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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사박물관] 서울이 아름답다 - (2) 고지도

Gijuzzang Dream 2008. 4. 30. 16:06

   

 

 

 

 

 

 

 도성대지도(都城大地圖) 

 

  

1754-1764년경, 종이에 채색, 213×188㎝, 2폭가리개,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지금까지 알려진 도성도 중 가장 큰 도성도이다.

모두 8장의 장지를 이어붙여 그렸으며,

현재는 두 폭의 가리개 병풍 형식으로 표장되어 있으나 원래는 절첩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도의 제작연대는

1711년 수축된 북한산성이 자세하게 그려져 있고,

'소덕문(昭德門)'이 1744년 개칭된 '소의문(昭義門)'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총융청(摠戎廳)'도 1747년부터 자하문 밖에 위치하였는데 지도에 표기되어 있고,

1754년(영조 30) 숙빈묘에서 승격된 '육상궁'(毓祥宮 : 당시에는 숙빈최씨 사당, 그 뒤 1908년-1929년

여러 제궁들을 합사하여=저경궁, 대빈궁, 연우궁, 선희궁, 경우궁, 덕안궁, 지금 명칭은 칠궁)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1764년(영조 40)에 세워진 수은묘(垂恩廟 : 사도세자 사당으로, 정조가 1776년 즉위한 이후에는

경모궁으로)가 없는 것으로 보아 1754년-1764년 사이의 영조 대로 추정할 수 있다.

 

한성부의 5部는 오방색으로 나타냈고, 도성삼군문(都城三軍門)의 分界는 점선으로 나타냈으므로

행정지도와 군사지도를 겸한 지도라고 할 수 있겠다.

또 지도의 아래쪽에 남산은 그려져 있으나

대개의 도성도에 거의 빠지지않고 그려지는 한강은 그려있지 않으며,

청계천과 합류한 중량천은 전곶교(箭串橋, 살곶이다리)까지만 그렸다.

또한 다른 도성도에서 볼 수 있는 범례나 부기 등은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도성 안이 시가지나 도로, 개천의 표시가 정확하기로는 다른 지도와 비교할 바가 되지 않을 정도로

자세하고, 인왕산, 북한산, 도봉산 등의 묘사는 자못 겸재 정선의 실경산수화 못지않은

정확성과 크기를 가지고 있는 조선 회화지도의 정수라고 말할 수 있다.

먹의 농담이 얇기는 하지만 미점(米點)과 松林 표현에서 가장 정선화풍을 닮아있다.

이 지도를 제작연대와 산수화법 등으로 보아 겸재 정선(1676-1759)의 작품으로 추측하기도 하지만,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서울육백년사> 제3권에는 '정선 作, 18세기중엽'으로 표기하고 있다.

이 지도는 다른 도성도와 비교해 볼 때 많은 양의 정보와 자세한 위치 등을 담고 있어

정밀하면서도 상세하며 커다란 지도라는 점에서 도성도의 백미로 꼽을 수 있다.

  

특히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한양도성도(漢陽都城圖)>서울대학교 규장각소장 <도성도> 등에서

보이는 화려한 색채를 가진 회화지도로서의 성격 또한 잘 보여주고 있다.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한양도성도(漢陽都城圖)>

 

 서울대학교 규장각소장 <도성도>

 

다만 다른 도성도에서 볼 수 있는 범례나 부기 등은 기록되어 있지 않은 점과

도성도에 거의 빠짐없이 그려지는 한강이 그려져 있지 않다는 사실이 특징적이다.

도성 안의 시가지나 도로, 개천(開川)의 표시가 매우 정확하고 자세하며,

인왕산, 북한산, 도봉산 등의 묘사는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 못지않은 정확성과

크기를 가지고 있어 조선 회화지도의 정수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겸재 정선(1676-1759)이 그린 지도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도성대지도>의 축척

 

도성대지도는 도성 안의 비례는 동서와 남북을 비슷하게 하였으나

도성 밖 북한산, 남한산까지의 거리를 압축하여 도성의 내외지형을 한 눈에 살펴볼 수 있도록 하였다.

 

성 안에는 대략 일보(一步)를 단위로 하여 그 수로서 길고 짧음을 삼았다.

아마도 도성 안의 묘사는 실제 거리를 비례에 맞게 축소하여 그려낸 것으로 보인다.

도성대지도에서 보면

남대문(숭례문)에서 경희궁 흥화문까지의 거리는 47㎝인데 실제거리는 12.000㎝이고,

모전교에서 광통교까지의 거리는 13㎝인데 실제 거리는 31,000㎝이므로

축적은 1 : 2,500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영조 33년(1757) 실록을 보면,

정상기(鄭尙騎, 1678-1752)가 백리척(百里尺)을 써서 제작한 <동국지도>를 왕이 보았고,

관찬지도보다 더욱 정확함에 감탄하였다고 하므로,

이후 관찬지도 뿐만 아니라 사찬지도들도 백리척을 사용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 백리척은 우리나라 지형의 특수성을 고려한 것으로,

평지는 100리를 1척으로 계산하고,

도로의 굴곡이 심한 지역은 120-130리를 1척으로 하여

차등을 둠으로써 실제에 가까운 직선거리를 계산해 내었다.

그리하여 직선거리를 실측하지 않고서도 비교적 정확하게 지도상에 표현할 수 있다고 한다.

이 방법은 실측된 직선거리가 없던 상황에서

오직 도로상의 거리만을 가지고 주변의 산천과 같은 지형적 요소들을 고려하여

각 주현의 형태를 그려내는 것인데,

정상기의 백리척 지도가 나온 이후로 백리척 지도는 새로운 유행이 되었다.

이것이 적용된 예로서 신경준의 <동국여지도, 1770>를 들 수 있다.

 

 

 

<도성대지도>의 지명

 

도성대지도에서 확인된 행정지명 - 5부(部) 42방(坊) 321계(契) 142동(洞)이다.

성 밖의 지명은 1751년 당시, 인구 희소지역 11개방이 폐지되고,

경강변에 둔지방, 두모방, 한강방, 용산방, 서강방의 5개방이 신설되었는데 이들의 이름이 보인다.

서울의 도시 공간이

조선초기 도성 안에서 조선후기에 이르러 점차 도성 밖으로 확대되었던 모습을 알 수 있다.

 

대개의 지도에서 5부의 경계를 나누는 것은

오방색(청, 백, 적, 흑, 황)을 기본으로 하여 구별하였으나 도성대지도에서는 확인할 수 없다.

 

지도의 방위는 위를 북쪽으로 하고, 아래를 남쪽으로 하였으나

도성 중심부에서 사방을 둘러보는 관점으로 지명들을 나열하였기 때문에

청계천 이남의 지명들은 바로 읽을 수가 없다.

