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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듬어보고(전시)

[국립중앙박물관] 황금의 나라, 페르시아 특별전

Gijuzzang Dream 2008. 5. 16. 16:06

 

 

 

 

 

 

[황금의 제국’ 페르시아] <1> 모든길은 페르시아로 통한다


 


독수리의 날개,염소의 뿔,사자의 얼굴을 지닌 이 상상의 동물은 세계의 중심에서 세계를 호령했던 페르시아의 위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페르시아 다리우스 1세의 궁전이었던 페르세폴리스 궁전에서 출토된 것으로,지금은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사진 제공 생각의 나무
만국을 호령하고 만인을 포용하다
 

동아일보가 국립중앙박물관 이란국립박물관 SBS와 공동 주최하고 컬쳐앤아이리더스가 주관하는 특별기획전 ‘황금의 제국 페르시아(The Glory of Persia)’.

이 전시는 인류 최초의 세계 제국이었던 페르시아(지금의 이란)의 영광의 역사를 한눈에 조망하는 자리다.

 

또 실크로드를 통한 고대 페르시아와 한국의 문화 교류 양상을 살펴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이기도 하다. 고대 동서문화교류사에서 로마와 페르시아는 실크로드의 시발점이었고 신라 경주는 실크로드의 종착지였기 때문이다.

 

페르시아는 우리에게 ‘아라비안나이트’의 나라로 잘 알려져 있으나 최근 드라마 ‘대장금’이 시청률 86%를 기록하는 등 이란에 한류 열풍이 불면서 한국과 이란 간 문화 교류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페르시아전은 한국과 이란의 문화 교류의 디딤돌이 될 것으로 보인다. 페르시아의 역사와 문화, 세계사적 의의 등을 소개하는 시리즈를 연재한다.

 

○ 기원전 6세기, 페르시아의 수도 페르세폴리스

 

기원전 6세기 어느 새해 첫날, 페르시아의 수도인 페르세폴리스 왕궁.

낙타를 타고 온 아라비아인, 들소를 몰고 온 간다라인, 전차를 끌고 온 리디아인, 상형문자가 가득한 파피루스를 들고 온 이집트인 등 세계 곳곳에서 온 사신들이 궁전 입구 ‘만국()의 문’ 앞에 줄지어 서 있었다. 서아시아부터 지중해를 건너 이집트에 이르기까지 28개 민족의 사신이 페르시아 다리우스 1세 대왕에게 조공을 바치기 위해 줄을 지어 서 있는 것이다.

 

사신들의 행렬을 바라보는 다리우스 1세의 표정은 흐뭇했다. 그 뒤로는 1만 명의 정예병으로 구성된 왕의 불사() 친위사수대가 당당하게 도열해 있었다.

 

그 다음 날, 다리우스 1세는 페르시아의 영광을 과시하기 위해 1만5000명의 왕족을 페르세폴리스 궁전으로 초청해 영광의 향연을 베풀었다.

 

○ 모든 길은 페르세폴리스로 통한다


 

기원전 525년 페르시아 아케메네스왕조는 아시리아를 격파하고 오리엔트를 통일했다. 페르시아가 로마제국에 앞서 최초의 세계 제국이 되었다. 페르시아의 영토는 지중해와 이집트로부터 서아시아를 지나 인더스 강 유역에 이르렀다.

 

당시 페르시아의 왕은 다리우스 1세. 그는 사람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가파른 절벽의 바위 위에 승리를 선포하는 글을 새겨 제국의 탄생을 널리 알렸다.

 

그는 제국을 20개 지역으로 나누어 통치했다. 그가 가장 역점을 둔 것은 교통과 유통. 전국 주요 도시를 연결하는 도로를 닦았다. 이 길을 통해 왕의 명령이 들고 났으며 경제와 문화가 오갔다. 그 핵심은 페르시아의 수도인 페르세폴리스였고 그래서 “모든 길은 페르세폴리스로 통한다”는 말이 나왔다.

 

다리우스 1세는 만국의 왕이 되었다. 이란의 페르세폴리스 궁정 터에 가면 ‘만국의 문’이 지금도 당당히 버티고 서 있다. 주변 민족의 사신들이 조공을 바쳤던 바로 그곳. 페르세폴리스 궁전 건축물의 기둥머리엔 용맹스러운 그리핀(사자의 몸에 독수리의 머리가 달린 신화속의 동물)과 황소 등이 조각되어 있다. 건물의 기둥과 벽에는 당시 주변 민족들의 조공 행렬 모습, 왕의 친위 사수대의 모습을 새긴 부조가 즐비하다.

 

○ 세계사에 길이 남는 불멸의 문화

 

페르시아 아케메네스왕조는 기원전 330년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약 200년 동안 세계의 중심이었다.

 

페르시아가 세계사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포용의 정신. 다리우스 1세를 비롯해 아케메네스왕조의 왕들은 정복한 민족의 지역공동체와 종교, 문화를 존중했다. 페르시아의 지배하에서도 이집트는 파피루스 위에 상형문자를 기록할 수 있었다. 바빌로니아로 쫓겨난 유대인(헤브라이인)들은 그들의 신전을 세울 수 있었다.

 

정복지의 문화는 주요 도로를 통해 페르세폴리스로 들어와 더 멋진 문화로 다시 피어났다. 페르세폴리스 궁전의 화려한 건축은 아시리아의 궁정 건축, 이집트 건축, 바빌로니아 건축이 한데 녹아 새롭게 탄생한 것이다. 페르시아가 약 200년 동안 서아시아와 오리엔트를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은 이 포용정책 덕분이었다.

- 동아, 2008.4. 2.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

 



 

 

 

 

  

[‘황금의 제국’ 페르시아] <2>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옛 페르시아인의 종교 의식을 보여주는 도기. 페르시아가 세계 제국을 건설하기 약400년 전인 기원전 10세기경에 제작된 것으로, 이란의 한 무덤에서 출토됐다. 두 마리의 동물이 조로아스터교에서 말하는 선과 악을, 그 위에 올라탄 사람은 선과 악 사이에서 투쟁하는 인간을 연상시킨다. 이란국립박물관 소장품. 사진 제공 생각의 나무
인간의 ‘자유의지’ 존중… 세계 종교의 모태

 

《기원전 6세기 오리엔트를 통일하고 약 200년간 세계의 중심이 되었던 페르시아. 그 명성에 걸맞게 페르시아의 종교 사상과 문화 예술도 인류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페르시아인들은 정복지 여러 민족의 정신과 문화를 존중하면서 그것을 하나로 녹여 더 위대한 종교와 문화 예술을 탄생시켰다.

다인종 다문화가 살아 숨쉬는 세계 국가의 가능성을 후대에 제시해 준 것이다. 페르시아 제국만이 보여 줄 수 있었던 위대한 업적이다.》

 

○ 자라투스트라(조로아스터)는 이렇게 말했다.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고 외치면서 20세기 서양 철학사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니체의 이 외침은 ‘인간의 자유 의지’를 상징한다.

 

여기서 말하는 자라투스트라는 페르시아의 예언자 조로아스터. 페르시아가 세계 제국이 되었던 기원전 6세기경 조로아스터교를 창시한 인물이다.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가 니체의 철학에 어떻게 영향을 준 것일까.

니체는 왜 조로아스터에 열광한 것일까.

 

조로아스터교는 선과 빛의 신 아후라마즈다와 악과 어둠의 신 아리만의 대결로 세상을 보았다. 개인의 삶이 발전하려면 선과 악 사이에서 끊임없이 투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선악 투쟁의 최후는 불이 심판한다. 불의 제단은 그래서 특별한 숭배의 장소이자 페르시아 종교의 중심이었다.

 

조로아스터와 페르시아인들은 인간이 선과 악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인간의 자유 의지를 중시한 것이다.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아후라마즈다의 편에 서면 최후의 심판 때 천국으로 갈 수 있다고 믿었고 그렇게 되길 기원했다.

 

세상과 삶을 선악의 투쟁으로 보고 동시에 인간의 자유 의지와 도덕성을 존중한 것은 인류의 종교사 지성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 니체가 조로아스터에 열광한 것은 바로 그 자유 의지 때문이었다.

조로아스터교가 인간의 자유 의지를 존중했다는 점은 종교의 개방성 보편성과 연결된다. 그건 누구나 자신의 뜻에 따라 선을 쟁취할 수 있다는 개방성 보편성을 의미한다. 페르시아의 종교는 페르세폴리스로 통하는 길을 따라 지중해 이집트에서 중앙아시아 인더스 강에 이르는 28개 민족의 땅으로 구석구석 전파되었다.

