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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 미술관] 화엄사 괘불 / 전 황복사 삼층석탑 사리갖춤

Gijuzzang Dream 2008. 5. 7. 21:43

  

 

 

 

 

 

 

 [국립중앙박물관] '해탈'을 보는 테마 展
 
 
 
 
‘부처님 오신날’인 5월 12일을 즈음해
국립중앙박물관(관장 최광식)이 테마전을 마련했다.
 
국보 301호인 화엄사 괘불이 미술관 2층 불교회화실에서
4월29일부터 8월31일까지 4개월 동안 장기간 전시되며,
경주 황복사 삼층석탑 출토 신라시대 사리갖춤도
같은 기간에 미술관 3층 금속공예실에서 만날 수 있다.
 
괘불(掛佛)이란 글자 그대로 거는 그림이란 뜻으로,
야외에서 열리는 불교의식에 사용한 큰 불화를 말한다.
화엄사 괘불은 높이가 무려 12m에 이르는 초대형으로 1653년 제작품.
특히 이 괘불은 처음으로 화엄사를 떠나 일반에 공개된다는 점에서 기대를 모은다.
이 괘불은 영취산(靈鷲山)에서 석가모니 부처가 설법하는 장면을 그린 것으로
현존하는 가장 큰 영산회 괘불이자 그 초기 도상 중에서도 가장 완성된 구성을 갖춘 것으로 평가된다.

중앙에 자리 잡은 부처는 백호(白毫)를 통해 빛을 오방으로 뿜어낸다.
그 양쪽으로는 활짝 핀 흰 연꽃과 푸른 연꽃에 각각 앉은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보좌한다.
부처 뒤에 위치한 제자와 나한들은 나고, 늙고, 병들고, 죽음의 경계를 뛰어넘은 존재들이다.
부처의 가르침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 도를 깨달은 벽지불(僻支佛) 역시
두 손을 합장한 채 설법을 듣는다.
불보살 앞에는 예불과 공양을 위한 작은 탁자가 놓여있고
그 위로는 사람들이 보시한 공양물과 오색향이 빛을 발한다.
화면 테두리에는 불법을 수호하는 사천왕(四天王)이 서있다.

이 괘불을 제작하게 된 내력과 참여자 등을 기록한 화기(畵記)에는
임진왜란 때 팔도도총섭으로 승병조직을 이끌던 벽암당 각성(覺性)을 비롯해
과거 승병으로 활약한 승려들 명단이 보인다.
따라서 화엄사 괘불은
전쟁을 위한 승병조직이 사찰 재건과 불사에도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했음을 뒷받침한다.
 
사리갖춤이란 사리를 봉안하기 위한 일체 시설물을 말한다.
사리를 곧 부처라고 인식한 불교신학에서 사리는
처음에는 부처 신체 일부분인 신사리(身舍利)만을 지칭했으나
이후에는 그것이 부족하게 되자
그의 말씀을 담았다고 간주한 경전 또한 법사리(法舍利)라는 이름으로 탑 같은 곳에 안치하게 된다.

황복사 사리갖춤에는 바로 법사리를 썼다.
이 경우 법사리는 중국에서 704년 한문으로 번역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이었다.
이 경전에 이르기를 탑을 만들거나 수리할 때
다라니(주문의 일종) 99벌 혹은 77벌을 써서 작은 진흙탑(土塔)에다가 넣어 경전을 봉안하면
그 사람은 수명을 연장하고 모든 죄를 용서받게 된다.

이 황복사 사리갖춤은 놀랍게도 706년 제작품으로 드러났다.
중국에서 갓 번역된 무구정경이 곧바로 신라로 수입되어 탑을 만드는 이데올로기를 제공한 것이다.
이 사리갖춤 외함 겉면에는 99기에 이르는 작은 탑을 묘사했다.
 
이번 테마전에서는 황복사 삼층석탑 출토 사리갖춤 일괄품 외에도
8세기 경주 나원리 오층석탑 사리갖춤과
9세기 무렵 해인사 길상탑 출토 소탑 자료도 아울러 전시한다.
- 문화일보, 김영번기자 zerokim@munhwa.com
- 2008-04-29

 

 

 

 

 

 

  

    

국립중앙박물관 미술관 테마전

 


['사찰 밖으로의 첫 나들이' - 국보 제301호 화엄사 괘불]


 

 ㅇ전 시  명 : '사찰 밖으로의 첫 나들이' - 국보 제 301호 화엄사 괘불
 ㅇ전시기간 : 4월 29일(월)부터 8월 31일(일)까지 
 ㅇ전시장소 : 미술관 2층 불교회화실

 


국립중앙박물관(관장 최광식)에서는 “국보301호 화엄사 괘불” 테마전을 개최한다.

미술관 2층 불교회화실에서 열리는 이번 전시는

4월 29일(월)부터 8월 31일(일)까지 4개월간 계속된다.

