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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화(佛畵) - 조선후기 불교회화의 이해

Gijuzzang Dream 2008. 4. 9. 00:13

 

 

 

 朝鮮後期 佛畵의 理解

 

 

김정희(원광대학교 고고 · 미술사학과 교수)

 

 

불교회화(佛敎繪畵)란 불교의 교리를 시각적으로 표현한 그림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 불교의 수용과 함께 불화가 제작되기 시작하여

난해한 교리를 알기쉽게 대중들에게 전해주는 신앙생활의 한 방편으로서 뿐 만 아니라

사원의 장엄을 위한 수단으로 불교미술사상 큰 역할을 하였다.

 

삼국시대 이래 수많은 작품들이 조성되었지만 현재 남아있는 것은 대부분 고려후기 이후의 것들이며,

그중에서 조선후기의 불화가 가장 많이 남아있다.

조선후기의 불화는 한 사찰에 적게는 몇 점에서부터 많게는 수십점, 수백점씩 남아 있으므로

전국적으로 따진다면 그 수는 엄청나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는 먼저 조선후기 불화의 조성배경과 내용 및 성격에 대하여 살펴보고

양식적 특징을 간단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1. 조성배경

  

16세기 말의 임진왜란과 17세기 중반의 병자호란 등 40여 년 간에 걸친 외국과의 전쟁은

전국을 초토화시킬 정도로 그 폐해가 심각하였다.

그중에서도 특히 전국의 사찰은 승병(僧兵)의 본거지였던 까닭에 가장 극심한 피해를 입었는데

많은 사원들은 이 기간 동안에 대부분 불타버렸으며, 수많은 불교문화재들이 약탈, 방화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승병들의 뛰어난 활약으로 인하여

조선전기의 강력한 억불정책은 다소 완화되었고

전란 중 소실된 사찰들은  숙종대 이후 대부분 중건 또는 중창되었다.

 

사찰의 활발한 조영에 따라 불교미술도 일대 조성 붐이 일어나

각 분야에 걸쳐 대규모의 불사(佛事)가 행해졌는데, 전각의 규모가 더욱 커지고 종류도 다양해지면서

그 안에 봉안하는 불교회화 역시 활발하게 조성되었다.

 

조선후기의 사찰의 전각배치와 전각 안의 불화배치를 보면

전각 안에는 적게는 몇 점에서 부터 수십 점에 이르는 불화들이 봉안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주불전에는 상단탱화(上壇幀畵)에서 하단탱화(下壇幀畵)에 이르기 까지

다양한 성격의 불화들이 한 곳에 봉안되어 중심전각으로서의 면모를 잘 보여준다.

그런데 주불전(主佛殿) 중에서도 대규모의 전각에는

삼신불화(三身佛畵: 비로자나불화毘盧遮那佛畵, 석가불화釋迦佛畵, 노사불화盧舍那佛畵) 내지

삼세불화(三世佛畵: 석가불화釋迦佛畵, 아미타불화阿彌陀佛畵, 약사불화藥師佛畵)를 봉안하는 것도

이 시기에 나타난 특징 중의 하나이다.

 

한편 조선후기에는 조선전기까지 후불화(後佛畵: 불상의 뒤에 봉안하는 불화)의 주류를 이루던

벽화의 제작은 거의 사라지고 점차 간편한 탱화를 후불벽에 걸어 예배하는 경향으로 변하였다.

후불벽에 벽화를 그려 예배화로 삼은 예는

선운사 후불벽화(1840년)를 제외하고는 별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데,

특히 이 벽화는 약사불, 비로자나불, 아미타불의 후불벽화가 전각을 압도하고 있어

예배화로서의 장중함과 숭고한 분위기를 짙게 풍기고 있다.

 

주불전의 예배화로서의 벽화제작은 거의 사라졌지만

후불벽의 뒷면에 관음보살도(觀音菩薩圖)를 그리거나,

좌우 측면벽에 다양한 주제를 벽화로 그리는 일,

전각 내부의 벽면에 나한(羅漢)이나 비천(飛天)같은 주제의 벽화를 그리는 일은

여전히 성행하여 오늘날까지도 우수한 작품들이 많이 남아있다.

 

그러나 벽화는 제작과정의 복잡성과 건축의 조형에 따라 화면의 구조가 제한을 받게됨에 따라

제작은 점차 줄어들었고, 대신 제작이 간편한 탱화가 후불화의 기능을 대체하였다.