 

선과 악의 대결, 최후의 심판, 천국과 지옥, 인간의 사후 운명에 대한 관심, 구세주 등 조로아스터교의 기본 정신은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불교에 모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조로아스터가 석가 공자 소크라테스 등 기원전 5세기의 성인보다 한 시대를 앞서 살았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다양한 종교의 원형이 되고 시대를 넘어 20세기 니체에게까지 영향을 준 조로아스터교.

그 종교에 담겨 있는 페르시아인들의 정신은 지금도 일상 속에서 살아 숨쉬고 있다.

 

○ 세계 전역에 뻗어 나간 페르시아 예술

 

기원전 5세기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페르시아만큼 외국 관습과 문화를 기꺼이 받아들인 나라는 없다”고 말했다. 페르시아가 정복지의 다른 문화에 대한 관용과 융합을 통해 세계적 감각의 독창적 문화를 창조했다는 말이다. 이것은 후일 페르시아 예술과 문화가 인도 유럽뿐 아니라 동아시아까지 세계 전역으로 퍼져 나가는 원동력이 됐다.

 

페르세폴리스, 파사르가다에 등 페르시아 옛 수도의 웅장하고 화려한 건축도 엘람, 이집트, 그리스, 바빌로니아, 에티오피아의 다양한 건축 양식이 혼합되어 탄생한 결과물. 2500여 년 전 페르시아에 이미 ‘글로벌 아트’가 탄생한 셈이다. 이 장엄한 건축 예술은 인도 마우리아 왕조(기원전 317년∼기원전 180년)의 건축과 예술 전통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기원전 330년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왕조를 멸망시킨 비운의 사건은 역설적으로 그리스와 페르시아 문화가 융합된 헬레니즘 문화의 기원이 됐다.

 

둥근 천장과 돔으로 구성된 사산조 페르시아(서기 226∼651년)의 궁전 건축은 4세기 아드리아 해 스플리트(크로아티아의 한 지방)의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 10, 11세기 스페인 카탈루냐 교회 건축 등 유럽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기독교인들의 시각에서 보면 ‘이교도’들의 예술이 기독교 신을 모시기 위한 건축에 영감을 준 것이다.

 

유럽뿐 아니다. 아프가니스탄 바미안 석굴사원의 장식, 인도 아잔타 석굴, 중국 투루판 석굴 벽화에서도 사산조 페르시아 왕조 특유의 양식이 나타난다. 우리 땅 경북 경주의 신라 고분에서도 사산조 페르시아의 유리그릇이 발견되었고 일본 나라()의 왕실 보물창고인 쇼소인()에서도 사산조 페르시아의 영향을 받은 직물들이 남아 있다.

 

이처럼 페르시아 제국은 대형 건축물에서 작은 예술품에 이르기까지 많은 예술 분야에 영향을 미쳤다.

- 동아, 2008.4.3,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황금의 제국’ 페르시아] <3> 페르시아인들 경주를 활보하다

터번 쓴 서역의 8척 장수, 신라왕릉을 수호

실크로드 따라 골드 러시… 국제도시 경주로

용강 고분 서역인 문관상… 관직도 진출한듯  


경북 경주 시내에서 울산 가는 길의 한적한 도로변에 있는 신라 괘릉(). 8세기 통일신라 원성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곳. 여기 있던 작은 연못에 왕의 유해를 걸어 놓았다고 해서 괘릉이란 이름이 붙었다.

그 괘릉에 들어서면 무시무시한 풍모의 페르시아 사내가 떡 하니 버티고 서 있다. 바로 페르시아인 조각상 한 쌍. 8세기 신라왕의 무덤 앞에 어떻게 페르시아인이 조각돼 있는 것일까.

 

○ 신라왕을 지키는 무시무시한 페르시아인

 

당시 신라 경주는 문물이 번창했던 국제도시였다. 그 명성에 걸맞게 멀리는 유럽의 로마, 페르시아에서부터 가깝게는 중국과 일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인종의 외국인들이 드나들었다. 그 흔적을 보여주는 대표 유물이 괘릉의 페르시아 무인상 2구(각 높이 257cm)다.

 

이 주인공이 페르시아인이라는 사실은 얼굴에서 찾아볼 수 있다. 깊숙한 눈, 우뚝 솟은 매부리코 등 전체적인 얼굴 형상이 페르시아풍이다. 이를 흔히 심목고비()라고 한다. 귀 밑에서 턱으로 흐르는 수염 역시 우리 모습이 아니라 페르시아 모습이다. 무늬를 새긴 천으로 곱슬머리를 동여맨 점, 헐렁한 상의에 치마 같은 하의를 걸친 점, 아랍식의 둥근 터번을 쓰고 있는 점 등 복장까지 영락없는 페르시아 계통이다.

 

이들은 무시무시하다. 8척이나 되는 키, 육중한 몸집, 가슴 앞에서 주먹을 불끈 쥐고 있는 오른손, 칼을 힘차게 움켜쥔 왼손이 역동적이고 무섭다. 신라인들이 왕의 무덤을 지키는 무인석의 모델로 페르시아인들을 채택했던 것은 그들의 무시무시한 풍모가 악귀를 쫓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 신라의 관료로 일했던 페르시아인

 

고분에서 출토된 토용(·흙인형)에서도 페르시아인 등 서역인의 모습이 나타난다. 경주 용강동 석실분(8세기)에서 나온 문관상은 홀()을 들고 서 있는 모습. 긴 턱수염과 얼굴 모습이 페르시아인의 풍모다. 그 분위기는 괘릉을 지키는 페르시아 무인석과 사뭇 다르다. 무시무시한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부드럽고 편안한 얼굴이다.

 

홀은 옛 관리들이 왕을 만날 때 손에 쥐는 물건이다. 이 홀을 들고 있다는 것은 1200여년 전 페르시아인들이 그 먼 곳에서부터 경주 땅으로 들어와 신라의 관료로 일했을 가능성을 말해준다.

 

9세기 ‘처용가’의 주인공인 처용도 빼놓을 수 없다. 헌강왕을 따라 경주에 와서 벼슬을 하던 중 어느 날 밤 아내를 범하려는 역신()에게 이 노래를 지어 불렀더니 그 역신이 물러갔다고 하는, 용의 아들 처용. 처용에 관한 조선시대의 기록 등에는 처용의 얼굴은 매우 이국적이었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처용도 페르시아 출신으로 신라 왕실에서 일했던 서역인일 가능성이 높다는 견해도 있다.

 

페르시아인과 서역인이 신라 왕실의 신하로까지 일했다면 경주 땅에 얼마나 많은 페르시아인과 서역인들이 들어왔는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 페르시아인들은 왜 신라에 왔을까

 

일부에서는 페르시아인과 서역인들이 실제로 경주에 들어온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당시 중국의 당나라에 남아 있는 조각이나 그림 등을 통해 페르시아인과 서역인의 이미지를 접하고 그것을 차용해 무인석과 토용을 만들었다는 견해다. 즉 직접 본 것이 아니라 간접적으로 보고 제작했다는 말이다.

 

그러나 페르시아인들이 실제로 신라에 들어왔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직접 보지 않고선 이렇게 생동감 넘치고 사실적으로 만들 수 없다는 것이다.

 

페르시아가 이슬람화한 뒤인 9세기, 아랍의 지리학자 이븐 쿠르다지바가 쓴 ‘왕국과 도로 총람’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중국의 맨 끝 맞은편에 산이 많고 왕들이 사는 곳이 있는데 바로 신라다. 신라는 금이 많이 나고 기후와 환경이 좋다. 그래서 많은 이슬람교도(페르시아인 포함)가 신라에 정착했다.’

 

이 기록에 따르면 페르시아인과 서역인은 신라의 금을 구하기 위해 먼 길을 마다 않고 실크로드를 거쳐 경주 땅을 찾은 것이다. 그들은 화려한 신라 금관을 탄생시킨 황금의 나라 신라를 찾아 우수한 금속 공예술을 직접 목격했을 것이다. 그 페르시아 사람들 중엔 상인도 있었고 용병도 있었다. 그들이 매일 신라의 수도 경주 거리를 활보했고 신라인들은 그 페르시아인을 모델로 삼아 무인상 등을 제작한 것이다.

