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끼며(시,서,화)

조선의 왕 - 초상(어진)

Gijuzzang Dream 2008. 4. 23. 09:22

 조선의 왕들은 어떻게 생겼을까?

전주 경기전에 있는 태조 이성계의 초상

오늘은 "조선 시대 왕들의 초상"
(어진이 정확한 말이지만, 그냥 쉽게 초상이라고 하겠습니다)에 대해 한번 다뤄보려고 합니다.
 
조선의 왕 가운데 생전의 모습을 담은 초상이 남아있는 사람은,
사진을 남긴 조선 말기의 고종과 순종을 제외하면 태조 이성계, 영조, 철종 등 세 사람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이들이 남긴 초상은 모두 5장입니다.
왜냐하면 태조와 영조가 각각 2장의 초상을 남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태조부터 한 사람씩 초상의 모습을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태조는 널리 알려진 늙은 시절의 초상이 전주의 경기전에 전해옵니다.

현재는 이성계의 본관인 전주시의 경기전에 모셔져 있습니다.

이 늙은 시절의 초상은 널리 알려져 있기도 하거니와 상당히 단정하고 안정감 있는 모습입니다.

 

전주 경기전에 있는 이성계의 노년 시절 초상
여기서 이성계의 모습은 앉은 품이 위엄이 있고, 당당한 보이지만,

얼굴에서 노인으로서의 노쇠함을 감추지는 못합니다.

얼굴이 갸름하고 눈이 작아서 만만치 않아 보이지만,

작은 눈도 매서워 보이기보다는 조금 힘이 없어 보입니다.

아마도 이것은 이성계의 60대 이후 모습이 아닌가 합니다.

저는 태조의 이 초상이 한반도의 변방, 또는 한반도 밖의 여진족 거주지 부근에서 태어나

무인으로 자란 뒤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잡은 이성계의 모습을 잘 보여주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애초부터 제가 이렇게 생각한 것은 아니고,

이성계의 젊은 시절 초상을 보면서 다시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지난 2006년 언론에 이성계의 젊은 시절 초상을 찍은 흑백 사진이 공개됐습니다.

유리원판 형태 사진으로 발견됐다고 하는데,

저는 이 흑백 초상을 보자마자 이것이 이성계의 진면목이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함흥 본궁에 있던 태조 이성계의 장년 시절 초상

이 초상에서 이성계의 얼굴은 왕이라기보다는 쿠데타를 일으킨 장군 그대로의 모습입니다.

눈이 늙은 시절 초상에서처럼 작지만, 여기서는 훨씬 더 매섭고 날카롭고 살아 있습니다.

더욱이 옆으로 툭 튀어나온 광대뼈나 움푹 패인 볼, 이를 악문 듯한 턱뼈의 모습 등에서

저는 최영과의 일생일대의 대결에서 승리한 그 강인한 승부근성을 봤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40~50대의 이성계 모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성계는 조선의 건국자이기 때문에 다른 왕들과 달리

초상이 전주 경기전, 함흥 본궁, 평양 숭녕전, 서울 선원전·영희전 등 8곳에 보관되고 있었다고 합니다.

심지어 말탄 초상까지 포함해 모두 25~26점이 있었다고 문화재청의 자료실은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초상화로는 1점, 초상을 찍은 사진으로 1점 등 2점만 전하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나 초상 한 장 남기지 못한 다른 왕들에 비하면 그나마 이성계는 엄청난 행운아입니다.

 

이성계와 함께 2점의 모습을 전하는 또 한 사람은 영조입니다.

정확히 말해서 영조는 2장의 초상을 전하는 한국 역사상 단 한 사람의 왕입니다.

 

태조의 초상은 1점만 전하는 것이고, 하나는 초상을 찍은 사진일 뿐입니다.

고려 공민왕이나 세조와 같은 왕들의 초상이 전하기도 하지만,

이것들은 정식 초상이라고 보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공민왕과 노국공주-작은 그림.JPG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초상

세조의 초상

영조의 어진은 이성계의 늙은 시절 어진과 마찬가지로 교과서에서 실려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 초상은 이성계의 어진과 다른 점이 있습니다.

하나는 정면이 아니라, 약간 옆모습을 담고 있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전신상이 아니라, 반신상이라는 점입니다.

 

저는 전문가가 아니라, 왜 영조의 초상이 전신상이 아니고 약간 옆모습을 담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못하겠습니다. 다만 정면으로 전신을 그린 초상보다 약간 옆면으로 반신을 그린 초상이

좀더 세련된 조선 후기 형식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영조의 51세 초상

영조의 초상에서는 조선 때 가장 오래(52년) 왕위에 있었던 영조의 성격적인 측면을 잘 볼 수 있습니다.

일단 영조는 얼굴이 길고 코도 긴 사람인데, 일반적으로 긴 얼굴과 코는 지성을 나타낸다고 생각합니다.

