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더듬어보고(전시)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이 아름답다 - (6) 상여장식

Gijuzzang Dream 2008. 5. 7. 21:37

 

 

 

 

 상 여(喪輿)

 

 

 

"천지는 만물이 묵어가는 여관이요 (夫天地者 萬物之逆旅)

 시간은 백대를 지나가는 나그네다  (光陰者 百代之過客)“

 - 이태백《춘야연도리원서(春夜宴桃李園序)》

 

 

 

                         북망산(北邙山) 가는 길

 

                         만장도 없이

                                 선소리꾼 요령(搖鈴) 따라

 

                                 긴 상여소리

                                 잦은 상여소리

                                 구슬픈 가락 흩날리는

 

                                 청상(靑孀)

                                 꽃상여

 

                                 길가의 시든 할미꽃도

                                 고개 숙여 눈물짓네

  

                                 비오는 날이면 날마다

                                 달뜨는 밤이면 밤마다

                                 한시름 속에 살며

 

                                 평생 새겨 온 한(恨)

                                 홀로 가슴에 묻고 가서

 

                                 달구꾼

                                 회다지 소리 빌어

                                 모두 풀어놓고

 

                                 훨훨 나비 날 듯

                                 빠져나와

 

                                 뜬구름 타며

                                 실바람 타며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

                                 다시는 태어나지 않으리 

 

 

 

 

 상여(喪輿)와 그 장식품

 

  

 

방상씨탈(方相)

 

고인의 편히 잠들도록 악귀를 쫓는 상징적인 기능으로

원래 역귀를 쫓아내는 의식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상여 행렬 맨 앞에 서서 죽은 이에게 귀신이 달라붙지 못하게 잡귀 잡신을 몰아내는 역할과

묘지까지의 길을 인도하는 역할을 하는 이가 방상씨이다.

 

5-6세기경 신라시대부터 장례의식에 사용된 기록이 있는 방상씨는

황금색의 눈을 네 개나 가진 귀신 쫓는 탈로서,

두 사람이 이 탈을 쓰고 긴칼이나 창과 방패를 들고 앞장을 서서 칼을 휘둘러

잡귀를 몰아내는 구실을 하는데 이것은 죽은 이의 저승길을 깨끗이 닦아주는 의식이다.

 

진도 지방에서는 이와 같은 행위를 일러 '희광이 춤'이라고 부른다.

희광이는 사형 집행인인 망나니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행세하는 집안의 어른이 죽으면 죽은 이가 매장되기 전에

평소에 원한을 사서 죽은 귀신들이 공격할 것에 대비하여

이들을 얼씬 못하도록 희광이 춤을 추게 했던 것이다.

상여 주위를 돌아다니며 칼을 휘둘러 무엇을 베거나 찌르는 시늉을 하며 위협적인 춤을 췄다.

 

방상씨는 상여가 묘지에 도착하면 미리 파 놓은 광중 속에 들어가 칼춤으로 잡귀를 몰아내는데,

죽은 이에게 원한을 가진 귀신이 죽은 이를 괴롭히지 못하게 막는 것이다.

하관할 때가 되면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오던 길이 아닌 다른 길로 달아나게 했다.

그러지 않으면 잡귀들의 등살에 죽을 수도 있다고 여겨

상가에서는 희광이 노릇을 한 사람에게는 그 위험성을 고려하여

특별히 보수를 챙겨 주기도 했었다고 한다.

또는 방상씨 탈을 쓴 허수아비를 만들어 수레에 태우고 끌어가기도 한다. 

 

 

  

■ 상여

 

상여는 이승과 저승을 연결하는 매개체이기도 하고 꿈꾸는 극락세계로 표현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승에서 못다 누린 부귀영화를 다음 생에서 다시 누리라고 꽃상여로 꾸미고,

많은 사람들이 이를 메고서 노래하며 인도한다.

꽃상여란 일반 백성은 절대로 살아서 타볼 수 없는 그런 가마라는 상징성도 가지고 있다.

 

상례(喪禮)에서 시신을 나르는 것은 상여만이 가는 것이 아니고

은 이의 이름을 쓴 명정(銘旌)이 앞서고,

다음에는 죽은 이의 영혼을 태운 영여(靈輿: 요즈음은 사진으로 대신한다)를 멘 사람이 따른다.

그 뒤에 죽은 이의 업적을 기리는 공포(功布)와 만장(輓章)이 서고

상여는 그 뒤를 따르며 상주와 문상객들은 다시 그 뒤를 따른다.

 

상여의 행렬은 독특한 장례법이 있는 경우에는 이와 전혀 다르게 진행되기도 하는데

일반적으로는 이러한 순서로 운구의 행렬은 이어진다.

 

상여의 각 부분은 매우 복잡하고

또한 조립하는 기법이 직접 참여하지 않으면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은데

우선 연초대라는 긴 나무 두개를 놓고 그 아래에 상여꾼들이 횡으로 멜 수 있도록 장강을 놓는다.

상여꾼이 28명이면 장강 사이에 서게 되고 한 줄에 4명씩 7줄이 되어야 하므로

장강의 숫자는 8개여야 하며 36명이면 10개가 된다.

