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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사박물관] 서울이 아름답다 - (7) 바라고 소망하건대

Gijuzzang Dream 2008. 5. 10. 07:47

              

 

 

 

 

 

 

 

 <뚝섬출토 금동여래좌상(金銅如來坐像)>

 

 

 

 

 5세기 전반, 높이 4.9㎝, 국립중앙박물관

 

 

작은 상(像)으로 부식이 심하지만 대체적인 형태는 알아볼 수 있다.

고개를 약간 숙이고 손을 모아 배에 대고 있는 모습이 선정인(禪定印)을 취하고 있다.

머리는 작은 편으로 소발(素髮)이며 얼굴은 마멸되어 세부표현을 알 수 없다.

법의는 통견(通肩)으로 목둘레를 감고 있는데 가슴이 드러나 보이지 않으며,

몸 가운데로 둥근 옷주름이 늘어져 결가부좌한 다리 위를 덮고 있다.

대좌는 4각형으로 앞면의 양쪽에 사자가 부조되어 있는 사자좌(獅子座)이다.

 

이러한 조각양식은 중국불상 중에서도 이른 예에 속하는 4세기경에 북방 5호16국시대나 북위 초기에

인도 간다라 불좌상을 수용하여 유행한 불상들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따라서 중국의 불상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지만

우리나라 불교수용 초기에 복제(複製)된 상(像)일 가능성도 있다.

이와 같은 선정인의 불좌상은

이후 신라출토의 금동불좌상이나 군수리출토의 납석제불좌상 등에서도 볼 수 있어

우리나라 불교조각사에서 초기에 유행한 불상형식임을 알 수 있다.

 

 

" . . . 침류왕에 의해 공전되기 전에 백제에는

이미 불교가 상당한 정도로 전파되어 있었다고 추단할 수 있다.

이러한 물증으로 한성시대의 백제 영역이던 한강변 뚝섬에서 발견된 금동불좌상들 수 있다.

이 금동상과 같은 건무 4년(338)이란 글자가 명기된 중국 북위시대의 불상 양식으로서

고구려로부터 불교가 유입된 결과라고 짐작된다.

불교문화 유산인 불상의 주조나 봉안 사실은 공전 이전에 벌써 민간에서 불교가 유포되고 있었으며,

그에 따라 불교문화를 수용했다는 의미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 . ."

- 한겨레, 2004-11-01(정수일교수) 

 

 

 <건무 4년명 선정인불좌상>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명문으로 후조(後趙)의 건무 4년명(建武 四年銘, 338년)

  

 

" . . . 중국에도 불교가 들어온 지 200여 년이 지나면서부터는

불교를 본격적으로 수용하려는 움직임이 크게 일어난다.
 이는 중화로서의 자존의식이 세계 어느 민족보다 강했던 한족(漢族)이

400년 치세이념이던 유교가 말폐를 노정하여 더 이상 그 역할을 담당할 수 없는데다

이를 대치할 만한 새로운 이념이 나타나지 않아 전에 없던 사상적 공백기를 맞이한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위에 야만족이라고 무시하던 북방의 호족(胡族)에게 무력으로 유린되어

참담한 굴욕을 감내하지 않으면 안 되는 비참한 현실에서

심리적 위안을 받을 수 있는 귀의처가 절대로 필요하였다는 시대적 여건도 크게 작용하였던 듯하다.
 

이런 때를 맞이하여 불도징(佛圖澄, 232~348년) 같은 대전도승이

후조(後趙) 황제 석호(石虎)와 같은 5호(五胡) 제왕들의 절대적인 신봉을 받아

불교를 중국화하는 일에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인 점도 불교 수용을 더욱 신속히 이루어내는데 한몫했다.
 

불도징은 종래에 금지되었던 중국인의 출가를 허용하게 하여 문도(門徒) 1만인을 양성하고

손수 893곳의 절을 건립하여 중국불교 교단 확립의 기틀을 다져 놓았다.

그를 뒤이은 중국인 수제자 석도안(釋道安, 314~385년)은 불경 원의(原意)에 충실한 주석을 가하여

원뜻을 제대로 파악하게 함으로써 격의불교를 탈피하는 작업을 서두르는 한편,

교단의 중국화를 꾀하여 이를 성공적으로 이루어낸다.

 

승려의 법성(法姓)을 석씨(釋氏)로 통일하고 의제(衣制)와 법계(法階)를 정하였으며

율장(律藏)을 토대로 승단생활의 규칙을 확정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서역의 고승을 초빙하여 한어(漢語)를 익히게 한 뒤 직접 역경(譯經)에 종사케 함으로써

불교 경전의 정확한 번역을 서두른다.

 

따라서 불상도 당연히 이런 중국화 운동에 발맞추게 되었던 것이니

후조(後趙) 건무(建武) 4년(338)에 조성된 <건무4년명 선정불좌상(禪定佛坐像)>과 같은

황인종 용모의 불상이 이를 증명해 준다. 이제 법수가 중국대륙에 충만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 법수는 다시 동토(東土)인 우리나라로 흘러 넘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에 도안(道安)에게 깊이 귀의하고 있던 전진(前秦) 황제 부견(符堅, 338~385년)이

소수림왕 2년(372) 고구려에 전도승 순도(順道)와 불상 및 불경을 보냄으로써

공식적으로 불교를 전해준다.

그리고 뒤이어 동왕(同王) 4년에는 아도(阿道)가 다시 왔다 하는데

고구려에서는 이들을 위해 동왕 5년에 각각 성문사(省門寺)와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지어 살게 하니

이것이 우리나라 불교 전파의 시초라 한다.

따라서 이들은 모두 도안(道安)의 명령을 받고 해동전도(海東傳道)의 큰 책임을 수행하고자 온

전도승이었므로 둘 다 도안(道安)의 제자였다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이들이 가져온 불상은 당시 중국에서 흔히 만들어지고 있던

양식화된 간다라불상 형태의 전통적인 것이거나 중국화된 신형일 수 있겠는데,

아무래도 처음 전해주는 불교 개척지에 신형을 보내는 모험은 하지 않았을 터이니

간다라식의 구형(舊形)이었으리라 생각된다.
 

이로써 우리나라에 처음 전래된 불상은 중국에서 양식화되었던 간다라식 불상이었고,

우리는 그것을 조본(祖本)으로 하여 이후에 불상을 조성하였을 개연성이 매우 높아진다.

이를 뒷받침해주는 것이 바로 <뚝섬 출토 선정불좌상>이다.

이것이 바로 그런 형태의 불상이기 때문이다.
 

서울 지역이 당시 백제의 수도권이었고

백제에도 침류왕 원년(384)에 동진(東晋)으로부터 마라난타(摩羅難陀)가 들어와 불교를 전하였으며

다음해에는 한산(漢山)에 절을 짓고 승려 10인을 출가시켰다 하였으니

혹시 이 불상이 이들과 관련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뒷날 장수왕(413~491년)이 이곳을 점령하여 고구려 판도에 넣었으므로(475년)

이 불상이 고구려에서 흘러들어 왔을 개연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어떻든 이 불상은 5호16국 시대에 유행하던 사자좌상(獅子座上)의 선정불 양식을 충실히 계승한 것으로

일찍이 중국제작설이 제기되기도 하였으나,

사자상이 지나치게 양식화되어 본연의 면목을 완전히 상실한 듯한 느낌을 주는 것으로 보아

우리나라 모작으로 보아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 . . "

-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 신동아, 1999년 12월호, 최완수의 우리문화 바로보기(고구려가 불교를 받아들인 까닭은?)

 

 

불교는 전진으로부터 4세기 후반(372, 고구려 소수림왕 2년) 처음으로 전래되었다.

이때 불상도 전해졌을 것이지만 현재 남아있는 한국의 불상은 6세기 이후의 것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그 이전의 모습은 알 길이 없었는데,

1959년 서울의 뚝섬에서 우연히 발견된 이 금동불은 손가락 마디 크기(4.9㎝)에 지나지않지만,

공백으로 남아있는 한국초기 불교 조각의 사정을 간접적으로나마 엿볼 수 있게 해주는

매우 귀중한 유물이다.

 

우리나라에서 출토된 가장 오래된 뚝섬출토 금동여래좌상은,

된 것으로 5세기 초나 중엽 경의 중국 북위의 불상 양식과 유사하여

대체로 중국에서 전해진 것으로 생각하는 견해가 강하다.

불교가 전래된 초기 우리나라의 불상 양식은 대체로 뚝섬의 불상처럼

중국식 불상 양식을 모방하거나 그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현존하는 예들은 대부분 6세기 이후의 불상이다.

 

이 여래상은 양손을 깍지낀 듯 몸 앞에 모으고

네모진 대좌 위에 앉아 깊은 사색에 잠긴 선정인(禪定印)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선정(禪定)이란 일종의 명상을 통하여 도달하게 되는 특수한 정신상태를 말한다.  

                              선정인

 

석가는 선정의 과정을 통해 불교의 진리를 깨달았다.

그러므로 선정은 곧 불교의 가장 본질적인 수도과정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선정인의 여러 좌상은 인도는 물론 중국의 초기불상에서 널리 유행했던 형식이다.

또 불교 경전에는 부처는 사람 중의 사자이므로

부처가 앉는 모든 곳은 사자좌(獅子座)라고 부른다고 했는데,

선정인의 여래좌상에는 이처럼 대좌 좌우에 직접 사자를 새겨 사자좌를 표현한 것이 많다.

 

이 금동불은 4세기-5세기에 걸쳐 크게 유행했던 중국의 여래상과 모습이 같기 때문에

국내에 수입된 중국불상으로 보기도 하고,

중국불상을 모방하여 한국에서 직접 만든 불상으로 보기도 한다.

 

문화의 속상상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였을 때, 처음에는 당연히 외국 것을 그대로 모방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금동불을 같은 형식의 중국 금동불과 비교해보면 다음과 같은 점에서 차이가 난다.

첫째, 불상의 크기가 현저히 줄었고

둘째, 중국불상은 속이 빈 이른바 중공식(中空式)주물인 반면에,

이 불상은 속이 찬 통주식(通鑄式)이며,

셋째, 성긴 옷주름과 불분명한 윤곽선 등 세부표현에 초보적인 추상성과 단순화된 부분이 많다.

현재까지 알려진 중국의 초기 선정인 금동불 가운데 이러한 특징을 가진 예가 한 점도 없다.

 

세부 형식과 기법, 그리고 규모의 단순화는 원형의 모방과 창조화 과정에서 생기는 필연적인 산물이다.

이렇게 본다면 이 금동불은

중국의 선정인 여래좌상을 모방하여 만든 5세기 중엽의 우리나라 금동불일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모방 단계를 거치고 난 뒤에야

비로소 우리의 정서와 미의식에 걸맞는 한국적인 조형감각을 갖춘 불상이 조성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금동불이 한국불상이라면 삼국 가운데 어느 나라에서 제작되었을까?

5세기 중엽 신라에서는 아직 뚜렷한 불교수용의 증거가 나타나지 않으므로

그 범위는 고구려와 백제로 좁힐 수 있다.

선정인의 여래좌상이 특히 고구려를 중심으로 널리 조성되었다는 점과

이 금동불과 동일한 형식의 벽화가 고구려에 남아있다는 점에 비추어

고구려에서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추정할 수 있다.

 

 

***** 참고

불교 전래 초기의 불상표현으로는,

옛고구려의 도읍인 지안(輯安)의 장천(長川)1호분 벽화에서

5세기경에 만들어진 불상및 보살상의 표현이 발견되었다.

 

한반도에서 발견된 금동불상 중에서 가장 오래된 서울 뚝섬출토의 금동여래좌상(金銅如來坐像)은

5세기 전반경 중국 북위(北魏)의 불상으로 추측되고 있어,

5세기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 가는 고구려불상은 아직 알려진 예가 없는 실정이다.
연가7년명 금동여래입상
현재까지 알려진 불상 중 고구려의 것으로 가장 오래된 것은

연가 7년 기미년명(延嘉七年巳未年銘) 금동여래입상이다.

이 불상은 명문에 의해

고구려 때 평양의 동사(東寺)에서 만든 천불상(千佛像) 가운데

하나임을 알 수 있고,

연가(延嘉)는 역사기록에 보이지 않는 연호이나

기미년(己未年)은 양식상으로 보아 539년(안원왕 9)에 해당된다.

중국 북위나 동위(東魏) 초기의 불상양식을 본따서

약간 거칠기는 하나

강직한 고구려적 표현감각을 가지고 있다.

 

 

 

 

 

 

 

 

 

 <서울 삼양동출토 금동보살입상>

 

 

 

   

    

  7세기 전반, 국보 127호, 높이 20.7㎝, 국립중앙박물관

 

 

지금의 서울이 위치한 한강은

삼국 당시 고구려, 백제, 신라의 각축장으로 세력권의 변화가 심한 지역이었다.