이 초상만 보면, 저는 영조가 상당히 지적이고 사려깊은,

그래서 아마도 정치력도 뛰어난 사람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둘째로 영조는 매부리코를 가진 사람입니다.

매부리코를 가지려면 코가 크고 날카로워야 하는데,

그것은 이 사람이 가진 카리스마를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과연 영조는 탕평책과 균역법 시행, 청계천 준설, 신문고 설치 등 과단성 있는 개혁으로

조선 후기 르네상스를 열었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아들을 뒤주에서 굶어죽일 정도로 강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의 길고 날카롭게 위로 향한 눈도 그런 점을 잘 보여줍니다.

 

영조는 조선 왕 가운데 유일하게 대군, 또는 왕세제 시절의 모습도 남기고 있습니다.

1950년 내전 당시 부산에서 조선 임금들의 초상이 불에 탈 때 간신히 건져낸 초상이 바로 그것입니다.

일부가 타기는 했지만, 연잉군 때의 이 초상을 보면, 영조의 어린 시절을 상상하게 됩니다.

이 초상에서 영조의 표정을 보면, 어른이 된 다음의 모습보다 더 어두워 보입니다.

아마도 후궁의 아들로 태어나 노론과 소론의 틈바구니에서 왕세제가 됐다는 점이

그를 얼마간 힘들게 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그래도 코와 턱 밑의 작고 까만 수염은 귀엽습니다.

장년 시절의 초상과 마찬가지로 이 초상도 정면이 아니라, 약간 옆모습을 그렸습니다.

연잉군 시절의 영조의 모습

이 초상이 장년 때의 초상과 다른 점은

영조의 젊은 시절 영조의 얼굴이 그렇게 길지 않았고, 눈도 그렇게 위로 째지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물론 초상을 그린 사람이나 그린 각도에 따라 조금 달라질 수 있는 것이지만,

저는 여기서 독특한 점을 발견했습니다.

왜냐면 보통 사람의 얼굴은 나이가 들면서 둥글어지고,

눈꼬리도 나이가 들수록 아래로 처지게 마련입니다. 살이 찌고 살갗이 처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영조는 그 반대로 얼굴이 변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아마도 영조는 나이가 들수록 기가 성하고(눈이 올라가고) 더 현명해진(얼굴이 길어진) 것일까요?

 

마지막으로 반쯤 타버린 철종의 초상을 보겠습니다.

저는 철종의 초상을 보면서 어쩌면 제가 상상한 모습과 이렇게 닮았을까 하고 놀라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했습니다.

애초에 저는 강화 도령이라는 별명처럼 철종이 되게 순박하고 심성이 고운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 초상을 보면, 철종은 얼굴이 동그란 편이고 눈이 크고 동그랗습니다.

사람이 좋고 착한, 나쁘게 말해서 조금 생각이 없고 맹한 사람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물론 얼굴이 둥글고 눈이 큰 사람이 모두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인상이나 관상이 반드시 그 사람의 성격과 맞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강화 도령 철종의 초상

이 초상에서 더욱 재미있는 것은

철종이 그 인상과 어울리지 않게도 무장한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입고 있는 옷도 그렇고, 오른손에 든 지휘봉(?)이나 옆에 세워둔 칼도 이 복장이 무장한 것이라는 점을

보여줍니다. 무장한 것이 아니더라도 적어도 조정에서 업무를 볼 때의 모습은 아니고,

사냥이나 활쏘기에 나설 때의 모습이 아닌가 추정합니다.

강화도에서 나무하며 시골뜨기로 살았던 철종의 천진난만한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참 재미있습니다.

인터넷을 뒤지다 보니 불탄 부분을 복원한 초상이 나오던데, 이것도 참고로 붙입니다.

이 초상은 더 맹한 모습으로 그려놓았습니다.

철종의 불탄 초상을 복구한 초상

이렇게 조선의 왕 세 사람의 초상을 살펴보았는데요.

사실 이렇게 글을 마칠 수밖에 없어서 참 아쉽습니다.

저는 조선 왕 가운데 태종 이방원에게 상당히 흥미를 갖고 있는데요.

불행히도 이방원의 초상은 전하지 않습니다.

그의 초상이 있다면, 제가 이 글의 첫머리에 썼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느 책에서 보니 아버지 이성계와 매우 닮았다고 합니다.

 

이성계의 아들이자 세종 이도의 아버지로 실질적인 조선의 건국자였던 이방원의 모습은 어땠을까요?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이방원 역할로 나온 탤런트 유동근과 닮았을까요? 참으로 궁금한 노릇입니다.

허망한 생각이지만, 어느 박물관이나 수집가의 창고에서

갑자기 태종의 초상이나 초상을 찍은 사진이라도 발견된다면 좋겠습니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가, 기자가 참여한 <블로그>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2008-04-21, 한겨레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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