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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듬어보고(전시)

[국립중앙박물관] 황금의 나라, 페르시아 특별전

Gijuzzang Dream 2008. 5. 15. 22:23

 

 

 

 ‘황금의 제국 페르시아’ 특별전
 (The Glory of Persia)  

   

 

 
ㅇ 전시장소 및 기간     
    -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  2008.4.21~ 8.31 (132일)
    - 국립대구박물관 기획전시실  2008.9.29~12.21(84일)

 


ㅇ 전시품 수량 : 총 230여 점 내외(복제품 포함)
   - 이란국립박물관 등 이란 내 5개 박물관 소장품   204점 
   - 신석기시대(BC5,000~)에서 사산왕조 페르시아(AD651)까지
   - 국립중앙박물관,경주박물관 소장 관련문화재    18점
   - 계림로 출토 황금보검, 적석목곽분 출토 유리기 등
   - 페르세폴리스 부조모형 등 복제품  10점 내외 

 


 ㅇ 전시품 배치                             

 

   · 기획 1실: 페르시아의 황금 
                    페르세폴리스 궁정에서 황금보물과 귀금속을 감상                   

                         : 황금문화재 중심배치(귀금속, 장신구, 화폐)
   

   · 기획 2실: 페르시아의 역사와 문화 : 선사~사산왕조 페르시아 시대순 배치
                   
신석기(BC5,000년)~사산왕조페르시아(AD651)

                 :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를 중심으로  
                  - 이란 선사문화와 문명을 향한 길 
                  - 페르시아 제국의 탄생 : 아케메네스왕조 페르시아 
                  - 헬레니즘과 파르티아 : 아르사케스왕조 페르시아 
                  - 제국의 부활 : 사산왕조 페르시아 
                  - 동서교류의 증거 : 신라와 페르시아

 

 

 

 

 

  

 

 

 

 

국립중앙박물관(관장 최광식)은 이란국립박물관, 동아일보사, SBS방송과 공동으로

‘황금의 제국 페르시아’ 기획특별전을 2008년 4월 22일(개막식 4월 21일)부터 8월 31일까지 개최한다. 
2005년 10월 용산시대를 맞이한 국립중앙박물관은

정기적으로 세계 여러 나라의 문화를 소개하는 전시회를 개최하고 있다.

이 전시는 약 3년간의 준비를 거쳐 열리게 된 것으로

이전까지 우리나라에서 한번도 소개되지 않은 페르시아와 이란의 문화를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지금의 이란에서 화려한 문명을 꽃피웠던 페르시아의 유물들이 선을 보인다.

기원전 5000년경부터 서기 7세기까지의 고대 유물들이다.

《황금의 제국 페르시아》 기획특별전은

이란국립박물관과 페르세폴리스 박물관 등 이란의 대표적 국립박물관 다섯 곳의 소장품 204점을

전시한다. 9월 29일부터 12월 21일까지는 국립대구박물관으로 옮겨 전시된다


시기적으로는

이란고원에서 농경이 발달하면서 최초의 도시들이 탄생하는 기원전 5천년기에서

사산왕조가 멸망하는 7세기에 이르는 기간을 아우른다.

 

전시품은 문명의 초기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채색토기에서

사산왕조의 금속공예품에 이르는 204점의 이란문화재와

경주 적석목곽분에서 출토된 유리잔, 황금보검 등 실크로드를 통해 페르시아지역과 교류된

18점의 우리문화재로 구성된다. 
  
전시는 기획전시실 두개를 모두 이용하는데

 

1실에서는 ‘페르시아의 황금’이라는 주제로 대형 금제용기들이 선보이며

각종 보석과 금,은으로 만들어진 장신구들도 보여준다.

특히 이란국립박물관 최고의 소장품이자 이란을 대표하는 국보인 금제뿔잔이 포함된 하마단 황금보물과

정교한 세공이 눈길을 사로잡는 의식용 금제그릇들이 주목된다.

페르시아인의 정교한 공예술과 용맹스러움이 돋보이는 기원전 5세기의 '날개 달린 사자장식 뿔잔',

기원전 8세기의 '쌍사자 장식 팔찌', '양 머리 모양 황금 뿔잔'과 '황금 단검' 등

각종 황금 잔과 황금 단검, 페르시아인들의 일상과 내면을 보여주는 각종 생활 유물,

페르시아의 영광을 보여주는 수도 페르세폴리스의 만국의 문….

기원전 6세기 세계를 호령했던 페르시아 제국의 영광의 역사를 보여준다.

 

그 외에 페르시아와 메소포타미아에서 신분과 증명을 상징하는 다채로운 인장들과

아케메네스왕조에서부터 사산왕조까지 만들어진 금화와 은화가 같이 전시된다.


2실은 이란과 페르시아의 역사와 문화를 통시적으로 조망하도록 조성되었다.

