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나아가는(문화)

야뇌 백동수 - 조선의 무사 / 무예도보통지

Gijuzzang Dream 2008. 3. 26. 19:27

 

 

 

 

 

 

 진정한 조선의 무사 - 야뇌(野餒) 백동수

 

 

 

 

 


중국에 삼국지에 등장하는 유비, 관우, 장비가 있고

일본에 미야모토 무사시라는 검객이 있다면,

조선에는 백동수가 있다.

 

관직에 얽매이지 않고 가난하여도 나눔의 미학을 스스로 실천하는 야뇌.

진정한 무인으로 불리었던 조선의 무사, 야뇌 백동수를 만나보자. 


벗을 사귀는 법


야뇌 백동수(野餒 白東修, 1743~1816)는 <무예도보통지>를 편찬한 불세출의 조선 무사였다.

무엇보다 그는 상하빈천을 아우른 폭 넓은 사귐을 통해

우정의 넓이와 깊이를 우리에게 보여 주었던 인물이다.

 

 

그의 벗 박제가는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영숙(백동수의 자)은 일찍부터 세상에 이름이 알려졌습니다.

그분과 우정을 맺은 사람은 나라 안에 두루 퍼져 있습니다.

위로는 정승과 판서와 목사와 관찰사가 그분의 벗이고,

다음으로 현인 명사 또한 그분을 인정하고 추켜세웠습니다.

그 밖에 친척이나 마을 사람들 그리고 혼인의 이를 맺은 사람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게다가 말을 달리고 활을 쏘며, 검을 쓰고 주먹을 뽐내는 부류와

서화, 인장, 바둑, 거문고와 가야금, 의술, 지리, 방기의 무리로부터

시정의 교두군, 농부, 어부, 백정, 장사치 같은 천인에 이르기까지

길거리에서 만나서 누구하고나 날마다 도타운 정을 나눕니다.”

백동수는 자신이 거처하는 사랑방을 농부와 어부의 집이란 뜻을 담아 ‘초어정’이라 이름 지었다.

그의 사랑방에는 늘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어느 날 그가 성대중의 집에 놀러갔을 때

“어떻게 그처럼 많은 사람들과 친밀하게 사귈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받고 이렇게 대답하였다.

“예법을 중시하는 사람을 만나면 나 또한 예법에 맞게 그를 상대하고,

글을 짓거나 서화를 그리는 선비를 만나면 나 또한 글을 쓰고 서화를 하는 법으로 그를 상대하고,

또 복서, 의약, 방기, 술수에 밝은 선비를 만나면, 나 역시 거기에 합당한 법도로 그들을 상대하였지요. 그들이 예법을 좋아하면, 나 또한 겸손으로 상대하는 것이외다.”

‘책만 보는 바보’라 불렸던 이덕무는 어린 시절부터 둘도 없는 동무였고,

장성하여서는 그의 손위 누이와 혼인하여 처남매부지간이 되었다.

주변의 좋은 사람들을 연결시켜 주는데도 열심이었던 그는

이덕무와 박제가를 박지원에게 소개해 주었다.

홍대용, 유득공 같은 학자들도 일찍부터 그와 사귀던 벗이다.

 

그는 조선 후기 사상사의 한 산맥을 이루었던 북학파의 숨은 별이다.

백동수가 서울을 떠나 강원도 기린 골짜기로 농사를 지으러 들어갈 때,

박지원과 박제가는 그에게 이별의 글을 지어 주었다.

박제가는 자신에게 벗의 도리를 깨닫게 해 준 사람이 바로 백동수라 했다.

 

백동수는 무과에 급제한 1771년 봄에 박지원과 함께

북으로는 묘향산으로부터 남으로는 가야산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명산대천을 두루 유람하였다.

이때 백동수는 박지원에게 연암골을 찾아내고 그곳에 집터를 잡아 주었다.

박지원은 그때의 추억을 담은 글을 지어 기린으로 들어가는 벗의 결단을 격려하였다.

박지원의 호 ‘연암’에는 백동수와의 깊은 우정이 담겨 있다.



 

 

아호속에 담긴 뜻 - 점재, 야뇌, 인재


 백동수는 호방한 성품을 지녔다.

 성대중은 그를 ‘고삐로 묶어 두고 싶다’고 표현할 정도였다.

