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듬어보고(전시)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이 아름답다 - (3) 회화

Gijuzzang Dream 2008. 4. 30. 16:07

 

 

 

 

 

 

 사직노송도(社稷老松圖)

  

선비의 절개와 기개를 상징하는 소나무는

세한도(歲寒圖)에서도 나타나듯이 예로부터 그 상징성으로 인해

선비그림에서 적지 않게 애호를 받아 온 주제였다.

그러나 이처럼 소나무만을 단일 주제로 아무 배경도 없이 크게 부각시킨 사례는 드물다 할 것인데,

정선은 이것을 과감하게 다루어 성공적으로 마무리지었다.

 

소나무만을 압도적으로 그려낸 명작으로는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1759)의 <사직노송도(社稷老松圖)>를 들 수 있다.

 

 

20세기초까지 살아있던 서울 사직단의 노송을 그린 겸재의 그림은 두 폭이 있는데

고려대 박물관과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국립중앙박물관본은 부채그림이다.

 

정선의 과감함이 돋보이는 사직단(社稷檀)의 늙은 소나무는

정밀묘사법으로 표현되어 그의 산수화에 보이는 지그재그식의 속필로 처리하여

활달한 나무의 필치와 대조를 이루고 있다.

뒤틀린 가지들을 좌우로 균형을 잡아 화면에 배치하고,

늙은 가지의 처짐을 막아주는 지지대를 화면 우측에 몰리게 하여

무게중심을 화면 우측에 편중되게 잡았다.

 

화면 가득 구불구불 용트림 하며 올라간 노송을 세 줄기로 포치하였고

짙고 옅은 녹색의 솔잎들을 세세히 표현하였다.

늘어진 가지를 받쳐주는 받침대만으로

그 깊이감이나 높이 등 공간감을 제시할 뿐

일체의 배경 없이 반송(盤松)의 기고(奇古)한 모습을 요점적으로 부각시켰다.

 

줄기의 구불거림이나 솔잎 등은 현실감의 효과가 충분히 드러나도록 묘사하였다.

그러나 줄기의 흐르는 선은 ‘노(老)’자를 연상되도록 은밀히 구성하였으며

다양하게 뻗은 줄기의 포치나 무성한 잔가지들은

관자(觀者)를 위해 의도적으로 노출하여 부각시켰다.

이처럼 그림의 시점을 중요하게 구성할 수 있었던 것은

정선이란 화가 자신의 독창성이 맘껏 발휘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생동하는 노송의 모습, 잘 짜여진 구도,

화면 왼쪽 위쪽에 '사직송(社稷松)'이라고 정성 들여 쓴 화제(畵題)와

그 좌측에 '원백(元伯)'이라는 그의 자가 있고, 그 아래에 음각방인이 있다.

 

경종의 뒤를 이어 영조가 즉위(1724)하였는데,

1728년(영조 4) 소론파였던 이인좌가 경종이 독살되었다고 믿고

왕이 된 영조를 인정하지 않고 청주에서 반란을 일으켜 한양을 진격했으나

이인좌는 난을 일으킨 지 10일만에 생포되어 실패로 되돌아갔다.

 

영조를 즉위시켰던 노론파에 가까웠던 정선은

이인좌의 난이 평정되자 이때의 기쁨을 <사직송>이라는 작품으로 표현하였다.

이 작품은 역시 화가이자 감식안이 높기로 이름났던 김광수에게 그려준 것인데

조선이 더욱 단단한 반석 위에 올라선 것을 기념하기 위한 그림이다.

 

화면을 가득 채운 소나무는 뿌리에서부터 여러 차례 용트림을 하며 계속 뻗어나가고,

곳곳에 나무를 받쳐주는 받침대를 설치해 놓은 것으로 소나무의 수명은 오래되어

나무의 왼쪽부분은 부러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부러진 나무가지 위에서 새싹이 돋아나고 있다.

한두 번의 비바람이나 폭풍우 때문에 죽어버리는 나무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정선은 이 그림을 통해 조선왕조 또한 여러 차례 어려움이 있겠지만

쉽게 무너져버릴 왕조가 아니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조선왕조가 한양에 도읍할 때, 사직단을 설치하고 그 주변에 소나무를 심었는데

따라서 사직단의 소나무는

바로 조선왕조 300년의 세월을 상징하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겸재 정선, <사직노송도>/ 종이에 먹과 엷은 색, 61.8x112.2cm/ 고려대학교박물관

  

 

 

 

 백운동(白雲洞)

 

 영조 26년(1750)경, 비단에 엷게 채색, 29.0×33.0㎝,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백운동은 인왕산 자락이 북악산 자락과 마주치는 인왕산 동편 북쪽 끝자락의 지명이다.

종로구 청운동 8 일대로 자하문터널과 이어지는 자하문길 서쪽 골짜기에 해당한다.

    

청운동이란 이름은 1914년 일제가 동명을 개칭할 때

아래 동네인 청풍계(靑楓溪)와 백운동을 합쳐 지은 것이다.

따라서 청운동(淸雲洞)은 마땅히 푸를 청(靑)자를 쓰는 청운동(靑雲洞)이 됐어야 하는데

당시 동 서기가 청운동(淸雲洞)으로 잘못 짓고 말았다.

 

이곳은 인왕산의 세 봉우리 중 낙월봉(落月峯) 줄기가 흘러내려 북악산 자락과 마주치는 곳으로

계곡이 깊고 개울물이 풍부하며 바위 절벽이 아름다워

일찍부터 도성 안에서 가장 빼어난 명승지로 손꼽혔다.

 

세조의 왕비인 정희왕후 윤씨(1418∼1483)의 형부로 부귀를 누렸던

지중추부사(정2품) 이념의(李念義, 1409∼1492)가 이곳에 대저택을 짓고 살았다.

얼마나 굉장한 저택이었던지 ‘동국여지승람’에 수록될 정도였다.

 

이 집의 풍치에 대해 사숙재 강희맹(私淑齋 姜希孟, 1424∼1483)은 이런 시를 남겼다.

'백운동 안은 백운에 가리고, 백운동 밖은 홍진(紅塵 · 붉은 티끌, 세속의 기운)이 깊다.

외길을 굽이돌아 구름 속 드니, 홀연 놀랍게도 성시(城市)는 숲 속에 묻힌다.

시냇물 콸콸 졸졸 제 소리 간 곳 없고, 장송(長松)은 서로 가려 바람에 슬피 운다.

안개덩굴 사이사이 등성이 드러나나, 화당(華堂·화려한 집)은 조용하여 언제나 그윽하다….’

 

명승지의 대저택은 권세와 부귀의 흐름에 따라 주인이 자주 바뀔 수밖에 없다.

이념의가 죽고 나서 불과 30년 남짓 지난 중종 25년(1530)에 발간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이념의가 예전에 살던 곳이다’라고 표기하고 있다.

 

이 집은 조선이 망할 때까지도 그대로 남아있었던 모양이다.

순조 때 지어진 것으로 알려진 ‘한경지략’에도,

고종 때 지어졌을 ‘동국여지비고’에도 그 내용이 실려있다.

당연히 겸재 당시에도 이념의(李念義)의 옛 집이 그대로 있었을 터이니

여기 보이는 골짜기 안의 큰 저택이 그 집인가 보다.

 

엊그제 이곳을 찾아가 보니 비록 폐가로 변한 청운아파트의 흉물스러운 모습이

자연경관을 엉망으로 만들어놓고 있기는 하나 깊은 계곡에는 아직도 물줄기가 살아있고,

암벽에 뿌리박은 적송은 이 그림에서 볼 수 있는 소나무 형태 그대로였다.

-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 <겸재 정선이 본 한양진경> 연재 중에서 35. 백운동

- 동아, 2002-12-13   

 

 영조 31년(1755)경, 종이에 엷은 채색, 29.5×33.0㎝, <장동팔경첩>, 국립중앙박물관

 

백운동(白雲洞)은

인왕산 자락이 북악산 자락과 마주치는 인왕산 동편 북쪽 끝자락에 해당하는 곳의 지명이다.

지금 청운아파트가 들어서 있는 종로구 청운동 8 일대로

자하문 터널과 이어지는 자하문길 서쪽 골짜기이다.

 

이곳은  인왕산의 세 봉우리 중 중앙에 해당하는 낙월봉(落月峯) 줄기가 흘러내려

북악산 자락과 마주치는 곳이어서 계곡이 깊고 개울물이 풍부하며 바위 절벽이 아름다워

일찍부터 도성에서 가장 빼어난 명승지로 꼽혔다. 

그래서 세조의 왕비인 정희왕후 윤씨(1418-1483)의 형부로 84세까지 살면서 부귀를 누렸던

지중추부사(정2품) 이념의(李念義, 1409-1492)가 이곳에 대저택을 짓고 호사를 누리며 살았다.

 

이 집의 풍치에 대해서 사숙재 강희맹(私淑齋 姜希孟, 1424-1483)의 시를 보면,

 

"백운동 안은 백운에 가리고 백운동 밖은 홍진(紅塵)이 깊다.

외길을 구비 돌아 구름속 드니, 홀연 놀랍게도 성시(城市)는 산림(山林)에 묻힌다.

시냇물 콸콸 졸졸 제소리 간 곳 없고, 장송(長松)은 서로 가려 바람에 슬피 운다.

안개 덩굴 사이사이 등성이 드러나나. 화당(華堂)은 조용하여 언제나 그윽하다.

물어보자 그 누구가 주인옹(主人翁)인가. 당시의 권세 부귀 장씨나 김씨겠지.

(중략)

봄이 와서 바위골에 산꽃 피어나면, 지저귀는 그윽한 산새 소리 허공에 되울리고,

황매철 장마비가 세상을 가리울 때, 동문(洞門)에 이끼 돋아 푸르름 깊어진다.

가을빛 씻은 듯이 숲 언덕 맑아지면, 달 밝은 만호 장안 다듬이소리 해맑고,

눈 ?여 가지에 눈꽃 피고 인적이 끊어지면, 등걸 땐 방안에 명주 이불 따사롭다.

(중략)

제공(諸公)의 높은 기개 구름도 무찌를 듯, 해마다 선비들이 서로 와 찾는구나.

풍월(風月)은 태평하고 동부(洞府)는 널찍하니, 대경(對境)과 사람 만남 남들이 부러워한다.

 

내 글이 거칠어서 가락을 못 이루되, 또한 신선의 노래 속에 날아들었네.

흘러 전해져서 문득 한양요(漢陽謠) 되면, 거의 고인(故人)과 옷깃을 같이 하겠지."

                                                          [<동국여지승람> 권3, 한성, 산천, 백운동]

 

이 집은 워낙 유명해서 조선이 망할 때까지도 그대로 남아 있었던 모양이니,

순조 때 유본예가 지은 것으로 알려진 <한경지략> 권2, 고적조에도 그 집이 그대로 있다 했고,

고종 때 지었을 <동국여지비고> 권2, 제택조에도 그 내용이 그대로 실려 있다.

 

주변 모든 산이 암산일 터인데 겸재 특유의 부벽찰법을 쓰지 않고

다만 담묵, 담청의 훈염(暈染)과 태점(苔點) 및 부드러운 피마준 만으로

부드럽게 산을 처리하고 있다. 장쾌한 맛은 없으나 쇄락한 분위기는 더욱 살아나는 듯하다.

