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승려도(僧侶圖)
최순택(원광대학교 고고 · 미술사학과 교수)
1. 머리말
'승려도'란 승려들의 수행모습과 다양한 일상생활을 수묵담채(水墨淡彩)로 그린 그림을 말한다.
한국의 승려도는 중국, 일본은 물론 소승불교권 국가들의 작품들과 다른 한국적 특징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는 장르이므로 이에 관한 연구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본다.
조선조(1392-1910)의 화원이나 사대부들은 중국이나 일본의 그림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스님들의 속화(俗化)된 모습들을 다룬 작품들, 예를 들면 스님들이 바둑이나 장기를 두는 장면, 술 마시는 장면, 시줏돈 모금 장면, 점괘 읽는 장면, 부녀자들을 엿보는 장면, 이(蝨) 터는 장면 등 스님들의 본연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는 부정적인 이미지들을 즐겨 화폭에 담았다.
동시에 그들은 수행자가 수행하는 경건한 모습을 그리기도 하였는데, 이는 한 화가의 스님에 관한 이미지가 양면성을 띠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이러한 양상은 500년간 지속된 조선왕조의 숭유배불정책에 따른 시대적 사회적 환경이 화가들의 사고와 작품의 주제선정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결과라고 보겠다.
조선시대의 불교에 대한 정치적 탄압과 종파의 통폐합, 승과(僧科) 및 도승법(度僧法) 폐지, 승니(僧尼)의 사회적 신분격하가 승려를 천시하는 풍조를 낳았으며 그 당시 화가들의 의식구조와 주제선정에도 그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미술의 흐름도 다른 예술과 마찬가지로 시대적 사회적 환경의 영향을 벗어날 수 없지만 특히 숭유배불정책과 같은 정치적 환경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구체적인 예로 '승려도' 연구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조명할 수 있다. 이러한 독특한 양상을 띤 조선시대의 승려도들을 체계적으로 고찰하는 일은 한국의 풍속화 연구에 있어서도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본 논문에서는 현존하는 한국의 승려도들을 시대 순으로 소개하고 그 주제의 다양한 양상 및 양식적인 특성을 살피고자 한다. <달마도(達磨圖)>, <나한도(羅漢圖>), <포대도(布袋圖)>, 조사(祖師)들의 <진영(眞影)> 등도 넓은 의미에서는 승려도의 범주에 속하나 본 논문에서는 이들을 제외한 일반승려들의 생활상을 주제로 한 수묵담채로 그린 승려도만을 연구대상으로 하였다.
2. 조선시대의 승려도
우리나라의 현존하는 그림들 중에서 스님의 모습이 묘사된 가장 오래된 그림은 쌍영총(雙盈塚) 현실 동벽에 그려진 부인이 승려와 함께 공양드리러 가는 <행렬도>와 무용총(舞踊塚) 현실 북벽에 그려진 <접견도>로 알려져 있다.
<접견도(接見圖)>는 묘주(墓主)가 장방이 걷어 올려진 실내에서 두 승려를 접대하고 있는 장면을 그린 것으로 이들 주위에는 다른 시자(侍者)들이 함께 묘사되어 있다. 의자에 앉아있는 묘주와 스님들은 음식이 차려진 상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앉아 있는데, 앞쪽에 앉은 스님은 왼손을 들어올린 채로 설법하는 모습이며 주름치마와 검은 가사를 입고 있다.
통일신라시대 및 고려시대나 조선 전기에도 승려를 주제로 한 그림이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현존하는 작품이 없어서 자세한 고찰을 할 수 없는 실정이어서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이색(李穡, 1328-1396)과 동암선사(東菴禪師)와의 화답시(和答詩)에 <삼소도(三笑圖)>가 언급되어 있어서 고려시대에 이미 이러한 유형의 그림이 그려졌음을 알 수 있다.
'삼소도(三笑圖)'란 중국 진대(晋代)의 승려인 혜원(慧遠, 334-416)과 시인 도연명(陶淵明), 도가(道家)인 육수정(陸修靜)이 호계(虎溪)를 건넌 고사를 묘사한 것이다.