곡물을 저장하는 거대한 토기부터

아리안 민족의 정신세계를 보여주는 다양한 상형토기,

루리스탄청동기로 대표되는 금속유물,

메소포타미아지역의 국가와 긴장과 교류를 통해 성장한 엘람과 메디아왕국을 살펴본다.

이후 전시실의 중심부에 페르시아 세계제국을 세운 아케메네스왕조(기원전 525~330)의 유적과

유물을 배치하였고 그 뒤로 파르티아, 사산왕조 페르시아를 살펴볼 수 있도록 하였다.

 

전시의 마지막 부분에는 신라시대 경주에서 출토된 유리그릇 등 우리 문화재 18점을 전시하여

실크로드를 통해 이루어진 고대신라와 페르시아 지역의 동서문화 교류를 볼 수 있도록 하였다.

 

 

페르시아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페르세폴리스 유적을 관람객에게 실감나게 전달하기 위하여

한국과학기술원과 같이 특수영상을 제작하여 상영한다.

여기에서는 과거 페르시아제국의 최전성기의 페르세폴리스의 모습과

현재 남겨진 유적을 HD화질의 초대형 스크린으로 만날 수 있으며

이외에도 전시장내에 특별하게 설치된 영상들을 통해 관람객에게 다양한 정보를 제공할 것이다. 

이란지역에서 황금제 유물의 출현은 아리안족의 남하와 깊은 관계가 있다. 이들은 주로 이란 북부 알부르즈 산맥과 카스피해 연안에 작은 왕국을 세웠는데 이 지역 지배자의 무덤에서 많은 금속유물이 발견된다.

특히 이중 마를리크 유적에서 출토되는 황금 잔은 상징성이 풍부한 표현과 정교한 가공으로 이름이 높다.

 

이외에 지위예 유적이나 카르마캬틀라 동굴유적에서 발견된 황금유물들도 독특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데, 유목민이 성격을 가진 새로운 정착자들은 운반이 용이한 귀금속 제품들을 특히 선호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외에 루리스탄 지역에서도 많은 금제, 은제 유물들이 발견되는데 당시 메소포타미아지역의 영향과 교류를 보여주는 것들이 많고, 특히 동물의 머리를 표현한 종교의식에 사용된 용기들은 후대 정형화된 황금뿔잔의 초기형태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란 지역은 기원전 5000년부터 농경이 발전하였고, 수사 등 도시가 생겨났으며, 엘람 왕국과 메디아 왕국이 형성되었다.

곡물저장용 토기 상형 토기 등 선사 토기, 루리스탄 청동기 등은 이란의 선사 문화와 문명의 형성 과정을 보여준다.

아케메네스 왕조는 기원전 550년과 520년 사이에 인더스 강 유역으로부터 아프리카 북부에 이르는 거대한 제국을 건설하였다.

키루스 대왕과 다리우스 대왕은 정복한 나라에 관대한 정책을 베풀었고, 관료 체계의 수립. 도로 교통망과 운하의 건설 등으로 제국의 모양새를 갖추었다.

 

역사상 세계제국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어떤 나라들을 떠올리게 될까. 아마도 고대 지중해 세계를 통일하고 세계제국으로 성장한 로마제국, 칭기즈칸과 몽골기병이 30년도 안 되는 기간 동안 이룩한 대원제국, 빅토리아시대의 해가 지지 않는다는 대영제국을 먼저 떠올릴 것이다.

 

사실 제국(Empire)이라는 단어는 사전적으로는 황제가 다스리는 국가라는 뜻이지만 그보다는 인종적, 문화적, 종교적으로 다른 여러 민족과 국가들을 통합적으로 다스리는 대국가와 그 통치 시스템을 가리키는 말이다. 세계사에서 이러한 제국의 역사는 ‘페르시아’라는 이름이 등장하면서 시작된다.

 

이란 남부 파르스라는 지역에서 아케메네스라는 전설적인 왕을 시조로 하는 작은 왕국은 기원전 550년과 520년 사이에 동으로는 인더스강 유역에서, 서쪽으로 아프리카 북부에 이르는 당시 알려진 문명세계를 통일하는 거대한 제국을 건설한다.

 

페르시아는 키루스대왕과 다리우스 1세의 통치기간 동안 군사력을 통하여 주변나라를 빠르게 정복하였지만 그 나라와 종족의 전통과 종교, 지배계층을 인정하는 관용적인 정책을 실시하였다.

 

또한 정교하게 구성된 관료체계와 도로교통망은 안정된 통치체계의 기반이 되었고 페르시아 이후 세계제국에 큰 영향을 주었다. 광대한 지역을 통치하기 위하여 바빌론, 엑바타나, 수사, 페르세폴리스의 네 곳에 수도를 두었다.

 

이중 ‘왕중왕’이라고 불리는 통치자는 평소에는 주로 수사에 거주하였으나 자신들의 고향인 파르스에 거대한 왕궁을 지어 중요한 의식을 거행하고 왕들의 무덤도 마련하였다.