80대 초반 겸재 만년기의 노숙함을 보여주는 특징 중 한 가지다.

 

조선 초기에는 이 백운동을 개성의 자하동(紫霞洞)에 비겼던 모양으로,

산 성문 아랫동네라는 의미인 '잣골' '잣동'의 이름이 이 시기부터 있어서

백운동 일대를 '자하동'으로 불렀던 모양인데,

겸재 시대에 이르면 백운동과 자하동이 구분되었던 듯 두 곳을 따로 그리고 있다.

그렇다면 잣문(山城門)인 창의문 바로 아랫동네를 둘로 나눠

윗동네를 '자하동'이라 했고, 그 아랫동네를 '백운동'이라 했던 모양이다.

 

사천 이병연의 제자로 <정겸재선수직동추서(鄭謙齋敾壽職同樞序)>를 지은

창암 박사해가 <백운동>이란 시제 아래 '도화동 서쪽에 있다(在桃花同西)'는 주(註)를 달았으니,

백운동은 인왕산쪽 산기슭에 있던 동네라고 생각된다.

도화동은 북악산 서쪽 기슭에 있던 동네이기 때문이다.

 

만장봉(萬丈峯)이 집 앞에 우뚝하니, 빈 수풀에 사립문 내지 않았네.

꽃은 떠서 물에 흘러가고, 누각은 흰 구름과 함께 난다.

봄 늦어 새들은 서로 지저귀는데, 날 저무니 사람은 홀로 돌아간다.

시끄럽게 앞에 가는 사람아, 어찌 앉아서 권세를 잊으려 하지 않는가.

                         [<蒼巖集> 권6, 白雲洞在桃花同西, 창암 박사해(1711-1778)]

 

 

 

  

 

 청풍계도(淸風溪圖)

 

정선, 18세기, 견본담채, 36×96.5㎝, 고려대박물관

 

겸재 정선은 한양과 금강산을 주제로 많은 진경산수화를 남겼는데,

한양을 그린 그림은 다시 청계천의 상류부근인 옥류동, 백운동 일대를 그린 것과

한강의 풍경을 표현한 것으로 분류된다.

 

청풍계는 인왕산 동쪽기슭의 북쪽에 해당하는,

지금의 종로구 청운동 52번지 일대에 해당하는 인왕산 아래 계곡으로

예로부터 청풍계는 수석이 맑고  뛰어나 저명한 인사들의 별장과 제택(諸宅)의 터로 선호되었다.

지금 이 터는 청운초등학교와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댁 등

몇몇 부호들의 私家로 나누어져 있다.

청운동(淸雲洞)이라는 동네이름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청풍계와 백운동을 합쳐 지은 것이다. 

 

원래는 '푸른 단풍나무가 많은 계곡'의 뜻인 ‘청풍계(靑楓溪)’라 불렀는데,

병자호란때 강화도를 지키다 순국한 우의정 선원 김상용(仙源 金尙容, 1561-1637)이

별장으로 꾸미면서부터 '맑은 바람이 부는 계곡'이라는 의미인 ‘청풍계(淸風溪)’로 바뀌었다 한다.

 

선원 김상용과 그 아우 청음 김상헌(淸陰 金尙憲, 1570-1652)형제가 율곡 학통을 이어

 

이곳 인왕산과 백악 아래에 뿌리를 내린 결과,

 

손자 김수항과 그들의 증손자 시대에 이르러서는

 

삼연 김창흡(三淵 金昌翕, 1653-1722) 등 6형제들이 살았고,

 

그들의 문하에서 진경문화의 주역인

 

겸재 정선(謙齋 鄭敾, 1676-1759)과 사천 이병연(槎川 李秉淵, 1671-1751) 등이 출현하여

 

진경문화를 절정으로 이끌어간다.

 

겸재 정선이 진경문화의 산실이라 할 수 있는 이 청풍계를 많이 그렸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정선이 청풍계를 표현한 그림은 10여 폭 이상이 남아 있다.

그런데 청풍계도 중에는 간송미술관 소장품의 청풍계가 알려져 있는데,

제일 크고 그것은 1739(영조 15)년 작으로 그의 나이 64세 때의 것이다.

‘己未年 봄에 그렸다’는 겸재 자필이 있어 짐작할 수 있다.

 

고려대 소장품은 그 다음으로 크고, 구도와 화법은 비슷하지만

1730년(영조 6) 겸재 55세에 그려진 작품이다.

 

이 그림은 바위산과 소나무에 농묵을 쓰고 붓을 대담하게 쓸어내려

바위산을 비교적 선명한 채색을 사용하여 신록이 한창인 청풍계의 풍경을 묘사하였다.

화면 중간부터 인왕산에 내려오는 계곡의 물길이

무성한 나무 사이로 보이며 화면 하단까지 이어진다.

 

이 고려대 소장품을 간송미술관 소장품과 같은 시기에 그린 것으로 전제한다면,

원숙한 그의 필치가 한껏 발휘된 작품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부벽준(斧劈준 : 산수화에서 도끼로 찍은 듯한 자국을 남겨 표현하는 동양화 준법)'으로 처리된

화강암질의 검은 너럭바위와 지그재그식의 속필로 마무리한 ‘수지법(樹枝法)’ 등에서

그의 개성미가 돋보인다. 거기에 또한 햇빛을 받아 환하게 된 바위들이

검은 바위와 명암의 작품의 한 특징으로 내세워지기도 한다 : (최완수 설명)

 

청록색을 잘 썼던 그는 담청색을 먼저 화면 전체에 칠하고,

수목(樹木)과 산곡(山谷) 및 절벽 등은 농청색(濃靑色)을 써서

액센트를 준 그림 가운데에서도 대표적인 그림이 청풍계도이다.

화면을 가득 채운 구도, 거칠면서도 활달한 필법, 

우뚝우뚝 서 있는 전나무와 소나무의 모습 등이 시원스럽다.

송림(松林)은 더욱 짙푸르고 수양버들은 더욱 곱게 늘어져 있다.

또 검푸른 먹색의 하얀 바탕에 듬성듬성 찍은 미점(米點)은

인왕산 기슭과 강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이를 가리켜 겸재가 연구한 주역(周易)의 음양조화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간송미술관본은 봄 경치인데, 고려대본은 여름 경치인 듯하다.

이 그림을 그린 연대는 적혀 있지 않고

겸재(謙齋)의 관서와 겸재의 음각방인과 '원백(元伯)'의 양각방인 등이 화면 우상부에 있다.

 

 

 

▲ 청풍계

 

지금 종로구 청운동은 옛날의 청풍동과 백운동을 합한 곳이다.

도성의 북쪽 인왕산, 백악 아래에 위치한 이 청풍동, 백운동 일대는

깊고 아득한 계곡에 맑은 수석을 곁들이고 주위에는 수림과 화초도 많아,

오랜 옛날부터 문인과 묵객들이 거닐면서 시를 읊조리던 곳이었다.

청풍계(淸風溪), 세심대(洗心臺), 유란동(幽蘭洞), 도화동(桃花洞), 대은암(大隱岩),

만리뢰(萬里瀨) 등이 모두 이 부근에 있는 명소이다.

 

그중에도 지금 청운초등학교 뒷쪽 일대는

임진왜란 후에 아우 청음(淸陰) 김상헌과 함께

청절대신(淸節大臣)으로 유명한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의 복거지(卜居地)가 되기도 하였던

청풍계의 소재지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선원연보(仙源年譜)』에 의하면,

이곳 계곡에는 맑고 깨끗한 수석만이 아니라

주위의 풍수의 경치 또한 좋았던 것을 알 수 있으며

'청풍(靑楓)'이 '청풍(淸風)'으로 이름이 바꾸어진 데에는

선원은 47세 되는 선조 40년(1607)에 수석 청절한 이곳 청풍계로 들어와서 복거하면서

청풍각(淸風閣), 와유암(臥遊菴), 태고정(太古亭) 등을 짓고

또 큰 바위에 주자(朱子) 글씨를 모아

'대명일월(大明日月) 백세청풍(百世淸風)'의 큰 각자를 한 데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여진다.

 

부근의 지대(池臺), 암학(岩壑)도 모두 이름을 지어 불렀으며,

경사스러운 날이나 축복받을 날이면 친척과 친우들과 함께 자연의 풍경을 관람하며

친지간의 우의를 돈독히 하였다고 하였다.

 

 

「청풍계 위의 태고정은 우리 형님 사시던 곳

임학(林壑) 승경 한폭의 그림인데, 높은 암벽은 창옥병(蒼玉屛)이 둘러있다네.」

[註:『청음선생집』 권11 설교전집]

 

 

선원(仙源)의 순절 후 70여 년을 지나 숙종 34년(1708)에는,

선원의 늠연한 절의를 추모하는 사우를 이 청풍계에 지어 신위를 봉안하고

이름을 늠연사(凜然祠)라 하여

이곳을 찾는 후인들로, 승지풍경과 함께 선현의 높은 절의를 추모하게도 하였다.

 

또 이곳에서 멀지 않은 북악 서쪽 기슭, 청음 김상헌(金尙憲)의 복거지 도화동(桃花洞)은

복사꽃이 많아 봄철 상춘객들이 즐겨 찾는 명소가 되었는데

정조조의 문인 냉재(冷齋) 유득공(柳得恭)은

어느 봄날 이 도화동을 찾아 도화동 춘경(春景)을 이렇게 읊었다.

 

 

「비 바람 지나간 시냇가로 봄을 찾아 도화동 들어가네.

도화동의 복사꽃 나무 1천그루는 되는 것이

사람은 나비 따라 가고 나비는 사람 따라 나누나.」

[註 :『한경지략(漢京識略)』권2 명승]

 

 

도화동과 함께 북악산록에는 또 봄철 꽃 구경의 명소로 유명하던 세심대가 있어

영성군(靈城君) 박문수(朴文秀)의 싯귀 그대로

'희고 붉은 자두꽃 복사꽃 만가지에 가득 피었네(李白挑紅萬樹開)'의 춘경으로 유명하였다.

[註 :『한경지략(漢京識略)』 권2 명승,

    :『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考)』 권2 명승, 열양세시기 3월]

 

 

 

▲ 일제하의 청풍계(淸風溪)

 

 

북악과 인왕산 사이 자하문(장의문, 창의문) 고개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면

청운국민학교, 청운양로원 등이 세워져 있는 청운동이 된다.

청운(淸雲)」이란 동명은 종전의 청풍, 백운의 두 동을 합할 때에

청풍의 청(淸)자와 백운의 운(雲)자를 합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또 청운동 일대는 그 동명이 말하여 주듯이

청풍, 백운이 항상 함께 하는 서울에서 자연 경치 좋기로 알려진 곳이므로

옛날부터 많은 문인 명사들이 이 곳을 찾아 은거소창하던 곳이다.

 

그 중에서도 청풍계가 있는 부근은

일찍이 병자호란 때 충절의 문신 선원 김상용(金尙容)이

청풍각, 와유암, 태고정 등을 짓고 거주하던 곳으로

아우인 청음 김상헌(金尙憲)은 물론 많은 명사들이 자주 찾아와 유명하였다.

