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듬어보고(전시)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이 아름답다 - (1) 서울을 담다

Gijuzzang Dream 2008. 4. 27. 15:11

 

 

 

 

 

 

 

 

 사진작가 홍순태

  서울 원남동 / 서울 신세계백화점 / 서울 마포

 

 

 

서울 원남동, 1969, 홍순태, 44.5×30㎝, 서울시립미술관

 

   

서울 신세계백화점, 1970년, 홍순태, 44×38㎝, 서울시립미술관 

 

 서울 마포, 1968년, 홍순태, 44×30㎝,, 서울시립미술관 

 

서울 명동, 1977년, 홍순태, 44.5×30㎝, 서울시립미술관

 

 

홍순태(1934- )는 60년대에 동아사진 콘테스트와 국전 사진부문을 통해 사진가로 입신한 이후,

시종일관 기계적 기록성을 신봉하는 순수사진(Straight Photo)의 입장을 견지해왔다.

그의 사진에 일관되게 흐르는 공통분모는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는 생활감정, 곧 '삶의 진실'을 파악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항상 삶의 현장에 파고들어 거기에 배어있는 인간의 숨결과 그 체취에

카메라의 초점을 맞추어왔다.

이번에 서울시립미술관이 수장하게 된 그의 작품은 줄잡아 1960-1970년대 서울,

거리의 일상을 아주 담담한 시선과 감수성으로 포착한 것인데,

거기에는 대체로 세속 삶을 근근이 꾸려가는 인생의 당대적 리얼리티나 긴박함의 밀도 대신

회고적인 서정이 짙어 보인다.

(서울시립미술관 홈페이지에서)

 

 

1.

홍순태는 기록을 한다는 것은 사진가의 사명감 같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기록을 하되 단순한 사건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고

창작적 자세로서 자신의 시각에 의해 대상들과의 만남을 이루는 것이라고 한다.
단순기록이라는 개념을 넘고자 하는 의식의 단계는 작가의 비판의 시각으로 발전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홍순태의 사진은 한국사진사의 시대적 진행 과정 속에서

어떻게 창의적 변신을 이룩해 나갔는가를 살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는 1960년대에 사단에 등단해서

그로부터 현재까지 30년 넘게 줄곧 사진계의 제일선에 서서 선도적 역할을 했다.

60년대는 우리 사진사에서 사진이 사회속에 제도적으로 뿌리를 내리는 시기이다.

 

이전까지는 인맥이나 지연을 따라 특정인물을 중심으로 이합집산하던 군소집단들이

예총 산하의 전국을 망라한 통일된 하나의 공식단체로 출범을 하였을 때이다.

70년대는 50년대와 60년대를 걸쳐 사진계를 휩쓴 리얼리즘 사진과 맞서

영상사진의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시기였다.

대상에 대해 사진이 어떻게 반영해야하는가 하는 사실적인 사진에서

대상을 바라보는 사진가 자신의 내면세계에 대해 어떻게 반영해야 하는가 하는

심상적인 사진의 문제로 사진가들의 관심을 뒤바뀌게 되었다.

홍순태는 바로 이런 사진의 새로운 역사적 전환기를 맞아

공모전사진에서 새로운 영상사진으로 앞장서 사진적인 변신을 했다.

이로써 홍순태는 60년대 공모전시대의 대표적인 신인으로 출발하여

70년대 새롭게 일어난 영상사진운동을 선도하는 중견자로서 변신하였다.
그 변신의 과정에서 홍순태는 서울이라는 거대한 도시를 영상사진으로 보여줌으로서

기록사진의 진가를 발휘하였다.

 

 

2.

사진계에서 그 이름의 지명도가 '홍순태'의 세 글자만큼 알려진 경우는 드물 것이다.

하기야 그만큼 열심히 사진 찍고

또 그만큼 사진문화의 보급을 위해 폭넓게 사회적으로 활동한 이가 또 어디 있었던가.

그가 이렇게 유명해진 요인은 딱 한가지이다.

즉 그의 이름 앞에는 언제나 "한국 최초의" 또는 "한국에서 제일"의 형용사가 붙어 다니기 때문이다.

아마 단언(斷言)하는 것은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우리 사진가 중에 필름 소비량이 제일 많고

그가 만진 카메라나 이에 대한 정보가 제일 많은 것도 그일 것이다.

사진전도 그렇고 그가 가지고있는 사진관계 서적도 그렇고

사진에 관한 지식이나 정보도 제일 그러리라고 생각한다.
  

사진가 홍순태의 초상화 그리기는 대체로 두 방향에서 접근되어 왔다는 것이 평소 나의 생각이었다.

하나는 첫 번째 화공의 경우이고, 또 하나는 두 번째 화공의 접근방식이다.

한쪽은 너무나 지나친 미화(美化)의 입장이고

다른 한쪽은 고지식하여 아쉬운 면만을 너무 드러낸 입장이다.

 

1968  국전사진부 특선 3회, 금상 1회, 입선 2회
1970  엑스포 '70 한국관 사진담당
1972  국전추천작가
1972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강사(∼1975)
1975  엑스포 '75 한국관 미래관  사진출품 30점
1980  국전초대작가
1881  신구전문대 사진학과교수(∼현재)

 

홍순태의 사진의 주제(主題)별로 지금까지 걸어온 작업과정을 큰 테두리로 정리한다면

대략 다음과 같이 사진세계의 윤곽이 잡힌다.


1. 초기의 공모전 출품사진들  (1960-1970)
2. 한국적 전통미의 사진들     (1960-1980)
3. 농촌의 인간상                   (1960-1980)
4. 도시의 영상(映像)             (1959-1994)
5. 아메리카 기행사진             (1980-1993)
6. KBS의 이산가족찾기          (1993)
7. 이 땅을 지키는 사람들        (1984-1987)
8. 세계의 documentary 사진   (1980-1994)

  

이상의 주제별 분류에서 발견되는 것은

우선 그가 시종일관 사진의 기계적 기록성을 신봉하는 순수사진(Straight photo)의 입장임을

알 수 있다. 그는 어디까지나 사진만이 갖는 사진의 고유성을 끝까지 고수하는

이른바 철저한 정통파 사진가이다.

그리고 주제별로 촬영연대를 대조해보면 1980년대를 경계로

그 이전까지는 촬영무대가 국내이고

그 이후부터는 대체적으로 국외(國外)가 주무대로 되어있다.

이것을 다시 구체적으로 세분해 보면

국내무대도 대개 초기에는 농촌지역이 많고 후반에 갈수록 대상에 대한 관심이 도시로 차츰 이동한다.