 

페르세폴리스에 있는 궁전은 이 거대한 제국의 숨결을 생생하게 전해주는 유적이다. 후기에 들어 영토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고 왕위계승을 둘러싼 내분이 계속되면서 위기를 맞는 제국은 그리스를 통일한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대왕의 원정으로 종말을 맞는다.

 

수도 페르세폴리스가 불에 타버린 후 2000년이 넘도록 전설과 신화 속에서만 존재하던 페르시아 제국은 20세기에 들어와 서구 고고학자들에 의하여 다양한 건축유적이 발굴조사되고 이란 곳곳에 남겨진 쐐기문자의 비문들이 해석되기 시작하면서 이란의 페르시아 유물들이 박물관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제국주의 시기를 거치면서 많은 유물이 미국과 유럽으로 반출되기는 하였지만 이란의 국립박물관들은 이 전설적인 최초의 제국이 누린 영화로움을 증거하는 많은 소장품을 가지고 있다. 이들 중 가장 대표적인 하마단 출토품을 비롯한 아케메네스왕조 페르시아 시기의 황금유물과 은제유물을 살펴보자.

 

 

마케도니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원정 이후, 페르시아 지역은 셀레우코스 왕조에 의해 지배되었다.

헬레니즘 영향 아래에 있었던 셀레우코스 왕조의 유물들과 헬레니즘과 로마의 영향에서도 그들만의 고유한 양식을 표현하려고 했던 파르티아의 유물들이 선보인다.

사산 왕조는 실크로드를 통해 교역으로 부를 쌓았고 그들의 문화, 예술 등을 널리 퍼뜨렸다.

페르시아의 문화는 실크로드를 따라 중앙아시아와 중국을 거쳐 신라에 이르렀다.

전시의 마지막 부분에는 신라와 통일신라시대 무덤 출토 유리잔, 황금 보검 등이 전시된다.

 

 


 

 '황금의 제국 페르시아' 전시유물                                  

 

  • 국립중앙박물관 '황금의 제국 페르시아' 기획특별전에서 전시되는 유물들. / 유석재 기자

 

 

['크레르크세스 위대한 왕'이라는 글새김이 있는 황금잔], 아케메네스 왕조 하마단

 

황금의 제국 페르시아’의 출품작 가운데 하나인 ‘크세르크세스가 새겨진 황금 잔’.

좁은 잔 바닥에서 부드럽게 넓어졌다가 입구로 올라오면서 다시 좁아지는 수려한 곡선,

잔 바깥쪽에 돋을새김 기법으로 조각한 여러 가닥의 꽃잎 모양 덕분에

활짝 핀 한 송이 ‘황금 꽃’을 보는 듯하다.

 

잔 입구엔 고대 페르시아어와 바빌로니아어, 엘람어 등 세 개의 언어로

 ‘크세르크세스 위대한 왕’이라고 새겨져 있다.

 

엘람 제국은 기원전 4000년∼기원전 3000년 이란 고원에 정착한 세력이다.

‘크세르크세스’는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왕조(기원전 559년∼기원전 330년)의 왕인

크세르크세스 1세(기원전 519년경∼기원전 465년)를 지칭한다.

다리우스 1세의 아들인 크세르크세스 1세는 아버지에 이어 페르시아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인물.

 

이 황금 잔처럼 생긴 모양의 술잔을 피알레(phiale)라고 부른다.

고대의 신이나 왕에 대한 의례를 지낼 때 사용했다.

의례 때 음료나 술을 뿔잔에 부어

뿔잔 아래쪽에 난 구멍으로 흘러내리면 피알레로 받아 마시는 것이다.

 

이 황금잔은 크세르크세스 1세를 위한 의식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황금 잔이 출토된 하마단은 아케메네스 왕조의 여름용 궁전이었고

사산조 페르시아가 멸망한 7세기 이후에는 이슬람 세계의 중심 도시로 성장했다.

현재 이란 하마단 주의 주도()이며 옛 이름은 에크바타나(Ecbatana)다.

 

 [잔] 기원전 4000년, 수사

   

[원무늬 병]
사산 왕조/ 기원 후 600~700년,

이란 북서부

 

 

 

 

 

 

 

[날개 달린 사자 모양 뿔잔], 기원전 550~330년, 아케메네스 왕조, 하마단, 금

  

기원전 550년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왕조 궁궐에선

‘날개 달린 사자 모양 황금 뿔잔’에 술을 받아 마셨다.

사자 머리와 연꽃무늬로 장식된 화려한 황금 잔은 바라보기만 해도 마법에 걸릴 듯하다.

 

 

 

 

[검], 기원전 1000년, 청동

[금제 숫소 장식잔], 기원전 1000년, 순금 1425g, 출토지 미상

 

 

 

 

[동물 장식잔], 기원전 1250-1150년, 마를리크, 호박금 (왼쪽)

[금제 양 머리 모양 각배], 기원전 700년, 순금 1685g (오른쪽)

 

           동물 장식 잔(높이 17.5cm).

