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전경>, 안석준(1953- ), 한국화, 1990년, 198×128㎝, 캔버스에 유채, 서울시립미술관
우리 주변의 풍경은 일시적인 큰 감동은 없지만 오가며 늘 보는 곳이므로,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까지 볼 수 있고 오래된 친구처럼 정감이 간다.
그리고 그 주변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집들과 그 사이의 나무들,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 풍경을 더욱 생생하게 만든다. 특히 가을이 되면 그 정감은 더욱 무르익어 조화를 이룬다. 내가 갈색조를 즐겨 사용하는 이유는 바로 그와 같은 이유에서다. 서울의 남산이나 인왕산, 북한산은 우리의 삶과 가장 가까이 접해있어 자연과 인간의 삶을 함께 담을 수 있는 가장 좋은 소재이다. 아직은 삶의 모습과 자연의 모습을 잘 조화시키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되지만, 이러한 주변의 자연을 통하여 삶의 모습들을 표현하려 노력하고 있다. <작가 안석준의 글>
안석준의 그림은 전통화법에 구애받지 않는 현대적인 감각의 표현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고법으로부터 절연된 것도 아니다. 수묵산수화로서의 정서를 견지하되 이 시대의 감각에 어울리는 모던한 실경산수화의 한 유형을 제시하고 있다. 그의 실경산수화는 그 소재 및 대상이 극히 제한적이며 선택적이다. 모던한 설경 수묵산수화의 이미지에 적합한 소재 및 대상 자체를 그 자신의 조형의지에 일체화하려는 것이다. <미술평론가, 신항섭> - 이상 서울시립미술관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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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메시지 2>, 1987년, 양화, 구자승, 116.8×80.3㎝, 종이에 수묵담채, 서울시립미술관
사물의 분명하고 명확한 묘사, 단지 외광의 투영만이 진실이 아닌 것처럼 ... '사물이 거기 그 자리에 있다' 나 스스로도 개입하길 원치않는 단지 거기 그 자리에 그들을 놓여주는 일을 할 뿐이다. 그래서 그들을 통해 뭔가 말하려 하지 않아도 된다. 이 리얼리티의 벼랑 끝에서 그것들을 이미 현실의 being이 아닌 것이다. 제2의 being이 작품 속에서 잉태하는 것이다. <작가 구자승(1941- )의 글>
정물화처럼 풍경화의 대다수는 대체적으로 화면의 하단으로 내려와 있는 구도가 특징이다. 또한 시점은 그보다도 훨씬 낮다. 따라서 밑에서 올려다보는 시점 설정이 특이하다. 이런 식의 특별한 구도에 대한 집착이 강하다. 산길, 산, 들녘, 집 따위의 풍경이 등장하는데 어느 작품이나 한결같이 고요한 분위기에 젖어 있다. 그림을 보고 있음으로써 저절로 심신이 정화되는 듯한 감정에 이끌린다. 자연의 형태적인 아름다움 그 자체보다는 신비적인 기운이 감도는 대자연의 존재성에 대해 시선을 돌리게 하는 힘이 있다. <미술평론가, 신항섭> - 이상 서울시립미술관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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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 1991년, 한국화, 정하경, 170×89㎝, 종이에 수묵담채, 서울시립미술관
정하경(鄭夏景, 1943- )은, 서울에서 태어나 1968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를 졸업하고 1973년 동대학교 대학원 동양화과를 졸업하였다. 한국미술협회 이사와 대한민국 미술대전 심사위원 등을 역임하였으며 현재는 한성대학교 예술대학 회화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1984년, '92년, '96년에 세차례의 개인전을 비롯해 수차례의 국제전 및 단체전을 가졌다.
