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영조 금보
正文宣武 熙敬顯孝 大王之寶(정문선무 희경현효 대왕지보) 9.7×9.7×7.8㎝, 국립고궁박물관1776년(정조 즉위)에 제작한 영조의 어보이다.
손잡이는 앞발톱 4개, 뒷발톱 3개를 가진 거북모양으로 장식하였으며
정사각형의 몸통 좌우부분에는 구멍을 뚫어 적색 술끈이 부착되어 있다.
턱 밑에 수염이 있고 이는 서로 다물고 입은 벌린 상태이다.
목둘레에는 주연의 반점이 있고 꼬리는 왼쪽으로 구부려 내려져 있다.
등줄기에는 육각형, 중간부분은 오각형, 바깥부분은 사각형으로 장식되어 있고 다리는 L자형이다.
영조(1694-1776)의 이름은 금(昑), 자는 광숙(光叔), 호는 양성헌(養性軒)이다.
숙종의 아들로 어머니는 화경숙빈(和敬淑嬪) 최씨(崔氏)이다.
조선 제21대 왕으로 재위기간은 1725년부터 1776년까지 52년간으로
조선 역대 왕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재위하였다.
1721년(경종 1) 경종에게 후사가 없자 노론인 김창집 등이
경종의 동생인 연잉군(영조)을 왕세제 책봉할 것을 상소하였다.
소론인 유봉휘 등이 반대했으나 8월에 책봉되었다.
1724년 즉위하자 붕당의 폐를 시정하기 위해 탕평책을 썼다.
절제와 검박에 힘써 사치를 금하고 농사를 장려하여 민생의 안정을 도모하려 하였다.
신문고를 다시 설치하고 세제를 개혁하여 균역법과 같은 제도를 확립했다.
1756년에는 기로과를 창설하여 60세 이상의 선비와 무인에게 시험을 보여 관리를 등용하였다.
학문을 즐겨 특히 인쇄물을 개량하여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속대전(續大典)』 등
서적을 간행하였다. 또한 유능한 학자를 발굴하여 실학의 학통을 수립,
풍속과 도의의 교정에도 힘써 사회 · 산업 · 예술 등 문화와 산업을 크게 부흥시켰으나,
그러나 아들 사도세자를 폐위시킨 후 뒤주에 가둬 죽이는 등 불행한 일도 있었다.
능은 경기도 동구릉에 있는 원릉(元陵)이다.
- 국립고궁박물관 홈페이지에서 -
(2) 고종비 금보
「皇后之寶」(황후지보), 9.8×9.8×9㎝, 국립고궁박물관
이미 죽은 왕후를 황후로 개칭하면서 제작한 어보이다.
손잡이는 앞뒤 각각 5개와 3개의 발톱을 가진 용모양으로 장식하였으며,
주황색 방망이 술끈을 부착시켰다.
명성왕후(1851-1895)의 본관은 여흥(驪興)이며,
여성부원군(驪城府院君)으로 영의정에 추증된 민치록(閔致祿)의 딸이다.
조선 고종의 비(妃)로서 여주(驪州)에서 출생하였다.
흥선대원군의 부인인 부대부인(府大夫人) 민씨의 천거로 고종 3년(1866) 왕비로 간택되었고,
왕비가 된 이후 대원군과 정치적 대립을 가져와
고종 19년(1882) 임오군란 때 충주 장호원(長湖院)의 민응식(閔應植) 집으로 피신하였으며,
청군(淸軍)을 끌어들여 흥선대원군을 납치하게 하고 민씨일파의 정국을 형성하였다.
그 후 외교적 국면에 따라 민첩하게 대응하여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였으며,
러일전쟁 직후 일본의 압력이 가해지자 친러정책을 추구함으로써
그에 대항하다가 1895년 8월 2일 일본인들이 을미사변을 일으켜 건청궁(乾淸宮)에서 시해당하였다.
숭릉(崇陵) 우강(右崗)에 국장(國葬)하였던 것을 1897년 10월에 청량리 홍릉으로 이장하였고,
1919년 고종의 승하와 함께 다시 양주군 미금면 금곡리의 홍릉으로 이장되었다.
명성(明成)이란 시호는 1897년에 내려졌다.
- 국립고궁박물관 홈페이지에서
(3) 용교의(龍交椅)
조선 후기, 국립고궁박물관
전체 높이 91×좌고 53×좌폭 56.7×좌 깊이 40㎝
발판 높이 23.5×발판 폭 51.7×발판 깊이 13㎝
접어서 운반할 수 있도록 만든 간편한 야외용 의자로 왕실에서 사용하던 것이다.
제작 시기는 조선말 개화기로 추정된다.
한 몸으로 이루어진 고사리형의 용머리(龍頭) 손잡이와 등받이 틀의 테는 U자형을 이루고 있으며
손잡이의 목 부분에 '갈 지'자형(之字形)의 의자 앞다리가 연결·고정되어 있다.
의자 다리는 X형으로 교차되어 마치 가위처럼 다리를 접었다 폈다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의자 표면에는 주칠(朱漆)이 되어 있고
손잡이와 등받이 테, 의자 다리에는 금채(金彩)로 운룡문(雲龍紋 : 구름, 용 무늬)이 장식되어 있다.
등받이의 머름칸(문의 아래쪽에 마련한 칸)에는 연화문양을 투각(透刻)하고
상단에는 일운문(日雲紋 : 해, 구름무늬)을 조각하였다.
하단에는 당초문(唐草紋)이 투각되어 있으며 좌우 양편의 아래위로 풍혈(風穴)을 달았다.
* 참고문헌 : 한국문화재보호재단, 『朝鮮王朝遺物圖錄』, 1993.
: 문화재관리국, 『宮中遺物圖錄』, 1986.
: 李宗碩, 『韓國의 木工藝』, 열화당, 1986.
- 국립고궁박물관 홈페이지에서
(4) 정조 옥책(玉冊)
순조 즉위년(1800)에
정조에게 「文成武烈 聖仁莊孝」라는 존호와 「정종」이라는 묘호를 올리면서 만든 어책이다.
이 옥책은 모두 16폭으로 95행에 걸쳐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상하단은 당초문이 시문된 유제도금판을 6개의 정침으로 부착시켰다.
조선 22대 王, 정조(1752-1800)는
휘는 이산(李祘), 자는 형운(亨運), 호는 홍재(弘齋)이다.
장헌세자(莊獻世子)의 아들로 어머니는 혜경궁(惠慶宮) 홍씨(洪氏),
비(妃)는 청원부원군(淸原府院君) 홍시묵(洪時黙)의 딸 효의왕후(孝懿王后)이다.
1759년 세손에 책봉되고 1762년 2월, 10세의 나이로 가례(嘉禮)를 올렸다.
그로부터 4개월 뒤 장헌세자가 폐서인(廢庶人)이 되었다가 뒤주 속에서 갇히어 굶어 죽는
비극의 참화를 당한 후 효장세자(孝章世子)의 후사(後嗣)가 되었으며,
1775년 연로한 영조를 대리하여 국정을 다스리다가 1776년 영조가 죽자 25세로 왕위에 즉위하였다.
영조 말년부터 집권하여 오던 벽파 일당이 정조를 옹호해 온 시파를 탄핵하자 이들을 추방하였고,
이어 그의 즉위를 반대하고 역모를 꾀한
홍상간(洪相簡) · 홍인한(洪麟漢) · 정후겸(鄭厚謙) · 윤양로(尹養老) 등을 주살, 유배시켰으며,
1777년 은전군(恩全君)을 추대하려던 홍상범(洪相範)을 처형하였다.
홍국영(洪國榮)에게 정사를 맡겨 장헌세자를 죽게 한 벽파 일당의 음모를 분쇄케 하였으나,
홍국영이 왕(王)의 총애를 믿고 횡포를 일삼으며 정치를 전횡하자,
1780년 홍국영을 전리(田里)에 추방함으로써 세도정치를 종식시켰다.
그리고 정조는 부친인 장헌세자의 죽음으로 인하여 당쟁에 대해 극도의 혐오감을 가지고
왕의 거실을 탕탕평평실(蕩蕩平平室)이라 이름하여 탕평책을 정책의 신조로 하고,
영조의 탕평책을 계수하여 당쟁의 격화를 막는데 힘썼다.
1791년 신해사옥(辛亥邪獄)을 일으켜 천주교를 탄압하기도 하였다.
정조는 퇴색해버린 홍문관을 대신하여 규장각을 설치하여 문형(文衡)의 상징적인 존재로 삼고,
홍문관 · 승정원 · 춘추관 · 종부시 등의 기능을 점진적으로 부여, 정권의 핵심으로 키워나갔다.
또한 인쇄술을 발전시켰으며 서적편찬에도 힘을 기울였고,
특히 규장각에 검서관(檢書官)제도를 신설하고
박지원(朴趾源)의 제자들, 즉 이덕무(李德懋) · 유득공(柳得恭) · 박제가(朴齊家) 등을 등용함으로써
실사구시(實事求是)와 이용후생(利用厚生)을 목표로 하는 실학을 수용, 발전시켰다.
