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지켜(연재자료)

유홍준 문화재청장의 특설강좌 (8) 고려시대 불상과 석탑

Gijuzzang Dream 2008. 5. 1. 12:38
 

 

‘문화유산을 보는 눈’   

신라와 달리 현세적 작품 많았다

 

 8. 고려시대 불상과 석탑

 

 

 

 

지금 여기서 말하는 고려시대 불상은

고려시대 때 제작된 불상을 말하며 미술사에서도 그렇게 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고려사람의 입장에서 봤을 때는

고려시대 제작된 불상은 물론 그 이전 시대에 만들어진 불상까지 다 사용했던 것이지요.

이것은 굉장히 어려우면서도 중요한 문제입니다.

 

“왜 고려시대에는 석굴암 같은 것이 없었을까”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당시에는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석굴암이 석굴암으로 기능을 하고 있었어요.

익산 미륵사도 그렇습니다.

따라서 단순히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문화유산의 양만 가지고

“고려시대 불교문화는 이랬다”고 정의내리는 것은 모순되는 측면이 있어요.

고려시대 때 불상들이 주로 지방에서 파격적이고 서민적인 것이 많이 만들어지는 이유 중의 하나는

이전 시대에 만들어진 궁중적이고 왕권적이며 중앙집권적인 유물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에요.

따라서 이것들에 더해서 다른 것의 의미로,

또 문화를 누리는 혜택이 지방까지 더 퍼져나갔다는 데서 의미를 찾을 수 있지요.

이런 의미를 빼버리면 우리가 교과서에서 흔히 본

“고려시대 사람들은 조각기술이 떨어져

‘은진미륵’으로 불리는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 같은 황당한 것을 만들었다”는 얘기가 가능해져요.

기존 미술사 관련 책들을 보면 거의 모두 석굴암과 논산에 있는 은진미륵을 비교하면서

“고려시대 조각수준은 통일신라에 비해 떨어졌다”고 써 있는데, 이는 비교의 대상이 잘못된 것입니다.

 

한 시대는 그 시대가 주도하고 있었던 문화의 흐름이 있어

불상을 갖고 말하면 21세기 사람들은 통일신라 사람들을 따라갈 수가 없어요.

지금 시대는 불상 대신 자동차와 컴퓨터 등을 만들어 쓰고 있는데,

이를 단순 비교해 조각기술이 떨어진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 문화유산을 크게 잘못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려불상은 경기도 광주 춘궁리에서 나온 철조석가여래좌상부터 얘기를 시작하지 않을 수 없어요.

통일신라 하대 호족들의 자화상과 같은 구산선문 시대 만들어졌던 불상이 고려초에 들어와

이처럼 젊고 씩씩하며 당당하고 능력있는 절대자의 모습으로 조형됐고,

그런 절대자 중의 한 사람인 왕건에 의해 고려가 통일을 이룹니다.

호족연합으로 정권을 잡은 태조 왕건도 통일 뒤에는 중앙집권화 정책을 쓸 수밖에 없었으며

과거제도 도입 등 광종의 개혁을 거쳐

11세기를 넘어서게 되면 중앙집권의 귀족문화를 만들어내게 되지요.

 

고려 초기 문화는 그래도 호족 연합세력적인 성격 때문에 지방성이 강하게 나타나며

귀족문화가 꽃피는 인종(재위 1123~46년)과 의종(재위 1146~70년) 연간인 12세기 3·4분기까지

문화 담당 계층은 중앙 귀족이었어요.

 

 

경기 광주 춘궁리에서 나온 철조석가여래좌상.

학계 일각에서 절대권력자였던 태조 왕건의 모습을 조형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다 무신난이 일어나 귀족문화의 중심세력이 무신귀족으로 넘어가면서

문신들이 갖고 있었던 자기 절제성, 인문적 · 도덕적인 것을 지키고자 했을 때 나타나는

검소하고 질박한 풍이 사라지고

상감청자의 등장 등에서 보듯 공예가 굉장히 화려해지는 특징이 나타납니다.

원나라의 간섭을 받을 때는 다시 문화의 주도층이

요즘말로 하면 ‘매판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원나라를 등에 업은 권문세족들로 또 한 차례 바뀌며

고려말에는 정도전 등 신흥사대부 계층이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하지요.