 

또 선원이 강화에서 순절한 후에도 이곳 청풍계의 구거만은 그 후손들에 의하여 잘 보존되었으며, 조선 후기로 와서 그 집안인 안동 김씨가 왕실과 인척 관계를 맺으면서부터는

임금이 때때로 태고정 등 선대귀적이 있는 이곳을 찾음으로서

청풍계의 이름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런 이야기도 전해진다.

 

“순조가 육상궁에 거동하였다가 이곳 청풍계상 태고정에 임행하였는데

주인집의 어린아이

병조(金炳操)가 어전에 엎드려 뵈었다.

순조가 기특하게 생각하여 글을 지어보았느냐고 묻자,

몇번 지어 보았다고 대답하니 지어보라고 하였다.

이 때 어린 병조는 주저하지 않고 곧장

'임금님 태고정에 나옵시니 소신이 황공해 엎드립니다.'라 써서 올리고

다시 낭낭한 음성으로 읽었다. 왕이 신동이라 칭찬하였는데

마침 배행하였던 대신 유석기가 '과연 인요물(人妖物)이올시다.' 하였다.

 

그것은 엉겁결에 나온 실언이었는데

이 때 부복해 있던 병조는 왕께

'폐하께옵서 어찌하여 조고(趙高)를 데리고 다니십니까?'고 아뢰었다.

유(兪)대신이 어린아이가 너무 신기한데 대하여 「인요물」이라고 잘못 말한데 대하여

어린 병조는 그가 수염이 없음을 보고

옛날 중국 진(秦)나라의 환자(宦者) 조고에 비유하여 욕을 뵈인 것이다.

그러나 재주가 많아서 명이 짧았던지 신동 병조는 요절하여

이 청풍계의 좋은 풍경을 더욱 빛내지 못하였다고 한다.

[註 : 문일평『사외이문비화(史外異聞秘話)』1946 pp.166-167.

      :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편『동명연혁고』1, 1967 pp.1-3 ]

 

 

이렇게 안동 김씨 세전지지이며

또 문인과 명사들이 자주 찾아 소창하던 청풍계 일대도

일제의 한국강점과 함께 그 면모가 크게 변하였다.

일본의 삼정회사가 이 곳을 차지하고 마음대로 자연과 고적을 훼손하였다.

 

시내(川)를 메우고 바위를 깨뜨려 새로 집을 지으니

단 한 채 남은 태고정 옛 건물도 일시는 인부들의 숙소로 사용되는 형편이었다.

「대명일월(大明日月)」「백세청풍(百世淸風)」이 큰 글자를 새겼던 암석마저

한 쪽만이 겨우 남아 옛날의 자취를 짐작하게 되니 큰 수난이 아닐 수 없었다.

 

다만 1935년에 유지 이윤영(李潤榮)이 태고정터 뒤로 청운양로원을 짓고

부근의 자연풍경을 보호하기에 힘쓴 결과로

양로원 뒤 산속간의 자연풍경이 일부나마 보존될 수 있었다.

[註 : 문일평『사외이문비화』1946 p.167.

      : 김영상 『서울명소고적』 1958 p.83.

      :「동리산책」조선일보 1972년 3월 22일자]

 

 

 

 

겸재 정선의 <청풍계(淸風溪)> 그림들

 

(1) 정선 64세, 영조 15년(1739), 비단에 채색, 58.8×133.0㎝, 간송미술관

"기미년 봄에 그렸다(己未春寫)"는 관서(款書)가 있으므로

겸재가 64세 되던 해인 영조 15년(1739)에 그린 것이 분명하다.

이때 겸재는 청하현감을 지내면서(1733-35) 관동팔경 등 동해안 명승지를 사생하는 것을 비롯해

경상도 명승지를 두루 섭렵하며 <영남첩>을 완성했다.

이후 모친 밀양박씨(1644-1735)가 92세로 돌아가시면서 3년상을 치르게 된다.

탈상 직후에 남한강 상류의 청풍, 단양, 영춘, 영월 등의 산수를 사생하고

<사군첩(四郡帖)>을 완성하고, 다음 그려낸 것이 <청풍계(淸風溪)>이다.

 

한편, 선원 김상용의 방손(傍孫)인 동야 김양근(東野 金養根, 1734-1799)이 영조 42년(1766)에

<풍계집승기(楓溪集勝記)>라는 글을 지어 당시 청풍계의 규모와 경치를 자세하게 기록해 놓았다.

간송미술관 소장의 <청풍계>는 겸재 정선이 1739년에 그린 것,

김양근이 <풍계집승기>를 짓기 27년 전에 그린 것이다.

이 원문을 참조, 비교하여 '청풍계'의 그림 내용을 살펴보도록 한다.

 

대문 밖 버드나무와 느티나무가 서 있는 곳에 나귀가 매어져 있는 것을 보니,

복건을 쓴 선비는 방금 전에 나귀에서 내린 듯.

토담으로 쌓은 담장을 터서 낸 협문을 들어서면

마당 한 가운데에 수십 길이나 되는 전나무가 서 있고, 그 왼쪽에는 사각형 연못이 먼저 나타난다.

 

이 청풍계의 그림에는 사각형으로 된 연못이 세 군데(三塘) 있음을 볼 수 있다.

모두 돌을 다듬어서 네모나게 쌓았는데

인왕산 계곡물을 정자 북쪽의 구멍으로 끌어들여 바위 바닥 위로 흘러들게 만들었다.

맨 위의 첫 번째 연못 '조심지(照心池)=마음이 비치는 연못' 에 물이 가득 차면

그 물은 두 번째 연못 '함벽지(涵碧池)=푸른 옥돌이 담겨있는 것 같은 연못'으로 흘러들어가고,

그리고 그곳에 물이 넘쳐흐르면

다시 세 번째 연못 '척금지(滌衿池)=옷깃을 헹구는 연못' 으로 흘러들어가도록 되어 있다.

 

연못에는 누각이 있기 마련인데,

그림 맨 아래의 '척금지'를 지나면

'함벽지' 오른쪽에는 '청풍지각(靑楓池閣)' 이라는 누각이 있다.

4간의 마루와 2간의 방이 있고, 방 앞에는 또 반 간 툇마루로 되었으며,

이 청풍지각의 글씨는 한석봉(1543-1605)이 썼으며,

선조어필의 '청풍계(淸風溪)'라는 글씨가 붉은 깁으로 둘러 들보 위에 걸려 있었다고 한다.

 

이 청풍지각의 동쪽이 '소오헌(嘯傲軒)'이 되는데

도연명의 시 '동쪽 처마 밑에서 휘파람 불어대니, 문득 다시금 이 삶을 얻은 듯하다'는 뜻이다.

(嘯傲東軒下, 聊復得此生)

 

소오헌의 왼쪽방은 온돌인데 방안의 편액은 '와유암(臥遊菴)' 으로 하였다.

'명산을 누워서 유람한다(臥遊名山)'의 뜻으로 산속 경치를 베개 베고 다 바라볼 수 있다 하였다.

 

또 남쪽 창문 문미(門梶) 위에는 소현세자의 시가 걸려 있었다고 한다.

    "창문을 물 떨어지는 쪽에 내고 흐르는 물 소리 듣는데,

     길손은 외로운 봉우리에 이르러 흰 구름을 쓴다."

     (窓臨絶磵聞流水, 客到孤峯掃白雲)

 

서쪽 창문 밖의 단상(壇上)에는 두 그루 묵은 소나무가 있어 서늘한 그늘을 가득 드리우는데

특히 달밤에 좋아 '송월단(松月壇)' 이라고 부른다.

단(壇) 북쪽은 석벽이 그림병풍 같고 세 그루 소나무 있는 형상이 누워 덮은 듯하여

'창옥병(蒼玉屛)' 이라 하였다. 또한 '화병암(畵屛岩)' 이라고도 한다.

 

함벽지 왼쪽 평평하고 반듯하고 표면은 두께가 서로 비슷하고

사방 넓이는 흡사 자리 몇 잎을 펴놓은 듯 큼직한 바위는

앉아서 가야금을 탈 수 있다 하여 '탄금석(彈琴石)' 이라 했는데,

충주 탄금대(彈琴臺)로부터 조선(潮船)을 따라 온 것이라서 그렇게 이름지었다고 한다.

 

맨 위의 '조심지' 왼쪽에도 '태고정(太古亭)' 이라는 정자가 있다.

수십명이 앉을 수 있을 만큼 큰 정자였다는 태고정은

오른쪽으로 청계(淸溪)를 끼고, 왼쪽으로는 삼각산을 끌어들이기 때문에

산의 고요함이 태고와 같다(山靜似太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회심대(會心臺)' 는 태고정 서쪽에 있으며 무릇 3층인데,

'마음에 맞는 곳이 꼭 멀리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會心處, 不必在遠者也)'라는 뜻이다.

 

회심대 왼쪽 돌계단 뒤에, 태고정 뒤로 돌 석축을 쌓아 지은 건물은 '늠연사(凜然祠)'

김상용의 영정을 봉안한 사당이다.

사당 앞 바위 위에 '대명일월(大明日月)' 이라는 글자를 새긴 것은 우암 송시열이다.

 

그 늠연사 뒤로, 곧 회심대 위에 있는 '천유대(天遊臺)' 는 푸른 석벽이 우뚝 솟아

저절로 대(臺)를 이루었으며, 돌벽 위로 소나무가 누워덮은 듯 자라고 있는 것도 묘사하였는데,

일명 '빙허대(憑虛臺)' 라고도 하니 근처의 빼어난 경치를 모두 바라볼 수 있다.

석벽 위에 주자(朱子)의 '백세청풍(百世淸風)' 의 네 글자가 새겨져 있으므로

또한 '청풍대(淸風臺)' 라고도 한다.

바위절벽인 청풍대는 1960년대까지만 해도 이 모양대로 남아 있었으나

지금은 어느 사가(私家)의 뜰 안으로 숨었는지 아니면 파괴되어 사라졌는지

아무리 찾아도 흔적조차 가늠할 길 없다.

 

정선은 이 그림에서 바라보는 시각이 다 제각각인, 세 군데에서 바라보며 그린 그림을 조합한

아주 특이한 표현법을 사용하였다.

입구에서 함벽지까지 - 한 곳에서 바라보고 그렸다면,

태고정과 청풍계 - 다른 시점으로 그렸으며,

안개로 쌓인 맨 윗부분 - 또 다른 시점에서 바라보고 그렸다.

 

실경을 그리되 실경에 얽매이지 않는 정선 그림은

단순히 실경산수라 부르지 않고 진경산수라 부르는 것도 바로 이런 특징 때문이다.

자신이 경치를 보고 느낀 감정을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해

필요하다면 생략과 과장, 때로는 왜곡과 변형까지도 마다하지 않은

겸재 정선의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나 있는 작품 가운데 하나가 곧 <청풍계>이다.

 

 

(2) 정선 55세, 영조 6년(1730), 종이에 채색, 견본담채, 36×96.2㎝, 고려대박물관

청풍계는 인왕산 동쪽 기슭의 북쪽에 해당하는 종로구 청운동 52번지 일대 골짜기를 일컫는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항복하게 되자 강화 남문 문루위에 올라가 스스로 자결한 충신이며

뛰어난 서예가 선원 김상용(1561-1637)이 이곳을 별장으로 꾸민 것은 선조 41년(1608)이다.

