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의 제국’ 페르시아] <1> 모든길은 페르시아로 통한다
독수리의 날개,염소의 뿔,사자의 얼굴을 지닌 이 상상의 동물은 세계의 중심에서 세계를 호령했던 페르시아의 위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페르시아 다리우스 1세의 궁전이었던 페르세폴리스 궁전에서 출토된 것으로,지금은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사진 제공 생각의 나무 |
동아일보가 국립중앙박물관 이란국립박물관 SBS와 공동 주최하고 컬쳐앤아이리더스가 주관하는 특별기획전 ‘황금의 제국 페르시아(The Glory of Persia)’.
이 전시는 인류 최초의 세계 제국이었던 페르시아(지금의 이란)의 영광의 역사를 한눈에 조망하는 자리다.
또 실크로드를 통한 고대 페르시아와 한국의 문화 교류 양상을 살펴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이기도 하다. 고대 동서문화교류사에서 로마와 페르시아는 실크로드의 시발점이었고 신라 경주는 실크로드의 종착지였기 때문이다.
페르시아는 우리에게 ‘아라비안나이트’의 나라로 잘 알려져 있으나 최근 드라마 ‘대장금’이 시청률 86%를 기록하는 등 이란에 한류 열풍이 불면서 한국과 이란 간 문화 교류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페르시아전은 한국과 이란의 문화 교류의 디딤돌이 될 것으로 보인다. 페르시아의 역사와 문화, 세계사적 의의 등을 소개하는 시리즈를 연재한다.
○ 기원전 6세기, 페르시아의 수도 페르세폴리스
기원전 6세기 어느 새해 첫날, 페르시아의 수도인 페르세폴리스 왕궁.
낙타를 타고 온 아라비아인, 들소를 몰고 온 간다라인, 전차를 끌고 온 리디아인, 상형문자가 가득한 파피루스를 들고 온 이집트인 등 세계 곳곳에서 온 사신들이 궁전 입구 ‘만국(萬國)의 문’ 앞에 줄지어 서 있었다. 서아시아부터 지중해를 건너 이집트에 이르기까지 28개 민족의 사신이 페르시아 다리우스 1세 대왕에게 조공을 바치기 위해 줄을 지어 서 있는 것이다.
사신들의 행렬을 바라보는 다리우스 1세의 표정은 흐뭇했다. 그 뒤로는 1만 명의 정예병으로 구성된 왕의 불사(不死) 친위사수대가 당당하게 도열해 있었다.
그 다음 날, 다리우스 1세는 페르시아의 영광을 과시하기 위해 1만5000명의 왕족을 페르세폴리스 궁전으로 초청해 영광의 향연을 베풀었다.
○ 모든 길은 페르세폴리스로 통한다
기원전 525년 페르시아 아케메네스왕조는 아시리아를 격파하고 오리엔트를 통일했다. 페르시아가 로마제국에 앞서 최초의 세계 제국이 되었다. 페르시아의 영토는 지중해와 이집트로부터 서아시아를 지나 인더스 강 유역에 이르렀다.
당시 페르시아의 왕은 다리우스 1세. 그는 사람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가파른 절벽의 바위 위에 승리를 선포하는 글을 새겨 제국의 탄생을 널리 알렸다.
그는 제국을 20개 지역으로 나누어 통치했다. 그가 가장 역점을 둔 것은 교통과 유통. 전국 주요 도시를 연결하는 도로를 닦았다. 이 길을 통해 왕의 명령이 들고 났으며 경제와 문화가 오갔다. 그 핵심은 페르시아의 수도인 페르세폴리스였고 그래서 “모든 길은 페르세폴리스로 통한다”는 말이 나왔다.
다리우스 1세는 만국의 왕이 되었다. 이란의 페르세폴리스 궁정 터에 가면 ‘만국의 문’이 지금도 당당히 버티고 서 있다. 주변 민족의 사신들이 조공을 바쳤던 바로 그곳. 페르세폴리스 궁전 건축물의 기둥머리엔 용맹스러운 그리핀(사자의 몸에 독수리의 머리가 달린 신화속의 동물)과 황소 등이 조각되어 있다. 건물의 기둥과 벽에는 당시 주변 민족들의 조공 행렬 모습, 왕의 친위 사수대의 모습을 새긴 부조가 즐비하다.
○ 세계사에 길이 남는 불멸의 문화
페르시아 아케메네스왕조는 기원전 330년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약 200년 동안 세계의 중심이었다.
페르시아가 세계사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포용의 정신. 다리우스 1세를 비롯해 아케메네스왕조의 왕들은 정복한 민족의 지역공동체와 종교, 문화를 존중했다. 페르시아의 지배하에서도 이집트는 파피루스 위에 상형문자를 기록할 수 있었다. 바빌로니아로 쫓겨난 유대인(헤브라이인)들은 그들의 신전을 세울 수 있었다.