그리고 외국무대도 초기에는 대상에 대한 호기심이 전세계로 확산되어가다가

후기에 갈수록 우리 동양문화권으로 집중 축소된다.

이것은 일단 주목할 현상으로 자신이 서있는 삶의 현장으로부터

처음에는 멀리 떨어진 데로 사진적인 관심의 향방이 원심적(遠心的)으로 기울었다가

마침내는 자아(自我)를 향해 구심적(求心的)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이것은 사진가가 사진을 찍어나가는 과정에서

사진을 통한 자아의식의 자각과 성숙에서 말미암은 자연스런 결과라 할 수 있다.

국내거나 국외거나 그의 사진에 일관되게 흐르고있는 공통분모는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는 생활감정의 파악, 즉 '삶이 진실'이다.

그는 항상 인간이 살아가는 삶의 현장 속에 배어있는 인간의 숨결과 체취에 카메라의 초점을 맞춘다.

그런데 이런 가운데 한가지 눈에 뜨이는 것이 있어 흥미롭다.

그의 사진은 대부분 하나같이 사진의 전면에 사람을 크게 부각시킨 인물위주의 사진보다는

인간이 삶을 살아가는 공간적인 상황을 강조한 분위기 위주의 사진이 대부분 성공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그의 사진은 인간에 대한 직접적인 대면(對面)보다는

그가 살고 있는 분위기 속에 자신의 심리적인 반응을 했을 때에 성공률이 더 높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밖에 또 한가지는 단순하고도 엄격하게 화면이 구성된 세정(世情)의 풍경들이

다른 사진들에 비해 거의 하나같이 돋보인다.

이것은 두말할 것 없이 그의 타고난 성정(性情)과 기질(氣質)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리라.

그의 단순 솔직한 직선적인 성격, 그리고 매사를 깔끔하게 다루어야 직성이 풀리는 정리벽(整理癖)이

그의 사진 속에 그대로 투사된 것이라 하겠다.

- 사진가 홍순태를 말한다 (육명심, 사진가, 서울예전교수) 

 

 

  

 

 

  

 

 

<남산전경>, 안석준(1953- ), 한국화, 1990년, 198×128㎝, 캔버스에 유채, 서울시립미술관

  

우리 주변의 풍경은 일시적인 큰 감동은 없지만 오가며 늘 보는 곳이므로,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까지 볼 수 있고 오래된 친구처럼 정감이 간다.

 

그리고 그 주변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집들과 그 사이의 나무들,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 풍경을 더욱 생생하게 만든다.

특히 가을이 되면 그 정감은 더욱 무르익어 조화를 이룬다.

내가 갈색조를 즐겨 사용하는 이유는 바로 그와 같은 이유에서다.

서울의 남산이나 인왕산, 북한산은 우리의 삶과 가장 가까이 접해있어

자연과 인간의 삶을 함께 담을 수 있는 가장 좋은 소재이다.

아직은 삶의 모습과 자연의 모습을 잘 조화시키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되지만,

이러한 주변의 자연을 통하여 삶의 모습들을 표현하려 노력하고 있다.

<작가 안석준의 글>

 

안석준의 그림은 전통화법에 구애받지 않는 현대적인 감각의 표현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고법으로부터 절연된 것도 아니다. 수묵산수화로서의 정서를 견지하되

이 시대의 감각에 어울리는 모던한 실경산수화의 한 유형을 제시하고 있다.

그의 실경산수화는 그 소재 및 대상이 극히 제한적이며 선택적이다.

모던한 설경 수묵산수화의 이미지에 적합한 소재 및 대상 자체를

그 자신의 조형의지에 일체화하려는 것이다.

<미술평론가, 신항섭>

- 이상 서울시립미술관 홈페이지에서

 

 

 

 

 

 

 

 

 

 

 

<한강메시지 2>, 1987년, 양화, 구자승, 116.8×80.3㎝, 종이에 수묵담채, 서울시립미술관

 

 

 

사물의 분명하고 명확한 묘사, 단지 외광의 투영만이 진실이 아닌 것처럼 ...

'사물이 거기 그 자리에 있다'

나 스스로도 개입하길 원치않는 단지 거기 그 자리에 그들을 놓여주는 일을 할 뿐이다.

그래서 그들을 통해 뭔가 말하려 하지 않아도 된다.

이 리얼리티의 벼랑 끝에서 그것들을 이미 현실의 being이 아닌 것이다.

제2의 being이 작품 속에서 잉태하는 것이다.

<작가 구자승(1941- )의 글>

 

정물화처럼 풍경화의 대다수는 대체적으로 화면의 하단으로 내려와 있는 구도가 특징이다.

또한 시점은 그보다도 훨씬 낮다.

따라서 밑에서 올려다보는 시점 설정이 특이하다. 이런 식의 특별한 구도에 대한 집착이 강하다.

산길, 산, 들녘, 집 따위의 풍경이 등장하는데 어느 작품이나 한결같이 고요한 분위기에 젖어 있다.

그림을 보고 있음으로써 저절로 심신이 정화되는 듯한 감정에 이끌린다.

자연의 형태적인 아름다움 그 자체보다는 신비적인 기운이 감도는 대자연의 존재성에 대해

시선을 돌리게 하는 힘이 있다.

<미술평론가, 신항섭>

- 이상 서울시립미술관 홈페이지에서

 

 

 

 

 

 

 

 

 

<성북동> 1991년, 한국화, 정하경, 170×89㎝, 종이에 수묵담채, 서울시립미술관

 

 

정하경(鄭夏景, 1943- )은,

서울에서 태어나 1968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를 졸업하고

1973년 동대학교 대학원 동양화과를 졸업하였다.

한국미술협회 이사와 대한민국 미술대전 심사위원 등을 역임하였으며

현재는 한성대학교 예술대학 회화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1984년, '92년, '96년에 세차례의 개인전을 비롯해 수차례의 국제전 및 단체전을 가졌다.

 

 

"맑고 깨끗한 붓질로 전체적인 인상을 장악한다.

자욱한 수림의 안개나 계곡의 차가운 물기가 곧장 화면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사실감은

세밀한 묘사에서 오는 느낌이라기보다는 산야의 호흡을 담으려는

작가의 자연 생명관에 기인한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작가의 글 중에서)


80년대 초반부터 10년 이상을 변함없이 이러한 자연이미지 작업에 몰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자기와의 대화일 수 있다.

70년대를 전후해서 소위 서구적인 경향의 추상작업을 해온 그가

80년대를 기점으로 해서 매우 구체적인 자연이미지 작업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다름아닌 자기 내면의 소리에 주목한 것이다.