 

그리고 연초대 위에 관을 놓고, 이를 상여 몸체로 씌워서 상여를 완성한다.

이 때, 상여에는 여러가지의 장식을 달거나 꼽아두는데 이 또한 다양하다.

청풍부원군의 상여 꼭대기에는 사자를 타고 있는 동방삭(東方朔)이 있다(신선이라고도 한다).

동방삭은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삼천갑자(三千甲子)를 살았다는 전설 속의 인물이다.

이는 나무꼭두와 같은 상징성을 지니고 있다.

동방삭을 상여에 태운 이유를 장수의 상징인 동시에 귀신을 쫓을 수 있는 힘을 가진 동방삭은

저승길을 안내하는 길잡이로 내세워 영혼을 안전하게 저승으로 인도해 주기를 바라는

후손들의 염원의 표현한다.

우리 조상들은 죽음을 몸과 넋의 분리 현상으로 보았고

사람이 죽으면 몸은 뭍이고 영혼은 저승으로 가 염라대왕에게 심판을 받는다고 믿었기 때문에

동방삭을 상여에 놓는 것이다.

 

상여는 관에 넣은 주검을 죽은 이가 살던 곳에서 무덤으로 옮겨 주는 가마이다.

상여는 그 규모가 커서 상여를 운반하는

상두꾼의 수효는 보통 24명으로 6명씩 두 줄로 양쪽에서 가마채에 묶은 끈을 어깨에 메고 움직인다.

더 큰 상여는 36인의 상두꾼이 메도록 하였다.

 

근래에 사용되기 시작한 보다 간소한 형태의 꽃상여는

보통 8-14명의 상두꾼이 가마채를 어깨에 멘다.

대부분 마을 주민들이 공동으로 상여를 사용하였으며

조립식이어서 평소에는 해체하여 특정한 곳간에 보관한다.

 

상여를 정비하는 일은 상두계원들이 맡아 한다.

상두계는 마을의 이삼십 가구로 이뤄지며

상여의 운반, 무덤 터 다지기, 묘쓰기 등 일을 하는 공동조직이다. 상두계를 향도계라고도 부른다.

상여를 나가기 전날에는 상두꾼들이 모여 빈 상여를 메고 발을 맞춰보며 놀이판을 벌이는 등

서로의 친목을 돈독히 한다.

상여의 목적은 관에 넣은 주검을 무덤까지 운반하는 것이기 때문에

주검을 무덤까지 옮겨 놓은 다음 상여를 불에 태우는 경우도 있다.

특히 꽃상여는 제작하기가 간편하여 초상나면 즉시 만들고, 사용한 다음에 보통 태운다. 

 

승언리상여(충남 태안군 안면읍 승언리 2구)

길이 2.2m, 폭 1m, 높이 1.5m, 충남도지정문화재자료 제315호 지정.

  

조선 말기 왕실에서 사용했던 상여로 추측되며 전통적인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양장틀의 앞뒤에는 용틀임조각을 하였고, 네 귀에 봉황머리를 조각하여 배치했다.

상여의 네 귀에는 귀면상(鬼面像)을 세웠다.

특히 용마루 중간에 서있는 말을 탄 저승사자상은 형상이 특이하다.

조각이 섬세하고 채색이 화려하며

유소(流蘇)와 보장(寶帳)이 약간 훼손되었으나 부재들이 잘 갖추어져 있고 격식도 있다.

이 상여는 고종(高宗)의 원자(元子) 완화군(完和君, 1866-1880)이 급사하여 장례를 치른 상여를

완화군을 가르치던 승지(承旨) 김병년(金炳年, 1855-1927)이 자기가 죽게되면

이 상여로 장례를 치러달라는 유언에 따라 장례를 치른 후 이곳 주민이 사용하였다고 전한다.

   

 

 

  

  

 

  

남은들 상여, 중요민속자료 31호, 예산군 덕산면 광천리, 조선시대

 

충남 예산군 덕산면 소재지에서 서산방향으로 약 3.5km 가면 홍성과 해미로 가는 삼거리가 있는데,

상여는 삼거리에서 홍성방향으로 50m 쯤 더 가면 덕산면 광천리부락 입구 보호각에 보관하였다.

 

조선 철종 때, 흥선군 이하응(1820-1898)이 아직 파락호로 지내고 있을 당시

정만인이라는 지관이 말하기를 충남 예산 지역에 명당자리가 두 곳 있는데,

한 곳은 "만대에 걸쳐 영화를 누리는 자리"이고, 또 한 곳은 "2대에 걸쳐 황제가 나올 자리"이므로

둘 중 한 곳에 선친의 묘를 쓰라 하거늘 흥선군은 후자를 택하였다.

그런데 황제가 나올 자리가 99개의 암자를 거느리고 있던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절골에 있는 가야사(伽倻寺) 금탑자리였으므로

흥선군은 자신의 재산을 처분한 2만 냥의 반을 주지에게 주어

가야산(伽倻山, 678m)의 이 유서 깊은 절을 불을 질러 폐사시킨 뒤

경기도 연천군 남송정(南松亭)에 있던 부친 남연군(南延君, 1788~1836)의 묘를 이장하였다.