이처럼 470여 년 지속된 고려왕조도 지배층이 100년, 150년 단위로 끊임없는 변화가 있었고

이에 따라 문화의 성격도 조금씩 바뀌어 나갔습니다.

어쨌든 고려초기는

왕권중심적이고 규범적이며, 아카데믹한 것 등으로부터 철저하게 벗어난 불상들이 조형됩니다.

예를 들어 충남 보령 성주사지(터)에서 나온 테라코타(소조) 불두(佛頭)들은

통일신라의 불상처럼 이상적인 것이 아니라 현세적인 고려초기의 전통을 반영하고 있지요.

서산 보원사지에서 발견된 철불은 석굴암 본존불과 분위기가 상당히 비슷해 8세기 작품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는 등 논란이 많은 불상이에요.

그러나 귓불이 바깥으로 휘다가 어깨까지 닿은 것이나 코를 대패로 밀듯이 반듯하게 만든 것 등은

고려시대인 10세기에 나타나는 양식입니다.

입의 길이가 눈의 1.5배 되는 그리스의 인체비례와는 정반대로

눈의 길이가 입의 1.5배 되는 것도 10세기 고려시대 양식입니다.

 

시대를 측정하기 힘든 이 불상에 대해 삼불(三佛) 김원용 선생은

“10세기에 만든 8세기풍의 복고적 작품”이라고 해석했지요.

고려시대 철불들의 경우 팔이 빠져나가고 없는 게 특징입니다.

남원 실상사의 철조약사여래불상도 그렇고 중국이나 일본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이는 대개 속을 텅비게 주조를 한 뒤 별도로 나무를 조각해 끼워넣은 손목아래 부분이

시간이 지나면서 대부분 빠져 없어졌기 때문이에요.

경남 창녕 관룡사 용선대 석조석가여래좌상이나

팔공산 갓바위에 있는 경북 경산시 관봉석조여래좌상 등 산 위에 있는 불상들은

대개 10세기에 만들어지는데,

서산 마애삼존불 · 석굴암과 마찬가지로, 이런 부처님들이 전부 바라보는 곳은

동짓날 해뜨는 쪽인 동동남 15도 방향입니다.

해방이후 가 본 사람이 없어 우리 미술사 책에는 소개가 안돼 있지만 금강산 내금강에 가면

묘길상이라 부르는 고려시대 마애불 중 가장 걸작인 높이 15m짜리 아미타여래좌상이 있어요.

원래 묘길상암이라고 하는 보살상을 모셔놓은 암자가 있다가 없어진 뒤

사람들이 보살과 부처를 구별하지 못하니까 그냥 묘길상이라고 부른 것으로

정확하게 얘기하면 묘길상터 석조마애여래좌상이라 불러야 됩니다.

당당한 호족들의 이미지를 가지고 인자함을 표현하려 했던 기풍과

서산 보원사의 복고적인 기풍이 함께 이어져 온 것이 10세기 무렵 불상의 특징입니다.

태조 왕건이 후백제와 격전을 치른 뒤 세운 논산 개태사지 석불입상(삼존불)은

현재 손하고 얼굴의 이미지가 맞지 않아요.

원래 얼굴도 손도 굉장히 험악한 이미지였는데,

절에서 성형수술하듯 얼굴을 세척하고 글라인더로 밀어 전혀 다른 이미지가 됐습니다.

경북 영주시 부석사 무량수전의 소조여래좌상도 부처님 얼굴이 심술궂은 모습으로

삼국시대 반가사유상이 보여주던 실존적 고뇌로부터 해탈된 모습이나 친절성 같은 것을

전혀 찾을 수 없어요.

충남 부여 대조사와 관촉사의 석조미륵보살입상에서 보이듯

불상의 모습에선 지방성도 강하게 나타나지요.

둘 모두 거의 같은 형식으로 장승을 만들 때처럼 인체비례를 무시한 게 특징이지요.

또 이마가 지나치게 길어 기이하게 보이는 은진미륵의 경우,

실제 구리장식이 떨어져나간 모자부분을 제외하면 3.8 등신, 4 등신의 어린아이 모습입니다.