 

이 터는 원래 김상용의 고조부인 사헌부 장령이었던 김영수(1446-1502)가 살던 집터이다.

그의 맏형인 학조대사(세조-중종 때까지 왕실의 귀의를 받았던 불교계 대표)가 잡아준 명당이었다.

그래서 이곳은 훗날 안동김씨 200년 집권, 60년 세도의 산실이 되었던 곳이다.

 

태고정은 김상용이 직접 심었다는 소나무들 1000여 그루가 앞뒤로 빽빽하게 에워싸고 있다.

 

아름다운 풍경 속에 자리잡은 건물, 연못, 바위, 소나무, 느티나무, 버드나무, 전나무 등이

이 집의 오래된 역사를 말해주는 청풍계는 마치 숲 속에 집이 그대로 녹아들어가 있는 것 같다.

나무의 표현을 둥치를 거친 붓으로 속도있게 처리함으로써

일체의 기교와 세밀한 표현을 배제하였는데,

그것이 가지는 우람하고 장대한 기품이 우리 주변에서 보는 수목의 특징을 너무도 잘 반영한다.

특히 이곳에서 보이는 버드나무, 소나무, 전나무, 느티나무 등 노거수(勞巨樹)의 거친 표현은

바로 그 본질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재현한 것이라고 보아야 하겠다.

 

이 고려대박물관 소장본의 규모는 간송미술관 소장본보다 작지만

시점은 훨씬 멀어 인왕산 낙월봉으로 파고든 청풍계 계곡 전체를 그려내고 있다.

간송미술관 소장본이 선원 김상용 고택을 중심으로 한 좁은 의미의 <청풍계>라면

이 고려대박물관 소장본은 계곡 전체를 포괄하는 넓은 의미의 <청풍계>이다.

 

따라서 김상용 고택은 전경으로만 처리되고 그 뒤로는 청풍계 계곡 전체가 굽이굽이 이어져 있다.

시점을 높이 띄웠기 때문에 김상용 고택의 앞부분도 눈 안에 들어와

늙은 버드나무 사이에 세워진 삼문 형식의 솟을대문까지 표현하고 있다.

건물을 표현함에 더욱 섬세한 필치로 사진(寫眞)하려는 성실성이 엿보이고

대상의 취사선택에서 아직까지 소극성을 벗어나지 못한 점 등으로 보아

대담한 생략과 웅혼장쾌한 필묵법으로 일관한 간송미술관 소장본보다는

10년 정도 앞선 그림일 듯하다.

 

 

(3) 정선, 영조 27년(1751)경, 종이에 엷은 채색, 29.5×33.7㎝, <장동팔경첩> 간송미술관

 

 

<장동팔경첩> 간송미술관 소장본이나,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 속에도

<청풍계>가 들어 있으나,

간송미술관 소장본은 태고정에 초점을 맞춰 늠연당과 청풍지각 등 건물을 주변으로 몰고

만송강(萬松岡 : 소나무 언덕) 창옥봉(蒼玉峯)으로 그 둘레를 에워싸는 특수한 구도를 보이고 있다.

 

장마비 그친 여름날의 경치인 듯한 주변 수림과 바위들이 물기에 젖어 온통 짙푸르기만 하다.

그러나 태고정과 늠연당, 청풍지각 등 건물에는 햇살이 환히 비추어 흐린 날이 아님을 알게 해준다.

 

태고정 주변으로 네모난 연못 3개가 모두 그려지니 층층이 이어진 돌계단들과 어지러이 섞이면서

청풍계 안뜰이 온통 평행직선으로 가득찬 느낌이다.

이런 직선의 양강(陽强)함을 만공강에 우거진 울창한 송림을 비롯한

태고정 주변 수림의 짙푸른 녹음이 음유(陰柔)한 기운으로 부드럽게 감싸서 음양조화를 이룬다.

만송강의 소나무는 선원 김상용이 심은 것이라 하니,

겸재가 이 그림을 그릴 당시에는 벌써 100년이 훨씬 넘은 것이다.

  

 

(4) 정선, 영조 31년(1755) 경, 종이에 엷은 채색, 29.5×33.0㎝, <장동팔경첩> 국립중앙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장동팔경첩>의 <청풍계>도 간송미술관 소장본과 비슷한 구도인데,

역시 시점을 높이 띄워 김상용 고택 전체가 그림 중심을 이루게 했다.

따라서 태고정이 그림이 중심이 되었던 간송미술관 소장본에서처럼

격렬한 음양대비는 느낄 수 없지만,

김상용 고택인 <청풍계>의 전모를 파악하는 데는 부족함이 없다.

 

겸재 정선은 스승인 김창흡의 후손이 살고 있는 이곳에 어렸을 때부터 자주 드나들었고,

게다가 외가댁이 바로 옆이었으므로 자연히 청풍계에 대한 애정이 누구보다 깊었다.

그래서 정선은 청풍계를 여러 점의 작품으로 남겼던 것이다.

겸재가 얼마나 자주 청풍계를 드나들었는지 그 사실을

사천 이병연(槎川 李秉淵, 1671-1751)의 시에서도 가늠해볼 수 있다.

 

- 태고정에서 원백(元伯=겸재의 字),

공미(公美=겸재의 큰외숙 박견성의 3남 박창언의 字)더불어 두율운(杜律韻)으로 -

이곳 처음 오지 않았으나, 처음 와서도 또한 알 수 있었네.

문에 들어서 홀로 선 전나무 지나면, 청풍댁 세 못 거친다.

바위 골짜기에 술 항아리 남겨둔 지 오래니,

구름 낀 봉우리 자리 따라 옮아간다.

성중 티끌이 만 섬이지만, 한 점도 따라올 수 없구나.

(此處非初到, 初來亦可知.

入門由獨檜, 淸宅以三池.

巖壑留樽久, 雲蠻與席移.

城中塵萬斛 , 一點不能隨.)

 

 

(5) 손암 정황(巽庵 鄭榥, 1735~1800) : 18세기, 모시에 엷은 색

 

 

겸재 정선의 손자인 정황(鄭榥, 1735∼? )의 호는 손암(巽菴).

행적이 뚜렷이 밝혀져 있지 않으나, 가업(家業)을 이어 정선의 진경산수 화풍을 계승하였다.

현존하는 작품은 조부(祖父) 정선의 화법(畵法)을 답습하였음이 현저하게 눈에 띄며,

강한 묵법과 시원한 필치가 어우러진 활달한 진경산수화풍을 구사하였으나,

정선의 화풍을 이어받아 충실히 전수한 수준에서 머물고 있다.
구도가 단조롭고 필치가 다소 약하여 생생한 현장감이 돋보이는 정선의 그림에는 못미치며,

자신만의 독창적인 경지에 이르지는 못했다는 평을 받는다.
그러나
정선의 작품과 구분하기 어려운 것도 있다.

 

<경화문답도(經畵問答圖)〉가 포함된 화첩(畵帖)의

<문암, 옹천(門岩, 瓮遷)〉<명경대, 장안사(明鏡臺, 長安寺)>

<대은암, 청풍계도(大隱岩, 淸風溪圖)>(이상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등의

한양과 금강산을 그린 6점의 진경산수화가 전하는데, 이는 정선의 그림을 임모(臨摸)한 것이다.

 

 

(6) 청풍계첩(靑楓契帖) : 1620(광해군 12), 1帖, 지본담채, 墨書, 50×38㎝, 성호기념관

     이상의(李尙毅) 외, 경서청풍계첩후(敬書靑楓溪帖後)  

   

 

 

 

1620년(광해군 12) 봄 인왕산 청풍계(靑楓溪) 태고정(太古亭)에서

7명의 고관 문사(文士)들이 모여 상춘(賞春)을 즐기고 감흥을 노래한 시문 14편과

계회(契會)를 기념하여 제작한 시화첩(詩畵帖)이다.  

 

청풍계첩에는 계회도(契會圖) 한 점과 제목으로 ‘청풍계에서 봄을 즐긴다’는 뜻의

‘청풍상춘(靑楓賞春)’ 네 글자와 김신국의 발문(跋文),

그리고 7명이 지은 시문 14편이 함께 붙어있다. 별도의 좌목은 기재하지 않았다.

김신국의 발문에는 이들이 상춘의 모임을 가진 때는 1620년 모춘(暮春)이었고,

김상용(金尙容, 1561-1637)의 집이 있는 청풍계를 장소로 택하였음을 밝혔다.

 

 

이 시회(詩會)에는 호조판서 김신국(金藎國, 1572-1657), 병조판서 이상의(李尙毅, 1560-1624),

판돈녕부사 민형남(閔馨男, 1564-1659), 예조판서 이덕형(李德泂, 1566-1645), 최희남(崔喜男),

형조판서 이경전(李慶全, 1567-1644), 이필영(李必榮, 1573-미상) 등 7인이 참여하였다.

청풍계의 주인인 김상용은 당시 외직(外職)에 나가 있던 관계로 모임에 함께 참석하지 못했다.

 

 

이들은 소북(小北), 남인 계열의 인물들인데,

계축(契軸)은 대부분 참석자의 인원만큼 7본이 만들어져 각자가 1부씩 나눠가졌지만,

이상의(李尙毅) 가전(家傳) 소장본만 남아 있다.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의 [경서청풍계첩후(敬書淸楓溪帖後)]에 의하면

그림이 떨어져 나가 1736년(영조 12) 원본(原本)을 똑같이 임모(臨模)하여

두루마리(軸)에서 첩(帖)으로 개장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星湖全書』권56, 今一百一十有六年之久 而不免殘缺 於是易粧爲帖).

이상의(李尙毅)는 성호 이익(李瀷, 1681-1763)의 증조부이다.

따라서 이 청풍계첩은

17세기 청풍계의 경관과 당시의 화풍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는 18세기 중모작(重模作)인 것이다.

 

 

이 <청풍계첩(靑楓契帖)>은 특히, 겸재 정선이 출현하기 전까지 청풍계를 그린 유일한 작품이며,

겸재 그림보다 무려 120년이 앞선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발간한 ‘여주이씨 성호가문 전적’(2002년)에 전문이 수록되어 있으며,

현재 원본은 안산의 성호기념관에 보관돼 있다.

 

 

그림 속에 나타난 청풍계 주변의 경관을 살펴보면,

청풍계는 뒤편의 인왕산과 우측의 백악산을 배경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인왕산 아래를 감싸고 흐르는 개울이 청풍계이며, 그 옆의 모정(茅亭)이 태고정(太古亭)이다.

태고정 주위에는 점경(點景)의 인물들이 그려 있어, 이곳이 계회가 이루어진 장소임을 암시해준다.

 

 

청풍계의 태고정은 ‘산이 고요하기가 마치 태고와 같다(山靜似太古)’는 소강절(邵康節)의 시구에서

이름지었으며, 이 집은 선원 김상용이 종증조부 김영(金瑛, 1475-미상)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다.

성정이 담박하고 산수를 사랑했던 김영은 장안의 비경 청풍계에 저택을 마련하고 이때 태고정도

건립한 것이다.

 

태고정 주변에는 사각의 석축(石築)을 돌려 만든

조심지(照心池), 함벽지(涵璧池), 척금지(滌衿池)라 불리는 3개의 연못이 조성되었는데,

조심지에 물이 차면 함벽지로 넘쳐들고,

함벽지의 물은 다시 척금지를 거쳐 계곡으로 흘러나가게끔 설계되었으니

가히 조형미의 극치를 보여준다.