정복지의 문화는 주요 도로를 통해 페르세폴리스로 들어와 더 멋진 문화로 다시 피어났다. 페르세폴리스 궁전의 화려한 건축은 아시리아의 궁정 건축, 이집트 건축, 바빌로니아 건축이 한데 녹아 새롭게 탄생한 것이다. 페르시아가 약 200년 동안 서아시아와 오리엔트를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은 이 포용정책 덕분이었다.
- 동아, 2008.4. 2.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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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페르시아인의 종교 의식을 보여주는 도기. 페르시아가 세계 제국을 건설하기 약400년 전인 기원전 10세기경에 제작된 것으로, 이란의 한 무덤에서 출토됐다. 두 마리의 동물이 조로아스터교에서 말하는 선과 악을, 그 위에 올라탄 사람은 선과 악 사이에서 투쟁하는 인간을 연상시킨다. 이란국립박물관 소장품. 사진 제공 생각의 나무 |
《기원전 6세기 오리엔트를 통일하고 약 200년간 세계의 중심이 되었던 페르시아. 그 명성에 걸맞게 페르시아의 종교 사상과 문화 예술도 인류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페르시아인들은 정복지 여러 민족의 정신과 문화를 존중하면서 그것을 하나로 녹여 더 위대한 종교와 문화 예술을 탄생시켰다.
다인종 다문화가 살아 숨쉬는 세계 국가의 가능성을 후대에 제시해 준 것이다. 페르시아 제국만이 보여 줄 수 있었던 위대한 업적이다.》
○ 자라투스트라(조로아스터)는 이렇게 말했다.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고 외치면서 20세기 서양 철학사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니체의 이 외침은 ‘인간의 자유 의지’를 상징한다.
여기서 말하는 자라투스트라는 페르시아의 예언자 조로아스터. 페르시아가 세계 제국이 되었던 기원전 6세기경 조로아스터교를 창시한 인물이다.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가 니체의 철학에 어떻게 영향을 준 것일까.
니체는 왜 조로아스터에 열광한 것일까.
조로아스터교는 선과 빛의 신 아후라마즈다와 악과 어둠의 신 아리만의 대결로 세상을 보았다. 개인의 삶이 발전하려면 선과 악 사이에서 끊임없이 투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선악 투쟁의 최후는 불이 심판한다. 불의 제단은 그래서 특별한 숭배의 장소이자 페르시아 종교의 중심이었다.
조로아스터와 페르시아인들은 인간이 선과 악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인간의 자유 의지를 중시한 것이다.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아후라마즈다의 편에 서면 최후의 심판 때 천국으로 갈 수 있다고 믿었고 그렇게 되길 기원했다.
세상과 삶을 선악의 투쟁으로 보고 동시에 인간의 자유 의지와 도덕성을 존중한 것은 인류의 종교사 지성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 니체가 조로아스터에 열광한 것은 바로 그 자유 의지 때문이었다.
조로아스터교가 인간의 자유 의지를 존중했다는 점은 종교의 개방성 보편성과 연결된다. 그건 누구나 자신의 뜻에 따라 선을 쟁취할 수 있다는 개방성 보편성을 의미한다. 페르시아의 종교는 페르세폴리스로 통하는 길을 따라 지중해 이집트에서 중앙아시아 인더스 강에 이르는 28개 민족의 땅으로 구석구석 전파되었다.
선과 악의 대결, 최후의 심판, 천국과 지옥, 인간의 사후 운명에 대한 관심, 구세주 등 조로아스터교의 기본 정신은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불교에 모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조로아스터가 석가 공자 소크라테스 등 기원전 5세기의 성인보다 한 시대를 앞서 살았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다양한 종교의 원형이 되고 시대를 넘어 20세기 니체에게까지 영향을 준 조로아스터교.
그 종교에 담겨 있는 페르시아인들의 정신은 지금도 일상 속에서 살아 숨쉬고 있다.
○ 세계 전역에 뻗어 나간 페르시아 예술
기원전 5세기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페르시아만큼 외국 관습과 문화를 기꺼이 받아들인 나라는 없다”고 말했다. 페르시아가 정복지의 다른 문화에 대한 관용과 융합을 통해 세계적 감각의 독창적 문화를 창조했다는 말이다. 이것은 후일 페르시아 예술과 문화가 인도 유럽뿐 아니라 동아시아까지 세계 전역으로 퍼져 나가는 원동력이 됐다.
페르세폴리스, 파사르가다에 등 페르시아 옛 수도의 웅장하고 화려한 건축도 엘람, 이집트, 그리스, 바빌로니아, 에티오피아의 다양한 건축 양식이 혼합되어 탄생한 결과물. 2500여 년 전 페르시아에 이미 ‘글로벌 아트’가 탄생한 셈이다. 이 장엄한 건축 예술은 인도 마우리아 왕조(기원전 317년∼기원전 180년)의 건축과 예술 전통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기원전 330년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왕조를 멸망시킨 비운의 사건은 역설적으로 그리스와 페르시아 문화가 융합된 헬레니즘 문화의 기원이 됐다.