그러나 이 지역이 비록 정치와 군사면에서 각축장이었다고 하더라도

문화면에서는 삼국의 독특한 문화가 공존하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이 보살상은 서울 성북구 삼양동에서 출토되었는데

도상적인 측면은 이러한 당시의 사정을 웅변으로 대변해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불상이다.

 

얼굴은 팽창되었고, 이목구비는 윤곽만을 특징적으로 나타내었으며,

삼면 보관의 중앙에는 연꽃 대좌위에 가부좌한 화불을 상징적으로 표시하였다.

오른손은 정병(淨甁)을 쥐었고, 왼손도 무언가를 쥔 모습이다.

 

지금가지 알려진 예에 비추어 이러한 관음보살의 도상은

삼국시대 말기 백제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처럼 단독의 관음보살로 등장하게 되는 것은

이미 이 지역에 관음신앙이 널리 퍼져있었음을 의미한다.

 

천의는 가슴과 무릎에 두 겹으로 걸쳤으나, 끝자락이 매우 짧아졌다.

옷주름은 생략되었으며, 다리는 그 윤곽만을 추상적으로 나타내었을 뿐이다.

측면관도 매우 얇고 뒤로 심하게 휘어졌다.

반면 대좌의 연꽃은 고구려불상에서처럼 양감이 있고, 탄력적이며

신체 뒷면의 천의자락에는 피건(被巾)처럼 뻗침이 남아 있다.

 

1967년 서울시 강북구 삼양동에서 발견된 보살상으로,

발목 윗부분에 금이 가고 왼쪽 옷자락이 약간 떨어져 나간 것 말고는 완전한 상태이며,

견실한 주조(鑄造)에 황금색 도금(鍍金)이 잘 남아 있다. 

머리에는 삼각형의 관((三面花冠)에 화불(化佛)을 하나 새기고 있고,

얼굴은 살이 올라 통통해 보이며, 입가에는 엷은 미소를 짓고 있다.

목에는 삼도(三道) 없이 목걸이가 가슴 앞으로 넓게 늘어져 있다.

상체는 어깨가 좁아 위축된 모양이며, 배를 앞으로 내밀고 있어 옆에서 보면 활처럼 휘어진 모습이다.

 

천의()는 어깨에서 팔에 걸쳐 늘어졌으며,

옷자락의 한 끝은 무릎 위까지 늘어져 U자형을 이루었다. 

치마는 발목을 덮어 대좌에 닿고 있는데 발 앞부분은 드러나 있지만,

 다리의 윤곽이 뚜렷하지 않으며, 옷주름은 몇 가닥의 선으로 단순화시켰다.

 

이 불상의 둥글고 풍만한 얼굴, 늘어진 목걸이, 두 줄기의 옆으로 돌려진 옷자락,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특징적인 휘어진 편평한 몸, 또 양쪽으로 벌린 두 팔,

단순한 형태미나 생략이 많은 옷주름, 배를 내밀어 휘어진 몸,

상하 2단으로 감긴 천의()자락 등은 모두 수(隋)나라(581∼618) 불상 양식의 특징과 상통하며,

이 불상의 조상연대가 7세기 전반임을 말해 주고 있다.

 


다소 투박하나 둥근 홀겹의 연화대좌가
고식()의 조각 기법을 보여준다.

대좌는 신부()와 한틀로 주조한 것으로, 아래로 향한 커다란 연꽃무늬를 새겨 놓았다.
지금은 광배()가 없으나 머리 뒤에 있는 작은 구멍으로 미루어
원래는 광배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일곱부처를 그린 드리개(七如來幡)

 

19세기말 - 20세기초, 비단, 한국불교미술박물관(안양암 소장)

 

 

 

 

의식에 참여한 죽은 영혼에게 극락왕생의 길을 열어주는 칠여래번이다.

이들은 모두 동일한 양식으로 제작되었는데,

모두 수(壽)를 에워싸고 있는 화문, 희(囍)자문, 박쥐문 등이 수놓아진 붉은색 바탕 위에

글자를 황색으로 표현하였다.

 

검은색 번두(幡頭) 위에는 오색 다라니주머니를 달았는데, 중앙에 꽃문양을 달아 장식하였다.

 

번신(幡身)의 좌우에는 오색이 아닌 삼색의 방석매듭을 드리우고 있어

다소 간략해진 형식을 띠고 있다. 반면 가장자리에는 청색바탕 위에 용과 구름무늬가

금색으로 수놓아진 화려한 천을 둘러 화려함을 더하고 있다.

 

번미(幡尾)에는 연두색 바탕에 분홍색 연꽃이 수놓아져 있어 역시 후기의 번(幡) 양식을 보여준다.

  

 

 

일곱여래(七如來)

 

 

(1) 다보여래 - 38×106, 비단

모든 영혼이 탐욕스러운 마음을 버리고 불법을 깨닫게 한다.

南無多寶如來 願諸孤魂 破除慳貪 法財具足(남무다보여래 원제고혼 파제간탐 법재구족)

 

(2) 보승여래 - 37.5×105.5

모든 영혼이 지옥, 아귀, 축생의 악도(惡道, 나쁜 길)에 빠지지 않게 한다.

南無寶勝如來 願諸孤魂 各捨惡道 隨意超昇(남무보승여래 원제고혼 각사악도 수의초승)

 

(3) 묘색신여래 - 36.5×105.2

모든 영혼이 추하고 천한 모습을 벗고 온전한 신체와 원만한 상호를 갖게 한다.

南無妙色身如來 願諸孤魂 離醜陋刑 相好圓滿(남무묘색신여래 원제고혼 이추누형 상호원만)

 

(4) 광박신여래 - 38.7×104

모든 영혼이 윤회해야 하는 몸을 버리고 불법을 깨달을 수 있도록 한다.

南無廣博身如來 願諸孤魂 捨六凡身 悟虛空身(남무광박신여래 원제고혼 사육범신 오허공신)

 

(5) 이포외여래 - 39.5×104

모든 영혼이 모든 두려움을 버리고 열반의 즐거움을 얻도록 한다.

南無離怖畏如來 願諸孤魂 離諸怖畏 得涅槃樂(남무이포외여래 원제고혼 이제포외 득열반락)

 

(6) 감로왕여래 - 37.2×106.5

모든 영혼이 언제나 굶주려야 하는(탐욕이 많은 자가 목마름과 배고픔 등 고통으로 가득찬 아귀처럼

음식을 입에 넣으면 돌이나 뜨거운 불덩어리로 변하기 때문에 먹을 수가 없고, 입은 크지만 목구멍이

바늘구멍처럼 작아 아무리 먹어도 배를 채울 수 없는 고통을 겪으며) 형벌을 면하고

부처의 가르침을 깨달아 감로의 맛을 알게 한다.

南無甘露王如來 願諸孤魂 咽喉開通 獲甘露味(남무감로왕여래 원제고혼 인후개통 획감로미)

 

(7) 아미타여래 - 37.5×105

모든 영혼을 윤회로부터 구제하여 생각에 따라 극락세계에 왕생하도록 한다.

南無阿彌陀如來 願諸孤魂 隨念超生 極樂世界(남무아미타여래 원제고혼 수념초생 극락세계)

 

 

 

 

 

 

관성제군명성경(關聖帝君明聖經)

1886년, 19.2×29.8×0.8㎝, 1책, 목판본, 서울역사박물관

 

 

관우(關羽)를 신격화하는 종교인 관성교(關聖敎)의 경전으로,

표제는 ‘명성경(明聖經)’으로 되어 있으나, 서제(序題)는 ‘관성제군명성경(關聖帝君明聖經)’이며,

내제는 ‘관성제군응험명성경(關聖帝君應驗明聖經)’이다.

조선 후기에 간행된 관성교(關聖敎) 경전을 언해한 책이다.

이러한 이본(異本)들은 당시의 조정에서

임진왜란 이후 민간신앙으로 전래되어오던 관성교를 크게 진흥시키고자 한 정책에 따른 것이다.

현대 활자본을 제외한 목판본들은 대부분 본문은 동일하나 권말, 권두의 첨삭부분에서 약간씩 다르다.

 

관성교(關聖敎)의 경전은

<삼성훈경(三聖訓經)>, <관성제군오륜경(關聖帝君五倫經)>, <과화존신(過火存神)> 등으로서

충효와 인간의 도리를 주로 내세운 일종의 도가서(道家書)이다.

관성교는 원래 관성제군(關聖帝君)이라고 불리는 관우(關羽)를 신격화하여 모시는 종교로서

이러한 경전은 전도를 목적으로 언해하였다.

 

권두에 1846년(헌종 12, 도광 26)의 옥청주인(玉淸主人) 순양자(純陽子)의 서(序),

가경 25년(1820, 순조 20) 장추산인(長秋山人)의 항서(降序)에 이어

관우의 세계도(歲界圖), 역조봉호(歷朝封號)가 나오고 본문이 시작된다.

 

본문은 한문과 언해문으로 되어 있는데, 한글로 한자음이 표기되어 있고, 토가 붙어있으며,

구절마다 순국문의 언해와 주석이 붙어 있다.

권말에는 <두구왕선흠봉관성대제 칙령(斗口王聃欽奉關聖大帝 勅令)>, <명성경주증(明聖經註證)>,

<영험기(靈驗記)>, <구겁신론(救劫新論)> 등이 순한문으로 실려 있다.

 

<이병근(李秉根)>의 내용을 보면 <응험명성경>에서는 이 책을 저술하게 된 동기를 밝히면서,

옥천사(玉泉寺)에서 써서 인간세상 사람에게 준다는 뜻을 기록했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그리고 이 경문을 염송하는 공덕에 대해

분향하고 맑고 깨끗한 마음으로 독송하면 모든 재앙이 사라지고 복이 온다고 밝혔다.

또한 인간의 행동은 효도와 또는 자손들이 보(報)를 받게 된다고 강조하였다.

 

<칙령(勅令)>에서는 유가(儒家)의 오상(五常: 仁義禮智信의 다섯 가지 덕)은

도교와 불교의 삼보(三寶: 佛, 法, 僧)와 같은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인간세상의 모든 어려움이나 기쁜 일이 마음에서 생기는 것이므로

仁과 義를 행하면 마음이 안정되고 기쁜 일만 생기는데,

仁은 곧 효제(孝悌)이며, 義는 곧 염절(廉節: 청렴하고 강직한 절개)이라고 하였다.

 

<영험기>에서는 최병공(崔秉恭)이 이 책 한 부를 초사(抄寫: 일부분만 뽑아서 베낌)하였는데

죽음 직전에 있던 어머니의 병이 쾌유되어 88세의 장수를 누렸다는 이야기와,

위성훈(魏成勳)이 초사한 덕으로 천연두의 위험에서 벗어난 것을 들었다.

 

<구겁신론>에서는 장봉화(張鳳華)의 경험담으로

관성제군이 몸을 나타내어 돌림병을 제거해준 사실과

현실에서는 믿을 수 없는 신이한 일화들을 들어서 영험한 일을 입증했다.

그밖에 관성제군의 일생 행적과 죽은 뒤 천상의 삼문을 지키게 되었다는 일화도 있다.

 

이 책 본문의 언해는 과도기 근대 국어의 혼란한 모습을 보이고 있으면서도,

한편 거의 현대국어에 가까운 모습도 보여서 이 시기의 대표적인 어학 자료의 하나가 된다.

국어 표기 면에서는 자립명사들은 연철을 허용하지 않고,

의존명사와 용언의 어간들은 연철되어 있고,

받침으로는 ‘ㄱ, ㄴ, ㄹ, ㅁ, ㅂ, ㅅ, ㅇ’의 7자가 쓰이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은 관성교 연구의 중요한 자료인 동시에,

또한 19세기 후반기 국어학 연구의 귀중한 자료이기도 하다.

국립중앙도서관과 규장각도서에 있다.

 

*** 관우(關羽)의 공식적인 봉호(封號)

관우의 고향인 해주(解州)에 세워진 무묘(武廟)를 비롯해 중국의 전국 각지에 세워진 무묘(武廟)는

그 규모도 웅장할 뿐만 아니라 전당의 내부도 화려하게 꾸며져 있다.

 

 

 

수당대부터 돌풍처럼 일기 시작한 관우묘에 대한 숭배 풍조는

관우의 관작을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승격시켜 결국 지존의 자리까지 올려놓고야 말았다.

건안 5년(200), 조조가 유비를 공격하자 유비는 패주하여 원소(袁紹)에게 몸을 의지하였다.

이때 유비의 아내와 함께 있던 관우는 하비에서 조조에게 포위되어 항복하였으며,

조조는 그를 편장군(偏將軍)에 임명하고 극진히 예우하였다.

