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끼며(시,서,화)

조선시대 회화의 사실정신

Gijuzzang Dream 2008. 4. 22. 11:34

 

 

 

 

조선시대 회화의 사실정신

 

 

이 태 호 교수

 

 

 1. 찬란한 위업을 남긴 조선 후기의 회화

  

우리 미술사를 통틀어서 조선 후기만큼 매력적인 시기는 없을 것이다.

그 어느 때보다 창조적 문화역량을 한껏 발휘하였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 미술의 발전은 건축, 도자기, 목칠과 금속공예, 불교미술, 민예나 민속미술 등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 걸쳐 풍성하였지만, 무엇보다 회화가 백미이다. 경제성장을 토대로 한 봉건사회 해체기 내지 근대로의 이행기라는 커다란 사회변동 속에서 다른 분야보다 당대 사람들의 의식변화와 미적 이상, 삶의 정취와 시대 향기, 예술성을 구체적이고 생동감 넘치게 발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미술사에서 조산 후기 회화의 찬란한 업적은, 먼저 조선풍의 고전적 전형을 완성한 점에 있다.

우리의 땅과 삶을 담는 그릇으로서 민족적 형식을 이룩한 것이다.

조선의 산천과 생활상을 직접 대상으로 한 진경산수나 풍속화가 본격적으로 발전하였고,

아울러서 사실묘사를 중시한 초상화와 동물화, 생활장식 그림인 민화,

중국 도상을 소화한 남종산수화(南宗山水畵)와 도석(道釋) · 고사인물화(高士人物畵),

그리고 불교회화까지 민족회화로서 조선적 형식을 다져내었다.

  

다음으로 위대한 업적은 조선풍의 독창성을 이끌어내었다는 데 있다.

중국회화에 대한 감화에서 벗어나 조선의 회화가 조선을 그리는 양식이 확립된 것이다.

진경산수(眞景山水)나 풍속화는 물론이려니와 심지어 당시 회화발전에 한몫을 한 《고씨역대명인화보 顧氏歷代名人畵譜》,《개자원화전 芥子園畵傳》 등 중국 화보를 수용하여 자주적 화풍으로 재창조해내었다. 그만큼 문화적 주체성에 대한 확신과 긍지를 가진 것이다. 이는 단순히 시류에 따르는 데 그치지 않고, 당대 화가들의 개성미가 적극적으로 표출되면서 이룩되었다.

다시 말해서 봉건적 계급구조가 이완되면서 일정하게나마 개인적 자아실현의 길이 열리고,

자유의지에 따라 천부적 예술성과 창조성을 발산한 작가들이 많이 배출된 것이다.

  

조선풍과 개성적 독창성을 가능케 한 조선 후기의 회화사상은 사실주의(寫實主義) 정신이다.

경제적 주도권을 장악한 계층 사이에서는 자신들의 이상을 구현할 현실에 애정을 쏟으려는 풍조와 함께

주체적 문예의식이 싹텄다.

그래서 옛 것을 본받기보다 새롭게 창작되는 당대 문예를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된다.

또한 사대부 사회에서도 국정에서 소외된 세력이 성장하면서 현실비판적 성향이 부상되었다.

이와 더불어 사실묘사력의 발전이 두드러졌다.

세심한 대상 관찰을 통한 '실득(實得)' (윤두서)으로부터 살아있는 그림을 위해 현장사생을 시도한

'즉물사진(卽物寫眞)' (조영석)으로 사실주의적 창작방식을 강조한 주장과

형상 묘사를 완벽하게 구현한 '곡진물태(曲盡物態)' (김홍도 그림에 대한 강세황의 평)의 경지에

이르기까지, 후기의 그림을 통해서 직접 확인할 수 있다.

나아가 당시 소개되기 시작한 서양화에 대하여도 입체감이나 원근법 등

사실적 묘사기법의 장점을 수용하려는 태도로 접근하였다.

 

 2. 사회 변동기 화가의 신분과 사회적 갈등

  

조선 후기가 변동기였던 만큼 창작자인 화가는 신분상으로 사회적 갈등의 부침이 컸다.그것을 극복하는 가운데 미술사적 업적이 달성된 것이다. 그리고 현실의식과 예술관의 변모에 따른 후기 회화의 예술적 완성과 쇠퇴를 엿볼 수 있다. 특히 화가들의 위상변화와 예술의지는 신분상승 욕구나 사회에 대한 저항으로 드러나며 전체적으로는 근대를 지향하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유교적인 조선사회의 회화로 장식적인 실용화나 기록화, 종교화도 있지만, 감상을 위한 그림(畵)은 시(詩) · 서(書) · 악(樂)과 함께 정치·경제·문화를 주도한 지배층의 이념이 실린 필수 교양에 해당되었다. 왕공 사대부들도 풍류와 수신덕목인 시·서·화를 빌려 미적 이상을 구현하는 가운데 특출한 화가가 되기도 하였다.

그처럼 회화는 유교적 인간상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되는 영역이면서도, 정통 학문의 정진에 방해 요인이 되거나 화원(畵圓)의 일로 천시되는 경향이 함께 존재하였다. 그래서 일반사대부층의 경우, 그림 그리는 일을 회피하거나 내색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취하기도 하였다.

한편 궁주의 실용화나 종교화, 사대부의 교양을 충족시킬 회화가 요구된 탓에 국가기관으로 도화서(圖畵署)를 두고 엄격하게 화원을 양성하였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화가는 사대부층에서 배출된 선비화가와 직업적인 화원으로 구분되는 셈이다.