 

지도의 내용을 살펴보면, 이 지도에 나타난 지명 중 많은 부분이 오늘날까지 남아있어

현재 동명이나 가로명 등이 연유한 뿌리를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밖에 도성 안의 사대문, 사소문, 궁궐, 종묘와 사직, 산천, 강, 관아, 정자, 창고, 누각, 교량, 포구,

명소, 동리, 거리 , 학교, 고개, 못(池) 등이 자세히 나타나 있다.

 

한편, 3군(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이 나누어 담당하는 구역의 경계는 푸른 점으로 나타냈다.

3군이 분할한 구역을 다시 左, 右, 中, 前, 後 5개 구역으로 나누었는데,

훈련도감의 관할구역인 북서부 - 訓左, 訓右, 訓中, 訓前, 訓後

금위영의 관할구역인 남서부 - 禁左, 禁右, 禁中, 禁前, 禁後

어영청의 관할구역인 동부 - 營左, 營右, 營中, 營前, 營後를 적어 놓았다.

   

 

<도성대지도>의 기호

 

남북의 방향은 북-자(子), 남-오(午)로 나타냈다.

다리는 규모와 재질에 따라 구별을 했는데 작은 다리이름은 생략한 경우가 많다.

 

 

궁궐 내부의 모습은 대표적인 전각의 큼직한 기와지붕을 그려 넣음으로써 갈음하였다.

가장 큰 경복궁은 경회루의 석주와 정문인 광화문의 석축과 석주만이 남아

임진왜란 때 소실된 이후 아직 재건되지 않은 상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관공서를 나타낼 때, 노란색 바탕에 먹글씨 둘레는 모나게 두른 경우와

분홍바탕에 먹글씨 둘레를 붉은 선으로 모나게 두른 경우가 있다.

 

 

개천은 그 크기와 너비를 두 개의 검은 실선으로 표현하였다.

 

<대전회통, 고종 2년(1865)에 편찬>에 의하면

도성 안의 도로와 대로는 너비 56척, 중로는 16척, 소로는 11척이며,

길 양옆의 도랑 너비는 각 2척이다.

 

  

 

 

 

 

 

 

 

조선성시도(朝鮮城市圖)

 

 

1830년(순조 30), 필사본(종이에 채색), 86×66㎝, 서울역사박물관 소장(이찬 기증)

 

 

 

서울지역을 그린 일종의 도성도로, 원래는 10매로 된 지도집에 포함되어 있던 것이다.

 

지도에는 도성과 북한산성, 탕춘대성, 4대문과 4소문 등이 그려져 있고,

도성 내 3군문(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의 분계가 묵선으로 표시되어 있다.

또한 사대문과 사소문을 통해서 도성 밖으로 연결되는 도로도 표시되어 있으며,

도로망은 붉은 색이며, 하계망과 산은 청록색으로 채색하였다.

 

도성 내의 개천과 개천의 지천(支川), 다리, 도로망,

5부(部)와 방동(坊洞)의 행정구역이 자세히 표시되어 있다.

 

5부(部) - 한성부의 관할구역은 중부, 동부, 서부, 남부, 북부의 5부로 나누고

태조 때 5부 52방(坊)으로 나누어서 관할하였다.

세종 때 5부 49방(坊) : 서부의 영견방, 인지방, 취현방을 폐지

어느때 변동되었는지 확실한 것을 알 수 없으나,

영조 27년(1751) 반포된 수성책자 「도성삼군문분계총록」에서는 5부 43방 329계(契)로

고종 3년(1866) 반포된 육전조례에는 동부에 경모궁방이 신설되어 5부 47방 339계(契)로

고종 31년(1894) 갑오경장 때에는 5부(부)를 5서(署)로 고쳐서, 5서 47방 228계 775동으로 하였다.

 

동부(12坊)는 연희방, 숭교방, 천달방, 창선방, 건덕방, 성덕방, 서운방, 연화방, 숭신방, 인창방, 관덕방,

                흥성방

서부(11방)는 영견방, 인달방, 적선방, 여경방, 인지방, 황화방, 취현방, 양생방, 신화방, 반석방, 반송방

남부(11방)는 광통방, 호현방, 명례방, 대평방, 훈도방, 성명방, 낙선방, 정심방, 명철방, 성신방, 예성방

북부(10방)는 광화방, 양덕방, 가회방, 안국방, 관광방, 징청방, 순화방, 명통방, 준수방, 의통방

중부(8방)는 정선방, 경행방, 관인방, 수지방, 진정방, 장통방, 서린방, 견평방

 

 

궁궐은 터만 남아있는 경복궁을 비롯하여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이 표시되어 있다.

그러나 1760년(영조 36) 이후의 이름인 '경희궁(慶熙宮)'이 '경희궁(景禧宮)'으로 표기되어 있다.

도성의 북쪽문은 숙정문(肅靖門)이 아닌 숙청문(肅淸門)으로 표기되어 있다.

도성 내에는 문묘, 사직, 경모궁, 영희전 등이 표시되어 있고,

특이하게도 원각사지 석탑이 그려져 있는 점이 눈에 띈다.

 

도성 밖으로 동관(왕)묘=동묘와 남관(왕)묘가 있고,

목멱산(木覓山)과 안현(鞍峴)에 봉수대가 그려져 있다.

도성을 휘감아 흐르는 한강과 한강 너머의 관악산을 표현하고 있다.

한강과 사천(沙川), 중량천(中梁川) 등의 하천과 도진(渡津)도 표시되어 있다.

 

지도의 우측 여백에는

태조대 도성 축조에 동원된 전국의 민정(民丁)의 수가 총 20만이라는 기록과

도성의 둘레가 9,975보, 높이가 48척2촌이고, 거민(居民)은 30,7233호(戶)임을 기록했다.

그리고 모서리에 '庚寅 三月' 1830년 3월에 지도를 그렸다는 기록이 있어 제작시기를 알 수 있다.

지도의 배면(裏面)에는 서울의 행정구역인5부 49방의 명칭을 부(部)별로 열거해 기록했다. 

 

 

 

 

 

 

대동여지도 - 도성도(보물 제850호)  

 

1861년(철종 12), 목판채색, 29.9×40㎝,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고산자(古山子) 김정호(金正浩)가 만든 분첩절첩식(分疊折帖式) 전국지도.

현재 알려진 것 가운데 최고의 선본(善本)으로 보물 제850호이다.

총 21첩으로 되어 있으며 모두를 아래위로 맞추면 전국지도가 된다.

 

제1첩에는 지도류설(地圖類說), 경도(京都) 및 각도인물수(各道 人物數), 지도표(地圖表),

경조오부도(京兆五部圖) 등이 수록되어 있고,

제2첩부터 제21첩까지는 전국지도이다.

<동여도>와 거의 유사한 내용을 담고 있으나 상호보완적인 내용을 수록하고 있기도 하다.

