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지켜(연재자료)

유홍준 문화재청장의 특설강좌 (2) 조선시대 분청사기와 백자

Gijuzzang Dream 2008. 5. 1. 15:37
 

 

‘문화유산을 보는 눈’   

자유 창작의지가 빚어낸 '빛나는 소박함'

 

2.  조선시대 분청사기와 백자 

 

 

 

 

자유 창작의지가 빚어낸 ‘빛나는 소박함’

우리 나라 역대 왕 중에서 요즘 말로 가장 위대한 문화대통령이라 할 수 있는 사람은 세종대왕입니다.
이 분이 전국의 토지조사를 실시해 만든 것이 ‘세종실록지리지’로
국가를 통치하기 위해 각 시 · 군 등의 국내총생산(GDP)을 전부 다 계산할 수 있게
만들어 놓은 종합 지리책입니다.
예를 들어 충남 공주에서 나오는 쌀은 얼마고 거기서 나오는 밤이 얼마고 등
각지의 생산물과 특산물이 다 세세하게 조사돼 있습니다.

또 현청(縣廳)으로부터 서쪽 30리 가면 자기소와 도기소가 있는데
거기서 나오는 것은 품질이 상 · 중 · 하 중 어느 것이다 하는 식으로 품평까지 해놨습니다.
여기서 자기소는 분청사기라고 불려지는 자기를,
도기소는 질그릇을 생산하는 곳으로
이 책에 나오는 전국의 도기소와 자기소를 모두 모아보니까 324곳에 달했습니다.
이중 도기소가 185곳이고 자기소가 139곳입니다.
 
지난번 강좌에서 말했던 고려말 전남 강진과 전북 부안 등 관요(官窯)에 있던 도공들이
왜구의 게릴라적인 침입을 피해 내륙으로 들어가 전국에 퍼지면서
이 같은 상황이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전국 각지로 흩어진 도공들은 곳곳에서 다시 청자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옛날 방식대로 만든다고 만들었는데 푸른빛이 안나오고
시멘트 빛깔이나 회색, 아니면 누런색이 나오는 것이에요.
가마와 태토, 유약만 있으면 어디서나 청자를 만들 수 있지만
좋은 흙과 유약을 구할 수 없었고
제작여건도 예전처럼 국가가 지원해 주는 일이 없으니 어려웠던 것입니다.
도공들의 입장에선 속상할 수밖에 없지만 이제 청자가 갖고 있는 바탕의 의미는 없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상감할 때 쓰던 백토로 하얗게 분장한 사발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이 같은 그릇을 사기그릇이라 불렀는데
나중(일제시대)에 미술사학자 고유섭 선생이
‘분장한 회청색 사기’란 뜻의 분장회청사기(粉粧灰靑沙器)란 이름을 붙였고,
우리는 다시 이를 줄여 분청사기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관요가 아닌 민요(民窯)에서 제작된 분청사기는
조선 초기 새로운 나라를 만들어가는 국가의 기풍과 의지, 관의 간섭으로부터 완벽하게 배제된
지방가마가 갖고 있는 순박하고 소박한 성격이 반영됩니다.
문양도 새털구름이나 학, 갈대와 해오라기, 청순한 국화꽃 등이 아니라
부귀를 상징하는 모란꽃을 큼직하게 만들어 조선후기 민화처럼 서민화 경향을 보이게 됩니다.

분청사기는 제작 기법에 따라 종류가 나눠집니다.
15세기 전반쯤에 상감분청사기와 인화(印花)분청사기가,
15세기 후반에 박지(剝地)분청사기와 선각(線刻)분청사기, 철화(鐵畵)분청사기 등이 제작됐으며,
16세기 전반에는 귀얄분청사기와 덤벙분청사기가 만들어집니다.
 
이중 제작기법이 똑같고 연장선상에 있는 상감청자와 상감분청사기는
도자사 전공자들 사이에서도
고려 상감청자로 부를지 조선 상감분청사기로 할지 논란이 있을 정도로 비슷합니다.
인화분청사기는 상감무늬를 넣을 때
국화꽃이나 우점(雨點) 무늬를 도장으로 찍어 쉽게 무늬를 새긴 것으로
15세기 궁중에서 실제 사용된 그릇 중에는 이와 같은 인화무늬가 제일 많았어요.