둥근 천장과 돔으로 구성된 사산조 페르시아(서기 226∼651년)의 궁전 건축은 4세기 아드리아 해 스플리트(크로아티아의 한 지방)의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 10, 11세기 스페인 카탈루냐 교회 건축 등 유럽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기독교인들의 시각에서 보면 ‘이교도’들의 예술이 기독교 신을 모시기 위한 건축에 영감을 준 것이다.
유럽뿐 아니다. 아프가니스탄 바미안 석굴사원의 장식, 인도 아잔타 석굴, 중국 투루판 석굴 벽화에서도 사산조 페르시아 왕조 특유의 양식이 나타난다. 우리 땅 경북 경주의 신라 고분에서도 사산조 페르시아의 유리그릇이 발견되었고 일본 나라(奈良)의 왕실 보물창고인 쇼소인(正倉院)에서도 사산조 페르시아의 영향을 받은 직물들이 남아 있다.
이처럼 페르시아 제국은 대형 건축물에서 작은 예술품에 이르기까지 많은 예술 분야에 영향을 미쳤다.
- 동아, 2008.4.3,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터번 쓴 서역의 8척 장수, 신라왕릉을 수호
실크로드 따라 골드 러시… 국제도시 경주로
경북 경주 시내에서 울산 가는 길의 한적한 도로변에 있는 신라 괘릉(掛陵). 8세기 통일신라 원성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곳. 여기 있던 작은 연못에 왕의 유해를 걸어 놓았다고 해서 괘릉이란 이름이 붙었다.
그 괘릉에 들어서면 무시무시한 풍모의 페르시아 사내가 떡 하니 버티고 서 있다. 바로 페르시아인 조각상 한 쌍. 8세기 신라왕의 무덤 앞에 어떻게 페르시아인이 조각돼 있는 것일까.
○ 신라왕을 지키는 무시무시한 페르시아인
당시 신라 경주는 문물이 번창했던 국제도시였다. 그 명성에 걸맞게 멀리는 유럽의 로마, 페르시아에서부터 가깝게는 중국과 일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인종의 외국인들이 드나들었다. 그 흔적을 보여주는 대표 유물이 괘릉의 페르시아 무인상 2구(각 높이 257cm)다.
이 주인공이 페르시아인이라는 사실은 얼굴에서 찾아볼 수 있다. 깊숙한 눈, 우뚝 솟은 매부리코 등 전체적인 얼굴 형상이 페르시아풍이다. 이를 흔히 심목고비(深目高鼻)라고 한다. 귀 밑에서 턱으로 흐르는 수염 역시 우리 모습이 아니라 페르시아 모습이다. 무늬를 새긴 천으로 곱슬머리를 동여맨 점, 헐렁한 상의에 치마 같은 하의를 걸친 점, 아랍식의 둥근 터번을 쓰고 있는 점 등 복장까지 영락없는 페르시아 계통이다.
이들은 무시무시하다. 8척이나 되는 키, 육중한 몸집, 가슴 앞에서 주먹을 불끈 쥐고 있는 오른손, 칼을 힘차게 움켜쥔 왼손이 역동적이고 무섭다. 신라인들이 왕의 무덤을 지키는 무인석의 모델로 페르시아인들을 채택했던 것은 그들의 무시무시한 풍모가 악귀를 쫓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 신라의 관료로 일했던 페르시아인
고분에서 출토된 토용(土俑·흙인형)에서도 페르시아인 등 서역인의 모습이 나타난다. 경주 용강동 석실분(8세기)에서 나온 문관상은 홀(笏)을 들고 서 있는 모습. 긴 턱수염과 얼굴 모습이 페르시아인의 풍모다. 그 분위기는 괘릉을 지키는 페르시아 무인석과 사뭇 다르다. 무시무시한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부드럽고 편안한 얼굴이다.
홀은 옛 관리들이 왕을 만날 때 손에 쥐는 물건이다. 이 홀을 들고 있다는 것은 1200여년 전 페르시아인들이 그 먼 곳에서부터 경주 땅으로 들어와 신라의 관료로 일했을 가능성을 말해준다.
9세기 ‘처용가’의 주인공인 처용도 빼놓을 수 없다. 헌강왕을 따라 경주에 와서 벼슬을 하던 중 어느 날 밤 아내를 범하려는 역신(疫神)에게 이 노래를 지어 불렀더니 그 역신이 물러갔다고 하는, 용의 아들 처용. 처용에 관한 조선시대의 기록 등에는 처용의 얼굴은 매우 이국적이었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처용도 페르시아 출신으로 신라 왕실에서 일했던 서역인일 가능성이 높다는 견해도 있다.
