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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켜(연재자료)

유홍준 문화재청장의 특설강좌 (7) 삼국,통일신라 석탑의 등장과 발전

Gijuzzang Dream 2008. 5. 1. 15:23

 

 

 

‘문화유산을 보는 눈’   

'화강암 석탑'은 한민족 강인함의 상징

 

 7. 삼국, 통일신라 석탑의 등장과 발전 과정

 

  

 

절에 가면 보이는 것이 거의 다 석탑이기 때문에

석탑이 불교를 믿는 나라의 공통적인 형식이라고 알기 쉬운데, 사실 석탑은 우리 고유의 양식입니다.

인도에서 동점(東漸)한 불교가 중국과 한국, 일본을 거치면서 어느 시점부터 자기화하는 과정에서

불교건축의 핵심을 이뤘던 탑도 각 나라의 사정에 따라

‘중국은 전탑(塼塔)의 나라, 한국은 석탑의 나라, 일본은 목탑의 나라’식으로 다른 길을 걷게 되지요.

 

조선의 연행사신들이 랴오둥(遼東)반도를 한참 걸어가다 보면 나타나는 것이

랴오닝(遼寧)성 베이닝(北寧)시에 있는 중국 요나라시대 폐사지의 쌍탑이었습니다.
흙을 구워만든 벽돌로 조성한 중국의 가장 전형적인 전탑이지요.

경주 황룡사 9층목탑도 이 쌍탑과 같은 그런 모습이었을 거예요.

자동차를 타지 않고 걸어가다가 들판 위에 랜드마크처럼 우뚝 솟아있는 탑을 만났을 때

어떤 느낌을 받을까요.

외국인으로 근대 일본 미술사를 처음 쓴 미국의 미술사가 어네스트 페널로사는

일본 나라(奈良) 교외의 야쿠시지(藥師寺)를 지나다가 목탑을 보고

“들판에 서서 호수에 비친 모습이 얼어붙은 소나타와 같았다”고 말했습니다.

쇼팽의 소나타가 얼어붙어 나와 있는 모습이었다는 얘기지요.

랴오양(遼陽)을 지나 선양(瀋陽)에 들어가기 전에 우뚝솟은 요동백탑(遼東百塔)은

벽돌로 쌓은 중간중간 탑신부가 정교한 조각이 들어간 대리석으로 장식돼 있습니다.

조각할 때 정으로 쪼아야 하는 우리 화강암과 달리,

유럽과 중국의 대리석은 연질이기 때문에 조각도로 얼마든지 새길 수 있는 게 특징이에요.

따라서 우리 석탑이나 석조문화재들은 1000년의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강인함을 보여주지만,

대신 세부적인 것을 장식하는 측면에선 유럽처럼 발전하기 힘들었습니다.

물론 디테일을 생략한 가운데 형체가 갖고 있는 힘을 묘사한 것은 우리가 훨씬 강했지요.

서양의 로코코미술이 보여주는 화려한 장식성에 비해

고전미술이나 르네상스미술의 차분함이 더 위대하듯,

저는 우리 석조문화재처럼 조금 덜 조각한 것이 더 멋있다고 생각합니다.

국내에는 삼국시대 사찰이 하나도 남아있는 게 없지만 일본에는 호류지(法隆寺)가 있어요.

그 곳의 5층(중)목탑은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이지요.

남북 일직선상으로 남문과 중문, 탑, 금당, 강당, 승방이 배치된 삼국시대 일반적인 가람배치와 달리

호류지의 경우 금당과 탑이 좌우로 늘어서 있는데, 이는 입지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봐요.

우리도 남북 일직선상이란 가람배치가 당시 모든 사찰에 적용되진 않았으니까요.

그래서 호류지에 가면 우리의 잃어버린 부여나 경주의 옛 사찰 모습을 찾을 수 있지요.

국립경주박물관을 가면 남문, 중문, 탑, 3개의 금당, 강당, 승방으로 이어지고 회랑이 둘러져 있는

옛 황룡사의 모습을 50분의 1 축적으로 상상복원한 모형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그려진 황룡사 9층목탑의 상상복원도를 보면

모두 경주 남산 탑곡의 바위에 새겨져 있는 9층탑과

일본 호류지(法隆寺) 5층목탑의 구조를 기초로 하고 있지요.

어쨌든 이렇게 만들어진 목탑의 전통은 석탑으로 바뀌면서 사라졌지만

조선시대 만들어진 5층 목탑인 보은 법주사 팔상전과 3층 목탑인 화순 쌍봉사 대웅전을 통해

명맥은 유지됐었죠.

특히 체감률이 급격한 법주사 팔상전에 비해,

쌍봉사 대웅전은 삼국시대 목탑형식을 가장 잘 보존했던 집인데

1984년 4월 초파일 화재로 잿더미가 됐다가 86년 복원됐어요.