형정(刑政)을 개혁, 악형을 금지시키고 백성의 부담을 덜기 위해
궁차징세법(宮差徵稅法)을 폐지하는 한편 빈민의 구제를 위해 자휼전칙(字恤典則)을 반포하는 등
조선 후기의 문화적 황금시대를 이룩하였다.
또한 정조의 치적 중 가장 돋보이는 것 중의 하나는
서얼허통(庶孼許通)의 정책을 시행하여 새로이 대두하는 지식인을 등용함으로써
정조가 의도하는 탕평책의 추진과 문화정책을 구현하려는데 있었는데,
그것은 결과적으로 시대의 풍조에 청신한 격려를 주려고 하는 새로운 시책의 일환이었다.
문집으로 재전서(弘齋全書)가 있으며 능(陵)은 수원에 있는 건릉(健陵)이다.
- 국립고궁박물관 홈페이지에서
(5) 적의(翟衣)
적의는 중궁과 왕세자비가 대례복(大禮服: 나라의 큰 의식에 입는 예복)으로 착용한 포(袍)로,
친애(親愛) · 해로(偕老)를 의미하는 적문(翟紋: 꿩 무늬)을 직성(織成)했다.
조선시대 여성 최고 신분의 복식으로 상하신분이 뚜렷한 계급사회에서 신분과 권위의 상징이었다.
이 유물은 영친왕비(英親王妃)가 1922년 순종을 알현할 때 착용했던 적의로, 132쌍의 꿩 문양이 있다.
깃과 도련(저고리나 두루마기 아래의 둘레 곡선), 소매 끝의 홍색 단(緞)에는
운봉문(雲鳳紋)이 금직(金織)되어 있다.
이는 광무 원년(1897)에 제정된 적의제도(翟衣制度)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국립고궁박물관 외에
세종대학교 박물관에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 1894-1966)의 적의가 1점 소장되어 있다.
세종대학교 소장품은 꿩 문양이 앞뒤로 154쌍이 있으며, 운봉문이 아닌 운룡문이 금직되어 있다.
이들은 각기 황후와 황태자비가 착용했던 것으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지위에 따른 문양의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 참고문헌 : 궁중유물전시관, 『朝鮮朝後期宮中服飾』, 1999
: 金英淑, 『한국복식문화사전』, 미술문화, 1998
"서울이 아름답다" 특별전에 전시된 <적의(翟衣)> 유물은
운현궁에서 소장하고 있던 19세기 유물이다. 현재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길이 154㎝, 화장 103.5, 품 49.3, 진동 24, 수구 74, 선 너비 92㎝,
겉고름너비 8.2, 겉고름길이 88.5, 속고름너비 8, 속고름길이 88㎝
궁중용 여자대례복으로 시청색 단(緞, 비단)에 적문(꿩문양)을 직조한 9등적의이다.
홍색의 선 부분은 운봉문(봉황)을 직금한 단(緞)으로, 운봉문과 화염부분에 연금사를 사용하였다.
깃의 안쪽은 홍색 명주로 처리하였으며,
고름과 겨드랑이의 대고리는 홍색 공단, 겨드랑이 바대와 어깨 바대는 청색명주로 제작되었다.
수구는 모두 트였으나 위에서 19.5㎝ 내려온 지점에 홍색 명주로 만든 박쥐매듭을 달아 고정하였다.
어깨 바대(길이 75㎝, 너비 8.7㎝)와 겨드랑이 바대(길이 20㎝, 너비 18㎝)는
한쪽에 2개씩으로 총 4개이다.
양옆 고대와 밑단의 등솔선끝(뒤 밑단 중심)에 2.5㎝ 길이의 홍색 고리가 있고,
뒷고대 중심에서 등솔선을 따라 15㎝ 내려온 지점과
이 지점에서 오른쪽 17㎝, 왼쪽 16.5㎝ 떨어진 지점에 각각 쌍밀이 단추 1개씩이 있는데,
하피와 후수를 걸기 위한 고리로 보인다.
소매 배래의 모양은 길의 옆선이 퍼지는 형태이다.
적의(翟衣)
왕비의 예복(禮服)으로 법복(法服)이라고도 한다. 대례복(大禮服)이다. 이에는 활수대의(闊袖大衣)의 포제(袍制)에 속하는 적의와 중단(中單), 상(裳), 폐슬(蔽膝), 대대(大帶), 혁대(革帶), 옥패(玉佩), 수(綬), 말(襪), 석(蓋)을 착용하고 규(圭)를 든다.
적의가 한국에 들어온 것은 고려 제31대 공민왕 19년(1370) 明나라 태조후(太祖后)인 효자황후(孝慈皇后)가 왕비에게 칠휘이봉관(七釪二鳳冠)과 더불어 적의를 보내옴으로써 비롯되었으며, 그것은 宋나라 때의 명부복(命婦服)에 해당한 것이었다.
조선시대에는 태종 3년(1403)에 주취칠적관(珠翠七翟冠)과 더불어 대삼(大衫)을 보내왔는데, 이를 한국에서는 역시 적의라 일컬었으며, 그것은 명나라 군왕비복(郡王妃服)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영조 때에 와서 우리 나름대로의 적의 제도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조선말에 대한제국(大韓帝國)이라 부르면서 고종황제(高宗皇帝) 광무(光武) 원년(1897) 관복 제정시 다시 명나라 황후, 황태자비의 적의제를 그대로 모방하여 제정하였다.
조선 영조 때 제정하였다는 적의는 《국조속오례의보(國朝續五禮儀補)》에 의거하여 대홍(大紅)의 단(緞)으로 지었으며, 앞면의 좌우가 서로 곧바로 내려가 여미어지지 않아 배자(褙子)와 비슷한데, 앞길이는 의단(衣端)과 가지런하고 뒷길이는 의단보다 척여(尺餘)나 더 길었다.
그리고 의(衣) 전후에는 금수(金繡)한 오조룡보(五瓜龍補)를 달았으며, 앞뒤 보(補) 밑에서 의단에 이르기까지 둥근 원 안에 꿩문양(圓翟)을 수놓았고 또 좌우의 넓은 소매는 의(衣)길이와 가지런히 하고, 수구(袖口) 외면에 또한 원적을 수놓았는데, 합하여 원적의 수는 51개였다.
대한제국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 純宗皇帝의 황후 윤씨)가 착용한 적의는 심청색 바탕의 저사(紵紗), 사(紗) 및 나(羅)를 수용(隨用)하였는데, 여기에 12등분하여 적문(翟文) 154쌍을, 사이사이에는 윤화(輪花 : 李花)를 넣었으며 홍색 깃과 도련 및 수구의 홍색 선에는 운룡문(雲龍文)을 직금하였다.
왕비가 착용하는 최고의 예복은 적의였다. 가례를 행할 때 왕비는 붉은 색 적의를 입었으며, 대비는 왕비와 구별하기 위해 좀더 고상한 색인 자주색 적의를 입었고, 세자빈은 검은색 적의를 입었었다. 이는 명나라의 예법에 따랐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왕비의 적의는 고려말 공민왕때 명나라에서 보내 준 것이 원형이었다. 이 적의에는 꿩이 9등으로 수놓아져 있었고, 7마리의 꿩과 2마리의 봉황이 새겨진 화관(花冠)이 함께 딸려 있었다.
명나라 황후는 12등의 꿩무늬가 있는 적의를 입고 9마리의 용과 4마리의 봉황이 새겨진 화관을 썼다.
그러다가 고종이 황제에 오른 후에야 대한제국 황후의 적의에도 12등의 꿩무늬를 넣었다. 적의에 들어가는 꿩무늬의 테두리는 청, 홍색 또는 검은색 바탕에 황색(금) 테두리로 꿩모양을 그린후 청, 백, 홍, 황, 흑의 오색실로 꿩모양의 수를 놓았다.
적의의 앞뒤에는 황금색 용무늬의 보(補)를 붙였는데 왕비의 적의에는 오조룡, 세자빈의 적의에는 사조룡의 보(補)를 붙였다.
대한제국말 생존하여 황후의 칭호를 받은 분은 순정효황후(윤황후) 뿐이었다.
황후의 적의 바탕색은 심청색이었고 깃과 도련, 수구에 홍색 선을 두르고 운룡문(雲龍紋)을 직금하였고, 12등의 적문 사이사이에 작은 이화(李花)꽃을〔중국에서는 윤화(倫花)〕 나란히 하여 꿩 154쌍을 직금하였다. 앞의 꿩이 고개를 뒤로하여 쌍쌍이 다정하게 마주보고 있는 모습이다.
순정효황후의 적의가 현재 세종대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중단은 옥색으로 하고 홍색 선을 둘렀으며, 깃 둘레에는 불문 13개를 직성하였다. 폐슬은 심청색으로 적문 3줄 사이에는 작은 이화문을 4줄 직성하였고, 아청색으로 연을 하고 운룡문을 직금하였다. 옥으로 만든 혁대는 청색 비단으로 하고 여기에 옥장식 10개와 금장식 4개가 장식되었고 운룡문을 그려 묘금하였다. 대대는 겉은 청, 안은 홍으로 하고 끝은 순홍으로 하여 늘어뜨렸다. 후수(後綬)는 훈색을 바탕으로 황, 적, 백, 청, 녹의 5색으로 직성하고 옥환 2개가 있고 후수와 같은 색의 소수가 옥패받침으로 늘어져 있다. 버선(말, 襪)과 신(석, 舃)은 청색 비단으로 되어 있다. 옥규(圭)는 길이가 7촌으로 위가 뾰족하고 곡문(穀紋)이 새겨져 있다. 아래의 손잡이는 황색 비단으로 항대(黃袋)에 넣어 있다.
