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뚝섬출토 금동여래좌상(金銅如來坐像)>
5세기 전반, 높이 4.9㎝, 국립중앙박물관
작은 상(像)으로 부식이 심하지만 대체적인 형태는 알아볼 수 있다. 고개를 약간 숙이고 손을 모아 배에 대고 있는 모습이 선정인(禪定印)을 취하고 있다. 머리는 작은 편으로 소발(素髮)이며 얼굴은 마멸되어 세부표현을 알 수 없다. 법의는 통견(通肩)으로 목둘레를 감고 있는데 가슴이 드러나 보이지 않으며, 몸 가운데로 둥근 옷주름이 늘어져 결가부좌한 다리 위를 덮고 있다. 대좌는 4각형으로 앞면의 양쪽에 사자가 부조되어 있는 사자좌(獅子座)이다.
이러한 조각양식은 중국불상 중에서도 이른 예에 속하는 4세기경에 북방 5호16국시대나 북위 초기에 인도 간다라 불좌상을 수용하여 유행한 불상들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따라서 중국의 불상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지만 우리나라 불교수용 초기에 복제(複製)된 상(像)일 가능성도 있다. 이와 같은 선정인의 불좌상은 이후 신라출토의 금동불좌상이나 군수리출토의 납석제불좌상 등에서도 볼 수 있어 우리나라 불교조각사에서 초기에 유행한 불상형식임을 알 수 있다.
" . . . 침류왕에 의해 공전되기 전에 백제에는 이미 불교가 상당한 정도로 전파되어 있었다고 추단할 수 있다. 이러한 물증으로 한성시대의 백제 영역이던 한강변 뚝섬에서 발견된 금동불좌상을 들 수 있다. 이 금동상과 같은 건무 4년(338)이란 글자가 명기된 중국 북위시대의 불상 양식으로서 고구려로부터 불교가 유입된 결과라고 짐작된다. 불교문화 유산인 불상의 주조나 봉안 사실은 공전 이전에 벌써 민간에서 불교가 유포되고 있었으며, 그에 따라 불교문화를 수용했다는 의미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 . ." - 한겨레, 2004-11-01(정수일교수)
<건무 4년명 선정인불좌상>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명문으로 후조(後趙)의 건무 4년명(建武 四年銘, 338년)
" . . . 중국에도 불교가 들어온 지 200여 년이 지나면서부터는 불교를 본격적으로 수용하려는 움직임이 크게 일어난다. 400년 치세이념이던 유교가 말폐를 노정하여 더 이상 그 역할을 담당할 수 없는데다 이를 대치할 만한 새로운 이념이 나타나지 않아 전에 없던 사상적 공백기를 맞이한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위에 야만족이라고 무시하던 북방의 호족(胡族)에게 무력으로 유린되어 참담한 굴욕을 감내하지 않으면 안 되는 비참한 현실에서 심리적 위안을 받을 수 있는 귀의처가 절대로 필요하였다는 시대적 여건도 크게 작용하였던 듯하다. 이런 때를 맞이하여 불도징(佛圖澄, 232~348년) 같은 대전도승이 후조(後趙) 황제 석호(石虎)와 같은 5호(五胡) 제왕들의 절대적인 신봉을 받아 불교를 중국화하는 일에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인 점도 불교 수용을 더욱 신속히 이루어내는데 한몫했다. 불도징은 종래에 금지되었던 중국인의 출가를 허용하게 하여 문도(門徒) 1만인을 양성하고 손수 893곳의 절을 건립하여 중국불교 교단 확립의 기틀을 다져 놓았다. 그를 뒤이은 중국인 수제자 석도안(釋道安, 314~385년)은 불경 원의(原意)에 충실한 주석을 가하여 원뜻을 제대로 파악하게 함으로써 격의불교를 탈피하는 작업을 서두르는 한편, 교단의 중국화를 꾀하여 이를 성공적으로 이루어낸다.
승려의 법성(法姓)을 석씨(釋氏)로 통일하고 의제(衣制)와 법계(法階)를 정하였으며 율장(律藏)을 토대로 승단생활의 규칙을 확정하였던 것이다. 불교 경전의 정확한 번역을 서두른다.
따라서 불상도 당연히 이런 중국화 운동에 발맞추게 되었던 것이니 후조(後趙) 건무(建武) 4년(338)에 조성된 <건무4년명 선정불좌상(禪定佛坐像)>과 같은 황인종 용모의 불상이 이를 증명해 준다. 이제 법수가 중국대륙에 충만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 법수는 다시 동토(東土)인 우리나라로 흘러 넘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에 도안(道安)에게 깊이 귀의하고 있던 전진(前秦) 황제 부견(符堅, 338~385년)이 소수림왕 2년(372) 고구려에 전도승 순도(順道)와 불상 및 불경을 보냄으로써 공식적으로 불교를 전해준다. 그리고 뒤이어 동왕(同王) 4년에는 아도(阿道)가 다시 왔다 하는데 고구려에서는 이들을 위해 동왕 5년에 각각 성문사(省門寺)와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지어 살게 하니 이것이 우리나라 불교 전파의 시초라 한다. 따라서 이들은 모두 도안(道安)의 명령을 받고 해동전도(海東傳道)의 큰 책임을 수행하고자 온 전도승이었므로 둘 다 도안(道安)의 제자였다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이들이 가져온 불상은 당시 중국에서 흔히 만들어지고 있던 양식화된 간다라불상 형태의 전통적인 것이거나 중국화된 신형일 수 있겠는데, 아무래도 처음 전해주는 불교 개척지에 신형을 보내는 모험은 하지 않았을 터이니 간다라식의 구형(舊形)이었으리라 생각된다. 이로써 우리나라에 처음 전래된 불상은 중국에서 양식화되었던 간다라식 불상이었고, 우리는 그것을 조본(祖本)으로 하여 이후에 불상을 조성하였을 개연성이 매우 높아진다. 이를 뒷받침해주는 것이 바로 <뚝섬 출토 선정불좌상>이다. 이것이 바로 그런 형태의 불상이기 때문이다. 서울 지역이 당시 백제의 수도권이었고 백제에도 침류왕 원년(384)에 동진(東晋)으로부터 마라난타(摩羅難陀)가 들어와 불교를 전하였으며 다음해에는 한산(漢山)에 절을 짓고 승려 10인을 출가시켰다 하였으니 혹시 이 불상이 이들과 관련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뒷날 장수왕(413~491년)이 이곳을 점령하여 고구려 판도에 넣었으므로(475년) 이 불상이 고구려에서 흘러들어 왔을 개연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어떻든 이 불상은 5호16국 시대에 유행하던 사자좌상(獅子座上)의 선정불 양식을 충실히 계승한 것으로 일찍이 중국제작설이 제기되기도 하였으나, 사자상이 지나치게 양식화되어 본연의 면목을 완전히 상실한 듯한 느낌을 주는 것으로 보아 우리나라 모작으로 보아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 . . " -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 신동아, 1999년 12월호, 최완수의 우리문화 바로보기(고구려가 불교를 받아들인 까닭은?)