한편 중국에서 받아들인 전탑은 경북 칠곡 송림사 5층전탑을 비롯,

안동 신세동 7층전탑과 동부동 5층전탑, 조탑동 5층전탑 등

안동지역에 가야만 볼 수 있는 것도 특징입니다.

석탑의 등장은 현재 국립문화재연구소가 해체중인 익산 미륵사지 서석탑에서 시작합니다.

흔히 미륵사지를 3탑 3금당 양식이라고 하는데,

황룡사처럼 목탑을 가운데 두고 남북 일직선상으로 가람을 배치했다가

나중에 양쪽에 별원을 만들면서 목탑형식의 석탑을 세운 것이 석탑의 시원이 된 것이지요.

세키노 다다시(關野貞) 등 일본 관학자들이

1915년 6층까지 남아있던 미륵사지 서탑의 붕괴를 막기 위해 뒷부분을 시멘트로 보강했지만,

최근 다시 붕괴 위험성이 제기되면서 해체작업중입니다.

2층까지 제거된 상태에서 가운데 사각형태의 심초석(주춧돌)이 깨져 있는 것이 확인돼

서둘러 해체하지 않았다면 위험할 수 있었던 상황임을 알 수 있지요.

 

 

국내 최고(最古) 최대(最大)의 석탑인 익산 미륵사지 서탑의 해체전 모습


익산 왕궁리 5층석탑의 연대를 놓고,

고려 초부터 시작해 통일신라, 백제말기 등 학자들마다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고 있지만

지금은 백제탑으로 보는 견해가 많아지고 있습니다.

저도 목탑을 흉내낸 미륵사지 서탑이 왕궁리 5층석탑 단계에 오면

석탑으로서 필요한 부재만 남기고 나머지들은 다 없어지며,

부여 정림사 5층석탑에서 석탑의 형식으로 완성된다고 생각해요.

익산 왕궁리는 백제 무왕이 천도를 위해 왕궁을 만들었던 곳임이

최근 발굴조사 결과 드러나고 있습니다.

정림사지 5층석탑은 실제 현장에서 보면 그렇게 늘씬한 탑일 수가 없는데

슬라이드로 보면 스케일이 작아져 오종종한 느낌을 줍니다.

우리 문화재 중 가장 사진발을 안받는 문화재가 바로 이 탑이지요.

백제의 탑은 여기서 막을 내리고 신라에서 처음 만들어진 석탑은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입니다.

멀리서 보면 벽돌로 쌓은 전탑 같지만 실제는 돌을 하나하나 벽돌모양으로 깎아서 만든

‘전탑을 모방한 석탑’이란 의미에서 모전(模塼)석탑이라고 부른 것이지요.

의성 탑리5층석탑과 빙산사지 5층석탑도 모전석탑이지만

이들 두 탑은 지붕의 옥개석(지붕돌)만 마치 전탑을 쌓았을 때처럼 계단식으로 만든 것으로

그냥 석탑이라고 보는 것이 더 맞습니다.

언뜻 보면 정림사 5층석탑과 분황사 모전석탑을 합친 모습이지요.

통일신라시대에 들어오면 경주 사천왕사지에서 비롯된 쌍탑식 가람배치가 성행하게 됩니다.

특히 사천왕사지는 목탑이었던데 비해, 감은사에서 동·서 석탑이 만들어지면서

3층 석탑과 통일신라시대 쌍탑 가람배치의 기준이 여기에서 생기게 됩니다.

감은사탑은 찰주가 남아 있어 다른 탑보다 훨씬 더 조형적인 매력을 주는 게 특징이지요.

2층의 기단과 3개의 탑신부를 갖고 있는 감은사탑은

탑이 갖고 있는 상승감과 건물의 안정감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며

이후 통일신라에서 만들어지는 탑의 기본이 됩니다. 통일신라 3층 석탑의 전형이 창조된 것이지요.

본래 탑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시기 위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시점부터 석가모니의 사리는 한정돼 있는데,

절은 지어야겠고 사리가 없으니까 대용품으로 모신 것이 불상과 불경 등입니다.

절대자의 분신이 있는 공간에서 절집을 의미하는 상징탑으로 바뀌게 된 것이지요.

영어로 말하면 스투파에서 파고다로 전환을 한 것이에요.

이러면서 장중한 목탑에서 절이라는 상징성을 나타내고

제작기간은 비교적 짧은 대신 오래갈 수 있는 석탑으로 바뀌게 됩니다.

이게 목탑에서 석탑으로 옮아가는 가장 큰 이유지요.

이와 함께 탑과 금당의 가치전환도 일어나고 불상이 갖고 있는 비중이 커지게 됩니다.

 

 

2층의 기단과 3개의 탑신부를 가진

통일신라시대 3층석탑의 전형을 창조한 경주 감은사지 동서 석탑


국립경주박물관에 가면 지금은 덕동호에 수몰된,

원효대사가 주지스님으로 있었던 경주 고선사지 3층석탑이 있습니다.