- 동아, 2008.04.05,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

 

 

 

 

 

 [‘황금의 제국’ 페르시아] <4> 구약의 주인공이 되다

   


페르시아 에케메네스 왕조의 크세르크세스 1세 두상. 사진제공 생각의 나무
바사의 은 성서속의 목자였다

 

기원전 587년 바빌로니아 왕국의 네부카드네자르 2세(느부갓네살)가 유다의 예루살렘 성전을 무너뜨린 뒤 두 차례에 걸쳐 유대인들을 강제로 바빌론으로 끌고 간다. 이 유명한 사건이 ‘바빌론 유수’다.

 

6세기 중엽 바빌로니아를 멸망시킨 바사 제국은 당시 성서의 저자들이 세계를 장악한 초강대국으로 봤을 정도로 강력한 군사력과 수많은 식민지를 자랑했지만 정복지에 대한 정책은 바빌로니아와 전혀 달랐다. 바사 제국의 고레스 왕은 바빌로니아의 유대인 정책을 폐지하고 유대인을 고향으로 돌려보내는 등 정복지 여러 민족의 정신과 문화를 존중한 관용과 융합의 정신을 보였다.

 

바사가 바로 페르시아다. 고레스 왕은 기원전 6세기 중엽 이란 고원에서 절대 권력을 잡아 페르시아 세계 제국 시대를 연 아케메네스 왕조의 키루스 2세(기원전 585년경∼기원전 529년)다.

 

페르시아는 기원전 525년 서아시아에서 이집트에 이르는 광대한 오리엔트 땅을 통일했기 때문에 당대 유대인들도 페르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아야 했다. 따라서 구약성서 곳곳에 페르시아와 페르시아 왕들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황금의 제국 페르시아’를 기독교인들이 꼭 둘러봐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 ‘고레스는 나의 목자라…’


페르세폴리스 이전 아케메네스 왕조의 첫 번째 수도였던 파사르가다에 평야에 솟아 있는 키루스 2세의 무덤. 키루스 2세는 페르시아를 세계 제국의 반열에 올려 놓은 대왕으로, 구약성서에서는 유대인들의 신앙을 존중한 고레스 대왕으로 등장한다. 사진 제공 생각의 나무

키루스 2세는 ‘고레스 칙령’을 내려 유대인들이 언제든 팔레스타인의 유다로 돌아가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지을 수 있게 했다. 키루스 2세는 유대인의 신앙, 민족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게 해야 유대인들이 페르시아의 통치에 협조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해서 유다로 돌아온 유대인들은 기원전 515년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세웠다(구약성서 느헤미야 2장 9절∼3장 32절).

 

바빌론으로 끌려간 유대인 포로를 격려하기 위해 쓴 구약성서 다니엘서는 아예 키루스 2세가 바빌론을 점령할 때를 배경으로 삼고 있다. 구약성서 이사야서에는 하느님이 키루스 2세를 ‘내 목자라 그가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리라 하며’(44장 28절)라는 표현과 ‘여호와께서 그의 기름 부음을 받은 고레스에게’(45장 1절)라는 표현이 잇달아 나온다.

 

키루스 2세는 유대인이 아닌데도 이처럼 구약성서 곳곳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키루스 2세가 유대인의 하느님을 섬기지 않았지만 유대인의 신앙을 보장한 일을 성서 저자들이 높이 샀기 때문이다.

 

○ ‘고레스 칙령’ 발견된 곳은 페르시아의 보물창고

 

유대인에 대한 키루스 2세의 관용을 보여 준 ‘고레스 칙령’이 발견된 곳은 악메다다.

그 발견의 사연은 이렇다. 아케메네스 왕조 다리우스 1세 때 유대인들이 성전을 다시 짓던 중 사마리아 주민들의 방해로 성전 재건이 중단될 위기에 처했다. 유대인들은 키루스 2세가 성전 건축을 허락했다며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왕조의 다리우스 1세에게 ‘고레스 칙령’을 찾아줄 것을 부탁한다. ‘악메다 궁성에서 한 두루마리를 찾았으니 거기에 기록하였으되….’(에스라 6장 2절)

 

이 유명한 악메다가 바로 하마단이다. 하마단은 다리우스 1세 시절 페르시아의 제3수도(여름 궁전)이기도 했다. 다리우스 1세는 페르세폴리스를 제1수도로, 수사를 제2수도(겨울 궁전)로 정했다. 하마단은 이란 수도 테헤란에서 서남쪽으로 337km 떨어져 있다.

 

현재까지 옛 궁전의 발굴 작업이 계속되면서 페르시아의 찬란한 문명을 상징하는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다. 아케메네스 왕조의 비문들도 잇달아 발견됐다. 구약성서 에스더서의 주인공인 에스더와 모르드개의 무덤도 있어 성서 고고학적으로도 중요한 곳이다.

 

‘황금의 제국 페르시아’에 선보이는 페르시아 문명 대표 유물 ‘날개 달린 사자 모양 황금 각배(·뿔 모양의 잔)’도 하마단에서 출토됐다. 사자와 염소를 화려하게 장식해 아케메네스 왕조를 대표하는 금제 공예품으로 불리는 ‘황금 단검’도 이곳에서 발견됐다.

 

○ 유대인을 구한 여성의 남편이 페르시아의 왕

 

그러면 하마단에 무덤이 있는 에스더는 누굴까.

유대인 여성인 에스더는 기원전 5세기 아하수에로 왕의 신하인 하만이 유대인을 몰살하려는 계획을 세우자 이에 맞서 아하수에로 왕의 비()가 된 뒤 양부()인 모르드개와 함께 하만의 음모로부터 유대인을 구출해 낸 영웅이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아하수에로 왕이 바로 다리우스 1세의 아들인 크세르크세스 1세다. 이집트, 바빌로니아의 반란을 진압하고 그리스와 전쟁을 벌인 주인공이다.

 

하마단에서 서쪽으로 5km 떨어진 아바스아바드 계곡에 다리우스 1세와 크세르크세스 1세의 돌 비문이 있다. 크세르크세스 1세의 비문에는 ‘많은 왕 가운데 뛰어난 왕, 많은 통치자 가운데 뛰어난 통치자, 나는 위대한 왕 크세르크세스다. 왕 중의 왕이며 수많은 거민()이 있는 땅의 왕, 끝없는 경계의 거대한 왕국의 왕 아케메네스의 군주 다리우스의 아들이다’라고 적혀 있다.

- 2008.04.12. 동아,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황금의 제국’ 페르시아] <5> 이란에 부는 한국 열풍

 

천년만의 문화 해후 실크로드엔 이제 한류가 흐른다

 

《이란 국영방송(IRIB) 채널 2에서 드라마 ‘대장금’이 막을 내린 지난해 11월 이란에서 ‘대장금’의 인기는 폭발적이었다. 이란 국영방송이 집계한‘대장금’의 최고 시청률은 86%. 국영방송 평균 시청률(30∼40%)의 두 배를 웃돌았다.

 

당시 이란을 찾았을 때 수도 테헤란에서도,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왕조의 수도인 페르세폴리스 유적이 있는 시라즈에서도, 화려한 이슬람 유적이 가득해 ‘세계의 절반’이라는 별명을 가진 이스파한에서도 ‘대장금’의 인기를 확인할 수 있었다.

길거리에서 한국인과 비슷한 외모를 가진 이들을 만나면 어김없이 “양금!”을 외쳤고 한국에 대해 물어 왔다. ‘양금’은 이란인들이 ‘대장금’의 주인공을 가리키는 말이다. 》

6개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양금’의 인기는 식을 줄 모르고 있다.

이란을 찾은 관광객들은 요즘도 거리에서 “양금!”을 외치며 말을 걸어오는 이란인이 많다고 전한다.

 

○ 1200년 전 실크로드에서 시작된 한국 이란의 문화교류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왕조의 수도인 페르세폴리스의 건축물에 돋을 새김으로 조각된 페르시아 친위대원. 머리와 수염을 소라처럼 고불고불하고 세밀하게 표현했다. 사진 제공 생각의 나무

 

한국인들이 열사()의 땅, 테러 위험 국가로 잘못 알고 있는 나라 이란. 2005년 이란 핵 개발 정책에 대한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제재안에 한국이 찬성해 한국 상품 수입을 거부했던 기억 때문인지 먼 나라로만 느껴지는 나라가 곧 이란이다.