황태자빈은 9등으로 하여 심청색 바탕에 홍색 선을 수구와 도련, 깃에 둘렀는데 여기에는 운봉문(雲鳳紋)을 직금하였다. 140-160쌍의 꿩이 9등으로 나눠서 직금되었다. 영왕비가 착용했던 9등적의는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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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단은
조선시대 왕과 중궁을 비롯한 백관들의 조복(朝服) · 제복(祭服) 착용 시
겉옷 안에 입던 중의(中衣)의 하나이다.
이 유물은 회색 평직(平織: 씨실과 날실을 한 올씩 엇바꾸어 짜는 방법)으로 직조한 무지견(無地絹)으로
만들었는데 깃 · 도련 · 소매 끝과 고름은 홍색 견으로 했다.
양 겨드랑이에는 속바대(옷의 잘 해지는 곳에 안으로 덧대는 헝겊조각)를 덧붙여 터짐을 방지하였다.
왕 · 왕비 · 왕세자 등이 착용한 것은
불문(黻紋: 亞자 모양이며, 신하와 백성의 배악향선(背惡向善)을 상징)을 금박하였다.
조선시대 광무(光武) 원년(1897)의 적의(翟衣) 제도와 함께 제정된 중단의 내용을 보면
신분에 따라 차이를 보인다.
황후는 옥색,
황태자비는 회색의 사(紗: 생사로 발을 살핏하게 짠 비단류)나
선라(線羅: 명주와 모시를 섞어 명주폭과 같이 짠 옷감)로 하되
깃 · 도련 · 소매 끝에 홍색 선을 두르고,
깃에는 불문(黻紋)을 직성하였는데 황후는 13개, 황태자비는 11개였다.
(5-2) 하피(霞帔)
하피(霞帔)는 조선시대 대왕대비 · 중궁 · 빈궁의 법복(法服: 예복)인 적의(翟衣)를 착용할 때
어깨에 걸어 늘이는 장식물이다. 한 폭으로 길게 만들어 어깨에 걸치되,
등 뒤에서는 보(補: 예복의 가슴 · 등 · 양 어깨에 부착하는 수를 놓은 둥근 천) 아래까지 접힌 상태로
늘이고 가슴 앞에서는 두 폭으로 가지런히 늘어뜨려 겹치지 않게 한다.
이 유물은 진한 자색 무문단(無紋緞: 문양 없는 비단류)에
연분홍 삼팔주(三八紬: 올이 고운 명주)로 안을 넣어 만들었다.
길이 492㎝, 너비 11.6㎝인데 봉황문양 26개와 운문(雲紋: 구름문양) 26개를 금박하였다.
(5-3) 옥대(玉帶) / 규(圭)
옥대는 조선시대 왕의 곤룡포(袞龍袍)나 왕비의 적의(翟衣), 왕세자의 자적룡포(紫的龍袍) 등에 띠던
옥으로 만든 띠이다.
왕의 것은 용 문양을 입체적으로 투각하여 만들고
왕비는 민옥(珉玉: 문양 없는 옥)을 사용하여 만들었다.
이 옥대는 영친왕비가 착용하던 것으로,
옥대 정면에 금속 띠돈(帶鉤: 띠에 부착하는 꾸밈새)이 부착된 옥판에 금선으로 테를 두르고
좌우에 역시 금선을 두른 백옥 장식을 달았다.
중간에 도금한 꽃 장식을 균형 있게 배치하였다.
후면에는 조각하지 않은 방형의 백옥 장식 5개를 연속적으로 나란히 부착하였다.
겉을 싼 청색 단(緞: 비단류)과 안쪽 후면의 옥색 문단(紋緞: 무늬 있는 비단류)이 색감의 조화를 이룬다.
규(圭)란 왕 · 왕세자 · 왕비 · 세자빈 등의 대례복(大禮服)에 갖추는 서옥(瑞玉)으로
위는 뾰족하고 아래는 각지게 만든 길쭉한 옥판이다.
왕과 왕세자는 청옥(靑玉), 왕비와 왕세자빈은 백옥(白玉)으로 만들며
신분에 따라 길이와 넓이를 달리했다.
광무 원년(1897) 고종이 『대명회전(大明會典)』을 근거로 정비한
적의(翟衣) 제도 중 규에 관하여는
“곡옥규(穀玉圭)는 길이가 주척(周尺)으로 7촌인데 그 위를 뾰족하게 하고 곡문(穀紋: 곡식무늬)을 새긴다.
황색 비단으로 아래를 싸되 따로 금룡문(金龍紋)을 한 황색 대도(袋韜: 주머니)가 있다.”라고 했다.
이 유물은 영친왕비의 곡옥규로,
형태는 위의 문헌기록과 대부분 일치하나 옥의 아랫부분을 싼 천이 기록과 달리 홍색이다.
백옥판 위에 곡문(穀紋)이 새겨져 있으며
위는 둥근 산형(山形)을 이루고, 하단을 묶은 천은 홍색 문단(紋緞: 무늬가 직조된 비단류)이다.
(5-4) 대대, 후수(大帶 · 後綬)
이 유물은 대대에 후수를 부착한 상태이다. 대대(大帶)는 예복에 착용하던 큰 띠를 말한다.
이 유물의 대대는 겹으로 되어 있는데, 겉감은 백색 문단(紋緞: 무늬 있는 고급 비단)이고
둘레에 옥색 초(綃: 생사로 짠 얇은 비단)로 된 좁은 가선(加線: 감의 올이 풀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다른 색의 천으로 가장자리를 두르는 것)을 둘렀다. 안은 홍색 초(綃)이다.
끈은 남색 무문견(無紋絹)으로 같은 색의 술을 달았다.
후수는 올이 굵은 홍 · 백 · 남 · 녹의 네 가지 색사(色絲)를 사용하여 평직(平織)으로 짜고
하단에 망수(網繡)와 술을 연결했다.
후면에는 홍색 사(紗)를 대고 전면 상단에 두 개의 금환(金環)을 부착했다.
적의(翟衣)를 입은 후 뒤의 중심에 후수가 놓이고 백색 대대가 양옆에 오도록 뒤에서 앞으로 띠를 맨다.
대대는 고려 말부터 조선시대에 걸쳐 왕과 문무관리, 왕비가 예복에 하던 큰 띠를 말하며
허리부분과 아래로 늘어뜨리는 부분, 끈으로 구성되어 있다.
후수는 왕이나 백관이 조복(朝服) · 제복(祭服)을 입을 때 뒤에 늘어뜨리는 띠로
장방형의 천을 색실로 짜서 위쪽에 고리(環)를 달고 아래에는 청사망(靑絲網)을 맺는다.
품계에 따라 색실의 수와 문양, 고리를 달리한다.
(5-5) 폐슬(蔽膝)
폐슬은 무릎을 가리기 위하여 허리 아래로 늘이는 장방형의 천으로
고려시대 말부터 조선시대에 걸쳐 왕의 면복(冕服)이나 원유관복(遠遊官服),
문무백관들의 조복(朝服) · 제복(祭服), 중궁(中宮)의 법복(法服: 예복)에 착용했다.
이 유물은 영친왕비가 적의를 입을 때 착용했던 폐슬로,
광무 원년(光武元年: 1897년)의 적의(翟衣) 제도에 따라 만들어졌다.
적의와 동일한 색인 남색 비단 바탕을 2등분하여 각각 두 쌍의 적문(翟紋: 꿩 문양)을 직성하였으며,
그 사이사이에 여섯 송이의 소륜화(小輪花)를 2송이씩 배치하였다.
둘레에는 홍단(紅緞)으로 된 선(襈: 감의 올이 풀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다른 색의 천으로 가장자리를
두르는 것)을 댔는데 상하좌우에 각각 화염문과 봉황 문양(鳳紋)을 정교하게
금직(金織: 비단 위에 순 금사(金絲)로만 문양을 짜는 것)하였다.
(5-6) 패옥(佩玉)
패옥은 조선시대 왕 · 왕비 이하 문무백관(文武百官)들이 조복(朝服) 및 제복(祭服)을 입을 때
양옆에 늘이는 장식품으로 여러 가지 형태의 얇은 옥을 연결하여 만들었다.
장식한 옥은 움직일 때마다 서로 부딪쳐 소리를 내게 되는데
이 소리는 오음(五音)을 상징하는 것으로
마음에 사악함이 깃들지 않고 늘 신중하며 평화로운 마음을 갖게 만든다고 여겼다.
패옥을 구성하는 옥은 형태에 따라 각기 그 명칭이 다른데
문헌에 따르면 형(珩) · 충아(衝牙) · 거(琚) · 우(瑀) · 황(璜) 등이 있고
이들을 연결하는 작은 구슬인 빈주(璸珠)로 구성된다.