 

페르시아가 세계 제국을 건설하기 약 400년 전인 기원전 10세기 무렵 제작된 것이다.

이 잔은 금과 은 구리 등이 천연적으로 합금된 상태인 호박금()으로 만들어졌다.

페르시아 즉 지금의 이란에서 많이 산출되는 호박금은

구성 성분의 비율에 따라 색이 다양하게 나타난다.

 

잔은 위쪽 입구(구연부)와 아랫부분에 가는 선으로 끈 모양의 무늬를 정교하게 새겼다.

잔의 위와 아래를 2개의 단으로 나누어

각각 반대 방향으로 행진하는 상상의 동물을 돋을새김 기법으로 표현했다.

잔의 입구 부분이 약간 벌어져 안정감과 세련미를 보여준다.

 

여기 등장하는 네 발 달린 동물은 이마에 뿔이 달린 상상의 동물이다.

신화적 상상력을 가미해 표현한 것으로, 이마의 뿔은 페르시아인의 용맹스러움을 상징한다.

잔에 장식된 동물의 표현을 보면 매우 정교하고 화려하며 전체적으로 조형미가 빼어나다.

목을 밑으로 내려 고개를 숙이고 걷는 동물의 모습이 다소 익살스럽지만

잔의 표면에 변화감을 주어 오히려 조형미를 더해 준다.

반대 방향으로 걷고 있는 동물들은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표면 장식에 생동감을 부여한다.

이 같은 돋을새김 기법의 잔은 오리엔트를 통일한 아케메네스 페르시아로 계승되어

페르시아 금속공예미술의 한 전형이 되었다.

 

 

[도금 은제 제왕 사냥무늬 접시], 사산조 페르시아, 직경 20cm, 은 (왼쪽)

[원반 장식], 기원전 1000년, 은 (오른쪽)

 

사냥 무늬 은접시, 지름 20.6cm

 

왕이 말을 타고 달리며 동물을 사냥하는 모습을 조각했다.

배경 부분을 도금해 화려한 느낌을 더했으며 왕이 칼을 찬 채 창을 들고

곰, 멧돼지, 사자 등 동물을 사냥하는 모습을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왕이 탄 말을 장식한 화려한 말갖춤도 인상적이다.

 

은제 접시에 도금하거나 금을 상감해 넣은 방식은

페르시아의 대표적 금은 세공법. 왕의 식기를 만들 때 특히 많이 사용했던 방법이다.

 

사산조 페르시아 시대에 왕의 사냥은 국가 의례였다.

왕의 용맹스러운 사냥 모습을 조각하는 것은 국가 의례를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또 다른 사산조 페르시아 시대 은접시는

왕이 말을 타고 달리며 뒤를 돌아 사자를 향해 활을 겨누는 모습을 새겨 눈길을 끈다.

이런 구도는 파르티아(기원전 247년 이란계 유목민이 세운 국가, 226년 사산조 페르시아에 의해

멸망)식 활쏘기의 전형적인 구도로,

고구려 고분 무용총의 벽화인 수렵도에서도 볼 수 있어 우리에게도 익숙하다.

 

 

 [황금 쌍사자장식 팔찌], 기원전 800~700년, 지위예, 순금 287g

 

‘황금의 제국 페르시아’에 선보이는 대표적 황금 유물 중 하나인 ‘쌍()사자 장식 팔찌’.

 

기원전 9세기∼기원전 8세기에 제작됐다.

페르시아가 세계 제국을 건설하기 300여 년 전이다.

이란 고원과 터키, 아르메니아 지방에서 번성했던 우라르투 왕국의 유물이며

이란 북서부 코르데스탄 지방에서 출토됐다.

 

이 팔찌는 전체적으로 자연스럽고 균형 있는 곡선이 인상적이다.

팔찌의 양 끝에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는 사자의 얼굴을 표현했다.

팔찌의 곡선은 양 끝 사자 장식으로부터 부드럽게 내려오다가

한가운데 아래에서 단면이 삼각형으로 넓어지면서 독특한 조형미를 뽐낸다.

서로 마주보고 있는 사자 장식은 갈기와 이빨을 세밀하게 표현했다.

사자의 눈, 피부, 이빨 사이로 내민 혀까지 정교하게 조각돼

2900여 년 전 이미 금속 세공 기술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세밀하게 조각된 갈기와 사자 머리 표현은 우라르투의 미술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다.

사자는 페르시아인들의 힘과 위용, 왕권을 상징한다.

 

어느 귀부인이 팔에 둘렀을 ‘쌍사자 장식 팔찌’는 숨을 멎게 할 만큼 정교하고 아름답다.

이 팔찌를 착용했던 사람은 우라르투 왕국의 왕족이었을 것이다.

우라르투 왕국은 기원전 8세기에 번성하면서

이란 고원에서 메디아인, 아시리아인들과 전투를 벌였다.

히타이트의 뛰어난 철기문화를 계승해 뛰어난 금속문화를 이룩했다.