 

이 청풍계는 김상용 이후 후손들(장동김씨)에게 청풍계는 서울살이의 내력을 상징하는

유서 깊은 세거지(世居地)가 되었다. 청풍계는 개인의 제택(第宅)이면서도

문인학사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을 만큼, 호젓하고 운치 있는 곳이었다.

 

 

그림의 우측에 등장하는 건물은

청풍지각(淸楓池閣)과 소오헌(嘯傲軒), 와유암(臥遊菴) 등의 부속건물들이다.

 

이 그림은 청풍계의 전경(全景)을 보여주려는 의도로 그린 듯

주변의 울창한 수목(樹木)들을 과감히 생략하고 넓게 설정한 공간 안에 각 경물들을 묘사하였다.

첩의 뒷면에는 일곱 사람이 짓고 직접 쓴 칠언율시(七言律詩) 2-3수씩이 함께 실려 있다.

 

 

        골짜기에 떨어진 꽃잎이 흐르는 개울물

        윤삼월 이름난 동산에서 좋은 놀이 벌였네.

        거울같이 맑은 물에 백발을 슬퍼하랴

        인간세상 도리어 신신에게 있구나.

        웃으며 보노니 앞산의 구름이 쉬 변하는데

        취하여 좋은 것은 큰 술잔에 이슬이 뜬 것이라.

        좋았던 일 아직도 귀에 쟁쟁하기에

        개울 너머 가는 노랫가락 고운 누각을 건너오네.

 

 

 

 

 

  

 창의문(彰義門)

 

 

 영조 31년(1755년경)/ 지본담채 / 29.5 ×33.0 cm / <장동팔경첩> 국립중앙박물

  

장동(壯洞)은 원래 '창의문'이 있어서 '창의동'으로 불렸다가, '자하동'을 거쳐 '장동'이라고 불렸다.

그래서 이 일대에 살았던 김상용과 김상헌의 후손들은 흔히 '장동 김씨'라 하였다.

 

장동은 경치가 아름다워 흔히 장동팔경을 꼽았는데

정선은 <장동팔경첩>을 두 번 제작하여 현재 국립중앙박물관과 간송미술관에 각각 소장되어 있다.

여기에 소개된 <장동팔경첩>에는

창의문, 백운동, 청풍계, 청휘각, 청송당, 대은암, 독락정, 취미대가 묘사되어 있다.

그림에 나타나는 계곡 물은 창의문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인왕산 동쪽 자락에서 내려오는 물길과 합류하여 남쪽으로 흘러 청계천 본류에 합쳐지게 된다.

 

창의문은 태조 5년(1396) 도성축조를 마치고 사대문과 사소문을 냈다는 것을

<태조실록> 권10, 태조 5년 병자 9월24일 기묘조의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겸재가 65세이던 영조 16년(1740) 당시 훈련대장이던 구성임은 영조에게 청을 올린다.

 

"창의문은 인조반정시에 창의군(唱義軍)이 들어온 곳이니 마땅히 보수하고 고쳐서 표시해야 합니다."

 

이에 영조는 명년 봄에 고치라고 명령하였는데,

 

다음해 정월 22일에 고치는 김에 아예 초루(초樓)까지 세우자고 또 청하게 되고

영조가 허락하니 창의문은 사소문 중에서 제일 먼저 문루를 가지게 된다.

 

 

인왕산 자락과 북악산 자락이 서로 마주치는 골짜기 능선 위에 지어진 문루와 성문,

그 좌우 인왕산과 북악산 능선을 따라 날개를 펼치듯 뻗어나간 성벽,

마치 날개를 퍼덕이며 내려앉는 한 마리의 독수리같은 형상이다.

 

 

그 좌측 인왕산 자락에는 '호군부장청(護軍部將廳)'으로 생각되는 성문 수호 관청건물이

암자처럼 바위 벼랑 위에 서 있고,

백운동과 유란동으로 흘러가는 인왕산 물줄기, 북악산 물줄기가 계곡을 굽이치고 있다.

 

유란동 쪽에서 물길을 따라 올라왔을 길이

성문 저 아래에서부터는 물길을 버리고 성문이 있는 산마루로 바위 사이를 구불구불 타고 오른다.

 

 

군데군데 송림이 우거지고 작은 큰 바위들이 널려 있는데,

성안 바위산은 기운찬 부벽찰법으로 쓸어내리지 않고

그와는 대조적인 아주 부드러운 피마준을 구사했다.

 

얼핏보면 운두준(雲頭)에 가까울 만큼 온유하니

이것은 노련미를 드러내는 겸재 만년 기법의 특징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성 밖 벽련봉(碧蓮峯)에 이르면 문득 겸재 본면목이 약여하게 살아나서

장쾌한 쇄찰묵법(刷擦墨法)이 난무한다.

강약(强弱), 경유(硬柔)가 조화를 이루는 음양 이치를 슬며시 드러내보인 원숙한 화면구성이다.

 

 

인왕산 북쪽 끝봉우리인 벽련봉은 한 덩어리의 거대한 바위로 이루어진 백색 암봉(岩峯)이다.

 

지금도 있는 부침바위(=부아암=負兒岩)는

그림에서 보면 백련봉 위에 축구공같이 생긴 하나의 바위로 올려 있다.

정황<대은암>

 

 

  

   

 장시흥(張始興), 창의문, 18세기 후반 / 지본담채 / 15.5 ×19 cm / 고려대 박물관

 

지금 청운중학교에서 자하문쪽으로 올라가는 길 근처를 그린 이 그림은 

화면 가운데에 쓴 ‘창의문(彰義門) 방호자(方壺子)’라는 관서(款署)와

성숙(聖叔)이라는 백문방인(白文方印)만 없으면 틀림없이 겸재의 그림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화가의 회화사상(繪畵思想)이 같고, 화가로서의 능력과 화기(畵技)가 비슷하고,

출신계급이 비슷하면 비슷한 양식의 그림을 그리게 되는데,

이들은 같은 시대에 살 수도 있고 다른 시대에 살 수도 있다.

그러나 미술사에서는 같은 화파(畵派)라 한다.

 

겸재와 방호자(方壺子)의 경우도 같다.

그래서 우리는 이들을 겸재파(謙齋派) 화가라 부르고,

방호자(方壺子)를 겸재화풍의 계승자라고 한다.

 

 

이 그림에서 방호자는 주제, 구도, 화법에서 철저하게 겸재를 따르고 있는데,

엄격하게 말하면 방호자는 창조적 상상력이 뛰어난 천재화가는 못된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화가의 독창성 여부는 어떻게 하면 스승과 다른 그림을 그리느냐에 달렸기 때문이다.

물론 이 그림은 잘 그린 것이지만 그런 면에서 아쉬움을 주는 그림임에는 틀림없다.

(방호자 장시흥은 생몰년 미상, 생애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으나

겸재 정선으로부터 화법을 배워 산수에 능하였다고 전해진다.)

 

 

 

 

 

  백악산도(白岳山圖)

 

 영조 16년(1740)경, 종이에 엷은 채색, 25.1×23.7, <한중기완첩(閑中奇玩帖)>, 간송미술관

 

원래 백악산이라 불렀던 모양이나, 그 아래에 경복궁을 터잡아 짓고 난 뒤로는

서울의 진산(鎭山)으로 북주(北主)가 된다 하여 북악산(北岳山)이라고도 부르게 되었다.

금강산 줄기가 북한강 물줄기를 몰고 내려오다가 그 강 끝에 이르러

혼신의 힘을 기울여 정기를 죄다 분출한 것이 삼각산(三角山)이라 하겠는데,

그중 서쪽 봉우리인 만경대의 남쪽 줄기가 뻗어나와 마지막으로 용솟음쳐 놓은 것이 백악산이다.

 

백악은 시청 앞 근처 큰 길쪽에서 마주 바라보면 봉우리 끝 부분이 동쪽으로 약간 기울어 있다.

그래서 경복궁은 동쪽 일본에 화를 입게 된다는 속설이 풍수가들 사이에서 전해져 오기도 한다.

아마 경복궁이 임진왜란에 불타고 또다시 대원군 중건 직후에 일본에 유린되었던 사실을 연계시켜

지어낸 얘기인 듯하다.

 

이 그림 <백악산>은  봉우리 끝이 곧게 솟아 있다. 겸재가 의도적으로 그렇게 그렸을 터인데

사실 청와대 앞이나 삼청동 근처에서 북악산을 바라보면 이렇게 보인다.

겸재는 바로 이 산밑 서쪽 기슭인 경복고등학교 자리에서 나서 50대 초반까지 살았으니

북악산이 뒷동산과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백악산을 어느 방향에서인들 바라보지 않았겠으며

어떤 골짜기 어떤 바위인들 모를 리가 있겠는가.

백악산이 항상 머릿속에 가득하고 가슴속에도 넘쳐나

한양 서울의 현무답게 우뚝 솟구쳐 그리고 싶어 이런 시각으로 잡아냈을 듯하다.

 

상봉에 가까운 동쪽 기슭에 거대한 거북머리(龜頭)처럼 생긴 바위가

우뚝 솟아난 바위절벽 위에 얹혀 있는 것이 한눈에 잡히는데

이것이 백악산을 특징지워주는 비둘기바위이다.

조선시대에는 오리바위(부암, 鳧岩)라고도 했던 모양이나

겸재 눈에는 이 바위가 오리나 비둘기 따위처럼 잔약한 모양으로 보이지 않았던가 보다.

힘차게 치켜든 현무의 거북머리 형태로 보였던 모양이다.

그래서 대담한 붓질과 짙은 먹칠로 흰색 화강암을 완전 반대색인 검은 일색으로 그려놓고 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이것이 백색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새하얀 비둘기바위로 느껴지는 것은 어쩐 까닭인지 알 수 없다.

 

겸재가 인완산이나 백악산을 그리면서 이런 흑백 도치법을 구사해 성공항 수 있었던 것은

<주역(周易)>에 정통하여 음양대비와 음양조화의 논리를 거침없이 사용했기 때문이었을 듯하다.

 

서쪽 산 능선을 따라서 한양서이 보이는데 지금 보아도 이모습 그대로이다.

이 아래 동쪽으로 물이 모이는 골짜기에 독락정(獨樂亭)이 있고,

그 서쪽에 사천 이병연이 사는 대은암(大隱巖)이 있으며,

모퉁이를 돌아 백악산 서편 기슭으로 가면 겸재가 나고 자란 유란동(幽蘭洞)이 있을 것이다.

청송당(聽松堂)을 거쳐 성벽 쪽으로 더 올라가면 자하동(紫霞洞)이 나오고

거기서 자하문, 즉 창의문(彰義門)을 만나게 된다.

그런데 이 그림에는 자하문을 그리지 않았다. 인공의 흔적을 배제하려는 의도때문이었을 것이다.

 

제시에 '겸재가 직보(直甫)에게 그려준다(謙齋寫與直甫)'고 했는데

직보는 한성부 서윤을 지낸 김정겸(1709-1767)의 字이다.

김정겸은 영의정을 지낸 김수흥(1628-1690)의 손자이다.

김수흥이 삼연 김창흡의 둘째 아버지이니 삼연에게는 직보가 5촌조카인 셈이다.

