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종교 나철 ① 한얼은 조선 옛말에 대종이라 했다 홍암 나철. 무악재 너머 인왕산의 북쪽 얼굴이 연이어 보이는 홍은동 산 위에 대종교 총본사가 있다. 교당은 재개발을 앞둔 산 아래 마을의 모습만큼 낡고 지쳐 있다. 일요일이면 50명가량 신도가 모여 종교행사인 경배를 하니 아직까지 살아 있는 종교로 맥을 지켜나가고 있으나 날이 갈수록 쇠약해지고 잊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이 정체성을 잃지 않고 대한민국이 광복할 수 있었던 바탕에는 대종교의 선구자들이 걸었던 고초가 있었다. 대종교를 빼놓고는 독립운동사를 말할 수 없는 정도의 비중을 지녔다. 북로군정서를 만들었고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으며 상해임시정부의 주축이 됐고 조선어학회사건을 일으킨 근간에 대종교가 있다. 29세 때 문과에 장원급제했다. 승정원에서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으로 벼슬을 시작해 왕의 곁에 밤낮으로 머물며 언행을 적는 기거주(起居注)를 지냈고 권지부정자를 거쳤다. 상당한 고위직을 지낸 것이다. 고종은 나철에게 관복과 말을 하사할 정도로 그를 총애했다. 왕은 세 번이나 반려한 끝에 허락했다. 후에도 징세서장(徵稅署長)으로 임명했지만 거절한 채 10년간 고향 벌교로 낙향하여 지냈다. 서울로 돌아와 비밀단체 ‘유신회(維新會)’를 만들어 항일 애국계몽운동에 나선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매국노인 5적을 처단하자는 ‘간신의 목을 베는 글’을 남기고 폭탄을 보냈다. 글의 내용은 절절하다. “여러분, 진실로 자유를 사랑할 수 있는가. 청컨대 결사의지로 이 5적을 죽이고 국내의 병폐를 없앤다면 우리와 자손들은 영원히 독립된 천지에서 숨을 쉴 수 있으리라. 그 성패가 오늘의 할 일에 달려 있으며 여러분의 생사 또한 여러분에게 달려 있다. 재주 없는 인영이 이러한 의무를 주창함에 눈물을 흘리며 피가 스미는 참담한 마음으로 엎드린다. 피가 뛰며 지혜와 용기를 갖춘 여러분의 면전에 이 뜻을 내놓는다.” 그러나 의거가 실패하고 나철은 자수하여 10년 유배 형을 받았다. 귀양살이 넉 달 만에 고종은 특사를 내려 그를 풀어줬다. 서울 홍은동에 있는 대종교 총본사 나철 비와 홍은단 비석 나철의 민족운동은 애국계몽운동으로 출발했다. 그는 매국노 척결에 앞섰다가 한일병합 후 일본으로 건너가 외교 경로를 통해 독립을 주장했다. 그마저 실패하자 민족 얼을 세우는 일에 나선다. 대종교는 그 일환이다. 1904년에 길에서 만난 백봉신사(白峯神師)라는 노인에게 예부터 전해져온 ‘삼일신고(三一神誥)’와 ‘신사기(神事記)’를 받았다는 것이다. 백봉신사나 두일백 모두 백두산에서 온 도인이라 한다. 나철은 이윽고 대종교를 포교했다. 재동에 초가집을 모시고 제사를 올리니 1909년 정월 보름날을 대종교의 중광절(重光節)로 삼는다. 창교라 하지 않고 중광이라 한 것은 단군의 옛 가르침을 다시 펼쳤다는 뜻이다. 대종교 불허에 항의하는 내용이었다. “대종교는 곧 옛적에 처음 세운 한얼 교문이다. 한얼은 조선 옛말에 대종이라 했다. 이제 믿는 무리를 데리고 아사달메(구월산)에 한님 한배께서 한울로 오르신 곳에 와서 한얼께 제사하는 의식을 삼성사당에서 공경히 행한다.” 나철이 처음 내세운 교의 이름은 단군교였다. 교세가 늘면서 친일세력이 섞여들자 대종교라 고쳤다. 대종이란 밝고 큰 옛사람인 한얼이니 단군을 뜻한다. 단군을 모신 대종교 회당 천궁. 5000년 역사에 밝은 얼을 가진 문화민족임을 널리 표방하고 나섰다. 단군 시대의 역사를 기산하여 서기전 2333년에 124년을 더해 단군교의 원년인 천신강세기원(天神降世紀元)을 삼았다. 