 

 

지도는 지방의 군현(郡縣), 산천(山川) 등이 주요부분을 이루고 있다.

각 군현간의 도로가 표시되어 있고 10리마다 구획이 지어져 있다.

또한 영위(營衛), 읍치, 성지(城池), 진보(鎭堡), 창고, 목소(牧所), 방리(坊里), 봉수, 능침, 고현(古縣),

고진보(古鎭堡), 고산성(古山城), 도로, 도진(渡津) 등이 표시되어 있다.

 

서울역사박물관 소장본은 성신여대박물관 소장본과 더불어 보물 제 850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성신여대박물관, 서울대 규장각, 국립중앙도서관 등의 소장본에는 없는

경도(京都) 및 각도 인물수(各道 人物數)가 기록되어 있어 더욱 높은 가치를 가지고 있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과 숭실대박물관에 대동여지도의 판목이 일부 남아있다.

  

  <도성도> 29.9 ×20㎝ / 1861년(철종 12) / 서울역사박물관

 

대동여지도와 동여도 제1첩에는 2점의 서울관련 지도가 포함되어 있다.

하나는 <도성도(도성도)>이며,

다른 하나는 도성을 중심으로 서울의 내사산(내사산)을 그리고

도성 밖으로 삼각산과 한강, 중량천, 난지도까지 그린 <경조오부도(경조오부도)>이다.

이 제1첩을 펼치면 옆으로 긴데 그 오른쪽 좌우로 나란히 그린 이 지도에는

도성 안은 텅 비우고, 그 외곽을 그린 지도에는 아무런 이름을 쓰지 않았다.

이 지도는 서울이 4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명소나 궁궐 등은 전혀 표기하지 않았으며, 大路만 몇 개 그려 넣었다.

 

<도성도>는 <경조오부도>가 도성 안이 모습을 자세히 그리지 못하는 단점을 보완하여,

도성 안을 자세히 그리고, 도성 주변인 성저십리(城底十里)까지 그렸다.

도성 안의 지명, 도로, 궁궐, 다리, 하천, 성곽 등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1861년 교간(校刊) 후 궁궐은 노란색, 산은 푸른색, 길은 붉은색, 내천은 푸른색으로 엷게 칠했다.

이 지도에서 볼 수 있는 산세나 화법은

1840년대에 김정호가 제작한 것으로 되어있는 <수선전도>와 산세나 화법이 아주 유사하다.

작은 목판에 정교하게 표현되어 있다.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1861년 / 29.9 ×20㎝ / 종이에 색 / 서울역사박물관

 

고산자 김정호가 1861년(철종 12)에 발간한 약 16만분의 1 대축척 지도이며, 22첩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지도 전체를 이어 붙인다면, 세로 6.6m ×가로 4.0m 의 크기가 된다.

 

<대동여지도>는 지도에 축척을 명시한 축척지도이며, 경위선표식(經緯線表式) 지도이다.

경위선표는 오늘날의 지도에서의 경위도좌표(經緯度座標)가 아닌

단순한 가로 세로의 눈금선을 뜻하며,

경위선표식 지도는 17세기 후반 이후 우리나라 지도에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김정호는 우리나라를 북쪽에서 남쪽으로 120里 간격으로 구분해

우리나라 전체를 22층으로 구분하여 그것을 각 1첩의 지도로 만들고,

22첩을 차례로 연결시키면 우리나라 전도가 되도록 고안하였다.

그리고 이 지도의 한 첩(帖) 또는 층(層)은 동서로 80里 간격으로 끊어서 한 版으로 하고,

그것을 병풍처럼 접어서 한 첩을 만들었다.

이 지도에서 병풍처럼 접었던 자리를 보면

강원도의 강릉에서 강화도까지 9版으로 되어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지도 첫머리인 제1층에

①좌표(座標): 어떤 위치나 점의 자리를 나타내는 대에 표준이 되는 표

②지도표(地圖標): 지도의 범례

③지도유설(地圖類說): 지도제작의 경위, 지도의 중요성, 지도의 도법, 지도의 실요 가치 등의 설명

④도성도(都城圖)

⑤경조오부도(京兆五部圖): 도성의 행정구역도

⑥부록에 해당하는 각종 통계가 양면에 실려있다.

 

 

<대동여지도>는 1834년에 김정호가 발간한 <청구도>를 발전시켜 약 27년 뒤에 만든 지도이다.

<청구도>는 책으로 되어 있어서 여러 지역을 잇대어 같이 볼 수 없는 단점이 있어서

이 단점을 개선한 것이 <대동여지도>이다.

그리고 <청구도>는 필사본이므로 많이 만들 수 없으나

<대동여지도>는 목판 인쇄본이므로 다량으로 찍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대동여지도>의 특징의 하나는 山系와 水系를 효과적으로 표현한 점이다.

산줄기의 굵기로 크고 작음을 가늠할 수 있게 하였고,

또 중요한 산은 산줄기 안에 따로 표시함으로써

산맥과 개개의 山도 어느 정도 알아볼 수 있게 하고 있다.

 

범례를 <대동여지도>에서는 ‘지도표(地圖標)’라고 했으며,

관아, 읍치, 성지(城池), 역참, 진보(鎭堡), 창고, 목소(牧所), 봉수, 능침, 방리(坊里), 고현(古縣), 도로

등을 부호로 표시하고 있다.

 

<대동여지도>는 조선시대 지도학의 결정체로서,

지도첩의 양식을 본떠 분첩절첩식(分帖折疊式)으로 만들어 일반인이 편리하게 사용하도록 하였으며,

산지를 이어진 산줄기의 형태로 표현하여

전통적인 산경원리(혹은 山水分合의 원리)를 반영하여 그 정확함이 현행의 지도와 큰 차이가 없다.

 

김정호는 <대동여지도>에서 이전 지도에서 볼 수 없었던 방식으로 축척을 표시하였다.

<대동여지도>를 펴면 원고지같이 눈금이 그려져 있는 면이 보인다.

가로로 8개, 세로로 12개의 눈금이 그려져 있는데

이 한 개의 눈금(方眼)에 '매방(每方) 10리'라고 기록하여

눈금 하나가 10리임을 명시하였다.

 

또 '매편(每片) 종(縱) 120리, 횡(橫) 80리'라고 기록하여

지도의 한 면(片)의 동서 길이가 80리, 남북 길이가 120리임을 나타냈다.

하나의 눈금 즉 10리가 2.5cm이고,

지도 한 면이 동서로 80리이므로 20cm, 세로는 120리이므로 30cm가 된다.

 

지도상에서 축척은 일반적으로 거리를 가늠하는 데 사용된다.

<대동여지도>는 한 면이 120리×80리로서 쉽게 거리를 짐작할 수 있도록 고안된 것이다.

 

축척은 지도 내용 속에도 표시되었다.

도로는 직선으로 표시되었는데, 이는 이전의 지도에서 거의 볼 수 없는 방식이었다.