기원전 6세기 아케메네스 왕조의 캄비세스 1세에 의해 멸망했지만

우라르투인들의 금속 세공 기술은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왕조의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사자 장식 황금잔]

 

‘황금의 제국 페르시아’에 선보이는 황금 유물 가운데 가장 오래된 ‘사자 장식 황금잔’.

기원전 1300년∼기원전 1200년경에 제작됐다.

사자 머리 두 개를 따로 만들어 붙이고

붙인 부분에 사자의 목과 몸이 자연스럽게 연결되도록 조각한 것이 특징이다.

본래 사자 머리가 세 개였으나 지금은 두 개만 남아 있고 못으로 고정돼 있다.

돋을새김 기법으로 조각한 사자의 몸에는

등에서 배까지 출렁거리는 갈기를 세밀한 선으로 표현했다.

황금잔 입구와 아랫부분에는 끈 무늬를 조각했다.

 

이 황금잔이 출토된 마잔다란은 이란 북부에 있는 곳으로 고대에는 ‘히르카니아’라고 불렸다.

이란 북부에서 출토되는 금속 공예품 가운데 이 황금잔처럼

동물 머리를 따로 만들어 붙인 유물이 많다.

특히 이란 서북부 길란 주 마를리크 유적(기원전 2000년∼기원전 1000년)에서

이런 양식의 공예품이 많이 출토됐다.

 

이 황금잔은 종교의식에 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동물 머리를 표현한 이 시기의 용기는

이번 전시에 출품된 ‘날개 달린 사자 장식 뿔잔’(기원전 500년∼기원전 400년),

‘숫양머리 모양 뿔잔’(기원전 7세기) 등 후대 페르시아 동물 머리 장식 뿔잔의 원형이 됐다.

이들 유물을 비교하는 것도 ‘황금의 제국 페르시아’가 선사하는 재미 가운데 하나다.  

 

 

 [아이벡스 장식의 말재갈], 루리스탄 피쉬코 카툰반B 유적출토, 기원전 1100~800년,

청동제, 높이 14.8cm, 폭 25.3cm,

 

루리스탄 청동기는 일찍부터 그 존재가 알려져 왔으나

도굴품이 많아 정확한 출토지가 확인된 것이 많지 않은데

이 재갈은 각종 청동용기, 청동도끼, 청동촛대 등과 같이 일괄 출토된 청동기이다.

말을 조종하는데 사용하는 재갈과 그 양쪽의 볼가리개로 구성되어 있는데,

볼가리개는 날개를 단 염소의 일종인 아이벡스가 다른 양을 누르고 있는 형태를 하고 있고,

아이벡스의 가슴 부위로 재갈을 통과하는 형태로 되어 있다.

 

 

 

 

  

[마스티프 상], 아케메네스왕조, 수사, 페르세폴리스, 석회암(좌)

[화살통], 기원전 800~700년, 루리스탄, 높이 61cm, 폭 16cm, 청동(우)

 

화살을 보관하는 청동제 화살통이다.

정면에 다양한 장면을 표현하였는데, 제일 위편에는 전차를 타고 사자를 사냥하는 장면,

그 아래에는 사자의 목을 찌르는 장면이 표현되어 있는데, 이러한 표현은 당시 인장 등에서도

보편적으로 발견되는 문양이다.

그 아래로는 양 또는 영양을 사냥한 두 마리의 사자와 연희를 열고 있는 왕의 모습이 표현되었다.

이러한 양식은 주로 앗시리아에서 많이 만들어져

루리스탄 청동기에 보이는 앗시리아의 영향을 잘 보여주는 예이다.

 

 

 

 

페르시아인들의 용맹함을 상징하는 조각 ‘마스티프 상’.

페르시아를 세계 최초의 제국으로 올려놓은 기원전 6세기 아케메네스 왕조 시대의 유물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전시실의 페르세폴리스 유적의 ‘만국의 문’을 지나면 만나게 된다.

 

조각상의 높이가 1m에 이르러 실제 대형 마스티프종을 보는 듯한 느낌이다.

마스티프는 털이 짧은 맹견의 일종으로, 용맹스럽고 강해 투견이나 호신견으로 기르는 개다.

금방이라도 침입자를 향해 달려들 듯한 날카로운 시선으로 정면을 노려보는

마스티프의 표정을 정교하고 사실감 있게 표현했다.

검은 석회암을 사용해 마스티프 특유의 매끈하고 강인한 몸을 잘 표현했다.

 

이 조각상이 발견된 곳은 이란 동쪽의 수사. 현재 슈슈라고 불리는 이 지역은

아케메네스 다리우스 1세 시절 페르시아의 제2수도(겨울 궁전)였다.

다리우스 1세는 페르세폴리스를 제1수도로 하마단을 제3수도로 정했다.