페르시아인과 서역인이 신라 왕실의 신하로까지 일했다면 경주 땅에 얼마나 많은 페르시아인과 서역인들이 들어왔는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 페르시아인들은 왜 신라에 왔을까
일부에서는 페르시아인과 서역인들이 실제로 경주에 들어온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당시 중국의 당나라에 남아 있는 조각이나 그림 등을 통해 페르시아인과 서역인의 이미지를 접하고 그것을 차용해 무인석과 토용을 만들었다는 견해다. 즉 직접 본 것이 아니라 간접적으로 보고 제작했다는 말이다.
그러나 페르시아인들이 실제로 신라에 들어왔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직접 보지 않고선 이렇게 생동감 넘치고 사실적으로 만들 수 없다는 것이다.
페르시아가 이슬람화한 뒤인 9세기, 아랍의 지리학자 이븐 쿠르다지바가 쓴 ‘왕국과 도로 총람’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중국의 맨 끝 맞은편에 산이 많고 왕들이 사는 곳이 있는데 바로 신라다. 신라는 금이 많이 나고 기후와 환경이 좋다. 그래서 많은 이슬람교도(페르시아인 포함)가 신라에 정착했다.’
이 기록에 따르면 페르시아인과 서역인은 신라의 금을 구하기 위해 먼 길을 마다 않고 실크로드를 거쳐 경주 땅을 찾은 것이다. 그들은 화려한 신라 금관을 탄생시킨 황금의 나라 신라를 찾아 우수한 금속 공예술을 직접 목격했을 것이다. 그 페르시아 사람들 중엔 상인도 있었고 용병도 있었다. 그들이 매일 신라의 수도 경주 거리를 활보했고 신라인들은 그 페르시아인을 모델로 삼아 무인상 등을 제작한 것이다.
- 동아, 2008.04.05,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
[‘황금의 제국’ 페르시아] <4> 구약의 주인공이 되다
페르시아 에케메네스 왕조의 크세르크세스 1세 두상. 사진제공 생각의 나무 |
기원전 587년 바빌로니아 왕국의 네부카드네자르 2세(느부갓네살)가 유다의 예루살렘 성전을 무너뜨린 뒤 두 차례에 걸쳐 유대인들을 강제로 바빌론으로 끌고 간다. 이 유명한 사건이 ‘바빌론 유수’다.
6세기 중엽 바빌로니아를 멸망시킨 바사 제국은 당시 성서의 저자들이 세계를 장악한 초강대국으로 봤을 정도로 강력한 군사력과 수많은 식민지를 자랑했지만 정복지에 대한 정책은 바빌로니아와 전혀 달랐다. 바사 제국의 고레스 왕은 바빌로니아의 유대인 정책을 폐지하고 유대인을 고향으로 돌려보내는 등 정복지 여러 민족의 정신과 문화를 존중한 관용과 융합의 정신을 보였다.
바사가 바로 페르시아다. 고레스 왕은 기원전 6세기 중엽 이란 고원에서 절대 권력을 잡아 페르시아 세계 제국 시대를 연 아케메네스 왕조의 키루스 2세(기원전 585년경∼기원전 529년)다.
페르시아는 기원전 525년 서아시아에서 이집트에 이르는 광대한 오리엔트 땅을 통일했기 때문에 당대 유대인들도 페르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아야 했다. 따라서 구약성서 곳곳에 페르시아와 페르시아 왕들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황금의 제국 페르시아’를 기독교인들이 꼭 둘러봐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 ‘고레스는 나의 목자라…’
페르세폴리스 이전 아케메네스 왕조의 첫 번째 수도였던 파사르가다에 평야에 솟아 있는 키루스 2세의 무덤. 키루스 2세는 페르시아를 세계 제국의 반열에 올려 놓은 대왕으로, 구약성서에서는 유대인들의 신앙을 존중한 고레스 대왕으로 등장한다. 사진 제공 생각의 나무 |
키루스 2세는 ‘고레스 칙령’을 내려 유대인들이 언제든 팔레스타인의 유다로 돌아가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지을 수 있게 했다. 키루스 2세는 유대인의 신앙, 민족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게 해야 유대인들이 페르시아의 통치에 협조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해서 유다로 돌아온 유대인들은 기원전 515년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세웠다(구약성서 느헤미야 2장 9절∼3장 32절).
바빌론으로 끌려간 유대인 포로를 격려하기 위해 쓴 구약성서 다니엘서는 아예 키루스 2세가 바빌론을 점령할 때를 배경으로 삼고 있다. 구약성서 이사야서에는 하느님이 키루스 2세를 ‘내 목자라 그가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리라 하며’(44장 28절)라는 표현과 ‘여호와께서 그의 기름 부음을 받은 고레스에게’(45장 1절)라는 표현이 잇달아 나온다.
