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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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사박물관] 서울이 아름답다 - (5) 서울에 살다

Gijuzzang Dream 2008. 5. 7. 21:36

 

 

 

 

 

 

 

 

 안 경

 

 

 

조선 후기, 13×5.2, 덕성여자대학교 박물관

 

원형 알에 갈색의 색을 입히고, 테는 옥(玉)으로 만들어졌다.

안경의 연결부위는 삼엽형(三葉形) 장식을 투각시켰다.

코걸이와 다리가 없으며 다리는 실이나 끈으로 대체하였다.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된 안경은

안경알을 수정으로, 테를 뿔, 뼈, 금속으로 제작하였다.

안경다리는 실이나 천을 사용하였으나 나중에 접는 다리를 달게 되었다.

19세기 말부터 수정알에 거북등딱지(玳瑁)안경테, 그리고 접는 다리 등이 사용되었다.

이 옥테안경은 18세기 중엽의 정조대왕이 사용하였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正祖 52卷, 23年(1799 己未 / 청 가경(嘉慶) 4年) 7月 10日(丙寅) 1번째기사
차대 때 임업의 상소문에서 수교를 어긴 것 등에 대해 이르다

 


○ 丙寅/次對。上曰:

“予之眼視, 漸不如前, 經傳文字, 非眼鏡則難以辦認, 而眼鏡乃二百年來初有之物也, 帶此臨朝, 有駭觀瞻。近有日記文蹟考見之事, 而亦難如意披閱。此不但尋常眼病, 有思慮有事爲如期輒發, 背脊上太陽經及左右脅間, 有氣若燃炬, 以致此祟。間或試處不之堗, 則堗面亦隨而漸溫, 始若稍爽, 終又難耐, 此莫非太陽經鬱火充滿之致, 緣予學力未到, 志氣不能制血氣故也。旣不能治心而治身, 則又何可以治人乎? 然而嗣服卄三四年, 治不徯志, 徒有役心之病, 自反而求, 汙不至此。而亦惟曰工夫未至, 血氣爲病故耳。

 

차대(次對)가 있었다. 상이 이르기를,

 

“나의 시력이 점점 이전보다 못해져서 경전의 문자는 안경이 아니면 알아보기가 어렵지만

안경은 2백 년 이후 처음 있는 물건이므로 이것을 쓰고 조정에서 국사를 처결한다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볼 것이다.

 

요즘 일기 등 문서를 상고해 볼 일이 있었는데 역시 마음대로 훑어보기가 어려웠다.

이는 예사로운 눈병이 아니어서 깊은 생각을 한다거나 복잡한 일이 있을 경우 어김없이 이상이 생겨

등골의 태양경(太陽經)과 좌우 옆구리에 횃불이 타는 듯한 열기가 있는데

이것이 눈병의 원인이 되고 있다. 간혹 시험삼아 불을 때지 않은 온돌바닥에 누워 있으면

몸의 열기로 바닥까지 차츰 따뜻해지므로 처음에는 조금 시원한 것 같아도

나중에는 또 견디기가 어려우니, 이는 전부 태양경의 울화가 팽배해 있는 결과로서

나의 학문의 힘이 깊지 못해 의지의 힘이 혈기(血氣)를 제어하지 못한 때문이다.

 

이미 내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고 내 몸을 다스리지 못한 처지에 또 어찌 남을 다스릴 수 있겠는가.

하지만 왕위에 오른 지 스물 서너 해 동안 정사가 뜻대로 되지 않고 그저 애만 쓴 병통이 있긴 하나

스스로 반성하여 그 원인을 찾아볼 때 그 수준이 그다지 낮은 정도는 아니었다.

아무튼 그렇다 하더라도 공부가 깊지 못해 혈기가 병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생략)

 

 

 

 

 

- 우리나라의 안경 역사 -

 

 

 

▪ 안경의 기원은 임진왜란을 전후로 추정

▪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안경은 임진왜란시 통신부사였던 김일성의 안경

▪ 조선 선조대의 학자 이수광(1563~1682)이 쓴 <지봉유설>에 '안경' 기록

▪ 조선 선조대에 경주 남석(수정)을 이용한 확대경 제작,

  홍대용(1731~1783)이 중국에서 안경을 쓰고 들어와 유행시킴

▪ 가공공구나 연마기술이 발전되면서 안경 일반화(18세기 초반)

▪ 경주 보안당 안경점 김창호가 경주 남석 안경을 대량 생산(19세기)

▪ 경주 남산의 국립공원 지정으로 수정 채굴 금지(1995년)

 

 

 

안경에 관한 우리나라의 최초의 기록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의 심유경(沈惟敬)과 일본인 승려였던 현소(玄蘇)가 나이가 많음에도

안경을 낀 덕분에 글을 잘 읽어 많은 사람이 놀라 선조가 이를 중신들에게 하사하였다’는

조선왕조실록 내용으로 볼 때, 우리나라에는 안경이 16세기 말에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안경을 '애체(靉靆)'라고 하였다.

'애체'라는 말은 중국어표기를 인용한 것으로,

이덕수(李德愁)의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청장관전서)>에 안경을 지칭하는 단어로 기록되어 있으며,

황주석(黃株錫)의 <신제전서(臣齊全書)>에 기록된 <동경수정안경명(東京水晶眼鏡銘)>에 의하면

임진왜란 직후에 조선에서 안경이 제작되고 있었음이 증명된다.

경주부윤 민기(閔機)가 1630년경에 경주에서 만들어진 남석안경(南石眼鏡)을 착용했다고 한다.

 

한편, 조선 임진왜란 당시 초유사로 활약하다 숨을 거둔 영남학파 유림의 거두

학봉 김성일 (鶴峯 金誠一, 1538-1593)의 안경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안경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임진왜란 직전에 일본에 통신사로 다녀온 학봉 김성일(1538∼1593)의 집에서

그가 쓴 것으로 전해진 안경이 1984년 발견되었는데

이 안경은 우리 안경역사의 시작을 임진왜란 전으로 끌어올린 의미를 지닌다.

접었다 폈다 할 수 있는 기능을 더한 안경의 형태, 코 모양은

조선 특유의 투박함과 섬세함은 물론 강약의 적절한 조화로움과 안경집의 처리법이

우리나라 전통 공예품과 같아 선조들에 의해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특징은 대모(龜甲=玳瑁 : 거북 등껍질)로 만들어졌으며,

귀에 거는 끈이 원래는 쪽빛실이었으나 끈이 떨어져 밤색 헝겊을 박아 달아놓았다.

또 코의 경첩은 놋쇠로 만들어 뒷면에 부착하고 앞판 장식이나 못은 구리로,

부러진 안쪽 안경 귀는 놋쇠로 보수되어 있다. 현재 안동 의성 김씨의 종가에서 소장하고 있다.

