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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조선은 초상화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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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초상화의 왕국’이라고 제가 표현하는 이유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우리나라에서 초상화가 많이 제작됐고
지금까지도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양이 남아있기 때문이지요.
조선시대 회화사를 전공한 저의 어림짐작에
전신(全身) 또는 반신상(半身像)으로 돼 있는 것과
50장 내지 30장씩 묶어놓은 초상화첩까지 모두 합치면
아마도 3000점 정도의 초상화를 갖고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이 중 국보와 보물로 지정된 것이 각각 4점과 31점이 있지요.
초상화의 종류도 여러가지 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게 ‘어진(御眞)’이라 부르는 임금님의 초상화이고
국가의 큰 변란을 수습한 뒤 공신을 책봉하게 되면 초상화를 그려주게 돼 있는 전통에 따라
대례복을 입은 공신상이 남아 있지요.
이와 함께 서원이나 주로 가묘(家廟)에 집안에서 불천위제(不遷位祭 · 나라의 허락으로 4대 봉사가 끝나도 신주를 사당에서 옮기지 않고 영원히 매년 기일 받드는 제사)를 지내는
중시조되는 분들의 초상화를 모셔다 놓은 것이 우리 초상화의 대종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즘 앨범북처럼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들의 초상화들을 모아 화첩으로 갖고 있는 풍조가
유행했는데, 현재 수십첩이 전해지고 있어요.
영조대왕은 선왕인 숙종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군신회의를 열어
“머리카락 하나 다르게 그려도 내 조상이 아니라 남의 조상이 된다”며 극도의 사실성을 강조했습니다.
살아계실 때 초상화를 그린 것도 있지만
임금님이 일찍 돌아가셨을 경우, 비슷하게 생긴 종친을 모델로 그림을 그린 뒤 근신(近臣)들이 모여
요즘 범인의 몽타주를 만들듯이 ‘눈썹을 좀 올려라’ ‘눈을 조금 크게 해라’하는 식으로 수정을 해
‘됐다’고 하면 그것을 초본(草本)으로 초상화를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초상화(어진)는
경복궁과 창덕궁, 덕수궁 등 각 궁궐에 마련된 선원전(璿源殿)에 모셔졌지요.
그러나 지금까지 남아 있는 어진은 태조 이성계와 영조의 초상화 두 개 뿐입니다.
이밖에 철종과 영조가 왕위에 즉위하기 전 연잉군 시절의 모습을 그린 초상화가 있지만
한국전쟁 때 불타 반쪽만 남았지요.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임금의 초상화를 그릴 때는 어진도감이란 임시기구를 만든 뒤
예조판서와 당대 최고 가는 감식안을 갖춘 인물이 감독관이 되고
주관화사(主管畵師)와 동참화원(同參畵員), 수종화원(隨從畵員) 등으로
최고의 화가 5명을 뽑아 그림을 그려 바치게 했습니다.
태조 이성계는 기마상을 포함해 전부 14개의 초상화가 그려져
평양 숭녕전과 함흥본궁 등 여러 곳에 모셔졌는데,
지금 남아 있는 것은 1900년 무렵 옮겨 그려 전주 경기전에 전하는 한 폭 뿐이에요.
임진왜란 등 각종 전란 당시 소실된데다
초상화가 지금은 유물이지만 옛날에는 실제 사용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100~200년 쓰다가 낡게 되면 새로 그려놓고
한국인들의 독특한 습성상 이전 것들은 불태워 없애버려 원본이 남아있지 않아요.
그런데 직접 데생을 한 뒤 그린 초상화 원본하고
그려놓은 것을 보고 다시 그리는 이모본(移摹本)하고는
품격과 생동감 등 여러가지 측면에서 하늘과 땅 차이가 납니다.
정면상(正面像)인 태조 이성계 초상화를 보면
이 분의 키가 작은 것을 보완하기 위해 비례를 맞추고 밑에서 위로 우러러 보는 형상으로 그렸어요.
영조대왕의 초상화를 보면 ‘좌안(左顔)7푼(分)’이라고 해
왼쪽 빰과 귀는 보이는데 오른쪽 귀는 안 보이게 그려졌습니다.