  

조선시대 회화는 이들 양자의 교류와 보완을 통해서 발전하였다. 왕의 초상화 제작시 선비화가를 감독으로 발탁하여 품위를 높였듯이, 선비화가는 화론과 격조에, 화원은 묘사기량에 초점을 맞추었을 것이다. 그런데 화원은 중인기술직에 해당되어 반상의 구분 속에서 인간적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군왕의 초상화나 궁중그림을 제작한 공로로 양반직 벼슬을 제수받기도 했고, 교양인으로서 손색이 없으면서도 제대로 대접을 못 받는 처지였기 때문이다.

화원들의 신분상승 욕구는 초기부터 분출될 수밖에 없었다.

 

우선 15세기 노비 출신 이상좌(李上佐)나 염장 출신인 최경(崔涇), 19세기 지물포 점원이었던 장승업(張承業) 등 서민이나 천민층에서 화원이 된 사례가 있다. 또 화원이 되면 일정하게 신분이 안정되었기에 의관 · 역관 · 율사 · 악사 등과 마찬가지로 세습적인 대물림이나 혼인을 통해 명문가를 형성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화원으로 출세하여 군직이나 동반직 벼슬에 오르더라도 본인으로 그칠 뿐이었다.

호적의 '연(連)'을 '연(蓮)'으로 위조하여 아들을 생원진사시에 응시시켰다가 발각된 15세기 배련(裴連)의 사건은 그러한 정황을 반증한다.

  

갈등의 양상은 그 정도로 그치지 않았다. 어용화사(御用畵師)로 동반직을 제수받게 될 경우 사대부 관료의 반발이 일었다. 당상관으로 승급시에는 더욱 물의를 빚었는데, 성종 때의 최경과 안귀생(安貴生)이 그런 경우를 당했다. 영조 때는 양반 출신인 정선(鄭敾)의 승진에도 대해서도 화가로 입신한 인물이라 하여 이의가 제기되기도 하였다.

  

화원들의 신분상승 욕구는 사회적 제약을 극복하고자 하는 당연한 인간적 속성일 터이다. 그것이 창작의지로 표출된 사례를 보면, 대체로 술의 힘을 빌리거나 범인과 다른 독특한 개성으로 드러난다. 조선시대 화가 중에서 기행(奇行)과 술로 인한 일화를 많이 남긴 이로 세 사람이 꼽힌다. 그 하나가 17세기의 김명국(金明國)이고, 18세기의 최북(崔北)과 19세기의 장승업이 나머지 두 사람이다. 이들이 남긴 일화는 자신들의 그림을 필요로 하고 좋아하던 사대부들과의 갈등이 외화된 것이다. 여기에는 임진왜란 이후의 격변기에 나타나는 근대적 인간으로의 꿈틀거림이 들어 있다. 시대가 내려올수록 상류층에 대한 저항의 의지가 강하다.

  

거친 필치로 '화원풍의 누습을 벗은' (윤두서, 《기졸 記拙》) 김명국에 대한 일화는 17세기가 아직 봉건적 틀이 강고한 때였으므로 대부분 술과 관련되어 있다. 양반사회에 대한 반항이라고 해석될 만한 김명국의 행적들은 술을 빌려서야 가능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는 만년에 아호를 '취옹(醉翁)'이라 쓰기도 했으며 '주광(酒狂)'이라는 별명을 얻었을 정도이다.

최북의 경우 대갓집 하인이 자기보고 직장(直長)이라고 부르자 '직장을 지낸 적이 없으니 기왕이면 최정승이라 부르라'고 했다는 것이나, 어느 재상집에서 그림을 펼쳐 보이는데, 그 자제들이 그림을 모른다고 하는 소리에 '그럼 다른 것은 아느냐'고 다그쳤다는 일화들이 전한다. 그의 괴팍한 기행에는 역시 현실에 대한 불만이 불거져 있다.

또 장승업은 자기 집에 그림을 얻으러 오는 양반들이 고개를 숙이고 들어오도록 대문의 높이를 낮추었다고 한다.

  

화원들의 신분상승 욕구는 후기에 오면 당당한 교양인으로서 사대부층과 교유하면서 풍류를 즐기려는 의식으로 변화되어 나타난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김홍도(金弘道)의 화단 활동이다.

김홍도는 시·서·악을 즐겼고, 그 용모조차 헌칠하고 신선 같다는 평을 들을 정도였다. 선비화가인 강세황(姜世晃)이나 사대부 학자 등과의 밀접한 교유, 중인인 강희언(姜熙彦)·정란(鄭瀾)과 사대부 풍속인 '진솔회(眞率會)' (1781)를 갖고 <단원도 檀園圖>(1784)를 제작한 일, 정조의 은총으로 동반직인 안기찰방과 연풍현감에 올랐으나 연풍현감에서 해임된 일화, 말년에 매화음(梅花飮)을 즐긴 생활태도 등은 나이가 들수록 상류문화를 지향한 세계관의 변화를 보여준다.

특히 연풍현감 해직의 이유가 "중매나 일삼고 과니들에게 노비와 가축을 상납케 하고, 사냥에 군정을 동운시킨 일"(《일성록 日省錄》)로 인한 것이었음은 당시의 사대부 관료형태와 별반 다를 바 없다.

또한 '그림값으로 3천 냥을 받자 2천 냥으로 매화를 구하고 8백 냥으로 술을 사다가 친구를 모아 매화음을 즐긴 일' (조희룡, 《호산외사 壺山外史》)은 풍류를 즐긴 김홍도의 말년 생활상 그대로이다.