이들 중 소리를 내는 부분인 충아와 상단의 형을 제외하고는 장식옥의 위치가 다양하게 배치되었고
시대에 따라 옥적(玉滴)과 옥화(玉花)가 추가되는 등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유물은 영친왕비가 착용했던 패옥으로,
색동 견직물에 매듭으로 망수(網繡)를 맺고 술을 늘인 소수(小綏) 위에
여러 가지 백옥장식을 연결하여 만들었다.
상단에 있는 형(珩)은 너비 10㎝, 높이 5㎝이며,
여기에 구슬을 꿴 3개의 줄로 연결된 우(瑀)는 너비 5.5㎝, 높이 5㎝ 정도이고
그 밑에 연결된 거(琚)는 너비 6.7㎝, 높이 5.4㎝이다. 여기에 다시 충아와 2개의 황이 있다.
또한 형에서 연결된 2개의 옥판에 옥화(玉花), 옥적(玉滴)이 달려 있다.
장식된 옥은 무늬가 없는 민옥(珉玉)이다.
그러나 『오례의(五禮儀)』, 『대한예전(大韓禮典)』 등의 문헌기록에는
운봉문(雲鳳紋: 구름과 봉황 무늬)을 묘금(描金)한다 되어 있고
형태에 있어서도 차이가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패옥은 남아있는 다른 한쪽의 패옥과 함께 한 쌍으로,
현존하는 유일한 왕비의 패옥으로서 그 가치가 크다.
(5-7) 청말(靑襪) / 청석(靑舃)
청말(靑襪)은 적의(翟衣) 착용시
청석(靑舃: 예복에 착용하던 푸른 비단 신)과 함께 신었던 푸른색 버선이다.
이 버선은 적의와 동일한 색인 남색 무문단(無紋緞)을 사용하여 겹으로 만들었고
버선목에 끈을 달아 앞으로 맬 수 있게 했다.
『의대발기(衣襨撥記)』에는 버선을 족의(足衣)라고도 하였는데,
조선조 궁중 예복에는 비단으로 지은 청말 · 적말 · 홍말 · 흑말을 신었다.
석(舃)은 왕의 면복(冕服) · 조복(朝服), 세자의 관복(官服), 왕비의 적의(翟衣)에 갖추어 신는 신발이다.
겉은 비단으로 하고 속은 흰색 증(繒: 비단의 한 종류)으로 준[純]을 두르고
바닥은 겹으로 하여 푹신하게 했다.
왕의 석은 신목에 끈을 달았고 왕비의 석은 신코에 장식을 하였다.
이 유물은 적의와 같은 남색 단으로 만들었으며,
신의 뒤꿈치 위쪽과 신울의 중간 양쪽에 고리를 달고 남색 끈을 달아 발등에 매도록 했다.
신울에는 검은색 선을 둘렀고 신코에는 검은색 사화 2개를 달았는데
구슬을 한 개씩 넣어 망(網)을 뜨고 수술을 달아 늘였다.
또한 신 바닥에는 연두색 면사로 매듭을 맺어 미끄러지지 않도록 하였다.
(6) 원삼(圓衫)과 대대(大帶)
원삼(圓衫)은 궁중에서 황후 · 중궁 · 빈궁 · 내명부 등이 착용한 예복이다.
단(緞)으로 지은 이 원삼은 영친왕비(英親王妃)가 착용했던 것으로
겉감은 대홍색(大紅色) 운봉문단(雲鳳紋緞: 구름과 봉황 무늬를 넣어 짠 비단)이고,
안감은 수자문(壽字紋) · 편복문(蝙蝠紋: 박쥐 문양) · 표주박문이 직조된 황색과 남색의 단(緞)이다.
겉감은 경수자직 바닥에 능직(綾織)으로 봉황문을 문직(紋織: 무늬를 넣어서 짬)하였으며
그 위에 편금사를 사용하여
봉황문을 직금(織金: 색실은 전혀 사용치 않고 순 금사로만 문양을 짬)하였다.
소매 끝에는 황색과 남색의 색동과 흰색 한삼(汗衫)이 달려 있는데,
모란 문양이 연속적으로 큼직하게 금직(金織: 비단 바탕에 금사로 문양을 짜서 나타냄)되어 있다.
앞뒤와 양 어깨에는 보(補)가 부착되어 있는데,
오조룡(五爪龍: 다섯 개의 발톱이 있는 용)이 정면을 향해 있고
주위에는 오색실로 장생문(長生紋)과 구름 문양을 수놓았다.
영친왕가(英親王家) 복식 유물 중에는
단(緞 : 견직물의 하나)과 사(紗 : 얇은 비단류)로 지은 두 점의 원삼이 포함되어 있다.
원삼(圓衫) 위에 착용하는 다홍색 대대는 허리 부분에서 뒤로 매어 아래로 드리운다.
조선 후기의 대대는 보통 너비 4-5㎝에 길이 350㎝ 정도이며
황후의 황원삼에는 용문(龍紋), 중궁의 원삼에는 봉황문(鳳凰紋),
공주의 원삼에는 화문(花紋)을 부금(付金: 금박으로 문양을 찍음)하였다.
이 유물은 자주색 단(緞)에 봉황문을 부금한 직물로 만들었다.
대대의 안쪽 중앙에는 양 끝에서 25㎝ 되는 위치에 속 끈을 1매씩 달았는데,
이는 대가 흘러내리지 않도록 매는 데 사용하였다.
(7) 타래버선(樓緋襪)
1930년대, 겹, 옥양목, 발길이 높이 17.5㎝, 끈길이 27㎝, 끈폭 2.5㎝, 경기여고 경운박물관
타래버선은 솜을 두고 누빈 후 버선코에 장식을 달고 예쁘게 만든 아이들의 버선이다.
이는 누비버선(樓緋襪)의 일종으로 위쪽의 타래버선은 돌 이후의 왕손(王孫)이 신던 한 가지이다.
타래버선은 주로 돌옷과 함께 신는 어린이용 버선으로, 버선목과 사선에 두땀 상침을 하고,
버선볼에 장생을 상징하는 불로초와 화문을 수놓았다.
코 부분에 남자아이는 남색, 여자아이는 홍색 실로 영화(榮華)를 상징하는 삭모(방울술)를 달았다.
백색 면에 솜을 두어 세로로 촘촘히 누빈 천으로 버선의 형태를 만들고,
회목에는 청문사(靑紋紗)로 된 끈을 달았으며,
수눅(꿰맨 솔기) 양쪽에 오색 비단실로 모란꽃을 수놓았다.
또한 버선코에는 분홍색의 방울술을 달았다.
바늘땀 수와 누빈 간격이 일정하여 섬세하게 지어진 버선임을 알 수 있다.
(8) 모란도병풍
모란을 그린 화훼화(花卉畵)로 비단 바탕에 설채(設彩)로 그린 4폭 병풍이다.
「애련설(愛蓮說)」에 의하면 “모란은 꽃 중에서 부귀한 것이다(牡丹花之富貴者)”라 하였고,
「하황사기(下黃私記)」나 『북산집(北山集)』에 “모든 꽃의 왕(百花王)”이라 하였듯이,
모란은 예로부터 동양인들 사이에서 부귀(富貴)의 상징으로 인식되어왔다.
모란만을 단독으로 그린 것도 있지만 괴석과 같이 그려서 석모란(石牡丹)을 만들거나
소나무 · 난 · 대나무 등과 조화시켜 많은 화제를 만들기도 한다.
예를 들면, 모란에 소나무나 괴석(怪石)이 첨가되어 부귀장년(富貴長年)을,
난을 같이 그려 부귀국향(富貴國香)을, 대나무가 첨가되어 부귀평안을 뜻하게 된다.
단폭의 그림보다는 다른 사군자와 함께 제작되고
민화에서는 괴석모란으로 꾸며진 모란병풍이 많이 그려진다.
표현 기법을 기준으로 먹으로만 그려진 묵모란도와
선명하고 화려한 채색을 입힌 채색모란도로 나눌 수 있다.
어른 손보다도 더 큰 모란꽃송이를 크고 화려하게 화폭 가득히 그려 넣어
모란의 장식성과 상징이 강하게 느껴진다.
각 폭에 그려진 모란을 비교해 보면 꽃송이의 숫자와 위치 색깔 등
그림을 구성하는 주요 요소들이 거의 동일함을 알 수 있다.
이렇듯 큰 규모의 모란병풍은 궁(宮)에서 애용되어 궁모란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모란도는 주로 궁중화원 화가들에 의해 제작되었으며,
가례 및 길, 흉례 등 궁중의례에 주로 사용되었다.
왕실의 장례의식과 종묘에서 거행된 조상숭배 의례에도 사용되었다.
각 화면마다 황, 녹, 적, 청색의 짙고 화려한 농채로 만개한 모란을 여러 개 그려 화사하게 묘사했고,
모란꽃을 받치고 있는 괴석도 청색과 회색이 각 폭을 달리하며 번갈아 배치되었다.
