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지켜(연재자료)

유홍준 문화재청장의 특설강좌 (6) 불교미술의 원리와 삼국, 통일신라 불상

Gijuzzang Dream 2008. 5. 1. 15:27

     

 

 

 

 

‘문화유산을 보는 눈’   

삼국불상 '미소'가 통일신라 들어 '근엄'

 

 6. 불교미술의 원리와 삼국, 통일신라 불상

 

 

모든 고대국가가 형성되는 데는 3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영토의 확장과 율령으로 대표되는 강력한 통치체계의 확립,

그리고 이데올로기로서의 종교가 그것이에요.

샤먼의 전통으로 유지될 때만해도 제관(祭官)이 춤추고 주술적인 것을 행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지만

조직이 커지고 사회가 분화돼 왕과 귀족, 백성의 신분차별이 생겨나면서

이런 위계를 설명하는데 종교의 신세를 지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이와 함께 인간의 삶과 영혼의 문제, 두 가지를 다 해결해 줄 수 있는 이데올로기인 종교의 전파를 위해

고대 제왕들은 막대한 재력이 들어가는 신전과 사찰의 건립에 그렇게 열성적이었던 것이지요.

 

실제 삼국시대 가람배치에서 남문, 중문, 탑, 금당, 강당, 승방 순으로 남북 일직선상에 배치돼 있는

경주 황룡사지 강당은 오늘날 정부종합청사의 강당이 아니라 로마시대 홀룸 같은 역할을 해

원효대사와 자장율사가 모두 이곳에서 강의를 했어요.

 

따라서 지금부터 강의하는 불교는 어느 특정 종교에 대한 얘기가 아니라

고대 우리 조상들이 국가창출의 원동력으로 삼았던 불교, 이데올로기로서의 불상에 대한 내용입니다.

기원전 6세기에 활동한 고타마 싯다르타가 도를 깨달은 뒤 10대 제자를 통해 불교를 전파했지만

국가로부터 인정받은 것은 300년이 지난 기원전 3세기가 됐을 때입니다.

불상을 만들지 않아 무불상 시대로 미술사에서 얘기하는 당시에는

산치대탑과 같은 수트파(Stupa · 불탑) 외에는 불교적인 장치물이 없었어요.

서기 1세기 들어 오늘날 파키스탄 영토인 간다라지역에서 비로소 불상이 출현하게 됩니다.

간다라는 알렉산더 대왕이 동쪽으로 진출한 마지막 지역이었지요.

헬레니즘 문화가 동쪽으로 진출하는 과정에서 간다라 지역에 살던 사람들이

인간의 모습을 빌어 신상(神像)을 만들던 그리스 사람들의 아이디어를 차용해

이때부터 불상이 제작되기 시작합니다.

원시 소승불교에서 대승불교로 전환하는 불교 교리상의 발전도 불상제작의 전기가 되지요.

 

“깨우친 자가 부처다”라는 대승불교의 교리에 따라 석가모니도 수많은 부처 중의 하나일 따름이 되며

경전이 찬술될 때마다 수많은 부처들이 탄생하게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족보가 대단히 복잡해요.

부처 밑에 보살이 있고 보살 아래 천상의 세계를 지켜주는 제석천과 범천, 그리고 사천왕이 있으며,

다시 그 밑에 아라한과 나한이라는 고승, 그 아래로 승려와 대중이 있어 상하로 연결된 것이

불교의 위계(하이어라키)입니다.

석가모니가 성불하기 전 왕자일 때의 모습을 모델로 한 보살상은

귀공자의 모습, 또 남성도 여성도 아닌 중성의 모습을 띠게 됩니다.

불상의 조성을 보면

석가를 포함 우주에서 중생을 구하기 위해 다녀간 일곱 분의 부처(과거칠불)와

미래에 출현한다는 미륵불 등 시간개념의 부처가 있는가 하면,

방위개념이 들어가 있는 부처도 있답니다.

과거칠불 중 석가모니 직전에 지구에 다녀갔던 분이 다보불이기 때문에

석가와 다보불이 나란히 앉아 있는 이불병좌상(二佛竝坐像)이나

석가탑과 다보탑이 병립해 만들어집니다.

동서남북에 다 부처가 있을 것이란 믿음에서 사방불 개념이 퍼지고 사면석불이 조성돼요.