키루스 2세는 유대인이 아닌데도 이처럼 구약성서 곳곳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키루스 2세가 유대인의 하느님을 섬기지 않았지만 유대인의 신앙을 보장한 일을 성서 저자들이 높이 샀기 때문이다.
○ ‘고레스 칙령’ 발견된 곳은 페르시아의 보물창고
유대인에 대한 키루스 2세의 관용을 보여 준 ‘고레스 칙령’이 발견된 곳은 악메다다.
그 발견의 사연은 이렇다. 아케메네스 왕조 다리우스 1세 때 유대인들이 성전을 다시 짓던 중 사마리아 주민들의 방해로 성전 재건이 중단될 위기에 처했다. 유대인들은 키루스 2세가 성전 건축을 허락했다며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왕조의 다리우스 1세에게 ‘고레스 칙령’을 찾아줄 것을 부탁한다. ‘악메다 궁성에서 한 두루마리를 찾았으니 거기에 기록하였으되….’(에스라 6장 2절)
이 유명한 악메다가 바로 하마단이다. 하마단은 다리우스 1세 시절 페르시아의 제3수도(여름 궁전)이기도 했다. 다리우스 1세는 페르세폴리스를 제1수도로, 수사를 제2수도(겨울 궁전)로 정했다. 하마단은 이란 수도 테헤란에서 서남쪽으로 337km 떨어져 있다.
현재까지 옛 궁전의 발굴 작업이 계속되면서 페르시아의 찬란한 문명을 상징하는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다. 아케메네스 왕조의 비문들도 잇달아 발견됐다. 구약성서 에스더서의 주인공인 에스더와 모르드개의 무덤도 있어 성서 고고학적으로도 중요한 곳이다.
‘황금의 제국 페르시아’에 선보이는 페르시아 문명 대표 유물 ‘날개 달린 사자 모양 황금 각배(角杯·뿔 모양의 잔)’도 하마단에서 출토됐다. 사자와 염소를 화려하게 장식해 아케메네스 왕조를 대표하는 금제 공예품으로 불리는 ‘황금 단검’도 이곳에서 발견됐다.
○ 유대인을 구한 여성의 남편이 페르시아의 왕
그러면 하마단에 무덤이 있는 에스더는 누굴까.
유대인 여성인 에스더는 기원전 5세기 아하수에로 왕의 신하인 하만이 유대인을 몰살하려는 계획을 세우자 이에 맞서 아하수에로 왕의 비(妃)가 된 뒤 양부(養父)인 모르드개와 함께 하만의 음모로부터 유대인을 구출해 낸 영웅이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아하수에로 왕이 바로 다리우스 1세의 아들인 크세르크세스 1세다. 이집트, 바빌로니아의 반란을 진압하고 그리스와 전쟁을 벌인 주인공이다.
하마단에서 서쪽으로 5km 떨어진 아바스아바드 계곡에 다리우스 1세와 크세르크세스 1세의 돌 비문이 있다. 크세르크세스 1세의 비문에는 ‘많은 왕 가운데 뛰어난 왕, 많은 통치자 가운데 뛰어난 통치자, 나는 위대한 왕 크세르크세스다. 왕 중의 왕이며 수많은 거민(居民)이 있는 땅의 왕, 끝없는 경계의 거대한 왕국의 왕 아케메네스의 군주 다리우스의 아들이다’라고 적혀 있다.
- 2008.04.12. 동아,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황금의 제국’ 페르시아] <5> 이란에 부는 한국 열풍
천년만의 문화 해후 실크로드엔 이제 한류가 흐른다
《이란 국영방송(IRIB) 채널 2에서 드라마 ‘대장금’이 막을 내린 지난해 11월 이란에서 ‘대장금’의 인기는 폭발적이었다. 이란 국영방송이 집계한‘대장금’의 최고 시청률은 86%. 국영방송 평균 시청률(30∼40%)의 두 배를 웃돌았다.
당시 이란을 찾았을 때 수도 테헤란에서도,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왕조의 수도인 페르세폴리스 유적이 있는 시라즈에서도, 화려한 이슬람 유적이 가득해 ‘세계의 절반’이라는 별명을 가진 이스파한에서도 ‘대장금’의 인기를 확인할 수 있었다.
길거리에서 한국인과 비슷한 외모를 가진 이들을 만나면 어김없이 “양금!”을 외쳤고 한국에 대해 물어 왔다. ‘양금’은 이란인들이 ‘대장금’의 주인공을 가리키는 말이다. 》
6개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양금’의 인기는 식을 줄 모르고 있다.
이란을 찾은 관광객들은 요즘도 거리에서 “양금!”을 외치며 말을 걸어오는 이란인이 많다고 전한다.