 

굽힐 줄 모르고 성급하며 불같은 자신의 기질을 고민하던 백동수는

아호를 통해 자신을 단속하였다.

19세 때 스스로 지은 호가 천천히 나아간다는 뜻을 담은 ‘점재(漸齋)’였고,

가난해도 떳떳하게 살겠다는 다짐을 담아 ‘야뇌(野餒)’라고 하였다.

그러나 나이를 먹어도 타고난 성품은 변하지 않았다.

그래서‘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다’는 뜻을 담은 ‘인재(靭齋)’라는 호를 지어

벗들에게 불러 주기를 당부하며 자신을 단속하였다.


그러나 백동수는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는 실격이었다.

30대에 어려운 이웃을 돕는다고 ‘천금’의 재산을 다 써 버려 끼니를 걱정할 형편이 되었다.

그는 장사로 돈을 벌려고 동래에 내려갔다.

왜관을 통해 일본과 무역을 시도하였으나 본전도 못 건졌다.

재주가 많아 주위를 놀라게 했던 그였지만 이윤을 남겨야하는 장사에는 영 서툴렀다.

 
1773년, 백동수는 서울을 떠나기로 결심하였다.

목축을 하기 위해 온 가족을 이끌고 첩첩산골인 강원도 기린으로 들어갔다.

화전을 일궈 수수와 기장을 심고, 울타리를 쳐 가축을 길러 목축에 성공하였다.

물론 계절마다 닭과 돼지 잡고 술 걸러 이웃 어른들을 초대하여 대접하는 일도 빠트리지 않았다.    

 


문무경전 - 학문과 무예는 새의 두 날개와 같다


명문 무가(武家)에서 태어난 백동수는

소년시절부터 할아버지와

당대의 빼어난 무인, 장안의 협객들과 두루 사귀었고, 조선 최고의 검객 김체건의 아들로

‘검선(劍仙)’이라 불리던 김광택을 스승으로 모시고 검술을 익혔다.

 

병법을 깊이 연구했고, 변란을 대비하여

중국의 산천과 국경 수비의 형편에 대해서도 치밀하게 공부하였다.

중국 변경의 형편에 대해 누군가 물으면 그의 대답은 머뭇거리거나 막힘이 없었다.
소년시절엔 공부를 소홀히 하였으나 나이 들어 학문에 매진하여

당대의 최고로 자부했던 벗들도 백동수의 실력을 높이 평가하게 되었다.

 

이덕무는 자신이 지은 글에 대한 비평을 백동수에게 자주 부탁하였다.

고문의 대가로 정조의 특별한 지우를 입었던 성대중은 “무로써 문을 이룬 사람”이라고 하였다.

서예는 물론 그림도 잘 그려 단원 김홍도와 화법을 논했을 정도였다.

 


<무예도보통지>편찬을 총감독하다


강원도 산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은둔하고 있었지만, 세상은 그를 잊지 않았다.

1788년 겨울, 개혁 군주 정조가 백동수를 친위군영인 장용영의 창검 초관에 임명하였던 것이다.

그 때 그의 나이 마흔 다섯이었다.

 

백동수는 국왕 정조를 호위하고, 창덕궁 춘당대에서 장용영 무사들에게 무예를 지도하는 일을 맡았다.

그의 임무는 무예의 표준을 정립하는 것이었다.

 

이듬 해 가을, 백동수는 규장각 검서관으로 재직하고 있던 이덕무, 박제가와 함께 <무예도보통지>를 편찬하라는 어명을 받았다.

세 사람은 장용영에서 합숙하며 편찬에 전념하였다.

마침내, 1790년 4월 29일 <무예도보통지>가 완성되었다.

 

<무예도보통지>는 세밀한 그림과 상세한 설명을 붙여 놓아 장수와 병사들이 쉽게 익힐 수 있는 무예 교범서의 모범이며, 한중일 동양 삼국의 우수한 무예를 집대성한 동양무예의 고전이다.


백동수는 공로를 인정받아 비인 현감과 박천 군수를 역임했다.

고을 수령이 되면 모두가 한 밑천을 장만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재산을 모으기는 고사하고 이때 받은 봉록조차 빚을 갚는데 다 써 버려 생활이 늘 어려웠다.