또 아호(雅號) '단원'을 명나라 선비화가인 이유방(李流芳)에서 따온 것이나, 60대 이후에 별호로 신선이 사는 땅이라는 '단구(丹邱)'나 도연명의 '권농(勸農)' 등을 사용한 것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는 30∼40대의 풍속화와 진경산수에 현실감이 넘쳤던 김홍도의 회화가 50대 이후 당송시의(唐宋詩意)적 산수인물도 등 관념화로 흐른 경향과 맞닿아 있다. 이처럼 김홍도가 추구한 풍류는 오히려 회화성을 무르익게 하는 쪽으로 작용하였다. 결국 김홍도의 세계관은 근대적 진보성보다는 상류층을 좇았지만, 중인신분으로서 겪었던 사회적 갈등과 인간적 고뇌를 예술적 깊이로 이끌어낸 것이다.

  

조선 후기 화원들이 사회적 위상을 확인하려 애쓴 흔적은 중인 지식인들과의 교유에서도 확인된다.

최북 · 김홍도 · 이인문(李寅文) 등이 여항문학(閭巷文學)의 대표적 모임인 천수경(天壽慶)의 옥계시사(玉溪詩社)에 참여하였고, 그 옥계 시인 가운데서 임득명(林得明) 같은 화가가 배출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19세기의 전기(田琦) · 김수철(金秀哲) · 유숙(劉淑) · 이한철(李漢喆) 등처럼 김정희(金正喜) 문하에 들락거리면서 사대부적 교양을 익히려는 화원이나 중인층 화가들의 노력은 지속되었다.

이는 조선 후기 회화가 커다란 성과를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봉건성에서 일탈하지 못한 한계로 지적할 수 있겠다.

  

화원 출신 작가들과 함께 사대부층 선비화가의 위상 변화도 적지 않았다.

특히 18세기가 배출한 윤두서(尹斗緖) · 정선(鄭敾) · 조영석(趙榮 ) · 심사정(沈師正) · 이인상(李麟祥) · 강세황(姜世晃) 등의 경우는 그 이전 사대부 관료나 학자의 여기적 수준을 넘어 표현기량도 화원 못지않았다. 이들 대부분이 사대부적 자존심을 지키며 전업화가로 성장하게 된 것이다.

그 계기는 역시 정치적 소외와 무관하지 않다.

노론 정권 아래에서 윤두서는 남인으로, 강세황은 관료에 오르는 60대 이전까지 재야인사로 지냈다.

노론계이면서도 정선과 조영석은 과거를 거치지 않아서, 심사정은 할아버지의 과거시험 부정으로 인하여, 이인상은 서출의 후손이었기 때문에 관료사회의 중심과는 거리가 있었다.

 

이러한 처지에서 선비화가들은 그림 그리는 일을 정치적 도피 수단으로 삼으면서 사대부적 시견을 바탕으로 예술적 진보를 이루어낸 것이다.

누구보다 앞서 민중의 삶을 자신의 회화세계로 끌어들인 윤두서와 조영석은 풍속화의 선구자로서, 정선은 진경산수를 완성한 대가로서, 심사정 · 이인상 · 강세황은 중국의 남종화풍을 조선적으로 소화해낸 장본인으로서, 제각 미술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또한 이들 18세기 선비화가는 지식인으로서 화원보다 먼저 현실인식에 눈뜨고 사실주의적 방향을 제시하였다. 김두량(金斗樑)과 강희언이 윤두서를 공부하여 김홍도에게 전수해주었고, 김홍도는 어려서부터 강세황 아래서 그림공부를 하였다. 정선의 진경산수화풍은 김응환(金應煥) · 이인문 · 김홍도 등 화원에게 이어졌고, 심사정의 화풍 역시 최북 · 이인문 · 김홍도 등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후기 화단은 정선파와 심사정파에서 김홍도파, 김정희 일파에 이르기까지 직접적인 사승(師承)관계를 통한 화파 형성으로 점철되어 있다.

  

조선 후기 회화를 풍성하게 하고 진보시킨 데는 창작자의 노고가 컸지만 그림을 감상할 수 있는 계층의 역할도 무시할 수 없었다. 영조와 정조의 서화기량은 수준급이었고, 김광국(金光國) · 김광수(金光遂) 등 감식안 높은 수장가가 배출되었으며, 윤두서 · 남태응(南泰膺) · 이하곤(李夏坤) · 강세황 · 이긍익(李肯翊) · 남공철(南公轍) · 정약용(丁若鏞) · 서유구(徐有 ) · 김정희 · 박규수(朴珪壽) 등 문인학자들의 서화비평이 어느 때보다 활발하였다.

  

이와 함께 후기 화단에서 주목되는 것은 향수층의 증가이다.

그림이 거래되는 사례가 많았고, 그림으로 먹고 산다는 의미로 '호생관(毫生館)'이라는 아호를 쓴 최북,

윤두서의 그림을 많이 사들였다는 수표교의 중인 출신 최씨(남태응, 《청죽화사 聽竹畵史》),

김홍도를 후원해준 염상 김한태(金漢泰; 김홍도가 영원재에서 그린 나비그림에 오세창이 쓴 화제)

등의 일화는 새로운 향수층의 발생을 시사한다.

궁중과 사대부의 전유물이나 다름없던 회화가 환전되고, 부를 축적한 서민층에까지 확대된 것이다.

또 교양을 갖추려는 부민층의 성장은 화단구조의 근대적 변화를 예고하는 것이다.

