 태조 이성계는 광대뼈 도드라진 무골상

 

 

함남 영흥 본궁 소재…청년기 추정

 

함남 영흥 본궁 준원전에 있던 태조 이성계의 어진 전경을 찍은 일제시대 사진

확대된 얼굴 부분. 검은 수염에 광대뼈가 도드라진 청장년기의 모습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국립중앙박물관, ‘어진’ 2점 새로 공개

 

수년전 인기사극 <용의 눈물>에서 탤런트 김무생의 열연으로

우리 눈에 익숙했던 조선 태조 이성계(1335~1408).

그의 진짜 얼굴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동안 이를 짐작케할 사료는

전북 전주의 경기전에 남은 1872년작 태조 어진(보물 931호)뿐이었다.

푸른 곤룡포를 입고 용문양 의좌에 앉은 그림 속 태조는 흰 수염 성성한 노년의 근엄한 군주다.

 

그런데 최근

이와 다른 젊은 시절 기골장대한 무인풍의 이성계를 그린 어진(어진) 2점의 사진이

발견되어 새삼 관심을 모은다.

 

국립중앙박물관 이수미 학예연구관은

11일 한성대에서 열린 미술사학연구회 정기학술대회를 통해

일제 때 함남 영흥 본궁(이성계의 옛집)에 있던 태조 어진의 유리원판 사진을 학계에 공개했다.

그는 또 이 원판 사진과 비슷한 구도인,

일제 때 잡지 <개벽>70호(1926)에 실린 초상사진도 같이 내보였다.

 

이 학예관은 함께 발표한 논문 ‘경기전 태조 어진의 조형적 특징과 봉안의 의미’를 통해

영흥 본궁의 어진 사진은

조선총독부의 1회 전국 사료조사가 진행중이던 1911년 9월19일

경내 준원전에서 찍은 것이라고 밝혔다.

 

이들 두 사진은 얼굴 윤곽이 원만한 노년기의 경기전 어진과 달리

검은 수염에 광대뼈가 도드라지고, 마른 모습이어서 청장년기 얼굴로 추정된다.

복식과 용상 등의 모습은 큰 차이가 없지만,

어진의 전체 그림 폭과 길이는 경기전 것보다 훨씬 길다는 설명이다.

 

또 <개벽>에 실린 어진 사진은 구도나 묘사로 보아

영흥 본궁의 어진 사진에 인공적인 손질을 한 것으로 보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어진이 있던 영흥 준원전은

개국초 태조 어진을 봉안하기 위해 만든 여섯 어진전 가운데 하나다.

사진 속 어진은

1837년(헌종 3년)에 도둑이 들어 파손되면서 새로 본떠 그렸다는 기록이 있다.

 

지난 5~6월 국립전주박물관 특별기획전 ‘왕의 초상’에서 경기전 어진과 함께 공개됐으나

당시엔 학계의 조명을 받지 못했다.

준원전 어진은 해방 뒤 북한에 남게 됐으나 현재 행방은 알 수 없다고 한다.

이 학예관은 “원본은 아니지만,

태조 어진의 원형을 반영하는 청장년기의 얼굴을 상세하게 그렸다는

점에서 어진의 미술사적 연구에 획기적인 사료”라며

“북한 당국과 연락해 원본의 존재여부와 소재부터 파악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현재 왕명으로 그려진 조선왕조 어진 가운데 온전한 완본은 경기전의 태조 어진이 유일하다.

이외에 영조, 순조, 익종, 철종의 타다 남은 어진 부분 4점과

1900년 왕명으로 원본을 옮겨 그린 영조의 반신상 어진이 전해진다.

대한제국 시대 개인 부탁으로 그린 고종과 순종 초상 등까지 포함하면 모두 10여 본이 알려져 있다.

- 한겨레, 노형석 기자, 2006년 3월13일

 

 

 

 

*** Tip  2 *** 

 

(1) 태조 어진

 

붉은 곤룡포를 입은 태조의 어진

  

오조룡 보(補) 부분

 

곤룡포의 옆 터짐

 

흑화(黑靴) 부분

 

 

(2) 순조 어진

 

강사포를 입은 순조의 어진

 

원유관 부분

 

강사포 부분

 

 

 

 

 

 

 

 

 

- Andante / Belo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