 

1816년 10월 3일, 백동수가 포천 집에서 눈을 감았다.

 

“백영숙의 집안은 본디 넉넉하였는데,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기를 좋아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가업은 흩어지고 기울어졌지만 베풀어 주는 것을 그치지 않았다. ...[중략]...

애석하도다! 다시는 기남자를 볼 수 없음이여!”

벗 성대중의 아들 성해응은 평생을 당당하게 살았던 백동수의 비범한 생애를 이렇게 추모했다.

 

그의 생애를 통해 우리는 민족 무예의 역사와 조선 무사의 삶을 더듬을 수 있다.

또한 그와 그의 벗들의 이야기들은

요즘 세태에서는 찾기 어려운 참된 우정과 의리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 시원한 가르침을 주고 있다.
- 글: 김영호 / 사진제공 : T스튜디오

- 월간문화재사랑, 2008-02-28

 

 

 

 

관직에 얽매이지 않고, 가난하여도 나눔의 미학을 스스로 실천한 야뇌(野餒).

진정한 ‘협(俠)’의 세계를 꿈꿨던 조선의 무사 백동수!

 

중국 사기(史記)의 저자인 사마천은

‘협객(俠客)이란 사회 규범에서 벗어난 행동을 보이면서도 약속과 의리를 위해서는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존재라’고 정의하였다.

 

그러나 조선에서의 협객의 의미는 ‘의로운 선비’ 다시 말해

문무를 겸비하고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사람으로서의 진정한 도리를 지키는 사람을

협객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백동수를 당당히 ‘협객(俠客)’이라 부를 수 있는 이유는 몇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성해응이 남긴 글에서 협객의 면모를 짚어 볼 수 있다.

 

“영숙(백동수)의 집안은 본디 넉넉했지만 궁핍한 사람들을 구제하기를 좋아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가업은 흩어지고 기울었지만 베풀어줌을 그치지 않았다.”

 

이처럼 백동수는 나눔의 아름다움을 몸으로 실천한 조선의 협객(俠客)이었다.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

 

<무예도보통지>에는 이름처럼 무예에 대한 그림과 설명이 자세하게 수록되어 있다.

특히 다른 그림의 경우 젊은 무관의 얼굴이 주를 이루는데,

마상월도와 격구에서는 수염을 근사하게 기른 장수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어정무예도보통지- 정조의 명으로 편찬된 무예24기가 수록된 무예도보통지의 표지.

 

목판본 4권 4책. 규장각도서. 무예훈련교범.

정조가 직접 편찬의 방향을 잡은 후

규장각 검서관 이덕무, 박제가와 장용영 장교 백동수에게 명령하여

1790년(정조 14) 마침내 지상무예 18기, 마상무예 6기를 총정리하여

무예 24기를 수록하여 간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백동수는 발로 뛰어 문헌기록을 하나하나 살피고

무예에 뛰어난 장교 여종주, 김명숙과 함께 군영마다 약간씩 차이나는 무예의 기법을 통일하였다.

 

무예(武藝)는 도(刀), 검(劍), 창(槍), 곤(棍), 권(拳) 등 병장기와 맨손무예를 통칭한다.

 

1598년(선조 31) 한교(韓嶠)가 편찬한 <무예제보(武藝諸譜)>와

1759년(영조 35) 간행된 <무예신보(武藝新譜)>의 내용을 합하고 새로운 훈련종목을 더한 후

이용에 편리한 체제로 편집하여 간행하였다.

이 책은 중앙 군영은 물론 팔도의 군영에 보급되어 군사훈련의 교본으로 활용되었다,

 

 

 

 

서얼 출신이었던 백동수는 신장이 6척이 넘었다 했으니 약 185㎝ 가까이 되었으며,

검술과 창술 특히 마상무예의 대가였다.

정조가 즉위하고 친위군영인 장용영을 조직하면서 서얼무사들을 등용할 때

그는 창검의 일인자로 추천받았고,

드디어 장용영 초관(哨官, 1초는 100명)를 거느리던 종9품 무관벼슬에 임명되었다.

 

유교적 이념이 뿌리깊게 자리잡은 조선에서

그는 무인이자 서얼이라는 신분적 한계에 끊임없이 부딪치는 역사적 약자였다.