  

진경산수나 풍속화의 사실주의적 경향이 대중의 인기를 끌고 평범하고 친숙한 소재로 이루어졌음은 그러한 변화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특히 여속(女俗)이나 남녀의 애정, 기방풍경 등을 즐겨 다룬 신윤복(申潤福)류의 풍속화나 춘화첩(春畵帖)의 유행은 새로운 향수층의 취향과 연계시켜 생각할 수 있다.

  

또한 섬세하고 화사한 채색의 동물화롸 화조화를 비롯해서 장식용 민화의 유행과 소박하면서도 해학적인 형식미에는 바로 그들의 생활감정이 담긴 것으로 파악된다.

  

이상의 정황 속에서 위업을 달성한 조선 후기 회화는 봉건왕조의 5백 년 문예전통을 집약한 것이다.

또 근대의 문을 두드리는 사회상에 따라 한 시대양식으로 부상하여 발전하고 퇴조하였다.

즉 조선풍의 독창성과 사실주의 창작방식은 17세기에 새롭게 그 기운이 일었고,

18세기에 완성을 보게된다. 18세기 회화가 봉건문화의 틀 속에서 번영한 만큼

19세기에는 시대적 갈등이 심화되고 지배체제가 흔들리면서 형식화로 치닫는다.

 

 3. 18세기의 회화 동향 - 진경산수화와 풍속화

  

18세기는 문예부흥기라고 일컬어지듯이 회화뿐만 아니라 역사 · 지리 등 국학과 실학 · 애정소설 · 사설시조 등의 문학, 서예, 판소리에 이르기까지 주체적 학문과 예술이 진흥되었다.

양대 전란(壬辰 1592, 丙子 1636)의 상처를 씻고 당쟁의 진정책으로 말미암은 정치 · 사회 · 경제적 변동의 바탕 위에 이룩된 것이다. 그것은 왕조 중심의 권력기반을 재확립해가는 과정에 편승한 것이지만, 신분질서의 해체, 자본주의 맹아론의 제기 등 근대를 향한 자체적 변혁의 움직임을 배태한 준비단계의 양상으로 평가된다. 그러니까 18세기 회화는 정치 경제적인 여건의 호전에 따른 지배권력층의 상승국면을 타고 사대부 지식인층 문화의 활성화가 뒷받침된 것이다.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진경산수화와 풍속화, 나아가 당대의 제반 회화 동향은 조선시대 봉건문화의 꽃을 만개하게 한 하나의 매듭을 지어낸 것이다.

 

진경산수화와 풍속화의 발달은 조선시대 회화사에서 그 이전과 이후의 시기를 구분하는 단서가 된다. 예컨대 중국 산수화 형식에 의존하여 관념성 짙게 전개되던 조선 회화에 진경산수가 출현함은 미술계의 새로운 변화 그 자체이다. 이는 동시기 풍속화의 발달과 마찬가지이다. 그만큼 진경산수나 풍속화는 다른 유형의 회화와 달리 주체의식과 표현형식에서 후기의 시대정신에 맞는 예술의지를 담고 있다.

  

먼저 진경산수화는 정선의 활동시기인 18세기 초·중반 영조년간에 가장 널리 유행하였다. 이때는 청조가 들어선 가운데 명나라의 법통을 유지하려는 주자학적 종본주의(宗本主義) 혹은 조선 중화사상의 입장을 취한 서인 - 노론계의 권력 장악이 이루어진 후이다. 이런 변화와 성리학적 이론에 대한 심취는 진경산수의 발전과 연계된다.

즉 선계(仙界)다운 절경을 담은 18세기 진경산수의 배경에는 조선 선비들의 기행 탐승하는 풍류적 성향 및 이이(李珥)의 석담구곡(石潭九曲), 송시열(宋時烈)의 화양구곡(華陽九曲), 김수증(金壽增)의 곡운구곡(谷雲九曲) 등 주자(朱子)의 무이구곡(武夷九曲)을 본받아 그것을 조선산천에서 실현하고자 한 이상주의적 은일사상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정선이 당시 노론 정권의 핵심인 김창집(金昌集)의 후원으로 출세한 사실은 그러한 배경과도 맞아 떨어진다. 이에 비하여 당시 정치에서 소외된 남인계 실학파의 비판적 지식인들은 생산력과 관계 깊은 경제지리적인 지도학에 관심을 두었다.

  

근대적 지도학 발달의 바탕이 되는 윤두서의 <동국여지지도 (東國輿地之圖)>와 정상기(鄭尙驥)의 <동국지도(東國地圖)>는 그 산물이다. 이처럼 18세기에는 지배계층의 국토를 보는 시각에 차이가 난다. 그런 관계가 동시대에 제기된 가운데 진경산수화의 질적 발전과 유행을 가져왔던 것이다.

  

진경산수에 이은 김홍도 · 김득신(金得臣) · 신윤복의 풍속화는 18세기 후반∼19세기 초 절정에 이른다.

조선 회화에서 풍속화적 요소는 이전의 궁중행사나 사대부층의 시회를 담아 온 기록화에서도 찾아지는데, 후기 풍속도의 발전은 17∼18세기 기록화의 형식 변화를 통해 엿볼 수 있다. 엄격했던 궁중이나 사대부 행사의 기록화에 행사와 무관한 구경꾼이나 민중의 생활상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나아가 18세기 후반 김홍도 · 신윤복의 풍속화가 독립된 회화 장르로 정착되는 것은 18세기 전반 윤두서나 조영석 등의 사대부 지식인들로부터 출발한다. 여기에는 이전에 볼 수 없었던 혁신적 시각이 담겨있다. 신분질서의 이완 속에서 직접생산자인 민(民)의 성장을 의미하는, 즉 사회변화를 시사하는 것이다.