 

남연군묘를 이장하고 7년 후 대원군은 차남 재황(載晃)을 얻었고,

이가 곧 철종의 뒤를 이어 12세에 왕위에 오른 고종이다.

아들이 실제로 왕(고종)이 되자,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불태운 가야사에 사죄하고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1865년 남연군묘 맞은편에 보덕사(報德寺)를 세우고 원당 사찰로 삼았다.

 

한편, 1847년 남연군묘를 500리 길을 따라 이장을 하면서

상여가 지나는 그지역 주민들이 각 구간을 연결하여 운구하도록 하였는데

덕산까지 이르러서 마지막 구간을 담당한 덕산 광천리 남은들(나분들)주민들에게

흥선군은 이 상여를 광천리 남은들마을에 기증하게 되어 오랫동안 이 마을의 상여로 쓰였다.

 

전체의 모습과 구도가 특이한 궁중상여(宮中喪輿)로 철종 때 제작된 남은들상여는

실용적이며 기교적이고 기술적인 면이 돋보인다.

이 상여는 장방형이나 네귀에 금박으로 된 용 형상이 있고

중앙에는 나무로 만든 작은 동자상이 있으며 미장은 검은색, 노란색, 백색으로 근엄하게 치장되어 있다.

 

상여의 전체 구조는 장강 · 소방상 · 별갑 · 판첨 · 앙장의 다섯 부분으로 되어 있어

왕가(王家)의 대여(大轝)와 비슷한 격식으로 되어 있으나,

소방상 밖의 주위에 난간이 설치되어 있지 않은 것이 다르다고 하겠다.

이러한 구조나 또는 그 부속품들의 조각수법과 4㎝ 두께의 목재를 사용한 점,

그리고 그 겉에 입힌 단청의 질이나 수법이 매우 뛰어난 점 등으로 보아,

왕가에 버금갈만한 가문에서 제작한 것이라 짐작된다.

 

이 상여는 상단부인 보개(寶蓋)와 중간부인 여동(與胴), 하단부인 장강대로 구분되어 있다.

상여의 구조는 기본틀인 장강채의 앞뒤 양끝 아래쪽으로 쇠고리를 달아 횡강채를 끼우도록 되어 있고,

중간에 소방상(小方狀:현지에서는 연초라고 부르고 있다)이 설치되어 있다.

판첨 위에는 지붕과 같이 둥글게 만들고 앞뒤판에 용각을 새긴 만충연(彎衝緣)을 배방목에 달고,

겉에는 검은 천으로 씌운 별갑(鼈甲)을 설치한다.

그리고 그 위에 중앙에 꽂은 용머리의 용마루와 몸채를 새긴 꼭두를 올린다.

또한 소방상의 앞뒤에 네 개의 앙장채를 펴서 앙장(仰張)을 쳤으며,

네 개의 앙장채는 끈으로 장강채에 묶어 움직이지 않도록 고정하였다.

장강채의 길이는 596㎝, 판첨의 길이는 196㎝, 너비는 76㎝, 높이는 16.5㎝이며,

별갑의 만충연의 길이는 69㎝, 너비는 52.5㎝, 높이는 35. 3㎝이고,

연용의 길이는 85㎝, 높이는 26.5㎝이며, 꼭두각시의 높이는 25㎝이며, 앙장의 크기는 284×185㎝이다.

 

이 상여는 그 자체의 가치보다도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상여라는 점에서 유물로서 가치가 있다.

상여의 제작은 1840년과 고종의 탄생년인 1852년 사이일 것으로 추정된다.

각 부의 조각수법도 당시의 조각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이며,

다른 작품에 비하여 어느 정도 제작시기를 추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가치가 있으며,

또한 대원군이 세도를 얻기 전에 제작된 것이므로, 왕실에서 사용하던 상여보다는 조촐한 모습이지만

왕실 상여의 제작을 담당하던 ‘귀후서(歸厚署)’에서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왕실에서 사용하던 상여인 대여(大輿)의 구조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숙종 대의 ‘청풍부원군 상여’와 비교할 만한 가치를 지닌 자료이다.
- <참고문헌> 남은들상여(朴鎭柱, 民俗資料調査報告書 31, 文化財管理局, 1971)


이 '남은들상여'는 1974년에 중요 민속 자료 31호로 지정되면서 보호각 안에 보관하고,

마을에는 정부에서 새 상여를 마련해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2005년 12월7일 덕산면사무소 직원이 청소를 하러갔다가 남은들상여집의 자물쇠가 뜯겨 있고

상여를 장식했던 용수판과 용마루 등이 모두 사라진 사실을 확인, 경찰에 신고했다.
도난당한 상여 장식품은 용수판 2, 용마루 1, 용두 2, 봉두 4, 정자용 2, 운각 일부 1, 개구리 12,

운각유소 12, 봉두유소 4, 앙장유소 3점 등 모두 8종류 41점이었다. 

 

이듬해(2006년) 3월10일 밤 9시45분쯤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익명의 남자로부터

경부고속도로 상행선 신탄진 휴게소 주변에 상여 관련 조각품들이 있을 것이라는 제보 전화를 받고

현장에서 도난문화재 모두를 회수했다. 현재는 국립고궁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회수문화재 현황]

구분

용수판

용마루

용두

봉두

정자용

개구리

유소

보개

 

(나무

조립대)

회수

실적

2점

1점

2점

5점

2조

(4개)

4점

20점

3점

8종

41점

 

 

△ 대여[大輿]

국상(國喪) 때 사용한 큰 상여.