백동수는 이덕무와는 처남, 매부 사이로 연배가 비슷하였지만, 

10살 이상 차이가 나는 친구인 박제가, 박지원 등은 후세에 이름을 남긴 반면

무인 백동수는 문집은 물론 행장 하나 남은 게 없다.

 

그러나 ‘야뇌(野餒)’라는 아호 또한 들사람처럼 거침없이 살고 싶은 조선의 청렴한 무인 백동수,

그는 무예에 대한 열정으로 조선이라는 국가에 한없는 사랑을 던져

조선의 다시 없는 무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실학과 무예

 

 

조선개혁의 꿈이 담긴 ‘실학’

조선의 무혼이 담긴 ‘무예24기’

 

  

실학의 등장배경

 

조선은 건국 이후 이렇다할 큰 전란을 겪지 않고 있다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큰 전란을 연이어 겪으면서

농토는 황폐화되어 국가의 재정이 크게 줄어들었고 백성들은 생활에 큰 어려움 겪게 되었다.

전란을 겪으면서 왕의 귄위가 크게 떨어져 신료들의 권한이 더 강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나라의 살림을 맡은 양반사대부들은 붕당을 결성하여 갖가지 명분을 걸고

쉼 없는 정쟁을 거듭하면서도 백성들의 어려운 형편은 돌보지 않아 많은 원성이 터져 나오게 되었다.

이러한 시대 상황에서 등장한 것이 바로 ‘실학’이다.


실학 사상의 등장은 구시대의 사회 체제를 극복하고, 부국강병 새로운 사회를 이루려는

지식인들 사이의 일련의 사상 체계의 흐름이라고 볼 수 있다.

실학자들은 무릇 학문은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데에 도움을 주어야 하고,

백성들의 실생활에서의 쓰임과 생활을 풍족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조선의 국기(國技)인‘무예24기(技)'는 탄생하게 된다.

 

무예24기의 성립

 

  

 

무예24기는 조선의 문예부흥기라 불리는 정조 14(1790)년 4월 장용영(壯勇營)에서 펴낸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에 실린 24가지 기예를 말한다.

여기에 실린 24가지 기예는 조선의 쓰라린 전쟁의 역사와 맥락을 같이 한다.

 

임진왜란을 통해 조선왕조는 전쟁의 승패에 영향력을 미치는 것이 진법과 활, 대포만이 아니라

소홀히 다루었던 창검무예가 큰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전쟁을 빨리 끝내고 승리하기 위해 조선의 군대에서는

일본과 중국의 군사들의 창검무예를 열심히 익혔다.

1598년, 선조의 명을 받은 훈련도감의 낭청[실무자] 한교가 중심이 되어

중국의 기예인 장창과 쌍수도 등 6기를 조선의 군사들이 쉽게 익힐 수 있도록 풀이한

「무예제보」를 편찬하였다. 이어서 1604년에는 맨손권법을 풀이한「권보」를,

그리고 1610년 광해군이 집권한 시기에는「무예제보번역속집」을 편찬하여 군영에 보급하였다.

 

이후 1759년 북벌을 준비했던 할아버지 효종을 빼 닮았던 장헌세자(사도세자)의 주도로

훈련도감의 장교 임수웅이 18가지 기예를 정리한「무예신보」를 편찬하였다.

이러한 역사 배경을 바탕으로 그의 아들인 정조는 즉위하던 1776년에

아버지가 완성한 18가지 기예와 더불어 마상무예 4기를 군사들에게 적극적으로 훈련토록 지시하였다.

또한 이들 기예들을 1785년부터는 무사를 선발하는 시험과목으로 규정하였으며,

1790년에 기마군(騎馬軍)의 훈련강화를 위해 마상재와 격구를 추가하여

24가지의 기예를 그가 창설을 주도한 최정예의 군부대인 장용영에서 편찬하게 하고

책이름을「무예도보통지」라 지어주었다.

 

「무예도보통지」를 편찬할 때 무예의 역사와 고증은

규장각 검서관 박제가, 이덕무 그리고 무예실기는 장용영 초관 백동수가 책임을 맡았다.

이처럼 동양 최고의 무예서로 꼽히는 「무예도보통지」는

국왕을 비롯한 당대 최고의 문무(文武) 인재들에 의해 완성되었다.