  

그러나 당대에 속된 삶을 표현한 그림이라는 의미로 '속화(俗畵)'라고 불렸듯이, 풍속화는 사대부층의 애민의식, 곧 내려다보는 시각에서 비롯되었다. 이는 주로 서민층의 삶을 다룬 김홍도의 인기와 달리, 도시의 시정풍물이나 기방 등 사대부층의 생활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신윤복이 도화서에서 쫓겨났다고 전해오는 일화에서도 엿볼 수 있다.

또 풍속화는 조선 후기의 시대상을 다른 어느 회화 유형보다 구체적으로 읽을 수 있는 문화사료이자. 변혁기의 생활상과 미의식의 민감한 변화가 뚜렷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예컨대 김홍도에서 신윤복으로 풍속도의 내용 및 형식의 변화는 18세기 중엽과 후반의 사회변화를 반영하고 있다. 특히 신윤복의 여성과 기방풍속을 중심으로 한 주제와 화사하고 섬세한 표현기법은 당시 새롭게 형성되는 도회문화의 단면을 포착한 것이다. 이는 근대적 시민계급의 예술로 발전할 가능성에 접근한 것인데, 신윤복류의 사실주의 경향은 그 이후 근대회화로의 발전이 저지되고 19세기의 풍속화는 오히려 형식화와 함께 중국식 경직도(耕織圖)류의 농경도로 퇴행하고 말았다.

 

진경산수나 풍속화, 여타의 회화영역에서 큰 성장을 보인 영조와 정조년간은 전후반기로 구분할 수 있을 만큼 약간 다른 발전과정을 보여준다.

전반부는 숙종(재위 1674∼1720) 말기에서 영조(재위 1724∼1776)년간까지,

후반부는 영조 말 정조(재위 1776∼1800)년간에서 영 · 정조 문화의 여파가 어느 정도 지속된 것으로 보이는 순조(재위 1800∼1834)년간 초기 1810년대까지이다.

  

전반기는 정선의 출현과 함께 이루어진 진경산수화의 정립과 유행이 대변한다.

그리고 선비화가인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 1668∼1715), 관아재(觀我齋) 조영석(趙榮 ; 1686∼1761) 등이 중기의 전통화풍을 따르면서도 남종화풍과 풍속화의 선구로 등장하였고, 현재(玄齋) 심사정(沈師正; 1707∼1769), 능호관(凌壺觀) 이인상(李麟祥; 1710∼1760),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 1713∼1791) 등 윤두서나 조영석보다 한 세대 정도 후배 화가들 사이에서는 중국 원·명체의 남종문인화가 본격적으로 수용되었다. 남종화풍이 조선적 감성으로 정착되는네는 정선에 공감하여 활발해진 기행사경이 작용하였다. 한편 사대부 그림과 화원 그림을 구분하기 위해 설정된 남종화 이념의 수용은 조선 후기 선비화가들 사이에 문예의 계급인식을 일깨운 반면, 보수성으로 기울게 한 요인이 되었다.

  

또한 이 시기 화단에서 표현기량의 성장은 도화서 출신 화가 남리(南里) 김두량(金斗樑; 1696∼1763), 화재(和齋) 변상벽(卞相璧; 18세기) 등의 완벽한 묘사력을 바탕으로 한 사생정신의 동물화와 초상화에서 나타난다. 이 외에 중국의 명현이나 풍류객을 담은 고사인물도, 신서도 계통의 도석인물화도 궁중기록화나 실용화, 불교 회화와 더불어 후기에 조선풍의 형식미를 구축한 영역으로 손꼽을 수 있다.

  

이러한 18세기 전반부 회화는 정조년간까지 장수한 작가들에 의해서 후반부로 이어진다.

그 가운데서도 다리 역할을 한 인물이 강세황이다.

그는 영조년간에 화가로, 특히 비평가로 활동하였는데, 당대 화단에 새롭게 떠오른 진경산수나 풍속화, 남종화 등 회화의 현실감각과 사의(寫意)정신을 진작시킨 인물이다. 강세황의 화론적 뒷받침에 힘입어 대성한 작가가 바로 김홍도이다.

  

김홍도는 18세기의 후반부를 풍미하면서 산수화 · 풍속화 · 고사인물도 · 도석인물화 · 화조 · 영모화 · 사군자 등을 두루 섭렵하였고, 타고난 예술가 자질과 자유자재의 표현력으로 사실상 후기 회화를 집약한 화가이다. 그 이전에 찾아 볼 수 없는 천재성이 돋보이며 후기 문화를 융성케 한 전형적 작가상이다. 김홍도의 회화는 현장을 정확한 시각으로 그려낸 풍속화와 진경산수, 그리고 완숙한 경지의 다른 회화 유형까지 정조년간의 시대적 미의식을 대표하는 것이다.

 

김홍도와 함께 정조와 순조년간에 활동하며 동참한 작가로는 산수화에 고송류수관도인(古松流水館道人) 이인문(李寅文; 1745∼1821), 풍속화에 혜원(蕙園) 신윤복(18세기 후반∼19세기 초), 그리고 그의 화풍을 따른 김득신(金得臣) · 김석신(金碩臣) · 엄치욱(嚴致郁) 등의 화원들이 있고, 개성이 뚜렷한 선비화가로 지우재(之又齋) 정수영(鄭遂榮; 1743∼1831), 학산(鶴山) 윤제홍(尹濟弘; 1764∼?) 등을 떠올릴 수 있다. 이들은 김홍도에 못지않은 화격으로 나름의 회화세계를 형성하여 18세기∼19세기 초의 화단을 살찌웠다.

