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끼며(시,서,화)

욍희지의 집자비(集字碑)

Gijuzzang Dream 2008. 4. 9. 16:07

 

 

 

 왕희지(王羲之) 집자비석(集子碑)

 

 

집자(集子)의 사전적 뜻은 ‘문헌 등에서 필요한 글자를 찾아 모은다’ 이다.

집자(集子)는 서예의 역사 속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서예에서 말하는 집자는

특정인의 글씨를 뽑아서 한 작품의 글씨처럼 연결하여 만들어내는 작업을 일컫는다.

 

서예사 속의 명필(名筆)들 또는 존경받는 대상들의 주옥같은 글씨들을 주로 집자하였는데,

대개 집자한 글씨로써 비석을 세우는 경우가 많았다.

존경받는 최고 명필의 집자된 필적으로써

비석의 주인공의 정신을 빛나게 표현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까닭에

집자 비석을 만든다는 것은 단순히 비석을 세우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그런데 집자는 많은 시간과 인내력을 바탕으로 하는 몹시 어려운 작업이다.

일단 한 사람의 명필이 남긴 여러 작품들을 추적하고 수집한다.

그리고 이 필적들 속에서 내용에 마땅한 글씨들을 찾아 모아놓는 작업을 진행한다.

다음으로 각각의 크기에 맞도록 크기를 조정하는 작업이 이어진다.

그리고 나서 실제의 문장(원고)에 맞추어 가장 알맞은 글씨를 골라 뽑아 연결하는 작업이 이루어진다.

이때 글씨의 흐름이 자연스럽게 한 붓으로 쓴 듯하게 이어지도록 엮어야 하는,

이 작업은 매우 신중하게 이루어지며,

좋은 글씨를 선별하는 작업과 더불어 집자를 잘 되었는가의 여부 또한 이때 결정된다.

 

이런 과정을 거치는 까닭에 집자를 하고 이를 비석으로 새기는 데에

빠르게는 몇 년, 길게는 몇 십 년이 걸리기도 했다.

 

서예문화권의 고금을 통틀어 가장 위대한 명필로 추앙받는 왕희지(王羲之, 307-365)의 글씨는

대표적인 집자의 대상이었다.

왕희지(王羲之)는 중국 동진(東晋)때 인물이다.

왕희지의 집안은 동진의 명문 귀족가문으로 이 집안에서는 대대로 명필이 많았다.

또한 그의 아들 왕헌지(王獻之, 344-388) 또한 아버지에 버금가는 명필로

이들 전설적인 부자 명필은 ‘이왕(二王)’이라 불렸다.

 

동진은 서예의 역사상 최고의 성숙기를 구가하던 시기로,

<청담(淸談)>을 숭상하며 표일(飄逸)한 정신, 깨끗한 풍격을 추구하여

이를 글씨 예술에 그대로 진솔하게 표현될 수 있도록 연구하고 노력하는 분위기가 이루어져 있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왕희지는 문자를 가장 아름답고 품격 높은 예술로 승화시킬 수 있었고,

서예의 역사 속에서 서성(書聖)으로서 오늘날까지 추앙받고 있다.

 

왕희지는 위부인(衛夫人)과 같은 당시의 명필들로부터 글씨를 배웠으며,

진한대의 비석 등 옛 글씨 등 서예의 원류가 되는 자료들을 통해 자신의 글씨의 깊이를 다져갔으며,

이로부터 옛 사람들의 글씨에 얽매이지 않는 단계의 서예를 이룩하였다.

그리고 후대의 사람들은

그의 글씨를 유장한 아름다움이 깃든 품격 높은 기품이 서려있다 하여 끊임없이 흠모하여 왔다.

 

왕희지의 작품으로는 <십칠첩(十七帖)>, <낙의론(樂意論)>, <동방삭화찬(東方朔畵讚)>을 비롯하여

행서의 제일이라고 꼽는 왕희지 최고의 걸작 <난정서(蘭亭序)> 등에 이르는 이름 높은 글씨들이 있다.

그러나 그가 친히 쓴 필적은 남아있지 않으며,

오늘날 전하는 것은 당나라 때부터의 모본(模本)들이다.