○ 1200년 전 실크로드에서 시작된 한국 이란의 문화교류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왕조의 수도인 페르세폴리스의 건축물에 돋을 새김으로 조각된 페르시아 친위대원. 머리와 수염을 소라처럼 고불고불하고 세밀하게 표현했다. 사진 제공 생각의 나무 |
한국인들이 열사(熱沙)의 땅, 테러 위험 국가로 잘못 알고 있는 나라 이란. 2005년 이란 핵 개발 정책에 대한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제재안에 한국이 찬성해 한국 상품 수입을 거부했던 기억 때문인지 먼 나라로만 느껴지는 나라가 곧 이란이다.
하지만 한국과 이란은 이미 1200년 전 실크로드를 통해 문화를 교류한 경험이 있는 사이다. 신라 고도(古都) 경주의 괘릉에는 페르시아인을 표현한 조각상이 있고 신라의 유리잔, 은제 그릇 등 유물도 페르시아에서 들여온 것들이다.
고대 동서문화교류사에서 페르시아는 실크로드의 허브였다. 사산조페르시아(226∼651년)의 문물은 중앙아시아, 인도, 당나라 수도 장안(長安·지금의 시안), 신라의 경주를 거쳐 일본에까지 전파되는 등 실크로드 교류사에 중요한 자취를 남겼다.
○ 한국어, 태권도…확산되는 이란 내 한류
‘대장금’ 열풍 등 이란에서 불고 있는 한류 바람은 고대 실크로드의 교류를 재현하고 있다고 할 만큼 기대를 모으고 있다. 특히 이란인들의 한국어 배우기 열기가 만만치 않다. 2006년 시작된 테헤란 한국학교의 주말 한글 강좌에는 매 학기 수강생 정원 50명이 가득 차고 대기자까지 있을 정도. 한국 드라마를 보기 위해서, 한국에 유학 가기 위해서 등등 이란인들은 다양한 이유에서 한국어를 배우고 있는 것이다.
이란의 태권도 인구가 120만 명이나 된다는 사실도 놀랍다. 일부 중학교에서는 태권도가 정규 수업 과정으로 편성됐고 지역별로 태권도 센터가 속속 문을 열고 있다. 이란 전역에 태권도장만 3500여 곳에 이른다. 여성들이 차도르를 쓴 채 태권도를 할 정도니 그 열풍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 고고학에서의 양국 교류 활성화
고고학 분야에서도 양국의 교류가 활발해지고 있다. 한양대 문화재연구소는 ‘페르시아 지역에 대한 한국 이란 고고학 공동조사’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지난해부터 이란 북부 길란 주의 동굴 유적 15곳을 발굴하고 있다. 발굴 결과 카스피 해 연안에서는 최초로 무스테리안(10만∼5만 년 전에 존재한 네안데르탈인의 문화) 식의 중기 구석기시대 유물(긁개)을 발굴하는 성과를 올렸다.
이란은 아프리카의 고인류와 현생인류가 세계로 퍼져 가는 과정에서 아시아로 가는 길목에 해당돼 인류의 탄생과 이동경로 연구에서 중요한 곳으로 평가받고 있다. 지난해 11월엔 이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서울에서 열린 국제학술대회에 하산 파젤리나실리(46) 이란 고고학연구소장이 참석하기도 했다.
○ 냉장고-에어컨 75%가 삼성-LG 제품
이 같은 문화 교류 분위기에 힘입어 한국과 이란의 경제 교류도 활발하다. 경제 교류의 대표 주자는 자동차. 테헤란을 방문한 한국인들은 눈을 의심한다. 테헤란 시내를 가득 메운 자동차를 보면 한 대 건너 한 대꼴로 프라이드 베타 승용차(국내에서는 단종)이기 때문이다.
프라이드는 이란의 자동차회사인 사이파사가 1993년부터 조립, 생산하기 시작해 최근까지 200만 대를 넘어섰다. 이란의 자동차 보유 대수가 700만 대이니 자동차 서너 대 가운데 한 대는 한국의 프라이드인 셈. 이란의 연간 자동차 생산 능력 100만 대 가운데 프라이드가 연간 30만 대를 차지한다. 그래서 이란 사람들은 프라이드를 ‘국민차’라 부른다.
냉장고, 에어컨 등 가전제품의 점유율도 삼성과 LG 제품이 75%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테헤란 시내의 건물 밖으로 보이는 에어컨 실외기 상표는 거의 LG다.
이처럼 한국은 아랍에미리트 중국 독일에 이어 이란의 4대 경제 교역국이다. 양국의 교역규모는 지난해 100억 달러를 돌파했다. 한국으로서는 중동 최대 수출국이다. 건설, 선박시장에도 우리 기업이 대거 진출해 있다. 한국이 이란에서 수입하는 석유량도 전체 석유 수입의 8∼9%를 차지할 정도로 비중이 높다.