그해 4월, 조조가 원소와 백마(白馬: 지금의 하남성 활현 동쪽)에서 일전을 벌였는데

관우는 용감하게 적진을 뚫고 돌진하여 원소의 대장 안량(顔良)의 목을 베었다.

이 전공으로 관우는 한수정후(漢壽亭侯)에 책봉되었다

 

건안 24년(219) 12월 관우는 맥성에서 패하여

임저장향(臨沮章鄕: 지금의 호북성 안원현<安遠縣> 북쪽)으로 퇴각하다가

손권의 복병에게 사로잡혀 아들 관평(關平)과 함께 피살되었다. 이때 관우의 나이 59세였다.

 

관우가 죽은지 41년 후 촉(蜀) 경요(景耀) 3년(260, 관우 탄신 100주년)에

후주 유선(劉禪)은 관우의 시호를 장목후(壯繆侯)로 추증했다.

그러나 남북조 시기부터 청대 말기에 이르기까지 관우는 역대 제왕들의 추존을 끊임없이 받아,

"후(侯)에서 왕(王), 왕에서 제(帝), 제에서 성(聖), 성에서 천(天)"으로 올라갔다.

그의 명성은 중국은 물론 해외에까지 널리 알려져

중국 역사상 가장 존경받고 신성시 되는 우상의 한 사람이 되었으며,

마침내는 공자와 함께 "문무이성(文武二聖)"으로 병칭되었다.

 

관우에게 왕(王)이라는 작위를 붙이기 시작한 것은 송대부터이다.

휘종(徽宗)은 숭녕(崇寧) 원년(1102)에 관우의 시호를 '충혜공(忠惠公)' 으로 추증하고

다시 계속하여 숭녕 3년(1104)에는 '숭녕진군(崇寧眞君)',

대관(大觀) 2년(1108)에는 '소열무안왕(昭烈武安王)',

선화(宣和) 5년(1123)에는 '의용무안왕(義勇武安王)' 으로 추존했다.

 

남송의 창시자 고종(高宗)도 건염(建炎) 2년(1128)에 관우를 '장목의용무안왕(壯繆義勇武安王)'

봉했고, 그의 아들 효종(孝宗)은 순희(淳熙) 14년(1187)에

관우를 '장목의용무안영제왕(壯繆義勇武安英濟王)' 에 봉했다.

 

원나라 문종(文宗)은 천력(天曆) 원년(1328)에 남송시대에 관우에게 내린 시호에서

'장목(壯繆)'을 없애고 대신 '현령(顯靈)'으로 바꾸어,

'현령의용무안영제왕(顯靈勇武安英濟王)' 이라 하였다.

 

관우에게 제(帝)라는 시호를 붙이기 시작한 것은 명대부터이다.

주원장(朱元璋)이 죽은 후 혜제(惠帝)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혜제 건문(建文) 3년(1399)에 주체(朱棣)가 정변을 일으켜 왕위를 찬탈했는데,

그가 바로 성조(成祖: 永樂皇帝)이다.

성조는 자신의 행동을 관우의 영험한 도움을 받은 것이라고 말했다.

즉 그가 황제가 된 것이 "하늘의 뜻"이라는 말이다.

황제가 관우를 신이라 한 이상, 신하와 백성들도 당연히 관우를 신으로 숭상하였다.

명대 중후기의 정덕(正德) 4년(1509), 조정에서는 조서를 내려

전국에 있던 관묘(關廟 : 관우 사당)의 이름을 모두 '충무묘(忠武廟)'로 고치게 했다.

 

만력(萬曆) 22년(1594), 도사 장통원(張通元)의 요청으로

신종(神宗: 萬曆皇帝)은 관우를 제(帝)에 봉하고, 관묘의 이름을 '충무'에서 '영렬(英烈)'로 바꾸었다.

만력 42년(1614) 10월,

신종은 관우를 '삼계복마대신위원진천존관성제군(三界伏魔大神威遠震天尊關聖帝君)' 에 봉했다.

 

청대의 통치자들도 관우를 매우 숭배했다.

세조(世祖: 順治皇帝)는 순치 원년(1644)에 관우를 '충의신무관성대제(忠義神武關聖大帝)' 에 봉했고,

건륭(乾隆) 이후 가경(嘉慶) · 도광(道光) 두 왕조를 거치면서 관우의 시호를

'인용위현호국보민정성수정익찬선덕충의신무관성대제

(仁勇威顯護國保民精誠綏靖翊贊宣德忠義神武關聖大帝)' 라고 하여 그에 대한 숭배가 극에 달했다.

문종(文宗: 咸豊皇帝)은 함풍 5년(1855)에

관우의 선조를 '광소왕(光昭王)', 조부를 '유창왕(裕昌王)', 부친을 '성충왕(成忠王)'에 추증하고,

관우의 신위를 황궁에 모셔두었다.

 

관우는 한수정후(漢壽亭侯)에서 출발해 충혜공(忠惠公)을 거쳐 소무안왕(昭武安王)이 된 후

북송의 휘종때에 와서는 숭녕진군(崇寧眞君)에 봉해졌다.

이어 다시 명청대에 들어와 명의 만력 연간에는 관제(關帝) 또는 관성제군(關聖帝君)이 되었다.

청대에 들어와서는 관우에 대한 존호가 절정에 달하게 되었다.

충의ㆍ신무ㆍ영우ㆍ인용ㆍ위현ㆍ호국ㆍ보민ㆍ정성ㆍ수정ㆍ익찬ㆍ선덕ㆍ관성대제가

(忠義ㆍ神武ㆍ靈佑ㆍ仁勇ㆍ威顯ㆍ護國ㆍ保民ㆍ精誠ㆍ綏靖ㆍ翊贊ㆍ宣德ㆍ關聖大帝)

그의 공식 봉호이다.

 

 

 

 

 

 임진왜란과 더불어 조선에 온 관우 동묘 - 보물 142호에 부쳐  

 

 

혹시 서울 종로구 숭인동 123-1번지에 가보셨소.

거기 보물 142호인 동묘(東廟), 곧 동관왕묘(東關王廟)가 있소. 관제묘(關帝廟)라고도 하오.

 

 

  

 

 

관우현령(關羽顯靈)의 도움으로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끌었다 하여 

명나라 황제 신종(神宗)이 1599년 현액(縣額)과 비용을 보내와

우리 조정에서 두 해 만인 선조 34년(1601)에 완성한 것.

 

선조실록에는 건축비용, 군사동원 등에 관한 기사와 더불어

조선왕이 과연 여기 참례할 것인가의 논란도 적혀 있고,

그 뒤 영조, 정조 등 역대 왕도 참례한 것으로 되어 있소.

 

 

 

우리 것만 보아온 사람에겐 건축은 썩 낯서오.

정면 5간, 측면 4간의 정자형(丁字形) 건물이며 검은 벽돌로 두텁게 쌓아올렸소.

정식 명칭은 '현령소덕무안왕묘(顯靈昭德武安王廟)'.

좌우 현판은 사신 정룡(程龍)의 글씨 ‘만고충심(万古忠心)’ ‘천추의기(千秋義氣)’로 뚜렷하오.

목조로 된 관우상과 그 옆엔 아들 관평 등 부하 4인이 모셔져 있소.

 

 

또다른 명칭도 입구에 붙어 있소. 현령소덕의열무안성제묘(顯靈昭德義列武安聖帝廟)가 그것.

광무 6년(1902)에 우리나라에서 다시 붙인 명칭이오.

왕묘에서 ‘성제묘’로 격상되어 있지 않겠소.

 

이 사당 기둥과 추녀엔 명나라 흠차사신이라든가 청나라 제독 등 참배객의 현판들이 여럿 걸려 있소.

대명(大明) 만력(萬曆) 28년 경자 9월 길일(吉日)에 쓴 ‘충의관천(忠義貫天)’ ‘현성보번(顯聖保藩)’도

인상적이오. 관우의 현령으로 제후의 나라(조선)를 구했다는 것.

 

 

이 근처엔 고물상과 더불어 고서점도 있어 헤매다 지치면 이 묘에 들르곤 했소.

갈 데 없는 노인들, 무숙자의 보따리와 소주병이 뒹굴고 있기도 했소.

서울 장안 무속인들이 제물을 차려놓고 참배하는 것도 자주 목격했소.

담 밖의 아비규환과는 달리 조용하기 이를 데 없소.

21세기 서울 한복판의 이런 공간이란 대체 무엇일까.

이런 기묘한 물음을 물리치기 어려웠소.

 

제법 오래 전 산동성 곡부(曲阜)에 간 적 있소.

공자의 사당이 있는 기묘한 형태의 공자 무덤 앞 비석을 보았소.

1443년에 만들어졌다는 이 대리석 비석 명문은 대성지성문선왕묘(大成至聖文宣王廟).

가까이 가자 깨진 비석의 이음새가 뚜렷하지 않겠는가. 뿐인가.

왕(王)자도 간(干)자 모양으로 되었고 담벼락이 그 밑을 가리고 있지 않겠는가.

 

공자가 문선왕의 시호를 얻은 것은 당나라 현종대로 되어 있소.

한족이든 이민족이든 역대 황제들은 과연 공자를 어떻게 대해야 했을까.

아무리 성인 공자라도 황제급으로 칭할 수는 없었을 터.

사당의 용트림 황색 기둥도 진짜 황제 앞에서는 붉은 천으로 가려야 했을 터.

 

이에 견줄 때 관우는 어떠했던가.

명나라 성화(1465-87) 무렵 관제대제(關帝大帝)로,

15세기 청나라 순치 때는 충의신무관성대제(忠義神武關聖大帝)로 봉해져

한민족이든 이민족이든 국가 수호의 최고 군신으로 받들어졌소.

 

왕(제후)의 위치를 훌쩍 뛰어넘어 제(帝)의 자리에 군림하는 이 사태는 무엇을 가리킴일까.

중국의 역사나 사상사를 공부한 바도, 민간신앙 도교를 살펴본 바도 없는 나 같은 사람이

이 물음에 기껏 마주칠 수 있는 데는

명말 나관중이 쓴, 귀신 붙은 책으로 소문난 <삼국지연의> 정도.

진수의 <삼국지>에 바탕을 둔 이 얘기책은 그러니까 요즘식으로 하면 팩션(Fact+Fiction)인 셈.

 

기원전 2세기 황건적의 난에서 시작, 약 80년간 위 · 촉 · 오 삼국의 쟁패를 다룬 이 책에는

수백 명의 영웅호걸이 부침하지만 그 중 제일 영웅은 과연 누구일까.

너무 원만한 유비가 위선자로,

신출귀몰하는 제갈량이 요괴스럽고,

임기응변의 웅숭깊은 조조가 간웅으로 보이기 쉽지만 단 하나 우뚝한 인물이 있소.

신장 9척 수염 길이 2척 붉은 봉의 눈, 누에의 눈썹, 익은 대춧빛 얼굴, 종소리 같은 목소리의 사내,

긴 일월도에 적토마를 탄 사내. 화룡도에서 보여준 기품과 의리의 사내. 그 이름은 운장(雲長) 관우.

 

내가 읽은 <삼국지연의>는 관우 죽음 이전과 이후로 양분되오.

<춘추(春秋)>를 읽으며 적토마를 탄 관우가 전반부를 휩쓸고 있다면,

후반부는 현성(顯聖)한 관우가 휩쓸고 있소.

옥천산에 나타났고, 조조를 죽음에 이르게 했고,

아들 관흥으로 하여금 적토마와 일월도를 되찾게 했고

마침내 유학층도 민중도 함께 숭배하는 관성대제에 이르렀던 것.

 

종로구 숭인동 동묘 뜰의 벤치에 앉아 혼자 멋대로 중얼거렸소.

그토록 떼를 지어 이 책을 좋아하는 한국 독자들이

정작 그네 나라 서울 한복판에 있는 이 관왕묘 앞에 선다면

우리 유산인가 남의 유산인가를 따지기 전에 대체 어떤 표정을 지을까, 라고.

- 김윤식, 문학평론가 · 명지대 석좌교수, 2005-06-02, ⓒ 한겨레, 책ㆍ지성 [문화산책]

 

 

 

  

 

 
 벽사그림
 
1. 벽사그림이란
 
 
벽사란
사악(邪惡)한 기운을 막고 잡귀(雜鬼)나 마귀(魔鬼) 등을 쫓는 것으로
벽사 관념과 현세에 온갖 복(福)을 누리고자하는 복락(福樂)주의는
예로부터 우리 조상들의 의식(意識) 속에 뿌리깊게 자리 잡아왔다.
 