교직을 만들고 자신은 교주에 해당하는 도사교(都司敎)에 취임한다. “대종교에서 도사교 나철 주간으로 단군개천일 경하식(檀君開天日慶賀式)이 거행되다” 라는 기사가 실릴 정도로 적극적인 대외활동을 펼쳤다. 첫째는 공경으로 한얼을 받들 것(敬奉天神)이며, 둘째는 정성으로 성품을 닦을 것(誠修靈性)을 말한다. 셋째는 사랑으로 겨레를 합할 것(愛合種族)이며, 넷째로 고요함으로 행복을 찾을 것(靜求利福)을 가르친다. 다섯째로는 부지런히 살림을 힘쓸 것(勤務産業)을 권하고 있다. 즉 겨레의 얼을 받들어 성품을 닦고 겨레를 위하며 행복하게 산업에 힘쓰라는 것이다. 현실초월적인 종교관보다 민족 중심의 생활 윤리에 더 가까운 가르침이다. 나철은 독립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지침을 전하려 했다. 절대자에게 매달리며 기복하는 신앙보다 자신의 내면을 주목하고 본성을 회복하는 자력신앙의 가르침를 펼친 것이다. 초기부터 요주의 대상이 됐다. 일제는 후에 대종교의 단군 중심 역사관에 대응하여 식민사관을 조장하여 단군을 철저히 허구의 신화적 사실로 치부해버린다. 일제의 집요한 노력 끝에 예부터 전해져온 신시시대의 역사는 단지 곰과 호랑이가 등장하는 설화 중심의 이야기로 변질하고 말았다. 종교단체라기보다 항일구국의 결사체로 대종교를 파악한 것이다. 종교단체로 인정하지 않고 단속과 제재가 계속되자 나철은 1914년에 간도의 화룡현 평강상리사 삼도구로 본사를 옮긴다. 대종교가 1912년부터 만주에 파견하여 청산리 일대에서 터를 잡고 있다는 사실을 보고하고 있다. 대종교인들은 집회를 하며 학교를 세우고 반일을 조장하는 요주의 단체라는 것이다. 초급학교와 중등학교를 세우고 학생을 모아 조선의 말과 역사와 문화를 가르쳤다. 만주 일대의 대종교세력은 후일 북로군정서를 만들고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항일무장투쟁의 주축이 된다. 단군과 관련한 민족의 성지를 두루 순례했다. 강화 마니산의 제천단과 평양의 숭령전을 찾아 나섰다. 만주에 터를 잡은 것도 민족의 성산인 백두산을 찾은 후 그 아래 삼도구에 터를 잡아 본사를 옮겨 교당을 만든 것이다. 대종교를 종교로 공인받는 것은 일제의 탄압을 피해 합법적 기반을 만들기 위해 반드시 필요했다. 그러나 총독부는 포교 규칙을 만들고 대종교를 종교로 인정하지 않았다. 모든 활동은 법적으로 금지됐다. 그는 대종교를 종교로서 민족에게 펼치는 뜻을 드러내고 있다. “유대가 망하되 예수의 도는 점점 떨치고 인도가 쇠잔하되 석가의 도는 더욱 일어났다. 만일 한국의 옛교로서 자유를 허락하지 않는다면 공법에 반드시 항거하리니 또한 애달프지 않겠는가. 오직 크신 한님께서 밝으시게 아래에 이르시니 한얼께 공경하면 경사로써 나리시고 한얼께 게을리 하면 재앙으로써 내리실 것이다.” 그리고 종교를 통해 민족의 고난을 이겨내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대종교는 한민족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자주독립국가 건설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일제의 식민화정책과는 근본적으로 병립이 불가능합니다. 민족의 자주성을 일깨우고 있었던 독립운동 지도자의 다수가 실제 대종교인이었습니다. 나철은 종교를 통한 민족의 독립을 실천했습니다.” 이후 나철은 일제의 탄압에 맞서서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을 펼친다. 대종교가 새로운 근거지로 삼은 만주는 대종교활동과 독립운동의 적격지였다. 독립을 위해 총을 든 대종교 교도들의 모습이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 2008 04/08 뉴스메이커 769호 [한국의 창종자들] - 김천 , 객원기자 mindtemple@gmail.com
‘단군의 가르침을 펼친다’는 뜻으로 처음엔 단군교라 칭해
대종교는 한 번도 외적인 영화를 누린 적이 없다.