"맑고 깨끗한 붓질로 전체적인 인상을 장악한다. 자욱한 수림의 안개나 계곡의 차가운 물기가 곧장 화면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사실감은 세밀한 묘사에서 오는 느낌이라기보다는 산야의 호흡을 담으려는 작가의 자연 생명관에 기인한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작가의 글 중에서)
그것은 바로 자기와의 대화일 수 있다. 70년대를 전후해서 소위 서구적인 경향의 추상작업을 해온 그가 80년대를 기점으로 해서 매우 구체적인 자연이미지 작업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다름아닌 자기 내면의 소리에 주목한 것이다. 정하경이라는 하나의 인식이 밖의 소란스러운 소리에서 안의 내밀한 소리로 관심의 대상을 바꾸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심이 자연이라는 대상과 만나게 되었고, 수많은 사생과 답사를 통해서 자연의 맑은 기운을 조금씩 느껴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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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봉산> 1989-1999년, 구상, 이상국, 273×71㎝, 캔버스에 유채, 서울시립미술관
"도봉산의 전경을 대관(大觀)하여 개괄, 표현한 작품이다" “나는 그림을 그리는 일은 항상 무당이 칼 위에 선 것 같이 긴장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무당은 칼 위에서 다른 마음을 먹으면 발에 피가 나는데, 작가가 그렇지 않다면 곤란하지요”
“제 필법은 좀 특이하다고 할 수 있는데 현장을 스케치한 것을 다시 목판에 칼로 떠본 후에 유화를 그리는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현실의 자연이 아니고 이미 조형화된 목판화 작업을 놓고 재구성한다는 점에서 이미 그릴 때부터 일정하게 현실에서 이탈했다고 할 수 있다.” “나로서는 산을 그리면서도 내 시대를 표현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작가의 글)
"호방한 붓질과 나이프의 흔적, 거칠 것 없이 펼쳐진 화면 구성의 대범함, 눌러붙은 두터운 물감층 위의 물성이 자아내는 견고함이 그 사이를 구성하고 있는 색채의 생생한 발색과 타블로 위에서의 물감의 혼합, 뼈대를 형성하는 선과 공간 묘사의 생략이다. 두터운 선의 약동과 자연스럽게 위치하는 면들이 이루는 화면의 높은 밀도 등이 이러한 바탕의 토대 위에서 해석되고 표현된 회화는 물질로, 이미지로, 그리고 행위의 흔적으로 생생하다. 거기에 나타나는 선이나 바다는 재현된 것이 아니라 대상의 분석과 작가에게 각인된 인상의 표현들이다. 아니 이상국의 내면이다.... 대상이 변형된 형태로 남아있지만 선과 면이라는 조형요소들로 환원되고, 거기에 다시 작가 특유의 물감 붙이기가 회화적 뉘앙스로 흔적화되어 재현보다는 표현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작가의 육체와 질료의 반응과 그림에 대한 평소의 사유가 일치했다는 것인데, 이러한 양상은 사실 이전의 그의 그림에서 보여줬지만 더욱 깊은 완성도와 집중력을 보여준다." (큐레이터, 김진하) - 이상 서울시립박물관 홈페이지에서
- 유홍준 <삶의 무게를 실은 침묵의 소리> 중에서 1990. 이상국의 개인전 서문 이상국의 목판화를 보면서 나는 곧잘 박수근과 오윤의 그것을 연상하곤 한다. 박수근의 목판화는 철저하게 ‘회화적’이며, 보는 이의 시각을 화면 속으로 빨아들이는 분위기를 기막히게 연출하고 있다. 반면에 오윤은 철저하게 ‘조각적’이며, 그림에 나타난 형체들이 화면 밖으로 돌출해 나오는 듯한 실체감을 누구보다 잘 구사한 작가였다. 그리고 이상국의 목판화는 철저하게 `조형적'인 것으로 아마도 그 중간쯤에 위치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박수근처럼 서정을 노래하지 않으며, 오윤과 같은 우렁찬 울림을 갖고 있지도 않다. 그렇다고 하여 이데올로기의 도해(圖解)나 격렬한 구호가 담겨 있는 것은 더욱 아니며 가냘픈 애상(哀傷)이 서려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이상국은 저 깊이 모를 밑바닥에 깔려 있는 내밀한 인식과 ‘침묵의 소리’를 담아낸다. 그가 즐겨 그리는 ‘나무’는 대지에 깊게 뿌리내린 겨울나무의 강인한 인내이며, ‘산동네’는 덤덤하게 삶의 힘겨움을 이겨내는 인정(人情)이다. 좀더 비약하자면 ‘그것은 차라리 혼(魂)이며, 한(恨)이고, 유명(幽明: 깊은 빛)이고,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에네르기’(김윤수의 평)이다.