‘분청사기 장흥고명 인화무늬 항아리’나 ‘분청사기 인화무늬 진해(鎭海)명 접시’에서 보듯,
인화분청사기 중에는 요즘 조달청에 해당하는 장흥고(長興庫)나
왜 사신을 접대한 내섬시(內贍寺), 인수부(仁壽府) 등의 관사명이나 지명을 새긴 게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언양장흥고’라 써 있는 것이 있다면
경남 언양 지역에서 만들어 언양 지방조달청에 집어넣은 것입니다.
 
국가에서 직접 가마를 운영하지 않았던 조선 초기에는
세금의 하나로 각 지방에서 제작된 분청사기를 거둬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거둔 도자기가 서울로 올라오는 과정에서
중간에 관리들이 빼먹는 게 태반이나 되자
아예 그릇에 조달청(장흥고)으로 가는 것이라고 찍어놓게 된 것입니다.
또 각 도에서 들어온 그릇들의 질이 천차만별이어서
경남 합천군 삼가(三嘉)니 진해니 하는 지명, 나아가 김씨, 이씨 등 도공의 성씨까지 박아넣게 되지요.

선각분청사기는 태토에 백토를 바른 다음 음각선으로 무늬를 새기는 것이고
박지분청사기는 반대로 백토를 바른 다음 문양을 제외한 부분을
모두 대나무칼 같은 것으로 긁어내는 기법입니다.
 
선각분청사기와 박지분청사기 중에는
항아리와 병을 만들면서 양쪽 면을 납작하게 만든 편호(扁壺)와 편병(扁甁)이 많습니다.
특히 망태기에 넣어 어깨에 들쳐메고 다닐 수 있는 야외용 술병으로 쓰인 편병 중
 ‘분청사기 선각 물고기무늬 편병’처럼 음각선으로 옆 둘레에는 변형된 모란꽃 잎을,
양쪽 면에는 물고기를 새긴 게 있어요.
청자와는 전혀 별개의 세계를 보여주는 분청사기 문양중에는
물고기 무늬가 많이 유행하는데 그 이유를 아직 확실히 알지 못합니다.
 
분청사기에 열광했던 일본사람들이 일제시대 때 경매를 통해 사갈 때
병에 새겨진 물고기 숫자에 따라 값이 두 세 배 뛰고 그랬습니다.
물고기도 그렇지만 잘 그리고 못 그리고의 경지를 떠난 나뭇잎 무늬를 새겨넣은 것이나
현대미술에서 볼 수 있는 추상성을 보여주는 휙휙 붓자국을 돌리다 만 것 같은 선무늬 편병 등이
분청사기의 특징입니다.
우리에게 위화감을 주는 완벽한 형식보다는 민화나 어린이 그림에서 찾을 수 있는 천진난만함,
그리고 여기에서 오는 소박함과 친숙함 등이 분청사기의 큰 매력 중 하나예요.

      
 

            (왼쪽) 조선백자 중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명품인 16세기 ‘백자철화 끈무늬 병’.

          소탈한 기형에 병목에서부터 노끈무늬를 그린 유머와 여유로 조선적인 넉넉함을 느끼게 한다.

                       젊은 세대들은 ‘넥타이병’이라고 부른다. 높이 31.4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오른쪽) 조선백자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18세기 전반 ‘백자 달항아리’. 높이 42.5cm. 개인소장

                   서민적인 생활미와 선비들의 이지적인 고고함이 절묘하게 조하를 이루고 있다.