  

이와 같이 18세기는 전후반의 미의식과 예술 성향에 차이가 난다.

전반기에는 새로운 시각의 부상으로 다양성이 파급되었는데, 그 가운데 정선의 진경산수화가 단연 우뚝하였다. 후반기에는 전반기의 다양한 회화를 고루 섭렵하며 질적 발전을 이룩한 김홍도에 의해 주도되면서 현실감을 반영한 풍속화가 자리를 잡았다.

또한 영조년간 정선의 진경산수는 우리 산천의 특성에 주목한 직선적 엄격성과 대상 해석의 변형이 감명깊게 이루어졌다. 반면에 풍속화 중심의 정조년간 김홍도 회화는 현장감에 충실한 시각의 친근감과 완숙함이 돋보인다. 사선적 화면구성이나 필묵법과 담채의 세련미가 그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전반부의 양식적인 엄격성이 후반부에 점차 유연해지면서 절정에 다다른 것이다.

영·정조년간은 다같이 문학적으로 상승기이지만 전반부는 권력 재편과정에서 숙종 때까지 심화된 당쟁의 불을 끄기 위해 실시한 영조의 탕평책으로 유발된 경직성이 반영된 듯싶다.

이를 계승한 정조년간에는 보다 진전된 상공업의 발달로 정계와 지식인 사회는 물론 신흥 교양층에까지 확대된 문화 · 예술 활동이 성숙된 것이다. 학문과 문예감각이 뛰어났던 정조의 개인적 역량도 언급할 만하다.

덧붙여서 18세기 회화의 구획은 당대에 새로운 학문으로 등장한 실학(實學)의 경향과도 합치한다.

즉 진경산수가 유행한 18세기 전반은 농경 중흥을 기반으로 한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이익(李瀷; 1681∼1763)의 실학으로, 풍속화가 유행한 후반부는 상공경제적 이용후생의 박지원(朴趾源; 1737∼1805) · 박제가(朴齊家; 1750∼1815)의 북학파 계열로 대별되는 것이다.

 

 4. 19세기의 회화 동향 - 화단의 보수화와 사실주의의 퇴조

 

순조년간 이후 일시 안정되었던 18세기의 정치적 균형이 깨지면서 말기에 이를수록 봉건적 모순은 극대화된다. 주지하다시피 19세기는 본격적으로 봉건사회가 해체되는 시기이다.

즉 조선시대를 지탱한 유교적 신분제가 와해되면서근대로 향하는 변혁기이다. 커다란 역사의 분수령인 셈이다. 권력의 상층부는 세도정치를 펴면서 체제유지에 급급하였고, 18세기 이후 경제력 상승과 신분질서의 혼란에 편승한 농 · 공 · 상의 부민층, 치부한 하급관리나 중인 잡직 · 아전 · 이속 등의 계층상승 욕구로 성리학을 기저로 한 체제경영이 심각한 지경에 와 있었다. 삼정(三政)의 문란과 더불어 사회전반에 부패상이 만연되고 민중수탈이 심화되면서 봉건적 계급갈등과 대립은 민란 형태의 항쟁으로 폭발하였다.

  

이런 시대상황에서 19세기 문예는 양반 사대부 문화의 보수화와 변혁을 갈망하는 민중의식의 고양에 따른 민중문화의 기운이 복합되어 있다. 먼저 민중문화의 성장은 생활고예, 무속화나 민화, 민불, 옹기, 마을공동체 중심 조형물인 장승과 솟대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이들에서 민중의 생활정서와 전통적 민중미술의 조형성이 읽혀지기는 하지만, 근대성의 기준으로 삼기에는 무속적인 성격이 강하다. 전체적으로 당대의 변혁의지를 실현할 만한 문화적 대안이 미비했던 점과 같이한다.

우리 근대미술사의 출발 시기와 미술의 근대성을 파악하는 데 있어서 봉착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아무튼 18∼19세기 민중의식의 성장은 자신들의 어법으로 시대정서를 유감없이 표출한 민중문화와 예술의 발달과 연결된다. 그래서 거기에는 민요나 구비문학, 연희 등과 마찬가지로 변혁의 주체로서 역사 전면에 부상한 민중의 생활감정과 변혁기의 시대적 역동성이 꾸밈없이 담겨있는 것이다.

  

이러한 동향에 비하여 지배층의 몰락 속에서 형성된 19세기의 회화는 초라하기 그지없다. 18세기를 답습한 산수 · 인물 · 초상 · 화조 등 감상화는 물론 기록화나 불화에 이르기까지 수요층의 증가가 있었으나, 18세기 회화와 상당한 차이가 있다. 자신감 넘치는 기량과 탁월한 미의식과 현실감에서 그러하다. 퇴락된 양상은 회화뿐만 아니라 도자기 · 공예 · 불교미술 · 조각 · 건축 등 전체 미술 분야의 공통된 흐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대부층의 이념을 표방한 남종문인화풍의 위력은 오히려 강세를 보였다.

문기(文氣)와 사의(寫意), 서권기(書卷氣)와 문자향(文字香)을 내세운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 일파의 형성이 그 전형적인 예이다. 이들의 회화는 풍류와 사색의 선비적 아취를 담으려 한 데서 알 수 있듯이 간일하고 담백하며 조용한 화풍이다.