이 책은 장용영을 비롯한 훈련도감, 어영청 등 중앙군영은 물론이고

지방의 군영까지 보급되어 군사들의 훈련교범으로 사용하였다.

 

실학과 무예24기

 

 

무예24기가 수록된 무예도보통지에는 실학(實學)과 관련하여 중요하게 살펴보아야 할 정신이

‘금(今)'과 ‘용(用)'의 정신이다.

예를 들면 24가지의 기예를 중국[화식(華式)]과 일본[왜식(倭式)]의 기예와 더블어

조선의 방식을 그림으로 표현 것의 설명을 조식(朝式)이 아닌 ‘금식(今式)'이라 표현하였다.

이는 바로 동양삼국 최고의 무예를 적극 받아들여 오늘날 우리 군사들에게 전파하기 위한

실학자 이덕무와 박제가의 깊은 뜻이 담겨 있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무예도보통지」편집자인 이덕무, 박제가, 백동수가 정조 임금께 올린 글에

“그리하여 조정은 실용 있는 정책을 강론하고, 백성은 실용 있는 직업을 지키고,

학자들은 실용 있는 책을 펴내고, 무사들은 실용 있는 기예를 익히고,

상인들은 실용 있는 상품을 유통시키고, 장인들은 실용 있는 기구를 만든다면,

어찌 나라를 지키는 일을 염려하며 어찌 백성을 보호하는 일에 걱정이 있겠습니까?"

라는 구절이 들어 있다. 이는 조선의 군사들이 익히는 무예 또한

지극히 실사구시의 발상으로 접근하겠다는 실학정신의 표현일 것이다.


결론적으로 「무예도보통지」에 실린 무예24기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몸바쳤던 조선의 무사들과

부국강병을 이루고자 고심했던 실학자들의 공동작품이다.

다시 말해 무예24기는 오랜 역사경험과 전투현장에서 걸러진

실학정신의 무예적 표현물이자 자주국방을 상징하는 우리의 소중한 문화 유산이라 할 것이다.

 


화성과 무예24기

 

수원 화성(華城)은 앞서 설명한 「무예도보통지」 무예24기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정조는 1784년에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존호를 장헌세자로 바꾸고

이를 경축하는 과거시험을 열어 많은 무사를 뽑고,

이듬해에는 훈련도감과 경과에 합격한 무사들 가운데 무예실력이 빼어난 자를 뽑아

국왕경호부대인 장용위(壯勇衛)를 설치하였다.

 

이후 장용위는 1788년에 ‘장용영(壯勇營)’이라는 독립군영으로 발전하였고,

1793년에는 도성의 내영과 수원에 외영을 두어

기존의 핵심 군영인 훈련도감보다 더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정조가 주도하여 창설한 장용영은 주 훈련과목으로 무예24기를 채택하여

전투력 극대화에 최선을 다하였다. 이처럼 당시 최고의 무사들이 모인 곳이 장용영이었으며,

장용영 외영군이 주둔했던 수원 화성은 무예24기가 가장 활발하게 수련되고 펼쳐졌던 공간이었다.
그러나 장용영은 정조가 서거한 후 1802년 노론벽파들에 의해 17년만에,

짧지만 영원한 족적을 남겨 놓으며 폐지되었다.


결론적으로 수원 화성은 정조의 효정신과 실학사상 및 자주국방의 상징인

「무예도보통지」무예24기가 오늘날까지 살아 숨쉬는 역사의 공간으로,

우리민족의 자랑스런 전통문화 산실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 최형국, 무예24기 사범

- 실학박물관 홈페이지에서 


 

 

 

 

 

 

 

 


 칼 끝엔 호국정신… 창 끝엔 실학사상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 24技’


등패냐, 곤봉이냐
 
등패와 곤봉을 든 무예24기 보존회 회원들이
수원의 화성행궁 신풍루 앞에서 겨루기를 하고 있다.
등패는 조총과 화살, 창검을 막아내며 적에게 접근해 공격하는 무기이고,
곤봉은 등패를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무기로 알려져 있다.

월도로 적장을 베듯
 
  월도를 사용해 적의 살을 의미하는 짚단을 베고 있다.
   베기에서 무예를 수련하는 무사의 마음가짐을 엿볼 수 있다.