괘불(掛佛)은 야외에서 열리는 불교의식에 사용한 큰 불화로,

이번 전시에서는 높이가 무려 12미터가 넘는 <화엄사 괘불〉을 공개한다. 

 

1653년에 제작된 <화엄사 괘불>은

특히 이번 전시를 통해 최초로 화엄사를 떠나 일반에 공개되는 것이라 그 의미가 더욱  크다.

영취산에서 석가모니부처가 설법하는 장면을 그린 <화엄사 괘불>은

현존하는 가장 큰 영산회 괘불로,

영산회 괘불의 초기 도상 중 가장 완성된 구성을 보여준다. 

중앙에 위치한 부처의 백호(白毫)에서 발하는 빛은 다섯 방향으로 뻗어 나가며

부처의 세계와 육도(六道) 중생의 모습을 비춘다.

부처의 양 옆에 있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은

활짝 핀 흰 연꽃과 푸른 연꽃에 앉아 석가모니불을 보좌한다.

 

부처의 뒤에 위치한 제자와 나한들은

나고, 늙고, 병들고, 죽음의 경계를 뛰어 넘은 존재들이다.

 

부처의 가르침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 도를 깨달은 벽지불(僻支佛) 역시

두 손을 합장한 공손한 자세로 설법을 듣는다.

불보살 앞에는 예불과 공양을 위한 작은 탁자가 놓여 있으며

그 위에서 사람들이 보시한 공양물과 오색의 향이 빛을 발한다.

 

화면 가장 바깥에는 불법을 수호하는 사천왕이 늠름한 모습으로 서 있다.

괘불의 화기에는

임진왜란 때 팔도도총섭으로 승병조직을 이끌었던 벽암당 각성(覺性)을 비롯하여

과거에 승병으로 활약했던 승려들의 이름이 기재되어 있다.

 

화엄사 괘불은 전쟁 시 조직되었던 승병체계가

사찰 재건과 불사에 있어서도 영향력을 행사했음을 보여준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사찰을 중건하고 괘불을 그려 완성하면서

부처의 바른 법으로 다시는 전쟁이 오지 않기를 바라던 그들의 염원을

화엄사 괘불을 통해 읽을 수 있다.

이 전시에 대한 보다 깊이 있는 이해를 위해

테마전 도록을 함께 간행하며 4월 말 시중에서 판매될 예정이다.

[화엄사 영산회괘불]
1653년, 삼베에 채색, 1201×860㎝,
국보 301호,

구례 화엄사 소장

 

  

 

  

 

 

 

 

 

 

  

 

 

 

 

국립중앙박물관 미술관 테마전 개최


[탑 안에 들어간 塔이야기 - 傳 황복사 삼층석탑 사리갖춤]


 

 ㅇ전 시  명 : 탑 안에 들어간 塔이야기 - 전 황복사 삼층석탑 사리갖춤
 ㅇ전시기간 : 2008년 4월 29일부터 8월 31일까지
 ㅇ전시장소 : 미술관 3층 금속공예실

 


국립중앙박물관(관장 최광식)은 부처님 오신 날을 맞이하여

미술관 3층 금속공예실에서 2008년 4월 29일부터 8월 31일까지

“탑 안에 들어간 탑 이야기, 전 황복사 삼층석탑 사리갖춤”이란 주제로 테마전시를 개최한다.

탑을 세우는 이유는 그 곳에 사리를 봉안하기 위함인데,

사리는 크게 신사리(身舍利, 석가의 유골)와 법사리(法舍利, 경전)로 구분한다.

 

법사리로서 통일신라시대에 크게 유행한 경전은

704년 중국에서 번역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이다.

이 경전에서는 탑을 만들거나 수리할 때

다라니 99벌 혹은 77벌을 써서 작은 진흙탑(土塔)에 넣어 그 안에 봉안하면,

수명이 연장되고 모든 죄가 소멸되어 바라던 바가 이루어진다는 내용을 설하고 있다.


706년 신라 왕실은 선대의 왕을 추모하고 현세의 왕을 위하여

황복사탑 안에 들어갈 사리갖춤에서 이 경전의 내용을 실현하고 있다.

즉 사리를 신성하게 보호하기 위한 사리외함 표면에 99기의 작은 탑을 묘사해 놓은 것이다.

이러한 소탑의 표현은

9세기 이후에는 다라니를 넣은 99기 혹은 77기의 작은 탑을 봉안하는 사리갖춤 방식으로 정착되어

통일신라 전 지역으로 확산된다.

