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지켜(연재자료)

유홍준 문화재청장의 특설강좌 (5) 삼국시대 고분미술

Gijuzzang Dream 2008. 5. 1. 15:32

    

 

‘문화유산을 보는 눈’   

'강인(고구려) - 우아(백제) - 화려(신라)' 세 나라 개성 오롯이 

 

 5. 삼국시대 고분미술

 

 

 

 

  

인간 삶의 아이러니이지만 옛날 사람들이 살았던 일상생활의 자취는 모두 없어져 버리고

죽음의 자취만 남아서 이를 통해 당시 사람들의 삶을 복원하는 것이 고고학의 큰 테마가 돼 버렸습니다.

삼국시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무덤이 존재하기 때문에 과거를 복원할 수 있게 됐으며

왕릉 때문에 서울의 녹지공간도 보호됐습니다.

그런데 인간생활중 가장 변하지 않는 것이 장례풍습입니다.

거꾸로 말해 장례풍습이 바뀌었다는 것은 그 문화가 완전히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기원전 1000년쯤(물론 북한은 청동기시대의 개시를 기원전 2500~3000년전으로 주장하지만)

이 땅에 고인돌이 등장한 것은 새로운 장례풍습제도의 등장이었고

고조선 · 부여시대의 상징적인 문화였어요.

그러다 기원전후 무렵이 되면 고인돌이 이 땅에서 사라지고

삼국시대 고분미술이 등장하게 되며 이후로는 장례문화가 크게 변하지 않습니다.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에 불교가 번성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에서만 화장을 했을 뿐 매장하는 풍습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잖아요.

이 점에서 한반도의 뿌리, 우리가 갖고 있는 삶의 뿌리는 삼국시대 고분미술에서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삼국시대 미술은 크게 고분미술과 불교미술로 나뉩니다.

다른 나라는 고대국가를 얘기할 때 한 줄기로 얘기하는데

우리는 고구려의 강인한 문화와 백제의 우아미, 신라의 화려함같이

인류가 고전문화를 만들어가던 시기 세 가닥으로 추구되던 문화가

통일신라에서 하나의 결실을 맺게 됩니다.

이는 한민족이 갖고 있는 정서의 발현을 다양화시킬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로

우리로서는 굉장히 큰 복이었던 셈이지요.

우선 한성백제의 초기 도읍지(하남 위례성)로 유력하게 떠오르는 풍납토성을 봅시다.

기원 전후 이렇게 토성을 중심으로 사람들의 집자리가 생기고

빗살무늬토기나 민무늬토기(무문토기)와 다른 단단한 회색의 와질(瓦質)토기가 나오며

삼국시대 전형적인 토기인 회청색의 경질(硬質)토기도 만들어지기 시작합니다.

노천에서 구우면 온도가 700도 이상 올라가지 않는데

지붕이 있는 굴가마(등요 · 登窯)가 등장해 1100도까지 올라가면서 가능하게 된 일이지요.

당시 토기를 보면 물레를 사용하기 전 그릇을 단단하게 하기 위해

새끼를 묶어서 만든 망치로 두드려 생긴 탄알 모양의 승석문(繩蓆文)이 많이 나옵니다.

삼국시대 초기 와질토기들이 우리나라에서 처음 발견된 곳이 김해지역입니다.

그래서 60, 70년대만 해도 당시를 김해토기시대라고 했어요.

그런데 이런 토기들이 서울 암사동과 풍납동에서도 나오니까 김해식 토기로 바뀌었으며

다시 전국에서 발견되자 원삼국시대 토기로 이름이 변경됩니다.

박물관에 가서 원삼국시대란 용어를 보고 생소하게 여기는 분들이 많은데,

사실 고구려와 백제, 신라 세 나라가 솥발처럼 정족(鼎足)을 이뤘던 시기는 채 150년도 안됩니다.

따라서 기원전 1세기부터 668년까지를 삼국시대라고 쓰는 것은 굉장한 모순이 있어요.

부여, 동예, 옥저, 삼한 등 삼국시대 초기만 해도 10여 개의 부족연맹국가가 있었습니다.

영어로 프로토(proto)란 뜻의 원(原)이 붙은 원삼국시대는

삼국으로 정립되기 이전의 상태인 기원전 100년부터 기원후 300년까지

약 400년의 기간을 부르는 용어로 고(故) 김원용 전 서울대 교수가 만든 것입니다.

원삼국시대 토기 중 소뿔 모양의 손잡이가 있는 항아리나 오리형 토기들은

파격적인 조형의지를 보여줍니다.

일상생활 용도라기보다는 제의용으로 고대국가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지배층이

자신들이나 국가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의지가 그릇에 반영된게 아닌가 생각돼요.

사실 오리모양 토기의 경우

서울 인사동과 장안평, 대구 건들바위 같은 고미술상점에 처음 나왔을 때

누구도 우리 것이라고 믿는 사람이 없었어요. 1985년 대구 임당동고분군에서 발굴될 때까지는 말이죠.