하지만 한국과 이란은 이미 1200년 전 실크로드를 통해 문화를 교류한 경험이 있는 사이다. 신라 고도() 경주의 괘릉에는 페르시아인을 표현한 조각상이 있고 신라의 유리잔, 은제 그릇 등 유물도 페르시아에서 들여온 것들이다.

 

고대 동서문화교류사에서 페르시아는 실크로드의 허브였다. 사산조페르시아(226∼651년)의 문물은 중앙아시아, 인도, 당나라 수도 장안(·지금의 시안), 신라의 경주를 거쳐 일본에까지 전파되는 등 실크로드 교류사에 중요한 자취를 남겼다.

 

○ 한국어, 태권도…확산되는 이란 내 한류

 

‘대장금’ 열풍 등 이란에서 불고 있는 한류 바람은 고대 실크로드의 교류를 재현하고 있다고 할 만큼 기대를 모으고 있다. 특히 이란인들의 한국어 배우기 열기가 만만치 않다. 2006년 시작된 테헤란 한국학교의 주말 한글 강좌에는 매 학기 수강생 정원 50명이 가득 차고 대기자까지 있을 정도. 한국 드라마를 보기 위해서, 한국에 유학 가기 위해서 등등 이란인들은 다양한 이유에서 한국어를 배우고 있는 것이다.

 

이란의 태권도 인구가 120만 명이나 된다는 사실도 놀랍다. 일부 중학교에서는 태권도가 정규 수업 과정으로 편성됐고 지역별로 태권도 센터가 속속 문을 열고 있다. 이란 전역에 태권도장만 3500여 곳에 이른다. 여성들이 차도르를 쓴 채 태권도를 할 정도니 그 열풍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 고고학에서의 양국 교류 활성화

 

고고학 분야에서도 양국의 교류가 활발해지고 있다. 한양대 문화재연구소는 ‘페르시아 지역에 대한 한국 이란 고고학 공동조사’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지난해부터 이란 북부 길란 주의 동굴 유적 15곳을 발굴하고 있다. 발굴 결과 카스피 해 연안에서는 최초로 무스테리안(10만∼5만 년 전에 존재한 네안데르탈인의 문화) 식의 중기 구석기시대 유물(긁개)을 발굴하는 성과를 올렸다.

 

이란은 아프리카의 고인류와 현생인류가 세계로 퍼져 가는 과정에서 아시아로 가는 길목에 해당돼 인류의 탄생과 이동경로 연구에서 중요한 곳으로 평가받고 있다. 지난해 11월엔 이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서울에서 열린 국제학술대회에 하산 파젤리나실리(46) 이란 고고학연구소장이 참석하기도 했다.

 

○ 냉장고-에어컨 75%가 삼성-LG 제품

 

이 같은 문화 교류 분위기에 힘입어 한국과 이란의 경제 교류도 활발하다. 경제 교류의 대표 주자는 자동차. 테헤란을 방문한 한국인들은 눈을 의심한다. 테헤란 시내를 가득 메운 자동차를 보면 한 대 건너 한 대꼴로 프라이드 베타 승용차(국내에서는 단종)이기 때문이다.

 

프라이드는 이란의 자동차회사인 사이파사가 1993년부터 조립, 생산하기 시작해 최근까지 200만 대를 넘어섰다. 이란의 자동차 보유 대수가 700만 대이니 자동차 서너 대 가운데 한 대는 한국의 프라이드인 셈. 이란의 연간 자동차 생산 능력 100만 대 가운데 프라이드가 연간 30만 대를 차지한다. 그래서 이란 사람들은 프라이드를 ‘국민차’라 부른다.

 

냉장고, 에어컨 등 가전제품의 점유율도 삼성과 LG 제품이 75%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테헤란 시내의 건물 밖으로 보이는 에어컨 실외기 상표는 거의 LG다.

 

이처럼 한국은 아랍에미리트 중국 독일에 이어 이란의 4대 경제 교역국이다. 양국의 교역규모는 지난해 100억 달러를 돌파했다. 한국으로서는 중동 최대 수출국이다. 건설, 선박시장에도 우리 기업이 대거 진출해 있다. 한국이 이란에서 수입하는 석유량도 전체 석유 수입의 8∼9%를 차지할 정도로 비중이 높다.

경제 교류 덕분에 한국에 대한 이란의 호감은 각별하다. 지난해 11월 세계박람회 개최를 놓고 여수시와 모로코 탕헤르시가 2차 투표까지 가는 접전을 벌였을 때 이슬람 국가 가운데 유일하게 여수를 지지한 나라가 이란이었다.

 

최근 양국 사이에 고조되는 문화 경제 교류 분위기는 ‘21세기 한국 이란의 실크로드’라고 할 정도다. 그러나 진정한 상호 문화교류를 위해선 이란의 문화가 한국에 더 많이 소개돼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22일부터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는 기획전 ‘황금의 제국 페르시아’는 양국 교류의 획기적인 계기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지난해 11월 이스파한에서 만난 한 이란인 교사는 “이란도 한국처럼 깊고 오랜 역사와 문화를 지니고 있으나 한국인들은 이란을 전쟁과 사막의 나라로 잘못 알고 있다”며 “한국인에게 이란의 진면목을 소개할 기회가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 동아, 2008. 4.14. 테헤란=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페르시아문화 탐방> ① 소금광산서 찾은 1700년전 '소금인간'  


이란 국립박물관 전시품 수백점 불과하나 인류문명 태동 증언

 

<※ 이란 북서부 길란 지역에서 이란과 구석기 유적 공동발굴조사를 벌이고 있는

한양대 문화재연구소(소장 배기동)는 이란 문화를 이해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지난 4일부터 11일까지 테헤란을 중심으로 시라즈-야즈드-이스파한을 거쳐

카스피해 남쪽 연안 도시 라시트를 경유하는 페르시아 문화탐방을 실시했다.

40여 명으로 구성된 이번 탐방단에 동행한 견문을 4회에 걸쳐 정리한다= 편집자주>

 

 

열사(熱砂)의 나라에 파카는 웬말이며, 부디 지뢰밭에는 근처도 얼씬거리지 말라는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의 말을 뒤로 하면서 인천공항을 출발해 9시간만에

테헤란 호메이니공항에 내리니 한밤중이었다.

이란은 열사의 나라도 아니며 위도가 비슷해서인지,

아니면 평균 고도가 1천m가 넘는 고원지대여서인지는 몰라도 기온은 서울과 비슷하다.

일주일 뒤 다시 호메이니공항을 통해 떠날 때까지

남북한을 합친 면적보다 7.5배나 넓다는 광대한 이란 국토 남북을 종단했음에도

적어도 우리가 다닌 길 어디에도 지뢰밭은 없었다.

 

전날 현지에 도착해 탐방단을 맞은 배기동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교수는

숙소까지 가는 버스 안에서 온 도시를 환하게 밝힌 불빛들을 가리키면서

"내가 어제 이란 외교부 장관에게 얘기해 저렇게 불빛을 밝히도록 했다"고 농담을 했다.

요즘 테헤란의 밤이 저렇게 밝은 까닭은

호메이니가 주도한 팔레비 친미정부 전복 혁명 30주년 기념일이 가까워 오기 때문이란다.

 

페르도시 호텔이란 곳에서 이란에서의 첫날밤을 보낸 탐방단은

이튿날 오전 도보로 5분 거리에 있는 이란 국립박물관을 찾았다.

가는 길 왼편에 담장이 우람한 이란 외교부 청사를 지난다.

경비는 그다지 삼엄하지 않으나, 이 부근에서는 사진촬영이 금지된다고 한다.

한양대측에 의하면

아직까지 외부세계에 공개되기를 꺼리는 경향이 있어 이런 전통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이란 국립박물관은 1937년 프랑스 건축가 앙드레 고다르가

사산조 페르시아 양식 건축물을 모델로 만든 본관에다가

1996년에 고고학 전문 박물관이 신관으로 추가 개관됐지만,

아무 생각없이 전시실을 빙 둘러보기만 한다면 5분이면 관람로 출발지점으로 도로 돌아온다.

전시실은 평면 ⊃자 모양이며, 그나마 1층만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눈대중으로 몇 백점에 지나지 않을 전시품 하나하나는

인류문명의 시작을 증언한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대표급이다.

하기야 이란은 인근 메소포타미아지역과 더불어 인류문명이 가장 일찍 태동한 곳이 아닌가?