불교는 전진으로부터 4세기 후반(372, 고구려 소수림왕 2년) 처음으로 전래되었다. 이때 불상도 전해졌을 것이지만 현재 남아있는 한국의 불상은 6세기 이후의 것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그 이전의 모습은 알 길이 없었는데, 1959년 서울의 뚝섬에서 우연히 발견된 이 금동불은 손가락 마디 크기(4.9㎝)에 지나지않지만, 공백으로 남아있는 한국초기 불교 조각의 사정을 간접적으로나마 엿볼 수 있게 해주는 매우 귀중한 유물이다.
우리나라에서 출토된 가장 오래된 뚝섬출토 금동여래좌상은, 된 것으로 5세기 초나 중엽 경의 중국 북위의 불상 양식과 유사하여 대체로 중국에서 전해진 것으로 생각하는 견해가 강하다. 불교가 전래된 초기 우리나라의 불상 양식은 대체로 뚝섬의 불상처럼 중국식 불상 양식을 모방하거나 그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현존하는 예들은 대부분 6세기 이후의 불상이다.
이 여래상은 양손을 깍지낀 듯 몸 앞에 모으고 네모진 대좌 위에 앉아 깊은 사색에 잠긴 선정인(禪定印)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선정(禪定)이란 일종의 명상을 통하여 도달하게 되는 특수한 정신상태를 말한다.
석가는 선정의 과정을 통해 불교의 진리를 깨달았다. 그러므로 선정은 곧 불교의 가장 본질적인 수도과정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선정인의 여러 좌상은 인도는 물론 중국의 초기불상에서 널리 유행했던 형식이다. 또 불교 경전에는 부처는 사람 중의 사자이므로 부처가 앉는 모든 곳은 사자좌(獅子座)라고 부른다고 했는데, 선정인의 여래좌상에는 이처럼 대좌 좌우에 직접 사자를 새겨 사자좌를 표현한 것이 많다.
이 금동불은 4세기-5세기에 걸쳐 크게 유행했던 중국의 여래상과 모습이 같기 때문에 국내에 수입된 중국불상으로 보기도 하고, 중국불상을 모방하여 한국에서 직접 만든 불상으로 보기도 한다.
문화의 속상상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였을 때, 처음에는 당연히 외국 것을 그대로 모방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금동불을 같은 형식의 중국 금동불과 비교해보면 다음과 같은 점에서 차이가 난다. 첫째, 불상의 크기가 현저히 줄었고 둘째, 중국불상은 속이 빈 이른바 중공식(中空式)주물인 반면에, 이 불상은 속이 찬 통주식(通鑄式)이며, 셋째, 성긴 옷주름과 불분명한 윤곽선 등 세부표현에 초보적인 추상성과 단순화된 부분이 많다. 현재까지 알려진 중국의 초기 선정인 금동불 가운데 이러한 특징을 가진 예가 한 점도 없다.
세부 형식과 기법, 그리고 규모의 단순화는 원형의 모방과 창조화 과정에서 생기는 필연적인 산물이다. 이렇게 본다면 이 금동불은 중국의 선정인 여래좌상을 모방하여 만든 5세기 중엽의 우리나라 금동불일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모방 단계를 거치고 난 뒤에야 비로소 우리의 정서와 미의식에 걸맞는 한국적인 조형감각을 갖춘 불상이 조성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금동불이 한국불상이라면 삼국 가운데 어느 나라에서 제작되었을까? 5세기 중엽 신라에서는 아직 뚜렷한 불교수용의 증거가 나타나지 않으므로 그 범위는 고구려와 백제로 좁힐 수 있다. 선정인의 여래좌상이 특히 고구려를 중심으로 널리 조성되었다는 점과 이 금동불과 동일한 형식의 벽화가 고구려에 남아있다는 점에 비추어 고구려에서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추정할 수 있다.
***** 참고 불교 전래 초기의 불상표현으로는, 옛고구려의 도읍인 지안(輯安)의 장천(長川)1호분 벽화에서 5세기경에 만들어진 불상및 보살상의 표현이 발견되었다.
한반도에서 발견된 금동불상 중에서 가장 오래된 서울 뚝섬출토의 금동여래좌상(金銅如來坐像)은 5세기 전반경 중국 북위(北魏)의 불상으로 추측되고 있어, 5세기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 가는 고구려불상은 아직 알려진 예가 없는 실정이다. 연가 7년 기미년명(延嘉七年巳未年銘) 금동여래입상이다. 이 불상은 명문에 의해 고구려 때 평양의 동사(東寺)에서 만든 천불상(千佛像) 가운데 하나임을 알 수 있고, 연가(延嘉)는 역사기록에 보이지 않는 연호이나 기미년(己未年)은 양식상으로 보아 539년(안원왕 9)에 해당된다. 중국 북위나 동위(東魏) 초기의 불상양식을 본따서 약간 거칠기는 하나 강직한 고구려적 표현감각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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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부처를 그린 드리개(七如來幡)
19세기말 - 20세기초, 비단, 한국불교미술박물관(안양암 소장)
의식에 참여한 죽은 영혼에게 극락왕생의 길을 열어주는 칠여래번이다. 이들은 모두 동일한 양식으로 제작되었는데, 모두 수(壽)를 에워싸고 있는 화문, 희(囍)자문, 박쥐문 등이 수놓아진 붉은색 바탕 위에 글자를 황색으로 표현하였다.
검은색 번두(幡頭) 위에는 오색 다라니주머니를 달았는데, 중앙에 꽃문양을 달아 장식하였다.
번신(幡身)의 좌우에는 오색이 아닌 삼색의 방석매듭을 드리우고 있어 다소 간략해진 형식을 띠고 있다. 반면 가장자리에는 청색바탕 위에 용과 구름무늬가 금색으로 수놓아진 화려한 천을 둘러 화려함을 더하고 있다.
번미(幡尾)에는 연두색 바탕에 분홍색 연꽃이 수놓아져 있어 역시 후기의 번(幡) 양식을 보여준다.
일곱여래(七如來)
(1) 다보여래 - 38×106, 비단 모든 영혼이 탐욕스러운 마음을 버리고 불법을 깨닫게 한다. 南無多寶如來 願諸孤魂 破除慳貪 法財具足(남무다보여래 원제고혼 파제간탐 법재구족)
(2) 보승여래 - 37.5×105.5 모든 영혼이 지옥, 아귀, 축생의 악도(惡道, 나쁜 길)에 빠지지 않게 한다. 南無寶勝如來 願諸孤魂 各捨惡道 隨意超昇(남무보승여래 원제고혼 각사악도 수의초승)
(3) 묘색신여래 - 36.5×105.2 모든 영혼이 추하고 천한 모습을 벗고 온전한 신체와 원만한 상호를 갖게 한다. 南無妙色身如來 願諸孤魂 離醜陋刑 相好圓滿(남무묘색신여래 원제고혼 이추누형 상호원만)
(4) 광박신여래 - 38.7×104 모든 영혼이 윤회해야 하는 몸을 버리고 불법을 깨달을 수 있도록 한다. 南無廣博身如來 願諸孤魂 捨六凡身 悟虛空身(남무광박신여래 원제고혼 사육범신 오허공신)
(5) 이포외여래 - 39.5×104 모든 영혼이 모든 두려움을 버리고 열반의 즐거움을 얻도록 한다. 南無離怖畏如來 願諸孤魂 離諸怖畏 得涅槃樂(남무이포외여래 원제고혼 이제포외 득열반락)
(6) 감로왕여래 - 37.2×106.5 모든 영혼이 언제나 굶주려야 하는(탐욕이 많은 자가 목마름과 배고픔 등 고통으로 가득찬 아귀처럼 음식을 입에 넣으면 돌이나 뜨거운 불덩어리로 변하기 때문에 먹을 수가 없고, 입은 크지만 목구멍이 바늘구멍처럼 작아 아무리 먹어도 배를 채울 수 없는 고통을 겪으며) 형벌을 면하고 부처의 가르침을 깨달아 감로의 맛을 알게 한다.