속세를 떠나 은둔생활을 한 혜원화상은 동림사(東林寺)에 기거하며 결코 호계의 다리를 건넌 적이 없이 30년간 여산(廬山)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육수정과 도연명을 배웅하면서 그는 대화에 몰두한 나머지 호계의 다리를 지나쳐버렸다. 그때 호랑이 한 마리가 으르렁 거리는 소리에 의해 이 사실을 감지한 세 사람은 한바탕 크게 웃었다 한다.
유불선(儒,佛,仙)의 삼교(三敎)일치사상을 반영하는 이 주제는 중국과 일본에서 더 많이 그려졌다. 중국의 경우 송대(宋代) 필자미상의 <호계삼소도>(타이베이 고궁박물원 소장), 양해(梁楷)의 <삼고유상도(三高遊賞圖)>(臺北故宮博物館所藏)와 고기패(高基佩)의 지두화(指頭畵)인 <호계삼소도>(Art Museum of San Francisco)가 있다.
15세기에 조선의 화가로 일본에서 활약한 문청(文淸)이 그린 <호계삼소도>가 일본에 남아 있으며, 에도(江戶)시대의 소가 쇼하꾸(曾我蕭白; 1730-1781)의 <호계삼소도>(Boston 미술관 소장) 가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최북의 <호계삼소도>(간송미술관 소장)가 있으며 담백한 필치로 다리 위에서 다정하게 담소하는 세 사람의 화기애애한 모습이 표현되어는데 바위의 묘사에 있어서 Y자형 준법을 사용하는 등 황공망의 영향이 엿보인다.
현존하는 우리나라의 수묵 승려도 가운데 제작시기가 가장 오래된 것은 조선 중기의 화원인 연담 김명국(蓮潭 金明國, 1600-1662)이 그린 국립박물관 소장의 <투기도(鬪碁圖)> 이다.
심산유곡의 폭포가 올려다보이는 넓은 바위 위에서 바둑을 두던 스님과 긴 하얀 수염을 단 도인(道人)이 바둑판을 뒤엎고 서로 붙들고 싸우고 있는 모습이 극적으로 표현된 그림이다. 텁수룩한 턱수염과 짙은 눈썹을 갖인 이국적인 풍모의 스님은 싸우는 바람에 옷이 벗겨져서 윗몸이 드러나 있으며, 절파(浙派)화풍의 활달한 의습선(衣褶線)의 사용으로 인해 극적인 분위기가 더욱 잘 표출되었다. 스님 곁에는 울퉁불퉁한 굉이가 보이는 긴 석장이 놓여있고, 화면 오른쪽에는 시자(侍者)가 구부리고 앉아서 흩어진 바둑돌을 주어담고 있다.
김명국은 비록 출가한 선승은 아니지만 한중일 동양 삼국에서 가장 호쾌한 <달마도>를 그렸으며, 이외에도 <포대도>, <은사도>, <수노인>등 많은 도석인물화를 남겼다. 그가 절파화풍의 산수인물도 이외에 달마를 비롯한 선종화(禪宗畵)를 많이 그렸던 것은 이동주 박사의 견해에 따르면 김명국이 일본에 갈 당시 일본화단에서는 선종화가 유행했으며 그곳 사람들의 취향에 맞는 그림들을 그려 주었던 데에 연유하는 것이라 보았다.
김명국은 1636년과 1643년 두차례에 걸쳐 조선통신사의 수행화원으로 일본을 다녀왔는데, 남태응(南泰膺; 1687-1740)의 <청죽화사(聽竹畵史)>에 '김명국이 통신사를 따라 일본에 다다르니 온 나라가 물결일 듯 떠들석 하여 (그의 그림이라면) 조그만 종이조각이라도 옥같이 귀하게 여겼다'라고 쓰여있는 것으로 보아 일본에서 떨쳤던 그의 명성을 짐작케 한다.
17세기에 활약했던 가장 대표적인 절파(浙派)화가로 알려진 김명국은 사람 됨됨이가 거친 듯 호방하고 농담을 잘하고, 술을 좋아하여 한 번에 몇 말씩이나 마셨다고 하며 대취해야만 그림을 그리는 버릇이 있어서 사람들은 그를 주광(酒狂)이라 불렀으며 그의 걸작 중에는 취흥이 도도해서 그린 것이 많다고 한다.