이는 <대동여지도>가 목판본이기 때문에 흑백으로 인쇄될 수밖에 없었고

곡선으로 표현되는 하천과의 중복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그것이 오히려 도로를 명확히 인식시키는 역할을 하였으며,

또한 하천과 더 명확히 구별하기 위해 도로 위 10里마다 점을 찍어 거리를 나타냈는데,

이러한 거리․축척 표시 방법은 <대동여지도>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이다.

 

특히 도로상의 10리 점은 그 간격이 일정하지 않다.

평탄한 지역에서는 10리 간격이 멀게, 산지가 있는 곳에서는 10리 간격이 가깝게 표시되었다.

이는 10리 간격의 점이 지도의 축척을 나타냈을 뿐만 아니라 지형적인 조건을 알려주며,

지점과 지점간의 직선 거리가 아닌 도로상의 거리를 표현한 것임을 알게 한다.

10리 간격의 점은 축척과 함께 길의 거리를 알려 주어

실제 지도 이용자의 입장에서는 매우 편리함을 주게 되는 장점을 보인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는

서양 지도학의 영향을 받지 않고 동양의 전통적인 도법을 이어받아 집대성한 것인데,

위치의 설정에 있어서 중강진(中江鎭) 부근이 북쪽으로 약간 치우쳐 있고,

울릉도가 남쪽으로 내려온 것을 제외하면 오늘날의 지도에 손색이 없을 정도로 정확하다.

 

이때까지의 대부분의 지도에 군현(郡縣)의 경계가 표시되지 않았으나

이 지도에서는 점선으로 군현의 경계를 명료하게 표시하고 있다.

이 지도는 일제시대의 근대식 5만분의 1 지도 작성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만든 것은

신헌(申櫶) 등 고급관리의 도움을 얻어 정부에서 가지고 있던 고지도들을 볼 수 있었고,

또 최한기와 최성환 등이 가지고 있던 자료들을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동여지도>는 기본적으로 실측지도가 아니라 편집지도인 것이다.

  

<대동여지도>의 版木은 전체가 227面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목판 한 판은 40㎝ ×30㎝ 크기이며,

2面(版)씩을 새기고 있어서 목판의 판수는 126版이다.

그리고 실제 판목은 보통 양면에 판각하고 있으므로

실제의 판목수는 그 판수의 1/2, 그러므로 목판은 총 60여 枚가 되는 셈이다.

 

 

 

현재 <대동여지도>의 목판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총 11장(지도 25면),

숭실대학교 기독교박물관에 1장(지도 2면)이 남아 전해지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대동여지도> 목판의 재질은 피나무이며, 

크기는 가로 41-42.5cm, 세로 29.7-31.3cm, 두께 1.0-1.5cm이며

숭실대본은 가로 42.2cm, 세로 31.8cm, 두께 1.0-1.5cm이다.

 

목판은 각종 지명, 산줄기, 하천, 관방, 역원, 봉수(烽燧) 등 다양한 요소를 기호로서 표시하였는데

판각의 기법이 매우 정교하다. 이들 목판에는 이후에 수정했던 흔적도 남아 있는데,

함경도 장진의 십만령 부근의 경계, 경상도 초계의 삼학진, 경상도 성주의 안언역 등이 대표적이다.

이전의 오류를 고쳐 좀더 나은 지도를 만들고자 했던 그의 열정을 엿볼 수 있다. 
 
 

  

 

 

 

 

 

 

한양경성도(漢陽京城圖) 

 

1900년, 26.0×34.7㎝, 서울역사박물관 소장(허영환 기증)

 

이 지도는 서울의 도성 내부와 도성 밖 인근 지역까지 포함한 도성도로,

제명(題名)은 <한양경성도(漢陽京城圖)>이다.

1900년(광무 4) 대한제국 학부편집국에서 발간한 지리교과서 <세계전도(世界全圖)> 안에

수록되어 있는 부속지도이다. 

서울의 이름이 복합적으로 즉, '한양도'도 아니고 '경성도'도 아니고 '한양경성' 표기된 점은

1890년대 초부터 1910년 무렵까지 제작된(조선과 일본에서) 서울지도에서 볼 수 있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부터는 '경성도, 경성부도, 대경성도' 등으로 표기하고 있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제1첩 왼쪽에 있는 서울지도(도성도)와 형태가 비슷하며,

축척과 범례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산세를 우모식(羽毛式)으로 표현하고,

북쪽을 가리키는 방위표가 있으며,

지도명이 지도 우측 상단에 있는 점 등이 다르다.

 

이 지도에는 각국 공사관들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는데,

현 덕수궁 주변에 '러시아공사관(俄公署)', '독일영사관(德領事)', '영국영사관(英領事)' 등이

집중적으로 표기되어 있다.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인 안국방 옆에는 '구독일영사관(舊德領事)'이 표기되어 있다.

남산 아래에는 '일본공사관(日本公使館)'이,

서대문 밖 천연정 옆에 '구일본공사관(舊日本公使館)'이 표기되어 있다.

독립관(獨立館)과 독립문(獨立門)이 아직 '모화관(慕華館)'과 '영은문(迎恩門)'으로 표기되어 있다.

1890년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되는 러시아공사관과 영국공사관이 지도에 표기되어 있고,

독립문이 1897년 건축되었음을 통해 볼 때 1890년에서 1897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경복궁, 경희궁, 창경궁, 창덕궁, 한양의 각 문들이 표시되어 있다. 

  

 

  

 

 

 

 

  

 

고지도첩(古地圖帖) 中 경기도 부분  

 

1676년(숙종 2), 18세기 후반, 목판인쇄, 31.5×36㎝, 화정박물관 소장

 

조선후기 민간에 널리 유포되었던 목판본 여지도첩(輿地圖帖)이다.

여지도첩은 세계지도인 <천하도(天下圖)>를 비롯하여 중국, 일본, 유구(琉球) 등 외국지도와

강원, 경기, 경상, 전라, 황해, 충청, 평안, 함경 및 <동국팔도대총도(東國八道大總圖)> 등의

우리나라 지도가 같이 수록된 지도책이다.

 

<동국팔도대총도(東國八道大總圖)>

 

조선시대에는 원칙적으로 민간에서의 지도 제작이나 소장을 금기했으나

17세기 이후에는 드문 경우이지만 민간에서도 지도를 소장하고 목판본으로 제작하기도 했다.

이 지도첩도 민간에서 이용되던 것으로 생각된다.

 

 

 

 

 <원형 천하도>

 

지도첩의 제일 처음에는 가장 전형적인 유형의 <원형(圓形) 천하도>가 실려 있다.

당시 사람들의 세계관을 나타낸 천하도는 지구를 상징하는 둥근 원 안에 천하가 그려져 있는데

중앙의 대륙에는 중국을 중심으로 조선, 안남국(安南國), 월지(月支), 오손(烏孫), 대완(大宛) 등의

실재하는 나라들이 보인다.