또한 불교나 도교 등과도 융합하여 독특한 민간 신앙을 형성하였으며
이런 사상적 배경 속에서 조상들은 신령스러운 힘이 있다고 생각되는 물건을 몸에 지니거나
부적(符籍)을 써서 집안에 붙여 놓기도 하고,
벽사용 그림을 집안에 걸어 놓아 액을 막고 복을 누리고자 하였던 것이다.

 

민화 중에는 민간신앙과 결합하여 주술적인 의미가 부여된 것들이 상당수 있는데,

세화(歲畵)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세화(歲畵)는 조선시대에 새해를 맞이하여

궁중은 물론이고 사대부들의 저택과 일반 서민의 집에 귀신을 쫓거나[축귀(逐鬼)]

복을 구하는[구복(求福)] 의미로 그려 대문에 건 그림으로 대표적인 벽사 그림이다.

 

벽사 상징의 대표적인 민화로 호랑이와 용을 들 수 있으며,

이 외에도 해태도 · 신구도(神狗圖) · 사신도(四神圖) · 사령도(四靈圖) · 천계도(天鷄圖) ·

치우도(蚩尤圖) · 처용도(處容圖) · 종규도 등이 대표적인 벽사용 민화로 꼽힌다.

 

귀신잡는 개(神狗圖)

전형적인 토종개의 모습에 목에 검은 방울을 달고, 벽사용 네눈박이 개의 모습으로 그린다.

칠흙같이 어두운 밤, 비바람이 몰아쳐도
멀리서 오는 도둑이나 귀신의 소리까지도 듣고 보아야 하므로,
벽사용 개나 호랑이는 두 눈으로는 모자라 네 눈, 네 귀를 가진 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했다.

 

 

 

검정색 암캐는 그 집안의 수호신으로 볼 수 있다.

개가 충성스런 동물일 뿐 아니라

집안의 사악함을 쫓아내고

집을 지켜 주는 수호동물로 상징되었다.

관습에 따라 귀신 쫓고 복을 빌기 위해

개를 그려 문배도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민속에서는 개가 사자(死者)의 영을 본다는 말도 있다.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개가 저승사자를 알아보고 짖어서 쫓아내기도 한다고 한다.

또 나쁜 악귀가 들어오면 개가 미리 알아보고 쫓아내는데, 이때는 하얀 개가 더 영험하다는 말이 있어

민속에서는 이때는 흰개를 선호하기도 한다. 

어쨌든 개는 신령스러운 능력을 가진 영험한 동물이라고 믿었던 것 같다.


 

우리 나라의 세시풍속을 기록한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매년 정초가 되면 해태 · 개 · 닭 · 호랑이를 그려 붙였다는 기록이 있다.

해태는 화재를 막기 위해 부엌문,

개는 도둑을 지키기 위해 광문,

닭은 어둠을 밝히고 잡귀를 쫓기 위해 중문,

호랑이는 대문에서 각각 악귀가 침범하지 못하도록 하는 기능을 가진 벽사용 그림이다.

때로는 네 가지 동물을 그려서 붙이기도 하고 목판으로 제작하여 사용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벽사용 그림들이 대중적인 민속신앙의 한 방편으로 사용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2. 벽사그림의 종류

 

● 닭 그림

닭 그림은 전통적으로 호랑이 그림과 함께

정초에 벽사초복( 邪招福)의 뜻을 담아 대문이나 집안에 붙였던 세화(歲畵)의 일종으로

직접 그리거나 목판으로 찍어서 사용하였다.

 

닭은 새벽을 알리는 길조로 대접을 받아왔으며

12지(十二支) 동물 가운데 유일하게 날개가 달린 짐승이라

지상과 하늘을 연결하는 심부름꾼으로 생각되어졌다.

 

수탉이 울면 동이 트고 동이 트면 광명을 두려워하는 잡귀가 모두 도망친다는 뜻에서

벽사의 뜻이 담겨져 있는 가금(家禽)으로서도 소중히 여겼다.

 

또한, 수탉의 붉은 볏은 그 이름이나 생김새에 있어서 벼슬과 통하므로 벼슬을 얻는다는 뜻이 있고

암탉은 매일 알을 낳으므로 자손의 번창을 상징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닭 그림 가운데는 맨드라미가 함께 그려지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닭과 맨드라미가 서로 어울려 '관상가관(冠上加冠)' 이라는 길상적 문구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관상가관이란 '관 위에 또 관을 더한다'는 뜻으로 입신출세의 최고 경지에 이름을 말한다.

 

이밖에 수탉이 하늘을 보고 크게 우는 모습과 모란을 함께 그려

부귀공명을 뜻하는 벽사그림 등이 있다.

공계(公鷄, 수탉)의 ‘공(公)’과 운다는 뜻의 ‘명(鳴)’은 '공명(功名)’과 독음이 같아

“공을 세워 이름을 널리 알린다”는 뜻으로 쓰이며

여기다 모란의 부귀를 합치면 부귀공명이 되기 때문이다.

 

● 호랑이 그림
호랑이가 미술의 소재로 쓰여지기 시작한 것은 선사시대부터였다.
경남 울주군(蔚州郡)의 반구대(盤龜臺) 암각화(岩刻畵)에 보이는 호랑이는
현재 알려진 것 가운데 가장 오랜 것이다.
이처럼 호랑이가 선사시대부터 인간과 밀접한 관계를 맺은 것은
단순히 수렵의 대상이었다기 보다는 주술적인 의미를 지니거나 신앙의 대상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호랑이는 원래 병귀(病鬼)나 사귀(邪鬼)를 물리치는 힘이 있는 것으로 믿었다.
때문에 말라리아에는 호랑이 고기를 삶아 먹거나 호랑이 그림을 환자의 등에 붙였으며
독감에는 '범 왔다'라는 소리를 3번 외쳐 도망가게 했다고 한다.
 
또한 조선시대에는 매년 정초가 되면
궁궐과 여염집에서 벽사의 수호신으로 호랑이를 그려 대문이나 집안 곳곳에 붙였다.
 
호랑이 그림이 가진 의미를 호축삼재(虎逐三災)라 하는데,
호랑이는 영험스러운 짐승이라서
사람에게 가져오는 화재(火災), 수재(水災), 풍재(風災)를 막아주고
병난(兵難), 질병, 기근의 세 가지 고통에서 지켜주는 신비로운 힘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호축삼재도(虎逐三災圖)  

벽사의 뜻으로 그려지는 이 그림은 삼재를 쫓는다는 뜻으로 그려졌다.
두 마리의 호랑이가 사나운 이빨을 드러내고 포효하는 모습으로 그려져
악귀를 물리치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나타내고 있다.
 

 

호축삼재팔난도(虎逐三災八難圖) ⓒ2005 정암 송기영

 

벽사의 뜻으로 그려지는 호랑이 그림 중에 대나무 숲을 배경(竹林出虎)으로 그려지는 것이 있다. 이 그림 속의 호랑이는 대개 포효하는 모습이거나 정면을 응시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악귀를 향해 정면으로 도전하여 물리치겠다는 의지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배경이 되는 대나무도 벽사의 의미를 지니는데

대나무가 타면서 터지는 소리에 귀신이 놀라 달아났다는 이야기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처럼 대나무 숲을 배경으로 한 호랑이 그림을

'호랑이는 죽을 때가 되어서만이 대나무 숲을 찾는다'는 통설이 아닌, 벽사의 의미로 해석되어진다.

 

- 가회박물관 홈페이지에서

 

 

 

 

 

 

부적(符籍)

조선 말기, 4.3 × 4.3 × 3.5㎝, 서울역사박물관

부적은 재앙을 방지하거나 복을 부르기 위하여 그림, 글씨, 기호 등을 그린 종이를 말한다.

방형의 부적을 찍는 도장으로써 목제로 제작되었다.

기하학적인 문양을 새겨놓았으며, 상단부에는 '丁'자를 새겼다.

붉은 인주를 찍은 흔적이 남아 있다.

 

 

 

 

부적패(符籍牌)

조선, 너비 2.5㎝, 길이 8.6㎝, 두께 0.9㎝, 끈길이 6㎝, 서울역사박물관

재앙을 방지하거나 복을 부르기 위하여 그림, 글씨, 기호 등을 종이에 찍어내는 판이다.

액막이를 하는 부적에 찍기 위한 사각형의 나무패로 만들어졌다.

표면에는 물고기나 호랑이, 박쥐 등 동물문양이나 변형문자 등을 새겨놓았고,

큰 것은 불교와 관계되는 주문을 한글로 새기기도 하였다.

이러한 목판으로 부적을 찍어 집에 붙여 '삼재불입지지(三災不入之地)'임을 표시했다.

 

대개 찍어내는 판을 '부적판'이라 하는데

전시된 이 유물처럼 작게 만들어 몸에 차고 다니거나 걸어두기도 하여 '부적패'라 할 수 있다.

이 부적패는 사각형 모양으로 위쪽은 각이 지게 깎았으며,

앞면과 뒷면에는 변형문자와 문양 등을 음각하고 글자면 위를 약하게 불로 그을려 놓았다.

위쪽에는 구멍을 뚫어 끈을 달았다.

 

 

 

 

 

부적판(符籍板)

조선, 너비 3.4㎝, 길이 29.3㎝, 두께 1.5㎝, 서울역사박물관

 

재앙을 방지하거나 복을 부르기 위하여 그림, 글씨, 기호 등을 종이에 찍어내는 판이다.

이 부적판은 액막이를 하는 부적에 찍기 위한 목판으로

길이가 긴 직사각형으로 표면에 옻칠을 하였다.

앞면과 뒷면에는 변형문자가, 옆면에는 '광서원년(光緖元年)'이 음각되어 있고,

한쪽 끝에는 구멍을 뚫어 끈을 달았다.

 

 

 

 

 

 

 

 

 부 적

 

 

1. 부적이란

 

부적은 종이에 글씨나 기타 주술적 기호 등을 그리거나 목판으로 찍고
재료에 따라 돌, 나무, 청동, 대나무, 조개 등을 이용하여 만든 것으로
그 목적은 복(福)을 불러들이고 액운(厄運)을 물리치는데 있다.
 
즉 주술적 방법으로 인간사의 복잡다난한 길흉(吉凶)을 관장하려는 의도가 짙은데
이러한 주술 행위는 인류 문명이 시작되면서부터 존재해 왔다.
 
 
2. 부적의 역사
 
부적은 인류가 생겨나고 원시종교가 발생했을 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선사시대에는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기 위해
주로 짐승의 뼈나 돌, 조개, 머리카락, 나무뿌리, 보석 등 자연물을 그대로 이용하다
시대가 내려오면서 점차 조형성을이 가미되고 일정한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졌다.
또한 생산활동이 활발해지고 인구가 증가하여 부적의 수요가 급증됨에 따라
빠른 시간에 제작할 수 있는 부적판의 사용이 활발해졌다.

 

조선시대 우리 조상들의 가장 큰 바램은 이차공덕(二次功德)과 왕생극락(往生極樂)이었다.

즉, 살아서 공덕을 쌓아 사후 극락세계에 가기를 염원했고,

수복강령(壽福康寧)·부귀다남(富貴多男)

즉 오래 살고 자식을 많이 낳고 복을 많이 받아 행복해지기를 기원하였다.

 

때문에 부적의 사용이 일반화되는데

전통 의학서인 허준의 『동의보감(東醫寶鑑)』에

아기를 빨리 낳을 수 있도록 하는 최생부(催生符)가 실려 있고,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궁중이나 사대부 집안에 정월 초하룻날, 세화(歲畵)를 벽에 걸거나

문을 지키는 신장을 그린 문배도(門排圖)를 그려 붙여 액(厄)이 물러가기를 빌었다고 하여

여러 형태의 주술행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러한 부적은 그냥 그리거나 찍는다고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청정한 마음으로 주문 같은 일정한 의식을 행한 후에야 그 주술적 기능을 다 한다고 믿었다.

때문에 조상들은 목욕을 하고 제물을 마련하는 등 지극한 정성을 다하여 부적을 제작하였다.

 

 

부적 안료(경명주사, 鏡明朱沙)
경명주사란, 부적을 종이에 쓸 때 사용되는 안료로 유화수은(流化水銀)의 일종이다.
『신농본초경(神農本草經)』이나 『포박자(抱朴子)』선인편에서
신약의 약재로도 다루고 있는 경명주사가 부적안료로 사용되는 이유는
붉은색이 양색(陽色)이라 음귀(陰鬼)를 쫓는데 효과가 있다고 여겼고,
붉은색 자체가 귀물(鬼物)이 공포를 느끼게 하는 위력과 힘을 가진 색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옛날에 붉은 색소를 구하기 어려울 때는 동물을 죽여 그 피를 사용한 것이 일반적인 방법이었다.