따라서 이 조각상은 왕의 목숨을 노리는 세력으로부터 왕궁을 지키는

상징적인 역할을 했을 것이다. 실제 마스티프의 근육과 표정, 이빨, 발톱까지 정교하게 조각해

당시 조각 기술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새 무늬 병], 7세기경, 사산조 페르시아 시대(226∼651)의 대표적 은제 공예품

  

주둥이 아래 목으로 내려오면서 좁아졌다가

몸통으로 내려올수록 계란 모양으로 불룩해지는 모습이 우리 도자기와 닮았다.

목 아랫부분에 장식 띠를 둘러 몸통과 목을 구분한 점, 몸통 아래 짧은 굽이 달려 있는 점 등은

사산조 페르시아 시대의 은제 공예품의 전형적 모습이다.

 

몸통에는 날갯짓하는 새 세 마리를 돋을새김으로 표현하고

새마다 둘레를 타원으로 감싸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했다.

새 조각 가운데 하나는 그리핀이다.

그리핀은 머리와 앞발, 날개는 독수리이고 몸통과 뒷발은 사자인 상상의 동물.

고대 서아시아와 그리스 장식에서 주요 소재로 등장했다.

 

이 병은 은으로 만들었지만 전체적으로 금을 입혀 화려하다.

이처럼 은제 공예품에 도금하거나 금 상감()을 하는 것이 사산조 페르시아 시대의 유행이었다.

은제품 가운데는 금 상감뿐 아니라 보석을 박는 경우도 많았다.

이런 금속 공예품을 통해 페르시아의 높은 미적 감각,

당시 귀족층의 화려한 음식 문화를 엿볼 수 있다.

 

 

 

 [페르시아 병사], 석회암, 부조()

 

 

 

  

 

 

 

 [페르시아에 조공하는 사절], 6세기경, 석회암, 부조()

 

페르시아에 복속된 28개 민족은

페르시아의 수도인 페르세폴리스의 궁전에 와서 다양한 상품을 조공으로 바쳐야 했다.

이러한 조공이 모습을 석회암 석판에 부조로 표현해

페르세폴리스 궁전 건축물의 벽을 장식했던 유물이다.

 

기원전 6세기 이후 약 200년 동안 오리엔트를 제패했던 페르시아의 세력과 위용이

어느 정도였는지 잘 보여준다.

또한 당시 페르시아 및 오리엔트 생활문화사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조공을 바치는 각 민족의 신체적 특징, 의상, 생활 풍속 등이

각각의 부조에 세세히 나타나기 때문이다. 무기, 낙타, 들소, 상형문자가 쓰여 있는 파피루스,

각종 악기 등 부조에 등장하는 조공품도 매우 다양하다.

 

이번 전시엔 조공 모습을 표현한 부조를 비롯해

페르시아 왕을 지켰던 친위사수대의 당당한 모습을 표현한 부조,

페르시아 조로아스터교에서 선과 빛의 신인 아후라 마즈다를 표현한 부조 등

10여 점의 부조가 전시된다.

 

[아후라 마즈다(악을 물리치는 조로아스터교 최고의 신)], 6세기경, 석회암, 부조()

 

페르시아 수도였던 페르세폴리스 궁전의 계단이나 난간에는

궁전의 각종 의례나 행사 장면이 부조()로 장식되어 있다.

이 부조는 페르시아 조로아스터교 최고의 신인 아후라 마즈다를 조각한 것.

 

아케메네스 왕조인 기원전 6세기경에 제작됐으며 재질은 석회암이다.

여기 표현된 아후라 마즈다를 보면 상반신은 사람 모습이고 하반신은 원반 모습이다.

오른손으로 원반을 쥐고 있으며 허리 아래 양옆으로 날개가 펼쳐져 있다.

얼굴 위쪽으로는 연꽃무늬가 줄지어 표현되어 있다.

직선으로 각이 지게 표현한 오른팔 팔꿈치 부분의 옷주름이 이색적이다.

 

페르시아 조로아스터교는

세상을 선과 빛의 신 아후라 마즈다와 악과

어둠의 신 아리만의 대결로 세상을 보았다.

개인의 삶이 발전하려면 선과 악 사이에서 끊임없이 투쟁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아후라 마즈다는 우주를 창조하고 우주의 질서를 유지해 나가는 신이기도 하다.

 

페르시아인들은 선과 악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중시한 것이다.

스스로의 의지로 아후라 마즈다의 편에 서면 최후의 심판 때 천국으로 갈 수 있다는 믿음이었다.

조로아스터교는 인간의 자유 의지에 대한 고민과 탐구의 시발점이었다.

독일 철학자 니체가 “자라투스트라(조로아스터)는 이렇게 말했다”고 선언한 것도

바로 페르시아인들의 자유 의지에 대한 경배의 표현이었다.

[그리핀 모양 장식], BC 9- BC 8세기.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왕조가 세계 제국을 건설하기 300여 년 전인

기원전 9세기∼기원전 8세기에 제작됐다.

이란 고원과 터키, 아르메니아 지방에서 번성했던 우라르투 왕국의 유물이며

이란 서북부 코르데스탄 지방에서 출토됐다.