 

 

 

20세기 최고 도예가였던 영국인 버나드 리치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도자학교인 알프레드 도자학교에서 기념강연을 하면서

“20세기 현대 도예의 나아갈 길은 500년전 조선 도공의 길을 배우고 찾아가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가 쓴 <동과 서를 넘어서(Beyond the east and west)>란 책 속에도 이런 생각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한국도자기의 아름다움에 이끌려 1936년 서울 덕수궁에서 개인전도 가졌던 그가 강조하는 것은
분청사기를 만든 도공이 기법적으로 굉장히 탁월한 사람이었는데도
억지로 잘 하겠다는 의지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에요.
 
세계 각국의 공예품들이 모인 영국 ‘빅토리아 앤 알버트 뮤지엄’의 소장품들은
모두 당대 왕이나 귀족들이 쓰던 것입니다.
그런데 15~16세기 조선 도예는
왕실 등 국가의 간섭으로부터 완전히 배제된 서민이 갖고 있는 자유 창작 의지의 산물이란 점에서
극히 예외적입니다.

15세기 후반에는 ‘분청사기 철화 어조(魚鳥)무늬 장군’처럼
충청도 공주지방 ‘계룡산 가마’를 중심으로 석간주(石間?)라는 일종의 녹물로
추상적인 문양을 그린 철화분청사기가 유행하며,
16세기에 들어서면 중국 명나라에서 들어온 백자의 영향을 받아
별다른 문양 없이 백토로 하얗게 분장한 분장분청사기가 많이 만들어집니다.
귀얄자국을 그대로 살린 귀얄분청사기와
그릇에 백토를 바르는 것이 아니라 아예 백토통에 덤벙 담갔다가 꺼내 유액이 줄줄 흐른채로 구워진
덤벙분청사기가 대표적인 분장분청사기입니다.

15세기 일본의 무로마치(室町)시대에 연극의 노(能), 음악의 렌가(連歌), 차로 대표되는
일본 특유의 미의식의 세계가 확립됩니다.
무로마치 문화가 지향한 미적 목표는 적막함, 쓸슬함, 스산함의 미학이었습니다.
또 그런 미의식을 추구한 다도인들에게 가장 어울리는 다완(茶碗)이 조선 분청사기였습니다.
 
‘고려다완’이라고 부른 분청다완은
일본인들이 적막의 미에서 ‘사비(寂)’와 ‘와비(侘ぴ)’의 미학으로 나아가면서 더욱 더 좋아하게 돼
아예 조선에서 주문생산으로 수입해 갔을 정도입니다.
 
정유재란은 일본에서 ‘도자기 전쟁’이라 부를 정도로 조선의 도공을 마구잡이로 잡아갔습니다.
우리는 분청사기로 뭉뚱그려 말하는 것을
일본인들은 미시마(三島), 하케메(刷手目), 가타데(堅手), 계룡산 등으로 세분해 얘기합니다.
이처럼 분류하는 언어가 다양한 것은 그것을 보는 시각도 발달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편 중국에선 원나라를 거쳐 명나라 초기에 오면 도자기를 구울 때
녹변 현상을 일으키는 철분이 완벽하게 제거된 백토,

이른바 카올린(kaolin)이라 부르는 고령토(高嶺土)와

페르시아에서 나오는 코발트 안료인 청화(靑畵)로 문양을 낸 청화백자를 새로 발명하게 됩니다.

 
백자는 청화백자와 함께 발전을 하는데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21세기도 청화백자의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지금 저는 분청사기를 훨씬 좋아하지만 이를 사용하던 당시 조선사람들에겐

<세종실록>에 중국 사신이 왔을 때 백자 반상기 한 세트를 갖고 왔다는 기록이 보여주듯

청화백자가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15세기 후반에 나온 ‘백자청화 홍치(弘治)명 송죽무늬 항아리’는
우리가 중국 것을 모방해 만든 대표적인 청화백자입니다.

조선백자는 500년간 각 시기별로 특색 있는 아름다움을 보여줍니다.
초기에는 상감분청의 전통에 따라 백자에 상감으로 무늬를 넣은 상감백자가 만들어지며,
16세기에는 왕주발이나 왕사발로 흔히 불리는 ‘백자 반합(飯盒)’과 ‘백자 대접’이
정중하면서도 우아한 백자의 위용을 대표합니다.
 