- 김종길 "대지(大地)의 뼈에서 핀 꽃" 이상국(1971년 서울대 미술대학 회화과 졸업)은 2000년 11월 고양시 삼송동으로 이사왔다. 90년대 초반엔 영국에서 작업을 했고, 후반에는 미국에서 작업했다. 기자출신인 아내가 해외 특파원으로 돌아다니는 동안 그는 그곳에서 작업을 해야만 했다. 언제나 삶의 현장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강렬한 색채로 그려왔던 그이기에 영국과 미국의 삶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는 그가 그곳에서 제작한 작품을 통해 엿볼 수 있다. 다만,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산(山)이다. 산의 형상을 들여다보고 있다. 사람을 쏙 뺀 것은 아마도 낯선 환경에서 스스로 ‘타자’가 되어야 했던 생활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3, 4년의 짧은 기간동안 그들 사회 속으로 깊게 들어간다는 것은 무리이다.
1970-80년대 긴박했던 한국사회의 ‘현장’을 추상 표현주의적인 기법으로 강인하게 각인했던 작업세계를 기억한다면 그의 타지 생활의 태도는 일견 이해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90년대 들어 작품의 주제를 ‘자연풍경’에 집중하게 된 것도 하나의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자연 풍경이라 해도 구체적인 ‘장소’를 선택하고 있는데, 제목을 보면 <홍은동>, <북한산>, <홍제동에서> 등이 있다. 그리고 그 장소에서 자라는 ‘나무’를 바라본다. <산으로부터>, <나무로부터>와 같은 작품들이 수년에 걸쳐 그려지고 있다. 그렇기에 그의 작품들은 세세한 구상(具象)이 부셔지고 종국에는 꿈틀거리는 지세(地勢)의 골격만 남는다. 이것을 ‘대지(大地)의 뼈’라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최근 작품들, 특히 풍경화는 해체되는 방식으로 그리고 있어요. 철거된 산동네 그림도 그런 식이지요. 그런데 그런 해체 과정에서 가슴 아픈 느낌과 동시에 어떤 새로운 에너지, 기氣를 느끼게 되는 것 같아요.” 화면은 그러한 뼈들이 꿈틀대며 상승하고 있다. 뼈의 기운이 전면전을 펼치고 있는 듯 대지가 요동치는 형국이다. 허버트 리드는 『예술의 의지』에서 “형태는 규칙성, 시메트리, 또는 어떤 종류의 고정된 비례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고 했다. 그의 형태론은 구상을 전제로 한 것임에도 불규칙, 불균형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구상이 해체된 비구상 혹은 추상(抽象)은 오히려 자연율의 리듬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최근 자연의 리듬이 프랙탈(fractal) 형상을 취하고 있음이 과학적으로 증명되었는데, “언제나 부분이 전체를 닮는 자기 유사성(self-similarity)과 소수(小數)차원을 특징으로 갖는 형상” 으로서 프랙탈은 매우 역동적인 리듬감에 차있다. 이상국의 판화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그러한 역동적 리듬이다.
- 박영택, 미술평론가, 이상국의 판화 "신명과 애증의 시선" . . . 이상국은 동양화를 전공했지만, 유화와 판화를 함께 하는 작가이다. 우리 화단에서 이런 일관성은 비교적 드물다. 이상국은 유화와 판화 작업 모두를 통해 상호보조하는 동시에 두 개의 영역에서 결핍된 부분들을 채워나가고 둘 모두를 끌어올리는 장치로서 다룬다. 이는 일종의 균형을 잡는 일이기도 하다. 둘 다 평면에서 이루어지는 일이지만 회화가 표면을 바르고 채워나가고 붓질에 의존한다면 판화는 나무판을 깎고 파고 잘라내면서 흑백의 긴장을 추려내는 이다. 그는 그림을 그리다가 판을 찍어보기도 하고 판화로 한 것을 가지고 다시 유화작업을 한다. 그리고 이 작업은 수없이 반복되는 편이다. 사실 이 두 영역은 하등의 차이가 없을 수도 있다. 그는 자신의 조형적 성취감과 완성을 향해 자신이 납득하고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밀어 올리는 과정에서 판화와 유화 모두를 필요로 한다는 인상이다.