경제 교류 덕분에 한국에 대한 이란의 호감은 각별하다. 지난해 11월 세계박람회 개최를 놓고 여수시와 모로코 탕헤르시가 2차 투표까지 가는 접전을 벌였을 때 이슬람 국가 가운데 유일하게 여수를 지지한 나라가 이란이었다.
최근 양국 사이에 고조되는 문화 경제 교류 분위기는 ‘21세기 한국 이란의 실크로드’라고 할 정도다. 그러나 진정한 상호 문화교류를 위해선 이란의 문화가 한국에 더 많이 소개돼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22일부터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는 기획전 ‘황금의 제국 페르시아’는 양국 교류의 획기적인 계기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지난해 11월 이스파한에서 만난 한 이란인 교사는 “이란도 한국처럼 깊고 오랜 역사와 문화를 지니고 있으나 한국인들은 이란을 전쟁과 사막의 나라로 잘못 알고 있다”며 “한국인에게 이란의 진면목을 소개할 기회가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 동아, 2008. 4.14. 테헤란=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페르시아문화 탐방> ① 소금광산서 찾은 1700년전 '소금인간'
- 2008-02-24 연합뉴스, 김태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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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문화 탐방> ② 하마스 테러와 페르세폴리스 점토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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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 문화탐방> ③ 조로아스터가 남긴 유산들
과거 위광 사라졌지만 살아있는 종교로 성지 유지
꺼져가는 불꽃 조로아스터(Zoroaster)에 다시 심지를 돋운 이는 프리드리히 니체다.
차라투스트라(Zaratustra)라는 이름으로 그를 관속에서 불러낸 니체는 이렇게 선언했다.
"신은 죽었다."
기원전 600년 이전에 활동했을 조로아스터는 아마도 인류역사상 최초의 종교 창시자일 것이다. 그의 가르침에서 비롯된다는 조로아스터교는
불을 특히 숭배한다 해서 배화교(拜火敎)라고도 번역한다.
조로아스터가 태어나 활동한 곳이 페르시아 이고 이슬람교가 침투하기 전까지
페르시아 사회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한 까닭에 현재도 이란 곳곳에는 그 흔적이 적지 않다.
조로아스터교를 국교로 신봉하다시피 한 페르시아 제국의 궁전 페르세폴리스에 남은 부조에서도
이를 엿볼 수 있었다.
이어 이곳에서 북동쪽 6㎞ 가량 되는 지점 황량한 사막지대에 우뚝 솟은 바위산에 형성된
나크시-에 로스탐(Naqsh-e Rostam) 유적에서도
조로아스터교의 강고했던 전통을 만날 수 있었다.
로스탐은 전설적인 제왕으로 나크시-에 로스탐은 로스탐의 그림 정도를 의미한다.
멀리서 이 유적을 조망하면 석굴사원에 온 듯한 착각을 준다.
수십m 되는 암벽 중턱을 따라가며 十자 모양으로 표면을 깎아내고는
그 정중앙을 방형으로 구멍을 뚫어 무덤 4기를 나란히 조성했기 때문이다.
그 무덤들이 자리잡은 곳은 지표면에서 대략 10m 지점은 될 듯 했다.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 암벽 깎기를 했을까?
아니면 요즘 고층건물 겉벽을 청소할 때와 같은 방식으로
암벽 위에서 밧줄을 내려 대롱대롱 매달려 작업했을까?
무덤 4기의 주인공은 왼쪽부터 차례로 크세르크세스(혹은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
다리우스 1세,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혹은 크세르크세스),
그리고 다리우스 2세라 하지만, 이 중 다리우스 1세 무덤만 확실하다.
다른 무엇보다 이곳에만 무덤 주인공을 밝혀주는 명문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저처럼 무덤을 조성한 것은 도굴 방지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무덤은 이미 오래 전에 모두 도굴됐다.
十자형 묘실 표면 위에는 예외 없이 아후라 마즈다 신상(神像)과 불꽃 문양을
세트처럼 장식해 놓았다. 이 둘은 모두 조로아스터교의 짙은 영향력을 감지케 하는 것으로,
전자는 우주 창조의 절대신이며, 후자는 그 상징이다.
조로아스터교를 왜 배화교라고도 하는지를 명쾌하게 보여주는 부조인 셈이다.
불꽃 문양은 백제금동대향로를 새겨 놓은 듯한 착각을 갖게한다.
페르세폴리스나 나크시-에 로스탐이 조로아스터교가 가졌던 과거의 영광을 증언한다면
시라즈를 출발해 자그로스 산맥을 넘어 450㎞ 가량을 달려간 이란고원 중부에 위치한 도시
야즈드는 그 종교가 단순히 과거에만 그치지 않고
현대에도 여전히 살아 꿈틀대는 생물체임을 보여준다.
이곳에서 탐방단이 처음으로 찾은 곳은 조로아스터교 묘지.