 

그리핀은 머리와 앞발, 날개는 독수리이고 몸통과 뒷발은 사자인 상상의 동물이다.

그리폰, 그리프스라고도 불린다.

고대 서아시아와 그리스 장식 미술의 주요 소재로 등장했다.

주로 신전이나 무덤의 장식에 쓰여 수호자 역할을 한 신성한 동물로 추정되지만

그리핀의 의미는 아직 분명히 밝혀지지 않았다.

 

그리핀 장식은

기원전 그리스와 이집트 사이의 동지중해 연안 지역인 레반트 지방에서 처음 생겨나

서아시아 전역에 퍼졌고 기원전 14세기경 그리스에까지 전해졌다.

서아시아에서 유행한 그리핀 장식은 머리에 볏이 달려 있다.

이에 반해 그리스의 그리핀에는 나선 모양의 곱슬곱슬한 갈기가 있다.

 

이 황금 유물은 독수리 모양의 머리와 부리, 발톱까지 정교하고 화려하게 조각됐다.

무언가를 노려보는 매서운 표정이 사실적이며

부리 아래의 돌기, 눈 위의 눈썹이 세밀하게 표현됐다. 높은 수준의 금속 세공 기술을 보여준다.

눈썹과 귀에 붙어 볼과 턱 아래로 곡선을 그리며 늘어진 머리카락 두 가닥이 인상적이다.

이런 양식은 우라르투 미술의 전형적인 특징이기도 하다.

  

[이시스-티케 여신상], 기원전 1세기, 11.5cm

 

서아시아에서 이집트까지 오리엔트 일대를 지배한 세계 제국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왕조는

기원전 330년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의해 멸망한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아케메네스 왕조 다리우스 3세 시절 수도 페르세폴리스를 함락시키고 불을 질렀다.

이 비운의 사건은 역설적으로 그리스와 페르시아 문화가 융합된 헬레니즘 문화의 기원이 된다.

 

‘이시스-티케 여신상’(기원전 1세기)은

‘황금의 제국 페르시아’ 출품작 가운데 헬레니즘 문화의 대표적 유물이다.

이시스는 고대 이집트의 여신.

 

이시스에 대한 숭배는

헬레니즘 시대에 이르러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그리스, 로마 등 지중해 전체로 퍼졌다.

높이 11.5cm의 이 여신상은 고대 그리스의 여성복인 페플로스를 입고 있다.

천을 어깨에 두른 뒤 발까지 늘어뜨리고 허리 부분을 묶은 모습을 세밀하게 표현했다.

여신상이 쓰고 있는 관은

사랑을 상징하는 고대 이집트의 또 다른 여신 하토르의 관이지만 이시스의 상징이 됐다.

이 조각상이 발견된 하마단은

이란 수도 테헤란에서 서남쪽으로 337km 떨어져 있는 곳으로 아케메네스 왕조 시절 제3 수도였다.

그리스풍의 의상을 입고 있는 이집트 여신상이 페르시아 지역에서 발견된 사실은

여러 문화가 융합된 헬레니즘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조로아스터교 상징무늬 벽장식], 사산왕조

 

 

  

 

 통일신라의 동서문화 교류기                                         

 

 

[각종 유리그릇]
신라 5~6세기

 

 

경주 황남대총출토 - 봉수병(국보 193호), 5세기

 

 

[장식보검]
신라 6세기

경주 계림로 14호

 

         보검

    (보물 645호)

 

 

  [통일신라의 교류사 유물들]

 

‘시인’으로 추앙받는 이란의 거장 키아로스타미의 영화 속에는

언제나 이란 고원의 풍경이 잡힐 듯 흘러간다.

첩첩이 쌓인 회색빛 돌산과 아래 펼쳐진 밀탑과 언덕, 이리저리 휘돌아가는 길과

사람들의 자근자근한 움직임이 뚜렷한 질감으로 살아 있다.

그 풍경들 속에서 친구가 놓고간 과제물을 전해주려고 아이가

지그재그의 언덕길을 뛰어 올라간다.

지진으로 무너진 집터 위에 텐트를 쳐놓고 월드컵 중계를 보는 사람들이 있고,

올리브 나무 서 있는 언덕 위에서 사랑하는 연인들은 점점 멀어져간다.

 

3년 전 실크로드 취재를 위해 찾아갔던 이란 북부 마슈하드 부근의 고원길은

영화 속 풍경보다도 좀더 황막하고 거칠었다.

돌산의 고갯길을 양떼 몰고 지나가는 목동들과 그들을 내려다보는 푸른 하늘과

산야의 파노라마는 드센 자연 풍광 때문인지,

어떤 곳보다도 인간 존재에 대한 감상을 절절하게 고조시켰다.

 

이란의 고원길은 기실 1천여 년 전 실크로드의 숱한 카라반(교역상)들과 수행자들이

이윤 혹은 적멸을 생각하며 걸었던 노정이 쌓여 만들어진 산물이다.