南無甘露王如來 願諸孤魂 咽喉開通 獲甘露味(남무감로왕여래 원제고혼 인후개통 획감로미)
(7) 아미타여래 - 37.5×105 모든 영혼을 윤회로부터 구제하여 생각에 따라 극락세계에 왕생하도록 한다. 南無阿彌陀如來 願諸孤魂 隨念超生 極樂世界(남무아미타여래 원제고혼 수념초생 극락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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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성제군명성경(關聖帝君明聖經)
1886년, 19.2×29.8×0.8㎝, 1책, 목판본, 서울역사박물관
관우(關羽)를 신격화하는 종교인 관성교(關聖敎)의 경전으로,
표제는 ‘명성경(明聖經)’으로 되어 있으나, 서제(序題)는 ‘관성제군명성경(關聖帝君明聖經)’이며,
내제는 ‘관성제군응험명성경(關聖帝君應驗明聖經)’이다.
조선 후기에 간행된 관성교(關聖敎) 경전을 언해한 책이다.
이러한 이본(異本)들은 당시의 조정에서
임진왜란 이후 민간신앙으로 전래되어오던 관성교를 크게 진흥시키고자 한 정책에 따른 것이다.
현대 활자본을 제외한 목판본들은 대부분 본문은 동일하나 권말, 권두의 첨삭부분에서 약간씩 다르다.
관성교(關聖敎)의 경전은
<삼성훈경(三聖訓經)>, <관성제군오륜경(關聖帝君五倫經)>, <과화존신(過火存神)> 등으로서
충효와 인간의 도리를 주로 내세운 일종의 도가서(道家書)이다.
관성교는 원래 관성제군(關聖帝君)이라고 불리는 관우(關羽)를 신격화하여 모시는 종교로서
이러한 경전은 전도를 목적으로 언해하였다.
권두에 1846년(헌종 12, 도광 26)의 옥청주인(玉淸主人) 순양자(純陽子)의 서(序),
가경 25년(1820, 순조 20) 장추산인(長秋山人)의 항서(降序)에 이어
관우의 세계도(歲界圖), 역조봉호(歷朝封號)가 나오고 본문이 시작된다.
본문은 한문과 언해문으로 되어 있는데, 한글로 한자음이 표기되어 있고, 토가 붙어있으며,
구절마다 순국문의 언해와 주석이 붙어 있다.
권말에는 <두구왕선흠봉관성대제 칙령(斗口王聃欽奉關聖大帝 勅令)>, <명성경주증(明聖經註證)>,
<영험기(靈驗記)>, <구겁신론(救劫新論)> 등이 순한문으로 실려 있다.
<이병근(李秉根)>의 내용을 보면 <응험명성경>에서는 이 책을 저술하게 된 동기를 밝히면서,
옥천사(玉泉寺)에서 써서 인간세상 사람에게 준다는 뜻을 기록했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그리고 이 경문을 염송하는 공덕에 대해
분향하고 맑고 깨끗한 마음으로 독송하면 모든 재앙이 사라지고 복이 온다고 밝혔다.
또한 인간의 행동은 효도와 또는 자손들이 보(報)를 받게 된다고 강조하였다.
<칙령(勅令)>에서는 유가(儒家)의 오상(五常: 仁義禮智信의 다섯 가지 덕)은
도교와 불교의 삼보(三寶: 佛, 法, 僧)와 같은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인간세상의 모든 어려움이나 기쁜 일이 마음에서 생기는 것이므로
仁과 義를 행하면 마음이 안정되고 기쁜 일만 생기는데,
仁은 곧 효제(孝悌)이며, 義는 곧 염절(廉節: 청렴하고 강직한 절개)이라고 하였다.
<영험기>에서는 최병공(崔秉恭)이 이 책 한 부를 초사(抄寫: 일부분만 뽑아서 베낌)하였는데
죽음 직전에 있던 어머니의 병이 쾌유되어 88세의 장수를 누렸다는 이야기와,
위성훈(魏成勳)이 초사한 덕으로 천연두의 위험에서 벗어난 것을 들었다.
<구겁신론>에서는 장봉화(張鳳華)의 경험담으로
관성제군이 몸을 나타내어 돌림병을 제거해준 사실과
현실에서는 믿을 수 없는 신이한 일화들을 들어서 영험한 일을 입증했다.
그밖에 관성제군의 일생 행적과 죽은 뒤 천상의 삼문을 지키게 되었다는 일화도 있다.
이 책 본문의 언해는 과도기 근대 국어의 혼란한 모습을 보이고 있으면서도,
한편 거의 현대국어에 가까운 모습도 보여서 이 시기의 대표적인 어학 자료의 하나가 된다.
국어 표기 면에서는 자립명사들은 연철을 허용하지 않고,
의존명사와 용언의 어간들은 연철되어 있고,
받침으로는 ‘ㄱ, ㄴ, ㄹ, ㅁ, ㅂ, ㅅ, ㅇ’의 7자가 쓰이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은 관성교 연구의 중요한 자료인 동시에,
또한 19세기 후반기 국어학 연구의 귀중한 자료이기도 하다.
국립중앙도서관과 규장각도서에 있다.
*** 관우(關羽)의 공식적인 봉호(封號)
관우의 고향인 해주(解州)에 세워진 무묘(武廟)를 비롯해 중국의 전국 각지에 세워진 무묘(武廟)는
그 규모도 웅장할 뿐만 아니라 전당의 내부도 화려하게 꾸며져 있다.
수당대부터 돌풍처럼 일기 시작한 관우묘에 대한 숭배 풍조는
관우의 관작을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승격시켜 결국 지존의 자리까지 올려놓고야 말았다.
건안 5년(200), 조조가 유비를 공격하자 유비는 패주하여 원소(袁紹)에게 몸을 의지하였다.
이때 유비의 아내와 함께 있던 관우는 하비에서 조조에게 포위되어 항복하였으며,
조조는 그를 편장군(偏將軍)에 임명하고 극진히 예우하였다.
그해 4월, 조조가 원소와 백마(白馬: 지금의 하남성 활현 동쪽)에서 일전을 벌였는데
관우는 용감하게 적진을 뚫고 돌진하여 원소의 대장 안량(顔良)의 목을 베었다.