접근전에 유리한 '동개궁'
 
기병이 사용한 동개궁은 가까운 거리에 있는 표적을 빠르고 정확하게
맞출수 있는 조선의 활이다.

파괴력이 좋은 '월도'
 
칼날의 모양이 초승달을 닮은 월도는
파괴력이 대단해 빠른 왜검을 제압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무기였다.

 전통 최고검법 '본국검'
 
신라의 화랑들이 익혔던 '본국검'은 전후좌우로 자유롭게
공격과 방어를 할 수 있는 우리 전통무예 중 최고의 검법이다.

기병 격퇴엔 '장창'
 
장창은 길이가 4m60㎝나 되는 긴 창으로,
밀집대형을 이뤄 적의 기병이나 진을 무너뜨리는 데 사용한 무기다.

빠른 공격에는 '왜검'
 
빠른 속도가 특징인 왜검을 들고 무예24기 공연을 펼치고 있는 단원들이
서로 편을 나눠 겨루기를 하고 있다.
 
 

한편, 18기(十八技)에는 일본에서 들여온 무예 두 종목이 포함되어 있다.

 

'왜검(倭劍)'과 '교전(交戰)'이다.

임진왜란을 겪은 이후 조선은 이제까지 무시해 왔던 왜구의 검술을

제대로 연구해서 대응해야 할 필요를 느꼈기 때문에

숙종 때 군교(軍校) 김체건(金體乾)이 사신을 따라 일본에 들어가

검보를 얻어와서 그 검술을 배웠는데,

여기에 새로 교전보(交戰譜)를 만들어 추가 하였다고 한다. 

필요에 의해 우리 것으로 새로 만든 조선의 무예 가운데 하나이다.

 

수원 화성(華城)은 조선의 최정예 장용영 무사들이
‘무예도보통지’의 무예24기를 연마했던 역사현장으로 한국 무예의 성지와도 같은 곳이다.

팔달산 동쪽 기슭 화성의 중심부에 자리하고 있는 화성행궁 앞.
장창이 하늘을 찌르고 본국검의 예리한 칼날이 섬광을 그리며 허공을 가른다.
이곳에서 옛 조선 무사들의 후예들이 전통무예의 재현을 위해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이름 산. 자 형운. 조선 제22대 임금 정조(1752~1800)는
영조의 손자로, 아버지는 억울하게 뒤주 속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세손 때는 물론 왕위에 오른 뒤에도
끊임없이 죽을 고비를 맞이하곤 했다.
그래서 정조는 자신의 신변을 보호하고 개혁을 실천하기 위해 새로운 군영을 창설할 필요성을 느꼈다.

정조는 즉위 6년째인 1782년에 장용위를 창설했다.
무예출신 및 무예별감의 장교를 지낸 50명의 정예멤버들로 구성된 장용위는
3년 후 장용영으로 확대 개편됐다. 정조의 막강한 친위부대인 장용영은
사도세자의 묘소를 수원 화산으로 옮기면서 수원에 터를 잡게 되었다.
행궁과 사도세자의 원소인 현륭원을 호위하고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정예 병력을 수원 화성에 배치하게 된 것이다.

장용영의 가장 큰 임무는 정조를 호위하는 것이었다.
화성 현륭원으로 행차할 때는 장용영의 군사들이 정조 임금을 좌우에서 에워싸고 원행에 동행했다.
당시 화성에 주둔한 병력은 무려 1만4천여 명에 달했다.
그러나 장용영은 1800년 정조가 서거하면서 쇠퇴의 길을 걸었다.
장용영은 결국 1802년 노론벽파 심환지의 주도로 끝내 해체되고 말았다.

정조는 왕에 즉위하던 1776년에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군사들에게 ‘무예신보’에 근거해 무예를 익히도록 했다.
또한 규장각 검서관 이덕무, 박제가와 장용영 초관 백동수에게
지상무예 18기와 마상무예 6기를 합한 24가지의 무예를 정리하도록 명을 내렸다.
마침내 동양 최고의 무예서 ‘무예도보통지’는 1790년 4월에 완성되었으며
장용영을 중심으로 전 군영에 보급하기에 이르렀다.