‘아미타경’이 찬술되는 2세기쯤 되면 인도사람들은 자신들이 남쪽에 있다는 생각에

남쪽에는 석가모니, 북쪽에는 미륵, 서쪽 극락세계는 아미타여래 하는 식으로 사방불 개념이

완전히 체제를 갖추게 됩니다.

 

또 부처의 좌우 양쪽에 부처를 보좌하는 보살상이 만들어지는데,

아미타여래의 경우 관세음과 대세지보살이, 석가모니의 경우 문수와 보현보살이 좌우에 배치됩니다.

 

‘화엄경’이 찬술되는 시점에 오면 불법 자체를 의미하는 비로자나불이 나타나게 됩니다.

말로는 간단하지만 불경으로 들어가면 아주 복잡한 구조를 갖는데,

사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당시 신앙형태가 어떠했느냐는 것일 겁니다.

동남아시아 각국의 불상을 소개한 ‘The Image of Buddha’란 책을 보면

불상들이 각각 그 나라 사람 중 가장 미남형이거나 이상적인 상으로 변해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인도는 인도 사람의 이상형으로, 캄보디아는 캄보디아 사람의 이상형으로,

그리고 우리가 인정하든 안하든 경주 남산의 불상은 한국인이 갖고 있는 이상적인 상을

반영한 것이에요.

미국 하와이주의 호놀룰루에 ‘아카데미 오브 아트’라는 미술관이 있는데,

이곳 간다라 미술실에 전시돼 있는 불두(佛頭)를 보면

그리스 신전에서 떼어왔는지 불상에서 떼어왔는지 거의 구별이 되지 않을 정도로

헬레니즘을 통해 받아들인 그리스의 영향을 느끼게 됩니다.

부처님이 어떻게 생겼는가에 대해 설명한 것으로 32상 80종호란 게 있어요.

거의 모두 부처님의 이상적인 몸매와 보통사람과 다른 신체구조를

32가지, 80가지로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예를 들어 나중에 법륜(法輪)으로 형상화되는 평발인 발바닥에 있는 바퀴나

곱슬머리와 머리 위의 군살을 나타낸 나발(螺髮)과 육계(肉계),

두 눈 사이에서 희고 빛나는 털인 백호(白毫) 등이 모두 32상 80종호에 나옵니다.

이밖에 눈은 은행알처럼 생겼고 몸에서 금빛이 났다는 내용 등도 설명돼 있습니다.

그리스인의 모습이 아닌 인도인의 이상적인 모습을 담은 불상을 만든 굽타왕조를 지나

흰두교가 불교를 압도해버리면서 인도에서는 더이상 불교가 발전하지 않고

실크로드를 넘어 불상과 함께 동점(東漸)을 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4~14세기 1000년에 걸쳐 막고굴 등과 같이

중국 둔황(敦煌) 등 실크로드 각지에 석굴을 파고 그 안에 불상을 조성한 유적이 나타납니다.

19세기 중엽 모래바람에 덮였던 석굴이 하나하나씩 드러나면서

스타인이나 펠리오, 오타니 같은 서구와 일본의 탐험대(도적떼)가 들어가

벽화와 불상 등 유물을 가져갔습니다.

이중 펠리오가 막고굴 장경동에서 발견, 프랑스 기메박물관으로 가져간 돈황문서에서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됐으며

일본의 오타니(大谷)탐험대가 조선총독부 창고에 갖다놓은 수집품 때문에

우리나라는 중앙아시아 벽화의 세계 최대 컬렉터 중 하나가 됐지요.

중국 북위시대 윈강(雲崗)석굴만해도 불상이 중국화되기전 간다라 양식을 보여줍니다.

선비족인 탁발씨(拓跋氏) 등 중국에 들어와 남북조시대를 연 북방 이민족들은

유교에 필적할만한 이데올로기로 불교를 적극 받아들였어요.

북위가 안정되면서 갸름한 얼굴에 미소를 짓고 있으며

추운 북방민족 출신답게 두툼한 옷을 입은 불상을 만들어냅니다.

또 똑같은 시대지만 남조 양나라에선 훨씬 더 부드럽고 유연한 모습의 불상을 조성하는데

각각 고구려와 백제 불상에 영향을 주게 됩니다.

우리 판소리에 “찡그리면 다 서시인줄 아느냐”란 대목이 있어요.