이 전공으로 관우는 한수정후(漢壽亭侯)에 책봉되었다
건안 24년(219) 12월 관우는 맥성에서 패하여
임저장향(臨沮章鄕: 지금의 호북성 안원현<安遠縣> 북쪽)으로 퇴각하다가
손권의 복병에게 사로잡혀 아들 관평(關平)과 함께 피살되었다. 이때 관우의 나이 59세였다.
관우가 죽은지 41년 후 촉(蜀) 경요(景耀) 3년(260, 관우 탄신 100주년)에
후주 유선(劉禪)은 관우의 시호를 장목후(壯繆侯)로 추증했다.
그러나 남북조 시기부터 청대 말기에 이르기까지 관우는 역대 제왕들의 추존을 끊임없이 받아,
"후(侯)에서 왕(王), 왕에서 제(帝), 제에서 성(聖), 성에서 천(天)"으로 올라갔다.
그의 명성은 중국은 물론 해외에까지 널리 알려져
중국 역사상 가장 존경받고 신성시 되는 우상의 한 사람이 되었으며,
마침내는 공자와 함께 "문무이성(文武二聖)"으로 병칭되었다.
관우에게 왕(王)이라는 작위를 붙이기 시작한 것은 송대부터이다.
휘종(徽宗)은 숭녕(崇寧) 원년(1102)에 관우의 시호를 '충혜공(忠惠公)' 으로 추증하고
다시 계속하여 숭녕 3년(1104)에는 '숭녕진군(崇寧眞君)',
대관(大觀) 2년(1108)에는 '소열무안왕(昭烈武安王)',
선화(宣和) 5년(1123)에는 '의용무안왕(義勇武安王)' 으로 추존했다.
남송의 창시자 고종(高宗)도 건염(建炎) 2년(1128)에 관우를 '장목의용무안왕(壯繆義勇武安王)' 에
봉했고, 그의 아들 효종(孝宗)은 순희(淳熙) 14년(1187)에
관우를 '장목의용무안영제왕(壯繆義勇武安英濟王)' 에 봉했다.
원나라 문종(文宗)은 천력(天曆) 원년(1328)에 남송시대에 관우에게 내린 시호에서
'장목(壯繆)'을 없애고 대신 '현령(顯靈)'으로 바꾸어,
'현령의용무안영제왕(顯靈勇武安英濟王)' 이라 하였다.
관우에게 제(帝)라는 시호를 붙이기 시작한 것은 명대부터이다.
주원장(朱元璋)이 죽은 후 혜제(惠帝)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혜제 건문(建文) 3년(1399)에 주체(朱棣)가 정변을 일으켜 왕위를 찬탈했는데,
그가 바로 성조(成祖: 永樂皇帝)이다.
성조는 자신의 행동을 관우의 영험한 도움을 받은 것이라고 말했다.
즉 그가 황제가 된 것이 "하늘의 뜻"이라는 말이다.
황제가 관우를 신이라 한 이상, 신하와 백성들도 당연히 관우를 신으로 숭상하였다.
명대 중후기의 정덕(正德) 4년(1509), 조정에서는 조서를 내려
전국에 있던 관묘(關廟 : 관우 사당)의 이름을 모두 '충무묘(忠武廟)'로 고치게 했다.
만력(萬曆) 22년(1594), 도사 장통원(張通元)의 요청으로
신종(神宗: 萬曆皇帝)은 관우를 제(帝)에 봉하고, 관묘의 이름을 '충무'에서 '영렬(英烈)'로 바꾸었다.
만력 42년(1614) 10월,
신종은 관우를 '삼계복마대신위원진천존관성제군(三界伏魔大神威遠震天尊關聖帝君)' 에 봉했다.
청대의 통치자들도 관우를 매우 숭배했다.
세조(世祖: 順治皇帝)는 순치 원년(1644)에 관우를 '충의신무관성대제(忠義神武關聖大帝)' 에 봉했고,
건륭(乾隆) 이후 가경(嘉慶) · 도광(道光) 두 왕조를 거치면서 관우의 시호를
'인용위현호국보민정성수정익찬선덕충의신무관성대제
(仁勇威顯護國保民精誠綏靖翊贊宣德忠義神武關聖大帝)' 라고 하여 그에 대한 숭배가 극에 달했다.
문종(文宗: 咸豊皇帝)은 함풍 5년(1855)에
관우의 선조를 '광소왕(光昭王)', 조부를 '유창왕(裕昌王)', 부친을 '성충왕(成忠王)'에 추증하고,
관우의 신위를 황궁에 모셔두었다.
관우는 한수정후(漢壽亭侯)에서 출발해 충혜공(忠惠公)을 거쳐 소무안왕(昭武安王)이 된 후
북송의 휘종때에 와서는 숭녕진군(崇寧眞君)에 봉해졌다.
이어 다시 명청대에 들어와 명의 만력 연간에는 관제(關帝) 또는 관성제군(關聖帝君)이 되었다.
청대에 들어와서는 관우에 대한 존호가 절정에 달하게 되었다.
충의ㆍ신무ㆍ영우ㆍ인용ㆍ위현ㆍ호국ㆍ보민ㆍ정성ㆍ수정ㆍ익찬ㆍ선덕ㆍ관성대제가
(忠義ㆍ神武ㆍ靈佑ㆍ仁勇ㆍ威顯ㆍ護國ㆍ保民ㆍ精誠ㆍ綏靖ㆍ翊贊ㆍ宣德ㆍ關聖大帝)
그의 공식 봉호이다.
임진왜란과 더불어 조선에 온 관우 동묘 - 보물 142호에 부쳐
혹시 서울 종로구 숭인동 123-1번지에 가보셨소. 거기 보물 142호인 동묘(東廟), 곧 동관왕묘(東關王廟)가 있소. 관제묘(關帝廟)라고도 하오.
관우현령(關羽顯靈)의 도움으로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끌었다 하여 명나라 황제 신종(神宗)이 1599년 현액(縣額)과 비용을 보내와 우리 조정에서 두 해 만인 선조 34년(1601)에 완성한 것.
선조실록에는 건축비용, 군사동원 등에 관한 기사와 더불어 조선왕이 과연 여기 참례할 것인가의 논란도 적혀 있고, 그 뒤 영조, 정조 등 역대 왕도 참례한 것으로 되어 있소.
우리 것만 보아온 사람에겐 건축은 썩 낯서오. 정면 5간, 측면 4간의 정자형(丁字形) 건물이며 검은 벽돌로 두텁게 쌓아올렸소. 정식 명칭은 '현령소덕무안왕묘(顯靈昭德武安王廟)'. 좌우 현판은 사신 정룡(程龍)의 글씨 ‘만고충심(万古忠心)’ ‘천추의기(千秋義氣)’로 뚜렷하오. 목조로 된 관우상과 그 옆엔 아들 관평 등 부하 4인이 모셔져 있소.
또다른 명칭도 입구에 붙어 있소. 현령소덕의열무안성제묘(顯靈昭德義列武安聖帝廟)가 그것. 광무 6년(1902)에 우리나라에서 다시 붙인 명칭이오. 왕묘에서 ‘성제묘’로 격상되어 있지 않겠소.