대여는 일반적인 상여에 있는 앙장(仰帳) 대신 연(輦)처럼 위에 뚜껑이 있으며,

뚜껑 4귀에는 봉황을 그린 장식물이 있고, 4면에 비단 휘장을 쳤다.

박다위라는 줄로 장강(長杠)틀 옆을 얽어매어 그 속으로 사람이 들어가 박다위를 메었다.

1줄에 8-15명이 멜 수 있는 줄이 4개 있고, 대여 위에는 지휘자가 서서 인도하였다.

(박다위; 상인들이 등짐을 질 때 종이, 노나 삼노를 꼬아서 만든 멜빵으로 짐짝을 메는 데 쓴다.)

 

△ 견여[肩輿]

장례행렬에서 좁은 길을 지날 때 임시로 쓴 간단한 상여.

어느 경우에나 쓰는 것은 아니고 대방상(大方狀)이라는 큰 상여를 쓸 때만 동원되었다.

대방상은 삼공(三公 :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과

구경(九卿 : 좌참찬, 우참찬, 6조의 판서, 한성부 판윤)이 죽었을 때만 사용한 상여이다.

 

△ 상여의 구조

상여는 영여에 비해 규모도 크고 꾸밈과 장식품들이 다양하다.

상여의 기본 골격은 대체로 상중하 셋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두 개의 긴 장채 중앙부에 네 면이 연결된 기반 틀이 있고 그 위에 관을 놓은 방상이 있다.

 

그곳에 네 수직기둥을 세워 집 모양으로 만든 운각(雲閣)이 있다.

상여의 맨 위 부분은 보통 흰 천으로 만든 휘장을 두르며 이것을 앙장(仰帳)이라고 부른다.

흰 뜬구름처럼 보이며 차양 역할을 한다.

앙장 네 면에 백색, 청색 혹은 홍색 천으로 연꽃의 수술과 청사 초롱을 달아 저승길을 밝혀 준다.

 

상여의 중심부는 집 모양의 장방형 운각이다.

죽은 이의 관을 덮고 있는 장방형의 운각을 중심으로 보면 운각 앞뒤에는 귀면이 그려져 있는데,

눈을 크게 부릅뜨고 수염이 거칠게 뻗어 있어 무서운 형상을 하고 있다.

상여 앞장을 서는 방상씨가 무서운 형상과 몸짓으로 잡귀를 쫓듯

귀면 역시 잡귀의 접근을 막기 위한 장치이다.

 

그 뒤로 용의 자웅이 조각된 용수판이 장식되어 있다.

몸체의 양옆에 난간을 만들고 그 위에 여러 종류의 나무꼭두를 세워놓는다.

죽은 이가 관직이 있었던 사람이면 의관을 갖춘 모습이고

말이나 호랑이 등을 타게 하거나

무사에게 칼이나 창을 들게 하고 시종들을 호위하게도 한다.

또 작은북을 치며 춤추는 대를 세워 놓아 화려한 장례행차를 보여준다.

 

운각의 정상에는 청룡과 황룡 두 마리가 앞뒤를 향해 서로 몸을 꼬고 있는데 이를 용마루라 한다. 

 

 

용두의 입에는 야광주를 물린다.

용마루 위에 호랑이를 타고 앉아 있는 염라대왕과 저승사자, 강림도령이

차례로 서 있는 것도 있으며 상여에 따라 어떤 것은 그 중 하나만 세우기도 한다.

특히 염라대왕은 호랑이를 타고 있어 별도의 의미를 지닌다.

용은 마음대로 날아다니는 신격이며,

이를 타고 있는 세 인물 역시 죽음을 관장하는 저승의 신격이자

이승과 저승을 마음대로 드나드는 초월적 존재이다.

 

용과 호랑이는 묘지 좌우에서 주검을 보호하는

이른바 '좌청룡 우백호' 구실을 상여에서부터 하는 셈이다.

죽은 이를 저승으로 순조롭게 인도하려는 기대와

이승과 저승 사이의 공간적 관계에 대한 인식이

용호의 형상과 저승의 신격을 통해 구체화된 것이다.

 

용마루 양옆으로 연꽃을 조각한 운궁판이 있으며

그 귀퉁이 네 면에 화려한 색상의 봉황머리가 서 있다.

하늘을 나는 봉황은 신화에 등장하는 새들과 마찬가지로

죽은 이의 영혼을 이승에서 저승으로 인도하는 신적인 역할을 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죽은 사람의 영혼이 새가 되어 저승인 천상으로 비상하여 영원의 세계에 이른다는

영혼관이 상여의 봉황으로 나타난 것이 아닌가 한다.

 

또한 새는 죽은 사람의 영혼을 인도하기도 하며

저승으로 가는 도중에 과도기적 재생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운궁판 둘레에 여러 개의 봉황머리를 꽂아놓는 것도 있다.

봉황의 부리에 주홍색의 굵은 줄을 늘어뜨려 중간에 매듭을 세 개 만들고

그 끝에 요령(종)을 달았다.