서양에서도 르네상스시대 초상화가 등장하면서 얼굴이 4분의 3 정면을 바라보게 그리는 게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인간적인 측면을 가장 잘 포착할 수 있다고 해서
초상화의 정형이 된 것과 마찬가지예요.
조선시대 초상화의 명작인 영조어진과 황희 정승, 공재 윤두서, 도암 이재의 초상화(왼쪽부터)
지금은 위패를 대개 모시지만 서원에서도 한 때 초상화를 모시던 전통이 있어
소수서원에는 고려시대 안향 선생의 초상화가 그대로 남아 현재 국보로 지정돼 있지요.
이 초상화가 낡아서 소수서원에서 이모본을 제작한 것이 있는데,
비교하면 원본과 이모본의 차이를 극명하게 느끼게 해 줍니다.
안향 선생의 초상화는‘우안9푼’ 정도로
왼쪽 귀만 안보이게 몸을 약간 비튼 예외적인 방향을 취하고 있지요.
강감찬 장군의 부관으로 진주강씨의 시조격인 강민첨 장군의 초상화는
조선 정조 때 이모된 것이지만
사모(문무백관이 관복을 입을 때 갖춰 쓴 모자) 꼬리(날개)를 비녀처럼 길게 해
중국 송나라 초상화가 갖고 있던 특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파주염씨 집안에 전하는 염제신 초상화는
목은 이색 선생 문집에 “공민왕이 염제신의 초상화를 그려주었다”는 내용이 나와
‘전 공민왕 필 염제신상’이란 이름으로 보물로 지정돼 있습니다.
목은 이색 선생의 초상화와 함께 조선시대 초상화가 보여주는 대상을 평면화시킴으로 해서
품격이 더 살아나오는 전신(傳神)수법에 가까운 명작이지요.
국보로 지정된 익재 이제현 초상화는 원나라 화가 진감여가 그린 것으로
중국식 초상화 형식으로 그려진게 특징입니다.
포은 정몽주 선생은 전신상 두 폭과 반신상 한 폭이 전하고 있는데,
19세기 고종 때 이한철이란 화가가 이모한 초상화를 보면
옷주름에 집어 넣은 음영과 얼굴 주름 때문에
안향이나 염제신 초상화에서 보이는 품격을 전해주지 못합니다.
얼굴 주름은 조선시대 초상화를 채색할 때 앞에서 채색하는 것이 아니라
비단 뒤쪽에서 채색을 해 은은하게 배어나오게 했는데,
이것이 떨어져버리고 나면 선만 남아 얼굴 주름처럼 보이는 것이지요.
초상화가 남쪽을 향하고 있기 때문에 이처럼 뒤쪽에서 칠하는 기법을
북쪽에서 칠했다는 의미로 ‘북채(北彩)’라고 합니다.
여러 폭이 남아 있는 조선시대 황희 정승의 초상화는
길고 잠자리 날개 모양인 사모꼬리 등 15세기 초상화 패션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사모꼬리는 신숙주 때 가면 빳빳해지며
16세기가 되면 넓적한 홑사모를 썼다가
18세기가 되면 겹사모로 바뀌고 꼬리도 안쪽으로 휘는 등 시대 패션을 민감하게 반영해주고 있지요.
여성에 대한 차별이 심했던 조선시대 세종 때 대신을 지낸 하연과 박연, 조반 등은
부인 초상화도 함께 전하고 있어 오늘날까지 조선초기 여인 초상화 3폭이 남아 있게 됐습니다.
보물로 지정된 장말손과 신숙주의 초상화는
관복을 입고 의자에 앉은 공신상의 전형을 보여주지요.
의자의 손잡이가 팔꿈치 아래쪽에 있고 발은 11자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관복의 꾸겨진 자국을 옆으로 각이 지게 표현한 것 등에서
15세기 새 국가를 건설한 사람들의 기상과 이상주의적 성격 같은 것을 느끼게 됩니다.