이 사당 기둥과 추녀엔 명나라 흠차사신이라든가 청나라 제독 등 참배객의 현판들이 여럿 걸려 있소. 대명(大明) 만력(萬曆) 28년 경자 9월 길일(吉日)에 쓴 ‘충의관천(忠義貫天)’ ‘현성보번(顯聖保藩)’도 인상적이오. 관우의 현령으로 제후의 나라(조선)를 구했다는 것.
이 근처엔 고물상과 더불어 고서점도 있어 헤매다 지치면 이 묘에 들르곤 했소. 갈 데 없는 노인들, 무숙자의 보따리와 소주병이 뒹굴고 있기도 했소. 서울 장안 무속인들이 제물을 차려놓고 참배하는 것도 자주 목격했소. 담 밖의 아비규환과는 달리 조용하기 이를 데 없소. 21세기 서울 한복판의 이런 공간이란 대체 무엇일까. 이런 기묘한 물음을 물리치기 어려웠소.
제법 오래 전 산동성 곡부(曲阜)에 간 적 있소. 공자의 사당이 있는 기묘한 형태의 공자 무덤 앞 비석을 보았소. 1443년에 만들어졌다는 이 대리석 비석 명문은 대성지성문선왕묘(大成至聖文宣王廟). 가까이 가자 깨진 비석의 이음새가 뚜렷하지 않겠는가. 뿐인가. 왕(王)자도 간(干)자 모양으로 되었고 담벼락이 그 밑을 가리고 있지 않겠는가.
공자가 문선왕의 시호를 얻은 것은 당나라 현종대로 되어 있소. 한족이든 이민족이든 역대 황제들은 과연 공자를 어떻게 대해야 했을까. 아무리 성인 공자라도 황제급으로 칭할 수는 없었을 터. 사당의 용트림 황색 기둥도 진짜 황제 앞에서는 붉은 천으로 가려야 했을 터.
이에 견줄 때 관우는 어떠했던가. 명나라 성화(1465-87) 무렵 관제대제(關帝大帝)로, 15세기 청나라 순치 때는 충의신무관성대제(忠義神武關聖大帝)로 봉해져 한민족이든 이민족이든 국가 수호의 최고 군신으로 받들어졌소.
왕(제후)의 위치를 훌쩍 뛰어넘어 제(帝)의 자리에 군림하는 이 사태는 무엇을 가리킴일까. 중국의 역사나 사상사를 공부한 바도, 민간신앙 도교를 살펴본 바도 없는 나 같은 사람이 이 물음에 기껏 마주칠 수 있는 데는 명말 나관중이 쓴, 귀신 붙은 책으로 소문난 <삼국지연의> 정도. 진수의 <삼국지>에 바탕을 둔 이 얘기책은 그러니까 요즘식으로 하면 팩션(Fact+Fiction)인 셈.
기원전 2세기 황건적의 난에서 시작, 약 80년간 위 · 촉 · 오 삼국의 쟁패를 다룬 이 책에는 수백 명의 영웅호걸이 부침하지만 그 중 제일 영웅은 과연 누구일까. 너무 원만한 유비가 위선자로, 신출귀몰하는 제갈량이 요괴스럽고, 임기응변의 웅숭깊은 조조가 간웅으로 보이기 쉽지만 단 하나 우뚝한 인물이 있소. 신장 9척 수염 길이 2척 붉은 봉의 눈, 누에의 눈썹, 익은 대춧빛 얼굴, 종소리 같은 목소리의 사내, 긴 일월도에 적토마를 탄 사내. 화룡도에서 보여준 기품과 의리의 사내. 그 이름은 운장(雲長) 관우.
내가 읽은 <삼국지연의>는 관우 죽음 이전과 이후로 양분되오. <춘추(春秋)>를 읽으며 적토마를 탄 관우가 전반부를 휩쓸고 있다면, 후반부는 현성(顯聖)한 관우가 휩쓸고 있소. 옥천산에 나타났고, 조조를 죽음에 이르게 했고, 아들 관흥으로 하여금 적토마와 일월도를 되찾게 했고 마침내 유학층도 민중도 함께 숭배하는 관성대제에 이르렀던 것.
종로구 숭인동 동묘 뜰의 벤치에 앉아 혼자 멋대로 중얼거렸소. 그토록 떼를 지어 이 책을 좋아하는 한국 독자들이 정작 그네 나라 서울 한복판에 있는 이 관왕묘 앞에 선다면 우리 유산인가 남의 유산인가를 따지기 전에 대체 어떤 표정을 지을까, 라고. - 김윤식, 문학평론가 · 명지대 석좌교수, 2005-06-02, ⓒ 한겨레, 책ㆍ지성 [문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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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화 중에는 민간신앙과 결합하여 주술적인 의미가 부여된 것들이 상당수 있는데,
세화(歲畵)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세화(歲畵)는 조선시대에 새해를 맞이하여
궁중은 물론이고 사대부들의 저택과 일반 서민의 집에 귀신을 쫓거나[축귀(逐鬼)]
복을 구하는[구복(求福)] 의미로 그려 대문에 건 그림으로 대표적인 벽사 그림이다.
벽사 상징의 대표적인 민화로 호랑이와 용을 들 수 있으며,
이 외에도 해태도 · 신구도(神狗圖) · 사신도(四神圖) · 사령도(四靈圖) · 천계도(天鷄圖) ·
치우도(蚩尤圖) · 처용도(處容圖) · 종규도 등이 대표적인 벽사용 민화로 꼽힌다.
귀신잡는 개(神狗圖) 전형적인 토종개의 모습에 목에 검은 방울을 달고, 벽사용 네눈박이 개의 모습으로 그린다. 칠흙같이 어두운 밤, 비바람이 몰아쳐도
멀리서 오는 도둑이나 귀신의 소리까지도 듣고 보아야 하므로,
벽사용 개나 호랑이는 두 눈으로는 모자라 네 눈, 네 귀를 가진 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했다. |
개가 충성스런 동물일 뿐 아니라
집안의 사악함을 쫓아내고
집을 지켜 주는 수호동물로 상징되었다.
관습에 따라 귀신 쫓고 복을 빌기 위해
개를 그려 문배도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민속에서는 개가 사자(死者)의 영을 본다는 말도 있다.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개가 저승사자를 알아보고 짖어서 쫓아내기도 한다고 한다.
또 나쁜 악귀가 들어오면 개가 미리 알아보고 쫓아내는데, 이때는 하얀 개가 더 영험하다는 말이 있어
민속에서는 이때는 흰개를 선호하기도 한다.
어쨌든 개는 신령스러운 능력을 가진 영험한 동물이라고 믿었던 것 같다.
우리 나라의 세시풍속을 기록한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매년 정초가 되면 해태 · 개 · 닭 · 호랑이를 그려 붙였다는 기록이 있다.
해태는 화재를 막기 위해 부엌문,
개는 도둑을 지키기 위해 광문,
닭은 어둠을 밝히고 잡귀를 쫓기 위해 중문,
호랑이는 대문에서 각각 악귀가 침범하지 못하도록 하는 기능을 가진 벽사용 그림이다.
