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의 역사는 인간의 역사와 함께 시작하는데 인간의 역사라고 하는 게 참 매력적인 연구 분야입니다.
지구 역사는 45억년을 헤아리고 있지요.
이 중에서 인간의 역사는 불과 200만년 전으로 얘기되고 있으며,
다시 선사시대에서 신석기시대로 들어온 게 1만년 전입니다.
또 여기에서 역사시대로 진입한 게 불과 4000~3000년 전이니까
45억년의 지구 역사에서 인간의 역사가 차지하는 기간은 극히 미미합니다.
지구 역사를 365일, 1년으로 봤을 때 12월31일 오후 11시50분대에 해당하는 기간만이
지구역사에서 인간의 역사에 해당한다는 계산이 나오게 됩니다.
인간의 기원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두 가지 설이 대립하고 있습니다.
아프리카 탄자니아에서 기원한 어떤 한 종이 지구 전역으로 퍼져나갔다는 설과
지구상의 모든 동물들은 생명의 조건만 갖춰지면 어디에서나 자연발생적으로 등장할 수 있다는 주장이
그것입니다.
우리나라 전기 구석기시대의 대표적인 유적이 상원 검은모루 동굴입니다.
북한에서 도로공사를 하던중 평양시 상원구역 흑우리의 검은모루 동굴에서
큰곰, 동굴곰, 하이에나, 코뿔소 등 50만년 전에 살았던 동물들의 화석이 확인됐는데,
일제 때 한국에는 구석기시대가 없었다고 말했던 일본인들의 주장을 뒤엎은 획기적인 발견이었어요.
북한에선 이후에도 평안남도 덕천의 승리산 유적과 함경북도 웅기 굴포리 등지에서
구석기 유적들이 계속 발굴됐습니다.
구석기시대 사람들은 떼어 만든 타제석기(뗀석기)를 사용했는데,
1960년대 들어와 남한에도 공주 석장리를 비롯, 구석기 유적들이 하나씩 발견됐어요.
이 중에서도 결정적인 유적이 1970년대 발견된 경기도 연천 전곡리 유적입니다.
미국 인디애나대 고고학과를 다니다 돈을 벌기 위해 군대에 입대,
한국 동두천에서 근무하던 미군 하사 보웬이 한 겨울에 전곡리 한탄강변에서 데이트를 하다
우연히 발견한 것이 고고학 수업시간에 배운 아슐리안 주먹도끼였어요.
구석기시대 사람이 만든 유일하고 현재까지 가장 오래된 조각품이
오스트리아 빈 역사박물관에 있는 빌렌도르프의 비너스입니다.
19세기 중엽 철도 공사를 할 때 오스트리아와 독일 등지에서 11~15㎝ 정도 되는 조그만 돌조각들이
약 60개 발견됐는데, 그 중 오스트리아 빌렌도르프 지역에서 나온 이 돌조각이
구석기시대 사람들이 갖고 있는 미인관을 반영했다고 해서 비너스라는 명칭이 붙여졌습니다.
다산과 풍요의 상징인 여체를 표현하면서 생산과 관계되는 부위,
즉 유방과 둔부, 국부만을 과장되게 표현한 것이 특징입니다.
일종의 주술적인 의미로서 조각을 시작한 것이지요.
아놀드 하우저가 쓴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를 보면
예술은 ‘내용이 먼저냐, 형식이 먼저냐’를 놓고 끊임없는 논쟁이 있어왔습니다.
그런데, 인류 역사에 나와 있는 명확한 사실은 예술은 형식보다는 내용이 먼저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유사(類似)가 유사를 낳는다는 ‘마술의 법칙’,
비슷하게 만들면 똑같은 것으로 실현된다는 신념이 결국 구석기시대 미술을 만들어낸 것이었고
인간에게 미술이라고 하는 것이 가지는 부적과 같은 기능에서 예술이 시작된 것입니다.
1만5000년 전 유적인 스페인과 프랑스의 경계선에 위치한 알타미라와 라스코 동굴 벽화를 보면
들소뿐만 아니라 소를 잡는 화살촉이 같이 그려져 있습니다.
알타미라 동굴에서는 돌멩이를 맞아 상처가 많이 난 들소도 보입니다.