 


2. 불화의 주제 및 내용

  

조선후기에는 거의 모든 주제의 불화들이 조성되었는데,

그중에서 중요한 것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석가불화(釋迦佛畵)

석가모니 부처님이 영축산(靈鷲山)에서 설법하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불교를 창시한 분이므로 불화 중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이자

가장 널리 그려진 그림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석가불화의 종류에는

석가독존도(釋迦獨尊圖) · 석가삼존도(釋迦三尊圖) · 석가오존도(釋迦五尊圖)

· 석가16나한도(釋迦十六羅漢圖) ·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 등 예배도의 형식이 있는가 하면,

석가모니의 전생을 그린 본생도(本生圖, Jataka),

석가모니의 일생을 8폭으로 그린 팔상도(八相圖) 등도 있다.

이 중 팔상도는 석가모니가 태어나서 입멸(入滅)할 때까지의

주요한 사건들을 여덟가지 장면으로 압축하여 표현한 것으로,

도솔래의(兜率來儀) · 비람강생(毘藍降生) · 사문유관(四門遊觀) · 유성출가(踰城出家)

· 설산수도(雪山修道) · 수하항마(樹下降魔) · 녹원전법(鹿苑轉法) · 쌍림열반(雙林涅槃) 등이다.

 

조선후기에는 대웅전(大雄殿)의 후불탱화(後佛幀畵)로 영산회상도가 주로 그려졌다.

 

 ② 아미타불화(阿彌陀佛畵)

서방 극락정토를 주재하는 아미타불을 그린 그림으로,

아미타독존도(阿彌陀獨尊圖) · 아미타삼존도(阿彌陀三尊圖) · 아미타칠존도(阿彌陀七尊圖)

· 아미타구존도(阿彌陀九尊圖) · 아미타내영도(阿彌陀來迎圖) · 관경변상도(觀經變相圖)

· 아미타극락회상도(阿彌陀極樂會上圖) 등이 있다.

 

이중 아미타내영도는 아미타불이 여러 권속들과 함께 내영하여

임종자를 맞이하는 장면을 그린 것으로 고려시대에 특히 많이 그려졌다.

호암미술관소장의 아미타삼존내영도가 유명하다.

 

관경변상도는 아미타삼부경(阿彌陀三部經) 중 하나인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의 내용을

도상화(圖像化)한 것으로 본변상(本變相)과 16관변상(16觀變相)의 두 종류가 있다.

조선후기에는 극락전의 후불탱화로 아미타극락회상도가 주로 그려져 봉안되었다.

 

 ③ 비로자나불화(毘盧舍那佛畵)

비로자나는 광명의 부처님으로,

부처님의 진리가 이 세상 어디에나 두루 비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화엄경>의 본존으로 널리 신앙되었으며, 밀교에서는 대일여래(大日如來)라고 칭해진다.

 

석가모니와 같이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을 협시로 하고 있으며,

두손을 마주 잡은 지권인(智拳印)을 결하고 있다.

 

비로자나독존도(毘盧舍那獨尊圖) · 비로자나삼존도(毘盧舍那三尊圖)

· 비로자나불회도(毘盧舍那佛會圖) · 화엄경변상도(華嚴經變相圖)의 형식이 있으며,

조선후기에는 대광명전(大光明殿) · 비로전(毘盧殿) · 화엄전(華嚴殿)에 봉안하였다.    

 

 ④ 약사불화(藥師佛畵)

약사여래는 중생의 질병과 번뇌를 치유해주는 부처님으로 유리광정토(琉璃光淨土)를 주재한다.

전쟁이나 전염병 등이 있을 때 특히 약사여래에 대한 신앙이 성행하였는데,

약사여래는 손에 약합(藥盒)을 든 모습으로 표현된다.

 

불화의 종류에는 약사독존도(藥師獨尊圖) · 약사삼존도(藥師三尊圖) · 약사불회도(藥師佛會圖)

등이 있다. 조선후기에는 약사전의 후불탱화로 약사불회도가 봉안되었다.

 

 ⑤ 관음보살도(觀音菩薩圖)

아미타불의 왼쪽 협시보살로서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인기있었던 보살 중의 하나인 관음보살을 그린 그림이다.

고려시대에는 주로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의 형상으로 그려졌는데,

대나무가 솟아있는 암벽에 흰 사라를 걸친 관음보살이 앉아있고

오른쪽 바위에는 버드나무 가지를 꽂은 정병(淨甁)이 놓여있으며

관음보살의 건너편 아래쪽에는 선재동자(善材童子)가 무릎을 꿇고 합장하고 있는 형상의 관음도이다.

 

이외에 십일면관음도(十一面觀音圖) · 천수천안관음도(千手千眼觀音圖)

· 관음32응신도(觀音三十二應身圖) · 준제관음도(准提觀音圖) 등도 있는데,

조선후기에는 주불전의 후불벽에 많이 그려졌다.