때로는 네 가지 동물을 그려서 붙이기도 하고 목판으로 제작하여 사용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벽사용 그림들이 대중적인 민속신앙의 한 방편으로 사용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2. 벽사그림의 종류
닭 그림은 전통적으로 호랑이 그림과 함께 정초에 벽사초복( 邪招福)의 뜻을 담아 대문이나 집안에 붙였던 세화(歲畵)의 일종으로 직접 그리거나 목판으로 찍어서 사용하였다. 닭은 새벽을 알리는 길조로 대접을 받아왔으며 12지(十二支) 동물 가운데 유일하게 날개가 달린 짐승이라 지상과 하늘을 연결하는 심부름꾼으로 생각되어졌다. 수탉이 울면 동이 트고 동이 트면 광명을 두려워하는 잡귀가 모두 도망친다는 뜻에서 벽사의 뜻이 담겨져 있는 가금(家禽)으로서도 소중히 여겼다. 또한, 수탉의 붉은 볏은 그 이름이나 생김새에 있어서 벼슬과 통하므로 벼슬을 얻는다는 뜻이 있고 암탉은 매일 알을 낳으므로 자손의 번창을 상징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닭 그림 가운데는 맨드라미가 함께 그려지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닭과 맨드라미가 서로 어울려 '관상가관(冠上加冠)' 이라는 길상적 문구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관상가관이란 '관 위에 또 관을 더한다'는 뜻으로 입신출세의 최고 경지에 이름을 말한다. 이밖에 수탉이 하늘을 보고 크게 우는 모습과 모란을 함께 그려 부귀공명을 뜻하는 벽사그림 등이 있다. 공계(公鷄, 수탉)의 ‘공(公)’과 운다는 뜻의 ‘명(鳴)’은 '공명(功名)’과 독음이 같아 “공을 세워 이름을 널리 알린다”는 뜻으로 쓰이며 여기다 모란의 부귀를 합치면 부귀공명이 되기 때문이다.
호축삼재도(虎逐三災圖)
벽사의 뜻으로 그려지는 호랑이 그림 중에 대나무 숲을 배경(竹林出虎)으로 그려지는 것이 있다. 이 그림 속의 호랑이는 대개 포효하는 모습이거나 정면을 응시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악귀를 향해 정면으로 도전하여 물리치겠다는 의지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배경이 되는 대나무도 벽사의 의미를 지니는데 대나무가 타면서 터지는 소리에 귀신이 놀라 달아났다는 이야기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처럼 대나무 숲을 배경으로 한 호랑이 그림을 '호랑이는 죽을 때가 되어서만이 대나무 숲을 찾는다'는 통설이 아닌, 벽사의 의미로 해석되어진다. - 가회박물관 홈페이지에서 부적(符籍) 조선 말기, 4.3 × 4.3 × 3.5㎝, 서울역사박물관 부적은 재앙을 방지하거나 복을 부르기 위하여 그림, 글씨, 기호 등을 그린 종이를 말한다. 방형의 부적을 찍는 도장으로써 목제로 제작되었다. 기하학적인 문양을 새겨놓았으며, 상단부에는 '丁'자를 새겼다. 붉은 인주를 찍은 흔적이 남아 있다. 부적패(符籍牌) 조선, 너비 2.5㎝, 길이 8.6㎝, 두께 0.9㎝, 끈길이 6㎝, 서울역사박물관 재앙을 방지하거나 복을 부르기 위하여 그림, 글씨, 기호 등을 종이에 찍어내는 판이다. 액막이를 하는 부적에 찍기 위한 사각형의 나무패로 만들어졌다. 표면에는 물고기나 호랑이, 박쥐 등 동물문양이나 변형문자 등을 새겨놓았고, 큰 것은 불교와 관계되는 주문을 한글로 새기기도 하였다. 이러한 목판으로 부적을 찍어 집에 붙여 '삼재불입지지(三災不入之地)'임을 표시했다. 대개 찍어내는 판을 '부적판'이라 하는데 전시된 이 유물처럼 작게 만들어 몸에 차고 다니거나 걸어두기도 하여 '부적패'라 할 수 있다. 이 부적패는 사각형 모양으로 위쪽은 각이 지게 깎았으며, 앞면과 뒷면에는 변형문자와 문양 등을 음각하고 글자면 위를 약하게 불로 그을려 놓았다. 위쪽에는 구멍을 뚫어 끈을 달았다. 부적판(符籍板) 조선, 너비 3.4㎝, 길이 29.3㎝, 두께 1.5㎝, 서울역사박물관 재앙을 방지하거나 복을 부르기 위하여 그림, 글씨, 기호 등을 종이에 찍어내는 판이다. 이 부적판은 액막이를 하는 부적에 찍기 위한 목판으로 길이가 긴 직사각형으로 표면에 옻칠을 하였다. 앞면과 뒷면에는 변형문자가, 옆면에는 '광서원년(光緖元年)'이 음각되어 있고, 한쪽 끝에는 구멍을 뚫어 끈을 달았다.