그의 <투기도>는 고매한 인품의 탈속한 선승의 이미지 대신에 바둑을 두다가 심하게 다투는 스님들의 부정적인 면모를 적나나하게 표현한 그림으로 김명국이 스님에 대해 갖고 있던 부정적인 사고가 그대로 반영된 작품의 예라 하겠다.
조선 중기의 <승려도>의 예로 자연을 배경으로 긴 석장을 들고 바위에 걸터앉아 있는 노승을 묘사한 인평대군 이요(麟平大君 李 ; 1622-1658)가 그린 <노승하관도(老僧遐觀圖)>를 들 수 있다.
홍성하(洪性夏) 소장의 <노승하관도>는 절파(浙派)와 이곽파(李郭派) 양식을 절충한 조선중기의 전형적인 인물화로 계류옆 나무아래 바위에 앉아서 휴식을 취하는 노승이 표현되어 있다. 오른쪽 상단에 그의 호인 송계(松溪)라는 관서(款署)가 있다. 인평대군은 인조의 셋째 아들이며 효종의 아우로서 시문(詩文)과 그림에 재능이 있었으며, <송계집(松溪集)>이란 문집을 남겼다. 그는 또한 인조때 조선 조정에 와 있던 중국인 화가 맹영광(孟永光)과 교유하면서 지은 시도 남겼다.
이와 유사한 주제를 다룬 작품으로 조선후기의 공재 윤두서(恭齋 尹斗緖, 1668-1715)가 그린 국립광주박물관 소장의 <수하노승도(樹下老僧圖)>가 있다. 긴 주장자를 비껴들고 소나무 아래에 걸터앉아 휴식을 취하는 노승의 탈속한 경지가 잘 표현된 부채그림으로, 인평대군 이요의 <노승하관도>에 보이는 스님보다 훨씬 사실적인 수법으로 그린 노스님의 얼굴과 표정에는 내면적 응시를 하는 수행자의 면모가 잘 드러나 있다.
이외에도 그는 이와 유사한 주제의 부채그림을 귀향한 일년 후인 1713년에 그렸다. 윤두서가 이러한 그림을 많이 그리게 된 것은 평생동안 전국을 두루 여행하면서 유명사찰을 거의 다 둘러 보았던 친구 이하곤(李夏坤)의 영향이라고 보기도한다.
윤두서는 나무 아래에 앉아서 흐르는 물소리를 듣는 노승 이외에도 노승의 걷는 모습을 화폭에 담아내기도 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노승도>는 화면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긴 주장자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염주를 쥐고 맨발로 걷고 있는 노승을 화면 중심에 부각시킨 그림으로 스님이 입고 있는 검은 가사의 활달한 필치의 의습선과 과장되게 긴 주장자의 강조로 인해 운동감을 나타내고 있으며 이와는 대조적으로 내면적 응시를 하고 있는 노스님의 조용히 가라앉은 분위기가 강렬한 대비를 이루고 있다. 즉 정중동 동중정(靜中動 動中靜)의 조화를 절묘하게 표현하고 있다. 대각선 방향으로 포치된 배경을 이루는 간략한 대나무의 묘사를 통해서 노스님을 더욱 크고 강하게 부각시켰으며 활달한 필치의 긴 주장자 표현 역시 노스님의 높은 수행력과 완숙한 덕을 상징하고 있다. 선미(禪味)가 느껴지는 이 <노승도>의 주인공은 아마도 실재하는 인물을 사생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산수와 인물, 화마(畵馬)에 모두 능했던 윤두서는 그림을 그릴때는 반드시 며칠을 주시해서 그 진형(眞形)을 파악하고서야 붓을 들었기 때문에 그의 그림들은 모두 생동하였다고 한다.
풍속화의 선구자인 윤두서는 <나물캐기(採艾圖)>, <짚신삼기>, <목기깎기(旋車圖)>, <돌깨기> 등의 작품에서 다양한 인간의 실제적인 삶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그는 사실과 사물에 대해 하나 하나 조사. 연구하였으며, 사대부들에게는 금기시 되었던 패관소설(稗官小說)은 물론 지도. 공예. 악기. 무기 등 다방면에 걸쳐 박학(博學)하였다. 이러한 그의 다양한 학문적 관심이 다양한 인간들의 삶의 모습을 그림의 소재로 삼는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이며 비교적 많은 승려도를 남겼다.