대종교를 일으킨 나철(羅喆, 1863~1916)은
29세 때 문과에 장원 사관벼슬
나라가 기울자 벼슬에서 물러나려 하니
러·일전쟁이 일어나고 한일의정서가 체결된 1904년 조선의 위기를 느낀 나철은
나철의 일대기를 적은 김교헌의 ‘홍암신형조천기(弘巖神兄朝天記)’에는 백두산 도인들로부터 단군의 가르침을 얻었다고 적혀 있다.
국운을 되찾으려 동분서주하다가 1908년 구국운동을 펴기 위해 일본 도쿄로 갔을 때 숙소를 찾아온 두일백(杜一白)에게 다시 단군의 가르침을 펴는 일을 사명으로 삼으라는 가르침을 받았다.
나철은 순절 직전에 조선총독 데라우치에게 글을 남겼다.
일제, 항일구국 결사체로 여겨
대종교란 한얼, 즉 단군 이래 계속되어온 민족정신이라는 주장이다.
대종교는 처음부터 활발히 활동했다.
대종교 중광 이듬해인 1910년 11월 2일자 매일신보에는
처음 나철이 교를 세우며 폈던 다섯 가지 종지는 지금도 계율로 지켜지고 있다.
민족을 내세우고 일본보다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며 민족 얼을 되찾자는 대종교는
일제는 초기부터 불온세력으로 감시하며 갖가지 제약을 가하고 있었다.
1914년 5월 13일 만주 헌병대에서 보고한 ‘간도시찰현황’은
간도가 민족의 잃어버린 땅이라는 사실과 맞물려
나철은 자신의 종교관을 ‘신리대전(神理大全)’에 고스란히 담았다.
만주일대서 북로군정서 만들어
나철이 심혈을 기울였던 것은 대종교의 체계를 세우는 일이었다.
앞서 적은 조선총독 데라우치에게 주는 글에서
대종교는 불교나 기독교처럼 보편적인 종교이며 엄연히 한국의 옛 종교라는 것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학대학원 정영훈 교수는 일제와 대종교의 관계를 이렇게 평가했다.
탄압은 곧 저항으로 이어진다.
② 한얼은 조선 옛말에 대종이라 했다
대종교 나철
1918년 대한독립선언서 선포, 3·1독립선언 이끌어내
나철의 구월산 여행에 동행한 대종교 간부들. 앞줄 왼쪽 두 번째가 나철. |
역사를 기억하는 민족은 미래의 활로를 잃지 않는다. 나철은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을 지냈다. 그가 민족의 활로를 역사에서 찾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민족의 근원을 돌아보고 얼을 되새기는 일 자체가 나철과 대종교인들에게는 절실한 독립운동이었다.
그는 단군 중심의 신앙과 종교를 역사 속에서 찾아냈다. 나철은 대종교의 대의를 담은 중광가(重光歌)에서 교의 이름을 두고 이렇게 노래한다.
“내리내리 한배빛. 대천교는 부여에, 승천교는 신라에, 경천교는 고구려, 대도진종 발해에, 임검교는 고려에, 주신교는 만주에.”
단군의 가르침과 종교가 역사 이래 한 번도 끊이지 않고 이어져왔다고 그는 파악했다. 민간신앙 속에 퍼져 있는 삼신신앙도 그 흔적이라는 것이다.
서일 · 신규식 · 이동녕 · 이상설 참여
중광가는 기자(箕子) · 비류왕 · 해모수 · 고주몽 · 박혁거세 · 동명성왕 · 부여온조 등 민족사의 영웅들도 단군의 맥을 이었다고 노래한다.
나철은 민족정신을 잃지 않았을 때 겨레와 나라가 발전했으나
불교와 유교의 외래 종교가 들어와
고유의 얼과 조상을 섬기지 않음으로 해서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우리의 종교를 되찾는 것은 민족의 번영으로 이어진다는 주장이다.
사대주의를 털어버리고 우리 얼로 돌아가자고 했다.
1914년 대종교 총본사가 간도로 이주한 후
나철은 백두산을 중심으로 영역을 나누어 동남서북 지역을 총괄하는 사도본사(四道本司)를 세운다.
또한 중국·일본·유럽·미주지역을 아우르는 외도교계도 정했다.
각 본사의 책임자는 그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민족운동가들이다.
동만주에서 연해주를 총괄하는 동도본사는 서일이 맡았고,
남만주에서 산해관까지 이르는 서도본사는 신규식과 이동녕이 책임자가 됐다.
이상설은 북만주에서 만주리까지 총괄하는 북도본사를 맡았다.