 

 

안경박물관 기획실의 황길산씨에 따르면

“안경을 연장자 앞에서 써서는 안되는 예법 때문에 오랫동안 일반인에게 보급되지 못했고

1891년 당시 일본 공사였던 오이시가 안경을 쓴 채로 왕(고종)을 알현해

우리 정부에서 일본에 정식으로 항의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또 “이후 안경은 신분 과시용이기도 해서 안경을 끼거나 들고 다니는 기생들은

눈이 나빠서가 아니라 엘리트 기생 출신임을 과시한 것이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1880년경의 우각(牛角) 안경테 - 꺾기다리

우각(牛角) 안경테의 제작에는 암소뿔이 주로 사용되는데

뿔 하나로는 보통 한장의 테를 만들 수 있다.

뿔을 오랫동안 물에 담궈 편 후에 황줄이라는 기구를 사용해서 표면을 고르게 만든다.

평평해진 표면 위에 안경본을 얹어 오려내고 활비비, 실톱, 끌, 칼 등의 도구로 안경테를 만든다.

형이 완성된 것은 보드라운 페이퍼로 문지르고 숫돌가루나 재를 물에 축여 발라서 광을 냈다.

                                                                                                               

18세기의 경주 남석안경(南石眼鏡)

가격이 엄청나게 비싸서 미국인 선교사 제이스 게일이

'코리언 스케치'에 수록한 일화에 의하면

남석(南石)안경은 미국돈으로 15달러나 주어야 구입할 수 있었다고 한다.

게일은 또 이같은 거금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양반들은 이를 구입 못해 안달이었다면서

동양인들의 허세에 찬 불합리한 생활태도를 꼬집었다. 

그런데 안경의 제작 기술이 발전하면서 남석안경이 대량 생산되자 가격도 하락했는데,

1930년대 매우 번창했던 경주 보안당(保眼堂)의 경우

1939년도에 최고 80원에서 최저 2원짜리까지 다양한 제품이 구비되어 있었다고 한다.

안경이 만들어지지던 초기의 안경테는

뿔, 뼈 또는 쇠붙이로, 안경알은 수정을 깎아 만들었고, 안경다리는 실이나 천으로 사용했다.

이후 개화기에 접을 수 있는 안경다리로 만들어진 개화경이 보편화되었다.

 

 

 

 

 

뷰마스터 + 필름  

 

(View-Master, SM 1008-구740-H3-211 /  SM 1016-구748-H3-219 /

SM 1017-구749-H3-220 / SM 1018-구750-H3-221 / SM 1019-구751-H3-222 )

1920년, 길이 32, 서울여대박물관

 

 

 

일제시대에 사용되었던 구형 뷰마스타이다.

똑같은 사진 2장을 끼워넣고 밑의 손잡이를 앞뒤로 움직여 눈과의 거리를 조절하다 보면

사진이 1장의 입체영상으로 나타난다.

 

 

 

 

 

 

 불교에 사용되었던 목조각상

불교와 관련된 목조각상은

절 입구의 방위를 지키는 사천왕상(四天王像),

부처님의 모습을 새긴 목불상(木佛象),

아이처럼 해맑음을 잃지 말라는 의미의 목동자상(木童子象),

그리고 그 소리로 세상의 천지 만물을 깨운다는 목어(木魚) 등 그 역할과 성격이 무척 다양하며,

이러한 목조각상들이 넓은 의미의 주술 및 종교적 의미의 목인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동자상, 브루클린박물관 소장, 18세기 

  

 

 

 

 

 

목안(木雁, 나무기러기)

혼례를 치르기 위해 신부집으로 가는 신랑행렬에서 청사초롱을 든 사람이 맨 앞에 서고,
나무기러기를 든 기럭아비와 신랑이 그 뒤를 따른다.
기러기는 부부금슬이 좋기로 소문난 새다. 원래는 살아있는 기러기를 들고 갔지만
산 기러기를 구하기가 힘들어지자 나무로 깎은 기러기로 대신하였다.
나무기러기는 몸통과 목을 따로 만들어 몸통구멍에 목을 끼우게 되어 있으며,
집집마다 혹은 마을에서 공동으로 장만해 사용하였다.

 

 

 

  혼례용 목안, 목인박물관 

 

 

 

 

 

보자기(褓)

 

보(褓)는 사용계층, 구조, 색상, 재료, 문양 등에 따라 다양하게 분류할 수 있는데

보자기는 물건 등을 싸거나 덮을 때, 또는 운반과 보관을 위하여 예로부터 다양하게 사용되어 왔다.

 

 

- 궁보(宮褓) -

보자기는 민간뿐만 아니라 왕실에서도 애용되었는데,

왕실에서 사용되었던 보자기는 궁보(宮褓)라고 불렸다.

사용된 소재나 모티브, 제작방법에 있어서 민간에서 제작된 보자기와는 뚜렷하게 차이점을 갖고 있다.

궁보에 이용된 천은 주로 명주, 모시 등이었으며,

그 중에서도 패물 등 귀중한 물건을 보관하거나 장식용으로 제작된 것들이 많이 전한다.

 화문수보. 자수박물관 소장. 꽃과 열매를 수놓은 길조 문양의 보자기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진

 

제작방법을 살펴보면 대체로 1장의 천을 이용하였는데,

민간에서 짜투리천을 이용하여 많이 제작한 조각보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비싼 가격의 당채를 이용해 채색한 당채보가 많이 제작되었다.

문양 등으로 사용된 주요 소재는 봉황문, ‘壽’자문, 모란문, 연꽃문, 회문 등

주요 길상문이 중심이 되었다.

 

현존하는 궁보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현종의 셋째 따님인 명안공주가 1681년 혼례시 사용했던 아청운문단궁보(鴉靑蕓紋緞宮褓)로서,

2겹으로 이루어졌는데, 안쪽은 옅은 청색을 띠며, 겉은 남색 비단에 칠보문과 운문을 직조했다.

 

 

1920년 영왕비 이방자여사의 혼례시 패물을 싸서 보관했던 보자기를 살펴보면,

붉은색 비단 바탕에 봉황, 앵무새, 연꽃, 국화, 난초, 꾀꼬리, 모란 등을 비롯해

그 사이를 벌과 나비로 꽉 차게 채워 직조하였다.

쪽 모서리에 연두색의 끝 2개를 달아매서 나머지 세 모서리를 모아 여밀 수 있도록 하였다

 

현재까지도 많이 이용되는 보자기는 일상적인 평범한 물건이지만

실용성인 측면뿐만 아니라 장식성인 측면에서 오히려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특히 궁보에는 왕실만이 지닌 격조높은 품위가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어,

당대 최고 수준의 문화를 살펴볼 수 있는 또 다른 일부분으로 주목할 만하다.