한반도가 여전히 신석기시대에 머물며 도구라고 해 봐야 돌을 다듬어 쓰면서

금속이 무엇인지도 모르던 그 시절에 이곳에서는 이미 함무라비왕이 군림하면서

광개토왕비 같은 장대한 비문을 남기기도 했다.

 

고고학 출토 유물 일색인 전시품은 선사시대 이후 역사시대를 내려오는

이른바 편년체식 진열기법을 쓴다.

다만 전시공간이 부족한 데 따른 고육책인지 역사시대는 우리로 치면

고구려, 백제, 신라가 한창 병립하는 사산조 페르시아 시대로 끝난다.

우리 박물관 같으면 으레 그 도입부에 주먹도끼를 비롯한 구석기 유물을 배치하기 마련이지만,

이곳에서 그렇게 익숙한 석기유물은 단 1점도 만날 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신 전시실 첫 머리는 원색으로 겉면을 장식한 각종 채도(彩陶) 차지가 되어 있다.

왜 이런 현상이 빚어질까?

 

구석기 고고학자인 배기동 교수는 이런 의문을 풀어준다.

"이란에는 구석기시대를 전공하는 고고학자가 없습니다."

인류문명의 시작과 궤를 같이 한다는 이란에 구석기 전공자가 없다니 선뜻 믿기 어렵다.

하지만 이는 이란 고고학이 처한 엄연한 현실이다.

이런 점에서 구석기 유적을 발판으로 삼은 한국 고고학의 이란 진출은 의미가 더욱 클 것이다.

 

상설 전시품을 일별하면 그 출토지는 대체로 이란 중부에 자리한

아케마메니아 왕조(페르시아 제국) 유적지인 '페르세폴리스'(Persepolis)와

페르시아만과 비교적 가까우며 선사시대 이래 페르시아 제국 시대에 이르는 기간에 중심지 구실을

한 '수사'(Susa) 등 두 곳에 집중돼 있음을 알 수 있다.

 

전시 토기를 훑어보던 조유전 토지박물관장이 갑자기 "여기 백제 삼족기(三足器)가 있네"라고

해서, 그가 가리키는 토기를 살펴보니 영락없이 발 세 개가 달린 토기인 삼족기다.

영어 안내문을 보니 이 토기는 제이란 테페(Jeiran Tepe)라는 유적의 출토품이며

제작 연대는 기원전 1천년대라고 한다.

한반도에서 선사시대 때 석기 제작에 널리 사용된 흑요석이란 돌은

이곳의 선사시대에도 그 재료로 널리 사용된 듯,

그 원석이라 할 만한 새까만 돌이 조명을 받아 더욱 빛을 낸다.

한데 그 크기가 자그마치 어린아이 머리만 했다.

우리의 도장 혹은 봉니(封泥)에 해당하는 인장은

이곳에서는 기원전 3천년대에 사용되다가 폐기된 '수사' 유적 출토품으로 여러 점이 전시됐다.

인장 바닥에는 문자가 아니라 동물이나 기하학 문양이 새겨져 있다.

 

기원전 수천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도기 문양 중에는 十자 도안이 더러 발견되는 점도

주목거리였다.

결국 이런 전통은 나중에 기독교가 흡수해 그들의 트레이드마크로 삼았을지도 모른다.

 

전시실 중간에서는 어른 키만한 흙으로 빚은 황소상이 기다린다.

무엇에 근거를 둔 것인지 모르겠지만 설명문에 의하면 그 제작 시기는 기원전 1250년이라고 한다.

이를 지나면 시커먼 원추형 돌기둥이 관람객을 가로막는데

그 유명한 함무라비왕의 법령을 새긴 비다.

하지만 널리 알려져 있듯이 그 원본은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에 있고, 이 비문은 복제품이다.

 

안내문을 보니 실제 비는 1901년 '수사'에서 프랑스 고고학자 자크 더 모르강이 발견한 직후

그 판독과 복원처리를 위해 루르브로 이송되었으나 얼마 뒤 프랑스 정부는 원본을 놔 두고,

이 복제품만 덜렁 넘겨주었다고 한다.

이런 내용을 담은 설명문은 말할 것도 없이

이 비의 원본을 언젠가는 돌려받아야 한다는 선언이나 다름없다.

복제품에도 이런 아픈 역사가 새겨 있다.

 

그 안내문은 나아가 원래 비는 지금의 이라크 바그다드인 바빌론에

기원전 1800년 무렵에 세워졌다가 기원전 1160년경 '수사'로 옮겼다고 한다.

우리의 제액(題額)에 해당되는 비문 꼭대기에는

태양신 사마시를 숭배하는 모습을 새겨놓았으며,

비 몸통에 쐐기문자(설형문자)를 새겼는데

줄과 행을 반듯이 긋고 그 안에다 글자를 촘촘히 새겨 넣었다.

 

기원전 716년에 세웠다는 사르곤 2세의 기념비는 함무라비왕 비문 옆에 전시 중이다.

글씨는 탁본없이는 그 흔적을 알기 어려울 정도로 마멸 상태가 심각하다.

페르시아 제국의 전성기를 연 다리우스 1세, 혹은 그 뒤를 이은 제왕 크세르크세스가

중국역사의 표현을 그대로 빌린다면 봉건제후국의 알현을 받는 장면을 묘사한 것으로 추정되는

부조 작품도 볼 만하다.

이 외에도 이란 역사의 자부심 원천이라고 할 만한 페르시아 제국, 혹은 다리우스 1세와 관련된

다른 유물로는 머리가 잘려 나간 그의 동상도 있다.

이 조각은 원래 이집트에서 제작되었다고 하며

1972년 프랑스 고고학 팀이 '수사'에서 발굴했다고 한다.

 

테헤란 국립박물관 관람 대미는 '소금인간'이 장식한다.

덥수룩한 백발과 그만큼이나 무성한 수염이 그대로 붙은 이 소금인간은

머리는 따로 분리해 유리용기에 넣어 전시 중이며,

그 주변에는 이 유골과 함께 발견된 다양한 유물을 배치했다.

유물로는 가죽신과 쇠칼 3자루, 모직물로 짠 반바지, 은으로 만든 바늘 혹은 귀 후비개, 멜빵,

가죽끈 일부, 숫돌, 호두 등이 있다.

발견 당시 가죽신발 안에는 이 유골 주인공의 발이 그대로 들어 있었다고 한다.

그 발뼈는 머리와 함께 전시가 이뤄지고 있다.

 

세계 고고학계에서 이를 소금인간이라 부르는 까닭은

발견된 곳이 바로 소금광산 갱도 안이기 때문이다.

현재 전시 중인 인골은 안내문에 의하면 1993년 겨울,

잔잔 주(州) 주도인 잔잔의 서쪽 마을 함젤루 의 남쪽에 위치한 체흐라바드 소금광산에서

소금을 캐던 광부가 갱도 깊이 45m 지점에서 발견했다.

 

뼈 조각과 직물을 시료로 실시한 탄소연대 측정결과,

이 소금인간이 산 시대는 대략 1천700년 전 사산조 페르시아 시기라 한다.

머리카락 분석결과 이 남자는 혈액형이 Rh+ B형.

다른 의학적 분석결과에 의하면 죽을 때 나이는 37세, 신장은 175㎝였다.

3차원 스캔 결과 사망하기 직전 눈 부위에 둔탁한 가격이 있었다는 결과도 나왔다.

긴 머리와 덥수룩한 수염, 왼쪽 귀에 황금 귀걸이를 한 점으로 보아

이 사람은 귀족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하지만 광부도 아닌 이런 고귀한 신분의 남자가

왜 소금광산에 버려졌는지는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이 소금광산에서는 지난해에 이르기까지 모두 5구에 이르는 소금인간이 추가로 발견됐다.

한국고고학계에서는 조선시대 분묘에서 잇따른 미라 발굴로 개가를 올리고 있는데,

이곳 이란에서는 소금인간이 연이어 출현해 세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 2008-02-24 연합뉴스, 김태식기자

 

 

 

 

  

 

 

 

 

 

 

<페르시아문화 탐방> ② 하마스 테러와 페르세폴리스 점토판  


 

세계문화유산 '만국의 문' 훼손한 낙서에 한글 이름도 한몫

 

페르시아만을 따라 이란 남부를 동서로 가로 지르는

자그로스 산맥이 펼친 초원지대에 위치한 시라즈.

테헤란에서 1천㎞ 가량이나 떨어진 까닭에 탐방단은 비행기를 이용했다.