조선후기에는 우리나라에 실재하는 명산승경(名山勝景)을 그린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와 조선사람들의 생활풍습과 정서를 사실적으로 생생하게 묘사한 풍속화가 크게 유행하였다. 특히 영조(1725-1776)와 정조(1776-1800)를 거쳐 순조조(1801-1834)에 이르는 동안 성행했던 실학의 영향으로 평민문학과 다양한 인간들의 삶의 모습을 그림의 소재로 삼는 풍속화가 큰 발전을 하였다.
숙종, 영조 년간에 활약한 선비화가인 관아재 조영석(觀我齋 趙榮 , 1686-1761)은 인물화 부문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 어진제작에 추천될 정도였으나 어진제작에 응하지 않아 영조의 노여움을 사기도 했다.
그의 문집과 서민의 일하는 모습을 담은 풍속소묘화첩인 <사제첩(麝臍帖, 사향노루 배꼽첩)>(趙東濟 소장)이 최근에 공개됨으로써 조영석은 윤두서와 함께 김홍도 이전의 시정풍물(市政風物)을 그린 조선후기 풍속화유행의 선구적 위치에 있는 사인풍속화가(士人風俗畵家)로 인식 되었다.
간송미술관 소장의 조영석의 <노승헐각도(老僧歇脚圖)>는 걸망을 내려놓고 석장에 기대어 커다란 소나무 밑둥에 털석 주저앉아 쉬고 있는 노승을 그린 것이다. 눈빛이 해맑은 노스님의 얼굴은 광대뼈가 유난히 튀어 나왔으며 간헐적으로 난 수염이 인상적인데 둥근 모자를 쓰고 큰 염주를 목에 걸고 있다. 전체적으로 깔끔하면서도 섬세한 필치의 사실적인 묘사솜씨로 인해 윤두서의 <노승도>에 비해서 현장감은 강하나 품격은 뒤 떨어지는 감이 있다 하겠다. 화면 좌측 상단에 관아재사(觀我齋寫)라고 적고 관아재의 백문방인장을 찍었다.
조영석의 <노승휴장(老僧携杖)>(간송미술관 소장)은 걸망을 메고 긴 석장을 들고 맨발로 걷고있는 노스님과 짐꾸러미를 등에 메고 뒤를 따르는 시자등 인물만을 부각시켜 간결한 필치로 사생한 그림이다. 김명국의 투기도에 보이는 스님은 전형적인 서역승의 풍모를 묘사한데 반해 조영석의 그림에 등장하는 스님들은 모두 조선식 복장과 한국인의 얼굴을 하고 있다. 조영석의 <노승휴장>에 표현된 스님의 바싹 여윈 얼굴이나 앞서 언급한 <노승헐각>의 유난히 튀어나온 광대뼈가 인상적인 스님의 개성적인 얼굴로 미루어 실재하는 스님을 모델로하여 사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조영석은 '그림을 보고 그림을 옮겨 그리는 것은 잘못이며 대상을 직접 보고 그려야만(卽物寫眞) 살아있는 그림(活畵)이 된다'(洪啓能, 1713-1777의 觀雅齋 行狀)는 회화관을 갖고 있었음이 밝혀졌다.
조영석의 <노승문슬(老僧問蝨)>은 소나무 밑둥에 쭈구리고 앉아서 이(蝨)를 잡는 노승이 주제인데 선염과 농묵의 조화로운 소나무 표현이 <노승헐각도> 보다 더욱 활기찬 맛이 있다. 가슴을 드러내놓고 옷을 벌려 이를 털고 있는, 즉 번뇌를 털어내는 삭발한 머리에 새로 자란 짧은 머리털과 땅바닥에 새로 돋아나는 풀의 표현에 호초점(胡椒點)을 찍어 화면에 더욱 생동감을 부여하고 있다. 화면 오른쪽 상단에 조영석의 자(字)인 종보(宗甫)라는 관서(款署)가 있다. 조영석의 그림들에 표현된 스님의 이미지는 존경스러운 탈속한 승려상과는 거리가 먼 매우 속(俗)된 분위기의 스님상으로 스님을 천시했던 당시의 사대부들의 사고가 은연중에 드러난 결과라고 생각된다.