정하경이라는 하나의 인식이 밖의 소란스러운 소리에서

안의 내밀한 소리로 관심의 대상을 바꾸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심이 자연이라는 대상과 만나게 되었고,

수많은 사생과 답사를 통해서 자연의 맑은 기운을 조금씩 느껴가고 있는 것이다.

 

 

 

 

 

 

 

 

  

 

  

                                       

 <도봉산> 1989-1999년, 구상, 이상국, 273×71㎝, 캔버스에 유채, 서울시립미술관

 

 

"도봉산의 전경을 대관(大觀)하여 개괄, 표현한 작품이다"

“나는 그림을 그리는 일은 항상 무당이 칼 위에 선 것 같이 긴장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무당은 칼 위에서 다른 마음을 먹으면 발에 피가 나는데, 작가가 그렇지 않다면 곤란하지요”

 

“제 필법은 좀 특이하다고 할 수 있는데 현장을 스케치한 것을 다시 목판에 칼로 떠본 후에

유화를 그리는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현실의 자연이 아니고 이미 조형화된 목판화 작업을 놓고

재구성한다는 점에서 이미 그릴 때부터 일정하게 현실에서 이탈했다고 할 수 있다.”

“나로서는 산을 그리면서도 내 시대를 표현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작가의 글)

 

"호방한 붓질과 나이프의 흔적, 거칠 것 없이 펼쳐진 화면 구성의 대범함,

눌러붙은 두터운 물감층 위의 물성이 자아내는 견고함이

그 사이를 구성하고 있는 색채의 생생한 발색과 타블로 위에서의 물감의 혼합,

뼈대를 형성하는 선과 공간 묘사의 생략이다.

두터운 선의 약동과 자연스럽게 위치하는 면들이 이루는 화면의 높은 밀도 등이

이러한 바탕의 토대 위에서 해석되고 표현된 회화는 물질로, 이미지로,

그리고 행위의 흔적으로 생생하다.

거기에 나타나는 선이나 바다는 재현된 것이 아니라

대상의 분석과 작가에게 각인된 인상의 표현들이다. 아니 이상국의 내면이다....

대상이 변형된 형태로 남아있지만 선과 면이라는 조형요소들로 환원되고,

거기에 다시 작가 특유의 물감 붙이기가 회화적 뉘앙스로 흔적화되어

재현보다는 표현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작가의 육체와 질료의 반응과 그림에 대한 평소의 사유가 일치했다는 것인데,

이러한 양상은 사실 이전의 그의 그림에서 보여줬지만 더욱 깊은 완성도와 집중력을 보여준다."

(큐레이터, 김진하)

- 이상 서울시립박물관 홈페이지에서

 

 

- 유홍준 <삶의 무게를 실은 침묵의 소리>  중에서

1990. 이상국의 개인전 서문

이상국의 목판화를 보면서 나는 곧잘 박수근과 오윤의 그것을 연상하곤 한다.

박수근의 목판화는 철저하게 ‘회화적’이며, 보는 이의 시각을 화면 속으로 빨아들이는

분위기를 기막히게 연출하고 있다.

반면에 오윤은 철저하게 ‘조각적’이며, 그림에 나타난 형체들이 화면 밖으로 돌출해 나오는 듯한

실체감을 누구보다 잘 구사한 작가였다.

그리고 이상국의 목판화는 철저하게 `조형적'인 것으로

아마도 그 중간쯤에 위치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박수근처럼 서정을 노래하지 않으며, 오윤과 같은 우렁찬 울림을 갖고 있지도 않다.

그렇다고 하여 이데올로기의 도해(圖解)나 격렬한 구호가 담겨 있는 것은 더욱 아니며

가냘픈 애상(哀傷)이 서려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이상국은 저 깊이 모를 밑바닥에 깔려 있는 내밀한 인식과 ‘침묵의 소리’를 담아낸다.

그가 즐겨 그리는 ‘나무’는 대지에 깊게 뿌리내린 겨울나무의 강인한 인내이며,

‘산동네’는 덤덤하게 삶의 힘겨움을 이겨내는 인정(人情)이다.

좀더 비약하자면 ‘그것은 차라리 혼(魂)이며, 한(恨)이고, 유명(幽明: 깊은 빛)이고,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에네르기’(김윤수의 평)이다.

 

- 김종길 "대지(大地)의 뼈에서 핀 꽃"

이상국(1971년 서울대 미술대학 회화과 졸업)은 2000년 11월 고양시 삼송동으로 이사왔다.

90년대 초반엔 영국에서 작업을 했고, 후반에는 미국에서 작업했다.

기자출신인 아내가 해외 특파원으로 돌아다니는 동안 그는 그곳에서 작업을 해야만 했다.

언제나 삶의 현장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강렬한 색채로 그려왔던 그이기에

영국과 미국의 삶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는 그가 그곳에서 제작한 작품을 통해 엿볼 수 있다.

다만,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산(山)이다. 산의 형상을 들여다보고 있다.

그런데 그 산이 한국의 산과 별반 차이가 없다.

사람을 쏙 뺀 것은 아마도 낯선 환경에서 스스로 ‘타자’가 되어야 했던 생활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3, 4년의 짧은 기간동안 그들 사회 속으로 깊게 들어간다는 것은 무리이다.

 

1970-80년대 긴박했던 한국사회의 ‘현장’을 추상 표현주의적인 기법으로

강인하게 각인했던 작업세계를 기억한다면 그의 타지 생활의 태도는 일견 이해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90년대 들어 작품의 주제를 ‘자연풍경’에 집중하게 된 것도 하나의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자연 풍경이라 해도 구체적인 ‘장소’를 선택하고 있는데,

제목을 보면 <홍은동>, <북한산>, <홍제동에서> 등이 있다.

그리고 그 장소에서 자라는 ‘나무’를 바라본다.

<산으로부터>, <나무로부터>와 같은 작품들이 수년에 걸쳐 그려지고 있다.

작품은 풍경의 해체와 재구조화를 반복함으로서 완성된다.

그렇기에 그의 작품들은 세세한 구상(具象)이 부셔지고

종국에는 꿈틀거리는 지세(地勢)의 골격만 남는다. 이것을 ‘대지(大地)의 뼈’라 할 수 있지 않을까?


“80년대까지 나는 그림을 집짓기처럼 구축해가는 과정으로 생각했지요.

그런데 최근 작품들, 특히 풍경화는 해체되는 방식으로 그리고 있어요.