한데 비행기는 정해진 출발시간보다 1시간 반 가량이나 늦게 떴다.

이란 체류기간에 경험한 일이지만 중국인을 특징짓는

이른바 '만만디'는 이란 사회 곳곳에 침투해 있었다.

 

해발 1천500m 고지에 위치한 시라즈는

이란에서는 남쪽에 치우친 파르스 주(州)에 위치한 까닭에

가로에 심어진 야자수들이 동남아에 온 듯한 상념을 잠시 주기도 하지만,

원지대여서인지 날씨는 매섭다.

인구 120만으로 이란에서는 6위의 대도시라 하지만,

천만 도시 서울에 익숙한 한국탐방단원들에게는 농촌이나 마찬가지다.

 

잔드 왕조(1747-1779) 수도일 당시에 그 군주 카림 칸이 만들었다 해서 '카림 칸 요새'로 일컫는

성곽은 벽돌로 구축한 성벽이 특히 장관이다.

높이 14m에 이르는 성벽이 평면 방형으로 둘러친 이 성곽은 요새라는 명칭답게

규모는 아담한 편이라 면적은 4천㎡ 정도였으며,

성벽 네 귀퉁이에는 각각 망루와 같은 탑을 세워 놓았다.

이상한 점은 정면 왼쪽 탑이 기울어져 있었는데,

이곳 안내를 맡은 현지 학자에 의하면 지진으로 인해 기울어졌다고 한다.

 

시라즈 시내를 막 벗어난 북서쪽 외곽에 위치한 이 요새를 둘러본 다음

이번 페르시아문명 탐방 하이라이트라고도 할 수 있는 페르세폴리스(Persepolis)란 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시라즈 북동쪽 70km 지점에 위치하는 이 고대 유적지는

이미 1979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이력만큼이나 장관을 이뤘다.

하늘을 향해 죽죽 솟은 돌기둥은 비온 뒤 한창 솟아나기 시작하는 죽순을 연상케 하며,

페르시아 제국 군주가 이곳으로 조공품을 들고 온 만국의 사신을 맞아들이는 입구였다는

'만국의 문'(the Gate of All Nations)은 비록 목재였을 지붕은 망실되고 없으나

그 우람한 자태는 2천년 이상 훨씬 지난 지금에도 변함이 없다.

 

그렇지만 유적 관리는 허술한 편이라 '만국의 문' 곳곳에는

이곳을 다녀간 사람들이 남긴 낙서가 발견된다.

이런 곳에는 어김없이 한국어 낙서도 있을 것 같아 심심풀이로 훑어보았더니,

이내 큼지막하게 긁어 놓은 한글 이름이 발견됐다.

 

현재 이곳은 복원사업이 한창인 듯,

곳곳에 붕괴된 건축 부재를 올리기 위한 비계 시설이 들어서 있는가 하면,

벽면 같은 시설 곳곳에는 현대에 들어와 땜질했음이 분명한 보수 흔적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전면으로 광활한 평야가 펼쳐지는 산 기슭에 거대한 궁전시설인 페르세폴리스를 건설하기 위해

페르시아 제국 최고권력자들은 산은 깎아내는 대신,

그 앞 낮은 대지를 축대로 쌓고는 흙이나 돌로 채우는 방식을 구사했다.

하늘에서 내려다 보았을 때 평면 장방형에 가깝다.

이렇게 쌓아올린 축대는 서쪽을 기준으로 할 때 5-13m에 이르며,

면적은 축대 내부만 12만5천㎡에 이른다.

하지만 축대 내부가 축구장처럼 완전한 평면을 이루는 것은 아니어서

이 왕궁 뒤편 산 중턱에 올라 유적을 한 눈에 조망하면 구역별 차이가 환연히 감지된다.

그 중 한 구역에서는 꽤 장대한 규모를 자랑하던 건물이 있었음을 증언하는 주춧돌이

행렬을 이루어 지표면에 노출돼 있었다. 아마 발굴조사를 거쳐 이렇게 복원되었을 것이다.

이런 모습을 보노라니, 경주 황룡사가 자꾸만 어른거렸다.

 

페르세 '폴리스'라는 이름, 죽죽 솟은 돌기둥을 보면

고대 그리스나 로마제국시대 원형 극장을 갖춘 폴리스를 떠올리게 되며,

나아가 일정 부분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을지도 모르지만, 적지 않은 차이가 관찰된다.

무엇보다 그리스ㆍ로마 건축양식이라면 이오니아식이니 코린트식이 하는 기둥 장식을

떠올리게 되지만, 페르시아 제국이 주로 연희 같은 특별한 행사에 사용할 목적으로 축조했다는

이 페르세폴리스에서는 그런 양식을 찾을 수 없다.

 

현장을 찾은 우리에게 특히나 인상적인 사실은 곳곳에서 연꽃 문양을 만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런 문양을 장식한 유물을 그대로 경주에 옮겨다 놓으면

많은 미술사학자가 신라시대 불교미술품이라고 착각할 만한 도안이다.

 

이 도시를 뒤편에서 내려다보는 산 중턱에는 암벽을 직각에 가깝게 깎아낸 다음

그 중앙을 뚫어 마련한 석굴이 자리한다.

언뜻 보면 한국 불교미술에서 흔한 마애불상 같기도 하며,

중국에서 만개한 윈강석굴이니 하는 석굴사원을 연상케 하지만

실은 페르시아 제국시대 제왕의 무덤이다.

언덕을 올라 이 무덤을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아치형으로 파고들어간 석굴 중앙에는

마치 누에고치를 반토막으로 자른 것 같은 석관이 놓여 있다.

한데 그 오른쪽에 깨진 흔적이 있고 그것을 땜질한 부분도 있다.

그 땜질한 부분에는 '11-5-1967'이란 숫자를 새겨 놓았다.

아마도 1967년 11월5일에 보수한 부분이라는 의미일 터이다.

 

이곳 페르세폴리스 유적 한쪽에는 전시관이 따로 있다.

규모는 크지 않으나, 이 유적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게 한 압축적인 전시가

소규모 공간에서 이뤄지고 있다. 이런 전시관에서 또 우리의 문화유산이 처한 현실이 오버랩됐다.

유적지 안에다가 이런 전시관 혹은 박물관을 세운다고 하면,

아마도 문화유산 시민운동 단체나 원형 고수를 주장하는 관계 학자들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

맹렬한 반대 운동을 펼칠 것이다. 문화유산을 파괴하면서 무슨 전시관이냐 삿대질을 해 댈 것이다.

황룡사 전시관이 그랬고, 석굴암 모형 전시관이 그랬다.

이들 모두가 추진 단계에서 반대운동에 좌초하고 말았다.

 

이런 점에서 이 페르세폴리스 전시관이 더욱 놀라운 점은

현장 유적을 그대로 활용해 건축물을 지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전시관 벽면 일부는 실제 유적이다. 이런 식으로 국내에서 전시관을 세운다면?

결말은 보지 않아도 선하다.

 

이곳 전시실을 안내하던 이란 현지 가이드 다라비 씨는

쐐기문자(설형문자)를 촘촘히 새긴 점토판 유물을 가리키면서 대뜸 미국 이야기를 꺼냈다.

얘기인즉, 미국인들이 오래 전에 이곳 페르세폴리스를 발굴해

12만장에 이르는 점토판을 판독 및 연구하고 나서 돌려주겠다고 해 놓고는

지금까지 돌려주지 않고 있으며,

이 때문에 미국에 대한 이란인들의 감정이 더욱 좋지 않다는 것이다.

도대체 무슨 곡절이 더 있을까?

 

미국이나 영국, 프랑스 등 과거 제국주의 국가들이 약탈을 방불하는 무차별적인 유물 수집을 통해

현재의 박물관 컬렉션을 채웠다는 것은 새삼스런 일이 아님에도

왜 점토판 때문에 이란-미국 관계가 더욱 악화되었다는 것일까?

 

그에 대한 의문은 이번 탐방이 끝날 무렵 테헤란으로 복귀해 만난

이란 고고학연구소장 하산 파젤리 박사를 통해 풀 수 있었다.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왼쪽 다리를 잃어 의족에 의지하는 파젤리 박사는

작년 11월에 한양대 문화재연구소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해 이란 고고학 성과를 발표했고,

그 자리에서 처음 만났다가 약 두 달만에 테헤란에서 재회한 것이다.