이번 전시에서는 『무구정광대다라니경』에 의한 99기의 소탑(小塔)이 표현된

가장 이른 예인 전 황복사 삼층석탑에서 출토된 금동제 사리외함을 중심으로

같은 석탑에서 발견된 순금제 불상 2구(국보 79호, 80호)를 비롯한 일괄 유물을

동시에 감상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소탑을 환조로 만들어서 봉안하기 시작한 8세기 나원리 오층석탑의 사리갖춤과

9세기 소탑 제작의 확산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인 해인사 길상탑에서 발견된 소탑 등도

함께 비교 전시할 예정이다.

삼국(고구려, 백제, 신라) 중에서
가장 늦게 불교를 받아들였으나

화려한 불교문화의 꽃을 피운 신라,

석탑 속에 넣어둔 작은 탑들의 비밀 속으로 여행을 떠나보자.

사리 상자 사리함(舍利函)

전 황복사 삼층석탑 출토

사리 상자 옆면 금동사리외함(金銅 舍利外函)

[오른쪽] 부처(金製 佛立像)

통일신라 692년경 - 국보 80호
전 황복사 삼층석탑 출토

[왼쪽] 아미타불(金製 佛坐像)

통일신라 706년경 - 국보 79호 
전 황복사 삼층석탑 출토

사리 갖춤(舍利具)
통일신라 8세기

경주 나원리 오층석탑 출토


공양탑

(土製 小塔)
통일신라 895년경, 높이 7.5㎝ 

합천 해인사 길상탑 출토

 

 

  

  

- 참고 -

 

해인사 길상탑 사리갖춤


해인사 입구의 일주문에서 남쪽으로 약 50m 지점에 세워져 있는 해인사 길상탑은

2중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갖춘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석탑이다.

이 탑의 사리구로는 1966년 도굴단으로부터 압수된 소탑(小塔) 157기와

탑에 대한 기록을 담은 탑지(塔誌) 4매가 남아 있다.


소탑은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에 따르면

원래 99기나 77기를 두는 것이 원칙이므로 원래는 176l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의 유행에 따른 탑 속에 작은 탑을 봉양하는 공양방식은

통일신라 9세기 이후가 되면 신라 전 지역으로 확산된다.

9세기에 제작된 공양 소탑은 틀을 이용해 찍어낸 토제소탑과 납석제 소탑이 주류를 이루는데,

소탑의 밑면에는 대부분 다라니를 봉안하기 위한 구멍이 뚫려 있다.


더욱이 해인사 길상탑에서 발견된 토제소탑은 탑의 표면에 산화된 녹유(綠釉)의 흔적이 확인되어 주목되고 있다. 이는 탑지의 기록중 “琉璃泥小塔九十九又七十七”이라는 내용에 근거, ‘琉璃泥’라는 명칭이 고대 녹유를 지칭하던 용어로 최근의 연구결과 밝혀진 바 있다.


탑지(塔誌)의 발견


탑지(塔誌)는 총 4매가 발견되었는데

모두 23㎝의 정방형 두께는 2.4㎝, 검은 색의 전판(塼板)으로 형태와 재질은 동일하다.

탑지의 내용으로 보아 해인사를 비롯한 운양대(雲陽臺), 백성산성(百城山城), 오대산사(五臺山寺)

등에 나누어 넣기 위해 만들어졌던 것이나 모두 해인사 길상탑에 같이 봉안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 중 해인사 묘길상 탑지는 통일신라 후기 대문장가인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것으로 유명하다.

 

이 글에는 건령(乾寧) 2년(신라 진성여왕 8년, 895)을 전후한 7년간 통일신라 말기의 혼란 속에서

창궐한 도적으로부터 절의 보물(寺寶)을 지키려다 희생된 스님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서

탑을 건립했다는 내용과 함께 탑의 높이, 공장승(工匠僧), 탑 안에 납입한 법보(法寶)의 내용 및

탑을 건립하는데 소용된 비용 등이 기록되어 있음이 주목된다.

특히 탑의 높이를 일장삼척(一丈三尺)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비록 현재 상륜부가 결실되었으나 탑의 높이를 3m로 볼 때

이 탑의 조성에 당척(唐尺)이 적용되었음을 보여주고 있어

당시 도량형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뿐만 아니라 탑지(塔誌)의 기록에 따라 석탑건립에 소요된 비용과 물품 등은

당시의 사원(寺院) 경제연구에 도움이 된다.

또한 탑의 건립배경 및 소요된 비용 등은 통일신라 말기 혼란된 사회상을 비롯하여,

당시의 경제상을 밝히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주고 있다.

- 미술관 금속공예실 학예사 권강미

- 국립중앙박물관 큐레이터와의 대화 제94회, 2008년 6월 25일 내용 중에서

 

 

 

 傳 황복사 삼층석탑 사리갖춤

 

 

 

 

傳 황복사터 삼층석탑(국보 제37호), 높이 7.3m, 692년경, 경주 구황동

 

 

부처 입상, 金製佛 立像(국보 80호) - 692년경, 높이 14.4㎝

 

아미타불 좌상, 金製佛 坐像(국보 79호) - 706년경, 높이 12.5㎝

 

 

무구정탑(無垢淨塔)의 건립

 

“절은 밤하늘에 별을 뿌려놓은 듯하고, 탑은 기러기 줄지어 나르는 듯하다.(寺寺星張 塔塔雁行)”

<삼국유사>권2, 흥법(興法) 제3편에서 묘사한 신라의 도읍 서라벌의 광경이다.