 

 

3. 부적의 종류

 

부적은 사용목적과 기능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사(邪), 귀(鬼), 액(厄)을 물리치거나 방어하는 벽사용과
주력(呪力)의 힘을 빌어 좋은 것을 더욱 증가시키는 소원성취(所願成就) 부적이 있는데
그 종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 소원성취 부적 (所願成就 符籍)
소원성취 부적에는
옥추영부(玉樞靈符), 통천보인부(通天寶印符), 소원성취부(所願成就符), 가택안녕태평부(家宅安寧太平符), 칠성부(七星符), 재수대길부(財數大吉符), 관직부(官職符), 합격부(合格符), 만사대길부(萬事大吉符), 정토왕생부(淨土往生符), 탈지옥부(脫地獄符) 등이 있다.
이러한 부적은 개인의 기원을 담아 부적목판에 새기거나 종이에 그렸다.

 

부적의 내용을 살펴보면

남성은 학문을 이루어 과거에 급제하여 고귀한 신분이 되는데 중점을 두었고

여성은 부부가 화합하여 가정의 평화를 이루고 아들을 낳아 잘 기르기를 바랬다.

그 다음이 물질적 풍요와 사후 세계를 걱정하는 내용으로

일상적 삶에서 추구되는 본질적인 것들이다. 보다 나은 생활을 영위하고 참된 인간으로써

삼강오륜(三綱五倫)을 지키려는 인간의 욕망은 신분의 높낮이와는 무관하게

모든 사람들에게 도덕적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때문에 매년 정초가 되면 수(壽), 복(福)자를 대문이나 기둥에 거꾸로 써 붙이거나

길상부적(吉祥符籍)을 찍어 나누어 가졌다는 기록이 '동국세시기'에도 잘 나타나 있다.

 

이처럼 장수의 비결을 담은 도교적 영향과 사후세계를 연결하는 불교적 영향 등이

민간신앙과 결합되어 형성된 소원성취 부적류는

인간에게 교훈적, 계몽적, 암시적 기능을 부여하는 주력(呪力)을 지니고 있다.

 

 

● 액막이 부적 (厄防止 符籍)
일명 벽사부적이라고도 부르는 액막이 부적은 종류가 가장 많고
쓰이는 용도 또한 생활전반에 걸쳐 다채롭게 쓰이고 있다.
 
민간신앙 가운데 사람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무서운 질병이나 재화를 막기 위해 만들어낸 부적으로
액운이나 사귀(邪鬼)를 예방, 퇴치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사람의 욕심만큼이나 벽사 부적 또한 다양하다.
각종 질병 예방 퇴치부, 부정에 관한 부적, 재앙퇴치부, 삼재예방부, 귀신불침부, 야수 불침부,
악몽 퇴치부 등이 있고,
또 도적 막는 부적, 오래 살 부적, 농축산물 보호부적, 전쟁을 피하는 부적 등으로 나누어진다.

 

액막이 부적은 글씨나 추상적 형상, 상상의 동물 문양 등을 붉은 경명주사(鏡明朱沙)로 쓰거나

목판에 새겨 찍어내어 출입구의 기둥이나 몸속에 숨기고 다니면 액운을 예방할 수 있다고 믿었다.

 
 
 
삼재부적(三災符籍)
삼재란 사람이 살면서 겪게 되는 세 가지 재난으로
도병재(刀兵災), 질역재(疾疫災), 기근재(饑饉災)
또는 수재(水災), 화재(火災), 풍재(風災)를 말한다.
 
사람은 9년마다 주기적으로 삼재를 맞이하게 되는데
삼재운이 든 첫 해를 '들삼재', 둘째 해를 '누울삼재', 셋째 해를 '날삼재'라 부른다.
이 가운데 가장 운이 나쁜 삼재는 '들삼재'이고
그 다음이 '누울삼재', '날삼재'의 순으로 액운이 따른다고 한다.
 

사람에게 삼재가 찾아오는 액년(厄年)은 십이지로 따지는데

사(巳)·유(酉)·축(丑)이 든 해에 태어난 사람은 해(亥)·자(子)·축(丑)이 되는 해에 '들삼재'가 들고,

신(申)· 자(子)·진(辰)이 든 해에 태어난 사람은 인(寅)·묘(卯)·진(辰)이 되는 해에 삼재가 들며,

해(亥)·묘(卯)·미(未)의 해에 출생한 사람은 사(巳)·오(午)·미(未)의 해에 삼재가 들고,

인(寅)·오(午)·술(戌)의 해에 태어난 사람은 신(申)·유(酉)·술(戌)이 되는 해에 삼재가 들어온다.

 

한편 생활 속에서도 삼재팔난(三災八難)이란 말을 많이 사용하는데,

이는 여덟 가지 재난으로 배고픔, 목마름, 추위, 더위, 물, 불, 칼, 병난을 말한다.

사람들은 삼재 액운이 든 해에 이를 막기 위해

문자화된 부적이나 머리 셋 달린 매를 경명주사로 그리거나 목판으로 찍어내어

출입하는 방문 위에 붙였다.

 

 

삼재(三災) 부적목판
목판에 새겨진 삼재부적은 그 종류가 다양한데
문자로 형상화된 부적은 삼재소멸부(三災消滅符), 옥추삼재부(玉樞三災符), 자연원리삼재부,
입삼재부(入三災符), 중삼재부(中三災符), 출삼재부(出三災符) 등으로 구분된다.
 
부적 가운데 가장 예술적인 작품으로 알려진 삼두일족(三頭一足)의 삼재부적 목판은
매의 머리가 셋이고 몸뚱이와 발이 하나로 되어 있는데
매의 사나운 주둥이와 날카로운 발톱, 큰 날개와 힘있는 꼬리가 위협적인 무서움을 주어
이러한 모습이 사람에게 찾아오는 악귀를 막아준다고 믿었다.
   
 
 
삼재팔난 부적목판
삼재팔난(三災八難)이란
수재(水災), 화재(火災), 풍재(風災)인 삼재와
배고픔, 목마름, 추위, 더위, 물, 불, 칼, 병난(病難) 등의 여덟가지 재난을 말한다.
사람들은 삼재 액운이 든 해에 문자화된 부적이나 머리 셋 달린 매를
경명주사(鏡明朱沙)로 그리거나 목판으로 찍어내어 출입하는 방문 위에 붙여 재난을 예방하였다.
      
 
 
● 불교의 전통적 부적
불교가 전래되는 과정에서 토착신앙과 결합하여 불교화된 신앙을 꼽자면
대표적인 것이 산신신앙(山神信仰)일 것이다.
산신 신앙에는 무속(巫俗)과 주술적 내용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불교 본연의 구도행 가운데 중생구제는
사바세계의 액운을 막아주고 안락한 삶을 누릴 수 있는 정신세계를 열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고등종교 차원의 교리 속에 나타나 있는 차원 높은 중생구제보다는
현실세계에 직접 영향을 미친다는 부적의 현혹은 민중 속에 쉽게 뿌리 내렸을 것이다.
 
사찰의 동지(冬至)행사 가운데
각종 부적을 신도들에게 나누어주어 가정의 행복과 풍요를 기원하는 것이 있다.
부처의 지혜로 정신이 통일되고 성불의 목적이 있는 다라니부적을 비롯,
불교와 직접 관련이 깊은 구도부(求道符), 멸죄성불부(滅罪成佛符), 당득견불부(當得見佛符),
위인염불부(爲人念佛符), 왕생정토부(往生淨土符) 등이 있다.
원래 불교적인 소재만 있었던 부적 속에
점차 길상적인 의미와 벽사적 내용이 조금씩 첨가되어지다가
근래에는 종합적인 다목적 부적으로 변화되어 가고 있다.
 

일상생활에 필요한 부적을 망라하여 종합적으로 수록하므로

부적판의 이름도 만사형통부, 백사대길부라 이름한 것도 있다.

이 역시 불교의 대승적 차원에서 중생들이 기원하는 모든 바램을

폭넓게 수용하려는 것으로 풀이된다.

 

사원에서 사용되는 대형화된 부적목판들은 대체로 먹이나 붉은 색을 사용하고 있는데

값비싼 경명주사로 찍어내기가 힘들어 수비된 붉은 황토에다 치자물을 섞어 사용하기도 했다.

 

부적 목판 가운데 가장 대형화된 것이 관(棺)을 덮었던 탑다라니 부적인데

크게는 길이가 2m가 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불교 전통의 부적을 내용별로 나누면 대략 다음과 같다.


① 구도부(求道符)

: 도를 구하는 사람이 여러 가지 장애와 번뇌가 일어날 때 이 부적을 써서 몸에 지니면

장애가 없어지고 좋은 스승을 만나 공부할 수 있게 된다고 한다.

② 당득견불부(當得見佛符)

: 이 부적을 가지고 꾸준히 노력하면 부처님을 뵐 수 있다 고 한다.

③ 염불부(念佛符)

: 업은 자업자득이지만 원행(願行)이 지극하면 남을 위해 업보를 바꾸어놓을 수도 있으니

이 염불부를 지니고 기도하면 그에게 좋은 업이 돌아간다고 한다.

일명 학인(學人)염불부라고도 한다.

④ 왕생정토부(往生淨土符)

: 이는 죽은 사람의 왕생극락을 위해서나 장차 죽음에 임한 사람이 가지는 부적이다.

설혹 죄가 있다고 해도 이 부적을 지니고

『정토삼부경』 이나『지장경』을 읽으며 "아미타불"을 염하면 극락세계에 탄생한다는 것이다.

⑤ 금강부(金剛符)

: 이것은 금강저(金剛杵)를 부적화한 것으로

이 부적을 지니면 일체 의 사(邪)가 없어지고 건강과 장수가 돌아와 행복하게 살 수 있다.

⑥ 준제부(準提符)

: 이 부적은 불교의 준제진언을 부적화한 것으로, 복과 수명이 산과 바다와 같아진다고 한다.

⑦ 관음부(觀音符)

: 관세음보살의 그림이나 조각을 몸에 지니거나 명호를 써 가지면

모든 악귀가 침범치 못하고 착한 신들이 수호해 준다고 한다.

일명 악귀불침부라고도 한다.

 

이외에도 불교부적은 수없이 많아서

팔부신장의 옹호를 받을 수 있는 팔부신장부, 노사나불부 등이 있다.

그 특징은 남을 해할 수 없다는 점과 구도 정진의 효과를 갖고 있다.

 

재료는 주사 외에 먹으로도 같은 효과를 가진다고 믿는다.

또한 금이나 동(銅)에 새겨도 좋으며 꼭 주문을 108번씩 외우거나 경전을 독송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의 부적은 인생의 번뇌와 괴로움 생사의 공포를 보리의 열반으로 이끄는

또 하나의 법륜(法輪)이기도 한 것이다. 

 

 
금강계만다라(金剛界曼茶羅)
 
만다라(曼茶羅)란 밀교(密敎)에서 발달한 상징의 형식을 그림으로 나타낸 불화(佛畵)로
신성한 단(壇:성역)에 부처와 보살을 배치하여 우주의 진리를 표현한 것이다.
 
원래는 ‘본질을 소유한 것’이라는 의미였으나,
밀교에서는 깨달음의 경지를 도형화한 것을 일컫는다.
그래서 윤원구족(輪圓具足)으로 번역한다.
 
윤원구족이란, 낱낱의 살[輻]이 속바퀴측에 모여 둥근 수레바퀴[圓輪]를 이루듯이,
모든 법을 원만히 다 갖춰 모자람이 없다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금강정경의 세계를 표현한 것을 금강계만다라(金剛界曼茶羅)라 하고
대일경의 세계를 상징적으로 묘사한 것을 태장계만다라(胎藏界曼茶羅)라고 한다.
이 만다라는
찬성사(贊成事) 염강석(廉康碩) 등과 공물색원(供物色員) 이지(李芝) 등이 발원한 것으로
그 시기는 고려 충렬왕 18년(1292)이다.
 
 
원자범상 태장계만다라(圓字梵相 胎藏界曼茶羅) 
 
한지인 저지(楮紙)에 원(圓)을 그리고
동심원(同心圓)의 중앙에 아자(阿字)를 둔 다음
그 주위에 25개의 동심원에 범어로 된 진언(眞言)을 좌에서 우의 방향으로 나열하였다.
 
일반적으로 태장계만다라는
법신여래(法身如來)의 실상(實相)을 이(理)의 방면에서 다루는 것으로
태장계(胎藏界)의 태(胎)는 생명을 출산하는 근원인 모태(母胎)를 가리키며
장(藏)은 숨겨져 있다는 뜻으로,
모태 속에서 탁생(託生)한 종자태아(種子胎兒)를 포용하여 육성해서 탄생하게 하는 것과 같이
제불(諸佛)이 대비(大悲)로서 섭화활동(攝化活動)을 실천하게 하므로
그 대비(大悲)를 태장이라고 한다.