 

인가가 들어서 있던 대은암동, 도화동, 유란동 등은 모두 구름으로 가려 놓았고,

지금 청와대가 차지하고 있는 너른 터전이 모두 이 구름 속에 잠겨있다.

 

사천 이병연은 이렇게 읊었다.

'백악에 아침 빛 찾아오면 푸르름 반쯤 머리 내민다.

응당 허리 아래 비 내리리니, 내 서루(西樓) 감춰주겠지'

 

백악산 아래 장동(壯洞)에는 율곡선생의 옛집이 있어 사당이 모셔져 있었는데,

사천 이병연의 제자인 창암 박사해(1711-1778)가 시화를 곁들인 시를 남겨놓고 있다.

'어진 스승 어느 곳에서 찾나, 백악산 자락이로다.

백세에 우뚝한 모습, 산과 함께 우러러 본다'

 

 

 

 

 

 

 태학계첩(太學契帖)

 

1747년(영조 23),  지본채색, 44.9×27.3㎝, 서울역사박물관

 

 

성균관 대사성 이정보(李鼎輔, 1693-1766)가 성균관 내외의 환경을 정비한 것을 기념하여

이 일에 참여한 사람들과 만든 계첩이다.

<태학지(太學志)>는 성균관 대사성 민종현(閔鍾顯)이 엮은 것으로

이 책의 卷之 一 '建置'에 관아도형인 <반궁도(泮宮圖)>가 수록되어 있다.

 

조선시대 성균관의 시설은 제후(諸侯)의 학궁(學宮)은 '반궁(泮宮)'이라는 입장에서

반궁제도(泮宮制度)에 입각하여 정비되었다.

반궁(泮宮)에는 반수(泮水)가 필수적 요소인데,

반수는 1478년(성종 9) 7월 24일(계미)에 공사가 완료되었다.

 

오른쪽 가장자리에 성균관을 둥글게 감싸며 흐르고 있는 반수(泮水),

그 위에 세워진 3개의 다리는 중석교(中石橋), 향석교(香石橋), 반수교(泮水橋),

반수교 옆의 어서비각(御書碑閣) 등 성균관임을 말해주는 표현이 사실적인 기록을 나타내고 있다.

 

비각에는 1742년(영조 18) 영조가 쓴 어필(御筆)을 새긴 비석이 안치되어 있는데,

성균관 유생들에게 당쟁의 폐풍에서 벗어나

참다운 인재가 되기를 권장하는 뜻을 적어서 내린 것이다.

 

‘예기’에 있는 한 구절을 써서 새겼는데,

“신의가 있으면서 아첨하지 않음은 곧 군자의 공변된 마음이요,

아첨하면서 신의가 없음은 이 소인의 사사로운 마음이다

(周而弗比 乃君子之公心 比而弗周 寔小人之私意)”라는 내용이다.

비의 액제(額題)를 쓰지 않았으나 사람들은 이를 탕평비라고 말했다.

 

 

 

 

 

  

  

 

 옥계시사(玉溪詩社)

 

임득명(林得明) / 1786년(정조 10) / 24.2 ×18.9㎝ / 지본담채 /  삼성출판박물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여항시사인 옥계시사(玉溪詩社)의 동인들이

인왕산자락에 위치한 옥류동의 옥계(玉溪)에 모여 제작한 시화첩으로

156편의 시와 4점의 그림으로 이루어져 있다.

 

정조 10년(1786) 7월16일에

천수경(千壽慶), 최창규(崔昌圭), 이양필(李陽馝), 김낙서(金洛瑞), 김호문(金灝文), 백이상(白履相),

이인위(李仁?), 조광린(趙匡藺), 장윤(張淪), 김태한(金泰漢), 신도흠(愼度欽), 노윤적(盧允迪),

임득명(林得明) 등 13명이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의 구성원으로서

옥류동 玉溪에 모여 시사(詩社)를 결성하였다.

 

이들은 한 동네에 살며 직업이 중인계층의 세습적으로 동류하고 취향이 같다는

동질성을 근거로 하여 결사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여기에서 시사(詩社)의 형식을 빌어

중인계층 신분상승운동의 의의와 상부상조를 바탕으로 깐 목적성,

비밀결사와 같은 운영방식, 결집력의 실체를 가지고 있으며,

조선 사대부의 교양 필수였던 시(詩), 서(書), 화(畵) 삼절(三絶)을 지향한

이들의 지향처는 역시 사대부를 모델로 한 사(士, 선비)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아울러 경아전(京衙前), 특히 옥류동에 모여 살던 규장각 서리들의 문화적 특징과

그들이 인식한 인왕산 진경산수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다.

진경산수화의 화풍과 진경시로 대변되는 진경문화가 중인문화로 확산되고 있었음도 알 수 있다.

 

 

 

 

옥계사(玉溪社) 시화첩에는

옥계 12승(勝)에 대해 13명의 동인들이 계절마다 읊은 156편의 시와 범례가 있으며,

옥계사 계안(契案)의 범례에 따르면

달마다 한번씩 모여 정해진 제목과 운에 따라서 시를 지어야 했다.

그 자리에서 짓지 못하면 벌칙이 주어지고

몇 차례 짓지 못한 동인들은 시사에서 제적되어 시간이 지남에 따라 구성원이 변모해 갔지만,

모두가 당대 평민출신의 시인과 묵객들이었다.

 

그 뒤 옥류동과 인왕산계곡은 계속 평민시인들이 모여 크고 작은 시사(詩社)를 결성하여

조선후기 평민문학의 전성기를 이룬 곳이다.

한편 이들이 모인 곳이 인왕산 아래 서촌(西村)에 있었으므로

‘서사(西社)’ 혹은 ‘서원시사(西園時社)’라고도 불린다.

 

 

1786년(정조 10) 최초 결사 당시의 <옥계사수계첩(삼성출판박물관본)>과

1791년(정조 15) 재결집한 이후의 <옥계사시첩(영국 브리티시 도서관본)>의 두 종류가 있다.

 

1786년 옥계시사 결사시의 <옥계사수계첩>은

연장자인 오옥재 최창규(五玉齋 崔昌圭)가 소장하고 있었다.

여기에는 <옥계십이승첩(玉溪十二勝帖)>이라 하여 다음의 12개 목록이 나와있다.

 

 

1. 가교보월(街橋步月) - 맹춘(孟春=초봄) 1월: 광교다리 밟으며 달구경하기

2. 등고상화(登高賞華) - 중춘(仲春=한봄) 2월: 높은 산에 올라 꽃 감상하기

3. 강사청유(江사淸遊) - 계춘(季春=늦봄) 3월: 한강 정자에의 淸遊

4. 성대관등(城臺觀燈) - 맹하(孟夏=초여름) 4월: 성대에 올라 초파일 등불 보기

5. 야우납량(夜雨納凉) - 중하(仲夏=한여름) 5월: 밤비에 더위 식히기

6. 임류탁영(臨流濯纓) - 계하(季夏=늦여름) 6월: 흐르는 물에 갓끈 씻기

7. 풍록수계(楓麓修계) - 맹추(孟秋=초가을) 7월: 청풍계 기슭에서 수계(修?)함

8. 국원단회(菊園團會) - 중추(仲秋=한가을) 8월: 국화 핀 동산에서 단합대회

9. 산사유약(山寺幽約) - 계추(季秋=늦가을) 9월: 산사에서의 그윽한 모임

10. 설리대적(雪裏對炙) - 맹동(孟冬=초겨울) 10월: 눈 속에 가까이 마주앉음

11. 매하개작(梅下開酌) - 중동(仲冬=한겨울) 11월: 매화나무 아래서 술잔 열기

12. 납한수세(臘寒守歲) - 계동(季冬=늦겨울) 12월: 섣달그믐에 밤 새우기

 

 

이 옥계시첩에 합장된 임득명의 그림은 인왕산의 풍광을 담은 것으로

<가교보월> <등고상화> <산사유약> <설리대적> 4폭만 남아있다.

 

간결한 구도, 대상을 응축하여 부각시킨 구성, 간소한 필묘, 맑은 선염의 색채 등으로

시적인 아취(雅趣)를 잘 드러내고 있다.

화면 구성과 필묘, 수지법 등에서 정선의 영향이 엿보인다.

당시는 진경산수화와 함께 진경풍속화가 널리 유행하면서

화원들간에 사실주의적인 화풍이 유행하던 시기이며,

임득명의 나이 20세이니 아직 습작하는 단계가 아니었을까 싶고

또한 그 시대성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가교보월(街橋步月)>

한양의 도성인들이 정월대보름에 하던 다리밟기와 상통하는 것으로

다리밟기 장소로 가장 붐볐다는 광통교와 수표교의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화면 하단에 다리를 수평으로 배치하고,

양쪽의 기와집들을 모두 뉘여서 표현하여 재미있는 구도를 보여준다.

 

‘오늘 밤은 눈빛이 유독 밝고 밝아

사람마다 광통교에서 달을 기다린다

노래하는 아이들 한 떼가 옷깃을 연이어

함께 동방의 행락조(行樂調)를 부르네.’

 

조선 후기 실학자 이덕무(李德懋)가 지은 한시 ‘상원곡(上元曲)’의 일부다.

달이 떠오르기를 기다리며 청계천 광통교 옆에 모여든 사람들의 흥겨운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등고상화(登高賞華)>

중춘(仲春=한봄)2월: 높은 산에 올라 꽃 감상하기

 

 

<산사유약(山寺幽約)>

옥계의 청풍정사에서 최초로 결사한 시의 내용은

지기인 자신들의 죽마고우로 단풍든 산기슭에서 결사하게 된 감회를 읊은 것이다. 

 

 

9월에 산사에서의 그윽한 모임이라는 주제대로

약속을 미리 해 놓고 각자 가서 만난 것으로 보인다.

배경에 큰 봉우리 세 개가 솟아있고 전면에 절로 가는 길이 대각선으로 배치되어 있다.

길옆으로는 소나무들이 겸재필법으로 나란히 그려져 있고,

작은 언덕 위 수림(樹林) 뒤로 큰 규모의 절이 보인다. 절집 가운데에 오층석탑이 있다.

 

13사람의 시에도 이 절의 이름은 없어서 확인되지 않으며,

늦은 가을날 동인들이 단풍 구경할 겸 산사에서 시회(詩會)를 연 듯하다.

 

 

공공자(空空子) 장윤(張淪)의 詩를 보면,

깊은 산 속 외따로 떨어져 있는 山寺의 가을풍경이 잘 묘사되어 있다.

 

‘스님 몇 사람이 탁주를 갖고 와 멀리 왔으니 밤새 함께 취해보자 하네’라는 구절로 보아

멀리 깊은 山寺에 가서 묵었던 것 같다. 스님들도 이들과 술로 교유한 듯하다.

 

 

山色은 성히 십리에 뻗쳐 있고, 단풍 든 나무 孤寺에 숨은 듯 보이네.

계곡 입구 범종 저녁 구름에서 나온 듯, 숲향기 푸른 허공에 흩어지네.

石門의 이내 낀 달 아름답고 맑은 가을 풍경은 일치할 것이 없네.

스님 몇 분이 탁주를 갖고 와 멀리 왔으니 밤새 함께 취해 보자 하네.