 

 

- 민보(民褓) -

보(褓)는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생활용품 중에 하나로, 작은 것은 '보자기'라고 한다.
보는 물건을 포장해서 보관하는 용도에서부터 혼례 때 쓰는 의례용까지 실로 다양하게 쓰였는데,

함을 싸는 보는 함보, 밥상을 덮으면 상보, 책을 싸두는 책보, 이불을 싸는 이불보 등

다양한 용도에 맞게 속 안에 내용물에 따라 그 이름이 정해졌다. 

이러한 실용적인 의미 외에도 보는 복을 싸둔다는 의미도 있고,

가야국신화(하늘에서 붉은색 보자기에 싸인 금상자가 내려왔는데 그 속에는 황금알이 들어있었다.

하늘에서 내려온 그 황금알로부터 가야국이 개국되었다는 이야기)에서처럼 

처음의 신성함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는 우리의 전통혼례의식에서 혼인이 시작되는 사주를 청홍의 보로 싸서

귀히 대접하는 풍습과 연관성이 있다고 한다.

보는 그 재료로 사용된 천이 매우 다양해서 철마다 다른 천이 사용되었다.
겨울이면 양단, 모본단, 공단, 여름에는 삼베, 모시, 노방,

봄 · 가을로 항라, 숙고사, 국사 등 소재가 무궁무진하다.
또 쓰임새에 따라 끈을 달기도 했는데

보통은 네 귀퉁이에 달았으나 대칭이 되는 두 귀퉁이나 한쪽 귀퉁이에만 달기도 하였다.

무명과 명주에 쪽물, 치자물, 쑥물 등 다양한 천연염료로 염색을 하여

여기에 나무와 꽃, 물고기, 학, 봉황, 나비, 풀 등을 수놓아 만든 수보(繡褓)는

보통 바탕색과 반대되는 보색 계열의 실로 수를 놓아 눈에 띄게 하였는데

이는 우리의 전통 보에서만 볼 수 있는 양식이다.

문양 중에서는 화려한 꽃 문양이 가장 많이 쓰인 것으로 보이며

19세기 후반부터 강렬하고 대담한 원색의 사용이 두드러지게 보이고 추상적인 문양이 많이 나타난다.
특히 여러 가지 보 중에서 조각보는
궁중에서는 쓰이지 않은 것으로 알려진 대표적인 민보의 양식이다.

 

조각보는 크기, 모양, 질감, 명암, 색깔 등이 한데 어우러져 기하학적인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는데

그 독보적인 조형감각과 조화로운 색감은 현대의 추상화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
여기에는 가족의 건강과 행복을 바라는 어머니의 마음이 담겨있는데

폐품 활용이라는 생활적인 의미 외에도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무언의 희망을 담고 있어 밝고 아름다운 기운이 서려있다. 
  

패물보 - 조선 말기, 34.5×36, 초전퀼트박물관

본견 자수 보자기이다. 진분홍색 바탕에 꽃을 수놓은 이 보자기는

여자의 노리개나 장신구들을 싼 보자기로 생각된다.

 

 

 

여의주문양보 - 조선 말기, 53×54, 초전퀼트박물관

본견 패치위크 보자기이다. 문양이 여의주와 비슷하다.

여의주무늬 조각보자기는 목기나 차반의 음식물을 덮는 보자기로 사용한다.

  

 

 

 

자수기러기보 - 조선 말기, 53×54, 초전퀼트박물관

본견 자수보자기는 혼례를 올리는 신랑 신부의 행복한 인생을 비는 길상의 문양을

보자기에 수놓은 자수기러기보이다.

 

 

 

 

모시보 - 조선 말기, 62×48, 초전퀼트박물관

청색과 홍색의 명주 누비보자기이다.

분홍 명주에 원형으로 기계누비하여 안과 밖으로 쓰인다.

청색 명주에 돌림무늬 사각형을 기계누비하였다. 

 

 

 

 

 

 

벼갯모(나전 / 화각)

 

 

 

 

 

화각이란 한우 황소뿔을 종이처럼 얇게 갈아서 그 뒷면에 그림을 그리고,

오방색을 기본으로 채색하여 함, 장, 농, 베갯모, 참빗, 자 등의 나무판 표면에 붙여서 꾸민

목공예의 한 가지로 상류계층에서 향유하였다.

무병하며 오래토록 장수하기를 기원하는 십장생(해, 달, 산, 물, 구름, 바위, 소나무, 거북, 사슴, 학)이나

신성한 용, 호랑이, 봉황, 고결하고 굳은 의지와 이상을 나타내는 사군자(매, 난, 국, 죽),

백년해로하며 화목하기를 바라는 원앙 및 기러기 등의 다양한 문양을 아름답게 베풀었다.

 

 

원삼(圓衫)

조선후기, 길이 119cm, 품 51.5cm, 소매 폭 47.5cm, 한상수자수박물관

 

원삼은 본래 궁중예복이나 서민에게는 혼례 때 입을 수 있도록 허락되었다.

이 원삼은 녹색의 수자(壽字) 호로문(葫蘆紋) 숙고사와

안감으로 댄 홍색 석류불수도화문(石榴佛手桃花紋) 갑사가 반투명으로 이중 색상의 조화를 이루며,

너른 소매에는 흰색 한삼을 대었고

목깃과 옷고름에는 자주색 숙고사를 달았으며 앞가슴에 쌍학문(雙鶴紋) 자수흉배가 붙었다.

흉배의 특징이 매우 투박하고 추상적이다.

 

신부혼례복(원삼) / 신랑혼례복(단령)

주홍색 소화문주(小花紋紬) 천에 흰색, 황색, 홍색, 녹색, 남색의 비단 꼰 실로

위아래 마주보며 나는 학 두 마리와 그 주위를 감싸는 서기에 찬 구름,

아래의 산악과 파도 등의 조형을 모두 면(面)으로 재구획하여

수놓은 땀이 평행으로 곧은 평수(平繡) 침법을 수놓았다.

학 날개에는 예각의 형태에 맞추어 두땀씩 길게 실을 떠서

꼭지점을 향해 가장자리에서 안쪽으로 반복하며 점차 좁혀 메우는 방법으로

신속하게 부문(浮紋)하여 수놓았다.

또한 학의 등과 비늘, 뒤집혀진 만(卍)자도 그냥 길게 한 번의 수땀으로 건너가고,

이 위를 일정한 간격으로 듬성하게 집어주는 징검수(찡검수) 침법으로

교차되거나 들뜬 긴 실로 고정하였을 뿐이다.

  

  

 

 

 

 한양가 (漢陽歌)

 

1912년본의 1938년 필사 / 31.2 ×20.8㎝ / 紙本 / 장편가사(2,955구) /  서울역사박물관

 

 

 

서민층 가운데 지식인으로 생각되는 한산거사(漢山居士)가 지었다고 전하는

헌종 10(1844)의 풍물 장편가사이다.

<한양풍물가(漢陽風物歌)>, <한양태평가(漢陽太平歌)>라고도 한다.