어느 책을 봐도 동굴벽화 사진이 제대로 나온 것이 매우 드문데,
그 이유는 전부 다 그림이 그려진 장소가 동굴 안에서도 가장 깊은 곳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동굴이든 30m만 들어가면 빛이 완전히 차단되는데
알타미라 동굴의 경우 170m 속 가장 깊은 곳의 천장에 달리는 들소와 누워있는 들소, 상처입은 들소 등
갖가지 들소를 그려놓았습니다.
라스코 동굴 벽화도 미로 같아서 들어가면 길을 찾을 수 없는 어두운 곳에 그려져 있습니다.
따라서 예술은 장식이나 형식으로 한 것이 아니라
‘마술’이라고 하는 내용으로 시작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어요.
한반도에서 제주도와 대마도가 떨어져 나간 게 불과 1만5000년 전의 일입니다.
서해 바다의 깊은 곳이라고 해봐야 75m 정도이고 평균 바다 깊이가 35m 밖에 되지 않아요. 옛날 서해 바다는 큰 강일 따름이었습니다.
동해 바다 이쪽은 백두대간이 흘러내리기 때문에 별 차이가 안나지만
서해 바다의 경우에 간만의 높이 차가 10m나 됐습니다.
따라서 구석기나 신석기시대 초기 유적지들을 보면 강변이 아니라 해안에서 나오는 것들은
함경북도 웅기 굴포리나 강원도 양양 오산리 같이 동해안에서 나오고 서해안에는 안나옵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한반도에 들어온 이주 경로가 동쪽을 통해서 왔다고 하는 설도 있지만 믿을 건 못돼요.
이 다음에 바닷물이 많이 빠져버리는 사태가 나거나 수중 고고학이 발달하면
서해안 해저 속에서 구석기나 신석기시대 초기 유적들이 많이 나올지도 모릅니다.
세계사적으로 신석기시대에 들어오면서 사람들이 강변 주위에 모여
정착생활을 하게 되고 집도 짓게 됩니다.
성적 수치심과 사계절을 견디기 위해 옷도 해 입게 되며 도구도 간석기(마제석기)를 만들어 씁니다.
또 농업과 목축을 시작하게 되는데
이는 요즘말로 하면 국내총생산(GDP)의 폭발적인 증가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와 함께 잉여곡물을 저장할 수 있는 토기를 제작하게 되면서
구석기인처럼 먹을게 없으면 굶어죽고, 추위와 싸우는 경쟁을 넘어서 인간이 자연을 경영하기 시작합니다.
(왼쪽) 6000년 전 신석기시대 마을유적인 서울 강동구 암사동 선사주거지(사적 제267호).
발굴조사를 거쳐 움집이 복원되면서 현재 선사유적공원으로 조성돼 있다.
(오른쪽) 한반도 신석기시대를 대표하는 빗살무늬토기
신석기시대 대표적인 유적으로
서울 강동구 암사동의 마을유적과 강원도 양양 오산리 유적이 있습니다.
한강변에 위치한 암사동 유적은 1925년 을축년 대홍수를 계기로
6000년 전 사람들의 집자리터(움집터)가 발견된 곳입니다.
오산리 유적과 부산 동삼동 유적, 암사동 유적 등지에선
덧무늬 토기와 함께 신석기시대를 대표하는 빗살무늬토기가 등장합니다.
빗살무늬토기를 만든 고아시아족들은
기원전 1000년 청동기 시대가 시작될 때까지 한반도의 주인공으로 살게 됩니다.
토기에 왜 빗살 문양을 쳤느냐를 놓고도 많은 해석이 있습니다.
단순히 멋으로 추상적인 문양을 넣었다고 얘기할 수도 있지만
덧무늬와 빗살무늬 등이 사람의 지문 같은 역할을 해
미끄러지지 않고 들기 편한 기능적인 측면도 무시할 수 없어요.
이밖에 아무 것도 그려지지 않은 공간에서 느끼는 인간의 공간 공포가
문양의 탄생을 낳았다는 해석도 있으며
빗살무늬를 생선뼈 무늬로 보고 강변에 살았던 신석기인들이 생선 같은 것을 많이 잡기 위한
주술적인 의미로 이와 같은 어골(魚骨)무늬를 발전시켰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기원전 1500년 무렵이 되면 빗살무늬토기에 번개무늬(雷文·뇌문)가 들어가고
뾰족바닥이 납작바닥으로 바뀌는 과정을 살짝 겪게 됩니다.
곡식 수확에 쓴 반월형 석도는 이때 등장해 청동기시대 농경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도구중 하나입니다 .