 

지금은 깨진 것까지 약 40개 정도 발굴돼 ‘오리형 토기의 시대’라고 부를 정도로

원삼국시대의 상징적인 유물이 됐습니다.

사실 오리라고 하지만 계관(鷄冠 · 닭의 볏)이 있는 등

오리도 닭도 아닌 상스러운 동물을 상징화했다고 보여집니다.

유장한 압록강 줄기를 따라가다 보면

날씨가 따뜻해 중국에서 동북 3성의 강남이라고 부르는 지안(集安)시 퉁거우(通溝)평원에

흩어져 있는 피라미드와 유사한 적석총(積石塚 · 돌무지무덤)을 볼 수 있습니다.

일제 때 ‘남만주조사보고’에 의하면

우산하 지구에 2000여 기 식으로 여러 군데 2000~3000개씩 흩어져 있는 것을 합하면

1만2000여 기에 달합니다.

 

중국에서 ‘동방의 금자탑’이라 부르는 7층(단)으로 된 장군총(장수왕릉으로 추정)이나 광개토왕릉비,

그 뒤의 태왕릉(광개토왕릉으로 추정) 등이 대표적인 고구려 유적입니다.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427년)하기 이전인 350년 무렵부터

평양과 대동강 남쪽, 황해도 안악 일대에서 벽화가 그려진 석실봉토분(石室封土墳 · 돌방흙무덤)이

등장합니다. 물론 돌방흙무덤이라고 모두 벽화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중국 지린성 지안시에 흩어져 있는 고구려 적석총


고구려에서 떨어져 나온 백제도 서울 석촌동 적석총에서 보듯

무덤형식이 처음에는 고구려식이었어요.

장군총에 비해 3층이지만 옆에다 돌멩이를 한 면에 3개씩 기대놓은 것 등이

고구려 무덤형식과 똑같습니다.

돌이 많은 마을이란 뜻의 ‘돌마리’라는 이름이 상징하듯 원래 석촌동에는 적석총이 많았지만

아파트를 지으면서 지금은 7기만 남아 있지요.

그러다 방이동으로 가면 고구려무덤 형식으로부터 벗어난

흙무덤인 토광묘(土壙墓 · 널무덤)와 토광목곽묘(덧널무덤) 등이 만들어지며

웅진천도 뒤에는 공주 송산리고분군의 무령왕릉에서 볼 수 있듯

중국 남조풍의 벽돌무덤인 전축분(塼築墳)이 등장합니다.

 

백제와 중국 남조 양(梁)나라 등과의 교류상을 보여주는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2000여 점의 유물 때문에

국립공주박물관이 탄생하지요.

“사마왕(斯麻王·무령왕)과 왕비가 토지신에게 2만냥의 돈을 주고 땅을 매입한다”는 내용의

무령왕릉에서 나온 일종의 토지매매 계약서인 매지권의 기록을 통해

‘삼국사기’의 정확성이 입증된 것도 성과입니다.

경주 일대에는

왕과 왕비의 봉분 두 개가 남북으로 이어져 있는 표형분(瓢形墳)인 황남대총을 비롯해

155개의 고분이 분포하고 있어요.

고구려나 백제의 무덤과 달리 신라의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 · 돌무지덧널무덤)은

도굴이 어려워 일제가 고고학의 실험대상으로 발굴할 때까지 사람들의 손을 타지 않았습니다.

 

통일신라시대로 들어오면 12지신상이 새겨진 호석(護石)을 두른 김유신묘와

원성왕릉으로 추정되는 괘릉(掛陵)이 만들어졌어요.

이중 괘릉은 동서남북 사방을 응시하고 있는 돌사자 2쌍과 서역인 형상의 무인석 등

화려한 능묘구조를 갖추고 있는 것이 특징인데

8세기 후반 조성된 어떤 불상에서도 이렇게 사실적인 조각을 찾을 수 없어요.

평지에 있는 신라의 무덤과 달리 석실분(石室墳 · 돌방무덤)인 가야의 무덤은

밑에서 위로 올라갈수록 무덤이 커지는 것이 특징입니다.

대가야 무덤인 고령 지산동고분군을 비롯해 함안, 창녕, 고령 등 어느 지역을 가도

가야무덤은 산자락을 타고 올라가면서 만들었어요.

조상님들과 자기의 삶이 이어진다는 의미에서 신라가 평지에 무덤을 조성했다면

가야사람들은 조상들의 비호와 가호 아래 우리들의 삶이 영위된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

마한의 세력이 강했던 나주에선 옹관(甕棺 · 독무덤) 전통이 계속된 게 특징입니다.

고분에서 출토된 것 중 하이라이트는 역시 왕이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관과 관모, 관식 등입니다.

평양 진파리1호분에서 나온 관모형태의 고구려 금동투조금구와

백제 무령왕 및 왕비의 관식, 천마총 금관 등 신라의 금관을 보면 세 나라 문화가 갖고 있는 성격,

거칠게 얘기해 고구려 문화의 사나이다움과 강인함이나

여성스럽고 우아한 백제의 미, 신라문화의 화려함 등이 그대로 나타나지요.