멀리 험준한 산들을 병풍처럼 두른 드넓은 평야지대 중에서도 야트막한 민둥산 기슭을 낀 이곳은
높이 2m가 될까말까 한 벽돌담장으로 외부와 차단시켜 놓았다.
너무 일찍 도착했기 때문인지 연락을 받은 이곳 관리인이 탐방단보다 늦게 나타나면서
제주도 조랑말 만한 나귀 1마리를 끌고 나왔다.
이곳 입구의 간판에는
영어로 'Zoroastrian Cemetery in Yazd'(야즈드 조로아스터교 묘지)라고 적어 놓았으나
실제는 기슭에 위치한 조로아스터교 사원 유적과 그 뒤편 민둥산 두 꼭대기에
나란히 원통형 벽돌 탑 같은 모습을 연출하는 장례식장이 세트를 이룬 이른바 '복합공간'이다.
유감스럽게도 이들 장례식장은 조망하기만 했을 뿐 현장을 밟아보지는 못했다.
현재는 사용하는 일이 거의 없다는 이 벽돌탑은 '침묵의 탑'이라 일컬으며,
과거 조로아스터 교도들이 조장(鳥葬)이라고 해서 시신을 그대로 외부에 노출시켜 놓고는
새들이 뜯어먹게 하는 방식으로 처리하기 위한 곳이라고 한다.
이런 시설로 두 곳을 마련한 까닭은 시신을 남성과 여성으로 분리해 처리하기 위함이라 한다.
조장처 전면에 위치한 조로아스터 사원은 폐허라 무너진 벽돌이 곳곳에 나뒹구는가 하면
심지어 못쓰게 된 트럭이 버려져 있기도 했다.
전면에서 보면 장방형 벽독 건물로 그 복판을 관통하는 아치형 통로를 마련해 놓았으며
그 통로 중간쯤 지붕에는 원형 구멍을 뚫어놓았다.
불을 피울 때 나는 연기를 빼내기 위한 장치일 것이다.
이와는 달리 야즈드 시내에 자리한 아테시카데(Ateshkadeh) 사원은
살아있는 조로아스터교 교회다.
사원은 앞에서 볼 때 정방형의 아담한 단독 벽돌건물로
그 앞에는 원형 연못을 만들고 물을 채워 놓았는데, 탐방단이 찾았을 때는 물이 얼어 있었다.
건물 전면 중앙 지붕 쪽에는
날개를 양쪽으로 활짝 펼친 채 오른쪽을 향해 돌아선 반인반조(半人半鳥)의 신상 장식물을
걸어 놓았다. 허리춤에는 마치 훌라후프 같은 큰 고리를 둘렀으며,
왼손에는 그 4분의 1 정도 크기인 작은 고리 하나를 쥐고 있다.
고리란 서로를 이어주는 것이니 신과의 약속을 상징할 것이다.
사원 입구 오른쪽에 붙은 영어 설명문을 보니 이 사원은
1934년 인도의 조로아스터 교인들이 건립했다고 한다.
안으로 들어서면 뒷벽 한 가운데 유리벽으로 차단한 공간에
바로 조로아스터교의 상징인 불이 활활 타고 있다.
이 불은 대략 서기 470년부터 타기 시작해 이후 단 한 번도 꺼진 적이 없는
나히드-에 파르스(Nahid-e Pars) 사원이란 곳에서 옮겨왔다고 한다.
말로만 듣던 배화교의 불을 이곳에서 보게 된 것이다.
불은 나무를 태워 피우고 있었다.
벌건 불기를 머금은 나무와 그 결을 보니 아무래도 참나무 숯을 연상케 했다.
그래서 현지 가이드에게 물어보니 살구나무나 아몬드 나무를 주로 쓴다고 했다.
역시 이곳에서도 화력을 유지하기 위해 견과류 나무를 재료로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불을 유지하기 위해 야즈드 시 정부는 가스를 제공하는 방안을 제시했다고 하나
사원측은 이를 거부했다고 한다.
가스 공급이 중단되면 불이 꺼지기 때문이라는 이유였다는 것이다.
왜 인도인들이 이곳에다가 조로아스터 교회를 세웠을까?
이 종교 신도는 전 세계적으로 약 15만명 정도로 추산된다.
이 중 인도가 8만명 정도를 차지한다. 야즈드 현지의 신도 숫자는 1만5천명.
과거 조로아스터교가 누린 위광에 비하면 초라하기만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인도의 조로아스터 교도들은 그들의 종교 성지인 야즈드를 잊지 않고
이곳에다가 사원을 건립한 것이다.
그래서인지 사원 안에 걸린 조로아스터 초상화는 인도인 색채가 매우 짙다.
- 2008-02-24 연합뉴스, 김태식기자,http://blog.yonhapnews.co.kr/ts1406 / taeshik@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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