당대 최고의 무예 달인이었던 백동수는 장용영 초관에 임명된 뒤 군사들에게 무예24기를 가르쳤다.
김영호는 그의 저서 ‘조선의 협객 백동수’에서
“조선에 바야흐로 상무의 바람이 불고 있었다.
바람의 진원지는 장용영이었고 그 한가운데 백동수가 있었다.
백동수의 지휘 아래 장용영 군사들은
‘바람으로 머리를 빗고 비로 목욕을 하며 무예 수련에 몰두했다”라며
‘무예도보통지’에 기록된 무예24기의 우수성에 대해 설파했다.

조선후기의 실학자 이덕무, 박제가, 백동수는 북학파로 알려진 빼어난 학자이자 무인이다.
따라서 이들이 편찬한 ‘무예도보통지’에서는 실사구시 이용후생의 실학정신도 곳곳에 묻어 나 있는데,
정조임금에게 올린 다음과 같은 글에서 실용적인 사고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다.

“조정은 실용적인 정책을 강론하고, 백성은 실용적인 직업을 지키고, 학자들은 실용적인 책을 펴내고,
무사들은 실용적인 기예를 익히고, 상인들은 실용적인 상품을 유통시키고,
장인들은 실용적인 기구를 만든다면, 어찌 나라를 지키는 일을 염려하며
어찌 백성을 보호하는 일에 걱정이 있겠습니까?”

무예24기는 ‘무예도보통지’의 24가지 군사무예를 일컫는다.
정조시대 수원 화성에 주둔했던 장용영 군사들이 익혔던 무예24기는 우리나라 전통무예는 물론
중국과 일본의 뛰어난 무술을 아우르고 있어 ‘동양무예의 보물창고’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우리 겨레의 기상과 피어린 역사가 살아 숨 쉬고 있는 무예24기가
긴 겨울잠을 깨고 대중 앞에서 그 위용을 뽐내고 있다.
옛 장용영 군사들이 훈련했던 화성행궁 신풍루 앞에서
월요일을 제외한 매일 오전 11시에 무예24기보존회(www.muye24ki.or.kr) 회원들에 의해
공연되는 우리나라 최고의 무예를 만날 수 있다.
- 사진 · 글 : 박상문 moonpark@munhwa.com
- 문화일보, 2008-03-08
 
 

 

 

 

 

 

 

 

 

  

  제목 : [특강] 백동수와 조선무예 : 정조시대의 무예와 《무예도보통지》
  강사 : 김영호   2007-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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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좌설명 :

 

7년 여의 노력끝에 <무예도보통지> 편찬 책임을 맡아

조선 무예의 역사에 중요한 획을 그은 조선시대의 협객 백동수.

문(文)에 치우치고 무(武)에 인색한 한국 역사가 실은 결코 그렇지 않았습니다.

조선시대, 무장의 후손으로 태어나 스물 아홉에 무과에 급제하고

흔 다섯에 국왕 호위부대인 장용영 초관에 임명되어

정조의 특명으로 한국 무예를 총정리한 <무예도보통지>의 편찬 총감독을 맡았던

조선시대의 협객 백동수.

그의 삶을 통해 18세기 문, 무 양면에서 활약했던 인물들을 돌아봅니다.

 

백동수가 등장한 시기는

개혁군주인 정조가 적극적으로 개혁 정책을 실시할 무렵이었습니다.

서얼 출신을 우대하여 국가 경영의 초석으로 삼고자 하는 정조의 노력으로 인해

백동수 같은 서얼 출신들도 서서히 제도권으로 편입이 되었습니다.

또한 장용영을 창설하여 당시 훈련도감이 주도하던 군사업무의 상당 부분을 이관하는 등 기구 설치를 통한 개혁 정책도 적극적으로 시행되던 때였습니다.

 

《무예도보통지》는 정조가 각 부대마다 달리 수행되던 무예의 표준을 제시하기 위해 만든 무예서입니다. 배우기 쉽도록 그림으로 표현했으며, 한문을 모르는 군인들을 위해 한글로 편찬하기도 했습니다.

《무예도보통지》는 단순한 무예서가 아닙니다. 다양한 무기, 진법, 과학기술이 적용된

지도 등이 총 망라된 종합 무예 전술 교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정조의 무예 진흥노력을 배울 수 있습니다.