한반도 전역은 남도본사의 강우가 책임졌다.
조직을 갖추자 대종교는 간도에 이주해온 조선인 사이에서 급속도로 번져갔다.
교도 수가 30만 명에 이르고 조선인들의 중심이 되자 감시와 탄압이 뒤따랐다.
포교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1914년 간도 화룡현의 중국인 지사는 대종교 해산령을 내리기도 했다.
대종교에 대한 지지 기반은 탄압 속에서도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2대 교주 김교헌이 교세 확장
대종교의 체제가 완전히 자리 잡자 나철은 다시 서울로 돌아온다.
포교에 힘쓰는 한편 대종교의 합법화를 위해 일제에 청원했지만 종교가 아니라는 이유로 묵살되었다.
1916년 남도본사가 강제 해산되자 그는 단군의 마지막 행적을 따라 구월산으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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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 화룡현 삼도구에 있는 나철과 대종교 3종사 묘역. |
황해도 신천군에 있는 삼성사(三聖祠)가 목적지였다. 삼성사는 옛 조선의 기자가 동으로 와
환인, 환웅, 단군의 신위를 모시고 제사를 올렸던 곳에 세워진 사당이다.
나철은 오랫동안 방치돼 허물어진 사당에서 손수 풀을 뽑고 사람을 불러 집을 중수했다.
나철은 최후 며칠 동안 사당 내외를 두루 돌아보며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중수가 끝나자 제자들에게 만족한 듯 웃음을 보였다고 한다.
8월 보름날 몇 장의 유서를 남기고
대종교의 수행법인 조식법(調息法)에 따라 스스로 숨을 끊어 순절했다.
나철이 마지막 남긴 순명삼조(殉命三條)는 민족과 하늘을 향한 그의 절절한 심정이 드러나 있다.
“나는 죄가 무겁고 덕이 없어 능히 한배님의 큰 도를 빛내지 못하며
능히 한겨레가 망하게 된 것을 건지지 못하였다.
도리어 오늘의 업신여김을 받게 된지라 이에 한 오리 목숨을 끊는 것은 대종교를 위하여 죽는 것이다.
내가 대종교를 받든 지 여덟 해에 빌고 원하는 대로 한얼의 사랑과 도움을 여러 번 입어
장차 모든 사람을 구원할 듯했다. 마침내 정성이 적어 갸륵하신 은혜를 만에 하나도 갚지 못할지라.
이에 한 오리 목숨을 끊는 것은 한배님을 위하여 죽는 것이다.
내가 이제 온 천하의 많은 동포가 잘못된 길로 떨어지니 그들의 죄를 대신으로 받으려 한다.
이에 한 오리 목숨을 끊음은 천하를 위하여 죽는 것이다.”
그는 조선 땅에 몸을 묻을 곳이 없으니 반드시 화장하여
총본사가 있는 간도 땅에 묻으라는 뜻을 남겼다.
대종교인들은 그의 죽음을 민족뿐 아니라 전 인류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시켜 대속한 순교라고 본다.
대속의 행위는 종교인으로서 나철이 늘 행했던 의식과도 연관이 있다.
생전에 그는 종교의식을 치를 때마다 ‘내 몸으로 다른 생명을 대신하여 구한다’는
이신대명(以身代命)이란 말을 썼다.
나철의 종교적인 태도에 대해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정영훈 교수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기록에 따르면 나철은 여러 차례 종교적인 이적을 행했습니다.
병자를 치료하고 가뭄을 해갈시키는 등 기적의 행사에는 항상 ‘이신대명’이라는 문구를 써 붙이고
행했다는 것이 특이합니다. 이 몸으로써 앓는 이의 목숨을 대신한다거나, 군생들의 죄를 이 몸으로
대신하겠으니 저를 제물로 받으시고 비를 내려주시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나철의 삶의 자세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대종교의 교리와 사상은 근본경전인 ‘삼일신고’와 나철이 지은 ‘신리대전’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 핵심인 삼일(三一) 철학은 시대를 뛰어넘는 보편적인 가르침이 담겨 있다.
우주의 생성과 조화와 운용의 원리가 다양하면서도 하나로 통하고
그것은 모두 우리 안에 담겨 있다는 내용이다.
우리는 원래 온전하니 단지 그것을 회복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나철은 한얼님인 단군에 대해서도 삼일철학으로 설명한다.
“한얼님은 한임(桓因)과 환웅(桓雄)과 한검(桓儉)이니라.
환(桓)의 본음은 ‘한’이요 인(因)의 본음은 ‘임’이다.