철거된 산동네 그림도 그런 식이지요. 그런데 그런 해체 과정에서 가슴 아픈 느낌과 동시에

어떤 새로운 에너지, 기氣를 느끼게 되는 것 같아요.”

그가 말하고 있는 ‘기(氣)의 느낌’이 대지의 뼈에서 비롯된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화면은 그러한 뼈들이 꿈틀대며 상승하고 있다.

뼈의 기운이 전면전을 펼치고 있는 듯 대지가 요동치는 형국이다.

허버트 리드는 『예술의 의지』에서

“형태는 규칙성, 시메트리, 또는 어떤 종류의 고정된 비례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고 했다.

그의 형태론은 구상을 전제로 한 것임에도 불규칙, 불균형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구상이 해체된 비구상 혹은 추상(抽象)은 오히려 자연율의 리듬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최근 자연의 리듬이 프랙탈(fractal) 형상을 취하고 있음이 과학적으로 증명되었는데,

“언제나 부분이 전체를 닮는 자기 유사성(self-similarity)과 소수(小數)차원을 특징으로 갖는 형상”

으로서 프랙탈은 매우 역동적인 리듬감에 차있다.

이상국의 판화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그러한 역동적 리듬이다.

 

- 박영택, 미술평론가, 이상국의 판화 "신명과 애증의 시선"

. . .  이상국은 동양화를 전공했지만, 유화와 판화를 함께 하는 작가이다.

우리 화단에서 이런 일관성은 비교적 드물다.

이상국은 유화와 판화 작업 모두를 통해 상호보조하는 동시에

두 개의 영역에서 결핍된 부분들을 채워나가고 둘 모두를 끌어올리는 장치로서 다룬다.

이는 일종의 균형을 잡는 일이기도 하다.

둘 다 평면에서 이루어지는 일이지만 회화가 표면을 바르고 채워나가고 붓질에 의존한다면

판화는 나무판을 깎고 파고 잘라내면서 흑백의 긴장을 추려내는 이다.

그는 그림을 그리다가 판을 찍어보기도 하고 판화로 한 것을 가지고 다시 유화작업을 한다.

그리고 이 작업은 수없이 반복되는 편이다.

사실 이 두 영역은 하등의 차이가 없을 수도 있다.

그는 자신의 조형적 성취감과 완성을 향해 자신이 납득하고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밀어 올리는 과정에서 판화와 유화 모두를 필요로 한다는 인상이다.

 

물감을 붓으로 바르고 덮어나가는 일과 칼을 들고 나무를 깎아내는 행위 사이에는

매번 결정적인 선택의 순간이 기다린다는 공유성이 있다.

이상국에게 회화와 판화에는 기묘한 이율배반이 하나로 뒤엉켜있는 셈이다.

그에게 판화와 회화가 서로 다르지 않다.

그가 말하기를 둘 다 신명이 나야되며 그것이 바로 완성으로 가는 길이라고 한다.

( . . . )

 

 

그의 판화와 유화에서 등장하는 산동네와 사람들의 모습, 산과 나무와 바다는

이 세상의 모든 생명체와 현실적 풍경의 상징들이고

그것을 매번 바람보고 함께 살아가는 인간의 연민어린 시선들의 어지러운 교차와 흔들림과 애증들이

만들어낸 선이다.”

 

 

 

 

 

 

 

  

 

 

<서울의 아침>, 1958년, 양화, 박상옥, 74.5×49㎝, 캔버스에 유채, 서울시립미술관

 

 

朴商玉(1915~1968)은,

1935~36년 14·15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선하여 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 뒤

1939년 일본제국 미술학교에 입학하여 본격적인 미술수업을 받았다.

재학시절 일본의 이과전(二科展)에 〈유동(遊童),1939>·〈군동(群童),1941> 등을 출품했는데,

초기부터 토속적인서정이 배어 있는 주제와 기법을 보여주었다.

1942년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대구사범학교에 부임하여

이듬해 경북미술전람회에서 〈건아〉로 도지사상을 받았다.

1946년부터서울 성남중학교·휘문중학교·경기공립중학교·이화여자대학교 등에서 미술을 가르쳤으며,

1951년 1·4후퇴 때 부산으로 피난하여 종군화가가 되었다.

1953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에서 〈소와 목동〉으로 특선을 차지했고

이듬해에도 〈한일(閑日)>로 대통령상 겸 예술원상을 수상했다.

 

대표작 〈한일〉은 뚜렷하고 어두운 색조의 인물이 화면의 중앙을 중심으로 배치되어 있다.

특히 인물과 주위와의 강한 빛의 대비 속에서 화사한 색조가

어두운 인물과 밝은 공간에서 각각 대비를 이루고 있어서 면이 분할된 인상주의 양식을보여준다.

1957년 국전 심사위원을 지냈고 그 이듬해 초대작가로 〈그늘〉·〈향로봉〉을 출품하는 등

이후 국전에초대작가 또는 추천작가로 꾸준히 출품해왔다.

1960년정부로부터 녹조소성훈장을 받았고 이듬해 서울대학교 교수가 되었다.

그의 작품은 소재나 기법 면에서 커다란 변화가 보이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부드럽고 온화한 색채를 써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토속적인 분위기를 형상화했다.

 

"박상옥은 완성자(完成者)로서의 미술가는 물론 아니다.

하지만 비록 중도에서 실추되었다고는 해도, 창시자(創始者)로서의 활약은 인정되어야 하며,

그의 스타일은 문자 그대로 한국의 토양으로부터 배양된 발아의 형식으로서의 리얼리즘인 것이다.

인물의 표정들이 무명(無名)의 평등(平等)으로 생략된 어린이들이 토담 곁에서

토기와 닭 또는 소와 함께 노는 정경을 통해 우리는 우리 속에 잠재하는 마음을 보며,

투박하고 굵은 그의 구도(構圖)를 통해 한국적인 조형을 읽게 된다."<미술평론가, 유준상>

 

 

 

 

 

 

  

 

 

 

 

 

 <노송배(老松背)-서울시가도> : 박노수(1956년), 화선지에 수묵채색, 서울시립미술관소장

 

 

특유의 양식적인 한국화의 세계를 개척한 동양화가 남정 박노수(藍丁 朴魯壽, 1927-  )가

30세에 그린 초기 작품이다.

이후 그가 보여주는 단순화한 필치의 선조와 채색 등 양식화된 작품들과는 달리

사실적인 풍경화에 더 가까운 모습을 보인다.

노송(老松) 뒤로 보이는 1950년대 당시 서울 시가지의 모습이 손에 잡힐 듯 생생하다.