땅은 간략하게 묘사하였고, 장식성은 최대한 살리고, 복잡하거나 혼란스럽지 않게
크고 화려한 모란꽃송이와 구멍이 뚫린 괴석을
화면이 가득 차게 그려 넣어 모란의 장식성과 상징이 강하게 느껴진다.
각 폭의 모란과 괴석을 비교해 보면 동일한 구도와 형태, 색채 등이 반복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는데,
큰병풍일수록 특히 홀수번째 폭들과 짝수번째 폭들이 서로 대응을 이루기도 한다.
밑그림을 그릴 때 하나 또는 두 종류의 화본(畵本)이 반복적으로 사용된 것으로 짐작된다.
(9) 원경왕후인(印)
15세기, 금동(金銅), 가로 : 8.5 cm / 세로 : 8.5 cm / 높이 : 5.6 cm, 고려대학교박물관
원경왕후(元敬王后, 1365-1420)가 사용하던 인장이다.
일반적으로 왕비의 인(印) 재질은 동(銅)에서 금(金)도금을 사용했는데,
원경왕후의 인(印)도 동일한 양식이다.
인장이란 금, 은, 옥, 수정, 나무, 뿔, 뼈 등의 각종 재료에 글씨, 그림, 문양을 새긴 후
인주 등을 발라 찍어서 개인이나 단체를 증명하는 신표이다.
공적인 업무 서류에서부터 개인적인 시(詩), 서(書), 화(畵)의 낙관에 이르기까지
옛 선비들은 인장을 주요시하여 다양한 종류를 사용하였다.
왕과 왕후, 각 관청, 개인에 이르기까지 인장은 관인(官印)과 사인(私印)의 종류가 다양했다.
인장은 새기는데 격식과 예술적인 가치가 있으며,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의 품격을 반영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많은 사람의 주목과 관심을 끌며 감상의 대상이 되고 있다.
원경왕후 민(閔)씨는, 조선의 제 3대왕 태종의 비(妃)로 본관은 여흥(驪興)이다.
여흥부원군(府院君) 민제(閔霽)의 딸로 1392년(태조 1) 정녕옹주(靖寧翁主)에 책봉되었다.
1400년(정종 2) 2월 세자의 정빈(貞嬪), 11월 왕비가 되어 정비(靜妃)에 진봉되었다.
양녕(讓寧) · 효령(孝寧) · 충녕(忠寧: 世宗) · 성녕(誠寧)의 4대군과 정순(貞順) 등 4공주를 낳았다.
태종이 왕위에 오르는 데 공이 컸으나, 뒤에 친정 남동생인 무질(無疾) · 무구(無咎) 형제가
사사(賜死)되는 등의 불행을 겪었다. 능은 헌릉(獻陵)이다.
(10) 오조룡 보(補)
- 오조룡보 / 19세기, 21㎝, 한국자수박물관
전시유물은 조선시대 왕비용 대례용 보(補)이다.
붉은 비단에 중앙에는 금실로 용을 수놓고, 주변에는 여러 가지 장생문양을 수놓았다.
- 사조룡보
한편, 조선시대 왕세자의 대례복에는 사조룡 보를 쓴다.
검은 비단에 중앙에는 금실로 용을 수놓았고 그 주변에는 일정한 형태의 구름을 수놓았다.
왕가의 흉배를 '보(補)'라고 하는데
왕과 왕비, 왕세자와 왕세자빈, 왕세손은 각각 오조룡, 사조룡, 삼조룡을 수놓은 둥근 보를
양어깨와 가슴, 등에 붙였다.
그 외에 왕가에서는 기린이나 봉황, 거북, 백택 등을 수놓은 보를 사용하였다.
- 봉황흉배
특히 기린은 대군의 흉배로 사용되었는데,
<경국대전>에 의하면, 조선에서 처음 흉배제도가 제정된 단종 2년 12월에
대군의 흉배로 기린이 제정된 이래, 세조 2년과 영조 21년의 개정때에도 대군의 흉배로 제정되었다.
또한 정조 12년 10월3일 기록에 의하면 '종친 명부(命婦)의 흉배는 기린'으로 되어 있다.
기린은 성인(聖人)이 왕위에 있을 때 나타나는 상상 속의 동물(瑞獸)로
이상적인 평화시대를 상징하기도 하고, 뛰어난 남성을 상징하기도 한다.
용과 같이 합성된 모습을 가진 기린은 사슴의 목과 사자의 꼬리, 용의 얼굴, 하나인 뿔을 가졌는데,
산 풀은 밟지않고 생물(生物)도 먹지않는 어진 동물로 수컷은 기(驥) 암컷은 린(麟)이라 하였다.
발굽은 통굽으로 되었고 갈기에는 화염이 돋아 있다.
문무백관의 흉배는 단종 2년부터 공작, 기러기, 사슴, 호랑이, 멧돼지, 거위 등 다양한 수가 놓여지다가
고종 때 문신 당상관은 쌍학, 당하관은 단학, 무신 당상관은 쌍호, 당하관은 단호로 정하여
사각의 흉배를 가슴과 등에 붙여 표시하였다.
(11) 거북흉배
19세기, 17×19㎝, 한국자수박물관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이 장식했던 거북흉배로 알려져 있다.
원래의 흉배제도에 없는 것으로 흥선대원군을 위해 고안된 특별한 형태이다.
헌종 9년(1843) 흥선군으로 봉해지고, 철종 14년(1863) 왕이 승하하여,
둘째 아들이 왕위에 올라 고종에 즉위하면서 그 자신은 대원군에 봉해졌다.
<경국대전> 禮典에 의하면, 대군이 기린을 금은사로 수놓은 흉배를 달았다고 전하는데
이에 비추어 흥선대원군이 달았다는 기린흉배는 대군의 예우를 갖춘 것이었다.
북청색 운문단 바탕에 금실과 은실로 수를 놓았으며,
문양은 기린을 중심으로 위, 양옆에는 구름문양을, 아래에는 구름과 바위, 물결문양 등을 배치하였는데
자수방법과 문양의 배치가 아주 정교하다. 온양민속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한편 흥선대원군은 고종 32년 4월 23일 기린흉배를 거북흉배로 바꾼다.
(12) 방장(房帳)
조선 후기(19세기), 213×241㎝, 서울역사박물관
외기를 막기 위하여 방안에 치는 휘장으로 주로 겨울에 사용되었다.
여름에 사용되는 발과는 달리 겨울용으로 주로 모직물과 견직물로 만들어진다.
상단과 하단 중앙에 목재로 된 지지대가 있고 그 사이에 배치된 직물은 화문주이다.
각각의 지지대는 가운데가 갈라져 사용할 때나 보관할 때 편리하도록 고안되었다.
방장의 중앙과 네 모서리에는 바탕천과 다른 색상의 천으로
수(壽)자문과 박쥐문양을 배치하여 장식하였다. 방장의 외곽을 4땀으로 상침하였다.
운현궁에서 사용하던 방장으로 궁중용으로 제작된 유물이다.
방장은 벽체에 의지하고 천장에 가까운 부분으로부터 늘어뜨려지도록 설치하는 장치로
가방(假房)이나 침상의 네 벽에도 설치된다.
우리 나라에서의 방장 사용은 삼국시대부터였다고 알려져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의 생활하는 모습 가운데는 건축물에 부착된 장막을 볼 수 있다.
또 따로 침상을 꾸민 주인공 내외가 거처하는 부분에 친 방장을 볼 수 있다.
이것으로 미루어 고구려의 귀족이나 왕족들은
넓은 방의 네 벽에 거대하고 두꺼운 유막을 늘여 일단 외기를 차단하였던 것 같다.
방 한쪽에 따로 침상을 놓고 그 침상에 천장과 벽체를 방장이나 병풍으로 둘러 설치하여
또하나의 공간을 구성하는 시설법을 구사하였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또 <삼국사기>의 집에 관한 금령(禁令)에도
비단을 써서 전을 두른 발을 육두품은 사용하지 못한다고 하였고,
수를 놓은 병풍도 쓸 수 없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육두품 이상의 골품에서는 사용할 수 있다는 뜻이므로 사용하는 계층을 두고 생각해본다면
발의 설치는 방의 문짝에 늘였다기 보다는 침상의 네 벽에 늘였던 것이라고 짐작된다.
이와 같은 방장의 사용은 조선시대까지 이어져 내려와
역대 임금의 신위를 모시기 위하여 세운 종묘의 정전에서도 볼 수 있다.
정전은 19실로 구획되어 있고 열 아홉 임금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각 방은 건물 내의 고주(高柱)에 의지하여 분할되어 있으며 고주의 내진에 봉안실이 꾸며져 있다.
고주의 주간에는 황색의 비단으로 만든 휘장이 늘여져 있고,
뒷벽과 좌우벽에는 고급스러운 발이 늘여져 있다.
또한 궁실이나 귀족들이 쓰던 침상에도 방장이 사용되었다.
침상은 사방으로 낮은 난간이 있고 앞쪽에만 난간이 없는 터진 형태의 것이다.
이들 침상 가운데는 두 짝을 한데 접합시켜 하나를 이루게 하고
네 귀퉁이에 맞장부를 뚫고 기둥을 세우게 만든 것도 있다.
이러한 유형은 네 기둥에 의지하고
기둥 머리에 인방을 짜돌려 소규모의 공간을 구성할 수 있는 골조를 형성한다.