북위시대 불상의 아련하게 잔잔한 미소는

중국의 미인인 서시(西施)가 어금니가 아파 찡그렸는데

웃음이 나와 아픔을 무릅쓰고 웃을 때의 모습을 연상시켜줍니다.

이런 불상이 북주와 북제를 지나 당나라에 오면 육감적인 불상으로 바뀌게 되요.

당나라 불상의 극치를 보여주는 게

통일신라가 석굴암을 만들 당시 조성된 높이 약40m짜리 ‘봉선사 비로자나불상’입니다.

살찐 사람 목처럼 목에 3도, 즉 세 줄이 가 있는데,

불상 중에서 가장 이상적인 인간상에 다가간 것으로 이 불상을 꼽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당나라를 끝으로 신유학의 시대로 다시 넘어가는 송나라 이후로는

고전을 파괴하는 파격적인 불상들이 출현하게 됩니다.

현재 우리나라 고구려 불상은 20여 개 밖에 남아있지 않아요.

그나마 석불은 남기지 않았고 옮겨다닐 수 있는 조그만 금동불이어서

양식을 가지고 설명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중 경남 의령에서 발견된 ‘연가(延嘉)7년명 금동여래입상’은

뒤쪽에 539년 고구려 동사(東寺)라는 절에서 천불을 만들어 유포했는데,

그 중 제29번째 불상이라는 기록이 전하고 있어 확실한 고구려 불상임을 알 수 있지요.

옷자락이 무릎에서 X자로 교차하고 있는 평남 ‘원오리 출토 소조보살입상’은

고구려 기왓장에서 보이는 것처럼 연꽃대좌를 포함한 전체적인 선이 강하고 날카로운게 특징입니다.

 

반면, 충남 부여 ‘규암면 신리 출토 금동보살입상’은

연꽃대좌의 양식을 보면 600년무렵 백제에서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이렇게 당시 유행했던 양식을 통해 시대를 감별해내는 것이 미술사가 갖고 있는 큰 힘 중 하나입니다.

가장 백제다운 모습을 보여줘 ‘미스 백제’로 불리는 부여 ‘군수리 출토 금동보살입상’이나

같은 곳에서 나온 고개가 6시5분 방향인 ‘납석제여래좌상’은

절대자가 갖고 있는 친절성을 보여줍니다.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삼국시대 불상 중 미소를 띠고 있는 불상들의 경우 입상이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대부분 좌상이면서 아주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는 통일신라불상과는 달리,

우리와 동일한 지평 속에서 우리를 극락세계로 맞이하고 구제하러 온 절대자가 갖고 있는 친절성을

극대화시킨게 삼국시대 불상의 공통적인 특징이라고 봐요.

‘서산 마애삼존불입상’처럼 은행알 같은 큰 눈을 하고 활짝웃는 불상은 세상에서 보기 힘듭니다.

서산 마애불이나 석굴암 본존불, 창녕 관룡사에 있는 불상 등은 모두 동동남 15도 방향,

즉 동짓날 해뜨는 방향을 바라보고 있어요.

그런데, 동지는 일년의 끝이 아니라 시작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서울 경복궁 국립중앙박물관이 지난 10월 문을 닫기 전

국보 78호와 83호 ‘금동반가사유상’을 함께 전시해 근래에 드문 히트를 쳤지요.
지금도 국적을 갖고 논란이 있지만, 거의 등신대에 가깝고 조선 사람의 이상적인 모습을 모델로 해

절대자가 갖고 있는 친절성을 극대화한 이들 반가사유상이 있기 때문에

삼국시대 불상의 위대함을 얘기할 수 있게 됐습니다.

이들 반가사유상과 거의 흡사한 일본 코류지(廣隆寺)의 ‘목조 미륵반가사유상’을

본 독일 철학자 칼 야스퍼스는

“모든 실존적 고뇌로부터 완벽하게 해방된 절대자의 모습을 읽을 수 있다”고 극찬했지요.

 

 

(왼쪽부터) 고구려의 ‘연가7년명 금동여래입상’과 백제의 ‘서산마애삼존불입상’.

신라의 ‘거창출토 금동보살 입상’ 등 삼국시대 불상에서 보이는 미소가

통일신라시대 석굴암 본존불(오른쪽)에 오면 근엄한 표정으로 바뀐다.