볼륨감이 매우 강하고 넉넉한데 이것이 더욱 세련돼 나타난 것이

8세기 3·4분기인 경덕왕 대에 만들어진 불국사 석가탑입니다.

하나의 고전의 완성으로 이후의 모든 탑들은 석가탑의 변형일 뿐이에요.

 

그렇지만 답사를 다니거나 예술감상의 측면에서 볼 때

오히려 석가탑보다 감은사지 동·서3층석탑과 고선사지 3층석탑이 우리에게 더 많은 감동을 줍니다.

이는 정점에 도달한 결과물보다 정상을 눈 앞에 두고 계속 더 높은 것을 추구하려는 의지가 담겨있을 때

더 아름답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또 석가탑 옆에 다보탑이 있는데,

이처럼 3층 석탑의 전형 속에 다보탑과 구례 화엄사 사사자3층석탑, 경주 정혜사지 13층석탑,

중원 탑평리 7층석탑과 같은 변형의 존재가

석가탑이 갖고 있는 전형의 힘을 더욱 빛내주고 악센트가 되지요.

경주 남산 용장골 3층석탑 등 8~9세기 만들어진 3층석탑만도 100개 이상 늘어놓을 수 있을 겁니다.

모든 고전미술이 갖고 있는 고전적 규범으로 비례와 균형, 조화의 3가지를 들 수 있습니다.

이 3가지를 가졌을 때 고전인데 어느 나라 고전이든 이런 요소를 다 가지고 있고,

우리 불국사와 석굴암도 예외가 아닙니다.

일본인 건축가 요네다 미요지(米田美代治)가 쓴 ‘조선 상대건축의 연구’에 나오는 불국사 평면도를 보면

백운교와 청운교, 회랑, 석가탑과 다보탑 등이 부분과 전체를 이루는 비례의 미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축대를 쌓으면서 땅에 박힌 울퉁불퉁한 자연석에 맞춰 인공석의 밑부분을 파낸 것이나,

대웅전 올라가는 계단에 보이는 직선에서 살포시 소맷자락 같이 들려 있는 선을 살린 조각,

연꽃잎을 조각해 놓은 연화교 등 모든 명작들은 정말로 디테일이 아름답지요.

항공사진 외에는 어디에서 봐도 전체를 볼 수 없는 안압지도 마찬가지입니다.

통일신라 불상이 하대에 들어오면 철불로 바뀌는 것과 똑같은 현상이 탑에서도 나타납니다.

구산선문 중 가지산문의 개조로 알려진 도의선사가 주석했던 양양 진전사지의 3층석탑은

9세기 석탑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크기도 8m에서 5m 정도로 줄어들어 아담하고 귀여운 모습으로 바뀌고

기단과 탑신부에 8부신중과 사방불이 새겨져 있어요.

이웃한 선림원지 3층석탑과 마찬가지로 전형에서 탈피하면서 장식성이 강해지는 것이 특징이지요.

일종의 매너리즘과 로코코 현상이 일어난 것입니다.

쌍탑인 남원 실상사 3층석탑과 장흥 보림사 3층석탑은

탑의 상륜부가 그대로 남아 있어 석가탑 복원 때 참고가 됐으며

보령 성주사지 석탑 3개는 다른 곳에서 옮아온 것으로 추정됩니다.

“부처님은 자기 자신의 마음 속에 있다”거나 “깨우친 자는 부처가 된다”고 주장한 도의선사의 가르침은

지방호족이라도 능력있는 자는 왕이 될 수 있다는 이데올로기를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깨우친 고승들의 경우 죽었을 때 부처님에 준하는 예우를 갖추게 했지요.

이렇게 해서 등장한 것이 사리탑인 부도와 부도비로,

진전사지와 여주 고달사지, 곡성 태안사, 남원 실상사, 쌍봉사 등 곳곳에서

도의선사와 적인선사(혜철), 증각대사(홍척), 철감선사 등의 부도와 부도비가 조성됩니다.

이중 화강암을 떡 주무르듯이 주물러 비천상을 새긴 철감선사 부도가

단일 조각품으로는 가장 화려합니다.

돌거북이에 비를 세우고 용(이무기)머리 지붕돌을 붙인 부도비도

철감선사의 것이 오른쪽 앞발을 살짝 들고 있어 가장 생동감을 주지요.

 

                  

(왼쪽) 눈과 조화돼 화려함이 돋보이는 화순 쌍봉사의 철감선사 부도

 

                           (오른쪽) 두 마리 사자 사이를 투공한 조각의 기법과

 

                           무지개를 썰어놓은 듯한 곡선이 특징인 합천 영암사지의 쌍사자석등과 돌계단

 

‘사찰기 게양대’인 강릉 굴산사지의 당간지주와

합천 영암사지의 쌍사자석등 및 돌계단은

우리 문화유산이 자연 속에서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보여줍니다.
- 정리〓
최영창기자ycchoi@munhwa.com
- 문화일보, 2004-1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