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을 보는 눈’ |
"중국자기 모방" 주장은 자기 폄훼 |
3. 조선 백자와 한국문화의 정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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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을 보는 안목을 키우는 데는 훌륭한 작품을 좋은 선생님과 함께 보는 것만한 게 없습니다.
그리고 그 때 좋은 선생이란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라 책인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낸 고(故) 최순우 선생의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나
김원용 선생의 ‘한국미의 탐구’ 등이 바로 그런 책입니다.
각각 1960~70년대 월간지 ‘여원’과 ‘한국일보’에 연재했던 에세이를 묶어서 책으로 낸 것이었어요.
백자 달항아리의 아름다움을 부잣집 맏며느리 같다는 말로 표현했던 최순우 선생은
자신의 책에서 “한국의 흰 빛깔과 공예미술에 표현된 어질면서도 어리숙한 둥근 맛,
부정형의 원이 그려주는 무심한 아름다움을 모르고 한국미의 본 바탕을 체득했다고 말할 수 없을 것”
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백자 달항아리를 수십 개 늘어놓고 바라보면
마치 시골 어느 장터에 모인 어진 아낙네들의 흰옷 입은 모습이 생각난다고도 했어요.
‘한국의 미’란 제목으로 신문에 매주 작품 하나를 골라 명품해설을 했던 김원용 선생은
반가사유상 등 다른 작품과는 달리 달항아리에 대해선 다음과 같이 ‘백자대호’라는 시를 썼어요.
“조선백자의 미는 이론을 초월한 백의(白衣)의 미
이것은 그저 느껴야 하며 느껴서 모르면 아예 말을 마시오
원(圓)은 둥글지 않고, 면(面)은 고르지 않으나 물레를 돌리다보니 그리 되었고
바닥이 좀 뒤뚱거리나 뭘 좀 괴어 놓으면 넘어지지야 않을 게 아니오
조선백자에는 허식이 없고 산수와 같은 자연이 있기에
보고 있으면 백운(白雲)이 날고 듣고 있으면 종달새 우오
이것은 그저 느껴야 하는 백의의 민의 생활 속에서 저도 모르게 우러나오는 고금미유의 한국의 미
여기에 무엇 새삼스러이 이론을 캐고 미를 따지오
이것은 그저 느껴야 하며 느끼지 않는다면 아예 말을 맙시다.”
이화여대박물관에 소장된 ‘백자철화 포도무늬 항아리’는
우리나라 항아리중 키와 볼륨감이 제일 큽니다.
원래 창랑 장택상이 소장하고 있었던 것인데
간송 전형필 선생이 등장하기 전에 정계로 진출해서 그렇지 일제시대 때 최고의 수집가였습니다.
백자의 표면을 캔버스로 생각하고 철사로 능숙하게 포도를 그린 솜씨가 일품이에요.
‘용재총화’ 등을 보면 화공들을 배에 싣고 분원으로 데리고 가 도자기에 그림을 그렸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작품도 도화서(圖畵署)에 소속된 궁중 화원이 그린 작품이 틀림없습니다.
경기 광주 일대를 10년마다 옮겨다니던 백자가마가
1720년대쯤 금사리로 옮겨와 30여년 동안 유지되면서 백자 전성기가 다시 시작됐습니다.
조선후기 문화역량은 숙종 때 기본을 갖추고 영·정조 때 꽃을 피우는데
백자가 다시 전성기를 맞은 것도 이런 문화능력의 뒷받침 때문이었어요.
금사리 가마단계에 와서 도공들도 380명 체제로 전문화되며 1752년 분원이 고정된 이후
가마가 이동할 필요없이 강줄기를 따라 백토와 땔나무를 운반해오면서
조선백자는 빛깔도 우윳빛 청백색을 띠는 난숙한 경지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릇의 형태는 몰라도 적어도 도자의 질로는 푸른 기를 머금은 분원백자가 등장하면서
조선백자는 최고 전성기를 맞습니다.
분원백자의 아름다움은 필통과 연적 등 문방구에서 드러납니다.
요즘으로 치면 좋은 만년필, 좋은 잉크와 같은 것으로 한 집에도 몇십 개씩 갖고 있었기 때문에
땅 속에서 나온 다른 백자들과는 달리 전세품(傳世品)이 많습니다.
다양한 형태의 분원시대 연적 가운데
혜원 신윤복 그림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에로티시즘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게 복숭아 연적입니다.