반면 16세기로 넘어가 약포 정탁 선생의 초상화를 보면
의자 손잡이가 팔꿈치 위로 올라가고 발은 팔(八)자 모양으로 벌리게 되며
옷도 옆으로 꺽이던 것을 일직선으로 해놓는 등 바뀌게 됩니다.
의자 밑에 깔리는 것도 처음엔 채단을 사용하다가 사치스럽다고 금지령이 내린 17~18세기에는
강화도 화문석을 까는 걸로 바뀌게 되며
18세기에는 의자 뒤에 호피를 얹는 것도 유행하게 되지요.
서원이 생기기 시작한 16세기에는 각 집안의 중시조를 중심으로 선비상의 초상화가 유행합니다.
의성김씨 집안을 일으킨 청계공 김진이나 농암 이현보 선생의 초상화 등 경북 안동지역을 중심으로
학자상의 초상화를 만드는 전통이 일어나게 되고, 17세기에 하나의 정형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조선시대 초상화 중에 손이 보이는 것은 18세기에 그려진 4~5폭 밖에 없어요.
그래도 당시 초상화가 오른손을 드러낸 강세황 초상화와 비교해
사실성은 떨어져도 나름대로 깊이감을 갖고 있어요.
17세기로 들어오면 몸집이 대비되는 우암 송시열 선생 초상화나 미수 허목의 초상화에서 나타나듯
낭만적 과장이 들어가면서 그 이전이나 이후 시대에 비해 예술적으로 뛰어난 초상화가 그려져요.
백사 이항복의 초상화를 보면 주독이 올라 코가 빨갛고 눈 꼬리에 장난기가 덕지덕지 어려 있는데,
옷주름을 대담하게 하나 그어놓고 말은 것이 조선시대 초상화 아니면 어디서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선을 몇 개 그어놓은 것으로 옷주름을 표현한 17세기 백사 이항복의 초상화.
대담한 조형적인 생략이 옷주름을 치밀하게 표현했던 18세기 초상화와 비교된다.
얼굴이 완성되면 ‘유지초본(油紙草本)’이라고 기름종이에다 얼굴을 그려보고 채색까지 해 본 뒤
마지막으로 비단에 정식으로 그리게 됩니다.
다른 종이에 그렸다가는 먹물이 배어 수정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먹물을 지울 수 있는 기름종이를 사용하는 것이지요.
17세기에서 18세기로 넘어가는 시기의 공재 윤두서 자화상은
서양의 렘브란트와 얼마 차이가 나지 않는 시기의 그림으로
당시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초상화가 있었다는 것을 자랑할 수 있게 해주는 작품입니다.
18세기의 초상화를 대표하는 것은 도암 이재 선생과 그의 손자인 이채의 초상화입니다.
옷주름 표현과 얼굴의 육리문(肉理文 · 살결문양) 등 사실성의 극치를 추구하면서
정신적인 기품까지 드러내는 전신에 성공한 작품이지요.
신금임의 초상화나 추사 김정희의 초상화에서 나타나듯 얼굴의 간반이나 곰보자국 하나 빼지않는 등
예쁘게 그리기보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려고 노력한 게 우리나라 초상화의 특징입니다.
얼굴은 이명기가, 몸은 김홍도가 나눠 그린 서직수 초상은
몸을 사실적으로 잘 그려 얼굴이 죽고만 사례입니다.
김홍도가 그린 옷의 사실성에서 서양 유화에서 느꼈던 콤플렉스를 떨쳐주게 만드는 작품이지요.
동네에서 70세가 넘은 노인들이 잔치를 벌인다음 초상화를 그리고 첩을 만들어 나눠 가진 ‘기사회첩’과
신윤복의 ‘미인도’ 등에서 나타나듯 18세기에 들어오면 초상화의 유형도 다양해집니다.
그러나 18세기 정조 때 피크를 이룬 초상화 전통도 한 50년간 여운을 남긴 뒤
흥선대원군의 초상화에서 보듯 19세기 후반에 가면
완전히 조선시대가 갖고 있던 긴장미를 상실하면서 쇠퇴하게 됩니다.
- 정리〓최영창기자 ycchoi@munhwa.com
- 문화일보, 2005-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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