청화백자도 중국 것의 카피에서 벗어나
‘백자청화 망우대(忘優臺)명 잔받침’처럼 우리 것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의 등장으로 성리학도 조선 성리학으로 발전하듯이
조선화된 눈부신 백자를 만들어내게 되지요.
 
기술과 재료를 완전히 장악해 실력이 완벽해지면
여유가 생기고 그때부터 유머가 들어가게 됩니다.
백자병은 노끈을 맨 뒤 걸어넣고 썼는데,
‘백자철화 끈무늬 병’처럼 한 도공이 아예 끈무늬를 그린 병을 만든게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특히, 조선백자는 국가에서 1467년쯤 경기 광주에
조선시대 궁중음식을 담당한 관청인 사옹원(司饔院)의 분원을 설치하면서 발전하게 됩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실린 139개의 자기소 중 상품(上品)을 만들어 낸 곳은
경북 고령(1곳)과 상주(2곳), 경기 광주(1곳) 등 4곳에 불과했습니다.
 
국가에서 수요가 있는 만큼 직영사업으로 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해
서울과 가까운 광주에 분원(分院)을 내게 된 것이에요.
현재 광주 일대에선 약 290개의 가마터가 조사됐습니다.
물론 한꺼번에 290개의 가마가 사용된 것은 아니고
한번에 10개 정도의 가마를 사용한 뒤 10년마다 다른 곳으로 옮겨다니는 방식으로 운용됐습니다.
도자기 굽는데 필요한 사방 10리 일대 땔나무가 떨어졌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광주의 우산리, 번천리, 도마리, 무갑리, 관음리, 상림리, 선동리, 신대리, 오항리 등지로
옮겨다니다가 1752년 금사리에서 분원리로 옮긴 다음부터 가마를 더 이상 이동하지 않고
1883년 민영화될 때까지 130년간 한 곳에서 운영됐습니다.
그래서 동네이름도 분원리로 불리게 됐던 것입니다.

임진왜란의 전승국은 조선이었지만 국토가 황폐해졌으며
회색 빛깔이 난 백자의 제모습을 찾는데 다시 100년의 세월이 걸리게 됩니다.
회회청(回回靑)으로 불린 코발트 안료를 수입할 수 없었던 17세기에는
철사로 추상적인 문양을 그린 백자가 많이 만들어집니다.
그러다가 18세기 영 · 정조시대 문예부흥기를 맞으면서
금사리가마와 분원가마에서 사대부들의 정갈한 정취에 맞는
각병(角甁)이나 ‘백자청화 초화무늬 항아리’처럼 소탈한 무늬나 여백미가 있는 그림이 등장하게 됩니다.
 
이 때 가장 아름다운 백자가 바로 금사리가마에서 만들어진 달항아리예요.
대호는 높이가 대개 40~45㎝, 중항아리는 30~33㎝ 되는데,
조선 사람을 빼고 지구상의 어떤 나라에서도 이렇게 큰 둥근 항아리를 만들지 못했습니다.
수동식 물레로는 태토가 약하기 때문에 항아리 윗부분을 만들다보면 주저앉고 말기 때문이죠.
 
그러나 달항아리를 만들겠다는 조선 도공의 조형의지는
커다란 대접(왕사발)을 두 개 만든 다음 이것을 잇대어 둥글게 만드는 방식으로
결국 달항아리를 만들어내고야 말았습니다.
따라서 모든 달항아리에는 가운데 이은 자국이 있고
이로 인해 달항아리의 둥근 선은 컴퍼스로 돌린 기하학적인 원이 아니라
둥그스름한 넉넉한 맛을 지니게 됐던 것입니다.
 
달항아리에 대해, 미술사학자인 최순우 선생은
“부잣집 맏며느리를 보는 것처럼 넉넉함을 느낀다”고 말했고
이동주 선생은 “조선 사대부의 지성과 서민의 질박함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있다”고 평가했습니다.
- 문화일보, 2004-11-11
- 정리〓 문화일보, 최영창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