여자가 보면 남자를 생각하게 하고 남자가 보면 여자를 생각하게 하는 형태로
꼭지를 동화(銅畵)로 빨갛게 칠해 ‘백자청화 동채 복숭아연적’이라 불립니다.
그러나 제 개인적으론 복숭아 연적보다는
무릎을 곧추세우고 앉아 있는 여인의 치맛자락을 벗겼을 때 드러나는 모습 같다는 무릎연적이
훨씬 더 높은 수준의 조형력을 보여준다고 생각해요.
‘백자 투각 파초무늬 필통’처럼 파초잎을 엇갈려 배치하고 여백을 투각으로 처리한 필통은
빛깔이 티없이 맑고 빙렬(氷裂)도 없어 옥으로 만든 것 같아요.
조선 정조시대를 대표하는 백자 항아리 하나를 들라면
저는 서슴없이 일본 오사카 동양도자미술관 소장의 ‘백자청화 동채 연꽃무늬 항아리’를 꼽습니다.
정조가 사도세자릉에 행차할 때 머문 화성 행궁에 있던 것이 능 앞의 용주사에 보관돼 있다가
일제시대 때 일본으로 넘어갔다고 전해집니다.
도자기에 그려진 연꽃그림은 단원 김홍도가 40대에 그린 것이란 설이 있는데
밑 부분이 산화돼 흠이 있지만 전체적으로 분원 백자가 최절정기에 있을 때 빛깔을 보여줍니다.
조선시대 백자가 최고로 세련됐던 분원가마의 명작으로
단원 김홍도가 그린 연꽃그림으로 유명한 ‘백자청화 동채 연꽃무늬 항아리’.
높이 44.6cm. 일본 오사카동양도자미술관 소장
모든 문명이나 문화는 절정에 오른 그 순간부터
감성의 과소비 현상과 긴장을 잃으면서 퇴락의 길로 나아갑니다.
르네상스 미술을 연구한 독일의 미술사가 하인리히 뵈플린도
“르네상스란 산마루는 담배 한 대를 다 피우고 가기에도 가파른 정상이었다”고 말했습니다.
르네상스가 정점에 도달했다고 하는 순간부터 하강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는 뜻이에요.
조선백자도 불과 50년 뒤인 19세기 중반에 오면 같은 현상이 나타나요.
물론 십장생을 그려넣는 등 변형을 많이하고 기발하게 만들어 사람들에게 어필하려는 노력은 하지만
우리가 볼 때 정조시대 김홍도가 그렸던 항아리가 갖고 있는 정서가 그리운 것입니다.
조선왕조의 도자기는 1880년대 왜사기가 대량으로 수입되면서 막을 내리게 됩니다.
값싸고 질 좋은 것을 사려는 소비자의 욕구에 부응하지 못한 분원은
6명의 민간업자 손을 거쳐 1920년 완전히 문을 닫고, 그 자리에는 분원초등학교가 들어서고 맙니다.
우리나라 백자가 갖는 아름다움은 중국, 일본의 도자기와 비교했을 때 더 명확하게 알 수 있어요.
중국 청나라 경덕진가마에서 만들어진 ‘백자청화 모란무늬 병’ 등에서 나타나듯,
조선이 순백색의 달항아리를 만들어낸 18세기 전반
중국과 일본은 오채영롱한 그릇으로 발전해나갑니다.
일본인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는 동양 3국의 도자기를 비교하면서
조형의 3요소를 형(形) · 색(色) · 선(線)이라고 할 때
중국도자기는 형태에, 일본도자기는 색채에, 한국도자기는 선에서 그 특징을 찾을 수 있다 평했습니다.
중국도자기는 형태의 완벽성과 위엄,
일본도자기는 색채의 화사함과 장식성이 특징이라면
한국도자기의 아름다움은 무엇인가 우리의 가슴을 저미게 하는 것을 곡선 속에서 느끼게 한다는 것이에요.
또 어떤 이는 중국도자기는 보기에 좋고 일본도자기는 사용하기에 좋지만
한국도자기는 그것을 어루만지며 사랑하고 싶어진다는 명언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한국인, 한국문화의 정체성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한국인은 민족적 자부심과 애국심이 대단히 강하면서도
자기문화에 대한 열등의식을 갖고 있는 게 특징입니다.
한국인의 이런 열등의식은 전부 중국에서 유래한 것이에요.
이는 우리가 역사를 잘못 배운 탓도 큽니다.