 

이 점토판 문제를 언급하면서 파젤리 소장은

뜻밖에도 팔레스타인 급진 무장조직으로 알려진 하마스를 언급했다.

그에 의하면 1997년 예루살렘에서 발생한 벤 예후다 몰 폭탄 테러로 미국인 희생이 컸다.

5명이 죽고 192명이 다쳤다.

이에 희생자측은 미국 국내 법원에 이란에 대한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소송을 냈다.

그 결과 이란 정부는 4억2천350만 달러를 배상하라는 판결을 얻어냈다.

 

하마스에 의한 테러 사건에 왜 미국인은 이란을 피고로 지목했을까?

그것은 이란이 하마스를 배후에서 지원한다고 간주했기 때문이었다.

한국의 법률상식으로는 쉽게 동의하기 어렵지만

어떻든 미국 희생자들은 이 법률소송에서 승리했다. 한데 문제는 또 남았다.

호메이니 혁명 이후 국교가 단절된 이상 배상판결을 받았다고 한들

이란 정부에서 배상금을 받아낼 재간이 없었던 것이다.

 

이런 모순에 봉착한 희생자측은 바로 페르세폴리스 유적에서 출토된 점토판 유물을 주목했다.

이 점토판들은 1930년대 시카고대학 동양연구소에서 발굴한 것으로 현재 소장처 또한 이곳이다.

파젤리 소장에 의하면 아직까지 이란에 반환되지 못한 점토판은

12만점이 아니라 약 7만점 정도라고 한다.

어떻든 폭탄테러 희생자측에서는

이 점토판 유물들을 압류해 그것을 경매에 부쳐 배상금을 받아내려 한 것이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시카고대학 동양연구소는 미묘한 위치에 처하게 됐다.

그렇지만 이 연구소는 이런 식으로 자기네 견해를 정리했다.

첫째, 점토판 유물은 소유권이 이란에 있으며, 언젠가는 이란에 돌려주어야 한다.

둘째, 그 가치는 미국 헌법 원본 문서만큼이나 크다.

 

연구를 위해 외국에 '빌려준' 자국 유물을 볼모로 삼아

그것을 경매에 부쳐 배상금을 받아내겠다는 미국인을 이란인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이 또한 보지 않아도 눈앞에 선하다.

- 2008-02-24 연합뉴스, 김태식기자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 Taeshik@yna.co.kr

 

   

 

 

 

 

 

 

<페르시아 문화탐방> ③ 조로아스터가 남긴 유산들  

 


 

과거 위광 사라졌지만 살아있는 종교로 성지 유지

 

꺼져가는 불꽃 조로아스터(Zoroaster)에 다시 심지를 돋운 이는 프리드리히 니체다.

차라투스트라(Zaratustra)라는 이름으로 그를 관속에서 불러낸 니체는 이렇게 선언했다.

"신은 죽었다."

 

기원전 600년 이전에 활동했을 조로아스터는 아마도 인류역사상 최초의 종교 창시자일 것이다. 그의 가르침에서 비롯된다는 조로아스터교는

불을 특히 숭배한다 해서 배화교(拜火敎)라고도 번역한다.

조로아스터가 태어나 활동한 곳이 페르시아 이고 이슬람교가 침투하기 전까지

페르시아 사회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한 까닭에 현재도 이란 곳곳에는 그 흔적이 적지 않다.

조로아스터교를 국교로 신봉하다시피 한 페르시아 제국의 궁전 페르세폴리스에 남은 부조에서도

이를 엿볼 수 있었다.

이어 이곳에서 북동쪽 6㎞ 가량 되는 지점 황량한 사막지대에 우뚝 솟은 바위산에 형성된

나크시-에 로스탐(Naqsh-e Rostam) 유적에서도

조로아스터교의 강고했던 전통을 만날 수 있었다.

 

로스탐은 전설적인 제왕으로 나크시-에 로스탐은 로스탐의 그림 정도를 의미한다.

멀리서 이 유적을 조망하면 석굴사원에 온 듯한 착각을 준다.

수십m 되는 암벽 중턱을 따라가며 十자 모양으로 표면을 깎아내고는

그 정중앙을 방형으로 구멍을 뚫어 무덤 4기를 나란히 조성했기 때문이다.

그 무덤들이 자리잡은 곳은 지표면에서 대략 10m 지점은 될 듯 했다.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 암벽 깎기를 했을까?

아니면 요즘 고층건물 겉벽을 청소할 때와 같은 방식으로

암벽 위에서 밧줄을 내려 대롱대롱 매달려 작업했을까?

 

무덤 4기의 주인공은 왼쪽부터 차례로 크세르크세스(혹은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

다리우스 1세,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혹은 크세르크세스),

그리고 다리우스 2세라 하지만, 이 중 다리우스 1세 무덤만 확실하다.

다른 무엇보다 이곳에만 무덤 주인공을 밝혀주는 명문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저처럼 무덤을 조성한 것은 도굴 방지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무덤은 이미 오래 전에 모두 도굴됐다.

十자형 묘실 표면 위에는 예외 없이 아후라 마즈다 신상(神像)과 불꽃 문양을

세트처럼 장식해 놓았다. 이 둘은 모두 조로아스터교의 짙은 영향력을 감지케 하는 것으로,

전자는 우주 창조의 절대신이며, 후자는 그 상징이다.

조로아스터교를 왜 배화교라고도 하는지를 명쾌하게 보여주는 부조인 셈이다.

불꽃 문양은 백제금동대향로를 새겨 놓은 듯한 착각을 갖게한다.

 

페르세폴리스나 나크시-에 로스탐이 조로아스터교가 가졌던 과거의 영광을 증언한다면

시라즈를 출발해 자그로스 산맥을 넘어 450㎞ 가량을 달려간 이란고원 중부에 위치한 도시

야즈드는 그 종교가 단순히 과거에만 그치지 않고

현대에도 여전히 살아 꿈틀대는 생물체임을 보여준다.

 

이곳에서 탐방단이 처음으로 찾은 곳은 조로아스터교 묘지.

멀리 험준한 산들을 병풍처럼 두른 드넓은 평야지대 중에서도 야트막한 민둥산 기슭을 낀 이곳은

높이 2m가 될까말까 한 벽돌담장으로 외부와 차단시켜 놓았다.

너무 일찍 도착했기 때문인지 연락을 받은 이곳 관리인이 탐방단보다 늦게 나타나면서

제주도 조랑말 만한 나귀 1마리를 끌고 나왔다.

 

이곳 입구의 간판에는

영어로 'Zoroastrian Cemetery in Yazd'(야즈드 조로아스터교 묘지)라고 적어 놓았으나

실제는 기슭에 위치한 조로아스터교 사원 유적과 그 뒤편 민둥산 두 꼭대기에

나란히 원통형 벽돌 탑 같은 모습을 연출하는 장례식장이 세트를 이룬 이른바 '복합공간'이다.

유감스럽게도 이들 장례식장은 조망하기만 했을 뿐 현장을 밟아보지는 못했다.

 

현재는 사용하는 일이 거의 없다는 이 벽돌탑은 '침묵의 탑'이라 일컬으며,

과거 조로아스터 교도들이 조장(鳥葬)이라고 해서 시신을 그대로 외부에 노출시켜 놓고는

새들이 뜯어먹게 하는 방식으로 처리하기 위한 곳이라고 한다.

이런 시설로 두 곳을 마련한 까닭은 시신을 남성과 여성으로 분리해 처리하기 위함이라 한다.

조장처 전면에 위치한 조로아스터 사원은 폐허라 무너진 벽돌이 곳곳에 나뒹구는가 하면

심지어 못쓰게 된 트럭이 버려져 있기도 했다.

전면에서 보면 장방형 벽독 건물로 그 복판을 관통하는 아치형 통로를 마련해 놓았으며

그 통로 중간쯤 지붕에는 원형 구멍을 뚫어놓았다.

불을 피울 때 나는 연기를 빼내기 위한 장치일 것이다.

 

이와는 달리 야즈드 시내에 자리한 아테시카데(Ateshkadeh) 사원은

살아있는 조로아스터교 교회다.

사원은 앞에서 볼 때 정방형의 아담한 단독 벽돌건물로

그 앞에는 원형 연못을 만들고 물을 채워 놓았는데, 탐방단이 찾았을 때는 물이 얼어 있었다.