 

칠갑산 장곡사의 석조대좌 위에 나무광배를 한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은

우리나라 불상 중 가장 불량끼가 많은 부처님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옛날 경복궁 회랑에 있다가 지금은 박물관 전시실로 들어간 철불 등 고려시대 불상의 매력은

서민의 모습을 보여주는 평범성에서 찾을 수 있어요.

10~11세기가 되면 이런 종류의 불상들이 전국 곳곳에서 만들어집니다.

강릉 한송사 석조보살좌상과 평창 월정사 8각9층석탑 앞에 있는 석조보살좌상 같이

원통형 보관을 쓴 불상은 라마교의 영향을 받은 강원도 지역에서 나타나는 특징이지요.

대포집 경력이 30년쯤 된 질퍽한 인상을 주는 ‘성주풀이’의 고향인 안동 제비원의 마애보살상 등

고려불상들은 나름대로 매력이 많습니다.

북한에서 불교문화센터로 만든 금강산 보현사를 가면 화려하기 그지없는 모습부터

가랑이를 쫙 벌리고 앉아있는 파격적인 것 등

금강산 일대에서 출토된 고려말 불상들의 다양함을 확인할 수 있어요.

납작한 얼굴을 입체화시킨 현대조각의 기법이 보이는 수안보 미륵리 석불입상에선

백제불상이 갖고 있는 순정 같은 것이 느껴져요.

화순 운주사 천불천탑동에 있는 불상은 고려시대 민중불교가 지향했던 마지막 모습을 보여줍니다.

운주사 와불이 유명한데 와불은 원래 소승불교에서 부처님 열반상을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에

불기립불(不起立佛)이나 미기립불(未起立佛)로 부르는 것이 맞아요.

“천불천탑을 만들면 서울이 이곳으로 옮겨온다”는 일종의 반역 내지 혁명사상 때문에 조성된만큼

불상도 개체가 아니라 하나의 덩어리로서 총 양, 총합적인 이미지가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하나하나가 개별적인 얼굴을 가진 것이 아닌 스테레오타입의 전형적인 모습이지요.

 

              

 (왼쪽) 전남 화순 운주사 천불천탑동의 불상.

일제시대만 해도 200여개가 있는 것으로 조사됐으나 현재는 70개 내외의 불상만 남아있다.

(오른쪽) 고구려 사찰 8각탑의 전통을 이어받은 강원도 평창 월정사의 8각9층 석탑


탑의 경우 불국사 석가탑에서 변형된 것으로,

9세기의 전형이 된 실상사의 쌍탑에 이어 고려시대로 접어들게 되면

역시 지방적인 특색이 강하게 나타납니다.

특히 서산 보원사지 5층석탑이나 부여 장하리 3층석탑 등 옛 백제지역에서 만들어지는 석탑의 경우

부여 정림사지 5층석탑을 모델로 한게 많은 것이 특징이에요.

서천 비인의 5층석탑이나 정읍 은선리 3층석탑 모두

정림사지 5층석탑을 기본으로 하면서 변형시킨 것입니다.

월정사의 8각9층석탑이나 묘향산 보현사의 8각13층석탑처럼 고구려 영향권에 있었던 지역들은

고구려 사찰 8각탑의 전통을 이어받아요.

운주사에는 도넛 모양이나 그냥 삐죽하게 돌을 쌓아 만든 탑들이 수십개 늘어서 있습니다.

금강산에서 고려불상들이 마지막으로 화려하게 꽃을 피우듯

탑은 내년 10월 개관예정인 서울 용산 새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될

경천사지 10층 석탑이 조형미의 절정을 보여줍니다.

부도로는 서울 경복궁 옛 국립중앙박물관 야외에 전시된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 현묘탑과 비가 단일 석조물로는 가장 화려합니다.

커튼을 늘어뜨린 것 같은 모습까지 조각해 놓았는데,

한국전쟁 때 폭격을 맞아 1만2000조각 난 것을 이어붙인 것이지요.

원주 법천사지의 부도비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조각을 갖고 있는 비중의 하나이지요.

부도는 고려말 석종형으로 다시 조선시대에 들어가면 종형으로 모습이 바뀌게 됩니다.

- 정리〓최영창기자 ycchoi@munhwa.com
- 문화일보, 2004-1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