 

신라시대 제작된 수많은 석탑의 건립배경에는

조탑경(造塔經)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의 유행을 들 수 있다.

이 경전에서는 탑을 세우는 것을 가장 큰 공덕으로 삼고 있었으므로

당시 사람들은 이 경전의 내용에 따라 수많은 탑을 세웠으며

이러한 탑을 ‘무구정탑(無垢淨塔)’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에서는 구체적으로

탑을 만들거나 수리할 때 다라니를 외우고 그것을 99벌, 혹은 77벌 써서 진흙으로 만든 탑(土塔)에

넣어 탑을 봉안하면 77억 또는 99억 개의 탑을 다른 곳에 세우는 것과 같은 공덕을 쌓게 된다는

내용을 설하고 있다.

여기서 77이나 99의 숫자는 홀수 가운데 가장 높은 숫자로

궁극적으로는 무한(無限)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706년 신라 제 33대 성덕왕은 자신의 수복(壽福)과 신문왕, 신목태후, 효소왕의 추복(追福)을 위하여

704년 중국에서 한역(漢譯)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의 내용에 따라 황복사탑의 중수를 행하였다.

이후 이 경전은 통일신라시대 불탑(佛塔) 건립의 확산을 가져오게 되니,

황복사 삼층석탑은 최초의 무구정탑이 되는 셈이다.

 

황복사 사리갖춤

 

1942년 6월 경주 낭산(狼山)의 동쪽에 자리 잡은

구황동 전(傳) 황복사(皇福寺) 삼층석탑을 해체 복원할 때,

2층 지붕돌에서는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의 내용에 의해 납입된

신라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사리갖춤이 발견되었다.

 

네모난 사리공(舍利孔) 안에는‘706년(神龍 2)’이 새겨진 금동제의 외함이 있었다.

외함의 뚜껑을 열자 안에는 작은 은제와 금제의 합, 순금제의 불상 2구(국보 79호, 80호),

금동과 은제 고배(高杯), 각종 유리옥 등이 가득 들어 있었다.

 

사리 외함 표면에는 99기의 작은 탑(小塔)이 새겨져 있는데, 탑은 사리함 안쪽에서 새긴 것이다.

한편 뚜껑 안쪽에는 345자나 되는 장문의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으니,

이로 인해 탑의 건립 유래와 그 속에 봉안된 사리갖춤과 관련된 내용을 알 수 있다.

명문에는 천수(天授) 3년(692)에 승하한 신문왕(神文王)의 명복을 빌기 위해

신목태후(神睦太后)와 아들인 효소왕(孝昭王)이 삼층석탑을 건립하였다.

 

이후 성력(聖歷) 3년(700)에 신목태후가 돌아가시고,

연이어 대족(大足) 2년(702) 효소왕이 승하하자

신룡(神龍) 2년(706)에 성덕왕(聖德王)이 사리 4구, ‘무구정광대다라니경’ 1권, 순금아미타상 1구 등을

제2층 탑신에 안치하여 그들의 명복을 빌었다는 중수(重修) 배경을 발하고 있다.

 

서있는 부처상(佛立像)은 비록 통일신라 초기에 만들어졌지만 삼국시대 말기 불상의 여운이 남아있다.

이 불상은 두께가 1㎜도 채 되지 않을 만큼 얇아서 제작 당시의 뛰어난 주조기술을 확인할 수 있다.

 

아미타불 좌상(坐像)은 입상과 비교하여 사실적인 표현이 두드러진다.

불과 10여 년 사이에 새로운 조각양식이 반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불상을 만들 때에도 금이 귀했던지 몸체는 순금으로 만들었으나

광배와 대좌는 청동에 금으로 도금하였다.

 

*** 육계(肉髻)

 

불상의 머리 위에 혹과 같이 살(肉)이 올라온 것이나 머리뼈가 튀어나온 것으로 지혜를 상징한다.

불교에서는 불정(佛頂) 무견정상(無見頂相)의 정계라고도 하는데,

원래는 인도의 성인(聖人)들이 긴 머리칼을 위로 올려 묶던 관습에서 유래한 것이다.

- 국립중앙박물관 금속공예실 권강미

- 국립중앙박물관 큐레이터와의 대화, 제 86회, 2008년 4월30일

 

 

 

 

 

 

- Yuichi Watanabe / Piano By The Sea (Le piano du bord de 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