김정희는 자신의 탁월한 감수성과 개성미를 예술성으로 극대화내었다. 그러나 남종화의 관념성 강조는 19세기 지배층이 문예적 정체성을 확인하고 유지하려는 데서 나온 것으로 해석된다. 또 그것은 개성주의나 사의적 형식미의 새로운 사조를 제시한 듯하나, 중국 지향의 사대주의적 양상을 띠고 있다.

 

이는 김정희 문하의 진도 출신 선비화가 허련(許鍊; 1809∼1892)을 통해 잘 드러난다. 김정희의 사랑을 받으면서 서화가로 성장한 허련이 이름과 자(字)를 중국 남종화의 창시자인 왕유(王維)를 따라 '유(維)'와 '마힐(摩詰)'이라 한 점, 아호를 원나라 선비화가 황공망(黃公望)의 '대치(大癡)' (큰 바보)를 따라 '소치(小癡)'라 한 점, 진도의 화실 이름을 역시 원나라 선비화가 예찬(倪瓚)의 아호를 따라 '운림산방(雲林山房)'이라 한 점만으로도 알 수 있다.

 

그 한 연원은 북학파에서도 찾아진다. 박제가나 박지원 등에서 김정희까지, 그들이 중국에서 만난 문인 서화가는 남종화풍을 토대로 한 개성주의 화파와 실증주의적 고증학파였다. 근대화를 앞당기기 위해 청조의 선진문명을 수용하자는 주장과는 별도로 문예는 보수적 측면으로 기운 것이다. 그리하여 18세기에 이룬 국풍의 진경산수나 풍속화의 성과를 계승하기보다 중국적 사대주의를 부추기는 결과를 낳았다.

  

그런데 남종화풍의 관념적 형식은 성호 이익이나 다산 정약용에서 박규수 등 개화파에 이르기까지 '못된 화가'들이 '뜻만 앞세워 형사를 무시한다(畵意不畵形)'라는 당대의 비판이 없지 않았으나, 봉건사회의 몰락과는 운명을 달리하였다. 오히려 남종화의 맥은 다른 어떤 전통미술의 영역보다 끈질기게 20세기로 전승되었다. 봉건적 모순을 내재한 채 곧바로 식민화한 우리 근대사의 특수성이 빚어낸 결과이다.

  

한편 그런대로 격조를 유지한 19세기 진경산수화나 풍속화도 남종화의 위세에 밀렸다. 김홍도 화풍이 계승은 되었지만 그 진의가 약해졌고, 변화된 현실을 담을 새로운 시각이나 창조성을 강구하지 못한 채 형식적 퇴조로 치닫는다. 18세기와 비교해서 봉건왕조의 말기라는 사회적 여건이 그 문화에 봉사해온 화가들의 참신한 감각을 일깨우지 못한 것이다. 이는 19세기 회화의 성격을 규명하는 단서이기도 하다.

  

19세기 진경산수화와 풍속화는 18세기를 답습하는 형식화 경향을 띠면서도 양적으로는 늘어났다.

경제력 상승에 따라 사대부층은 물론 일정하게 부를 축적한 하급관리 · 향리 · 이속 · 부민층에 이르기까지 그림의 향수층이 넓어졌음을 의미한다.

 

19세기 회화는 창작과 소비관계의 증진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과 형식에서 근대성과 거리가 먼 모순을 지니고 있다. 낡은 형식에 안주하려 했던 19세기 문화의 진취적이지 못한 성격을 반영하는 것이다.

또 풍속화나 진경산수가 근대적 사실주의로 변모하지 못한 데는 그 회화 장르 자체가 지닌 봉건적 성격도 작용하였다. 그런 데다 격동기의 사대부나 새로 부상한 향수층의 안목과 미의식이 18세기에 못 미친 때문이기도 하다.

  

이처럼 19세기 회화는 18세기와 달리 변혁기의 갈등을 승화시켜내지는 못하였지만, 미흡하나마 회화 수준을 유지하고 시대성향을 읽을 수 있는 작품은 나왔다. 회화적 수준은 김홍도의 화법을 계승한 것이었다. 김홍도의 영향은 이재관(李在寬) · 조정규(趙廷奎) · 유운홍(劉運弘) · 이한철(李漢喆) · 유숙(劉淑) · 백은배(白殷培) 등부터 '단원'과 '혜원'의 아호를 따라 '오원(五園)'이라 지은 장승업에 이르기까지 19세기를 풍미한다. 그러나 이들은 우리 회화사에서 차지하는 김홍도 회화의 고전적 가치를 재확인시키는 역할로 그치고 말았다.

  

화원에 비하여 19세기 선비화가나 중인 출신 화가들은 18세기보다 한층 뒤져있다. 조희룡(趙熙龍) · 전기(田琦) · 허련 등 김정희 일파를 포함한 19세기 선비화가들은, 풍속화를 개척하고 진경산수를 토대로 남종화를 조선풍으로 소화하고 화론을 통해 화원화가들의 자질을 계발시킨 18세기의 분위기와는 사뭇 달랐던 것이다. 앞서 거론했듯이 신분적 위상이 크게 흔들리는 변혁기에 보수성에만 집착한 데 따른 결과이다.   

이런 풍조 속에서 북산(北山) 김수철(金秀哲), 석창(石窓) 홍세섭(洪世燮; 1832∼1884) 등 간일하게 맑은 먹과 담채를 구사하는 독특한 감각의 작가들이 배출되었다.