건물 전면 중앙 지붕 쪽에는

날개를 양쪽으로 활짝 펼친 채 오른쪽을 향해 돌아선 반인반조(半人半鳥)의 신상 장식물을

걸어 놓았다. 허리춤에는 마치 훌라후프 같은 큰 고리를 둘렀으며,

왼손에는 그 4분의 1 정도 크기인 작은 고리 하나를 쥐고 있다.

고리란 서로를 이어주는 것이니 신과의 약속을 상징할 것이다.

 

사원 입구 오른쪽에 붙은 영어 설명문을 보니 이 사원은

1934년 인도의 조로아스터 교인들이 건립했다고 한다.

안으로 들어서면 뒷벽 한 가운데 유리벽으로 차단한 공간에

바로 조로아스터교의 상징인 불이 활활 타고 있다.

이 불은 대략 서기 470년부터 타기 시작해 이후 단 한 번도 꺼진 적이 없는

나히드-에 파르스(Nahid-e Pars) 사원이란 곳에서 옮겨왔다고 한다.

말로만 듣던 배화교의 불을 이곳에서 보게 된 것이다.

 

불은 나무를 태워 피우고 있었다.

벌건 불기를 머금은 나무와 그 결을 보니 아무래도 참나무 숯을 연상케 했다.

그래서 현지 가이드에게 물어보니 살구나무나 아몬드 나무를 주로 쓴다고 했다.

역시 이곳에서도 화력을 유지하기 위해 견과류 나무를 재료로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불을 유지하기 위해 야즈드 시 정부는 가스를 제공하는 방안을 제시했다고 하나

사원측은 이를 거부했다고 한다.

가스 공급이 중단되면 불이 꺼지기 때문이라는 이유였다는 것이다.

 

왜 인도인들이 이곳에다가 조로아스터 교회를 세웠을까?

이 종교 신도는 전 세계적으로 약 15만명 정도로 추산된다.

이 중 인도가 8만명 정도를 차지한다. 야즈드 현지의 신도 숫자는 1만5천명.

과거 조로아스터교가 누린 위광에 비하면 초라하기만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인도의 조로아스터 교도들은 그들의 종교 성지인 야즈드를 잊지 않고

이곳에다가 사원을 건립한 것이다.

그래서인지 사원 안에 걸린 조로아스터 초상화는 인도인 색채가 매우 짙다.

- 2008-02-24 연합뉴스, 김태식기자,http://blog.yonhapnews.co.kr/ts1406 / taeshik@yna.co.kr

 

 

 

 

 

 

 

 

 

 

<페르시아문화 탐방> ④ 세계유산 보호위해 헐어낸 백화점  


 

'경관해친다' 유네스코 권고받고 3개층 건물 골조 뜯어내

 

조로아스터교 성지인 야즈드를 출발한 탐방단은 북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버스로 300㎞ 정도를 달려 이스파한으로 갔다.

테헤란 정남쪽 435km 지점에 위치한 해발 1천500m의 고원도시다.

이란에서 대표적인 고도라 할 만한 이 도시 중심부를 자얀데흐강이 관통한다.

눈대중으로 강폭은 한강에 비해 약간 더 좁고, 수량은 훨씬 못 미친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런 점에서 서울을 관통하는 한강은 역시 세계 어느 대도시의 강과 견주더라도 손색이 없다.

다만 자얀데흐강을 관통하는 다리는 한강을 기죽게 만든다.

이 강을 관통하는 다리는 모두 13개다. 그 중 '씨-오-세 폴'(Ci-o-se Pol)이란 다리는

아름답기 그지없다. 33개의 아치형 교각이 장관이며 특히 야경은 압권이다.

1602년에 건립되었다 하니 역사 또한 만만치 않다.

 

반크 교회는 이란이 다른 종교에는 배타적인 강고한 이슬람 원리주의 사회라는 통념을

일순간에 무너뜨린다. 야즈드를 중심으로 하는 조로아스터교가 그렇듯이

이스파한의 반크 교회는 아르메니아인들이 건립한 그리스정교 교회다.

다만 그 사원 양식은 이슬람 모스크의 전형을 상징하는 돔 한가운데다 십자가를 세운 점이

이채로운 정도다.

 

이곳 본당은 17세기 교회 건립 이후 한 번도 손질을 하지 않았다는 기독교 성화가 압권이다.

벽면이건 천장이건 온통 성경을 주제로 한 프레스코화가 온갖 원색을 발산하며

침침한 교회당 내부를 밝히고 있다.

이곳에 아르메니아인들이 정착하게 된 것은

그 본거지가 터키의 침략을 받게 되면서부터라고 한다.

본당 맞은편 박물관 전시품 중에는 머리카락에 새긴 성경이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인쇄술에 뛰어났다는 아르메니아인들, 그 기술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물이다.

 

이스파한 지역 이슬람 모스크를 대표하는 '마스지-데 자메'는 이란 건축의 산증인이라 할 만하다.

이 사원은 이란에서 가장 오래된 모스크 중 하나로 그 역사가 매우 복잡하다.

우리의 삼국시대에 해당하는 사산조 페르시아 시대에는 조로아스터교 사원으로 기능하다가

771년 전소되었으며, 1086년에 재건된 이후에는 셀주크 투르크 시대와 몽골제국시대를 거쳐

18세기 사파비 왕조에 이르기까지 중건이 잇따랐다.

그래서인지 사원 구조가 다른 곳에 비해 매우 복잡하고,

나아가 각 시대를 대표하는 흔적이 적지 않게 남아있다.

 

하지만 이스파한의 마스코트는 1979년에 페르세폴리스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이맘 광장이다.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는 이맘광장은 규모가 폭 160m에 길이 560m다.

그 장방형 테두리를 따라 남쪽에는 샤 모스크(Shah Mosque)가 똬리를 틀고 있으며,

서쪽 중앙에는 알리 카푸 궁전(Ali Qapu Palace)이 우람한 자태를 드러낸다.

동쪽에는 세이크 롯폴라 모스크(Sheikh Lotf-o Allah Mosque)가 위치하며

북쪽을 따라서는 우리의 남대문시장과 같은 그랜드 바자르(Grand Bazaar)가 펼쳐진다.

이들 건축물은 대부분 17세기 사파비 왕조 때 건설되었다고 한다.

요새나 성곽과도 같은 이런 도심 광장 내부 구역 중 바자르가 위치한 북쪽 구역에는

주차장까지 있어 사람과 차량이 북새통을 이루는 모습을 연출했다.

차량 통행은 금지했으면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이맘광장으로 이동하면서 우리 탐방단을 놀라게 한 장면이 있었다.

광장에서 적어도 수백m 떨어진 곳이라 생각되는 도심지 한 지점에

벽체를 이제 막 갖춘 듯한 건설현장을 지나게 되었다.

지상 층수는 3-4층 정도에 지나지 않았지만 대지나 건평 규모는 상당했다.

탐방단을 안내한 이란 현지 가이드 다라비 씨는 이 신축 건물을 가리키면서

대뜸 "원래는 7층 높이로 지으려다가 유네스코의 권고로 3개층을 뜯어낸 백화점 건설현장"

이라고 설명했다. 그에 의하면 유네스코는 이곳에 7층짜리 건물이 들어설 경우

이맘광장의 경관을 해칠 우려가 있다면서 건물 높이를 낮출 것을 권고했다고 한다.

더 놀라운 것은 이란 정부가 이를 받아들여 7층까지 올라간 건물 골조를 권고안에 맞춰

상층부를 뜯어냈다는 사실이다.

 

이런 설명을 듣던 조유전 토지박물관장은

"덕수궁 바로 옆에다가 19층짜리 서울시 청사를 세우겠다고 난리법석을 부리는 사람들을

이곳에 데려와 견학을 시켜야 겠다"고 거들었다.

그는 "경복궁을 보라구. 정부종합청사가 떡 하니 경복궁을 가로막고 있잖아. 남대문은 어떻고?"

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국립문화재연구소장을 역임했으며, 40년 이상을 유적 발굴현장에서 보낸 그에게

이맘광장의 경관 보호를 위해 백화점 층수까지 낮추기로 했다는 소식이

더 크게 다가올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스파한에서 이런 흥분을 여전히 가슴 한 구석에 안고 인천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그에게 날아든 소식은 전날 밤 남대문이 화재로 몽땅 불탔다는 것이었다.

- 2008-02-24 연합뉴스, 김태식기자,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 taeshik@yna.co.kr

 

 

 

 

 

 

 

 

 

 

 

- Ralf Bach /  Near The Oceansid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