부 적 1. 부적이란 조선시대 우리 조상들의 가장 큰 바램은 이차공덕(二次功德)과 왕생극락(往生極樂)이었다. 즉, 살아서 공덕을 쌓아 사후 극락세계에 가기를 염원했고, 수복강령(壽福康寧)·부귀다남(富貴多男) 즉 오래 살고 자식을 많이 낳고 복을 많이 받아 행복해지기를 기원하였다. 때문에 부적의 사용이 일반화되는데 전통 의학서인 허준의 『동의보감(東醫寶鑑)』에 아기를 빨리 낳을 수 있도록 하는 최생부(催生符)가 실려 있고,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궁중이나 사대부 집안에 정월 초하룻날, 세화(歲畵)를 벽에 걸거나 문을 지키는 신장을 그린 문배도(門排圖)를 그려 붙여 액(厄)이 물러가기를 빌었다고 하여 여러 형태의 주술행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러한 부적은 그냥 그리거나 찍는다고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청정한 마음으로 주문 같은 일정한 의식을 행한 후에야 그 주술적 기능을 다 한다고 믿었다. 때문에 조상들은 목욕을 하고 제물을 마련하는 등 지극한 정성을 다하여 부적을 제작하였다. 3. 부적의 종류 부적의 내용을 살펴보면 남성은 학문을 이루어 과거에 급제하여 고귀한 신분이 되는데 중점을 두었고 여성은 부부가 화합하여 가정의 평화를 이루고 아들을 낳아 잘 기르기를 바랬다. 그 다음이 물질적 풍요와 사후 세계를 걱정하는 내용으로 일상적 삶에서 추구되는 본질적인 것들이다. 보다 나은 생활을 영위하고 참된 인간으로써 삼강오륜(三綱五倫)을 지키려는 인간의 욕망은 신분의 높낮이와는 무관하게 모든 사람들에게 도덕적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때문에 매년 정초가 되면 수(壽), 복(福)자를 대문이나 기둥에 거꾸로 써 붙이거나 길상부적(吉祥符籍)을 찍어 나누어 가졌다는 기록이 '동국세시기'에도 잘 나타나 있다. 이처럼 장수의 비결을 담은 도교적 영향과 사후세계를 연결하는 불교적 영향 등이 민간신앙과 결합되어 형성된 소원성취 부적류는 인간에게 교훈적, 계몽적, 암시적 기능을 부여하는 주력(呪力)을 지니고 있다. 액막이 부적은 글씨나 추상적 형상, 상상의 동물 문양 등을 붉은 경명주사(鏡明朱沙)로 쓰거나 목판에 새겨 찍어내어 출입구의 기둥이나 몸속에 숨기고 다니면 액운을 예방할 수 있다고 믿었다. 사람에게 삼재가 찾아오는 액년(厄年)은 십이지로 따지는데 사(巳)·유(酉)·축(丑)이 든 해에 태어난 사람은 해(亥)·자(子)·축(丑)이 되는 해에 '들삼재'가 들고, 신(申)· 자(子)·진(辰)이 든 해에 태어난 사람은 인(寅)·묘(卯)·진(辰)이 되는 해에 삼재가 들며, 해(亥)·묘(卯)·미(未)의 해에 출생한 사람은 사(巳)·오(午)·미(未)의 해에 삼재가 들고, 인(寅)·오(午)·술(戌)의 해에 태어난 사람은 신(申)·유(酉)·술(戌)이 되는 해에 삼재가 들어온다. 한편 생활 속에서도 삼재팔난(三災八難)이란 말을 많이 사용하는데, 이는 여덟 가지 재난으로 배고픔, 목마름, 추위, 더위, 물, 불, 칼, 병난을 말한다. 사람들은 삼재 액운이 든 해에 이를 막기 위해 문자화된 부적이나 머리 셋 달린 매를 경명주사로 그리거나 목판으로 찍어내어 출입하는 방문 위에 붙였다. 일상생활에 필요한 부적을 망라하여 종합적으로 수록하므로 부적판의 이름도 만사형통부, 백사대길부라 이름한 것도 있다. 이 역시 불교의 대승적 차원에서 중생들이 기원하는 모든 바램을 폭넓게 수용하려는 것으로 풀이된다. 사원에서 사용되는 대형화된 부적목판들은 대체로 먹이나 붉은 색을 사용하고 있는데 값비싼 경명주사로 찍어내기가 힘들어 수비된 붉은 황토에다 치자물을 섞어 사용하기도 했다. 부적 목판 가운데 가장 대형화된 것이 관(棺)을 덮었던 탑다라니 부적인데 크게는 길이가 2m가 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불교 전통의 부적을 내용별로 나누면 대략 다음과 같다. : 도를 구하는 사람이 여러 가지 장애와 번뇌가 일어날 때 이 부적을 써서 몸에 지니면 장애가 없어지고 좋은 스승을 만나 공부할 수 있게 된다고 한다. ② 당득견불부(當得見佛符) : 이 부적을 가지고 꾸준히 노력하면 부처님을 뵐 수 있다 고 한다. ③ 염불부(念佛符) : 업은 자업자득이지만 원행(願行)이 지극하면 남을 위해 업보를 바꾸어놓을 수도 있으니 이 염불부를 지니고 기도하면 그에게 좋은 업이 돌아간다고 한다. 일명 학인(學人)염불부라고도 한다. ④ 왕생정토부(往生淨土符) : 이는 죽은 사람의 왕생극락을 위해서나 장차 죽음에 임한 사람이 가지는 부적이다. 설혹 죄가 있다고 해도 이 부적을 지니고 『정토삼부경』 이나『지장경』을 읽으며 "아미타불"을 염하면 극락세계에 탄생한다는 것이다. ⑤ 금강부(金剛符) : 이것은 금강저(金剛杵)를 부적화한 것으로 이 부적을 지니면 일체 의 사(邪)가 없어지고 건강과 장수가 돌아와 행복하게 살 수 있다. ⑥ 준제부(準提符) : 이 부적은 불교의 준제진언을 부적화한 것으로, 복과 수명이 산과 바다와 같아진다고 한다. ⑦ 관음부(觀音符) : 관세음보살의 그림이나 조각을 몸에 지니거나 명호를 써 가지면 모든 악귀가 침범치 못하고 착한 신들이 수호해 준다고 한다. 일명 악귀불침부라고도 한다. 이외에도 불교부적은 수없이 많아서 팔부신장의 옹호를 받을 수 있는 팔부신장부, 노사나불부 등이 있다. 그 특징은 남을 해할 수 없다는 점과 구도 정진의 효과를 갖고 있다. 재료는 주사 외에 먹으로도 같은 효과를 가진다고 믿는다. 또한 금이나 동(銅)에 새겨도 좋으며 꼭 주문을 108번씩 외우거나 경전을 독송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의 부적은 인생의 번뇌와 괴로움 생사의 공포를 보리의 열반으로 이끄는 또 하나의 법륜(法輪)이기도 한 것이다. - 부적의 여러 가지 - 호랑이 수염(호수, 虎鬚) 호랑이가 인간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주술적인 의미를 지니거나 신앙의 대상이었을 가능성은 상당히 오래전부터이다. 경남 울주군 반구대의 선사시대 암각화와 고구려 고분벽화의 사신도에 청룡(靑龍), 주작(朱雀), 현무(玄武)와 함께 나오는 ‘백호’ 외에도 벽화나 석상은 물론 회화나 공예품, 자수에 이르기까지 호랑이는 상당히 오래전부터 폭넓게 다루어져 왔다. 뿐만 아니라 호랑이의 수염(鬚), 발톱(爪), 뼈(骨), 털가죽(皮) 등도 매우 큰 위력을 발휘하는 것으로 믿었기 때문에 약재로 사용되거나 벽사용 생활용구로도 사용되었다. 그 가운데 호랑이 이빨은 사람 몸에 악귀가 침범하지 못하도록 지니고 다녔던 부적의 일종이다.