이것은 방장이 귀하고 사치스러운 것이었으며 집의 구성이 그것을 쓰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즉 고구려시대의 침상생활 방식은 통일신라 · 고려 · 조선시대에까지 계승되어,
이른바 입식생활의 양식은 역대의 전 기간 동안 상류층에 의하여 계승되어왔기 때문이다.
붉은 견직물 바탕에 오색실로 '수(壽)' '복(福)' '희(囍)'의 길상무늬를 수놓은 것을 일품으로 친다.
그 뒤 온돌의 보급이 완성되고 토상(土床)에 마루를 놓기 시작하는 무렵부터
비로소 좌식의 생활양식을 모든 사람들이 받아들였으며 아울러 방장의 사용이 쇠퇴되었다.
온돌의 보급 이후에는 주로 문 앞에 설치되어 문틈으로 찬 공기가 들어오는 것을 막는 구실을 하였다.
방장은 주로 견직물과 모직물로 만들어지며
벽체에 의지하여 천장에서 가까운 부분으로부터 들어지도록 설치한다.
이러한 휘장은 고구려고분벽화나 삼국사기의 기록으로 미루어볼 때,
삼국시대부터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휘장은 입식생활양식에 수반되어야 하는 부속품인데,
당시 상류층만이 입식생활을 하였으므로 여염(閭閻)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삼국시대에는 육두품 이상의 계층이, 조선시대에는 종묘의 정전이나 왕족, 귀족의 침상에 주로 쓰여 왔다.
(13) 백자금채이화문유개발(白磁金彩李花紋有蓋鉢)
20세기, 운현궁, 서울역사박물관
(뚜껑 - 3.5×12 / 몸체 4.7×11.5×6.5)
(뚜껑 - 3.8×12.2 / 몸체 4.8×11.6×6.2)
(뚜껑 - 2.6×12.1 / 몸체 5×11.5×6.5)
(뚜껑 - 3.4×13 / 몸체 5.3×12.6×7.2)
(뚜껑 - 3.5×12.8 / 몸체 5×11.9× 6)
운현궁(雲峴宮)에서 사용되었던 흰색 도자기 대접으로 뚜껑이 있다.
정선된 태토에 투명유를 고루 시유하였으며, 뚜껑에는 손잡이가 달려 있는데,
뚜껑과 손잡이의 연결부분, 그리고 뚜껑의 가장자리에는 각각 한 줄의 금선을 두르고
그 사이 공간에 대한제국 황실의 문장(紋章)인 이화문(李花文)을 선명히 금색으로 그려 넣었다.
구연은 약간 외반되고, 내저는 곡면을 이루며, 구연의 안쪽과 바깥 모두 금테를 둘렀고
바깥 측벽 중앙에도 이화문이 자리잡고 있다.
이화문은 다섯 개의 꽃잎마다 세 개의 꽃술을 배치한 정형화된 형태이다.
1897년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바꾸면서 오얏 李자에서 따온 오얏꽃, 곧 이화문을 상징문장으로 삼았다.
이화문은 5개의 꽃잎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꽃잎마다 3 개의 꽃술을 놓고
꽃잎 사이에 또 꽃술을 하나씩 놓은 형태로 정형화되었다. 빛깔은 황제국을 뜻하는 황금색이다.
대한제국 최고 훈장인 태극장 수상자 가운데 더 큰 공훈자에게는
바로 이화문을 넣은 이화대훈장을 수여하여 최상의 영예로 삼았다.
이러한 이화문은 황실의 상징으로 황실복과 창덕궁 인정전 용마루 등의 궁궐 건물 안팎장식,
도자기와, 목기 등의 각종 황실용품, 어차나 조명구 나아가 석물을 비롯한 기물 등에 두루 쓰였다.
참고로, 운현궁 고유의 운현궁문장은,
대한제국 황실의 상징문장인 이화문(李花紋)에 바깥쪽으로 둥근 원(圓圈)을 하나 두른 것이다.
(14) 식탁용 칼
운현궁, 20세기, 철, 상아, 25.3×9.5×2.3㎝, 서울역사박물관
서양식 식탁용칼로 손잡이는 상아로 만들었고 칼날은 철제이다.
날의 한쪽에 'MEIDI-YA TOKYO'라고 새겨져 있다.
또 하나의 칼날에도 'JAMES DEAKIN & SONS / SHEFFIELD'라고 새겨져 있다.
이왕직미술품제작소에서 일본과 해외주문하여 제작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칼날은 녹이 슬어 변색되었으며 날도 많이 무뎌진 상태이다.
손잡이 양측면 중앙에 못을 박았으며 음각으로 이화문을 새기고 검정안료로 안을 채웠다.
(15) 백자청화수복문대발(壽福文 大鉢)
1897년, '뎡유가례시...銘', 높이 8.3 ×입지름 21.5×바닥지름 9.9㎝, 서울역사박물관
'뎡유가례시...'銘
청백색을 띠는 백자발로 바깥쪽에는 '壽'를, 안쪽에는 '福'을 청화로 시문하였다.
발(鉢)의 형태는 8엽(葉) 화형으로 구연부가 살짝 외반되었다.
굽바닥에는 '뎡유가례시 큰뎐고간이뉴 일�팔 (丁酉年가례시 大殿庫間이뉴 一竹八)'이라는
한글명문을 쪼아 새겼는데, 이렇게 이미 만들어진 그릇을 용도에 따라 구분할 때
점각으로 표시한 것은 19세기 중후반에 집중적으로 사용된 방식이다.
명문을 확인해보면, 정유년 가례(嘉禮) 때 대전(大殿) 곳간(庫間)에서 쓰기 위해 만든
동일한 열 개의 그릇 중 여덟 번째 그릇임을 알 수 있다.
정유년(1897) 순종과 순명효황후의 정유년 가례 때 사용된 그릇 중 하나임을 알 수 있다.
(16) 호미명 각궁(虎尾銘角弓)
호미명 각궁은 대한제국의 고종황제가 소장하면서 사용한 어궁(御弓)이며,
고종황제는 황학정(오늘날, 종로구 인왕산 사직단 위에 있음)에서 활쏘기를 많이 하였다.
'호미(虎尾)'란 활에 사용한 물소뿔의 문양이 범의 꼬리(호미)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장문환이 호랑이 꼬리무늬가 있는 물소뿔로 제작, 고종황제에게 진상하였는데,
이 활에 사용한 뿔의 양끝에 각각 '호미(虎尾)',
고종황제의 호인 '주연(珠淵)'이라는 작은 글씨를 음각하고 붉은 색을 칠하였다.
조선시대 고종(재위 1863∼1907)이 사용하던 활이라고 전하며,
특히 이 활의 검은색 양 단에 각각 ‘호미(虎尾)’ 및 ‘주연(珠淵)’이라 작은 글씨가 새겨져 있어
‘주연’이 고종황제의 호이므로 고종의 활이라는 내력을 보여주고 있다.
당시의 활 만드는 장인 장문환이 제작하였다고 하며, 활의 전체길이는 124㎝이고, 오금너비는 3㎝이다.
한국의 전통적인 각궁은 명성이 높고 독특한 자료로 만들었다.
글자 그대로 쇠뿔의 장점을 최대한으로 활용하여 제작한 것으로
한국의 대나무, 물소뿔, 쇠심, 구지뽕나무, 참나무, 화피의 6가지 재료로 구성된다.
이 각궁은 벚나무 껍질로 만든 화피 위에 채색을 하였으며,
시위고리를 거는 새코머리는 가죽으로 감싸서 3가지 색의 천으로 발랐고
그 밑에는 아(亞)자 무늬를 새긴 검정색 종이로 감쌌다.
대한궁도협회, 조선 후기(19세기), 130㎝
육군 박물관에 소장된 호미명 각궁(角弓)
현재 육군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 각궁은 중요민속자료 35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각궁은 조선시대 고종(재위 1863∼1907)이 친히 사용했던 어궁(御弓)이라고 전하는 활인데
당시 서울의 명궁인이었던 장문환이 제작하여 진상한 것으로 구전되고 있다.
활의 전체길이는 130㎝이고, 오금너비는 3㎝ 크기로 일반적인 활에 비하면 작은 편에 속한다.
이 활의 바깥쪽에는 호미무늬가 있는 물소뿔을, 안쪽에는 쇠심줄을 댔다.
시위고리를 거는 새코머리는 가죽으로 감싸 3가지 색의 천으로 바르고
그 밑에 아(亞)자 무늬를 새긴 검은색 종이로 감쌌다.
도고자 역시 단단한 쇠가죽을 타원형으로 붙이고 그 가죽을 빨간 천으로 쌌다.
줌통은 두꺼운 종이로 싼 뒤 녹색 융단을 감았고, 출전피로는 자색 가죽을 돌려 입혔다.
활의 검은색 양 끝에 각각 '호미(虎尾)'와 ‘주연(珠淵)’이라는 작은 글씨를 새기고
붉은색을 칠했는데, ‘주연’이 고종황제의 호(號)이므로 이 활이 고종의 활임을 입증해주고 있다.