 

 ⑥ 지장보살도(地藏菩薩圖)

지옥에 빠진 중생을 구제해주는 명부의 구세주인 지장보살은

특히 외우내환이 잦았던 고려시대에 큰 인기를 끌었으며,

조선시대에는 명부전(冥府殿)의 주존으로 신앙되었다.

 

종류는 지장독존도(地藏獨尊圖) · 지장삼존도(地藏三尊圖) · 지장과 권속그림

· 지장시왕도(地藏十王圖) 등이 있는데, 조선후기에는 명부전의 중앙에 지장보살도를 봉안하고

좌우벽에 시왕도를 봉안하는 형식이 크게 유행하였다.

 

 ⑦ 감로왕도(甘露王圖)

우란분경변상도(盂蘭盆經變相圖)라고도 한다.

음력 7월 15일 죽은 조상을 위하여 지내는 우란분재(盂蘭盆齋)의 장면과

인간이 현실세계에서 겪는 여러 가지 고통상, 아귀도(餓鬼道)의 모습,

아미타불이 내영하여 중생을 구제하는 장면 등이 표현된다.

 

우리나라에서만 제작된 불화로서 감로왕도에는

제작 당시의 백성들의 습속과 생활장면 등이 생생하게 표현되어 불화 중의 풍속화라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 특히 18, 19세기에 많이 그려졌다.

 

 ⑧ 나한도(羅漢圖)

나한은 덕높은 고승을 통털어 일컫는 말로서

주로 부처님의 제자 중 덕이 뛰어난 16나한, 오백나한 등이 대표적이다.

고려시대에는 호불정책으로 스님들에 대한 존경심이 높았고

이에 따라 나한에 대한 신앙도 크게 성행하여 나한재가 활발히 이루어졌다.

조선후기에는 나한전(羅漢殿) 또는 응진전(應眞殿), 오백나한전(五百羅漢殿) 등에 주로 봉안되었는데,

16나한도가 대부분이다.

 

 ⑨ 신중도(神衆圖)

불법을 수호하고 옹호하는 신들을 그린 그림으로서

제석도(帝釋圖), 제석 · 천룡도(帝釋·天龍圖), 104위신중도(104位神衆圖), 금강 · 천룡도(金剛·天龍圖)

등 다양하다. 조선후기에는 사찰을 수호하고 전각을 수호하는 신중도가 특히 많이 그려졌는데,

18, 19세기 이후의 작품들이 주로 남아있다.

 

이외에도 조선후기에는 칠성도(七星圖)를 비롯하여

산신도(山神圖), 독성도(獨聖圖), 조사도(祖師圖) 등도 제작되었다.

 


 3. 양식적 특징   

   

조선후기의 불화는 양식변천에 의해 대략 2기로 나눌 수 있다.

1기는 양란을 겪은 후 새로 사찰이 건립되는 1650년 경부터 1800년에 이르는 기간이고,

2기는 1800년 이후 1910년까지의 시기이다.

 

 1기는 조선불화의 전형양식이 정립되는 시기로서,

조선조 불화 중에서도 조선적인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난 때라고 볼 수 있다.

구도는 권속(眷屬)들이 본존(本尊)을 둥글게 에워싸는 군도형식(群圖形式)이 완전히 정착되어,

화면의 가장자리에  본존의 설법을 옹위하는 四天王을 배치하고

본존의 주위에는 보살상(菩薩衆)과 청문중(聽聞衆), 팔부중(八部衆) 등을 배치하는데,

청문중과 보살중은 적게는 몇명에서 부터 많게는 수십명에 이르기까지 좌우대칭으로 묘사하고 있다.

 

인물의 형태는 건장하면서도 원만한 형태가 주류를 이루는데,

1649년 보석사 괘불(掛佛)의 경우,

항마촉지인(降魔觸指印)에 결가부좌(結跏趺坐)한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의 근엄한 얼굴과

당당한 상체가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여기에 표현된 뾰족한 肉계와 나발(螺髮), 큼직한 寶珠, 작은 코와 입에 비해 유난히 큰 눈,

도식적인 귀의 모습 등은 전형적인 당시 불상의 특징으로서,

불상의 얼굴과 상체, 하체 등을 마치 큐빅과도 같이 분절되고 각지게 묘사하는 수법은

조선후기 동안 불상, 불화에 일관되게 적용되었다.

  

색채는 다양하면서도 화려해졌다.

1653년의 화엄사 괘불, 1683년의 도림사 후불탱화 등 17세기 후반기의 불화에서는

색채가 매우 밝고 투명하게 설채되었는데,

특히 화엄사 괘불에서는 붉은색과 녹색이 밝고 연하게 채색되어

거의 포가 비칠 정도의 색감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18세기 중반 이후에는 바탕과 광배 등에 녹색을 두드러지게 사용하고

거기에 감홍색을 배합하는 등 강렬한 색 대비를 보여준다.