 

1,528구(句)(1,622구?) 의 문장이 3․4조와 4․4조가 거의 반반씩 되어 있다.

화려, 장중하고 쾌활, 쇄락하여 조선왕조의 역사를 노래한 한양오백년가에 비하여 월등히 우수하다.

 

내용은 서곡(序曲)에서 한양의 뛰어난 지세(地勢),

다음으로 웅대한 궁궐, 찬란한 관아(官衙), 번화한 거리의 풍경과 화려한 누정,

임금의 엄숙한 거동, 과거(科擧)의 광경 등을 그려낸 후

결론으로 역대 도읍 중에서 한양이 제일이라 하였다.

 

이 <한양가>에는 이름만 같고 내용이 전혀 다른 책이 여러 가지 전한다.

또한 국립중앙도서관 소장의 목판본을 비롯해 악부본, 송갑용본, 이석래본, 박성의본 등이 있다.

 

<한양가>는 고종 17년(1880)의 목판본 외에도 필사된 이본이 많이 전하는데

1907년에 나온 석동(石洞)의 방각본(坊刻本)이 가장 오래된 것이며,

1949년 송신용의 교주본(校註本 : 문장의 字句 따위를 교정하여 쉽게 풀이함)도 있다.

 

조선시대 풍물을 찬양한 것으로 풍속사 연구에 중요한 문헌이다.

 

 

중요한 내용을 문단별로 추려보면,

① 한양의 지세와 도국(都局) ② 궁전, 보탑(寶榻) ③ 궁방(宮房), 내시(內侍), 나인(內人)

④ 정원(政院), 의정부(議政府) ⑤육조관아(六曹官衙) ⑥ 조마거동(調馬擧動)과 여러 관서(官署)

⑦ 선혜청과 여러 관서 ⑧ 성첩(城堞)과 백각육의전 ⑨ 마루저자, 광통교와 구리게 전방(廛房)

⑩ 유희와 유희처 ⑪ 승전노름과 복식(服飾) 및 기생점고(妓生點考)와 가무 ⑫능행경(陵幸景)

⑬ 과정풍경(科場風景)과 유가경(遊街景) ⑭ 한양찬(漢陽讚)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용은 한양을 중심으로 한 조서의 관직 문물 제도 태평성대의 모습이다.

단군과 기자 조선을 통해 우리 민족의 뿌리를 과시한 후

한양 풍물과 풍경을 예찬해 긍지에 찬 민족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서울역사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한양가>는 전체 2,995구(句)로 구성되었고,

작자는 강원도 원주에 거주하는 ‘만성(晩醒)’이라는 호를 가진 사람으로

조선이 멸망한 직후인 1912년경, 그 서러움을 달래기 위하여 지은 것으로 보여진다.

본 도서는 가사가 처음 작성된 지 20여 년이 지난 1938년에 누군가에 의하여 다시 필사된 것인데

이같은 내용의 가사가 일제시대에 여러 사람에 의해 필사되어 전하여지고 있다.

 

 

책의 구성은 75면에 걸쳐 각 면당 40구씩 배열하였고,

마지막 면은 35구로 마쳐서, 총 2,995구가 되었으며 국한문 혼용체로 서술되었다.

 

가사의 내용은 태조에 의한 한양의 건국, 세조의 등극과 사육신의 복위운동,

임진왜란시 선조의 피난과 의병활동, 정묘호란시 국난의 극복, 대원군의 등극과 경복궁 중건,

경술년의 합방 등으로 주로 왕대별로 역사적인 사적들을 열거하고 있다.

 

 

 

 

 

 

 

 

 

수동식 전화기

1928년, 25×20.8×26.7, 서울역사박물관

 

다이얼식 전화기인데, 다이얼 중앙에 "LLEVE EL RECEPTOR AL OIDO AL"라고 쓰여 있다.

전화기 윗면 양쪽에 구멍을 뚫고 비닐끈으로 전화기 걸이를 만들었고,

우측 구멍부분은 파손되어 호치키스로 박아 고정시켜 놓은 상태이다.

전선은 부분부분 연결이 끊어진 상태이다.

송신기 하단에 "日本電信話公事 中國電氣通信工作工場 昭和O年 3月"이라 된 원인(圓印)과

"11,3,26"이라 쓰인 판독 불가한 원인(圓印)이 찍혀 있다.

 

 

전화기

1950년대, 22.4×14.5×13.5, 서울역사박물관

 

 

몸체에 수화기를 얹은 형태의 다이얼식 전화기이다. 전선부분은 파손되어 고무테이프로 감겨 있고,

바닥면에 "MADE BY THE NORTH ELECTRIC MFGC GALION, OHIO"이라고 쓰여 있다.

몸체 뒷면 하단 왼쪽에는 "NORTH ELECTRIC", 오른쪽에는 "PATENTED. U.S.A"이라 표기 되어 있다.

 

 

공중전화기

1980년대, 높이 29.5×가로 21.5㎝, 국립민속박물관

 

 

음성 등을 전달하는 통신장치이다. 주황색 공중전화기는 전화통, 수화기, 전화선 등으로 구성된다.

윗면에 '20원'이 음각된 동전투입구가 있다. 앞면에 다이얼, 반화구 등이 있고 개폐형이다.

잠금장치와 열쇠, 밑면에 4개의 받침대가 달렸다.  

 

 

 

1920년대에 제작된 벽걸이형 자석식 전화기

체신 1호 자석식 전화기(1966년 제작), 이 전화기는 1962년 체신부가 전화기 규격을 정한 뒤

처음 개발된 기종으로, 본격적인 국산 전화기 시대를 열었다.

소록우체국 우체통(1945년 사용)은 광복 직후에 전남 고흥군 소록도에서 사용된 우체통으로,

현대 우체통과 달리 원기둥 모양이며 당시의 붉은 칠이 그대로 유지돼 있다. 

 

 

 

 

 

 양단드레스 '청자'

 

디자이너 최경자, 1957년, 한국현대의상박물관

      

 

  

청자드레스는 한국패션의 대모인 최경자씨가

고려청자의 아름다운 미의 재현을 시도하여 이세득 화백이 의상에 그림을 그렸고,

미스코리아(미스 해병대)출신의 김미자가 착용하였다.

1957년에 제작한 작품인데,

1962년 서울에서 처음으로 개최된 세계 패션쇼에 출품되었고,

1963년 미국 뉴욕 세계만국박람회 때 출품되어 절찬을 받은 작품이다.

세계 패션쇼에 참여하기 시작하면서 우리나라 패션도 도약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1950년대 한국전쟁으로 인한 폐허를 가난 속에서도 외국잡지를 통하여 멋에 대한 동경심을 키웠고,

모든 것이 부족했던 전반기를 보내고 억눌렸던 멋내기 패션의 꿈이 살아나면서

양단 소재로 된 의상들이 많이 유행하게 되었는데, 급진적인 사회 변화에 맞춰 양장이 대중화되면서

서울 명동에 밀집한 많은 양장점들이 활기를 찾게 되었다.