 

박노수 작품은 채색과 선조가 이루는 독특한 조형과 함께

홀로 등장하는 인물들의 고고하고도 고결한 선비정신에서 찾을 수 있다.

박노수는 "선이란 그림의 생명이요, 영원한 세계가 열리는 길, 무한의 공간을 끌어들이는 것"이라고

피력한 바 있는데, 이는 곧 작품의 근간이 선(線)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선은 쪽빛의 무한한 장식성, 깊은 공간감과 어우러져 독특한 조화를 이룸으로써

그 만의 작업세계를 완성시킨다.

다시 말해서 북화적 색채감각이 주는 장식성과 남화적 운필이 주는 시적 여운이 어우러지면서

엄격함과 부드러움, 냉정함과 따듯함, 엄격함과 고귀함이 서로 직조되어

독특한 아름다움을 발현하는 것이다.

이에 더하여 세속희 유혹과 허욕을 등지고 홀로 등장하는 인물들은

인생을 평화롭게 관조하는 작가의 심회를 대변하며 보는 이로 하여금 자연스레 동조하게 만든다.

 

 

 

 남정(藍丁) 박노수(朴魯壽: 1927-)

 

1940년대 청전(靑田) 이상범(李象範)의 문하에서 사사 했으며,

해방후 서울대학교 미대에서 본격적인 작품공부를 시작하였다.

작품활동은 주로 국전을 통해 이루어졌는데,

1953-55년에 걸쳐 국무총리상, 특선, 대통령상을 수상하였으며, 57년에는 추천작가를 지냈다. 

그는 초기에 추상화된 인물 표현과 대담한 구도와 독특한 준법을 보여주면서

산수화로 독자적인 경지를 개척하고 있다.

고고하고 기개 높은 준발과 분방한 필세가 특징적이며,

대각구도를 바탕으로한 청색조의 색채와 빠른 선조가 높은 화격을 구축했다.

선명하고 아름다운 선, 투명성을 지닌 채색, 자유로운 형태를 띤 주관적인 추상화를 이루어내고 있다.

 

그는 충남 연기의 한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비교적 유복한 가정환경에서 외조모에게 천자문을 배우고

부친에게 붓글씨를 익히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청주상고에 다닐 때는 문학지망을 꿈꾸기도 했으나

부친은 그림 그리는 것을 말리진 않았다. 서울에 올라와 사직동에 있는 청전화실에 드나들면서

초기엔 인물화를 그렸고 서울대 미대에 입학하여

「근원수필」로 유명한 김용준과 심산 노수현 월전(月田) 장우성(長遇聖)을 사사,

일찍이 청전은 고귀한 품성을 지닌 이 미소년의 범상치 않은 재질을 보고

이미 '일총한 화가탄생'을 주변에 일러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 시기엔 학교 숙직실에서 그림을 그리거나 서책들을 난독하면서

인생에 대한 무상에 빠져 술로 밤을 지새는 경우가 많았다.

 

28세 때 제 4회 국전(國展)에서 '선소운(仙簫韻)' 이란 인물화로 대통령상을 수상하면서

그는 비로소 독자적인 채색과 여백의 미를 화면에 전개해 나갈 수 있었다.

 

 

<선소운(仙簫韻)>, 수묵채색, 180×150㎝,

박노수(藍丁 朴魯壽, 1955년 4회 국전에서 대통령상 수상)

 

지금도 그는 골프나 바둑이나 술과 텔레비전에 이르기까지 그림에 방해가 되는 일은 일체를 삼간다.

그의 취미는 일요일 등산하는 것과 난과 수석뿐이다.

난은 섬세하고 유연한 동양화의 선을 갖춘데다가 수수한 향기로 정신을 수려하게 정화시킨다는

차원에서 각별한 애정을 지니는 듯하다. 그외 그의 일상생활은 비교적 단조로운 편이다.

국전 대통령상 수상기념으로 그에게 남정(藍丁)이란 아호를 지어준 소전 손재형,

소설가 유주현과 교분을 나누었으나 그들은 고인이 된지 오래이고

지금은 서울대 시절의 스승인 월전(月田)과 시인 김춘수 정병욱 등과 담소를 즐긴다.

 

그의 결벽한 일면은 그의 개인전 팜플렛에는 반드시 이경성의 서문만을 고집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화단 일각에서는 이를 섭섭하게 여기는 이들이 있지만

이경성과는 이대교수로 함께 재직하면서 그의 제작의 내부까지를 일일이 파악하고 있다는 점에서

노평론가의 넘치거나 치우치지 않는 『남정화론』을 굳게 믿는 것 같다.

이경성은 남정의 작품을 '한마디로 격조의 예술'로 천명한다.

"품격이 높고 예술적으로 성숙되어 정신과 기술을 아울러 갖췄을 뿐만 아니라

북화적인 큰 스타일과 남화적인 정신세계가 어울려 새로운 한국화를 만들어냈다"고 말한다. 

 

그의 성격의 일면은 60년대 중반 일본 중국화풍을 모방한 국적불명의 그림들이 쏟아져 나오자

이를 한심하게 여긴 나머지 한 신문에 기고한 글만으로도 알 수 있다.

"우리의 것을 소중히 여기지 않고 남의 나라에서 시도하는 것에 관심을 보이며

이를 모방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은 '망국족자 상선자망기문화(亡國族者 常先自亡其文化)'

즉 나라와 민족을 망치는 자는 언제나 먼저 스스로 그 문화를 망친다." 는 내용이 그것이다.

이는 화단의 경각심을 촉구하여 지식 있는 많은 층의 호응을 받았었다.

그림도 그렇다. 누구라도 그의 그림을 보면 그것이 남정화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본다. 

 

한국적인 노송과 강안(江岸)의 야트막한 산들,

청결하게 빗어 넘긴 여인의 머릿결과 잔잔히 치켜 올라간 눈매, 소년의 외로운 등 모습과

목선이 긴 한국적인 비마(飛馬)는 한국적인 비감의 정서를 무위로 관조하고 있다.

돛단배의 돛과 선비의 취월창의, 멀리 지나는 여인의 치맛자락을 바탕색인 군청 비취록과는 달리

호박색이나 산호색으로 점을 찍어 청색 비단보에 싸인 별빛 같은 효과를 내는 것도

그만의 채색기교라 할 수 있다.

그의 색조는 초기에는 물기가 마르기 전에 발묵 채색하는 선염법을 쓰다가

피카소에 심취했던 젊은 시절은 되살려 검푸른 청남과 여명으로 영롱한 운기를 살려낸다.