물감을 붓으로 바르고 덮어나가는 일과 칼을 들고 나무를 깎아내는 행위 사이에는 매번 결정적인 선택의 순간이 기다린다는 공유성이 있다. 이상국에게 회화와 판화에는 기묘한 이율배반이 하나로 뒤엉켜있는 셈이다. 그에게 판화와 회화가 서로 다르지 않다. 그가 말하기를 둘 다 신명이 나야되며 그것이 바로 완성으로 가는 길이라고 한다. ( . . . )
그의 판화와 유화에서 등장하는 산동네와 사람들의 모습, 산과 나무와 바다는 이 세상의 모든 생명체와 현실적 풍경의 상징들이고 그것을 매번 바람보고 함께 살아가는 인간의 연민어린 시선들의 어지러운 교차와 흔들림과 애증들이 만들어낸 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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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아침>, 1958년, 양화, 박상옥, 74.5×49㎝, 캔버스에 유채, 서울시립미술관
朴商玉(1915~1968)은, 1935~36년 14·15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선하여 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 뒤 1939년 일본제국 미술학교에 입학하여 본격적인 미술수업을 받았다. 재학시절 일본의 이과전(二科展)에 〈유동(遊童),1939>·〈군동(群童),1941> 등을 출품했는데, 초기부터 토속적인서정이 배어 있는 주제와 기법을 보여주었다. 1942년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대구사범학교에 부임하여 이듬해 경북미술전람회에서 〈건아〉로 도지사상을 받았다. 1946년부터서울 성남중학교·휘문중학교·경기공립중학교·이화여자대학교 등에서 미술을 가르쳤으며, 1951년 1·4후퇴 때 부산으로 피난하여 종군화가가 되었다. 1953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에서 〈소와 목동〉으로 특선을 차지했고 이듬해에도 〈한일(閑日)>로 대통령상 겸 예술원상을 수상했다.
대표작 〈한일〉은 뚜렷하고 어두운 색조의 인물이 화면의 중앙을 중심으로 배치되어 있다. 특히 인물과 주위와의 강한 빛의 대비 속에서 화사한 색조가 어두운 인물과 밝은 공간에서 각각 대비를 이루고 있어서 면이 분할된 인상주의 양식을보여준다. 1957년 국전 심사위원을 지냈고 그 이듬해 초대작가로 〈그늘〉·〈향로봉〉을 출품하는 등 이후 국전에초대작가 또는 추천작가로 꾸준히 출품해왔다. 1960년정부로부터 녹조소성훈장을 받았고 이듬해 서울대학교 교수가 되었다. 그의 작품은 소재나 기법 면에서 커다란 변화가 보이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부드럽고 온화한 색채를 써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토속적인 분위기를 형상화했다.
"박상옥은 완성자(完成者)로서의 미술가는 물론 아니다. 하지만 비록 중도에서 실추되었다고는 해도, 창시자(創始者)로서의 활약은 인정되어야 하며, 그의 스타일은 문자 그대로 한국의 토양으로부터 배양된 발아의 형식으로서의 리얼리즘인 것이다. 인물의 표정들이 무명(無名)의 평등(平等)으로 생략된 어린이들이 토담 곁에서 토기와 닭 또는 소와 함께 노는 정경을 통해 우리는 우리 속에 잠재하는 마음을 보며, 투박하고 굵은 그의 구도(構圖)를 통해 한국적인 조형을 읽게 된다."<미술평론가, 유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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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우 옛집 / 등록문화재 제 268호, 혜곡 최순우기념관
최순우 옛집은 미술사학자이자 前 국립중앙박물관장(제4대)을 지낸 최순우 선생(1916-1984)이 1976년부터 작고할 때까지 살았던 고택이다. 1930년대 지은 한옥으로 서울, 경기지방에서 많이 보이는 ㄱ자형 안채와 ㄴ자형 바깥채로 된 튼ㅁ자형 집이다.