상여가 움직이며 때로는 기울거나 흔들릴 때 요령소리가 알려주는 구실을 하여

상두꾼들이 상여를 바로 잡도록 한다. 또한 요령소리는 잡귀를 쫓는 구실도 한다.

 

상여는 운각, 몸체, 난간, 용마루 등으로 이루어져 절의 전각과 같은 집 모양이며

죽은 이의 주검을 이승에서 무덤까지 무사히 모시는 운반 도구이다.

주검을 저승길로 데려가는 상여의 모습이 집과 같은 형태라는 점이 상여의 특징이다.

죽은 이가 이승의 집에서 나와 저승의 집으로 떠날 때는

용과 봉황처럼 신적인 존재들의 비호를 받으며 가마를 타고 간다.

 

△ 상여의 장식과 상징성

집 모양으로 꾸민 상여의 중심부 운각의 앞뒤 면에 그려진 귀면을

잡귀가 주검에 가까이 오지 못하게 보호한다.

즉 방상에 놓인 관의 영역이 상여 밖의 것과 다른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처용의 탈이 역귀를 쫓아내는 일을 하는 것과 같다.

 

한편 운각에 장식된 용들과 봉황, 연꽃 그리고 난간에 꽂아 놓은 선인을 태운 호랑이 등

우리 나라 전래 문화에 흔히 나오는 상징물들이 상여에도 사용되는데

이는 저승과 내세에 대한 이해가 무속과 유불선 사상으로 어우러져 있음을 보여준다.

이승에서 저승으로 주검을 나르는 상여가

청룡, 황룡, 봉황, 호랑이 등 상서롭고 신적인 짐승으로 장식되는 것은

그들의 도움으로 죽은 이가 극락세계로 옮겨져 행복하게 지내기를 바라는

산 사람의 염원에서 이해될 수 있다.

 

상여의 화려한 조각상은 모두 죽은 이의 등천왕생(登天往生)을 기원하는 깊은 뜻을 담고 있다.

조각상 뿐 아니라 상여에는 부귀의 상징인 모란문도 그려진다.

 

상여의 장식품 가운데 가장 특징적인 것은 용마루와 난간에 세우는 나무 꼭두들이다.

상여의 나무 꼭두에는 남자와 여자, 시종, 동자와 동녀, 호랑이나 말을 탄 무사나 선비,

의장을 갖춘 선비, 악기를 다루는 악사, 춤추는 광대 등 다양하며

젊은이, 중년, 늙은이 등 나이별로도 나온다.

선비들은 홍포나 녹색포를 입고 의관을 잘 갖춘 모습으로 죽은 이를 시종 호위하는 인물 같다.

젊은 여자 꼭두들은 주로 공양여인의 모습이다.

호랑이를 탄 염라대왕이나 동방삭(東方朔)은 혼백을 잘 안내하라는 의미로 용마루대 중간에 앉혔다.

상여가 나가는 방향을 알려준다.

나무 꼭두는 죽은 이와 함께 장례행렬에 참가하여 저승길을 동반한다고 이해된다.

- 안성림(옥랑 박물관장)   

 

 

 

  호랑이를 탄 신랑, 신부(20세기, 목인박물관)

 

호랑이나 말을 타고 있는 기호(騎虎), 기마(騎馬) 인물상 같은 경우는

악귀를 몰아내는 벽사의 역할은 물론 망자의 신분과 지위를 높여주는 의미도 함께 하고 있다.

황색의 몸통에 줄무늬를 그려 넣은 호랑이는 얼굴모습과 쭉 뻗쳐있는 꼬리의 형태에서

해학적인 미감을 보여 주고 있다. 호랑이 등 위에는 신랑과 신부를 조각하였다.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양한 형식으로 표현되며, 그 의미와 상징 또한 다양하다.

이러한 장식물은 목용(木俑), 목인(木人), 목우(木偶)라고도 불리며,

죽은 자의 시신을 보호하고 혼백을 호위하여 이승에서 저승으로 인도하는 한편,

죽음으로 인한 슬픔을 위로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상여에 부착되는 장식물들로는 용과 봉황, 저승사자 그리고 연꽃, 호랑이 등 초자연적 존재에서

동식물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한데, 그 중 가장 많이 장식되는 조각상은 인물상이다.

 

북, 장구, 꽹과리 등을 연주하는 악공들, 연주에 맞추어 재주를 넘는 재인(才人)이나 광대,

망자(亡者)를 저승으로 인도하는 사자(使者), 신선 등 다양한 형태의 인물상은

멀고 먼 저승길의 안내자 역할, 저승길을 가는 동안

외롭지않고 즐거운 마음으로 갈 수 있도록 보살피는 역할, 망자를 시중하는 역할 등,

그 역할 또한 다양하게 표현되어 있다.

 

한편, 동방삭(東方朔)과 같은 인물장식은

내세 혹은 저승에서 오래도록 건강하게 살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기도 하며,

동물을 타고 있는 인물장식은 악귀를 몰아내는 벽사의 역할을 하고,

새를 탄 동자나 다른 인물들은 천계에 속한 존재로서

천상과 지상을 오고가는 신통력을 지닌 것으로 여겨진다.