그 외곽 바다와 바다의 바깥쪽을 원형으로 둘러싼 대륙에는

일본국, 삼수국(三首國), 관흉국(貫胸國) 등 중국의 고전인 <산해경(山海經)>에 나오는

가상의 나라들이 섞여 있다.

 

천하의 동쪽과 서쪽 끝에는 신성한 나무가 그려져 있는데,

동쪽의 '유파산(流波山)' - 해와 달이 뜨는 곳에는 부상(扶桑)이,

서쪽 '방산(方山)' - 해와 달이 지는 곳에는 반격송(盤格松)이 그려져 있다.

부상의 왼쪽에는 감연(甘淵)이 있고,

바깥의 고리와 안쪽의 대륙 사이에는 신선들이 산다는 삼신산(三神山)인

방장, 영주, 봉래의 세 섬이 크게 표시되어 있으며, 조선에 붙어서 일본이 표시되어 있다. 

경기지도를 보면

서울을 비롯한 유수부, 부, 목, 군, 현 등 도시의 지명은 둥근 원 안에 쓰여 있다.

각 지명의 우측에는 서울로부터 걸리는 일수(日程)를 적어넣고, 거리를 간접적으로 표시하였다.

즉 이천(利川) 오른쪽에 ‘二’라고 기록한 것은 서울에서 이틀 걸리는 거리라는 뜻이다.

거리를 표시하는 방법은 절대거리 표시법과 시간거리 표시법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이 지도는 서울에서 얼마나 먼 지역인가를 시간거리 즉 일정(日程)으로 나타낸 것이다

군현사이의 도로를 직선으로 표시하고, 도로 위에는 군현간의 거리를 기록하였다.

 

조선시대의 지방행정 체계는 도(道) 아래에 부(府), 목(牧), 군(郡), 현(縣)이 있었으며,

부와 목에는 종3품 부사와 목사가, 군에는 종4품 군수가 파견되었다.

현에는 종5품 현령(縣令)이 파견되는 고을과 종6품현감(縣監)이 파견되는 고을이 있었다.

그러므로 지명의 좌측에는 각 군현의 품계에 따라

유(留), 부(府), 목(牧), 수(守), 감(監), 령(令) 등 각 도시 지방관의 약칭을 넣어

도시의 위상을 알 수 있게 하였다.

현존하는 여지도첩 중 이처럼 빠진 부분없이 완전하게 갖춰진 내용은 드문 예이다.    

 

  

 

  

 

 

 

 

 

  사산금표도(四山禁標圖)

  

1765년(영조 41),  66.2×130.0㎝, 서울역사박물관 (허영환 기증)

 

서울 도성과 도성주변 지역 즉 한성부의 관할구역 내 사방의 산에 경계를 정하여

금표(禁標)를 세워 묘지를 쓰거나 소나무 벌목을 금하는 내용을 담은 특수 목적의 지도이다.

지도는 도성과 도성 내부의 궁궐과 종묘, 성균관, 청계천 등을 아주 소략하게 그렸으나

도성 주변의 산천은 산줄기와 수계를 비교적 자세하게 그리고,

지도 상단부에는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사산금표도>의 판각 시기는 '乙酉 八月'이라는 간기(刊記)를 통해서 

대체로 1765년(영조 41)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지도에 영조대에 경희궁(慶熙宮)으로 명칭이 바뀐 경덕궁(慶德宮)의 명칭이 그대로 사용되고 있고,

1711년(숙종 37) 이후 축성된 북한산성, 탕춘대성, 홍지문 등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경덕궁이 경희궁으로 명칭이 바뀌는 1760년(영조 36) 이전,

북한산성 축성 이전인 1705년(숙종 31)으로 볼 수 있다.

현재 이 지도는 규장각, 고려대학교, 영남대학교, 성신여자대학교 등지에 6점이 남아 있다.

  

▲ 재식(栽植)

나무를 재배하고 배양하는 일은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보면 공조(工曹)에 속해 있다.

우선 서울 도성의 내외산(內外山)에 표를 세우고 그 근처의 사람에게 구역을 나누어주어

벌목(伐木)의 금지와 동시 돌을 떠가는 것을 금지하도록 하였으며,

나무를 배양하는 사람으로 감역관(監役官), 또는 산지기 등 많은 사람을 두었다.

이중 감역관과 산지기는 병조(兵曹)에서 정하고

감역관은 군직(軍職)에 속하는 자로서 군인과 같은 대우를 받았다.

그리고 산지기는 민간인을 특별히 채용하여 교대로 산과 나무를 돌아보며 맡은 임무를 수행하게 했다.

이들의 임무는 나무를 가꾸는 일과 산에서 돌을 떠가는 사람을 감시하며

경작하는 일이 없도록 감시하는 것이다.

 

 

서울의 사산(四山)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경복궁과 창덕궁의 주산(主山)과 그 내맥(來脈)의 산을 보호하는 일이다.

원래 삼각산(三角山)을 정점(頂點)으로 하여 동서로 뻗쳐있는 산을 외산(外山)이라 하고

도성을 중심으로 그밖의 가까운 곳을 내산(內山)이라 하였다.

그 중에도 경복궁과 창덕궁의 주산의 내맥(來脈, 東龍)과 산배(山背, 산의 뒤),

그리고 산록(山麓)까지도 경작하는 것을 엄중하게 금지하고 감시하였다.

단 내맥 중의 외산에는 산척(山脊)만 금경(禁耕), 금송(禁松)하였으니

즉 삼각산의 뒷면은 엄중하게 감시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로써 보면 삼각산의 내맥으로부터 서울로 들어오는 모든 산은 금지구역에 해당되고

그 뒷면만을 그대로 둔 셈이다.

그러므로 도성의 주산 내맥과 남산(南山)의 양면 성벽까지 모두 금지구역으로 되어갔다.

그리하여 서울의 성문 밖에도 여러 가지 나무가 무성하여 풍경을 좋게 해주기도 하였다.

 

조선 초기에 송도에서 들어온 고관들이 처음에 서울에 들어와 살기 좋은 곳을 골랐다.

이 때 지금의 명륜동(明倫洞) 산수가 좋다 하여 잡은 곳이 향교동(鄕校洞)으로

지금의 동소문(東小門) 안 성균관(成均館) 근처였다.

또 다른 한 곳은 남대문 밖에서 서쪽으로 약 5리 떨어진 만리재 근처였다.

이러한 곳은 그 당시에는 그다지 소나무가 무성하지 않고 대개 빈터로서

대가(大家)들이 차지하여 자기의 원림(園林)을 만들었고

풍치(風致)가 좋은 곳을 찾아 자기들의 큰집을 만들기도 하였다.