 

(山色???十里/ 紅樹隱映見孤寺/ 谷口鐘梵出暮雲/ 林端香氣散空翠/

石門霞月有餘好/ 淸秋風景非一致/ 尼僧數人携濁?/ 問我遠行供夜醉)

 

 

<설리대적(雪裏對炙)>

맹동(孟冬=초겨울) 10월: 눈 속에 가까이 마주앉아 경치 감상하기

 

 

- 이상, <韓國學報> 제 109집, 2002 겨울호, 정옥자 「정조대 玉溪詩社의 결사와 眞景詩畵」에서

 

 

 

임득명(林得明, 1767-1822, 영조 43-순조 22) : 호는 송월헌(松月軒)

 

본관은 회진(會津), 자는 자도(子道)이나, 성장과정이나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다만, 천수경(千壽慶), 최북(崔北), 임희지(林熙之), 김낙서(金洛瑞) 등과 함께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의 구성원으로서 그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가 중인 신분의 문사(文士)였을 것으로 추측될 뿐이다.

시(詩), 서(書), 화(畵)에 뛰어나서 '삼절(三絶)'이라 일컬어졌다고 한다.

 

그림은 정선(鄭敾)의 진경산수화법을 배웠는데 특히 산수화를 잘 그렸으며,

글씨는 전서(篆書)를 잘 썼다고 전해진다.

 

대표적 작품으로는

서울에서 의주까지의 경치를 6폭에 담은 《서행일천리(西行一千里)》라는

장권(長卷)의 서화축(書畵軸)이 있다.

그밖에 종이에 담채로 그린 《고정관폭도(孤亭觀瀑圖)》를 비롯하여

《송월헌화첩(松月軒畵帖)》등의 작품이 남아 있다.

 

 

 조선 평민 시동인지 첫 발견‥‥ <옥계사(玉溪社)> 13명 작품 156편, 그림 곁들여

 

조선후기 평민 시동인 모임의 동인 시집이 처음으로 발견됐다.

삼성출판박물관에서 소장자료 분류 중 발견된 시집은

시사(詩社, 시동인)인 <옥계사(玉溪社)> 동인 13명이 매월 한편씩 지은 시 156편을 모은 수계첩.

 

제목을 시사 이름인 <옥계사>로 붙였으며,

최창규, 천수경 등 회원의 이름과 제작 연대(1786년 10월) 소장자 이름은 물론

모임의 형태, 정관조직 운영 등이 자세히 밝혀져 있다.

 

수계첩(修契帖)에는

이외에도 겸재 정선의 제자인 동인 임득명이 그린 4장의 그림까지 수록되어 있어

그들이 시를 지으며 노는 모습을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지금까지 평민문학 관련자료는 <소대풍요(昭代風謠)>, <풍요속선> 등 시선집이 나오기는 했지만,

이번처럼 평민시사의 1차 자료는 처음 발견된 것이다.

 

목원대 허경진 교수(국문학과)는

"평민문학은 조선 후기 활발한 활동을 보이면서 구실을 담당했지만,

사대부와는 달리 신분상의 제약으로 제대로 된 자료가 발견돼지 않았다"면서

"이번 옥계사 발견으로 평민문학에 대한 연구가 한층 가속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수계첩(修契帖)에 따르면

옥계사는 1786년 서울 인왕산 기슭에 있는 옥류동(지금의 옥인동)에서

평소 문학으로 교유를 맺고 있던 평민끼리

보다 조직적인 문학모임을 만들자는 취지에서 발족했다는 것.

이를 기념하여 동인들이 각각 쓴 서문에는 자신들의 모임을

도연명의 '백련사(白蓮社)'와 왕희지의 '난정수계(蘭亭修契)'의 맥을 이어받은 것으로 규정하면서

"우리의 契는 세상 사람들의 契와는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 1991. 8. 조선일보

 

 

▲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

 

시사의 맹주였던 천수경(千壽慶)의 호를 따서 통칭 ‘송석원시사’로 불렸는데,

서울의 중인계층이 인왕산(仁王山) 옥류동(王流洞) 송석원에서 결성하였다.

옥계시사(玉溪詩社)라고도 한다.

 

이들은 한 달에 한 번 이상 야외에서 정기적인 모임을 가지면서 시를 지어

《옥계십이승첩》《옥계아집첩(雅集帖)》등의 시첩으로 만들었다.

 

《옥계십이승첩》은 1786년(정조 10) 시사가 결성될 당시에 제작된 것으로

원 표제는 《옥계사(玉溪社)》이다.

이 시화첩은 ‘서문(序文)’과 규약인 ‘범례(凡例)’, 시사 구성원의 명단인 ‘서차(序次)’,

절기별 시사의 활동내용을 요약한 ‘옥계사십이승(玉溪四十二勝)’,

이것을 소재로 한 동인들의 시, 그리고 시의 중간중간에 임득명이 그린 4점의 그림,

장혼의 ‘발문(跋文)’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대부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한시가

17세기 말, 18세기부터 국가기관에서 실무에 종사하면서 지식을 습득한 경아전이나 의원, 역관 등

중인들에게 향유되면서 많은 시사가 결성되는데 옥계시사는 이러한 흐름의 전형이다.

 

사대부문학이 중심을 이루던 조선사회에서

위항인(委巷人)들의 문학활동과 활동집결체 구실을 하였다.

이들은 전국적 규모의 시회인 백전(白戰)을 개최하였고

《풍요속선》을 간행하면서 1818년(순조 18)까지 활동하였다.

위항문학은 송석원시사의 융성과 작품활동으로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금오계첩(金吾契帖)=의금부

  

금오계첩, 1739년(영조 15), 종이에 채색, 30.5×40.3㎝, 고려대박물관 

 

‘金吾’는 의금부(義禁府)의 별칭으로, 이 첩은 당시 의금부 관원들의 契會를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의금부 관리들이 의금부 경내에서 계회를 하는 모습을 담채로 그렸으며,

회랑은 위에서 내려다 본 것으로, 나머지 건물들은 정면에서 본 것으로 표현하였고,

행사장면은 부감법을 사용하였다.

 

총 4면으로 구성되었는데,

앞표지에 '金吾帖'이라 묵서한 제첨(題簽)이 있다.

 

제1면에는 높은 산을 배경으로 휴식을 취하는 2인의 선비와 시동(侍童)을 묘사하였고,

제2면과 제3면에는

계회에 참석한 의금부 관원의 품계, 관직, 이름, 자, 생년, 과거(등과한 시험 및 년도), 본관 등을

내용으로 하는 좌목(座目)부분이 적혀있다.

좌목 중 윤학선(尹學善)이 1781년生이고, 1807년 사마시에 합격한 것으로 보아

이 첩의 제작시기는 19세기 전반으로 추정된다.

 

제4면에는 멀리 구름너머 미점(米點)이 가해진 산을 배경으로 한 강안산수(江岸山水)가 그려져 있다.

 

그런데, 제1면과 제4면의 장면은

사실적인 계회장면이 아닌 관념적인 이상경을 그린 것으로

좌목 부분을 앞뒤로 장식하는 삽도적인 의미가 강한데,

특이한 기하학적 형태로 분할된 암산(巖山)의 표현,

원산에 가해진 미점(米點)과 위가 평평한 강안(江岸)의 언덕 형태 등으로 보아

계회(契會) 당시의 화풍과는 거리가 있어서 후대인 18-19세기경에 다시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17-18세기에는 실제 계회장면이나 관아를 배경으로 그려졌던 계회도가

후대로 오면서 실경이 아닌 관념적이고 형식적인 산수화로 변하는 경향을 잘 보여준다.

 

 

 

조선 초기부터 대부분의 관청에는 소속 동료들끼리의 모임인 ‘요계(僚契)’가 형성되었다.

 

<성종실록>에

“오늘날 조정의 관리로서 문신은 같은 해에 서사(筮仕)하여 오래되면 동관(同官)이 있게 되어,

혹은 계(契)를 만들어 교정을 굳게 하고 있다” 는 기록이 보이는 것처럼,

한 관청에 봉직하며 같은 임무를 수행한다는 동관(同官), 동사(同事)에 의미를 둔 契의 결성이

15세기 무렵에는 사대부들 사이에서 대표적인 契로 자리잡게 되었다.

 

관료가 부임하면 題名하는 관례에 따라

각 관청에는 제명록(題名錄, 先生案)을 구비해 두는 것이 규례였던 것처럼

결계의 자취를 남기기 위한 문서를 만들 때에도

처음에는 제명의 의미가 있는 座目형태로부터 시작했던 것이다.

그후 계회도가 담긴 화축을 만들게 된 뒤에도

좌목은 제명록을 대신하여 그 계회의 성격을 말해주게 된다.

계축(契軸)이란 명칭도

제목과 좌목을 구비한 계회도의 독특한 화면구성으로 인해 얻게 된 이름으로 보인다.

  

六曹를 비롯하여 삼사(三司: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승정원, 한성부 등 거의 모든 관청에는

소속 관원들을 계원으로 하는 요계의 결성이 확산되어 있었다.

요계는 관직을 수행하며 동고동락하는 동료끼리의 강한 결속력, 소속 관청에 대한 긍지,

왕의 신료로 선발되었다는 인재의식 등을 표출할 수 있는 통로로서 인정되었고,

座目이 반드시 수반되는 계회도는 그러한 의미를 시각적으로 보존하는 수단으로 간주되었다.

 

18세기 이전에는 화축이 주류를 이루었는데,

일반 관청에서 계회도를 그려 나누어 갖곤 했던 제작배경을 공유한 결과였다.

궁중행사도 화첩은 몇몇 관청에서 즐겨 사용하였던 장황(粧潢, 表裝) 형식이었고,

병풍은 18세기 후반 이후 크게 유행하였다.

그에 따라 화축은 하급관리에게 분하되는 형식이 되었으며,

단독으로 궁중행사도 계축을 만드는 일은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상대계첩(霜臺契帖)  

  

1629년(인조 7) / 33.0 ×21㎝ / 종이에 엷은 색 / 서울역사박물관

 

  

 

 

 

'상대(霜臺)'는 '사헌부'의 계회(契會)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첩이다.

 

상대는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때 법무아문(法務衙門), 1895년에 법부로 개칭되었다.

사헌부는 현재의 광화문 앞 세종로의 육조거리 좌측에 위치했다.

 

계첩은 총 6면으로 구성되었는데

제1면은 계회장면이고, 제2-5면은 계회참석자 15인의 신상을 적은 좌목(座目)부분이며,

제6면은 조희일(趙希逸, 1575-1638)의 제시(題詩)가 들어있다.

 

제1면의 계회장면은 근경, 중경, 원경의 구도에 간략한 소묘풍으로

근경에는 모임에 참석하려고 말을 타고 오는 인물과 앉아서 그를 맞이하는 3명의 인물을 그리고,

중경에는 안개에 쌓여 겹겹이 들어선 관아(또는 궁궐)를 묘사하였으며,

원경에는 건물들 뒤에 병풍처럼 둘러선 원산을 그렸다.

 

인물과 건물, 근경의 버드나무 등 대개의 경물들을 세필(細筆)로 간략하게 그리고,

원산의 녹음과 건물의 지붕, 우물과 시내 등을 표현하기 위해 옅은 하늘색의 담채를 가하였다.