 

이 유물은 머리에 감투를 쓴 재인(才人)이 물구나무를 하고 있는 모습을 조각한 것으로,

전체적으로 채색되어 있으며 붉은색 더그레에 초록색 띠를 매고 초록색 홀태바지를 입고 있으며,

반달형 눈썹과 수염이 표현되어 있다.

아랫부분에는 받침판과 고정용 꽂이가 달려 있다.

이와 같은 형태의 조각상은 망자가 가는 저승길을 보다 긍정적으로 표현해주는 것으로서

북, 장구, 꽹과리 등의 소리에 맞추어 춤을 추고, 재주를 부리는 인물을 통해

저승길로 향하는 망자를 즐겁게하고 위로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따라서 어둡고 쓸쓸한 저승길을 밝게 비추고 망자의 발걸음을 가볍게 하는 한편,

남은 자들을 위로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상여장식용 목조각상은 죽음에 대한 어두운 시선과 선입견으로 인해

그 의미가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었지만,

최근 목조각상의 화려한 채색과 조각솜씨, 장식에 담긴 상징적인 의미들이 새롭게 평가되고 있다.

상여와 상여장식에 표현된 많은 상징적 의미들은

우리 선조들의 죽음과 내세(內世)에 대한 긍정적인 해석을 보여준다.

또한 당시의 사생관(死生觀)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 황경선, 국립민속박물관유물과학과 연구원 / 국립민속박물관 <민속소식> 2008년1월호.

  

 

 

 

   

 

 꼭두 (木人)

 

 

木(나무 목) 人(사람 인) : “나무로 만든 사람의 형상“


‘목우(木偶)’,  ‘목상(木像)’,  ‘목우인(木偶人)’으로도 불리며
사람이나 동물의 형상을 한 전통 목조각상을 통칭한다.

- 문화관광부 국립국어원 편찬 표준국어대사전 발췌 -

망자의 길동무 - 목인(木人)

 

목인(木人)은 옛적 망자의 길동무감으로 상여에 달거나 무덤의 껴묻거리로 들어갔다.

양반, 광대, 아낙, 군인, 순사, 동자, 악사, 용, 호랑이 등 천차만별의 모양새에

옛 사람들의 염원과 생각들을 반영하고 있어 민속사의 새 보고로 각광받는다.

호랑이, 해태 같은 상서로운 짐승을 탄 저승사자상, 한국전쟁 때 군인상,

상여 앞머리에 붙였던 용수판, 도깨비처럼 철제화관을 쓴 가족상 등

기기묘묘한 이미지 세계가 담겨있다.

 

목인이란 옛 목각 인형을 통칭하여 목인(木人)이라고 부른다.

목인들은 우리 선조들이 주술 및 벽사 그리고 각종 의례에 사용하기 위해 제작된 것들로

각각의 기능과 역할을 가지고 있다.

 

그 종류와 쓰임을 보면

1. 무덤에 부적용으로 쓰였던 목용

2. 죽은 이를 저승길로 안내하고 극락세계로 모시는 역할을 했던 상여조각 인형

3. 귀신을 물리치고 화복을 비는 용도로 각종 신당이나 성황당에 쓰였던 신상

4. 목불상이나 동자상 같은 종교적 의미의 목인형

5. 마을의 수호신 역할을 했던 장승

6. 일상생활에서 쓰였던 각종 목각 민예품 등이 있다.

이러한 목인들은 주로 일반 서민들이 사용하던 민속조각들로

기록이 많이 남아있지 않은 당시의 생활모습과 토속신앙, 그리고 복식문화 등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 장승(長丞)

목인(木人) 가운데 공동체 신앙이 가장 잘 반영된 것이 장승이다.

장승은 마을의 수호신 역할을 하는 민속 조각으로 지역간의 경계나 이정표 구실을 했다.

또한 천연두나 괴질(怪疾)이 어린아이들에게 접근하는 것을 막아준다고 믿었다.

마을을 이루고 있는 집단의 행복과 소원성취를 기원하는 신앙적인 숭배의 대상이었으며,

보통 남녀가 한 쌍을 이루고 있다.

 

- 목용(木俑)

사람이 죽었을 때 산 사람을 같이 묻는 순장(殉葬) 풍습을 대신해

사람 모습을 본 떠 흙으로 만든 것을 토용(土俑) 토우(土偶)라고 하며,

나무로 만든 것을 목용(木俑) 혹은 목우(木偶)라고 한다.

 

넓은 의미에서 보면 사람뿐만 아니라 이러한 인물상과 같이

매장된 동물과 각종 부장품(副葬品)들도 이에 포함된다.

이러한 목용은 죽은 사람에 대한 봉사자의 역할을 했던 순장 노예의 모사품에서

그 기원을 찾는다. 나무의 특성상 토용에 비해 목용은 그 출토가 거의 드문 편이다.

 

- 신당(神堂)

민간신앙에서 볼 수 있는 목인은

무당들이 차려놓은 굿당과 마을의 수호신을 모셔 놓은 신당들에서 볼 수 있는

각종 목조각상들이 있다. 주로 모시고 있는 신을 초상화 형식으로 많이 제작하였으나

목조각상으로도 제작해 신성(神聖)을 부여했다.