(출처 : 정조실록 아카데미) 

 

 

 

 

 

 

■ 백동수와 조선무예

- 정조시대의 무예와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

 

 

백동수(1743-1816) : 정조문예부흥기에 조선의 무예를 중흥시킨 인물

   

▴ 집안

조선후기 정치적 격랑 속에서 노론에 속했던 증조부(백시구, 절도사)는 신임사화(1721)에 연루되어 죽음 - 백상화(조부, 백시구의 서자, 현감) - 백사굉(부) - 백동수로 이어지는 전형적인 무인가문이었음.

 

 

▴ 교우관계

- 백동수, 1771년(영조 47) 무과 급제 

- 원중거 등의 서얼출신 인재들과 폭넓게 교유

- 성대중, 이덕무 등과 교유하며 문무를 겸비한 인재로 성장

- 이 인연을 배경으로 이덕무, 박제가와 함께 <무예도보통지>편찬 3인방이 됨.

- 박제가, 이덕무 등 영,정조 시대를 풍미한 인물과 교유

- 연암 박지원과도 교분이 두터움.

   박지원의 ‘연암’이라는 호도 백동수와 여행하다가 발견한 계곡에서 따온 호.

  

임진왜란 시 조총과 일본도는 조선 군인에게 큰 두려움의 대상이 됨.

조총에 대항하기 위해 훈련도감을 창설하고

사수(화살) 포수(조총) 살수(창)의 삼수병 체제를 만듬.

 

우리는 예로부터 활을 쏘는 기법이 뛰어나 다양한 화살을 만들어 실전에 사용함.

편전(편箭)은 국경부대에서 전투시에만 이용할 정도로 성능이 우수한 비밀병기였다.

 

 

단병기예 : 칼과 창 같은 근접전 무기 사용법

장병기예 : 활, 조총 같은 장거리 사격무기 사용법

 

 

정조, 1785년 장용영 창설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가 18기를 정리, 정조가 이를 계승하여

장용영에 18기군을 설치하고, 무예서 편찬업무 장용영으로 이관

 

 

■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

 

- <어정무예도보통지(御定武藝圖譜通志)> : <무예도보통지> 이름도 정조가 직접 지음

- <무예도보통지>를 임금께 바치는 글에 싸움을 막고 평화를 가져오기 위한다는 편찬

   목적이 명시됨.

- <무예도보통지>는 그동안 익혀온 무예의 표준을 제시하여, 

   훈련도감, 금위영, 용호영, 어영청 등의 부대별로 시행되던 무예와 훈련 방식을 통일.

- 1999년 계명대학교도서관에서 <무예제보번역속집> 발견.

   이 책은 일본의 재침을 우려하여 만든 책.

- <무예도보통지>는 한문을 모르는 군사들을 위해 한글로도 편찬

  <무예도보통지>는 변경지역에서는 외국인이 번역 못하도록 일부러 한글로 쓰기도 함

- 총도 : 무예의 연속동장을 이어서 표현한 그림

- <무예도보통지>는 그림만 보면 무예의 동작과 순서를 알 수 있도록 구성

 

 

■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에 나타난 무기와 무장

  

- 조선의 칼에는 고리가 있어 전투시에 쉽게 들릴 수 있도록 함

- 기병은 말 타기 쉽도록 칼을 허리 아래로 내려 참

- 보병은 달리기 편하도록 칼을 어깨 밑까지 붙여 참 

 

- 칼을 뽑는 것을 출검(出劍)이라고 함.

- 기병은 활을 기본무기로, 조총은 비(雨)와 연속사격에 약한 단점이 있음.

- 근접전을 수행하는 보병에게 가장 중요한 소양은 달리기 능력이었음

- 기병들은 긴 화살 20개, 편전(짧은 화살) 15개를 의무적으로 휴대 

 

- <무예도보통지>에는 당시의 과학기술이 총망라됨

- <무예도보통지>에는 개인무예와 부대 단위의 협동진법도 있음 

- 창덕궁과 창경궁을 잇는 춘당대(서총대)와 수원 화성의 동장대는 한국무예의 성지

 

 

  : 강사 - 김영호(무예24기 보존회사무처장, <조선의 협객, 백동수>의 저자

  : 정조실록 아카데미에서 내용 정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