 

 

 

- 부적의 여러 가지 -

 

호랑이 수염(호수, 虎鬚)

호랑이 수염에 관련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호랑이의 용맹한 근원을 알아보기 위해 여자 여럿이 호랑이를 만났다.
여자들은 호랑이에게 그러한 용맹이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 물어보자
꼬임에 빠진 호랑이는 수염에서 나온다고 일러주었다.
여자들은 호랑이의 비위를 맞추고 수염을 얻어내어 이 수염을 남자들에게 주니,
남자들이 용기와 활력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그 이후로 수염은 권위와 위엄의 상징이 되었으며
조선시대 당상관 이상의 무관 모자장식에 벽사용 호수(虎鬚)를 장식해 무관의 용맹성을 나타냈다.

  

 

호랑이 이빨(虎齒)
호랑이를 숭배하거나 친근하게 생각하는 현상은 일상생활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사람이 죽어 묘(墓)를 쓸 때 좌청룡 우백호가 둘러진 곳을 명당이라 하고,
집을 지을 때 집의 가장 핵심부인 상량(上梁)에 ‘용(龍)·호(虎)’등의 글자를 적어두고
복(福)을 받고 자손이 번창하며 액운이 찾아들지 못하도록 빌었다.
 
또한 벽장문이나 중문 혹은 출입문 위에 삼재소멸(三災消滅) 호랑이 부적을 붙이거나
호랑이를 그린 부적을 몸에 지니고 다니면서 액(厄)을 막고자 하였다.

 

호랑이가 인간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주술적인 의미를 지니거나

신앙의 대상이었을 가능성은 상당히 오래전부터이다.

경남 울주군 반구대의 선사시대 암각화와

고구려 고분벽화의 사신도에 청룡(靑龍), 주작(朱雀), 현무(玄武)와 함께 나오는 ‘백호’ 외에도

벽화나 석상은 물론 회화나 공예품, 자수에 이르기까지

호랑이는 상당히 오래전부터 폭넓게 다루어져 왔다.

뿐만 아니라 호랑이의 수염(鬚), 발톱(爪), 뼈(骨), 털가죽(皮) 등도

매우 큰 위력을 발휘하는 것으로 믿었기 때문에

약재로 사용되거나 벽사용 생활용구로도 사용되었다.

그 가운데 호랑이 이빨은 사람 몸에 악귀가 침범하지 못하도록 지니고 다녔던 부적의 일종이다. 

 

  

호랑이 발톱(虎爪)

어린 아이 팔뚝에 붙은 병도깨비를 쫓는 치료용으로 사용되거나
남편이 바람피우는 것을 막기 위해 지니고 다녔다.

 

 

고추, 도끼부적(苦椒·斧符籍)
고추 부적과 가지 부적, 도끼 부적은 모두 아들과 관련된 부적이다.
예로부터 도끼 모형 3개를 끈에 꿰어 주머니에 넣고 허리에 차면,
3정승에 오를 아들을 얻을 수 있다고 하였다.
이는 도끼가 무력(권력)의 상징으로
민속에서 훌륭한 아들을 얻기 위한 태교의 방편으로 쓰였기 때문이다.
 
『세종실록』에는 불임녀가 도끼 부적을 지니면 사기(邪氣)를 쫓아내어 임신할 수 있다고 하여
신하들에게 하사한 기록도 보이며,
고추부적 역시 지니고 다니면 나라에 큰 인재가 될 수 있는 아들을 얻는다고 하였다. 

 

 
조개부적(紫貝符籍)
조개는 안산(安産), 다산(多産), 풍숙(豊熟, 곡식이 잘됨)을 의미하는데 
지니면 재수 있는 일이 생긴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동자상(童子像)
동자상은 악귀의 침해를 막고 가호를 받는다는 주술적인 상징물로
'자미전서(紫微全書)'에서는 동자상을 지니면 남을 복종시키는 힘을 얻을 수 있고
어린아이의 병을 없애거나 순산을 돕는다고 하였다.
이 밖에도 아이 낳기를 빌 때 무당들이 만들어서 사용하였다.
 
 
관재구설부(官災口舌符)
경(經)을 외우고 부적을 불사르면 자연히 액화가 소멸되는 관재구설 부적이다.
 
 
1눈박이 3물고기부(一目三身符)
한 눈박이 세 물고기 부적은
물고기 세마리의 머리를 하나가 되게 겹치게 그린 후,
눈동자에 바늘을 꽂고(땅바닥에 그렸을 때에는 가시를 꽂는다)
‘물고기야, 물고기야 내 눈의 티를 빼주면 니(네) 눈의 바늘도 빼줄께’라는 주문을
눈을감고 거듭해서 외운다. 그러면 어느 사이에 티가 눈물에 씻겨 아픔이 없어진다고 한다.
 
 
학업성취부
이 부적은 옥추경(玉樞經)에 들어 있는 것으로
도(道)를 연구하고 신선이 되기를 염원할 때 쓰이는데
잡념을 없애고 정진하는 효험이 있다 하여 최근에는‘학업성취부’'로 사용되고 있다.
원명은 학도회선부(學道廻仙符)이다.

        

 

첩 떼는 부적(除妾符)
첩을 떼는 부적을 지니면 첩이 스스로 다른 마음을 먹고 남편과 사이가 멀어지게 된다고 한다.
복숭아 나무가지에 감아서 남편이 입던 내의(內服) 속에 붉은 종이로 감싸서 넣어두면
천신들이 인도하여 액운을 물리쳐 남편이 돌아온다고 하는 부적이다.
   
 
안산성취부(安産成就符)
귀한 자녀를 얻게 하고 산모와 태아를 천신들이 보호하여 순산하게 하는 부적이다.
북쪽으로 뻗은 복숭아나무 가지를 7조각으로 쪼개어
붉은 종이에 싼 후 안주머니에 넣고 다니면 효험이 있다는 부적이다.

   

 

 

4. 부적판

 

집안에 복숭아나무를 심으면 귀신이 침범하지 못한다 하여

후미진 뒷뜰이나 사립문 밖 골목길에 오래된 복숭아나무를 볼 수 있다.

 

복숭아나무는 오목(五木)의 정(精)으로

사기압복(邪氣壓伏) 백귀불침(百鬼不侵)의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 이유는 복숭아나무가 춘양의 정(精)이기 때문에

늦봄 잎이 돋아나기 전에 화사한 꽃을 피워 다른 어떤 나무보다도 생기가 충만해 있고

구마(驅魔)의 힘도 매우 왕성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특히 동남향으로 곧게 뻗은 가지, 도동지(桃東枝)는

나무의 모든 양기(陽氣)를 가장 많이 받기 때문에

음(陰)에 해당되는 귀신이 제일 무서워하는 나무로 여겨졌다.

 

때문에 부적 목판에 쓰이는 나무로는 복숭아나무, 대추나무가 주로 쓰였고

이밖에도 박달나무, 엄나무, 느티나무, 은행나무, 피나무, 소나무, 회양목, 단풍나무, 감나무 등

다양한 소재로 부적 목판이 만들어졌다.

 

나무의 선택은 대체로 부적판의 크기에 따라 결정되는데

가로 40㎝ 세로50㎝ 정도 이상 크기에서는 소나무, 피나무, 은행나무, 회양목, 단풍나무, 감나무

등의 다양한 소재로 만들어진 부적목판이 남아있다.

 

크기가 적은 판일수록 단단하고 야무진 목재가 사용되어

복숭아, 살구, 대추나무 등으로 만든 부적목판이 많다.

 

'부적방망이', 또는 '대추나무 방망이'란 말이 있는데

이는 대추나무가 단단하다는 표현이기도 하지만

부적 목판 가운데 역시 귀한 나무는 벼락맞은 대추나무(霹棗木)를 으뜸으로 치기 때문이다.

단단하고 결이 고르게 자란 대추나무는

떡살, 도장, 봉인, 능화판, 화전지판 등에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으나

벽조목은 매우 희귀한 목재로 몸에 지니고만 있어도 잡귀가 침범하지 못한다고 하며,

닭장 속에 넣어두면 닭이 울지 못할 만큼 기(氣)가 충전된 신비한 힘이 있다고 한다.

 

부적 목판으로 효험이 있는 나무는 역시 복숭아나무, 벽조목, 엄나무, 뽕나무 등인데

조각에 사용된 목재의 선택은 원통형을 4등분하여 다듬어 낸 심재(深材)가

기(氣)를 많이 받은 나무라고 한다.

 

부적 목판 새김질은 원하는 초본을 반드시 한지에 그려

다듬어진 나무에 정반대의 방향으로 붙인 다음

들기름칠을 하면 뒤집어진 형상의 문양이 나타난다.

 

새김질을 시작하는 자세는 부적을 쓸 때와 같이 경건한 마음으로 진행되는데

쓰이는 기법은 양각이나 음각적으로 이루어진다.

새김질의 방법은 서각을 할 때나 판화를 할 때 사용하는 기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칼의 종류는 끌, 창칼, 평칼, 삼각칼, 둥근칼 등이 기본으로 적용된다.

 

완성된 부적목판은 부정을 방지하도록

수비된 황토물이나 경명주사에 담근 후 효험이 있기를 기원하는 간단한 예를 갖추고 사용된다.

 

 

금은자래득 부적목판(金銀自來得 符籍木板)
기복부적(祈福符籍)의 일종으로 벼락맞은 대추나무로 만들어졌다.
근검하고 덕이 지극한 사람이 이 부적을 지니면 금과 은이 저절로 집안에 쌓인다고 한다.
                  

 

 

 

 

  

 

 

 

<최영장군 像>, 비단에 채색, 52×86㎝, 가회박물관 소장

 

 

장군(將軍)신은

대부분 나라를 위해 많은 공을 세운 인물들로 인간을 보호하고

무당을 수호하며 잡귀를 물리치는 의미로 그려진다.

 

이 가운데 고려 때의 명장 최영장군은

청렴결백하고 남의 재물을 탐내는 일이 없었던 역사적인 인물로

위화도회군을 단행한 이성계에 패하여 억울하게 죽은 원혼이 되어 무속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이 밖에도 위력을 가진 무신으로 인간을 이롭게 하는

임장군(임경업장군), 장장군(장계홍장군), 홍장군, 조장군, 남이장군, 김유신장군 등

유명 장군의 성을 따서 만들어진 장군신들이 많다.

 

    

(왼쪽 - 임경업장군신)               (오른쪽 - 남이장군신)

한국의 토착신으로서 무당의 일곱 계급 중 셋째 계급인 박수. 만신 계급의 신령이다.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실제 경상남도 통영시 사량면 금평리 150번지에 위치한 최영장군 사당은

고려 말엽 왜구가 침입했을 때, 최영 장군이 이곳에 진을 치고 진두지휘하여 왜구를 무찌르고

나라를 지킨 공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고려의 명장이자 재상이었던 최영장군을 기린 이 사당 안에는

‘고려공신최영장군영위(高麗功臣崔瑩將軍靈位)’라고 적혀 있는 위패가 있고

왼편에 다섯 선녀에게 호위된 최영 장군의 영정이,

오른편으로는 말을 타고 있는 장군의 마부상이 있다.
이곳 사람들은 매년 2회 음력 1월 14일, 12월 14일 사당제를 모셔오고 있다.

 

 

 서울 서대문구 인왕산국사당에 있는 무신도. 최영장군신.

최영장군은 고려의 명장으로 죽어서 무속 신앙의 숭배 대상이 되었다.


이처럼, 최영장군신은 주로 중부지방의 무속신앙에서 모시는 인물신의 하나로

최영장군의 최후가 그렇듯이 대개 억울하게 죽은 원혼을 위로하고자 하는 원혼신앙이 작용한 것이다.

 

 

 

 

  

 관우(關羽)장군 / 종이에 채색, 65×110㎝, 가회박물관

  

중국 삼국지에 등장하는 관우를 모시는 사당이

임진왜란, 정유재란 때 난리를 피하는데 영험이 있다고 전해진 후 크게 유행하게 되었다.

 

병을 지켜주는 수호신 역할로 단 몇 장의 무신도라도 모시는 곳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장군상 가운데 하나가 관우장군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왕가에서도 남묘(南廟)와 동묘(東廟)에 관운장을 모시게 하고

금 오백냥과 쌀 오십석을 내린 적도 있다.

현재 서울의 동묘를 비롯한 안동, 남원, 강화 등지에 관운장을 모신 사당이 남아 있다.

 

관운장의 몇 가지 특징은 반드시 의자에 두 다리를 펴고 앉아 있으며,

사납게 찢어진 눈과 긴 수염이 있고 책을 펴들고 있거나 위협적인 청룡도를 들고 있다.