이러한 신들은 마을을 수호하는 역할 이외에도

액운을 퇴치하거나 풍년(豊年)이나 풍어(豊漁)를 기원하고 숭배하는 대상으로

민간신앙 연구에 빼놓을 수 없는 자료이다.

 

- 상여(喪輿)

상여는 돌아가신 분을 운반할 때 사용되는 가마다.

이러한 상여를 장식할 때 많은 목인들이 사용되었는데

죽은 이의 가는 길을 동행하는 길동무의 역할을 했다.

호랑이나 말을 탄 인물상을 비롯해 봉황(鳳凰), 용머리(龍頭) 등

그 장식이 화려한 것이 특징이며, 주로 조선 후기에 많이 제작되었다.

현존하는 목인들 가운데 그 수가 가장 많고, 그 종류나 형태 또한 다양하다.

 

- 불상(佛像) 및 동자상(童子像)

목인 중에서 불교와 관련된 대표적 유물은

불상(佛像) 및 동자상(童子像), 사천왕상(四天王像), 목어(木魚) 등이 있다.

동자상은 어린아이와 같은 자유로움 천진스러움을 상징하며,

불교조각 뿐만 아니라 회화, 건축, 공예, 상여조각에도 많이 쓰인다.

그밖에 잉어의 형태를 나무로 깎아 만든 불교의 기구인 목어가 있다.

목어는 수행자로 하여금 졸지 말고 늘 물고기처럼 깨어

부지런히 수행에 정진하라는 의미가 있으며, 목탁은 목어의 축소된 형태이다.

 

- 그밖에 나무 민속 조각품

목안(木雁)은 나무로 만든 기러기로 사랑을 상징한다.

결혼식(婚禮)을 치를 때 신랑 신부의 영원한 사랑을 기원하는 의례용 민속조각품이다.

솟대는 새를 돌이나 나무로 만들어서 장대나 돌기둥에 앉힌 민간 신앙의 대상물이다.

마을의 안녕과 수호, 풍년을 위해서 마을에서 공동으로 마을 입구에 세워진다.

그래서 마을 밖의 나쁜 기운과 부정을 막고

마을 안의 경계를 주어 마을을 지키고자 하는 민속 신앙적 조각이다.

   

 

상여장식에 사용되었던 목인(木人)

 

 

 

 

 

 

 

불교 조각품이나 출토품을 제외한 대부분의 목인상은 상여에 장식되었던 것들이다.
상여는 목인상을 비롯한 목조각의 종합 집합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양한 종류와 크기로 화려하게 장식된 집 모양의 상여와 조각상들에는
유·불·선과 우리의 민간신앙이 녹아있어
한국인의 저승관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호랑이 · 말 · 해태 · 봉황 등을 타고 있는 인물상(人物像)

상여장식에 쓰였던 인물상 가운데는 사자나 호랑이, 말, 해태 같은 서수(瑞獸-상서로운 짐승)나

봉황, 학 같은 금조(錦鳥)를 타고 있는 조각상들이 많다.

이러한 서수나 금조를 타고 있는 인물상들은

망자(亡者)를 형상화 한 선비, 마지막 가는 길을 악귀들로부터 호위하는 장군이나 무사

산신(山神), 저승사자, 차사(差使), 그리고 천상의 세계로 인도하는 동자, 동방삭에 이르기까지

매우 폭넓은 인물들이 표현되어 있다.

  

특히, 그 중에서도 호랑이나 말을 타고 있는 기호(虎), 기마(馬) 인물상 같은 경우는

악귀를 몰아내는 벽사(辟邪)의 역할은 물론 망자의 신분과 지위를 높여주는 의미도 함께하고 있다.

 

상여장식 조각 중 가장 많이 등장하는 조각상이 인물상이다.

극락왕생(極樂往生)을 염원하는 각종 종교적 영향을 받은 신선,

북, 장구, 꽹과리, 바라를 연주하는 악공(樂工)들,

연주에 맞춰 재주를 넘는 재인(才人)이나 남사당패,

그리고 망자를 저승으로 인도하는 사자에 이르기까지 그 역할이나 모습이 무척 다양하다.

이러한 인물 조각상들은 크게 존재하지 않는 설화나 신화 속의 인물들의 모습으로 구분할 수 있으며,

이 인물 조각상들은 망자의 마지막 가는 저승길을 동행하는 수행자들이다.

  

 

 

봉황과 학(20세기)

 

상여 장식에 등장하는 서수(瑞獸), 서조(瑞鳥) 등 성스러운 동물이나 새는

사자, 호랑이, 해태, 자라, 봉황, 학 등이다.

이들을 탄 동자나 다른 인물들은 천계(天界)에 속한 존재로서

천상과 지상을 오고가는 신통력을 지닌 것으로 여겼다.

특히 봉황이나 학(鶴)은 신의 메신저 역할을 하고 천계로 날아갈 수 있는 새이다.

학은 신선들이 타고 다닌 새로, 이 또한 봉황과 마찬가지로 천계를 오고가는 금조(錦鳥)로 여겨졌다.