현재 이 활은 오랫동안 시위를 푼 채 보관하였기 때문에
지금은 사용할 수 없게 C형으로 굳어져 다시는 시위를 얹을 수 없다.
시위는 무명실을 합사해서 밀랍을 먹여 사용한다.
화살은 역시 활과 유사한 일곱가지 재료로 제작되는데
워낙 소모품에 속하는 것이어서 어궁에 딸린 유물은 없다.
*** 호미(虎尾)는 활에 사용된 흑각 복판에 한줄로 인(人)자 모양의 황백색 얼룩무늬가
마치 호랑이 꼬리 같다는 데서 붙여진 지칭이다.
이것은 물소뿔의 등솔에 간혹 나타나는 미려한 무늬이며 그런 각재(角材)를 댄 각궁일수록
빼어난 양궁의 대명사처럼 일컬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호미는 최상품으로서 제작된 각궁이란 용어와 뜻을 같이한다.
조선시대에는 활의 기본형태에 큰 변화가 없었다. 다만 현재의 국궁과 비교했을 때
조선시대의 활은 고자 부분이 훨씬 크고 튼튼하게 만들어졌다.
<세종실록> <국조오례의> <악학궤범> <조선의 궁술> <융원필비>에 나오는
조선시대의 활의 모양이다.
조선시대 짐승뿔로 만든 각궁(角弓)이 조선군의 주력무기로 사용되었다.
조선은 문관중심의 사회로서 대부분의 무예를 천시했지만,
활쏘기만은 공자말씀에 군자가 익혀야 하는 육예(禮, 樂, 射, 御, 書, 數) 중의 하나로 꼽혔기 때문에,
문반과 무반을 불문하고 모두 활쏘기를 익혔다.
특히 무관의 경우에는 무과 초시과목 6가지중 활쏘기가 4종목이나 되었기 때문에
관직에 나아가려면 반드시 기본적으로 궁술을 익혀야 했다.
▪ 단순궁(單純弓) - 나무 등의 단일 소재로 만든 활
▪ 강화궁(强化弓) - 활채를 나무껍질이나 힘줄 등으로 감아 보강한 것
▪ 합성궁(合成弓) - 여러 가지 재료를 사용하여 활채의 탄력을 극대화시킨 것
- 조선의 활이 해당되며,
활채가 활시위를 묶는 고자 부분에서 한 번 더 휘는 이중 만곡궁(彎曲弓)의 일종
조선 각궁의 재료는 물소뿔과 산뽕나무, 대나무, 소 힘줄, 벚나무 껍질 등이며,
이들 재료를 민어부레풀을 이용하여 접합하여 활을 만든다.
이렇게 만든 활은 궁력이 강할 뿐만 아니라 길이가 매우 짧아서
말 위에서 사격하는 데도 매우 편리했다.
1) 재질에 따른 분류
▪흑각궁(黑角弓) - 물소뿔로 만든 활로 조선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활.
중국 남부지방과 인도차이나 반도 등지에서 수입되었던 물소뿔 중에는 흰색, 황색도 가끔 있으므로,
흰 물소뿔로 만든 것은 백각궁(白角弓), 노란 물소뿔로 만든 것은 황각궁(黃角弓)이라 했다.
각궁을 만들 때 물소뿔의 바깥 쪽 한 면만을 쓸 수 있고, 뿔 2개로 활 한 자루를 만들기 때문에
흑각궁 제조에는 물소뿔이 대량으로 필요했다.
조선은 물소뿔을 중국, 일본을 통하여 수입했지만, 항상 공급이 모자랐고
특히 조선 후기에는 청나라가 의도적으로 물소뿔의 교역을 제한했기 때문에 주로 일본을 통했다.
조선은 물소를 수입해서 남부지방에서 키워보려고 했지만, 기후가 맞지 않아 번번히 실패하였다.
물소뿔은 그렇게 힘들게 구해야 하는 재료였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물소뿔은 활채의 안쪽에 붙여서 활을 당겼을 때 반탄력이 생기도록 해주는 재료인데,
당시에 얻을 수 있는 어떤 재료보다도 탄력이 좋고 오래갔다.
게다가 물소뿔은 가공하기도 좋고, 활채의 한쪽 마디를 이음매 없이 댈 수 있을 정도로 길이가 길었다.
하지만 흑각궁의 강력한 힘의 비밀이 반드시 물소뿔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각궁은 활채의 바깥쪽에 소의 힘줄을 곱게 빗어서 붙이는데
이 힘줄은 활을 당겼을 때 강한 인장력으로 활채를 당겨서 활이 부러지는 것을 막고
활의 복원력을 극대화시켜준다.
그밖에 또 한 가지 반드시 언급해야 할 재료는 활채를 접합시키는 접착제이다.
원래 각궁의 재료를 결합시키는 접착제로는 소의 부산물에서 얻어지는 아교가 사용되었으나
세종시대 전후하여 민어의 부레로 만든 어교(魚膠)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 민어 부레풀은 접착력이 우수할 뿐만 아니라,
다 마른 후에도 실리콘처럼 상당한 유연성을 유지하기 때문에,
각기 다른 연신율(延伸率)을 가진 여러 종류의 재료를 접합시켰을 때에도
재료간의 연신율 차이로 인한 힘의 손실이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
반면에 흑각궁은 중요한 약점이 있었다.
흑각을 접착한 어교는 비가 오거나 기후가 습해지면 물을 머금고 녹아 풀어진다.
따라서 비가 오거나 습할 때는 흑각궁을 사용할 수 없었으며, 무더운 여름철에는
활을 따뜻한 온돌방에 넣어서 보관하는 점화(點火)를 해야만 활의 탄력이 유지되었다.
▪ 후궁(帿弓) - 짧은 물소뿔 조각을 사용해서 만든 활
활 안쪽의 일부에만 물소뿔을 붙여서 만드는데,
활채 중앙의 줌통에서 활채가 반대편으로 휘는 지점인 삼삼이까지만 물소뿔을 대고,
나머지는 뽕나무를 댄다.
조선은 흑각을 수입에만 의존했기 때문에 항상 흑각이 부족했고
따라서 흑각궁을 만들고 남은 물소뿔(殘角)이나
원래부터 작은 조각으로 수입된 물소뿔을 이용하여 후궁을 만들었다.
▪ 녹각궁(鹿角弓) - 사슴뿔로 만든 활
▪ 향각궁(鄕角弓) - 황소뿔로 만든 활
▪ 교자궁(交子弓) - 몇 종류의 나무를 합성하여 만든 활(합성목궁)
▪ 목궁(木弓=弧) - 나무로만 만든 활
호(弧)는 원래 모든 활을 통칭하는 말이었다.
고대의 활 중에서 가장 초보적인 형태의 활은 순수하게 나무로만 만든 단순 목궁이다.
이 목궁은 신석기시대부터 이 땅에서 사용되었으며,
한사군시대의 낙랑 단궁(檀弓), 또한 단순 목궁의 일종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활과 활쏘기 기술이 고도로 발달했던 조선에서도 목궁이 각궁을 보완하거나
혹은 민간에서의 활쏘기연습을 위해 사용했다.
문종 1년의 기록에 군용으로 제작하는 목궁은
탄력성이 높은 나무로 만들고 그 바깥쪽에는 말 힘줄 등을 아교로 붙여 탄력을 높였다.
활의 표면에는 베(布)를 두르고 옻칠(漆)을 올리거나 혹은 가죽으로 싸며,
활시위로는 사슴가죽 끈으로 사용한다고 했다.
▪ 죽궁(竹弓) - 대나무로 만든 활(왜인들이 흔히 사용하던 활)
일본은 날씨가 습하고 비가 자주 오기 때문에
물소뿔과 부레풀로 만든 합성궁을 사용할 수가 없었으며,
대신에 대나무를 쪼개서 만든 단순 죽궁이나 합성 죽궁을 사용했다.
조선에서도 한여름이면 일본과 마찬가지로 습도가 높고 비가 자주 오기 때문에
죽궁을 부분적으로 사용했다.
각궁이 발달한 조선에서 죽궁이 보편화될 여지는 없었으나,
제작의 간편성과 습기에 대한 저항력 때문에 조선시대 내내 꾸준히 죽궁이 제작되어 사용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 배를 타고 섬으로 일을 나가는 백성들이 죽궁을 휴대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민간에서도 죽궁을 널리 제작하여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 철궁(鐵弓), 철태궁(鐵胎弓) - 철이나 놋쇠로 만든 활
<적벽가>에 조자룡이 활을 쏘아 오나라 서성이 탄 배의 돛줄을 끊는 장면에서 철궁이 등장하며,
서양의 경우 프랑스에서 석궁의 활채를 쇠로 만들어 관통력을 높인 일이 있다.
하지만 조선시대의 경우 철궁이 실전에서 널리 사용된 기록은 발견되지 않으며
다만 몇몇 지방 군영에 한 두 자루가 소장된 기록이 있을 뿐이다.
한편 철태궁은 부러지기 쉬운 활채의 중간 부분만을 금속으로 제조한 것이다.