 

- 한국패션계의 대모, 최경자

 

최경자는 1911년 함경남도 안변에서 태어나

자랄 때 보배라는 이름이 맘에 안들어 경자(敬子)로 이름을 바꿀 정도로

어릴 때부터 좋고 싫음이 분명하고 자기주장이 강한 아이였다.

 

1920년대 작은 오빠의 도움으로 원산에 있는 루씨여고에 입학하였는데,

하숙집에서 가부장적인 남편과 수동적인 주인집 아주머니를 보면서

그는 여성의 경제적 자립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여성들이 자신의 일을 갖는 것이 곧 경제적 독립이고 여성 개인의 삶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

그때의 경험은 그가 여성교육기관인 양재학원을 설립하는데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일본에 유학을 가던 23살까지 피아니스트가 꿈인 음대생이었는데,

고향집에 화재가 나서 어려워진 가정형편으로 피아노를 팔아 돈벌이가 되는 재봉틀을 사야 했다.

그는 1937년 한국으로 돌아와 ‘은좌옥’이라는 양장점을 열었다.

여성들에게 옷을 만들어주기보다 옷을 만드는 재봉술을 가르쳐주고 싶어

1년후 '함흥양재학원'을 열게 된다. 한국인이 세운 최초의 양재학원이다.

(양재=양복의 재봉, 양복을 마르거나 바느질하거나 디자인하는 일을 말함)

 

 

하지만 해방과 소련군이 진주하면서 학원은 문을 닫고 그는 서울로 월남하게 된다.

한국전쟁으로 다시 대구로 내려가 현재 국제디자인학원의 전신인 '국제양장사'를 만들게 되었는데

미군을 상대하는 양공주들이 주손님이었다.

휴전이 성립되고 서울로 돌아온 그녀는 명동으로 국제양장사를 옮겼는데,

유명연예인과 외국대사관 부인들의 발길로 문전성시를 이루게 된다.

그는 1961년 국제양장사를 '국제고등양재학원'으로 바꾸고 교육자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시작한다.

당시 양재교육이란 옷감을 자르고 바느질하는 법, 색채학 정도를 가르치는 것에 불과하여

디자이너의 의도가 만드는 이에게 정확하게 전달되려면 필요한 스타일화를 위해

국내 최초로 국제고등양재학원에 스타일화과를 개설하였다.

이후 대학 의상학과에서도 스타일화 강의를 본따 스타일화 강의를 개설한다.

(스타일화=복식 디자인의 내용을 표현하고 전달하기 위해 디자이너가 그리는 그림, 디자인화라고도 함)

 

 

1962년 5월 한국최초로 서울에서 국제패션쇼가 열려 프랑스의 피에르 가르뎅과 마기루후,

일본의 노보코와 오치마리 루리 등 17개국 일류 디자이너들이 참가했다.

아직 분야별로 전문화되지 못한 한국에서 모든 것을 디자이너 혼자서 해결해야만 하는 상황에서

그는 고려청자의 곡선미를 연상시키는 한국적인 미와 드레스라는 서양의 미를 잘 접목시킨

‘청자’를 만들었다. 사흘에 걸쳐 열린 패션쇼에 가장 많은 관심을 끌었던 이 작품은

현재 한국의상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1964년 국제양재학원 내에 차밍과를 개설하고 워킹과 화장술, 미용체조를 전문모델에게 가르쳤다.

이렇게 시작된 차밍스쿨은 도신우, 이재연, 이희재, 이계순 등 당대이 탑 모델들을 배출해냈다.

 

 

최초의 양재학원 설립, 최초의 디자이너 모임 창립, 스타일화 첫 도입, 국제 패션쇼 개최,

최초의 차밍스쿨 운영, 최초의 패션잡지 창간 등에서 최경자는 최초의 단어를 연발한다.

 

 

(2005년 7월1일, DEW 하태현기자)

 

- 디자인과 정체성 <디자인 문화비평 05> 안그라픽스

 

 

해외파 디자이너 노라노가 1948년 미국으로 건너가

로스앤젤레스 프랭크 웨건 공대에서 양재를 배우고 1950년에 귀국했으나 한국전쟁이 일어나는 바람에

1952년에야 현재 조흥은행 본점 맞은편에 첫 양장점을 열었다가

1955년 현재 명동 사보이호텔 부근으로 이전했다.

 

이듬해인 1956년 노라노는 반도호텔(현재 조선호텔)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패션쇼를 열게 된다.

‘찔레꽃’의 작가 김말봉이 사회를 보고

모델이라는 직업이 따로 없던 시절이라 미스코리아 출신의 강귀희와 무용가 김백초,

그리고 영화배우들이 무대에 섰다.

그러나 초창기 패션쇼는 양장을 제대로 입을 줄 몰라 뒷단추로 된 옷의 앞뒤를 바꿔 입는다거나

스커트의 앞뒤를 바꿔 입는 해프닝이 비일비재했다.

 

 

1962년 5월18알-20일에 한국 최초의 국제패션쇼가 열렸다.

한국 디자이너로는 국제복장학원 설립자인 최경자씨의 이브닝드레스인 '청자'를 내놓았다.

‘청자’가 나오기까지는 요즘에는 그렇게도 흔한 나일론 망사조차 구하기가 어려워

서양식 패티코트와는 완전히 반대구조인 ‘무지개 속치마’를 만들어 받침으로 사용했다는 비화가 있다.

하지만 삼베와 모시를 빳빳이 풀을 먹여 청자만의 독특한 실루엣을 재현하고

이세득화백이 직접 학과 소나무를 그려 넣은 옷으로 패션쇼 기간중에 가장 많은 박수를 받았다고 한다.

 

이 ‘청자’ 드레스는 국제복장학원의 신혜순 원장(국제복장학원 설립자 최경자씨의 딸)이

30여 년 간 모은 복식 1,080여 점 중에서 특이한 복식을 골라 전시해 놓은

현대의상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 김성복 <오리엔탈리즘의 족쇄 : 한국 패션 정체성의 딜레마>

그동안 많은 패션 디자이너들이 '한국의 미'를 자신의 디자인에 표현했다고 주장해왔다.

한데 왜 정작 한국인들 사이에는 거의 입혀지거나 유행하지 않았는가?

왜곡된 한국미를 추적하다보면,

근원에 1959년 노라노의 '아리랑 드레스'와 최경자의 '청자 드레스'가 있다.

둘 모두 일상 삶과 무관한 과도기적 패션이었다.

 

하지만 아리랑이 주체성과 현재성의 균형을 시도해 대중성을 확보하려고 노력했던 데 반해,

청자는 근원에 대한 집착으로 현재성이 결여된 과거 지향적 전통의 모방만을 강조했다.