그런 중에 소나무가 송충이 때문에 산이 헐벗어 가므로

공조(工曹)에서 경승지에 소나무를 많이 심고 이러한 곳을 살리기 위하여

공조와 한성부의 당하관(堂下官)들과 자주 회동(會同)하여

산림을 보호하기 위하여 각자 그들이 순회하는 구역을 정하였다.

 

이 때 소나무만을 보호하였을 뿐 아니라 돌도 엄중히 감시하였다.

돌은 큰 것은 집을 지을 때 주춧돌로 사용하고 작은 돌은 온돌을 놓는데 사용되었다.

이러한 것을 순시하며 벌목하는 자나 혹은 벌석(伐石)하는 자가 있으면

즉시 관에 고발하여 처벌하도록 하였다.

나무를 벌취(伐取)하거나 돌을 채석(採石)한 자에게는 장(杖) 90에 처하고

그 구역을 맡아보던 자나 또 산지기에는 장(杖) 80에 처한다.

그리고 당해관(當該官)은 장(杖) 60에 처한다.

 

이것 역시 사산(四山)의 나무와 돌을 가져가는 사람을 엄중하게 감시하기 위하여

정해 놓은 엄중한 처벌규정이라 하겠다.

그리고 채취한 나무나 돌은 관에서 몰수하고

그 중 나무는 벌채한 자에 대하여 그 수만큼 심으라 하였다.

그러나 도벌한 자를 잡기 힘들었으므로 때로 사문(死文)이 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서울의 사산(四山)에 소나무를 보호하므로 나무는 언제나 무성하였다.

그러나 성의 가까운 곳에 사는 사람 중에는 도벌하는 자가 있어

사산 근처에는 항상 나무가 무성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사람이 많이 살고 있으므로 나무를 보호할 수 없는 까닭이라 하겠다. 

 

 

 四山禁標

 

●東道

大菩洞澗水東流. 過水踰峴之北. 入牛耳川下流. 南下過上下伐里長位松溪橋. 至中梁浦. 以川爲限.

(대보동간수동류 과수유현지북 입우이천하류 남하과상하벌리장위송계교 지중량포 이천위한)

대보동 시냇물이 동쪽으로 흘러 수유의 북쪽을 지나 우이천 하류로 들어가고,

남쪽으로 내려가 상벌리․ 하벌리와 장위의 송계교를 지나 중량포에 이르는데 시내를 한계로 삼는다.

 

南道

中梁浦川流. 歷箭串橋新村. 至豆毛浦. 以川爲限. 自豆毛浦西. 至龍山以江爲限.

(중량포천류 역전곶교신촌 지두모포 이천위한 자두모포서 지용산이강위한)

중량포 시냇물이 전관교(살곶이다리)와 신촌을 지나 두모포에 이르는데,

시내로 한계를 삼고, 두모포에서 서쪽으로 용산에 이르러 강으로 한계를 삼는다.

 

●北道

大菩洞之西. 歷普賢峯. 至猪噬峯一支卯落. 爲猪噬峴.

西起爲峨嵋山. 逶迤而西. 延曙舊舘基. 歷大棗里至石串峴西南兩川合流處. 以山背爲限.

(대보동지서 역보현봉 지저서봉일지묘락 위저서현

서기위아미산 위이이서 연서구관기 역대조리지석관현서남양천합류처 이산배위한)

대보동 서쪽에서 보현봉을 지나 저서봉에 이르는데, 한 줄기 묘락이 저서현을 이룬다.

서쪽의 아미산으로부터 시작하여 구비쳐 흘러 서쪽으로 가면 연서 구관의 터가 되며,

대조리를 지나 석관현 서남쪽의 두 시내가 합류하는 곳에 이르러 산등성이를 한계로 삼는다.

 

●西道

自石串峴兩川合流處. 西南至時威洞. 以川爲限. 自時威洞南.

至沙川渡. 有谷路. 以路爲限. 自沙川渡. 南流過城山之東.

又西折而至望遠亭. 以川爲限. 自望遠亭至麻浦. 以江爲限.

(자석관현양천합류처 서남지시위동 이천위한 자시위동남

지사천도 유곡로 이로위한 자사천도 남류과성산지동

우서절이지망원정 이천위한 자망원정지마포 이강위한)

 

此乃四山禁葬界限. 而禁松則東北至楊州界. 西高陽界. 南與禁葬同.

(차내사산금장계한 이금송즉동북지양주계 서고양계 남여금장동)

 

乙酉 八月 日

 

석관현의 두 시내가 합류하는 곳에서 서남쪽으로 시위동에 이르러 시내를 한계로 삼고,

시위동에서 남쪽으로 사천도에 이르면 골짜기 길이 있으니 이를 한계로 삼는다.

사천도에서 남쪽으로 흘러 성산의 동쪽을 지나 다시 서쪽으로 꺾이어

망원정에 이르러 시내를 한계로 삼으며, 망원정으로부터 마포에 이르러 강을 한계로 삼는다.

이것은 사산의 금장 한계이며,

금송은 동북으로 양주 경계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고양 경계에 이르는데, 남쪽은 금장의 한계와 같다.

을유년(176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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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성 10리 안에서의 투장(偸葬)의 금단은 다음과 같이 한다.

대보동(大菩洞) 유현(踰峴) 북쪽으로부터 우이천(牛耳川) 하류로 들어가

남쪽으로는 상하벌리(上下伐里), 장위(長位), 송계교(松溪橋), 신촌(新村)에 이르고,

두모포(豆毛浦)에 이르러서는 시내를 한계로 한다.

두모포 서쪽으로부터 용산에 이르러서는 강을 한계로 한다.

 

북쪽은 대보동 서쪽에서 보현봉(普賢峯)을 거쳐

저서봉(猪噬峯)의 한 줄기 묘락(卯落)이 저서현(猪噬峴)이 되며,

서쪽으로 아미산(峨眉山)에서 시작하여 서쪽으로 구비쳐 흘러 연서(延曙) 구관(舊舘) 터가 되며,

대조리(大棗里) 석관현(石串峴)을 지나 두 시내가 합쳐 흐르는 곳에서 산등성이를 한계로 한다.

 

서쪽으로는 석관현 서남쪽의 두 시내가 합류되는 곳에서부터

서남쪽으로 시위동(時威洞) 남쪽 사천도(沙川渡)에서 남쪽으로 흘러 성리(城里)를 지나고,

또 서쪽으로 꺾이면 망원정(望遠亭)에 이르는데 시내로 한계를 삼는다.

망원정에서부터 마포(麻浦)에 이르러서는 강을 한계로 삼는다.

 

경성 10리 안에다 장사(葬事)를 지내면 원릉(園陵)의 수목을 도벌한 자를 처벌하는 율(律)로 논죄하고,

기한을 정해 파서 옮기게 한다.