목이 길고 가는 학의 신체적 특징을 잘 살려 조각한 상여장식으로

몸통은 흰색을 칠하고 부리와 꼬리는 갈색,

정수리와 부리 아래쪽은 붉은색으로 각각 색을 달리 칠하여 포인트를 주었다.  

 

 

효녀 심청(20세기, 목인박물관)

 

상여를 장식하는 조각상 가운데 많은 인물 조각상이 등장한다.

이러한 인물 조각상들 중에는 크게 존재하지 않는 설화나 신화 속의 인물들을 형상화한 것들이

많이 있는데, 이 조각상 또한 고전설화 속 주인공인 효녀 심청을 형상화한 것이다.

상단에는 한복을 입은 소녀를, 하단에는 연꽃을 조각하여

용궁에서 연꽃을 타고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오는 대목을 표현하였다.

 

재주넘는 광대(才人), 살판, 남사당패 

 

 

 

 

 

 

 

  

 

꼭두닭, 19세기, 닭문화관

 

나무꼭두는 여러가지로 형상화되고 그 성격도 각기 다르게 기능하지만

대체로 저승으로 가는 영혼에게 이승에서의 마지막 길동무이다.

주로 상여의 난간을 장식할 때 쓰였던 꼭두들 중에 꽃과 새는

내세(來世)의 이상향(理想鄕)에 대한 염원(念願)이 깃들어 있는 조각상들이다.

 

꽃의 종류로는 불교의 영향을 받은 연꽃과 부귀영화를 상징하는 모란을 주로 표현했다.

꽃과 함께 표현된 물고기는 다산(多産)을,

그리고 새는 하늘과 땅, 이승과 저승을 오가며 신의 메시지를 전하는 메신저 역할을 의미한다.

상여를 장식하고 조립할 때 꽂는 위치를 표시하기 위해 하단부에는 고유번호가 표기되어 있으며,

후기로 갈수록 제작공정이 편리해진 판 형태의 다양한 조각상들이 나타난다.

 

 

 

 

 

 

 

대봉유소(大鳳流蘇): 기(旗)나 가마(상여) 따위에 달던 술장식이다.

                                      상여의 네 모서리에 있는 봉황의 부리에 매달았다.

 

   

  

 

   

  

  

 

 

 

 

 

   

  

  

명사십리 해당화야 꽃진다고 설어마라

명춘삼월 봄이 오면 너는 다시 피려니와

인생 한 번 돌아가면 다시 올 길 바이 없네‥‥

 

 

상례 때 시신(屍身)을 운반하는 기구로,

장례행렬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상여(喪輿)와 영여(靈輿)인데,

시신을 운반하는 상여와 혼백을 운반하는 영여(靈輿)로 나누어진다.

이 둘을 통칭하여 상여라고도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앞의 것만을 다룬다.

 

영여는 2인교 가마를 메듯이 끈을 가위표로 엇걸어 어깨에 걸고 두 손으로 가마채를 잡고

상여에 앞장서서 가는 작은 가마이다.

여기에는 혼백상자와 향로, 영정 등을 실어 영혼이 타고 가는 것을 상징한다.

오늘날에는 영여 대신 죽은 이의 사진을 어깨에 걸고 상여 앞에 서는 일이 많다.

 

상여의 모양은 가마와 비슷하나 더 길다.

몸채 좌우에는 밀채가 앞뒤로 길게 뻗어 있어 양쪽 끝에 채막대를 가로로 대고,

앞채막대 좌우로 2줄씩 끈을 달아 뒤채막대에 붙잡아맨 다음,

중간에 일정한 간격으로 멜방망이를 좌우로 끼워 사이에 사람이 들어가 끈을 어깨에 멘다.

 

몸채는 단청식으로 여러 가지 채색을 하고,

4귀에는 기둥을 세워 위로 포장을 쳐 햇빛을 가리며,

상여 뚜껑에는 연꽃, 봉황 등으로 장식한다.

 

대개 상여틀을 분해, 조립할 수 있도록 만들며,

옛날에는 마을마다 상여 한 틀을 공동으로 마련하여,

동네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상여집(상여막)을 짓고 그곳에 보관하였다.

 

오늘날의 장례행렬에서는 영여와 상여 대신

죽은 이의 사진이나 혼백을 실은 승용차가 앞장을 서고,

뒤에 주검을 실은 영구차가 따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용머리판(龍頭板): 상여 앞에 청룡과 황룡 두 마리가 몸을 꼬고 있는 모양을 새긴 판이다.

                             주검을 보호하여 순조롭게 저승으로 인도하려는 뜻에서 세운다.  

  

 

용수판(龍首板) - 청룡, 황룡

 

상여의 상단 앞·뒤에 부착하는 반달 형태의 판으로

귀면 혹은 용수판(龍首板), 용면판(龍面板)으로 불리며,

대부분 도깨비나 용의 모습을 하고 있다.

방상시와 마찬가지로 잡귀를 �는 벽사(辟邪)의 역할을 한다.

새겨진 도상으로 볼 때 크게 ‘도깨비형상’, ‘물고기를 입에 문 도깨비형상’, ‘용의 형상’,

그리고 사람의 얼굴 형태를 한 인면형(人面形) 용수판으로 분류할 수 있다. 

 

 

    

  

 

 

 

 

 

 

- The Rain / Hisaishi Jo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