 

중국 唐대에는 왕희지의 글씨를 깊이 사모하던 唐 태종(太宗)에 의해

이 시기의 명필들이 왕희지의 작품들을 많이 임모하였는데,

이 임모본들은 왕희지의 필의를 파악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왕희지 글씨로 만든 집자비석으로 가장 유명한 것은

행서로 된 대당삼장성교서[大唐三藏聖敎序, 통칭 집자성교서(集子聖敎序)라 함]가 있다.

 

대당삼장성교서(大唐三藏聖敎序, 탑본)

 

우리나라의 경우 통일신라, 고려시대 때 왕희지의 글씨로 된 집자 비석이 제작되었다.

무장사 아미타불을 만든 내용을 쓴 비석과 같이 불상을 모신 내력을 적은 경우도 있지만,

사림사 홍각선사 비석(沙林寺 弘覺禪師碑), 인각사 보각국사 비석(麟角寺 普覺國師碑)와 같이

고승선사(高僧禪師)를 기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 글씨들은 모두 행서이며, 왕희지 글씨의 원본이 전하지 않는 까닭에

이렇게 비석에 새겨진 글씨들은 그의 글씨를 이해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무장사 아미타불을 만든 내용을 쓴 비석(탑본)

 

무장사(䥐藏寺) 아미타불 조상비(阿彌陀佛 造像碑)

왕희지(王羲之) 행서 집자, 통일신라 801년 무렵 조성

  

이 깨어진 비석은 무장사(䥐藏寺)에 아미타불을 모신 내력을 적은 비석이다.

태종 무열왕(654-661 재위)이 삼국통일을 한 뒤

병기와 투구를 골짜기 속에 묻고 절을 세워

투구 무(䥐)’, ‘감출 장(藏)’ 자를 써 무장사(䥐藏寺)란 이름을 얻었다는 전설이 있는 무장사에,

        *** 투구(무) = (힘쓸 무, ) 아래에 (쇠 금, 金)이 있는 글자임.

소성왕(798-800 재위)의 왕비 계화왕후가 소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이 절에 아미타불을 만들어 모신 후 비석을 세웠다.

 

비석 조각은 홍양호(洪良浩, 1724-1802)와 김정희(金正喜, 1786-1856)에 의해 발견되었다.

홍양호는 이 비석의 글씨가 김육진이 왕희지 글씨체로 쓴 것으로 알았다.

이후 김정희가 이 비석의 조각들을 더 발견하고,

이를 중국의 옹방강(翁方綱, 1733-1818)에게 중요한 자료로써 소개하여 이를 고증, 감정하게 되었다.

그 결과 왕희지의 행서 글씨를 집자한 것으로 밝혀졌다.

 

무장사 비석의 글씨는 마치 한 붓에 쓴 것처럼 흐름이 자연스러워

‘집자(集子)’한 글씨라는 것이 무색할 정도이다.

왕희지의 글씨체를 연구하기 위한 중요자료인 이 비석의 글씨는

한국과 중국 서예사 속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인각사 보각국사 비석 탑본

 

인각사 보각국사비(麟角寺 普覺國師碑, 榻本)

왕희지 행서, 집자, 고려 1295년

 

인각사 보각국사 비석은

<삼국유사(三國遺事)>를 쓴 보각국사(普覺國師) 일연스님(釋一然, 1206-1289)을 기리는 비석이다.

일연스님은 인각사(현재 경북 군위군에 있음)에서 <삼국유사>를 집필하였다.

이 비석은 왕희지(王羲之)의 행서(行書)를 집자한 대표적인 집자비석이다.

이 비석은 임진왜란 때 크게 파손되었고,

남은 비석 조각 역시 탑본을 너무 많이 하여 글씨 면이 마멸되었다.

2006년 일연스님 탄신800주년을 기념하여 비석을 복원하였다.

- 박성원, 국립중앙박물관 미술관 서예실 학예사

- 국립중앙박물관 큐레이터와의 대화, 2007년 11월7일

 

 

 

 

 

 

 

 

- The Letter / Andante 1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