이른바 오채가 깃든 먹과 쪽빛 섞인 청화색은

광활한 하늘로 배분하고 준열한 한 획의 선은 산의 기개로 과시된다.

이때 강을 사이에 둔 언덕은 붓의 영욕을 적멸한 피안이며 인물들의 표정에는 상락이 깃들여

정중동의 관념산수와 동중정의 실경 산수의 요소를 자연스럽게 함축시키고 있다.

'여기에 무한감을 수반하지 못하면 살아있는 그림이 될 수 없다'는 생각에서

그는 화면에다 우주로 통하는 공간을 설정하고 먹과 선으로 공간을 공략하여

여백과 색채가 어울린 기운생동을 성취해낸 것이다.

 

말하자면 색채를 화면에 부여함으로써 남정(藍丁)은

그곳에 반드시 존재돼야 할 바위나 산이나 사람을 만들어낸다.

이른바 모든 사물의 전화가 그의 날카로운 붓끝에서 창조되고

그렇게 창조된 사물은 영원한 예술로서 존속된다.

인위와 조작이 없는 '순도 높은 인품이 담긴 작품', 그리고 세련되고 치밀하게 계산된 공간처리와

평면감각을 극도로 추구하여 회화의 본질을 회복하고 있다.

이렇게 하여 그는 한국현대회화사상 우뚝한 봉우리 중의 하나로 서게 되었다.

 

 

"그의 작품은 북화적인 큰 스케일과 남화적인 정신세계 등이 잘 어울려서

새로운 한국화를 만들어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남정 작품이 주제는 지극히 한정되어 있다.

바위, 노송, 노인, 소년, 영모 그리고 독특한 양식화의 경로를 보이는데

그 양식화는 세련되고 계산된 공간처리의 결과라고 본다.

그는 색채를 화면에 부여함으로써 종이를 바위로 만들기도 하고, 사람으로 만들기도 한다.

말하자면 사물의 진화가 그의 붓끝에서 창조되고,

그렇게 창조된 사물은 영원한 산 밑에서 예술로서 존속된다.

그의 작품의 또 하나 특이한 면은 평면감각을 극도로 나타냈다는 것이다.

결국 그는 근대회화가 도달한 3차원적인 착각을 2차원적인 평면으로 환원시킴으로써

회화의 본질을 회복시켰던 것이다." (이경성, 미술평론가)

 

 

"그의 작품세계는 한마디로 말하면 고도로 세련되고 계산된 세계이면서

단순화되고 장식화된 예술세계인 것이다.... (중략) ...

대담하게 원색적인 설채(設彩)를 하고 있는 그의 그림을 보면 그의 강한 장식성을 쉽게 알 수 있다.

말하자면 남종문인화적인 정신세계와 북종화적인 장식세계를 넘나들고 있는 것이

남정의 예술세계인 것이다" (허영환, 미술평론가)

 

 

 

 

     

 

 

 

 

 

 

최순우 옛집 / 등록문화재 제 268호, 혜곡 최순우기념관

 

 

최순우 옛집은

미술사학자이자 前 국립중앙박물관장(제4대)을 지낸 최순우 선생(1916-1984)이

1976년부터 작고할 때까지 살았던 고택이다.

1930년대 지은 한옥으로 서울, 경기지방에서 많이 보이는

ㄱ자형 안채와 ㄴ자형 바깥채로 된 튼ㅁ자형 집이다.

 

선생의 손길이 곳곳에 담겨있는 아담한 안마당과 뒷마당에는

꾸미지 않은 한국미의 자연스러움이 담겨 있다.

 

선생의 본명은 희순(熙淳), 호는 혜곡(兮谷)으로 개성에서 출생하였다.

도자기와 전통 목공예, 회화사 분야에 많은 학문적 업적을 남겼으며,

우현 고유섭 선생과의 만남을 계기로

1943년 개성부립박물관에 입사하여 이후 평생 박물관에 재직하였다.

선생은 이 집에서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나는 내 것이 아름답다>와 같은 아름다운 글을 집필하였다.

 

한국내셔널트러스트에서 시민성금으로 매입한 시민문화유산 1호이며, 등록문화재 제268호이다.

현재 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에서 보전하며 혜곡 최순우기념관으로 운영하고 있다.

 

 

 

 

(1) 사랑방

 

- 최순우 저, <나는 내 것이 아름답다> 中

그 첫해 늦은 가을 달밤, 나는 옛일처럼 불을 끄고 호젓이 누워

동창에 비친 늙은 감나무 그림자를 바라보면서 애틋한 사람의 얼굴을 허공에 그려 보곤 했다.

아래 윗방에 각기 높직하게 자리 잡은 영창에 달빛이 너무나 가득해서

감나무 그림자는 마치 멋진 추상화처럼 구도가 잡혀 있었고,

달이 어울어감에 따라서 이 희한한 그림 아닌 그림 폭은 허전하게 지워져 가곤 했다.

이른 봄날이면 보라색 새벽노을이 이 영창에 물들어오기 마련이고

초여름 녹음이 짙어지기 시작하면 바야흐로 무성해지는 감나무 그늘에 가려져서

달그림자 없는 한여름을 지루해하기도 했다.

 

 

- 최순우 저, <나는 내 것이 아름답다> 中

고향집도 그러했고 지금의 내 방도 그러하지만,

미닫이의 창살은 용자살(用字)이 가장 정갈하고도 조용할뿐더러

황금율이 적용된 쾌적한 비례의 아름다움을 갖추어

온갖 잔재주를 부린 어느 완자창살보다 한 수가 높았다. ... 

말하자면 용자살창은 가장 단순하면서도 가장 세련될 수 있는 소지를 충분히 지니고 있다.

한국 사람들은 그것을 잘 알고 있었고 또 그 누구보다도 그 아름다움을 잘 가누어 왔음이 분명하다.

... 조선 목수들의 손으로 가누어진 한국 창살 무늬의 아름다움은

때로는 몬드리안의 작품들을 능가할 만큼 세련된 면의 분할을 적지않게 보여주었다.

 

 

(2) 뒷마당

 

뒷마당에는 최순우 선생이 가꾼 산나무들과 들꽃, 담장에는 운치를 더하는 담쟁이가 자라고 있다.

툇마루를 사이에 두고 뒷마당을 마주하는

안채의 벽면은 1개의 용자살문과 4개의 커다란 용(用)자 살창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내부에서 외부공간을 바라보는 시선이 담겨 있는 전형적인 조선말 선비집의 분위기를 풍긴다.