선생의 손길이 곳곳에 담겨있는 아담한 안마당과 뒷마당에는 꾸미지 않은 한국미의 자연스러움이 담겨 있다.
선생의 본명은 희순(熙淳), 호는 혜곡(兮谷)으로 개성에서 출생하였다. 도자기와 전통 목공예, 회화사 분야에 많은 학문적 업적을 남겼으며, 우현 고유섭 선생과의 만남을 계기로 1943년 개성부립박물관에 입사하여 이후 평생 박물관에 재직하였다. 선생은 이 집에서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나는 내 것이 아름답다>와 같은 아름다운 글을 집필하였다.
한국내셔널트러스트에서 시민성금으로 매입한 시민문화유산 1호이며, 등록문화재 제268호이다. 현재 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에서 보전하며 혜곡 최순우기념관으로 운영하고 있다.
(1) 사랑방
- 최순우 저, <나는 내 것이 아름답다> 中 그 첫해 늦은 가을 달밤, 나는 옛일처럼 불을 끄고 호젓이 누워 동창에 비친 늙은 감나무 그림자를 바라보면서 애틋한 사람의 얼굴을 허공에 그려 보곤 했다. 아래 윗방에 각기 높직하게 자리 잡은 영창에 달빛이 너무나 가득해서 감나무 그림자는 마치 멋진 추상화처럼 구도가 잡혀 있었고, 달이 어울어감에 따라서 이 희한한 그림 아닌 그림 폭은 허전하게 지워져 가곤 했다. 이른 봄날이면 보라색 새벽노을이 이 영창에 물들어오기 마련이고 초여름 녹음이 짙어지기 시작하면 바야흐로 무성해지는 감나무 그늘에 가려져서 달그림자 없는 한여름을 지루해하기도 했다.
- 최순우 저, <나는 내 것이 아름답다> 中 고향집도 그러했고 지금의 내 방도 그러하지만, 미닫이의 창살은 용자살(用字)이 가장 정갈하고도 조용할뿐더러 황금율이 적용된 쾌적한 비례의 아름다움을 갖추어 온갖 잔재주를 부린 어느 완자창살보다 한 수가 높았다. ... 말하자면 용자살창은 가장 단순하면서도 가장 세련될 수 있는 소지를 충분히 지니고 있다. 한국 사람들은 그것을 잘 알고 있었고 또 그 누구보다도 그 아름다움을 잘 가누어 왔음이 분명하다. ... 조선 목수들의 손으로 가누어진 한국 창살 무늬의 아름다움은 때로는 몬드리안의 작품들을 능가할 만큼 세련된 면의 분할을 적지않게 보여주었다.
(2) 뒷마당
뒷마당에는 최순우 선생이 가꾼 산나무들과 들꽃, 담장에는 운치를 더하는 담쟁이가 자라고 있다. 툇마루를 사이에 두고 뒷마당을 마주하는 안채의 벽면은 1개의 용자살문과 4개의 커다란 용(用)자 살창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내부에서 외부공간을 바라보는 시선이 담겨 있는 전형적인 조선말 선비집의 분위기를 풍긴다. 선생은 눈길이 잘 닿는 마당 가운데 백자 항아리를 두고 감상하였는데, 백자 뒤에 청죽을 심어 그 그림자가 백자에 비춘 정취를 즐긴 선생의 심미안이 돋보인다.