본부에서는 송사(訟事)로 인하여 발각된 것과

적간(摘奸)하라는 특교(特敎)로 파서 옮기는 것 이외에 몰래 장사하는 것 등의 일은

군문(軍門)과 네 도(道)에 이속(移屬)시켜 맡아 거행하게 한다.

  

 

  

 사산금표도(四山禁標圖)

 

 

서울 도성 안은 말할 것도 없이 도성 밖(城底) 10里 안에서는 장지(葬地)를 만들지 못하게 하고,

또 송림(松林)의 벌채를 금지하는 표석(標石)을 세운 경계를 나타낸 지도이다.

 

이 지도는 상하 2단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체의 반쯤되는 상단에는 그 外側 경계를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동쪽은 우이산(牛耳川)에서 시작하여 한강으로 유입하는 중량천을 경계로 하고,

남쪽은 한강,

북쪽은 보현봉(普賢峯), 저서봉(猪筮峯), 아미산(峨眉山), 연서구관기(延曙舊館基)에,

서쪽은 석곶현(石串峴)에서 사천(沙川)을 거쳐 망원정(望遠亭)에서 한강에 연결된다”는 내용이다.

 

이 경계를 대강 보면,

동북쪽의 우이동 발원지로부터 시작하여

우이천 하류, 장이도, 중량포, 전곶교, 두모포, 한강, 망원정, 성산리, 아미현, 대조리, 연서구관기,

아미산, 비봉, 문수봉, 북한산, 삼각산을 거쳐 다시 우이천 발원지로 이어진다.

 

18세기 영조와 정조 연간에 우리나라의 인구는 급격한 증가추세를 보였고,

산업의 발달도 활발하였다. 특히 한양인구는 임진왜란 전보다 두 배 늘어 20만명이나 되었다.

이러한 인구의 팽창은 당시의 수도권내의 山林이 남벌 당하고 葬地의 확산이 심화되어

결국, 정부에서 취한 조치의 하나로 추정된다.

 

이 지도는 사산에서의 금장(禁葬)과 금송(禁松)의 내용을 실은 글과 그 내용을

알기 쉽도록 지도를 첨부했다는 사실에서

이 시기에 이미 지도가 널리 보급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할 수 있게 한다.

 

이 지도의 제작연대는 지도에 경덕궁(慶德宮)이 있으므로 영조 36년(1760) 이전임을 알 수 있으나,

상단에 있는 글의 말미에 ‘乙酉八月’이라는 刊記가 있으므로 영조 41년(1765)이 틀림없다.

즉 1765년에 이 글을 쓰면서 첨부한 지도는 수정된 것이 아니고,

그 이전에 작성된 지도를 이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지도에 만든 해(乙酉)를 밝힌 것은

조선시대 서울지도 가운데에서는 아주 드문 경우여서 이 지도의 가치를 더해주고 있다.

 

 

사산금표도의 판각시기 다른 해석 】

- 刊記를 통해 대체로 1765년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①지도에 영조대에 경희궁으로 명칭이 바뀐 경덕궁의 명칭이 그대로 사용되고 있고

②1711년 이후 축성된 북한산성, 탕춘대성, 홍지문 등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경덕궁이 경희궁으로 명칭이 바뀌는 1760년 이전,

북한산성 축성 이전인 숙종 31년(1705)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조선시대에도 그린벨트와 유사한 개념이 있었다.

금산(禁山, 혹은 사산, 四山)제도란 것인데,

서울 주변의 산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벌채와 토석의 채취를 엄금하던 일이다.

지방에도 이런 제도는 있었지만 그 목적이 목재용 소나무 보호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성격이 좀 다르다.

 

금산의 운영은 왕권의 절대적 관심 속에 가혹한 처벌을 규정하여 엄격하게 이루어졌다고 한다.

 

「경국대전」은 금산에서 벌목이나 채석을 하는 자는 곤장 90대에 처하고

벌채한 자로 하여금 그 수대로 나무를 다시 심도록 하고 있다.

실제로는 이 규정보다 더욱 가혹하게 시행되었는데

세조 때 기록을 보면 나무 한두 그루를 베었는데도 곤장 100대를 치고

열 그루 이상을 베었으면 곤장 100대에 온 집안을 변방으로 이주시켰던 적도 있다.

 

이것은 참 재미있는 제도이다. 나무를 베었으면 그 수대로 다시 심으라는 것이니 합리적이기도 하다.

 

조선 왕조는 그들의 왕권이 서울의 땅 기운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맥이 흐르는 산들을 철저히 보호하기 위하여 금산 제도를 엄격히 시행한 것이다.

 

산 산지기의 순찰하는 인원도

가장 험준한 서북쪽 길을 가장 중요시하여 이 곳에는 6명을 배치하였다.

그 중 1명은 서원이 여기에 충당되고 5명만이 순찰하였고,

동남쪽은 서북쪽보다 편리하다 하여 1명을 줄이고 4명만이 순찰하였다.

이것은 서북쪽의 산이 비교적 험준하고 송목이 그다지 번식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 후 산을 순찰할 때 열심히 행하지 않는 자가 있어 나중에는 양쪽에 각각 5명씩 늘렸다.

 

산지기의 급료도 상당히 문제가 되었다.

산지기의 급료는 처음에 면포(綿布) 3필을 주기로 하였지만

내려올수록 급료를 줄여 1필반으로 정하였다.

이렇게 급료가 적어지므로 산지기들은 별로 일도 하지 않고 그대로 방치하고 있었다.

더구나 산지기들에게도 계방(契房)을 주어 계방에서 무엇이고 얻을 수 있었는데

계방을 줄인 이후 계방의 계원은 나중에 아주 없어졌다.

이와 같이 계방이 없어진 것은 19세기초가 된다.

 

이때는 바로 순조 초기 안동(安東) 김씨의 세도가 점차로 강성해가기 시작하였다.

이로써 볼 때 산에 그래도 남아 있던 사산금송(四山禁松)의 표(標)는

이 해를 전후하여 자취가 없어지기 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순조때에는 사산금송의 관리는 이름만 남아 있고

소나무를 보호하는 금송의 정책은 미약해져 사산(四山)은 더욱 헐벗어갔다.

  

 

 

  

  

 

망우동지 (忘憂洞誌) 

  

1760년(영조 36) 필사 간행, 1820년(순조 20) 필사, 2권(상, 하) 1책, 紙本채색, 필자미상,

30.3×19.5서울역사박물관 (동래정씨, 정일섭 기증) 

 

 

 

 

  

 

 

서울 중랑구 망우동 '양원리(養源里)'의 동래정씨는

서울시에서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집성촌이다.

양원리는 중앙선 철로 북쪽 너머 송곡여자중고등학교 뒤쪽에 있는 마을로

동래 정씨 일가가 600여 년 전부터 17대에 걸쳐 모여 살고 있는 집성마을이다.