다소의 차이는 있지만 녹색과 홍색이 주조색을 이루면서

황토색, 검정색, 금니, 하늘색, 흰색 등을 배합하는 것이 이 시대 설채법의 특색이 아닌가 생각된다.

보관, 옷깃, 홀,  법의의 일부 등을 제외하고는 金泥의 사용이 극도로 제한된 것도 특색이라 할 수 있다.

   

2기에 해당하는 19세기에 들어서면서 불화에 나타나는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역시 구도이다.

대부분의 불화에서는 18세기와 마찬가지로 본존을 중심으로 하여

권속들이 둥글게 에워싸는 군도형식(群圖型式)이 가장 기본을 이루게 된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불화의 규모가 小形化됨에 따라 일부 권속이 생략되는 한편,

일부에서는 작아진 화면에 오히려 전보다 많은 권속들을 표현하므로써

상대적으로 화면은 더욱 복잡해지는 양상을 보이게 된다.

권속의 간략화 현상은 후불탱화에서 두드러지며,

일부 佛, 菩薩畵 내지 神衆畵에서는 화면이 매우 복잡해지는 특징을 보인다.

 

이 시기에는 18세기 불화에서 보이던 둥글고 원만했던 인물의 모습은 점차 형식화되고

현실적인 모습으로 변모되어 갔으며,

신체의 표현은 인체 비례와 맞지않아 우스꽝스럽게 보이는 것이  많다.

얼굴은 전보다 더 가늘고 길어졌으며, 아주 작은 입이 얼굴 한가운데로 몰려있어

중생을 구제하는 자비로운 불, 보살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어졌다.

 

대체로 신체는 세장한 편이지만 탄력이나 量感이 줄어들었다.

그런데, 1880년대를 전후하여 경기도 일대에서는

권속들의 얼굴에 음영(陰影)을 표현하는 기법이 유행하여 주목된다.

즉 눈주위라든가 코부분, 뺨부분을 짙게 칠하여 움푹 들어간 느낌을 주며,

얼굴 골격을 유난히 강조한 불화들이 많이 제작되었는데,

이것은 조선후기에 이르러 서양화법이 전래되면서 전통적인 표현법에도 영향을 끼친 것으로 생각된다.

   

색채는 적색과 녹색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면서 전반적인 색의 분위기를 이끌어가던

18세기 불화에 비해, 19세기는 전반적으로 채색이 어둡고 짙어지는 경향을 보인다.

적색과 녹색 또한 전처럼 밝고 명랑한 색조가 아니라 두껍게 덧칠하여 탁하면서도 무거운 느낌을 주며,

검은색이라든가 고동색, 명도가 높은 청색의 빈번한 사용도

불화의 고상한 품격을 떨어뜨리는 요소가 되기도 한다.  

金泥의 사용도 빈번해졌는데, 특히 19세기 후반에 흥천사, 정수사, 칠장사 등 경기도 일대에서 제작된

불화에서는 본존의 身光 전체를 금니로 채색하여 화려하면서도 다소 답답한 느낌이 든다.

 

19세기 말에 이르면 호분(胡粉)을 섞은 청색을 많이 사용하여 화면 자체가 탁해지면서

한편으로는 격조없이 타락해버린 느낌을 준다.

청색은 18세기 말부터 사용이 늘어나기 시작하는데

명도가 높은 색을 칠하여 다른 색들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두드러져 보인다.

 

더구나 20세기 초의 작품에 이르게 되면

불화의 주조색이 적색과 청색으로 바뀐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청색의 사용이 많아졌다.

필선은 더욱 경직되어 더 이상의 유려한 필치는 볼 수 없게 되었는데,

필선은 이제 더 이상 인물이나 사물의 윤곽을 정의하는 선이 아니라

단지 채색을 하기 위한 밑선으로 바뀐 듯한 느낌이 든다.

  

이상에서 간단하게나마 조선후기 불화의 조성배경과 양식적 특징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유교가 국시(國是)였던 시대에 민중들의 발원(發願)과 시주(施主)에 의하여 조성된

조선후기의 불화는 양식상으로는 고려불화나 조선전기 불화에는 못미쳤지만,

화원(畵員)과 文人士大夫가 주도해 나갔던 조선후기 회화사에서

민중의 회화로서 발전하였다는 점에 의의를 둘 수 있으며,  

그 엄청난 양으로 볼 때 가히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 장 프랑스와(Jean Francois) 연주 / 'Pour El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