붉은 얼굴에 곤룡포를 입거나 무복을 입었지만 머리의 관은 각기 다르다.

가끔은 적토마와 마부가 배경으로 등장되기도 한다.

  

 

 

 

 무 신 도  

                                                                                           

1. 무신도의 기원과 역사

 

무신도의 기원을 정확히 밝히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무격, 혹은 샤머니즘으로서의 무속신앙이 우리의 역사 이래 토착 종교로 자리잡은 이후,
모든 주술적인 제의(祭儀)에 무속신이 그려지거나,
상징된 무구(巫具)나 무화(巫畵)가 등장했었다는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무속신앙은 토착종교로서 불교와 유교의 이입 휠씬 전부터 있어 왔고,
불교와 유교가 도래한 이후에도 그 종교들과 섞이면서 민간신앙으로 꾸준히 내려왔다.
그렇게 본다면 무속화의 기원은 우리의 역사와 함께 있어온 셈이다.
 
더욱이 고대의 사회가 제정일치시대였던 점을 감안한다면
단군 이래 무속화는 종교화로서 상당히 많이 그려져 왔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어떤 내용으로 신격시되었는지 추측하긴 어려우나
기록으로 남아 있는 단군영정이나 고구려 시대의 벽화들을 면밀히 살펴보면
무속화로서의 기능과 내용을 포괄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구한말 개화기 무렵에는 무속이 미신타파라는 이름으로,
또는 혹세무민한다고 하여 강하게 철퇴를 맞았다.
이때 많은 당집들이 철거되었으며, 무속은 철저히 배척되었다.
 
당시의 신문에는 잡신의 화상(무신도였을 것이다)을 집에 걸어두는 것조차
법적으로 금지하는 훈령이 내려졌고, 이를 어긴 사람들을 단속하는 기록이 보인다.
그러나 뿌리 깊이 내린 민중신앙은
어떤 탄압에도 쉽사리 끊어지지 않고 끈질기게 이어져 내려왔다.

근래에 그려진 무속화 중에는
그 당시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일본순사의 모습까지 등장하여
시대적인 사회환경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이는 무신도가 지니고 있는 단편적인 성격을 살펴볼 수 있게 한다.
이렇듯 무신도는 민속문화 속에서 발견되는 우리의 기층문화로
솔직하고 직설적인 서민들의 모습을 담고 있는 대표적인 그림이라 할 수 있다.
 
 
2. 무신도의 종류
 
무신도의 종류는
무신의 성격, 무신의 신격, 무신의 외모, 무신의 기능에 따라 다양하게 분류될 수 있다.
 
무신도는 인간의 욕망과 삶의 안녕을 비는 신앙의 대상으로서 그려지기 때문에
인간의 세속적인 모든 부분을 관장하는 다양한 신들이 등장하게 마련이다.

무당을 영험하게 하는 무조신은 가장 종교화적인 부분을 의미하고 있지만,
직접적으로 여타 종교의 도상에서 빌어온 그림들 이외에도
다른 대부분의 무신들은 일상적인 삶의 기복과 직접적인 연관을 지닌다.
 
예를 들어
수명장수는 칠성신, 재복을 주는 대감신,
동서남북을 지켜 주는 오방신, 수명을 관장하는 염라대왕신,
액을 막아 주는 창부, 천연두를 물리치는 호구아씨 등은
결과적으로 부귀다남, 수명장수처럼 인간의 근본적인 기복신앙의 내용을 고루 담고 있다.
자연신 속에는 천신 · 지신 · 수신 · 농신 · 화신 · 방위신 등이 있고
외래종교인 불교 · 유교 · 도교 · 기독교 계통에서
무속화엔 등장하는 인물로는
석가모니부처,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미륵보살, 십대왕, 염라대왕, 동진보살, 사명대사, 서산대사,
무학대사, 산신, 독성, 칠성, 오방신장, 옥황상제, 공자, 맹자, 예수 등이 보이는데
불교 계통이 제일 많다.
 
칠성신(七星神)
 
칠성신앙은 수명장수, 소원성취, 자녀성장, 평안무사를 비는 일을 담당한다.
도교에서는 북두칠성을 일(日), 월(月), 화(火), 수(水), 목(木), 금(金), 토(土)의 정수로 간주하고
인간의 길흉화복을 주관한다고 믿고 있다.
 
하늘의 별을 신앙하는 칠성신앙의 기원은 원시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도교·불교·무속 등 여타 종교에서도 숭상하며,
산신과 함께 우리 민족에게는 매우 친근한 신앙이다.
여성 칠성도 있으며 관복차림에 홀을 들고 머리에 별을 이고 있는 것도 있다.
 
제1칠성(탐랑성군)  제2칠성(거문성군)  제3칠성(록존성군)  제4칠성(문곡성군)
제5성군(염정성군)  제6칠성(무곡성군)  제7칠성(파군성군)

 

  

또한 무속화에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는
시대적인 변천이나 사회 환경, 전쟁으로 인하여 나타난 인물이 많으며
질병이 유행하거나 전쟁, 천재지변 등으로 사회가 혼란한 때일수록
무속신앙의 종류와 대상이 많아지는 경향을 볼 수 있다.
 
한편, 문명의 발달로 사라져 버린 것도 많다.
독각귀, 독개비, 독갑이 등으로 불리던 도깨비 귀신도
현대문명의 이기인 전등불의 등장과 함께 아예 사라져 버린 무속신이다.
 
그리고 조선 시대 후기 전국에 걸쳐 가장 무서운 귀신,
가장 두려운 존재로 크게 유행하였던 괴질, 전염병인 천연두를 막아주던 호구별성의 역할도
천연두가 사라지자 운명을 점치거나 각종 현대 질병을 담당하는 신으로 변모해 가고 있다.
 

청궁 호구별성(淸宮 戶口別星) - 호구마마(戶口媽媽)

 

 

  

 

 

유행성 홍역 두신(痘神)으로
손님, 손님마마, 별상애기, 별상마마 등으로도 불리는 신이다. 또 호구마마(戶口媽媽),
호구별성(戶口別星) 별성마마(別星媽媽), 강남별성(江南別星) 등으로 불린다.
 
예방주사나 의학이 발달하지 못한 시대의 유행성 열병은 제일 무서운 병으로
마을의 한사람이 앓기 시작하면 집집마다 환자가 생긴다고 믿어 '호구(戶口)'라 썼다.
이 괴질은 강남 혹은 淸나라에서 호귀(胡鬼)가 마을마다 찾아온 것이라 생각하였다. 
일설에는 몽고군에게 강제로 끌려간 처녀들의 영혼을 달래는 신이라는 설도 있다.
 
왕이나 왕족에 붙였던 존칭어로 '마마'를 사용하기도 하는데
그 자체가 병을 옮기고 다니는 신이므로 노여움을 풀고 은총을 베풀어
오래 머물지 말고 쉽게 돌아가달라고 정성 들여 제물을 장만하여
아름다운 복장과 노래로 굿을 하며 대접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이는 또한 가장 무서운 질병 귀신으로 믿어
지방별로 제를 올리는 동해안 별신굿, 부여 은산 별신굿, 안동 하회 별신굿이 있었으나
대상이 점차 변하여 근래에는 용왕, 풍어, 마을제사 등으로 변해 버렸다.

 

  
근래에 조사된 무속화 가운데는
만법통일의 명제 아래 자비석가, 인의공자, 박애기독을 표방하며
세 교주가 나란히 한 장의 무속화 속에 나타나는 것도 있다. 참으로 기이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무속은 타 종교에서는 전혀 상상도 할 수 없는 폭넓은 포용력을 지니고 있으며,
어떤 종교가 들어와도 싸우지 않고 공존 관계를 유지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3. 무신도의 의미와 상징성
 
무교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종교인 만큼
무교 속의 무속화도 역사가 깊고,
그 바탕 속에 깔려 있는 의미나 상징성을 찾아내는 일은 바로 민족정신을 찾는 일이며,
미술사에서도 매우 의미가 크다고 보아야 한다.
 
종교화로서 무신도를 이해하는 데는 그 속에 들어 있는 상징성을 읽어내지 못하면
의미를 알지 못하고 단순한 그림으로 회화적인 성격만을 보게 된다.
때문에 무신도의 의미나 신의 역할, 성격 등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무구나 지물, 악기, 무복, 채색, 동자, 배경, 굿의 종류나 무가 등을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1) 무구와 지물
칠금령(무당방울), 부채(파초선, 윤선), 목탁, 연꽃, 지화(수파련), 복주머니, 꽃병, 복숭아,
나뭇가지, 부적, 엽전, 산통, 지팡이, 두루마리, 무경책, 불경, 홀, 규, 천도 복숭아, 산삼, 칠성도,
칠성언월도, 삼지창, 창, 신칼, 신경, 활, 화 살, 방망이, 철퇴, 벼락, 작두, 빗자루,
사령기, 오방기가 있다.
 
무신도 속에 나타나는 무구나 무신도 속의 지물 상징을 크게 나누면
치병의 기능과 사제적기능, 공수의 기능, 놀이 기능으로 분류할 수 있다.
2) 악기
징, 꽹과리, 태징, 북, 장구, 법구, 호적(태평소) , 대금(젓대), 소금, 해금, 제금, 피리, 박고가
포함된다. 무당굿에서 반주로는 삼현육각의 편성이 보통이지만
징, 꽹과리, 북 등은 단일 악기로도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무신도에 나타나는 무속 악기류는 상징성보다는 주변 장엄, 즉 분위기를 조성하게 되며
화랭이로 부르는 창부씨는 무속악을 다스리는 신으로 쉽게 구별이 된다.
사용되는 악기에 따라 굿의 종류나 순서가 바뀌어지는 경우가 있다.
3) 무복과 관모
용포, 조복, 도포, 두루마기, 전복, 갑옷, 철릭, 바지, 저고리, 치마, 활옷, 원삼, 가사, 장삼,
금관, 사모, 갓, 고깔, 와룡관, 초립, 주립, 복건, 패랭이, 투구, 쪽두리, 화관, 술띠, 각띠, 전대, 흉배,
패물을 들 수 있다.
무신도에 나타나는 원색적인 무복이나 의관은 매우 다양하며
시대적인 변천에 따라 변화된 양상을 쉽게 볼 수 있다.
세습무 굿에서는 3∼4벌의 옷으로 족하지만
강신무들의 굿판에서는 20여 종의 무복을 갈아입기도 한다.
4) 무가, 무경, 굿거리
① 무가(巫歌)
: 부정무가, 조상무가, 삼신무가, 칠성무가, 제석무가, 성주무가, 서당무가, 손님무가, 군웅무가,
지신무가, 산신무가, 뒷전무가, 넋청무가 등이 공통적으로 사용되며
신을 즐겁게 하거나 노여움을 푸는 역할을 한다.
 
② 무경(巫經)
: 명단경, 지신경, 성조경, 동토경, 조왕경, 제석경, 옥추경, 축귀경, 용왕경, 칠성경, 천존경, 옥황경
등 90여가지가 넘는데 내용은 귀신을 위협하여 쫓아버리거나 행운을 빌고 안정을 위한 것이다.
 
③ 굿거리
: 대개 20거리이며 부정, 불사맞이, 본향, 조상거리, 대감거리, 성조맞이, 상산거리, 별성거리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4. 무신도의 회화적 성격
 
 

  

무신도는 종교화로서나 민화로서 특성을 고루 지니고 있다.
특히 무신도가 지니고 있는 색채(오방색을 중심으로 한)의 표현은
조형적인 측면에서도 전통문화의 색채 바로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으며,
신성화임에도 불구하고 익살적인 표현이나 과장된 묘사는
우리 회화의 다른 한 성격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무신도의 제작은 대부분이 무당의 주문에 의하여 그려졌다.
무속화의 배경 설정은 무당이 요구한 주문에 의하여 그 유형이 설정되었을 테지만
그리는 사람, 즉 화가에 따라서도 달라지게 되었을 것이다.
 
무신도는 초에 의하여 그려지거나 실사, 즉 초없이 직접 그리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불교의 탱화나 민화, 자수 등은 초나 본온, 즉 '본'이라고 부르는 밑그림이 전하여지는데
무속화도 같은 경우가 많다.
무속화는 배경에 등장하는 등장인물이나 색채, 지물 등만 다를 뿐, 불화와 별로 다른 점이 없다.
초를 사용하여 무속화를 그리는 경우,
상당한 그림 수업을 받았거나 솜씨가 뛰어난 화가로,
불화를 전문으로 그리는 스님이나 무명의 민화 작가가 이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무신도는 작가의 학력이나 사회 경험, 무속의 이해도에 따라 각기 다른 상상력을 표현하게 된다.
따라서 무신도를 이해하는 데는 굿의 내용과
무경·무가, 전설이나 설화 등을 파악하고 체험해야만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 가회박물관 홈페이지에서
 
  
 

 

 

 

 

 

 ● 무속(巫俗)신앙

 

 

(1) 신칼(神刀)

 

무구(巫具)의 하나로, 무속에서의 칼은 모양새와 쓰임새에 따라 여러 종류가 있는데

언월도(偃月刀), 청룡도(靑龍刀), 신명도(神明刀), 신도(神刀), 신검(神劍), 칠성칼, 장군칼, 군웅칼,

타살칼, 명도칼 등으로 다양하다.