 

중랑구 망우1동 277번지 일대에 30여 호가 거주하며

비닐하우스 작물재배와 밭농사를 짓고 있는 이 마을은

1995년 중랑구청에서 실시한 '중량구 문화유적 지표 조사' 때

조사 용역을 맡은 서울학연구소(책임연구원 최종현)에 의해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 지표조사 보고서에 의하면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인 정구(鄭矩․1350-1418)가 정착한 이후

그 후손들이 현재까지 거주하고 있는 서울시 최고의 집성촌 마을로 밝혀졌다.

 

1995년 '중랑구 문화유적지료 조사' 중 발견된 ‘망우동지(忘憂洞誌)’는

권희(權禧․ 1547-1624), 한성판윤을 지낸 권반(權盼․ 1564-?)이 1621년 편찬한

 ‘훈도방(薰陶坊) 주자동지(鑄字洞誌)’ 이후

처음 발견된 동지로 당시 사학계에 큰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훈도방 주자동지>

 

洞을 단위로 하는 소규모의 지역단위에서 작성된 것으로

한 마을의 역사와 인물을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는 특색을 가지며,

특히 마을의 역사를 기록한 문헌은 ‘훈도방 주자동지’와 더불어 洞을 단위로 하고 있는 점이며,

망우동지는 조선시대 양주군에 속해 있지만 서울과 매우 가까운 곳으로

장례풍습 등은 서울의 경화사족(京華士族)을 그대로 모방하고 있음을 살펴볼 수 있는 특색이 있다.

 

‘망우동지’는 정구의 후손인 정일섭(鄭一燮)씨가 소장하고 있던 것으로,

기증 절차를 거쳐 현재는 서울역사박물관에 소장되어있다.

이 동지는 편저자 미상의 필사본으로

광곽(匡廓)은 28.5×12cm이며 2권(상, 하) 1책으로 편찬되어 있다.

 

편저자는 알 수 없으나,

상편의 말미 "洞( )時座目後" 편에 남치관(南致寬)의 나이 39세인 기묘년(1759년)에 기록한 것과

1760년에 편찬되었다고 전제한다면 남치관이 편저자일 가능성이 있다.

 

편찬시기는 하편 말미에 "( )楨三( )"이라 기록되어 있어,

조선 영조 36년(1760년)에 편찬된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 )楨三( )"을 숭정기원(1628년) 후 3년째인 경진년으로 단정지어 1630년으로 추정하거나,

숭정기간(1628-1644) 후 세번째 경진년으로 보아 1820년(순조 20)에 편찬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망우동지'의 표지를 넘기면 망우리 전체의 지세를 볼 수 있는 망우총도(忘憂總圖)와

의령남씨의 묘역을 표시한 의령남씨 산국내도(山局內圖),

동래정씨의 묘역을 표시한 동래정씨 산국내도, 평산신씨 산국내도가 있으며,

망우동지의 목록과 범례가 실려 있다.

 

'망우동지' 상편에는

망우리도, 의령남씨산국내도(山局內圖), 동래정씨산국내도, 평산윤씨산국내도 등

지역 내 유력사족의 산도(山圖)를 소개하고,

이어서 본문으로 동명원위(洞名原委, 동명의 유래 ), 형승(形勝), 능묘, 촌리, 풍속, 토산, 동계(洞契),

원위(原委), 동규(洞規), 제영(題詠), 향약(鄕約), 선생안(先生案), 시좌목(時座目)이 나온다.

 

망우리 지역에 산재해 있던 지금의 별장격인 묵우당(黙愚堂), 사오당(四五堂),

남간(南澗)의 신도비 문구, 정구(鄭矩)의 행적, 신말평(申末平)의 묘비 문구,

김인손(金麟孫)의 신도비 문구, 신상(申상)의 신도비 문구, 정응(鄭膺․1490-1522)의 묘비 문구,

정건(鄭騫, 1515-1545)의 묘비 문구, 정숙하(鄭淑夏, 1541-1599)의 행적, 남정구(南定國)의 묘비 문구,

신경진(申景진)의 신도비 문구, 남대원(南大源)의 행적, 신여정(申汝挺)의 묘비 문구,

남종백(南宗伯)의 묘비 문구, 유광문(柳光門)의 묘비 문구, 신여철(申汝哲)의 묘비 문구,

정습(鄭習, 1652-1727)의 묘비 문구, 정세희(鄭世禧, 1628-1676)의 묘비 문구, 신옥(申沃)의 행적,

남오(南오)의 행적 등 19명의 신도비, 묘비 문구와 행적을 글로서 기록하고 있다.

 

특히 상편의 ‘동명원위(洞名原委)’조에는 망우동의 지명연원을 밝히길,

‘망우(忘憂)’라는 지명은

조선조 태조가 도성 동쪽의 검암산에 친히 건원릉(健元陵․ 자신의 陵)터를 잡고

아차산 北麓 고개 위로 말머리를 돌리면서 말씀하시길

능 자리를 이미 정하였으니 나의 근심을 잊었다고 하시면서

이곳을 ‘忘憂’라고 명명하시면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형승(形勝)’조에 보면 당시 망우리의 규모와 경계를 가름할 수 있는데,

"봉화산 봉화대는 옛날에는 아차산 뒤에 있었으나 강릉과 태릉에서 바라다보이므로

이 봉우리로 옮겼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현재 봉화산에 위치한 봉수대의 건립시기를

강릉(1567년)과 태릉(1565년) 안장 이후에서 임진왜란(1592년) 이전으로 추정할 수 있는 단초가 된다.

 

또한 월릉교(月陵橋) 근처에 매몰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송계교의 위치와 규모가 기록되어 있어

송계교의 실체를 증명해 주고 있어 중랑구 역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망우동지’ 하편은

모두 ‘선배비장(先輩碑狀)’조로 편성되어 있고,  

여기에는 여러 선현들의 행적들이 서술되어 있어 인물조에 커다란 비중을 두었음을 알 수 있다.

처음에는 개국공신이었던 南在(의령남씨)를 비롯하여

동래정씨, 평산신씨, 경주김씨, 영양남씨, 진주유씨 등 19명이 기재되어있는데,

특히 의령남씨, 동래정씨, 평산신씨 이들 세 성씨가

당시 망우동에 근거를 두고 있는 대표적 유력사족이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아울러 당시 망우동지의 편찬도 이들에 의해 주관되고 편찬의 목적도

그들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한 마을의 동지로서는 조선시대 부지(府誌)나 읍지(邑誌)를 능가할 만큼 풍부한 내용으로 편찬되었으며,

따라서 '망우동지'는 조선시대 향토사(지방사), 즉 향촌사회 연구, 인물사(씨족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망우동지' 필사본 몇 권을 의령남씨, 평산신씨, 동래정씨 일가가 나누어 보관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 A Little Peace / Nicole Flie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