옛말에 한울을 이르되 ‘한’이라 하니 곧 ‘큰 하나’의 뜻이며, 합하여 말하면 환인은 한울 아버님이요,
환웅은 한울 스승님이요, 한검은 한울 임금님이니라.
한임은 조화의 자리에 계시고 환웅은 교화의 자리에 계시고 한검은 치화의 자리에 계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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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오독립선언서(왼쪽)와 대종교 2대 교주인 무원 김교헌. |
환인과 환웅과 한검의 셋으로 표현되지만 곧 한얼님이라는 하나의 다른 자리이며,
나누면 셋이요 합하면 하나가 되니 셋과 하나로써 한얼님 자리가 정해진다.
주체는 하나지만 쓰이는 것은 셋이라는 뜻이다.
삼일사상 혹은 삼신사상은
기독교 신학의 삼위일체론이나 인도 종교의 삼신설과 비교할 수 있는 보편적인 종교 철학이다.
그 때문에 대종교에서는 삼일의 가르침이 세상 모든 종교의 뿌리와 닿아 있다고 주장한다.
나철은 교주자리인 도사교(都司敎)를 무원 김교헌(茂園 金敎獻, 1868~1923)에게 물려주었다.
그는 백포 서일(白圃 徐一, 1881~1921)과 함께 대종교의 삼종사(三宗師)로 꼽히는 인물이다.
김교헌은 18세의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여 사관으로 벼슬을 시작했다.
성균관 대사성을 역임할 정도로 학식과 명망, 관록을 갖춘 인물로,
일찍부터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만민공동회 운동을 이끌었다.
최남선이 민족정신을 펼치기 위해 조직한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에도 동참하여
박은식, 장지연 등과 함께 우리 민족의 고전을 번역하는 일에 힘쓰고 있었다.
독립운동가 키워내는 공장 역할
대종교 중광 이듬해 그는 나철을 찾아가 민족정신을 되찾자는 데 합의하고 교인이 됐다.
나철이 틀을 잡은 대종교의 교리과 사상을 이어받아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일을 맡았다.
그뿐 아니라 역사 속에 묻힌 단군의 기록을 모아
‘신단실기(神檀實紀)’와 ‘신단민사(神檀民史)’를 지어 민족사를 정립했다.
나철이 순절한 이듬해 그는 간도의 본사로 가 교세를 확장하는 일에 매달린다.
조선인이 있는 곳에 교당과 학교를 짓는 일에 전념했다.
특히 1918년 개천절 김교헌은 대종교인을 중심으로 대한독립선언서를 선포해 일제와 정면으로 맞선다.
무오독립선언으로 지칭되는 이 항일무제한 무력투쟁선언은
후에 동경 유학생의 2·8독립선언서와 3·1독립선언을 이끌어낸 도화선이 됐다.
김교헌은 8년 동안 대종교 2대 교주의 자리에 있으면서 대종교의 분명한 성격을 만들었다.
그의 부음을 알리는 1923년 12월 28일자 동아일보 기사는
대종교가 해외에서 위대한 세력을 얻은 것은 김교헌의 고심과 노력이 있었으며,
그의 죽음은 대종교의 앞날에 중대한 문제가 된다고 적고 있다.
대종교인들은 그의 지휘 아래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대종교는 종교의 영역을 벗어나 실질적인 독립투쟁의 선봉에 서고 있었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정영훈 교수는
대종교가 종교민족주의의 대표로 항일의 중심에 선 이유를 이렇게 지적한다.
“민족정신과 고유 종교가 살아 있으면 자주 독립은 언젠가 이루어진다는 것이 대종교의 생각입니다.
포교활동 자체가 독립운동의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민족의식이 깨어나는 데 중요한 영향을 미치고 있어
민족운동의 주요 지도자들은 대종교의 교인이 되거나
그들과 교유하면서 자주독립의 의지를 새겼던 것입니다.”
항일 무장투쟁의 노선을 택하면서 대종교는 일제와 직접 맞섰다.
대종교 산하에 군사조직을 갖추고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면서 대종교는 토벌의 대상이 됐다.
일제의 탄압으로 조선 땅에서는 교세를 크게 펼칠 수 없었지만
간도와 중국 땅 전역에서 대종교는 독립운동가를 키워내는 공장 역할을 하고 있었다.
- 2008 04/15 뉴스메이커 770호 [한국의 창종자들]
- 김천 , 객원기자 mindtemple@gmail.com
- Karen Marie Garrett / The Piano Call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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