사실 한국은 단군조선 이래 오늘날까지 단 1초도 세계문화를 주도해 본 경험이 없는 나라입니다.
물론, 지구상에서 문화를 주도해본 나라도 몇 안되지만
우리는 분명히 동아시아 문화권 속에서 한 주변부 문화였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탈리아 피렌체와 베네치아에서 시작해 독일과 네덜란드, 프랑스, 영국 등지로 퍼져간
16세기 유럽 르네상스 시대 역사를 서술할 때
누구도 네덜란드와 독일이 이탈리아를 모방했다고 깎아내리는 일이 없듯이
우리도 중국 것을 다 모방했다고 폄훼할 필요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말해 어느 나라, 어느 문화권이든지 그 나라 문화를 이끌어나가는 중심부 문화가 있고
거기서 수많은 노동력과 막대한 자원을 투자해 새로운 문명을 만들어냅니다.
문제는 이들 중심부 문화의 사람들이
우리가 만들었으니 너희도 쓰라고 나눠준 경우가 한번도 없다는 것입니다.
고려사람들이 중국 청자를 보고 중국인들이 1500년 동안 애써 연구해 만든 것을 역추적해
200년 만에 똑같은 질로 만들어낸 게 고려청자입니다.
일본과 베트남, 위구르족 등 중국 주변뿐 아니라 세계 그 어느 나라도 청자를 못만들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 민족은 중국이 주도하고 있는 동아시아 문명에서 끝까지 낙오되지 않고
오늘날까지 왔습니다. 그런 민족이 몇이나 됩니까. 우리와 일본, 베트남 정도뿐입니다.
문화의 정체성(identity)이라고 하는 것은 고유성(originality)과는 전혀 다릅니다.
굳이 우리 문화에서 고유성을 따지면 한글 정도 얘기할 수 있겠죠.
고유성에 대한 컴플렉스 때문에 우리의 불교미술도 인도에서 나온 게 아닌가라고 생각하며
배척하는 경향도 있는데 한국의 불교문화는 한국문화지 인도문화가 아닙니다.
우리의 삶이나 문화를 풍요롭게 하고 세련되게 할 수 있다면 콩고제면 어떻고 우간다제면 어떻습니까.
20세기에 들어와 일본이 동아시아 문화를 주도할 기회가 있었는데 식민지 만들고 괴뢰정부 만들어
군사적으로 강압하고 경제적으로 수탈하다 태평양전쟁에서 지면서 모든 게 끝나버렸습니다.
지금도 아무런 반성없이 도쿄 야스쿠니(靖國)신사에 참배하는 모습을 보면
일본은 당분간 아시아의 문화를 주도할 지도력을 상실했을 뿐만 아니라
포기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중국은 우리를 따라잡으려면 아직도 5~10년은 있어야 합니다.
최근의 한류(韓流) 열풍이 상징하듯,
결국 아시아에서 문화를 이끌어갈 수 있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세계문화를 지배했던 역사적 경험이 없어
지금 우리가 아시아문화를 이끌고 있다는 생각을 못하고 있어요.
중국 선양(瀋陽)에서 ‘한국식 최신 공법 시공’이란 플래카드가 아파트에 걸려 있는 것을 봤습니다.
여기서 ‘한국식’은 우리가 옛날 ‘미제’, ‘일제’니 했던 것과 같은 뜻이에요.
노무현 대통령이 한국을 동아시아의 물류중심국가로 만들겠다고 말했는데
‘물류(物流)’는 ‘문류(文流)’가 먼저 흘러갔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문화저력을 국민들은 체감하지 못하지만 이미 한류가 동아시아에 흘러갔습니다.
이제는 동아시아 사람들이 왜 우리의 드라마 등 대중문화에 감동하는가를
인류학, 사회학 등 다각도로 분석해내는 노력이 필요할 때입니다.
- 정리〓최영창기자
- 문화일보, 2004-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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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 중 · 일 명품 2000여 점 절반 이상이 한국도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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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 중 · 일 동아시아 3국의 명품 도자기만 소장된 오사카동양도자미술관은
아타카컬렉션은 원래 사업가였던 아타카 에이이치(安宅英一)가 평생 모았던
여론이 일고 일본 국회에서까지 논의되자
총 965점의 아타카컬렉션 중
아타카컬렉션에 더해 지난 1999년 이승만 전대통령 비서 출신인 재일교포 이병창씨가
- 문화일보, 최영창기자 / 2004-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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