조영석은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의 직계제자인 지촌 이희조(芝村 李喜朝)의 문하생이었으며 안동 김씨 가문의 김창흡(金昌翕), 김창집(金昌集), 김창업(金昌業)형제들의 가르침을 받았고 이병연(李秉淵), 유탁기(兪拓基), 정선(鄭敾)등과 친밀히 교유 하면서 자전적(自傳的) 성격을 띤 사인풍속도(士人風俗圖)나 서민풍속도를 남김으로써 풍속화 분야의 선구적 위치에 서게 되었다.
조영석과 이웃해 살면서 30년간 조석(朝夕)으로 왕래하며 절친하게 지냈던 진경산수화의 대가 겸재 정선(謙齋 鄭敾 , 1676-1759) 역시 노승을 주제로 한 그림을 남겼다.
간송박물관 소장의 <송암복호도(松岩伏虎圖>는 큰 소나무 아래 바위에 걸터앉아 옆에 엎드려 있는 호랑이 머리를 쓰다듬으며 계곡의 물소리를 듣고 있는 노승을 그린 것이다.
『고씨화보(顧氏畵譜)』에 수록된 장승요(張僧繇)의 승상(僧像)이나 석각(石恪)의 전칭작품으로 전해오는 <이조조심도(二祖調心圖)>에서는 배경을 생략한채 호랑이와 스님만을 다룬데 비해서 겸재의 <송암복호도>는 배경을 이루는 거송(巨松)과 계류가 화면에서 중요한 소재로 인물보다 크게 그려진 점이 다르다.
옅은 담채를 구사한 설채법 사용으로 인해 스님의 모습은 산신령이나 신선에 가깝게 보이며 한국적 미감이 느껴지는 작품이라 하겠다. 비교적 섬세한 필치로 묘사된 소나무와 스님과는 대조적으로 호랑이와 바위, 특히 흐르는 계류 사이에 놓여있는 조약돌은 활달한 필치로 묘사되어 있어서 동적인 느낌을 자아낸다.
옅은 청회색의 가사를 묶은 붉은 끈과 초록색의 신발 묘사로 화면에 액센트를 주었다. 하늘을 향해서 S자로 쳐든 옅은 노랑색의 호랑이 꼬리와 역시 S자 형태로 굽은 옅은 황색의 소나무가 X자를 이루며 서로 교차하는 가운데, 노승, 호랑이, 소나무, 둥근 바위가 다정하게 서로 맞대고 한데 모여 있어서 통일감을 주는 포치솜씨가 돋보인다.
이와 유사한 그림의 예로 필자미상의 <송암복호도>(서울 개인 소장)가 있는데 정선의 그림과는 달리 주인공이 도의(道衣)를 입고 있으며 석장을 든 시자가 그려져 있다. 절파화풍의 영향이 뚜렷한 이 그림은 정선의 <송암복호도>와 주제는 유사하나 미불(米芾, 字 元章, 1051~1107)의 수지법을 토대로 한 남종화적 경향의 정선의 그림과는 양식적인 차이를 보이는 작품이다.
겨울날의 절 풍경을 묘사한 정선의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에 들어 있는 <사문탈사(寺門脫蓑)>(간송미술관 소장)는 율곡 이이(栗谷 李耳)가 소를 타고 눈 속을 헤쳐 절을 찾던 고사를 도해한 것이다.