- 최순우 저, <나는 내 것이 아름답다> 中 자연의 아름다움이 결코 큰 덩치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뜰 앞 잔가지에 구슬진 영롱한 아침 이슬, 오솔길에 차분히 비에 젖은 낙엽, 서리 찬 겨울 달밤 빈 숲 잔가지에 쏟아지는 달빛, 예를 들자면 한이 없지만 고맙고 즐거운 자연의 아름다움을 갈피갈피 느끼면서 세상을 살아가는 낙이 젊음과 사랑의 생리 속에 속속들이 스몄으면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 ... 자연이나 조형의 아름다움은 늘 사랑보다는 외로움이고, 젊음보다는 호젓한 것이기 때문에 그 아름다움은 공감 앞에서 비로소 빛나며, 뛰어난 안목들은 서로 그 공감하는 반려를 아쉬워한다. 반려 없이 보는 아름다움은 때로는 아픔이며, 때로는 외로움과 호젓함이며, 때로는 그 의미를 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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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우 옛집 (등록문화재 제268호, 혜곡 최순우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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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미술사의 산실 - 최순우 옛 집
최순우 선생이 궁정동에서 이곳으로 이사한 1976년부터 1984년 12월 16일 타계할 때까지 살았던 곳이다. 그후 선생의 부인과 따님의 가족이 2002년 11월까지 거주했고, 이해 12월에 이 집을 (사)한국내셔널트러스트에 팔게 되었다.
이유는 이 일대가 다세대주택으로 급격하게 바뀌어갔기 때문이었다. 이 집도 개발업자와 계약이 성사되어 팔리면 곧 빌라가 들어설 순간에 있었다. 그러나 정말 다행히도 이 집이 한옥으로 남기를 바랐던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사)한국내셔널트러스트가 이 집을 사서 여러 사람들의 고증을 통해 상당한 부분을 복원하게 된 것이다.
현재 이 집은 ‘혜곡 최순우 기념관’으로 등록되어 박물관으로, 차를 마시며 담소할 수 있는 시민들의 문화 공간으로, (재)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의 사무실로, 또한 최순우 선생의 옛 자취를 기리는 장소로 활용되고 있다. 처마 끝에 달은 함석 차양은 한옥의 미관을 고려하여 동판 차양으로 바꿨다. 안채의 안방은 선생이 생활하던 당시에는 3개의 방으로 나뉘어 있었고, 동편 1칸은 사랑방, 중간 1칸은 선생의 침실, 서편 1칸은 안방으로 사용했었다는 고증을 바탕으로 안방 부분의 동편 1칸과 중간 1칸의 사잇문 한 곳을 복원하였고, 동편 1칸은 사랑방으로 재현하여 안채 전체를 전시 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 능선을 따라 조선시대 서울의 성벽이 있다. 이 집은 성벽의 바로 바깥쪽에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이 집은 성벽을 바라보는 쪽으로 길이 나 있어 북향하도록 지어졌고 안마당보다 집 남쪽으로 있는 뒷마당이 더 넓다.
집 안에서 북쪽과 남쪽으로 있는 마당을 내다보면 선생이 자신의 안목으로 집 가꾸기에도 심혈을 기울였던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오히려 북향집의 특징을 살려 마당을 가꾼 흔적을 읽을 수 있다. 집을 지을 당시 주인이 그 자리에 있던 나무를 베지 않고 나무를 비켜 집을 지어, 안채와 바깥채가 나무를 둘러싸게 한 것 같다. 개발만 앞세우는 현대인이 따라가기 힘든 마음을 읽게 하는 곳이다. 사람이 만든 집과 자연이 더불어 살고자 한 우리 한국인 본래의 심성을 읽게 하는 마당이다. 이 안마당은 우물과 각종 석물로 꾸며져 있다. (산수유, 생강나무, 모과나무, 자목련, 대나무, 소나무, 떡갈나무, 단풍나무, 감나무 등) 시정의 시끄러움을 멀리한 또 다른 세계가 펼쳐지는 곳이다. 마치 자연 그대로의 야산을 옮겨놓은 듯한 분위기가 감도는 곳이다. 뒷마당 가운데에는 대나무가 심어져 있고, 그 옆에는 커다란 달항아리가 놓여 있다.
비가 올 때나 달이 떴을 때나 달항아리에 비친 대나무와 자연을 사랑방에서 감상할 자리를 마련한 것을 알 수 있다. 선생은 사랑방에서 달항아리와 그 속에 비치는 자연을, 툇마루에 걸린 달빛 넘어 간간히 내다보았을 것이다.