호랑이 발톱(虎爪) 집안에 복숭아나무를 심으면 귀신이 침범하지 못한다 하여 후미진 뒷뜰이나 사립문 밖 골목길에 오래된 복숭아나무를 볼 수 있다. 복숭아나무는 오목(五木)의 정(精)으로 사기압복(邪氣壓伏) 백귀불침(百鬼不侵)의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 이유는 복숭아나무가 춘양의 정(精)이기 때문에 늦봄 잎이 돋아나기 전에 화사한 꽃을 피워 다른 어떤 나무보다도 생기가 충만해 있고 구마(驅魔)의 힘도 매우 왕성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특히 동남향으로 곧게 뻗은 가지, 도동지(桃東枝)는 나무의 모든 양기(陽氣)를 가장 많이 받기 때문에 음(陰)에 해당되는 귀신이 제일 무서워하는 나무로 여겨졌다. 때문에 부적 목판에 쓰이는 나무로는 복숭아나무, 대추나무가 주로 쓰였고 이밖에도 박달나무, 엄나무, 느티나무, 은행나무, 피나무, 소나무, 회양목, 단풍나무, 감나무 등 다양한 소재로 부적 목판이 만들어졌다. 나무의 선택은 대체로 부적판의 크기에 따라 결정되는데 가로 40㎝ 세로50㎝ 정도 이상 크기에서는 소나무, 피나무, 은행나무, 회양목, 단풍나무, 감나무 등의 다양한 소재로 만들어진 부적목판이 남아있다. 크기가 적은 판일수록 단단하고 야무진 목재가 사용되어 복숭아, 살구, 대추나무 등으로 만든 부적목판이 많다. '부적방망이', 또는 '대추나무 방망이'란 말이 있는데 이는 대추나무가 단단하다는 표현이기도 하지만 부적 목판 가운데 역시 귀한 나무는 벼락맞은 대추나무(霹棗木)를 으뜸으로 치기 때문이다. 단단하고 결이 고르게 자란 대추나무는 떡살, 도장, 봉인, 능화판, 화전지판 등에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으나 벽조목은 매우 희귀한 목재로 몸에 지니고만 있어도 잡귀가 침범하지 못한다고 하며, 닭장 속에 넣어두면 닭이 울지 못할 만큼 기(氣)가 충전된 신비한 힘이 있다고 한다. 부적 목판으로 효험이 있는 나무는 역시 복숭아나무, 벽조목, 엄나무, 뽕나무 등인데 조각에 사용된 목재의 선택은 원통형을 4등분하여 다듬어 낸 심재(深材)가 기(氣)를 많이 받은 나무라고 한다. 부적 목판 새김질은 원하는 초본을 반드시 한지에 그려 다듬어진 나무에 정반대의 방향으로 붙인 다음 들기름칠을 하면 뒤집어진 형상의 문양이 나타난다. 새김질을 시작하는 자세는 부적을 쓸 때와 같이 경건한 마음으로 진행되는데 쓰이는 기법은 양각이나 음각적으로 이루어진다. 새김질의 방법은 서각을 할 때나 판화를 할 때 사용하는 기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칼의 종류는 끌, 창칼, 평칼, 삼각칼, 둥근칼 등이 기본으로 적용된다. 완성된 부적목판은 부정을 방지하도록 수비된 황토물이나 경명주사에 담근 후 효험이 있기를 기원하는 간단한 예를 갖추고 사용된다.
● 닭 그림
● 호랑이 그림
호랑이는 원래 병귀(病鬼)나 사귀(邪鬼)를 물리치는 힘이 있는 것으로 믿었다.
호축삼재팔난도(虎逐三災八難圖) ⓒ2005 정암 송기영
● 소원성취 부적 (所願成就 符籍)
● 액막이 부적 (厄防止 符籍)
● 삼재부적(三災符籍)
● 불교의 전통적 부적
① 구도부(求道符)
4. 부적판
관우(關羽)장군 / 종이에 채색, 65×110㎝, 가회박물관
중국 삼국지에 등장하는 관우를 모시는 사당이 임진왜란, 정유재란 때 난리를 피하는데 영험이 있다고 전해진 후 크게 유행하게 되었다.
병을 지켜주는 수호신 역할로 단 몇 장의 무신도라도 모시는 곳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장군상 가운데 하나가 관우장군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왕가에서도 남묘(南廟)와 동묘(東廟)에 관운장을 모시게 하고 금 오백냥과 쌀 오십석을 내린 적도 있다. 현재 서울의 동묘를 비롯한 안동, 남원, 강화 등지에 관운장을 모신 사당이 남아 있다.
관운장의 몇 가지 특징은 반드시 의자에 두 다리를 펴고 앉아 있으며, 사납게 찢어진 눈과 긴 수염이 있고 책을 펴들고 있거나 위협적인 청룡도를 들고 있다. 붉은 얼굴에 곤룡포를 입거나 무복을 입었지만 머리의 관은 각기 다르다. 가끔은 적토마와 마부가 배경으로 등장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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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 신 도
1. 무신도의 기원과 역사
무신도의 기원을 정확히 밝히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구한말 개화기 무렵에는 무속이 미신타파라는 이름으로,
근래에 그려진 무속화 중에는
무당을 영험하게 하는 무조신은 가장 종교화적인 부분을 의미하고 있지만,
예를 들어
칠성신(七星神)
칠성신앙은 수명장수, 소원성취, 자녀성장, 평안무사를 비는 일을 담당한다.
도교에서는 북두칠성을 일(日), 월(月), 화(火), 수(水), 목(木), 금(金), 토(土)의 정수로 간주하고
인간의 길흉화복을 주관한다고 믿고 있다.
하늘의 별을 신앙하는 칠성신앙의 기원은 원시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도교·불교·무속 등 여타 종교에서도 숭상하며,
산신과 함께 우리 민족에게는 매우 친근한 신앙이다.
여성 칠성도 있으며 관복차림에 홀을 들고 머리에 별을 이고 있는 것도 있다.
제1칠성(탐랑성군) 제2칠성(거문성군) 제3칠성(록존성군) 제4칠성(문곡성군)
제5성군(염정성군) 제6칠성(무곡성군) 제7칠성(파군성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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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에 조사된 무속화 가운데는
만법통일의 명제 아래 자비석가, 인의공자, 박애기독을 표방하며
세 교주가 나란히 한 장의 무속화 속에 나타나는 것도 있다. 참으로 기이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무속은 타 종교에서는 전혀 상상도 할 수 없는 폭넓은 포용력을 지니고 있으며,
어떤 종교가 들어와도 싸우지 않고 공존 관계를 유지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3. 무신도의 의미와 상징성
4. 무신도의 회화적 성격
무신도는 종교화로서나 민화로서 특성을 고루 지니고 있다.
특히 무신도가 지니고 있는 색채(오방색을 중심으로 한)의 표현은
조형적인 측면에서도 전통문화의 색채 바로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으며,
신성화임에도 불구하고 익살적인 표현이나 과장된 묘사는
우리 회화의 다른 한 성격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무신도의 제작은 대부분이 무당의 주문에 의하여 그려졌다.
무속화의 배경 설정은 무당이 요구한 주문에 의하여 그 유형이 설정되었을 테지만
그리는 사람, 즉 화가에 따라서도 달라지게 되었을 것이다.
무신도는 초에 의하여 그려지거나 실사, 즉 초없이 직접 그리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불교의 탱화나 민화, 자수 등은 초나 본온, 즉 '본'이라고 부르는 밑그림이 전하여지는데 무속화도 같은 경우가 많다.
무속화는 배경에 등장하는 등장인물이나 색채, 지물 등만 다를 뿐, 불화와 별로 다른 점이 없다.
초를 사용하여 무속화를 그리는 경우,
상당한 그림 수업을 받았거나 솜씨가 뛰어난 화가로,
불화를 전문으로 그리는 스님이나 무명의 민화 작가가 이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무신도는 작가의 학력이나 사회 경험, 무속의 이해도에 따라 각기 다른 상상력을 표현하게 된다.
따라서 무신도를 이해하는 데는 굿의 내용과
무경·무가, 전설이나 설화 등을 파악하고 체험해야만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 가회박물관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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