다니던 사람과 물자는 바뀌었어도, 사람들 사이에 막힌 통로를 뚫고

마음과 마음의 물꼬를 트려는 의지는 여전히 살아 숨쉰다.

광막한 이란의 황야와 고원에는 수천 년동안 흘러 들어간 숱한 열정과 비탄, 환희가

알알이 박혀 있다. 이란의 산악 실크로드 풍경이 시선에 남겼던 웅숭깊은 의미는

역사에 아로새겨진 휴머니즘의 잔상일 터다.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 ‘황금의 제국 페르시아’를 보면서

인간의 보이지 않는 역사가 깃든 이란의 고원 풍경을 내내 떠올렸다.

 

선사시대부터 고대 페르시아, 파르티아, 사산조시대까지 고대 이란의 화려한 문화를 보여주는

이란국립박물관의 일급 컬렉션들은

동물 문양 금제 장신구와 사자 장식 뿔잔 의식 용기들의 정교하고 사실적인 디자인이 압권이다.

 

신라의 토우, 동물형 토기들과 거의 비슷한 모티브를 띠는 물고기, 말 모양 토기류와

구슬 목걸이, 뿔잔 등은 접붙인 세부 장식의 차이를 빼면,

기본적인 모양새가 신라, 가야의 토기, 공예품과 다를 바 없다.

 

반추상적인 기원전 1200년께 흑소 모양 주자의 양감은

절제된 조형미를 취하면서도, 생명의 활력으로 가득 차 있다.

그것 또한 신라 토우의 활달함과 닮았다.

 

꼬아 늘어뜨린 머리카락에 네모난 턱수염을 한 사산왕조의 관료 소조상은

경주 괘릉의 서역인 석상이나 용강동 고분에서 나온 서역인 도용을 떠올리게 한다.

 

키아로스타미는

“경계를 만드는 것이 경찰과 이민국의 업무라면 경계를 없애는 것은 예술가의 임무”라고 말했다.

수천 년 전 이란 장인들 또한 고도의 세공술과 상상력으로 시공의 경계를 넘어

우리 선조들의 삶과 역사의 한구석으로 예술혼을 전했다는 사실을 눈앞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시간과 공간의 장벽을 깨는 교류의 마음은 아름답다.

그 성심의 마음이야말로 전란과 파괴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오뚝이처럼 실크로드가 재개되어 사산조의 유물들을 한반도까지 전해올 수 있었던 원동력이다.

 

7세기 이슬람 세력에 의해 멸망한 뒤

진귀한 이란 문물을 가득 지니고 서역을 거쳐 중국으로 망명한 사산조 왕족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그 뒤 중국 장안에서는 ‘호풍’이라는 이란의 의식주 문화가 대유행했다.

그 여파는 곧장 신라의 경주와 고대 일본의 도읍 나라로 퍼졌다.

 

전시 유물들은 실크로드는 휴머니즘의 문화적 산물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해주었지만,

국립중앙박물관쪽의 전시 디자인은 그 의미를 세심하게 발라내지 못한 채

용두사미로 갈무리했다는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비교전시하겠다고 가져온 통일신라의 교류사 유물들이

이란 유물들의 들러리에 불과하다는 느낌을 안겨준 까닭이다.

전시가 끝나는 출구 바로 앞 공간에

마치 잔여물처럼 몰아놓은 신라 서역계 유물들의 초라한 모습들은 당장 눈에 거슬렸다.

 

5세기 경주 황남대총 북쪽 무덤에서 나온 이란풍의 동물 무늬 잔이나

로마 이란산으로 추정되는 유리그릇,

같은 시기 경주 식리총 무덤에서 나온 금동제 신발의 동물무늬 바닥판 등은

하나하나가 세계적인 희귀 명품들이다.

 

그러나 전시장에는 간략한 설명문만 붙인 채 좁은 공간에 줄줄이 도열시킨 것이 전부였다.

 

이란 유물과 맞대어놓고 전시한 것이 아니어서

얼핏 그 가치가 무엇인지를 잘 알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사실 외국 컬렉션을 직수입하는 순회전에서 다른 컬렉션 끼워넣기는 큰 실례다.

 

곽동석 박물관 전시팀장은

이란과 연관되는 신라 공예품들을 반드시 같이 전시해야 한다는 내부 의견에 따라

국립경주박물관의 소장품들을 빌려왔다고했다.

 

그럴 요량이라면 우리 쪽 유물을 상세히 찍은 패널로 이란 유물과의 연관성을 설명하거나,

한두 점만 독립 진열장에 넣고 부각시켜도 의미는 충분했을 것이다.

진품을 전시했지만, 옹색한 공간에 쓸어넣듯 배치하는 바람에,

유물들의 격만 낮춰 보이는 모양새가 되어버렸다. 작은 것 얻으려다 더 큰 것을 잃은 격이다.

ⓒ 한겨레(http://www.hani.co.kr),  2008-05-09, 노형석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