후자를 이어받은 것이 앙드레 김, 이영희, 이신우였다.

이러한 패션의 특징은 서양이 만들어낸 오리엔탈리즘에 감염된 것이었다.

(생략)

  

 

 

 노리개(佩飾)

 

목걸이나 귀걸이를 대신하여 조선시대에 가장 다양하게 발달한 여자의 장신구이다.

궁중과 상류층으로부터 평민, 노년층과 어린아이에 이르기까지 널리 애용되었으며,

계절과 용도, 목적에 따라 노리개의 재료, 크기, 형태가 다양했다.

노리개는 우리 한복의 악센트와 같은 역할로 색과 선, 그리고 재료의 미를 한층 돋보이게 해주며,

그 아름다움을 통해 선조들의 미적 감각을 발견할 수 있게 해준다.

단지 장식적인 수단으로 애용된 것 뿐 아니라, 여인들의 일상을 담는 실용적인 용도로 쓰이기도 했다.

다양한 형태와 문양을 담아 착용함으로써

가정의 행복과 소원을 빌기도 하며 마음을 다스리는 옛 여인들의 지혜와 소망이 두루 담겨져 있다.

 

 

 

도금불수노리개 - 조선, 전체길이 27.3, 보나장신구박물관

 

 

불수감나무 열매의 뜻과 부처의 손과 같이 자비(慈悲)와 구원(救援)을 상징하는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국화매듭과 세벌감개매듭으로 연결되어져 있으며 이 봉술로 구성미가 뛰어나다.

 

 

 

은 방아다리 노리개 - 조선, 전체길이 31.3, 보나장신구박물관 

 

 

귀이개 모양의 다리가 쌍(雙)으로 달린 것이 특징이고

방아다리는 농기구를 문양화한 것으로 여성들이 평상시 안고름에 단작으로 찼던 노리개이다.

다홍빛 봉술이 달려 있다.

 

 

 

은투호 삼작노리개 - 조선, 전체길이 33, 보나장신구박물관

 

 

투호는 궁중에서 왕족과 궁녀들이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단지 안에 화살을 넣는 놀이로

단지모양을 축소하여 뚜껑을 덮어 액(厄)을 면하고 한 해를 편히 지내라는 뜻이 있다.

세 개의 투호가 주체인 노리개로 모두 중앙에 문자 도안이 새겨져 있다.

국화매듭과 세벌감개매듭이 주체를 연결하고 홍, 남, 황의 삼색 봉술이 달려 있다.

 

 

 

은파란 삼작노리개 - 조선, 전체길이 28.5, 보나장신구박물관

 

 

 

장도(粧刀), 바늘집(針囊), 별전(別錢)과 고추노리개로 은파란 상태가 아주 양호하다.

삼색의 봉술로 이루어져 있으며 은파란이 화려하여 더욱 장식성이 돋보이는 삼작노리개이다.

 

 

 

향갑노리개 - 조선, 전체길이 45, 보나장신구박물관

 

 

 

은, 니사(泥絲)로 만들어진 대형 향갑노리개로 향갑의 하단부가 개폐식으로 되어 있다.

그 안에 홍색의 향이 들어있고, 다홍빛으로 인하여 투각된 문양과 섬세한 도안이 돋보이며

문양에 물총새털로 장식되어 화려함을 더해준다.

크기로보아 궁중이나 상류층 계급에서 사용되었으리라 추측되며

병아리매듭으로 연결되어 봉술이 달려 있다.

 

 

비취발향(翡翠發香) 노리개 - 조선후기, 길이 35, 폭 6.2, 수 길이 7, 한상수자수박물관

 

  

궁중과 반가의 여성용 장신구로 또는 절에 시주되어 부처님 가마 연(輦)을 수식하기도 하였다.

홍색 단(緞, 비단) 천에 목단문과 난초문을 수놓고

안으로 솜을 넣어 꾸민 보개(寶蓋) 장식물과 중간에 쌍희(囍)자문, 천도문을 수놓은 장식물 사이에

비취색 물총새(翠鳥)의 깃털을 붙인 원통형의 발향(發香) 고체를 줄을 매어

향과 향 사이에 금속 원판을 삽입하고 일곱개 씩 다섯 줄을 꿰어 달았다.

 

비취발향노리개는 조선시대 여성의 옷차림새에서

눈으로 감상하는 시감(視感),

움직임에 따라 흔들리는 동감(動感)과 청감(聽感),

그리고 그윽한 향기의 후감(嗅感)을 모두 갖춘

줄향 패식(佩飾)으로 심미의 감성을 선사하는 최고급 공예미술품이다.

 

 

 

 

 

 

 화장 (化粧)

 

 

화장품에 보편적 개념을 규정한 약사법 2조 8항에 의하면

‘화장(化粧)’은 신체의 일부에 화장품을 바르고 그리고 문지르고 뿌리는 일이다.

 

사실 화장이라는 말은 일본에서 건너온 말이고, 옛날에는‘단장(丹粧)’이라는 말이 더 일반적이었다.

붉을 단(丹), 꾸밀 장(粧), 이것이 바로 우리 화장의 옛말이다.

붉다는 것은 연지곤지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그 기원이 오래되었는데,

후대에 주사(朱沙)를 이용하며 재료가 변했고, 꾸밀 장(粧)에서 바탕 화장의 기본이 보인다.

즉 장(粧)자는 쌀과 같은 곡물로 피부를 희고 평평하게 만든다는 것을 말한다.

단장의 또 다른 말인 분장도 곡물 가루분으로 피부를 희고 평평하게 만드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 선조들은 어떻게 피부를 정리하고 보호했을까?

분은 피부가 하얗게 보이도록 얼굴에 바르는 화장품으로 백분(白紛)과 색분(色紛)으로 나뉜다.

 

전통적으로 분말 백분을 가리키는 분(紛)은

역사적으로 동서양을 막론하고 가장 오래 애용되어 온 화장품 중 하나다.

우리나라는 꽤 오래전부터 분꽃의 열매를 곱게 갈아 체에 쳐서 백분을 만들어 보관해 두고

화장할 때 적당량을 분접시에 덜어 분수기의 물로 갠 다음 누에고치집에 묻혀 곱게 펴 발랐다.

 

또한 분의 주원료로 곡물을 오랫동안 이용했는데,

이는 분(粉)의 표기가 쌀(米)의 가루(分)라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그러나 곡식을 원료로 한 천연분은 날비린내가 난다는 단점이 있었다.

그래서 실제로는 쌀로만 만들지 않고 쌀과 서속(黍粟, 기장과 조)을 3 : 2로 배합하여 만들었으며

분꽃씨, 조개껍질 태운 분말, 흰 돌가루, 칡 말린 가루 등이 분의 원료로 사용되었다.