산과 건물의 배치, 시내와 버드나무 그리고 우물 등을 묘사하여

실경을 그리는 계회도(契會圖)로서의 현장성을 유지하려했음을 알 수 있다.

일반적인 계회도가 모임이 이루어지고 있는 모습을 표현하거나

모임장소에 대한 설명적인 묘사를 하는 것에 비해

여기에서는 계회시작 전의 장면을 간략하게 그렸다.

 

제2-5면에는 참가자 15인의 관직, 성명, 자, 생년, 과거, 본관, 부친의 관직, 성명 등을 적은 좌목으로,

참가자는 사헌부감찰 조간(趙幹), 박유관(朴由寬), 유석(柳碩), 김도(金濤), 정운한(鄭雲翰),

김수선(金綏善), 심택(沈澤), 유준(柳浚), 신현(申鉉), 홍정(洪霆), 조후설(趙後說), 이경절(李景節),

송석몽(宋錫夢), 권억(權억), 신응정(辛應貞) 등이다.

여기에서 확실히 연대를 알 수 있는 인물은 유석, 심택, 이경절 등으로

모두 17세기 전반기에 활동하던 인물들로 확인된다.

 

제6면에는 다음과 같은 오언시가 적혀있다.

 

두만조용숙(두慢朝容肅) / 분사중무해(分司衆務該)

존조승경칙(尊早承警칙) / 환회관추배(歡會慣追陪)

백일지승효(柏日遲升曉) / 다시조상대(茶時早上臺)

수지벽로처(須知僻路處) / 쟁도전중래(爭道殿中來)

기사중동(己巳仲冬=1629년, 인조 7) 죽음(竹陰 : 조희일의 호)

 

 

 

 

 

 

 

추관계첩 (秋官契帖)

 

1709년(숙종 35), 18.6×44×0.5㎝, 서울역사박물관

  

'秋霜(추상)같은 叱責(질책)'이니 '서릿발같은 명령'이 그것이다.

서리[霜]의 존재야말로 위엄과 공포의 상징이었다.

그래서 조선시대에는 형벌을 관장하는 장관을 ‘秋官(추관)’이라고 불렀다.

1709년에 열린 추관(秋官) 곧, 형조(刑曹)의 계회(契會)를 기록한 화첩으로

총 5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절첩본으로 되어 있다.

 

제 1면의 계회장면은 형조관아의 각 건물을 구획하고,

중당의 정청에 형조판서 최석항, 참판 김(金), 참의 원성유,

좌측의 익랑에는 정랑 이하 황응일, 김몽서, 김성후, 황(黃), 한(韓), 이의행 등 6인을 그려 넣었다.

건물들은 투시도법을 무시한 채 정면만으로 표현되어 계회도의 한 특징을 잘 보여준다.

 

제 2면에는 참석자 9명의 관직, 자, 생년, 과거, 본관 등을 적었고

제 3면에는 당시 모임을 주재한 것으로 추정되는 형조판서 최석항의 글이 실려있다.

후면 제 1-2면은 형조참판인 김성후의 식(識)이 붙어 있다.

 

 

  

  

 

 

 

 경현당도 어제어필화재첩(景賢堂圖 御製御筆和載帖)

 

 1741년(영조 17), 지본담채, 27×38.5, 서울역사박물관

 

1741년(영조 17) 6월 22일 영조가 경희궁의 전각 중 하나인 경현당에서

왕세자(사도세자를 시좌한 가운데 승정원과 홍문관의 관원들을 초견하고 선온한 사실을

기록한 첩이다.

 

이 자리에서 영조는 어제시를 내리고

근신(近臣) 13인의 갱운시(갱韻詩), 제25-26면은 만장(輓章)을 각각 적었다.

 

시회장면은 사면에 옥색 담장을 두른 경현당을 그리고 시회(詩會)의 모습을 그렸다.

중앙에는 일월오봉도 병풍을 펼치고, 욕석(褥席)을 두어서

영조와 왕세자의 친림(親臨)을 표시하고, 그 아래에는 모임에 참석한 근신 13명의 뒷모습을 그렸다.

 

담장 너머에 활엽수의 무성한 잎은 때가 한여름임을 나타낸다.

평면도와 입면도 형식이 혼합된 건물과

담장의 구조, 건물의 취도, 용두, 잡상, 단청 등은

비슷한 시기 경현당을 그린 그림에들에 나타나는 공통적인 형식으로 알려져 있다.

 

그 뒤에는 영조와 왕세자, 그리고 13명의 근신들 사이에 오간 대화가 자세히 적혀 있다.

 

영조의 어제시는 13면에 있는데,

"昨夕인經己訖工, 今辰宣酒一堂中, 春秋大義感懷切, 追憶왕年倍予衷"으로

운(韻)이 工, 中, 衷(충) 인데, 그에 화답하는 신하들의 갱운시가 뒤를 잇는다.

 

마지막으로 초서로 쓴 만장(輓章)이 있다.

이 그림은 영조대에 경희궁이 경현당을 배경으로 한 행사도로

당시 군신간에 행해졌던 시회의 모습을 보여주는 유물이다.

 

  

 

 

 

 

 

 

  종친부 사연도(宗親府 賜宴圖)

 

 1744년(영조 20), 비단에 채색, 64×134.5㎝, 서울대학교 박물관

  

종친부에서 행한 연회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종친부란 왕실의 족친관계의 일을 맡아보던 관청으로

역대 선왕의 어보와 어진, 왕과 왕비의 의복,

선원제파(璿源諸派)와 종실제군(宗室諸君)을 통솔하고 감독하는 기관이었다.

 

1744년 10월 7일 영조는 기로소(耆老所) 입소를 축하하는 경희궁 숭정전 진연례를 마치고

종친부에 술과 음식을 내려 종친들이 연회를 계속하도록 하였다.

 

종친부에서는 이 일을 기념하여 계병(契屛) 4좌와 족자 36건을 제작하여

당상에게는 계병을, 당하의 낭청(郎廳)에게는 족자를 나누어 주었다.

서울대 박물관 소장의 <종친부사연도>는 이 족자 중 하나로 보인다.

 

종친부 보관용과 당상에게 올릴 계병에 대해 형식과 규모를 차별화하여

낭청에게 배급한 계축이었기 때문에 궁중행사도 계축의 절반 규모인 가로 폭 64로 조성되었다.

이 길이는 일반 관청의 계회도와 비슷한 크기이다.

 

계병의 발문이 1745년 3월 하순에 쓰여진 것으로 보아,

계병 4좌와 <종친부사연도> 36건을 만드는데

두 명의 화원이 1744년 11월부터 4개월 남짓 소요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화원, 사자관, 병풍장 등 실제 제작자가 명시되어 있어서

이 그림이 도화서 화원인 함세휘, 노시빈이 담당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그림은 늦은 시각에 종친부에서 벌어진 사연(賜宴)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촛불이 밝혀진 실내에는 어찬안(御饌案) 두 개가 사선 방향으로 놓여 있고,

그 아래의 주탁(酒卓)은 어찬안과 엇갈리는 반대 방향의 사선으로 놓여 있다.

 

종친부 건물의 기단은 뒤로 갈수록 좁아지게 표현하여 건물을 안정감있게 받쳐 주지만,

그 아래 계단은 다시 찬안과 같은 방향으로 그려져 어색한 공간이 되었다.

기본적인 시각 구성은 전통적인 정면 부감에 의존하였지만,

당시의 진전된 원근과 선투시에 대한 관심이 서투르나마 부분적으로 표출된 결과이다.

 

단정한 필선과 반듯한 윤곽,

청, 녹, 적색에 한정된 화려하지 않은 채색은 전체적으로 품위와 격조를 느끼게 한다.

 

<종친부사연도>라는 제목 아래에

화면을 나누어 상단에는 제목과 영조의 전언을,

하단에는 참가자의 좌목(座目)을 기록하였다.

중앙에는 횃불을 밝히고 밤의 연회를 즐기는 종친부의 모습이

깔끔한 필선과 정제된 색채로 그려져 있다.  

 

숭정전 진연을 거행한 뒤 기로소에서는 계첩을 만들고, 종친부에서 계병과 계축을 조성하였는데

기로소에서 제작한 계첩은 <기사경회첩>이라는 제목으로 남아 있고,

종친부에서 만든 계병과 계축에 관해서는 그 제작 경위와 내력이 상세하게 기록된

<갑자년 계병등록(契屛謄錄)>이 남아 있다.

이 등록(謄錄)을 통해 관청 주도하에 관원들 중심으로 제작되는 궁중행사도의 제작과정에 대한

좀더 자세하고 구체적인 사실들을 접할 수 있다.

 

영조의 전교, 제작경위, 각 폭의 내용, 병풍과 족자를 만드는 데 소용된 물목과 가격, 총제작비용,

화원과 사자관 등 제작 실무자의 성명, 10월8일 밀창군(密昌君)의 이름으로 올린 전문,

원경하(元景夏)가 1745년 3월 하순에 쓴 발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종친부사연도>는 족친에 대한 예우로서 조선 초부터 가장 빈번한 사연 가운데 하나였으며,

종친부에서는 이것을 기념하여 기념화(記念畵)를 만드는 관습을 가지고 있었다.

이 등록에 의하면 병풍과 족자, 즉 계병과 계축의 두 가지 형식이 제작되어

관계(官階)에 따라 차등을 두어 분배되었는데, 병풍은 종친부 보관용과 당상에게만 올리고,

그 아래의 종친에게는 족자를 나누어 주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림의 형식과 규모를 달리하여 분배하는 제도는 품계에 따른 구별의 의미도 있었겠지만,

병풍의 조성에 필요한 물력과 공력이 족자에 비해 세 배 이상 많이 들었기 때문에

경제적인 사정이 좌목에 있는 인물 모두에게 동일한 도병을 분아(分兒)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던 데에 기인할 것이다.

따라서 품계에 따른 그림의 형식과 규모의 차등은

18세기 이후 계병이 주된 형식으로 자리잡은 이후에 나타난 현상이었다.

 

 <갑자년 계병등록>을 통해 확인한 사항은

  - 병풍과 족자의 좌목은 그림의 분하 대상에 맞추어 달리 하였다는 점.

  - 개인적으로 계병의 조성 비용을 각출하지 않고

     그동안 식리해 두었던 종친부의 공금으로 관아 차원에서 제작하였다는 점.

  - 종친부 보관용으로 병풍 1좌가 비치되지만,

     어람용이나 내입을 목적으로 제작되었다는 명시가 없는 점.

  -  병풍은 8첩으로서 진연도, 사연도, 진전도의 세 장면이 두 첩 혹은 한 첩에 그려진 점.

  - 족자는 사연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분하되므로, 그에 합당한 사연도가 그려진 점.

  - 공식적으로 명단에 올라간 참연(參宴) 제신(諸臣)은

     재신(宰臣) 87명, 종친 48명, 의빈(儀賓) 4명,

     숭정전에 올라가서 참연하지 못한 불승전자(不陞殿者) 61명 등 200명이었다.

     종친 48명 중에서 42명이 군(君, 2품이상)이고, 나머지는 도정(都正, 3품 당상) 2명,

     부령(副令, 종5품) 1명, 부정(副正, 3품 당하) 1명, 부수(副守, 종4품) 2명이다.

     따라서 종친부사연에는 48명 전체가 참여하지 않았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