선생은 눈길이 잘 닿는 마당 가운데 백자 항아리를 두고 감상하였는데,

백자 뒤에 청죽을 심어 그 그림자가 백자에 비춘 정취를 즐긴 선생의 심미안이 돋보인다.

 

 

- 최순우 저, <나는 내 것이 아름답다> 中

자연의 아름다움이 결코 큰 덩치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뜰 앞 잔가지에 구슬진 영롱한 아침 이슬, 오솔길에 차분히 비에 젖은 낙엽,

서리 찬 겨울 달밤 빈 숲 잔가지에 쏟아지는 달빛,

예를 들자면 한이 없지만 고맙고 즐거운 자연의 아름다움을 갈피갈피 느끼면서

세상을 살아가는 낙이 젊음과 사랑의 생리 속에 속속들이 스몄으면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 ...

자연이나 조형의 아름다움은 늘 사랑보다는 외로움이고, 젊음보다는 호젓한 것이기 때문에

그 아름다움은 공감 앞에서 비로소 빛나며, 뛰어난 안목들은 서로 그 공감하는 반려를 아쉬워한다.

반려 없이 보는 아름다움은 때로는 아픔이며, 때로는 외로움과 호젓함이며, 때로는 그 의미를 잃는다.

  

 

 

 

 

 

 

 

 최순우 옛집 (등록문화재 제268호, 혜곡 최순우기념관)

 



나는 내 것이 아름답다

- 한국내셔널트러스트 시민문화유산 1호 '최순우 옛집'

 

 

첫눈에 눈을 사로잡는 화려함이나 눈을 부릅뜨고 들여다봐야 하는 근시안적인 신경질이 없으며,

거칠고 성글어보여도 한 걸음 뒤로 물러서 보면 시원하고 대범하면서도 담담하고 조촐하다.

- 최순우 : 나는 내 것이 아름답다 中 -

 

 

최순우 옛집’은

한국 문화재에 대한 깊은 애정과 뛰어난 안목으로

그 아름다움을 찾고 보존하는 데 일생을 바쳤던 미술사학자인 혜곡 최순우 선생이

1976년에 이사하여 작고할 때까지 살았던 집으로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서서>를 집필한 곳이기도 하다.

 ‘최순우 옛집’이 지금처럼 일반에 공개되기까지는

한국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위원회와

시민들의 자발적인 모금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2002년 ‘최순우 옛집’의 매각정보를 입수한

한국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위원회는

민간모금운동으로 그해 12월 매입을 완료한 후

수리, 복원 공사를 진행하였고 ‘최순우 옛집‘은 지금의 모습으로 다시 태어났다.
(한국내셔널 트러스트란 시민들의 자발적인 기증, 기부, 임대 및 모금을 통하여

보전가치가 있는 자연 및 문화유산을 확보한 후

이를 시민주도 하에 영구히 보전하고 관리하는 시민운동 단체이다.)

 

최근 모 CF를 통해 자주 듣게 된 말처럼

“집이 뭐죠?” 라고 묻는다면

‘최순우 옛집’을 다녀온 사람들은

아마도 “집은 휴식할 수 있는 곳, 편히 쉴 수 있는 곳”

이라는 답변을 할 것이다.

 

전통 한옥으로 조선말기 선비집의 운치가 그대로 남아있으며

아담한 안마당과 뒷마당에는 꾸미지 않은 한국미의 자연스러움을 찾았던

최순우 선생의 안목과 멋이 구석구석 배어있다.
햇살 가득 쏟아지는 앞마당, 최순우 선생의 여러 유품이 있는 안채,

뒤편으로 넓게 자리하고 있는 뒷마당의 소나무, 밤나무하며 이름 모를 꽃들까지

최순우 선생이 생전 이 집에 들인 사랑과 정성이 느껴진다.

하나하나 소박한 멋이 있는 소품들,

다시 찾아 편히 기대어 쉬고 싶은 ‘최순우 옛집’에서의 촬영을 위해서는

‘최순우 옛집’을 관리, 운영하고 있는 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에 문의하여야 한다.


- 위치 : 서울시 성북구 성북2동 126-20 (최순우 옛집)

- 글, 사진 : 이근철

 

 

 

 

 

 


한국미술사의 산실 - 최순우 옛 집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2동 126-20에 위치한 ‘최순우 옛집’은

최순우 선생이 궁정동에서 이곳으로 이사한 1976년부터

1984년 12월 16일 타계할 때까지 살았던 곳이다.

그후 선생의 부인과 따님의 가족이 2002년 11월까지 거주했고,

이해 12월에 이 집을 (사)한국내셔널트러스트에 팔게 되었다.

 

이유는 이 일대가 다세대주택으로 급격하게 바뀌어갔기 때문이었다.

이 집도 개발업자와 계약이 성사되어 팔리면 곧 빌라가 들어설 순간에 있었다.

그러나 정말 다행히도 이 집이 한옥으로 남기를 바랐던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사)한국내셔널트러스트가 이 집을 사서

여러 사람들의 고증을 통해 상당한 부분을 복원하게 된 것이다.

 

현재 이 집은 ‘혜곡 최순우 기념관’으로 등록되어 박물관으로,

차를 마시며 담소할 수 있는 시민들의 문화 공간으로,

(재)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의 사무실로,

또한 최순우 선생의 옛 자취를 기리는 장소로 활용되고 있다.

마당에 깔린 시멘트 블록을 걷어내고 흙과 마사토로 깔았으며,

처마 끝에 달은 함석 차양은 한옥의 미관을 고려하여 동판 차양으로 바꿨다.

안채의 안방은 선생이 생활하던 당시에는 3개의 방으로 나뉘어 있었고,

동편 1칸은 사랑방, 중간 1칸은 선생의 침실, 서편 1칸은 안방으로 사용했었다는 고증을 바탕으로

안방 부분의 동편 1칸과 중간 1칸의 사잇문 한 곳을 복원하였고,

동편 1칸은 사랑방으로 재현하여 안채 전체를 전시 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 집의 뒤편은 응봉에서 낙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으로,

이 능선을 따라 조선시대 서울의 성벽이 있다.

이 집은 성벽의 바로 바깥쪽에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이 집은 성벽을 바라보는 쪽으로 길이 나 있어 북향하도록 지어졌고

안마당보다 집 남쪽으로 있는 뒷마당이 더 넓다.

 

집 안에서 북쪽과 남쪽으로 있는 마당을 내다보면

선생이 자신의 안목으로 집 가꾸기에도 심혈을 기울였던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오히려 북향집의 특징을 살려 마당을 가꾼 흔적을 읽을 수 있다.