빗살무늬토기는 반지하 움집 생활을 하면서 모래사장에다 묻기 좋게 하기 위해서 밑이 뾰족했던 것인데,
이게 납작해졌다는 것은 지상으로 올라왔다는 의미이고
뇌문이 등장한 것을 인간이 그냥 채취하는 단계에서 적극적으로 농사를 짓기 시작한 것을 나타내는
징표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기원전 1000년쯤 되면 민무늬토기라고 부르는 무문토기 시대로 넘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이 무문토기는 지역에 따라서 상당히 다른 편차를 보입니다.
빗살무늬토기 시대에는 빗살무늬토기 한 가지만 대종을 이루었던 것에 비해,
민무늬토기 시대에는 민무늬토기 외에
붉은 간토기(홍도)와 구멍무늬토기(공열문토기), 검은 간토기(흑도), 가지무늬토기(채문토기) 등
다양화돼 있는게 특징입니다.
민무늬토기를 사용하고 있던 사람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죽음의 장식으로 고인돌을 만들었고 청동기를 사용했습니다.
이 사람들이 바로 우리의 직접적인 조상이 되는 퉁구스 계통의 예족과 맥족입니다.
이들은 한반도에서 평화롭게 장고한 세월동안 거의 매너리즘에 빠진 듯이 살아왔던
고아시아족 빗살무늬토기인들을 섬멸시켜버리고 이 땅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한민족은 한 번도 남을 침범한 일이 없는 것을 자랑처럼 얘기하지만
“우리는 한반도에서 살고 있던 빗살무늬토기를 사용한 고아시아족을 섬멸시키고
이 땅에 민무늬토기와 고인돌, 청동기를 갖고 들어온 위대한 퉁구스 예맥족이다”라고 쓰는 게
한민족의 기원에 대한 정확한 고고학적인 해석이 됩니다.
이들이 만든 나라가 바로 고조선과 부여입니다.
북방식과 남방식, 또는 탁상식과 바둑판형으로 구분되는 고인돌이
황해도 은율과 평양 등 북한에 1만4000기 정도 있고
강화도와 전남 화순, 전북 고창 등지를 중심으로 남한에 2만4000기 정도 있다고 하지만
실제 숫자는 훨씬 많을 겁니다.
수몰지구를 발굴하면서 바깥으로 옮겨놓은 고인돌 등 모두 계산하면
남·북한 합쳐서 5만기 이상 될 것이에요.
청동기시대 때 족장과 그 가족 묘역이라고 생각되는 고인돌에선
고조선의 상징적인 유물인 비파형 동검 등 많은 유물이 나왔습니다.
당시 대표적인 유적으로
경기 여주 흔암리· 충남 부여 송국리 마을유적, 전남 보성 봉릉리 고인돌 유적, 대전 괴정동 무덤 유적
등이 있습니다.
요녕식인 비파형 동검은 한반도에 들어와 자주적 양식인 세형동검으로 변합니다.
대전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하는 농경문 청동기도 있어요.
조그마한 동판에 밭을 갈고 있는 사람과 도리깨질하고 타작하는 사람이 그려진
그 뒷면에 보면 나뭇가지 위에 새를 조각했는데,
이것은 충청도 지역에 있는 솟대, 소도의 전통을 보여줍니다. 성역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지요.
장승과 함께 소도가 갖고 있는 전통은 3000년전부터 오늘날까지도 끈질기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고인돌 등 청동기시대 무덤에선 각종 문양을 넣은 방울과 거울 등이 많이 나오는데,
이와 같은 일련의 도구들은 오늘날 무당들이 사용하고 있는 연장과 똑같습니다.
오늘날 무당들이 쓰는 명두(明斗)라는 거울과 요령이라고 부르는 방울이 그것입니다.
나팔형동기와 팔주령, 쌍두령, 조합식 쌍두령, 간두령 등으로 구성된 청동방울 일괄
청동기시대 제관(祭官)이 사용하고 있었던 모든 의식의 구조들이
오늘날 샤머니즘의 무당 세계로 전달됐다고 볼 수 있어요.
울산시 울주 반구대 및 천전리 암각화도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유적입니다.
이들은 모두 우리가 끝내 중국과 동화할 수 없었던
선사시대 우리 한민족의 뿌리를 이야기해 주는 미술사적·고고학적 물증입니다. - 정리〓최영창기자 ycchoi@munhwa.com - 문화일보, 2004-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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