고구려 금동투조금구와 백제 무령왕 관식의 경우 같은 불꽃무늬라도 선이 주는 느낌이 다릅니다.

신라금관은 고대 일본에서 동경, 칠지도와 함께

신령스런 보물로 생각한 곡옥(曲玉)이 수십개씩 달려 있어 대단히 화려합니다.

고려시대 무덤에 청자 그릇 하나 넣듯이 삼국시대 왕과 귀족의 무덤을 파면 금귀걸이가 다 나옵니다.

무령왕릉에서 나온 하트형을 비롯해 펜촉형, 총알형, 낙엽형 등 종류도 다양해요.

특히 금 알갱이로 장식하는 기법 등 신라사람들의 금속공예기술은 세계 어느나라보다 앞서 있었습니다.

각종 금 목걸이나 다리(多利)라는 장인의 이름이 새겨진 무령왕비의 은팔찌에선

요즘 크리스천 디오르 제품 못지않게 현대적인 감각의 디자인을 볼 수 있습니다.

 

경주 고분에서 나온 허리띠 장식과 식리총의 금동신발의 문양 등은

유럽 중세문화 속에서 보이는 다양한 장식문양을 능가해

신라 황금문화가 대단히 다양하고 세련됐음을 보여줍니다.

성덕대왕신종(에밀레종)이나 백제 금동대향로는

실제 사용했을 때 그것이 갖고 있는 오리지널한 맛을 확인할 수 있지요.

 

    

 (왼쪽) 가운데 삼족오(三足烏)와 불꽃무늬로 장식된 평양 진파리1호분 출토

                              고구려 관모형 금동투조금구.

                    (오른쪽) 곡옥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경주 천마총 출토 금관.


사실 와당을 보면 고구려와 백제, 신라의 미감에 대해 제일 먼저 눈뜨게 됩니다.

똑같은 숫막새 기와의 연판문양에서도 삼국이 서로 다른 것을 확인할 수 있어요.

충청도 지역을 돌아다니다 솔밭들을 보면 백제 ‘산수문전’의 문양과 참 비슷한 곳이 많아요.

10여 년전 성주사지를 발굴하던 이강승 충남대 교수가 저를 발굴현장에 초대하며

“바람도 돌도 나무도 산수문전 같다”고 한 말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 정리〓최영창기자 ycchoi@munhwa.com
- 문화일보, 2004-12-09

 

 

 

 

 

 고구려 고분 벽화의 변천

 

 

인물도→생활도→사신도 후기엔 새 영혼관념 등장

 

 

삼국시대 고분미술의 정수는 고구려 고분벽화입니다.
350년쯤부터 시작해 고구려가 멸망하는 668년까지 발달한 고구려 벽화고분은
지금까지 평양과 중국 지안 일대를 중심으로 100여 기가 확인돼 있습니다.
이렇게 많은 것은 왕의 무덤뿐 아니라
유주자사 진(鎭)의 무덤인 덕흥리고분처럼 고급 관료들의 무덤에도 벽화가 그려졌기 때문이에요.
고구려 고분벽화는 3시기로 나눌 수 있습니다.

안악3호분이나 덕흥리고분 등 350년에서 450년 사이 만들어진 벽화고분은
인물도가 벽화의 중심을 이루고 있어 이 사람이 피장자(被葬者)란 사실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물론 357년에 죽은 동수(冬壽)란 이름이 적힌 명문이 전하는 안악3호분의 경우
지금까지 피장자를 놓고 동수무덤이란 설과
동수는 당시 주인공을 모시고 있던 신하로
무덤의 주인은 미천왕이나 고국원왕이란 논란이 진행중이지만 말이죠.

450~550년 사이가 되면 인물도에서 생활도 중심으로 바뀌게 됩니다.
무용총의 사냥하는 그림 등이 대표적인데,
당시는 고구려의 전성기인 장수왕 때로 벽화를 그리는 능력과 실력도 높은 수준에 도달합니다.
대개 실력이 있으면 여유가 생기고, 여유가 생기면 유머가 들어갑니다.
무용총 벽화에서 마지못해 사냥에 나서는 것 같은 말 탄 사나이의 모습이 바로 이런 유머의 산물입니다.
이 때가 되면 무덤 주인공이 평상 위로 올라가고, 다시 무덤 위쪽에 그려지는 등 서서히 퇴조하는데,
이는 아무개의 무덤이라는 개인의 공간에서
죽은 자의 무덤이라는 상징의 공간으로 바뀌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다 550년 이후는 주인공이 무덤의 공간에서 쫓겨나고
사신도(四神圖)가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게 되지요.
개인의 공간에서 공적인 공간으로 바뀌고, 마지막에 나타난 것은 영혼의 세계입니다.
이는 삶의 공간과 죽음의 공간을 동일시한 초보적인 영혼개념에서
이제 영혼의 세계는 영혼이 지배한다는 관념이 등장한 것을 의미합니다.
- 문화일보, 2004-1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