사문탈사란 문자 그대로 절 문에서 도롱이를 벗는다는 의미로서, 화면 중앙에는 고깔을 쓴 두 승려가 소를 타고 절에 당도한 율곡의 좌우에 서서 그의 도롱이를 벗기고 있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소의 뒤에는 소몰이꾼이 총채를 들고 서있고, 절 문에 기대선 채 이 장면을 지켜보는 승려와 절 마당 안에는 둥근 삿갓을 눌러 쓴 주지스님이 고깔 쓴 시자에게 무언가를 지시하는 광경이 묘사되어 있다. 절 문 양켠의 힘있게 뻗은 여섯 그루의 우람한 나무들은 가지마다 흰 눈이 쌓여 겨울날의 해맑은 정취가 느껴지는 그림이다. 지붕과 대각선으로 길게 뚫린 길바닥 위에도 잔설이 남아있고 길옆으로 흐르는 시냇물 위로 넓직한 돌다리가 놓여있다. 가지마다 피어난 흰 눈꽃과는 대조적으로 굵직하고 씩씩하게 자란 거대한 나무들이 화면을 압도하는데 중첩된 긴 대각선을 구사하여 수간(樹幹)을 표현하였다. 대각선을 살린 구도나 독특한 수지법의 사용을 통해서 겸재 정선의 뛰어난 기량과 독창성을 엿볼 수 있다.
이와같이 윤두서, 조영석, 정선 등의 승려도는 중국적 인물화풍의 영향을 탈피한 조선인의 복색과 정서가 깃든 독자적인 인물화풍을 구사함으로써 사인풍속화가로서의 선구적 위치에 서게되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이광사, 심사정, 최북 등은 중국적 소재의 승려도를 선호하였다.
원교 이광사(員嶠 李匡師, 1705-1777)가 병인년(丙寅年 1746年) 여름에 그린 <高僧玩繪>에는 산수도를 감상하는 고승과 선비 및 시자(侍者)들을 묘사했는데 의복, 의자, 괴석 등의 표현에서 중국적인 정취를 드러내었다. 그는 白下 尹淳의 문인(門人)으로 백하필법(白下筆法)을 계승 발전시켜 동국진체(東國眞體)를 완성하고 서예이론서인 <원교필결(員嶠必訣)>을 저술했다.
조선후기의 선비화가인 현재 심사정(玄齋 沈師正, 1707-1769)은 공재 윤두서, 겸재 정선과 더불어 삼재(三齋)로 일컬어졌던 인물이다. 그는 젊어서 정선에게 그림을 배웠다고 하며 강세황(姜世晃)과 친교가 있었다. 강세황은 [...현재(玄齋)는 회사(繪事)에 있어 못하는 것이 없지만 화훼,초충을 더욱 잘하고, 그 다음이 영모, 또 그 다음이 산수이다. 인물에 있어서는 그의 소장(所長)이 아니다....]라고 평한바가 있다.
그러나 그는 선비화가로서는 드물게도 많은 도석인물화를 남겼으며, 그의 작품들은 독특한 개성과 풍격을 지니고 있다. 심사정은 선림(禪林)에서 즐겨 그린 소재의 하나인 <산승보납도(山僧補納圖)>(부산시립미술관 소장)를 남겼다. <보납도>란 승려가 가사를 꿰매는 자세를 묘사한 그림을 말하며 일본에서는 이를 <조양도(朝陽圖)>라고 부르는데 흔히 달 아래에서 불경을 읽는 승려를 묘사한 <대월도(對月圖)>와 쌍폭을 이루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현존하는 <보납도>의 예로는 북송대의 이원제(李元濟)가 그린 프리어미술관 소장의 <나한도>, 남송대의 유송년(劉松年)이 그린 타이베이 고궁박물관 소장의 <보납도>, 원대의 필자미상의 <조양도>(文化廳 所藏), 원대의 인다라(因陀羅)가 그린 <조양도>(根津美術館所藏) 및 명대의 장굉(張宏)의 <보납도> 등이 있다. 일본의 경우 가마쿠라의 겐조오지(建長寺)의 화승으로 15세기 중엽에 활약했던 주안신코(仲安眞康)의 <조양도>(東京國立博物館所藏)가 있다.
심사정의 <보납도>에는 노승이 심산유곡의 굽이굽이 흐르는 계류 옆 소나무등걸에 걸터 앉아서 가사를 꿰매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으며 작은 원숭이 한 마리가 노승의 앞에서 실장난을 하고 있다. 남종화풍의 이 <보납도>는 심사정의 다른 도석인물화에서 보이는 격렬한 필치와는 대조적인 부드럽고 가녀린 필선으로 표현하여 자연속에 푹 파묻혀 있는 느낌이 나며, 주제인 노승보다도 연륜을 자랑하는 구불거리는 소나무와 암벽, 굽이치는 계류 등 산수가 더욱 중요한 요소로 취급되어 있어서 중국의 <보납도>와는 전혀 다른 특성을 갖고 있다. 더욱이 담갈(淡褐)의 설채와 부드러운 필묵 및 태점의 사용으로 인해 화면전체에 안온하고 한적한 산속의 아침분위기가 고조되었다.