안마당 한가운데에는 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집을 지을 당시 주인이 그 자리에 있던 나무를 베지 않고 나무를 비켜 집을 지어,

안채와 바깥채가 나무를 둘러싸게 한 것 같다.

개발만 앞세우는 현대인이 따라가기 힘든 마음을 읽게 하는 곳이다.

사람이 만든 집과 자연이 더불어 살고자 한 우리 한국인 본래의 심성을 읽게 하는 마당이다.

이 안마당은 우물과 각종 석물로 꾸며져 있다.

뒷마당은 계절별로 피는 꽃나무들과 수목들로 가꾸어져

(산수유, 생강나무, 모과나무, 자목련, 대나무, 소나무, 떡갈나무, 단풍나무, 감나무 등)

시정의 시끄러움을 멀리한 또 다른 세계가 펼쳐지는 곳이다.

마치 자연 그대로의 야산을 옮겨놓은 듯한 분위기가 감도는 곳이다.

뒷마당 가운데에는 대나무가 심어져 있고, 그 옆에는 커다란 달항아리가 놓여 있다.

 

비가 올 때나 달이 떴을 때나

달항아리에 비친 대나무와 자연을 사랑방에서 감상할 자리를 마련한 것을 알 수 있다.

선생은 사랑방에서 달항아리와 그 속에 비치는 자연을,

툇마루에 걸린 달빛 넘어 간간히 내다보았을 것이다. 
 

최순우 옛집은 도심에 있지만, 집 뒤뜰을 바라보면

시정의 시끄러움에서 벗어난 별세계에 온 느낌을 준다.

 


한옥은 이웃하는 방과 방 사이의 미서기문이나 들어열개문을 열면 서로 트이게 되고,

또 외부로도 트여서 내외부 공간이 하나가 되는 특성을 가졌다.

이러한 공간은 자연과 사람과 공간이 하나가 되게 한다.


안마당 한가운데에 서 있는 나무 한 그루는 이 집을 짓기 전부터 이 자리에 있었다.

나무를 다치지 않고 집과 자연이 하나가 되게 한

선인들의 지혜와 삶의 자세를 배울 수 있는 곳이다.


사대부 선비가 지향하는 삶 중의 하나는 세속의 시끄러움에서 벗어나

인간 본연의 가치를 궁구하는 것이다.

뒷마당의 나무며 돌이며 달항아리는 조선시대 선비들이 추구한 세계를 읽게 해준다.

 

 - 글, 이상해 [ 한옥에살어리랏다 ① ]

 - 2007년 6월 14일, 문화재청, 문화재포커스,

 

 

 

 

   

 

 

 

 

<부채형 상평 열쇠패>, 19세기, 23.4×3㎝, 쇳대박물관

 

 

다섯가지 색의 당채가 입혀진 특대형급으로

가장 바깥 테두리에 상평통보 당일전(當一錢) 22개, 안쪽 줄에 15개, 가운데 13개 등

모두 당일전(當一錢) 모전으로만 50개가 연주(連珠)되었다.

 

모전(母錢)이란 통용전을 만들기 위해 미리 만든 돈으로서 일명 '번돈'이라고도 한다.

 

상평통보가 매달린 것을 나무열매에 비유하여

해마다 나무에 돈이 열려 쓰고싶은 대로 쓰고 부자가 된다는 '돈 낳은 열쇠패'

즉 '산전패(産錢牌)'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주전소에서 통용전을 만들던 거푸집으로 사용하다가 당채를 입혀 열쇠패로 만든 것으로도 보인다.

 

열쇠패에 사용하는 별전(別錢)은 양반들이 특별주문해 기념으로 모았던 일종의 장신구이다.

당시에는 이같은 별전에

과거에 합격하게 해달라거나 부부금슬이 좋아지도록 해달라는 소원을 써넣기도 하였다.

때때로 '부부금슬'을 쓴 별전을 혼수품으로 마련해주기도 하였다.

조선의 사대부 집에는 곳간이 많았는데 곳간 열쇠는 안방마님의 차지였다.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열쇠가 주렁주렁 달린 열쇠패를 건네주는 것은

집안살림을 물려주는 것을 상징하였다.

특히 우리나라의 열쇠패는

중국과 일본 그 밖의 다른 나라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하고 희귀한 실내장식 문화재이다.

 

 당일전 모전(1678년, 숙종 4)

 

 

 

 

 

 

 

 

 

 

 

월인석보(月印釋譜)

보물 745호, 목판본, 14권13책

 

 

 


'월인석보(月印釋譜)'는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과 '석보상절(釋譜詳節)'을 합하여

세조 5년(1459)에 간행한 불교대장경이다.

이 책은 '월인천강지곡'이라는 명칭으로 발행된 것과

'석보상절', 혹은 '월인석보'라는 명칭으로 발행된 3종류의 간행본이 있다.

 

석보는 석가모니의 년보 즉 그의 일대기라는 뜻이다.

조선 세종 28년(1446)에 소헌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아들인 수양대군(세조)이

불교서적을 참고하여 한글로 번역하여 편찬한 것이 곧 '석보상절'이다.

세종 29년(1447) 세종은 '석보상절'을 읽고 각각 2구절에 따라 찬가를 지었는데,

이것이 곧 '월인천강지곡'이다.

 

'월인석보'는 총 25권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현재까지 발견된 것으로는 처음 간행된 권 1, 2, 7, 8, 9, 10, 11, 12, 13, 14, 15, 17, 18, 19, 23, 25와

재간행된 권 4, 21, 22 등 총 19권이 있다.

 

책은 조선 전기 2대에 걸쳐 임금이 편찬, 간행한 것으로,

우리나라 최초로 불교서적을 한글로 번역한 책이다.

훈민정음(訓民正音) 이후 제일 먼저 나온 불경 언해서로

당시의 글자나 말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어서 

조선 전기 훈민정음연구와 불교학 및 국어사, 문헌학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아이스케키통

20세기, 78.3×42.5×53.3㎝, 서울시립대박물관 소장

 

 

 

 

목재에 쇠못과 쇠경첩(뚜껑 양 옆에 잠금고리)이 있다.

뚜껑과 몸체가 분리되고, 바닥에 낮은 다리가 있다.

양 옆 중간에 각목이 붙여져 있고, 윗면에 직사각형의 출입구멍(18×13)이 있다.

앞뒤에 붉은색의 페인트로 '케키, 하드, 입설당' 글씨가 쓰여 있다.

하단은 젖었던 듯 틀어져 있어 전체적인 상태는 좋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