 
경남 ‘거창 출토 금동보살입상’을 보면

보살상이 가진 존엄성보다는 옆집 수퍼 아줌마를 보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바로 이 점이 뒤늦게 불교를 받아들인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룰 수 있었던 기반인지도 모르는데,

절대자의 모습을 이웃집 아저씨와 아줌마 같은 평범한 상에서 찾은 것이 특징이에요.

원효의 대중불교가 갖고 있는 성격과도 일맥상통합니다.

신라의 불상, 특히 경주 남산자락에 있는 100여 군데의 불상 중 삼국통일 전에 조성된 것은

‘배리 석조삼존불입상’과 ‘남산 부처골 감실 마애불’, ‘삼화령 석조미륵삼존불상’ 등 3개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들 석불상은 여타의 다른 신라 불상과는 모습이 달라

백제 석공을 불러 만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신라불교는 점점 세속화되면서 삼국통일의 밑바탕이 됩니다.

 

삼국통일 뒤 가장 먼저 만들었다고 생각되는

경북 군위 팔공산의 자연석굴을 이용해 조성된 ‘군위 삼존석불’을 보면

아련한 미소를 짓던 삼국시대 불상의 미소는 사라지고

뻣뻣하다 못해 목에 깁스를 한 채 높은 좌대 위에 앉아 군림하는 모습이에요.

삼국시대에서 통일신라시대 불상으로 나아가는 전환을 보여주는데,

불상의 미소는 점점 없어지다가 경주 남산 보리사 불상을 마지막으로

이후 이땅에서 만들어진 불상에선 미소가 완전히 사라지게 됩니다.

720년 김지성이 부모를 위해 만든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 및 ‘석조아미타불입상’은

전남 장흥 보림사와 강원도 철원 도피안사의 철불과 함께

제작 연대를 알 수 있는 몇안되는 불상 중 하나입니다.

‘군위 삼존불’에서 보이는 뻣뻣한 목의 불상이

100년 동안 세련돼 그 정점에 나타난 것이 경덕왕(재위 742~765) 때 만들어진 석굴암 본존불입니다.

옷자락이 몸에 밀착돼 있는 것을 표현할 정도로

돌을 다루는 솜씨가 세련됐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지요.

목에 3도가 있는 것이나 젖꼭지 표현, 엉덩이 등을 보면 당나라 때 불상과 마찬가지로 육감적입니다.
아잔타 석굴을 원용해 만들었다고 볼 때 전실은 없었고 빛을 받아들이는 광창이 있었다는 게

석굴암에 대한 제 생각입니다.

11면 관세음보살상과 제석천 · 범천 등의 조각에서 보이는 인체비례나

도들새김을 표현한 두께에 따라 이상향과 현실감을 표현해낸 점이나

석굴사원 조성과정에서 1000분의 1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은 완벽한 기술 등을 볼 때

한반도에서 모든 것이 사라져도 석굴암 하나가 남아있다면

이 땅에 살았던 민족은 위대한 민족이었다고 사람들이 기억해줄 것입니다.

석굴암을 비롯, 불국사와 석가탑, 다보탑, 성덕대왕신종(에밀레종), 안압지

모두 신라문화의 전성기로 고전이 완성되는 8세기 3·4분기인 경덕왕 때 만들어진 게 특징입니다.

경주 남산의 불상조성도 경덕왕 때 들어와 본격화됩니다.

혜공왕 이후 신라하대에 조성되는 불상들에선

긴장감이 빠지면서 감정의 과소비 현상이 나타나며 하향곡선을 걷게 됩니다.

반면, 지방에서 일어난 호족들이 구산선문을 중심으로

자신들의 자화상이라 할 수 있는 철불을 조성하기 시작하며 이런 사람들에 의해 세상이 바뀌게 됩니다.

보림사와 도피안사, 광주 춘궁리 철불이 대표적인 예지요.

이렇게 봤을 때 불상은 어느 한 종교의 신상이 아니라 우리 역사의 산물이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절대자의 모습도 시대에 따라 친절성을 극대화시킨 모습으로,

혹은 석굴암처럼 이상적인 인간상과 신의 인격화가 절묘하게 조화돼 근엄의 극치를 보여주는 모습으로,

다시 능력있는 자만이 절대자가 갖고 있는 현실파괴 능력과 변형능력을 기원하는 모습 등으로

바뀌게 되는 것을 확인하게 되지요.
- 정리〓최영창기자 ycchoi@munhwa.com
- 문화일보, 2004-1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