 

분의 필수요소인 부착력을 높이기 위해 한때 광물질인 납[鉛]을 가미했다가

살갗이 푸르스름해지고 땀구멍이 커지는 등 납독이 유발되어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된 시절도 있었다.

- 박희준, 향기를 찾는 사람들

 

 

 

  화장품으로 자살을 시도한 기생현재진행형인 납중독의 망령

급작스럽게 몰락의 길을 걸은 로마제국의 멸망 원인을 놓고

호사가들은 여러 가지 설을 제기하고 있다.

향락적인 목욕 문화로 인한 ‘목욕탕설’과 난잡한 성생활 때문이라는 ‘성도덕 타락설’ 등이 좋은 예다.

목욕탕설의 경우, 뜨거운 물로 자주 목욕을 한 남자들의 고환에 장애가 생겨

인구가 급격히 줄어들게 되었다는 과학적인 해설까지 곁들인다.
그 가운데 가장 과학적인 면모를 갖춘 가설 중의 하나가 ‘납중독설’이다.

납은 다른 금속보다 비교적 녹는점이 낮아 가공이 쉽고, 색상 조성이 잘 된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로마제국은 수도관도 납으로 만들었고,

요리냄비나 컵 등의 식기와 심지어 여자들이 얼굴에 바르는 분도 납이 주성분이었다.

특히 로마 사람들이 즐겼던 포도주는 납중독의 제1원인으로 꼽힌다.

포도주의 풍미를 높이기 위해 섞던 포도시럽의 제조과정을 보면 그 이유를 잘 알 수 있다.

포도시럽은 포도즙을 솥에 넣고 졸여서 만드는데, 그 솥들은 납으로 만든 제품이었다.

뜨거운 포도즙을 휘저을 때 솥 표면의 납이 시럽으로 스며들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여러 경로를 통해 섭취된 납은 인체에 축적되어

불임증을 유발시켰고, 로마 인구가 격감하게 되었다는 것이 납중독설이다.

납중독은 어린이에게 더욱 치명적이어서,

지능지수 및 주의력 저하, 성장 지연, 과민증, 성격 포악 등을 유발할 수 있다.

실제로 발굴된 로마인들의 유해를 분석해본 결과,

정상인보다 80배나 더 많은 납이 검출되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도 납으로 만든 분 때문에
한때 물의를 빚은 적이 있었다.

1927년 3월 2일 조선일보에는 창기가 ‘박가분’을 먹고 자살을 시도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박가분이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상품화된 관허 1호 화장품이다.

국내 최장수 기업인 두산의 전신은 창업자 박두병 씨의 부친인 박승직 씨가

1896년 종로4가 부근에서 개설한 ‘박승직상점’이다.

박승직 씨의 부인인 정정숙 여사는 조선시대 화장품 외판원이던 ‘매분구’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재래식 화장분을 근대적으로 만들어 포장한 ‘박가분’을 1915년에 만들었다.

처음엔 박승직상점의 포목을 팔 때 하나씩 끼어주던 미끼 상품이었는데,

반응이 의외로 좋자 1919년 총독부 특허국에 향장품 제조등록을 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고급 기생들은 서양에서 들어온 ‘양분’이나 일본에서 들어온 ‘왜분’을 주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얼굴에 잘 퍼지고 값도 싼 박가분이 나오자

화류계 여성뿐만 아니라 양가집 규수들도 찾을 만큼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심지어 박가분(朴家粉)과 문자가 거의 비슷한 ‘촌가분(村家粉)’이라는 짝퉁 제품이 등장할 정도였다.

1922년 2월엔 우리나라 화장품으로서는 최초로 신문광고까지 했는데, 그 광고 문구는 다음과 같았다.

‘최고한 역사가 있고 누차 상패 받은 박가분을 항상 바르시면

살빛이 고와지고 모든 풍증과 땀띠와 잡티가 사라지고 윤택해집니다.’

그런데 이 광고 문구와 달리 박가분을 매일 바르는 기생들의 얼굴에 이상이 생기기 시작했다.

피부가 푸르뎅뎅하게 변해 창백한 빛이 되고, 눈에 경련이 일어나는가 하면

구토를 자주하는 증상이 나타난 것이다.

그 원인은 바로 박가분이 납을 주성분으로 하는 연분(鉛粉)이었기 때문이다.

납중독 증상을 호소하는 기생들의 고소가 이어지자

1937년 박승직상점은 박가분의 제조를 중단해 버렸다. 박가분을 먹고 자살을 시도한 한 기생의

사연은 당시 납중독 사건의 일면을 잘 보여준 사건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옛날 일로만 여겼던 납중독의 망령이 요즘도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최근 기술표준원이 시중에서 판매되고 있는 어린이 용품을 조사한 결과,

여자 어린이들이 갖고 노는 액세서리 제품에서 납이 기준치의 평균 28배까지 검출되었다는 것.
예나 지금이나 하필이면 왜 여성들이 주로 사용하는 제품이 납중독에 더욱 취약한 것일까.

- 2008년 09월 12일(금) 이성규기자, ⓒ ScienceTimes

   대표조선시대의 다양한 화장 용구들. 화장품 숟가락, 분첩, 분단지

 

 

 

1920년대에 여성들로부터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화장품, 박가분

 

      

 

 

'뽀뽀파후' 퍼프(PoPo Powder PUFF)

20세기 후반, 퍼프 지름 7㎝ , 종이갑 7.5×7.5×1.3, 서울역사박물관

 

정사각형 모양의 종이갑에 둥근 퍼프가 들어 있다. 상자에 'Made in Korea'라고 쓰여 있고,

옆에 '뽀뽀파후'라고  표기되어 있다.

종이갑은 노란색의 바탕에 장미꽃과 원들이 도안되었고, 상품 식별이 용이하게 구멍이 디자인되었다.

퍼프 뒷면은 손가락을 끼워 사용할 수 있게 주머니식으로 디자인되어 있다.

 

 

'금성파후' 퍼프(KUMSUNG POWDER PUFF)

20세기 후반, 퍼프 지름 7.5㎝, 상자 7.6×8.0㎝, 서울역사박물관

사각형의 중이갑 안에 둥근 퍼프가 들어 있다. 종이갑 위에 'Made in Korea'라고 쓰여 있고

옆에 '금성파후'라는 표기가 있다.

종이갑 윗면에 상품을 식별하기 위한 구멍이 도안되어 있고

장미꽃과 각양각색의 원문양이 디자인되었다.

상표이름(Puff Powder)과 광고문구는 주로 영어로 표기되어 있다.

퍼프는 둥근 모양이며 시접부분이 정교하지는 않다. 손잡이 부분에는 천으로 줄무늬가 도안되어 있다.

 

 

일본産 'Kiss Me' 분(紛)

20세기, 지름 8㎝, 두께 2.1㎝, 서울역사박물관 

 

빨간색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원통형 분통으로 돌려서 닫는 형식을 하고 있다.