- 글, 이상해 [ 한옥에살어리랏다 ① ] - 2007년 6월 14일, 문화재청, 문화재포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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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채형 상평 열쇠패>, 19세기, 23.4×3㎝, 쇳대박물관
다섯가지 색의 당채가 입혀진 특대형급으로 가장 바깥 테두리에 상평통보 당일전(當一錢) 22개, 안쪽 줄에 15개, 가운데 13개 등 모두 당일전(當一錢) 모전으로만 50개가 연주(連珠)되었다.
모전(母錢)이란 통용전을 만들기 위해 미리 만든 돈으로서 일명 '번돈'이라고도 한다.
상평통보가 매달린 것을 나무열매에 비유하여 해마다 나무에 돈이 열려 쓰고싶은 대로 쓰고 부자가 된다는 '돈 낳은 열쇠패' 즉 '산전패(産錢牌)'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주전소에서 통용전을 만들던 거푸집으로 사용하다가 당채를 입혀 열쇠패로 만든 것으로도 보인다.
열쇠패에 사용하는 별전(別錢)은 양반들이 특별주문해 기념으로 모았던 일종의 장신구이다. 당시에는 이같은 별전에 과거에 합격하게 해달라거나 부부금슬이 좋아지도록 해달라는 소원을 써넣기도 하였다. 때때로 '부부금슬'을 쓴 별전을 혼수품으로 마련해주기도 하였다. 조선의 사대부 집에는 곳간이 많았는데 곳간 열쇠는 안방마님의 차지였다.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열쇠가 주렁주렁 달린 열쇠패를 건네주는 것은 집안살림을 물려주는 것을 상징하였다. 특히 우리나라의 열쇠패는 중국과 일본 그 밖의 다른 나라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하고 희귀한 실내장식 문화재이다.
당일전 모전(1678년, 숙종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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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인석보(月印釋譜) 보물 745호, 목판본, 14권13책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과 '석보상절(釋譜詳節)'을 합하여 세조 5년(1459)에 간행한 불교대장경이다. 이 책은 '월인천강지곡'이라는 명칭으로 발행된 것과 '석보상절', 혹은 '월인석보'라는 명칭으로 발행된 3종류의 간행본이 있다.
석보는 석가모니의 년보 즉 그의 일대기라는 뜻이다. 조선 세종 28년(1446)에 소헌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아들인 수양대군(세조)이 불교서적을 참고하여 한글로 번역하여 편찬한 것이 곧 '석보상절'이다. 세종 29년(1447) 세종은 '석보상절'을 읽고 각각 2구절에 따라 찬가를 지었는데, 이것이 곧 '월인천강지곡'이다.
'월인석보'는 총 25권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현재까지 발견된 것으로는 처음 간행된 권 1, 2, 7, 8, 9, 10, 11, 12, 13, 14, 15, 17, 18, 19, 23, 25와 재간행된 권 4, 21, 22 등 총 19권이 있다.
이 책은 조선 전기 2대에 걸쳐 임금이 편찬, 간행한 것으로, 우리나라 최초로 불교서적을 한글로 번역한 책이다. 훈민정음(訓民正音) 이후 제일 먼저 나온 불경 언해서로 당시의 글자나 말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어서 조선 전기 훈민정음연구와 불교학 및 국어사, 문헌학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아이스케키통 20세기, 78.3×42.5×53.3㎝, 서울시립대박물관 소장
목재에 쇠못과 쇠경첩(뚜껑 양 옆에 잠금고리)이 있다. 뚜껑과 몸체가 분리되고, 바닥에 낮은 다리가 있다. 양 옆 중간에 각목이 붙여져 있고, 윗면에 직사각형의 출입구멍(18×13)이 있다. 앞뒤에 붉은색의 페인트로 '케키, 하드, 입설당' 글씨가 쓰여 있다. 하단은 젖었던 듯 틀어져 있어 전체적인 상태는 좋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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