신령을 모시고자 할 때, 잡귀나 잡신을 몰아낼 때, 신의 영험력을 과시하고자 할 때 등에 사용된다.

주로 무쇠나 놋쇠로 만들고 벼락맞은 나무로 만들기도 한다.

형태는 쇠로 된 칼날 부분과 나무로 만든 칼자루 부분으로 되어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19세기, ➀ 4.7×29×1㎝ / ➁ 5×25×1㎝, 서울역사박물관

길이가 4 정도 차이가 나는 참나무로 만든 칼 2점이다.

손잡이 길이는 두 점이 거의 같으나 칼체가 ➀이 더 길며

손잡이도 ➁와 달리 끝이 둥글게 깎여 있다.

➁는 칼날과 끝이 곡선으로 처리되어 있으며,

두 점 모두 칼 끝 양면에 단순한 형태의 꼬리와 부리가 긴 새를 새겨 넣었다.

두 점 모두 새모양은 서로 유사하나 ➁에 새겨진 새는 ➀과 달리 발까지 표현되었다.

두 점 모두 손잡이 끝에 구멍을 뚫어 놓아 끈 같은 것을 연결할 수 있도록 하였다.

 

 

 

1875년, 너비 5.7㎝, 길이 17.7㎝, 서울역사박물관

전시된 신칼은 칼날과 칼자루를 모두 무쇠로 만들었다.

칼자루의 끝은 원형의 고리형태이고, 칼날은 낫 모양으로 구부러져 있으며 칼날 끝은 뾰족하다.

 

 

(2) 무당방울(巫鈴)

 

 

무당이 굿을 하거나 점을 칠 때 사용하는 무구의 하나인 방울이다.

무령(巫鈴), 요령이라고도 하며,

무당방울은 청동제의 방울 7개를 16-17㎝ 길이의 자루 끝의 둥근 테에 묶은 형태를 취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것을 칠금령(七金鈴) 또는 칠성(七星)방울이라 부른다.

그 7개의 방울은 칠성을 상징한다.

때로 8개의 방울이 달려있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큰무당이 사용한다고 한다.

 

무당이 굿을 할 때 무당방울을 왼손에 들고 이따금씩 흔들어가며 춤을 춘다.

춤추면서 흔드는 것은 잡귀를 쫓고 신령을 부르는 뜻이며, 정신을 신령에게 집중시키기 위함이다.

 

이밖에 점구(占具)로도 쓰이는데,

점상(占床)에다 부어놓은 쌀더미 속에 방울을 집어넣었다가 꺼내어

방울에 묻은 쌀알을 점상에다 털어내고 그 숫자와 형태로 점치기도 한다.

 

 

전시된 무당방울은 7개의 방울이 달려있는 칠금령이다.

손잡이 끝에는 고리가 달려 있고,

위쪽에서 두 갈래로 갈라져서 끝을 연봉오리 형태로 마무리하였다.

두 갈래로 갈라진 한 쪽에는 4개의 방울이, 다른 쪽에는 3개의 방울이 달려 있다.

 

 

(3) 무당부채(巫扇)

 

접었다 폈다 할 수 있게 만든 접부채 형태의 무당부채는 무당들이 사용한다.

무당방울과 함께 귀중한 귀물(鬼物)로 인식되면서

신령을 부르고 모시고 놀리고 보낼 때 사용되는 중요한 신구(神具)이다.

 

신과 관련되어 사용되는 의례용 부채이므로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가정용 부채나 소지품으로 지닐 수 있도록 만들어지는 장식용,

무용가들의 예술용 부채와는 쓰임새가 확연히 다르다.

크기는 일반부채보다 크게 만들어지며 부채살이 뭉툭한 특징을 가진다.

 

부채 표면에 그려지는 그림은 신령이나 무의식과 관련되는 무속적 그림을 그리는 것이 원칙이다.

해와 달, 팔선녀, 장군, 선녀, 승려, 도인, 대신 등을 그려넣는다.

무속적 그림의 색상은 원색인 오방색을 사용함으로서 종교적 목적의 신앙상이 부여된다.

또한 일반적인 생활용품이나 예술용품의 부채에는 주로 아름다운 매듭이나

금은보석의 조각품으로 선추(扇錘)를 달지만,

무속에서는 원색의 기다란 천을 매달아 허리띠에 끼어넣을 수 있도록 하거나,

춤을 출 때 나풀거릴 수 있도록 하여 신비성을 갖게 한다.

 

종류로는 접부채 형식의 칠성부채, 삼불제석부채, 만성수부채, 성수부채, 일월부채, 토인성수부채,

삼선녀부채, 감흥부채, 애기 및 동자씨부채, 도사부채, 광대부채 등이 있으며

방구부채(團扇) 형식의 선녀부채가 있다.

또한 동글부채 형식의 만성수둥글부채, 애기 및 동자씨동굴부채, 칠성 및 제석동글부채 등이 있다.

 

무속세계에서의 부채는

악신(惡神)은 떨쳐버리고, 선신(善神)은 불러들이는 무당의 필수적 신구(神具)로써

부채바람을 통해 잘못된 과거를 씻어내고 현재의 복을 들이며 미래의 예언적 뜻을 알게 된다.

 

  

조선시대, 전체길이 40.6㎝, 서울역사박물관

전시된 무당부채는 표면에 해와 달이 표현되어 있는 일월선(日月扇)으로

8명의 선녀가 그려져 있는 팔선녀부채이기도 하다.

중앙에 푸른색의 옷을 입은 신령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각 4명의 선녀가 있고,

끝에는 해와 달이 있다. 색상이 비교적 양호한 상태로 남아 있으며

대나무 부채살에는 옻칠이 되어 있고, 손으로 쥐는 부분에는 금속으로 만든 고리가 달려 있다.

부채살은 49살이고 부채살의 아랫부분이 곡선으로 휘어져서 아름다움을 준다.

 

 

(4) 점통(占筒)

 

조선, 지름 2.6㎝, 길이 6.9㎝ / 20세기, 지름 2.4㎝, 길이 9.4㎝, 서울역사박물관

 

 

얇은 대나무쪽에 육효(六爻) 점괘를 표시한 60쪽의 산(算)을 담은 원통으로

이것을 들고 쌀점과 같은 식의 축원을 하며 흔든 다음,

뽑은 산가지의 괘를 점책 괘에 맞추어 운수를 맞히는 것이다.

이 점통은 팔각형으로 표면에 옻칠을 하였다.

윗면에는 산가지 한 개가 나올 수 있을 정도의 사각구멍이 뚫려 있고,

점통 안에는 29개의 산가지(算)이 들어 있다.

산이 나오는 구멍에는 지름 1.3㎝의 원형 덮개가 있다.

 

또 하나의 점통에는 겉면에 '자명죽(自鳴竹)'이라 음각되어 있다.

점통 안에는 쇠로 만든 5개의 산(算)이 들어 있다.

각각의 쇠마다 다른 의미를 지니는 표시가 음각되어 있다.

 

 

(5) 명두(明斗 - 대명두, 중명두, 소명두)

 

신비로운 신성(神聲)의 반사경으로 귀신과의 대화를 확성(擴聲)하는 주술적인 무구이다.

굿당에 메어놓을 때나 대신할머니 무신도 위에 거는 것으로

3개와 4개를 따로 묶어 2쌍으로 사용하며,

명도(明圖), 일월명두(日月明斗)라고도 한다.

뒷면은 한 가운데 고리가 있어 끈을 끼워 걸게 되어 있고,

현재는 비단으로 된 것을 사용하지만 예전에는 명주나 인조천을 끈같이 연결하기도 했다.

 

명두(明斗)는 한국무당에게는 신령의 거울 내지 신령마음의 거울로 받아들여져

상단의 중앙에 걸린다.

무당이 어쩌다 같은날 두 집안을 위해 굿을 벌여야 할 곤란한 경우,

그날 한 집안을 위해서만 굿을 거행하고, 다른 집에는 그 사이 명두(明斗)를 걸어둔다.

또 명두는 본시 큰 무당이 신딸에게 전해주는 상징적인 무구로서

신부모에게 신자식으로 물려지기도 한다.

명도(明圖)라고 하기도 하며 거울과는 별 상관이 없는 물건이다.

 

 

 

- 20세기, 서울역사박물관

전시된 명두(明斗)는 둥글고 가운데가 볼록한 거울 모양이고,

모두 유제(鍮製=놋쇠)로 만들어졌다.

가장자리는 약간 올라왔으며 군데군데 패어졌다.

앞면은 중앙에 2조(條), 가장자리에 2조, 1조의 가는 줄(線)을 둘렀다. 

 

'대명두(大明斗)' 명칭이 양각되어 있는 명두는 별을 상징하는 삼각형의 돌기들과

5개의 반원문(半圓紋)이 있다. - 크기 지름 23.1㎝

'중명두(中明斗)'는 별을 상징하는 삼각형의 돌기들과 3개의 반원문이 있으며 - 크기 지름 21.5㎝

'소명두(小明斗)'는 별을 상징하는 삼각형의 돌기들과 4개의 반원문이 있다. - 크기 지름 19.8㎝

 

대명두

 

중명두

 

소명두

 

 

 

 

 

(6) 성주단지

 

높이 17.8㎝, 입지름 20.5㎝, 몸통지름 28.7㎝, 바닥지름 17.5㎝,

뚜껑높이 6.4㎝, 뚜껑지름 21.3㎝, 서울역사박물관

 

 

성주단지는 갈색을 띠는 도기로 구연은 넓고 뚜껑을 덮을 수 있도록 단을 만들었다.

구연에서 하부로 내려가면서 약간 넓어지다가 동체 중앙 부분에서 급격하게 좁아진다.

동체 중앙에 두 개의 손잡이가 달려 있다.

굽은 평저를 이루었고, 표면에는 광택이 있으며, 기면 가득 마모된 흔적이 있고,

내부에는 기물 성형할 때 두드린 자국이 남아 있다.

 

뚜껑은 나무로 만들었으며 13각을 이룬 손잡이 부착되어 있다.

뚜껑은 편평하며 단을 만들어 덮기 쉽게 만들고, 뚜껑 윗면은 옻칠을 하고,

아랫면은 호작문(虎鵲紋)의 부적을 양각하였다. 조각은 근대에 와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아랫면 전체에 붉은 색의 칠을 하였다.

 

 

 

 

 

 

 

● 그림당사주(畵唐四柱)

 

 

19세기 말 - 20세기 초, 서울역사박물관

 

 

 
당사주책은 사람이 태어난 해와 월, 일, 시를 의미하는 사주(四柱)를 토대로
한 사람의 일생 운세를 주역에 맞춰 풀이한 책.
   

그림당사주는 일반 사주와 보는 방법이 다르다.

당사주는 사람의 사주를 토대로 천상에 있는 12별의 운행에 맞춰
한평생의 길흉을 점치는 방법인데, 중국의 주역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당사주책이 유행하였다.
이 책은 일반적인 간지에 근거한 상생과 상극, 운세에 따른 길흉을 판단하는 방식이 아니라,
오직 12성(星)의 운행방식을 토대로 운세를 결정하는 특징이 있다.
 
이러한 점법은 중국 당나라 때 이허중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으로

앞에 천(天)을 넣어 귀(貴) · 액(厄) · 권(權) · 파(破) · 간(奸) · 문(文) · 복(福) · 역(驛) · 고(孤) ·

인(刃) · 예(藝) · 수(壽)의 12성을 사람의 사주에 맞춰 길흉화복을 판단하였다.

 

그 뒤 송나라 서자평이 이허중의 설에 간지, 오행의 상생과 상극의 길흉을 가미한 뒤에

당사주와 사주로 분리되어 발달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민간신앙으로 발달되어

이허중의 원문에 그림을 삽화하여 서민들이 알기 쉽게 만들어진다.

오른쪽 페이지에는 그림과 풀이를, 왼쪽 페이지에는 자세한 설명을 기록했다.

점술에 대한 관심이 높았던 우리 민족의 심성과 부합되어 활발하게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사주를 통해 자신의 미래를 알고자 했던 당시 사람들의 관심이 얼마나 높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 True Lo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