윗면은 국화문양이 새겨져 있고, 바닥에는 'Kiss Me' Face Powder 라는 상품면과

제조사(Kiss Me Cosmetics)과 국적(Made in Japan)이 표기되어 있다.

 

 

△ 이명래고약(李明來膏藥) 

종기나 상처에 붙이는 약이다.

이명래고약은 1906년 독실한 가톨릭신자였던 이씨가

충남 아산에 있는 공세리성당에서 만난 프랑스 선교사 드비즈신부에게 고약만드는 법을 배웠다.

드비즈 신부가 라틴어로 된 약용식물학 책을 가져왔는데, 중국을 거쳐 오면서 한의학을 배운 것이었다.

신부의 가르침에 이명래선생의 민간요법이 더해져서 이명래고약이 생겨났다.

 

부스럼이 흔하던 시절, 만병통치약으로 통했던 명약 '이명래고약'은

기름종이에 싸여 독특한 냄새를 풍기는 단단한 고약을 성냥불에 살살 녹여 붙이면

고름은 쏙 빠지고 상처는 아물었다.

성한 살은 다치지 않으면서 굳어진 고름만 골라 뿌리를 뽑는 '발근고(拔根膏)'는

소나무 뿌리를 태워 나오는 기름(송근유, 松根油)에다 약재를 녹여 만드는데,

발근고가 종기를 터뜨리면 고약은 고름을 빨아내게 되어 있었다.

고약은 잘 발라지면서도 끈적끈적하게 눌러붙지 않아야하고,

물에 떨어뜨렸을 때 구슬처럼 굳어지는(適水成珠) 정도가 되어야만 약을 태우고 녹여

다시 굳히는 온도가 제일 관건이었다고 한다.

 

이명래고약의 계보는 이명래씨가 사망한 뒤 두 갈래로 갈라졌다.

이명래씨의 막내딸 이용재(헌법학자 유진오 박사의 아내)가 1956년에 세운 명래제약에서는

대량생산한 이명래고약으로 한때 제약업계를 주름잡았으나 2002년 끝내 도산하고

더 이상 약국에서 이명래고약을 살 수 없게 되었다.

명래제약이 제약허가 신고를 낼 때 오행초와 가래나무 등 약의 성분이 일부 공개됐지만,

다양한 약재를 비롯한 제조법은 아직도 베일에 가려져 있다.

반면 명래한의원은 이씨의 둘째사위 이광진씨가 뒤를 이었고,

다시 그의 사위 임재형 원장이 전통방식 그대로 3대째 계승하고 있다.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 종근당 건물 뒷편 골목길에 '명래한의원, 이명래 고약집' 간판. 

사진출처 :  http://blog.naver.com/myemotion/70022556540

 

명래한의원 현관 문을 열고 들어서면

‘본원이 만든 정통 이명래고약은 약국이나 다른 곳에서는 전혀 판매치 않습니다’라는 글이 눈에 띈다.

임 원장은 지난해 미국의 유명한 의학연구소의 한 연구원으로부터

현대의학과 접목해 치료제를 개발하자는 제안을 받았다. 국내 한의사들도 더러 찾아오는 경우가 있다.

  

이명래고약 제작소는 경기도 용인에 있는데, 온도 조절이 중요해

보통 180∼250도를 유지해야 차진 고약이 나온다.

“이명래고약은 여러 종류가 있어 종기뿐 아니라 화상, 피부병, 관절염, 유선염 등 질병에 따라

다르게 사용합니다. 또 고약은 봄·여름·가을·겨울에 따라 각각 약성이 다르게 만들어야 합니다.

몇몇 한의사들이 시도를 많이 하는데, 이명래고약은 아직 못 만들어요.” 임 원장의 말이다.

 

임 원장은 “정말로 뜻이 있는 젊은 사람에게 전수하고 싶다.

돈 많이 벌 욕심으로 뛰어든다면 극구 사양한다”고 못을 박는다.

노하우가 공개되고 전문 의약품이 된다면 엉터리 고약이 판을 칠 것이며,

그 순간 이명래고약의 명성 또한 역사 속으로 영원히 자취를 감춰질 것을 두려워하는 기색이다. 

35년간 이명래고약을 만들어 온 임 원장이 요구하는 것은 무엇보다 ‘장인정신’이다.

임 원장은 가업을 소중히 여기는 일본을 예로 들며

“ ‘해볼까’보다 ‘해야 한다’는 의지가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임 원장은 특히 “(고약 만드는데) 돈버는데 익숙한 손(사람)은 절대 안된다”고 손사래 쳤다.

임 원장은 ‘光武 十年 創立’이라는 대한제국 연호가 적힌 약봉투에서 고약 한 놈을 꺼냈다.

냄새도 색깔도 옛날 모습 그대로다. 그 때 추억의 라디오 광고 멘트를 그대로 읊고 있는 듯 했다.

‘잘 낫지 않는 종기엔 이명래, 이명래고약.’ (2006년 11월, 경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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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처음 등장했다가 2001년 생산이 중지돼 역사 속으로 사라졌던

추억의 명약 '이명래 고약'이 부활한다.

중소 제약사 지피제약은 부도난 명래제약소를 인수해

고약 생산에 필요한 자동화 설비 라인을 최근 구축, 이르면 2007년 4월께

밴드 형태로 리뉴얼한 이명래 고약을 선보일 예정이라고 밝혔다.

(2007, 3. 5. 한국경제신문 기사에서)

 

 

△ 고무신

남성용 고무신은 타이어를 재활용하여 만들었다.

유선형으로 검은색 장미무늬가 있으며 바닥에 '진짜 타이야표' 라고 인쇄되어 있다.    

 

남성용 고무신(진짜 타이야표) / 여자용 고무신(국제상사) /  소아용 고무신(대덕고무)

 

 

 

△ 대륙고무신 포스터

 

 

 

 

대한전선 자바라텔레비전(Taihan electric wire folding Television)

 

대한전선 주식회사에서 제조한 흑백텔레비전 수상기이다.

텔레비전 장은 밤색의 나무로 짜여 있고, 수상기를 덮는 장문은 미닫이식이다.

텔레비전의 품명은 '대한흑백텔레비전' 수상기이고, IC 트랜지스터식이다.

정격전압은 AC100V 60, 안테나 300Ω, 정격소비전력은 52W 이다.

뒷면의 판은 구멍이 뚫려 있고 스피커가 양쪽에 장착되어 있다.

대한전선 자바라 TV는 한 세트로 판매된 것이 아니라

대한전선 TV를 구매하여 자바라 TV장을 사다 집어넣은 형식이다.

 

 

 

 

 

 

 

 

 

 

 

 

 

 

 

 

 

 - Naori Uchida - Beautiful for HARP / Amazing Gra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