또한 여기적(餘技的) 수준으로 장기를 내세우며 개성미를 풍기려 한 화가들도 있었다. 남계우(南啓宇)의 섬세한 채색풍 나비그림,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의 묵란도, 석연(石然) 양기훈(楊基薰)의 노안도(蘆雁圖), 몽인(夢人) 정학교(丁學敎)의 괴석도(怪石圖), 운미(芸楣) 민영익(閔泳翊)의 난초와 대나무 그림 등이 그 사례이다.

  

이상 19세기 회화에서 근대로의 분수령에는 구한말 장승업이 자리하고 있다. 비록 주체의식은 현실감이나 시대정신과 거리가 있는 복고풍에 머물렀지만, 뛰어난 표현기량으로 묘사력을 진척시켰다. 그의 회화사적 위상은 조선 후기 회화를 20세기 초 조석진(趙錫晋)과 안중식(安中植)을 통하여 근현대 회화로 연결시키는 교량이라는 점이다.

  

근대사가 시작되는 구한말 회화의 특징은 서울 중심에서 탈피하여 그림의 수요 증가에 따라 각 지역의 특성을 바탕으로 한 지역화단의 형성에 있다. 전라도 지역을 중심으로 한 허련 일파나 평양의 양기훈과 김윤보(金允輔) 등의 활약은 낡은 회화형식에 머물러 있지만, 나름대로 중앙문화에서 벗어나려 한 미술계의 새로운 움직임으로 볼 수 있다. 이는 민화에 지역적 개성이 두드러지는 점과 함께 당시 안성의 방짜유기, 해주나 고장의 도자기, 강화나 평양의 반닫이, 충무 장, 나주 소반 등 지역경제와 특성에 기초한 민간공예의 융성과도 같이하는 것이다.

  

또한 제국주의의 침략에 맞서 민족적 항거가 지속된 19세기 말∼20세기 초의 시대상황에 부응한 회화 경향도 없지 않았다. 우리 근대사의 특수성을 감안할 때 근대미술의 출발로서 무엇보다 중요하면서도 아직 정리되지 않은 상태이고, 회화적 수준이 떨어져 관심에서 멀어진 채이지만 김준근(金俊根)과 김윤보의 풍속도, 채용신(蔡龍臣)의 항일지사 초상화와 기록적 성격의 그림, 이도영(李道榮)의 신문삽화 등이 있다. 이들에게서 당시 사회현실의 풍자나 민족애가 담긴 근대적 경향성을 읽을 수 있다.

이 외에도 위정척사파로서 한계를 갖지만 항일 의병장들의 절개있는 서화도 따져보아야 할 과제이다. 국권회복이 급선무였던 당대의 민족현실과 관련지어서 말이다.

 

 5. 재창조할 민족회화의 전범은 18세기에서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18세기에 이룩된 우리 회화의 고전적 전형은 19세기에 오면서 흐트러졌다. 그러나 근대회화로의 변모를 전혀 예견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18세기의 성과를 토대로 한 회화 수준의 유지나 시민계급으로 성장할 문화적 향수층의 새로운 생활감정과 취미, 보수성과 봉건서에 대한 비판적 시각의 형성, 지역특성을 살린 지역화단과 공예문화의 융성, 반외세 투쟁에 나선 항일지사들의 서화기풍 등 한계가 있지만 그나마 근대성을 이끌어낼만한 자산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제국주의 침략으로말미암아 자주적 발전이 저지되고, 식민지를 경험하며 그 성과와 한계를 명확히 진단하면서 올곧게 계승하지 못하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특히 18세기 회화의 사실주의 정신이 근대적 성과로 전승되지 못한 아쉬움은 크다. 오히려 봉건적 보수성이 강한 서화가이며 화론가로서 독창성이 결여된 김정희와 그 일파가 일제 강점기 이후 과대포장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는 식민지 지배 강화를 위해 기존의 보수세력을 이용하는 제국주의의 정치적 의도와 맞물려 있는 것이다.

  

한편 20세기 이후 우리의 현대 사실주의는 서구 조형론에 밀려 조선 후기 회화와 정상적으로 조응하지 못하였다. 서양 회화를 배운 작가들은 전통형식을 무시하고 배척한 채 서구의 것에 대한 충분한 검증 없이 신사조를 뒤쫓기에 급급하였고, 전통회화는 왜색조에 물들거나 현대감을 실어내는 데 역부족이었다.

우리의 근현대회화사가 남긴 뼈저린 교훈이다.

이처럼 조선 후기부터 순탄치 않았던 근현대회화사의 흐름을 보면, 우리가 모색해야 할 민족회화의 방향은 자명해진다. 조선후기, 그것도 18세기 회화의 견실한 창조정신과 현실감, 그리고 예술성이 재창조의 핵심일 것이다. 18세기 회화가 지닌 예술적 매력과 우리 시대와의 친근성을 고려할 때, 그리고 조선풍의 주체의식과 개성적 독창성으로 우리식 사실주의의 한 전범을 이루었음을 볼 때 그러하다.

  

또 19세기 이래 근현대가 그런 18세기 회화의 민족정서와 시대정신을 방치해 온 탓으로, 더욱이 식민화한 문화가치의 혼돈 속에서 그 역사적 유산에 쌓인 먼지를 털어내는 일은 민족회화의 자주선 회복을 위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리고 근현대미술에 대한 반성과 함께 18세기 회화의 형식미에 대한 재검토는 우리 시대의 민족회화를 튼실하게 세우는 데 더없이 소중한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