▪ 노궁(盧弓) - 재료에 관계 없이 활채에 검은 옻을 칠한 활
▪ 동궁(동彤弓) - 주사(朱砂)를 이용하여 붉게 칠한 활로 궁중의 사냥과 의례에만 사용
▪ 정량궁(正兩弓) - 과거시험용 활
정량궁은 속칭 큰활, 대궁(大弓), 육량궁(六兩弓)이라고 부른다.
정량궁은 무관들의 초시와 복시에 사용했는데 이 시험은 과녁을 맞히는 것이 아니라,
무거운 육량전을 50보(63m) 이상 멀리 날려보내는 궁력 시험이었다.
육량궁은 활 자체도 크고 화살 무게도 무겁기 때문에
활을 쏠 때는 힘이 센 자는 펄쩍 뛰어나가면서 반동을 이용해서 쓰고,
힘이 약한 자는 엎어지고 넘어졌다고 한다.
현재 고려대박물관 등에 육량궁 몇 점이 남아있는데,
고려대 육량궁은 전체 길이가 168㎝이고, 화피(벚나무 껍질)로 잘 단장되어 있다.
▪ 예궁(禮弓) - 의식용 활
<경국대전>에는 궁중에서 국왕과 신하들이 모여 활쏘기를 하는 대사례(大射禮)와,
지방에서 관원과 덕행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활을 쏘는 향사례(鄕射禮)에 관한 규정이 있다.
성종 8년에 열린 대사례의 기록을 보면,
국왕과 신하가 성균관에 나가서 석전례를 올린 후,
활터에 가서 술을 마시고 두 명씩 짝을 지어
후(帿 - 임금은 웅후=곰, 대신은 미후=사슴)로 하고, 각각 네 발의 화살을 쏘았다.
지방에서는 매년 3월3일 삼짇날과 9월9일 중양절에 향사례를 열었다.
향사례는 효자, 충신, 예를 아는 사람들을 권면하는 활쏘기 자리였다.
따라서 활쏘기를 권하고 사양하기를 반복하면서 활쏘기가 진행되고,
과녁을 맞히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다고 하여 과녁에서 멀찌감치 화살을 날려버리곤 했다.
과녁은 50보(63m) 밖의 후(帿)로 하고,
화살은 승시(乘矢), 곧 네 발을 쏘며 이긴 사람은 인사하고 진 사람은 벌주를 마신다.
<활의 제작과정>
① 물소뿔 - 물소 한 마리에서 나온 2개를 활의 안쪽에 붙인다. 물소뿔에서 활채에 사용되는 부분은 양각(陽角), 즉 볼록하게 튀어나온 한쪽 면이며 나머지 부분은 사용하지 않는다. 물소뿔은 톱으로 양각 부분을 잘라낸 후 자귀와 줄로 깎아서 얇게 만든다.
② 대나무 - 현재 제작되고 있는 국궁의 활채는 3년생 되는 대나무로 만든다. 조선시대에는 군용 활에 대나무 대신 산뽕나무를 사용했다. 대나무는 가공이 용이하고 궁력이 지나치게 강하지 않기 때문에 습사용으로 널리 사용되었다. 활을 제작하는 데 사용되는 목재 중 대나무가 가장 하품이라고 한다.
③ 산뽕나무 - 궁간상(弓幹桑)이라고도 하며, 우리나라 산악지대에서 자생하는 야생 뽕나무이다. 이 산뽕나무는 다른 재목과 달리 탄력성이 좋아서 휘어놓으면 서서히 제자리로 돌아온다. 현재의 국궁은 활의 양쪽 끝에 활 시위를 거는 부분인 고자에만 산뽕나무를 사용한다. 이 고자 부분은 잘 다듬고 불에 쬐어 기역자 모양으로 휘어놓는다.
④ 참나무 - 활의 손잡이 부분에 덧대는 대림목을 만드는 데 사용한다. 한 뼘이 못되는 길이의 참나무를 잘라서 불에 달군 후 약간 휘어놓는다.
⑤ 쇠심줄 - 쇠심술(正筋)은 일을 많이 한 황소의 등에 있는 힘줄을 사용한다. 이 쇠심줄을 곱게 빗어서 활채의 바깥부분에 부레풀로 붙이면, 활시위를 당겼을 때 강한 힘으로 버티면서 활채에 복원력을 준다. 쇠심줄은 망치로 두드리고 빗으로 곱게 빗어서 정리한 후 부레풀을 먹여놓는다.
⑥ 어교 - 서해안에서 잡히는 민어의 부레로 만든 풀이다. 민어부레에서 기름을 제거하고 잘 말려두었다가 도가니에 넣고 끓이면 어교가 된다. 어교는 접착력이 강할 뿐만 아니라, 완전히 마른 후에도 실리콘과 같이 유연성을 유지한다.
복합재료를 사용해서 만든 국궁이 활시위를 풀었을 때 재료간에 풀림이 없이 완전히 반대방향으로 휠 수 있는 것은 어교를 사용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조선시대에 민어 부레 대신 연어피로 어교를 만든 적도 있지만 이는 민어 부레풀만큼 접착력이 높지않아 널리 사용되지 못했다.
⑦ 화피(樺皮) - 산벚나무의 껍질이다. 이 화피는 적당한 탄력이 있어서 변형이 심한 국궁의 표면을 씌운데 적합하다. 화피로 활의 표면을 씌우는 것은 방수를 위한 것이지만, 감촉도 부드럽고 안쪽의 재료들이 감추어져 보기에도 좋다. 활을 습기로부터 보호하자면 옻칠을 올리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옻은 워낙 귀하기 때문에 화피로 씌웠던 것이다.
⑧ 소가죽 - 활에서 소가죽이 사용되는 곳은 활시위를 거는 부분인 세코와, 화살이 스치고 지나가는 부분인 출전피, 그리고 활시위 매듭과 활채가 마찰되는 부분인 도고자 부분이다.
⑨ 실 - 국궁의 활시위는 비단실이나 면실을 여러 겹으로 겹치고 여기에 밀랍을 발라서 만든다. 활시위의 중간 조금 윗부분에는 화살 오늬를 걸기 위해 붉은색 실을 감아서 절피를 만든다.
⑩ 기타 - 삼베는 활채의 중간에 손으로 잡는 부분인 줌통에 감는다. 줌통의 안쪽에는 종이나 코르크를 넣어서 손으로 잡기에 적절한 크기로 만든다.
<활의 조립>
① 활채의 조립 활채는 가운뎃부분에 대나무를 두고, 그 양끝에 산뽕나무로 만든 고자를 붙여서 만든다. 대나무는 제비꼬리 모양으로 오목하게 깎고, 산뽕나무 끝은 뾰족하게 다듬은 뒤 이 둘을 끼우고 어교로 붙인다.
② 부각(뿔대기) 물소뿔의 표면과 활채의 표면은 미리 거칠게 깎아서 접착제가 잘 붙게 만든다. 두 재료에 어교를 바른 뒤, 밧줄로 활채와 물소뿔을 단단히 감아서 한참을 둔다. 부각이 끝나면 참나무로 만든 대림목을 활채의 중간에 붙인다.
③ 쇠심줄 대기 잘 빗어서 풀을 먹여놓은 쇠심줄을 활채의 바깥쪽에 붙인다. 줌통을 기준으로 양쪽에 각각 길게 쇠심줄을 한 번 붙이고, 다음에는 조금 짧은 쇠심줄을 한 번 더 붙인다. 풀이 마르고 나면 밀쇠로 문질러서 단단히 접착되도록 한다.
④ 화피 단장 물소뿔과 대나무, 대림목, 산뽕나무로 만든 고자, 쇠심줄을 모두 붙이고 나면 활의 기본형태는 갖추어진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활채의 표면에는 화피 단장을 한다. 산벚나무에서 벗겨낸 화피는 어교를 발라서 활채에 붙인 후 은은한 불에 말린다.
⑤ 줌 만들기 활채의 중간부분에 손으로 잡는 줌통에는 종이나 코르크 등을 넣고 삼베로 감아서 손으로 잡기 좋게 만든다. 줌통의 바로 윗부분에는 화살과의 마찰을 줄이기 위해 가죽 조각을 붙이는데 이를 '출전피'라고 한다.
⑥ 고자 만들기 산뽕나무로 만든 고자에는 활시위를 거는 홈인 세코를 파야 한다. 이 세코는 '양양고자'라고도 한다. 세코를 깎은 후에는 어교를 먹인 쇠심줄을 감고 그 위에 다시 가죽을 붙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칠지'라고 하는 색깔있는 종이를 세코에 붙여서 장식한다. 세코 밑에 활시위 매듭과 활채가 만나는 부분에는 도고자 또는 동고자라고 하는 붉은색 가죽을 둥글게 잘라서 붙인다.
<조선의 궁술>에서는 활채를 구성하는 대나무와 구지뽕나무의 가공과정을 순서대로 묘사하고 있다. 활채의 중앙에는 대나무를 두고 양 끝에 뽕나무를 부착한다.
<조선의 궁술>에서는 활채에 덧대어 궁력을 강화시키는 흑각과 쇠심줄, 그리고 손잡이 부분의 대림목을 가공하는 과정과 부착 방법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 <조선의 무기와 갑옷>, 민승기 지음, 가람기획, pp38-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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