화면의 오른쪽 상단부에는 [산승보납도 고씨화보중강은작비 현재약방기의방사차심기표암평(山僧補納圖 顧氏畵譜中姜隱作此 玄齋略倣其意方寫比甚寄豹菴評)]이라 쓰인 제사(題辭)가 있어서 이 작품이 『고씨화보』에 실린 강은(姜隱)의 그림을 따라 그린 것을 알 수 있다. 이 그림을 강은의 그림이나 명대의 장굉(張宏)이 그린 <보납도>와 비교해 보면 중국의 그림들은 인물이 크게 부각된 소경산수인물화로서 원숭이가 화면의 오른쪽에 있으며 노승 뒤쪽의 절벽도 생략되어 있다. 심사정은 산수에 중점을 두고 경물의 위치를 바꾸어서 비록 방(倣)을 하더라도 자신의 기호에 맞게 변형시켰음을 알 수 있다.
호생관 최북(毫生館 崔北, 1712-1786)의 <관수삼매도(觀水三昧圖)>(간송미술관 소장)는 파초 아래 좌선한 승려가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조용한 침묵 속에 삼매(三昧)에 든 경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심사정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화면 속의 인물보다는 산수에 비중을 두어 자연과 합일된 적요하고 차분한 분위기를 나타내었다. 중국의 경우 파초 아래 앉아 있는 나한을 그리는 경우가 일반적인데 유관도(劉貫道)의 <나한도>(臺北 國立博物館所藏)와 라빙(羅聘)의 <초음나한도(蕉陰羅漢圖)>(Koeln 동아시아박물관 소장) 등이 있다. 중국의 <나한도>에 비해서 최북의 <관수삼매도>는 파초와 인물묘사에 있어서 필치가 소략하고 소박한 맛이 있다.
그는 시서화를 겸비했던 최초의 조선후기 여항출신 직업화가로서 김홍도(金弘道), 이인문(李寅文), 김득신(金得臣) 및 남인계 문사들인 이익(李瀷) 등, 윤두서의 사위였던 신광수(申光洙)와, 서예가인 이광사(李匡師) 등과 교유했으며 남종문인화풍을 본격적으로 구사한 조선후기 최초의 문사형(文士形) 직업화가였다. 그는 1747년부터 1748년에 걸쳐 통신사행(通信使行)의 수행화원으로 일본에 다녀왔으며 도일(渡日)할 때 성호 이익(星湖 李瀷)이 송별시를 지어주기도 하였다.
이인문(李寅文, 1745-1824경)의 <십우도(十友圖)>(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역시 승려, 문인, 도인이 함께 어울린 고사아집도(高士雅集圖) 형식의 그림이다.
화면 상부에 쓰인 화가 자신의 긴 발문(跋文)에 의하면 술과 심주(沈周)의 그림을 포함한 철형대사(澈瀅大師), 수경도인(水鏡道人), 화계노인(花溪老人), 수남왕(誰南王), 심악(瀋岳; 字는 安仁), 왕표(王豹) 등 십우(十友)를 언급하였다.
화면에는 철형대사로 추정되는 스님을 비롯하여 문인들과 도인으로 보이는 인물들이 폭포소리 들리는 심산유곡의 넓직한 바위위에 정겹게 모여앉아 그림도 감상하고 술도 마시면서 담소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옅은 청색의 선염(渲染)과 담묵(淡墨)으로 처리된 인물표현수법이 조화를 이루어 전체적으로 정갈하고 고아(高雅)한 맛이 화면 전체에 감돈다. 화면 상부에 십죽재 서직수(十竹齋 徐直修)의 찬문(贊文)과 표암 강세황(豹菴 姜世晃)이 쓴 화제가 적혀있다.
<십우도>와는 대조적으로 이인문의 <나한문슬도(羅漢問蝨圖>(간송미술관 소장)에는 한 스님이 소나무 우거진 숲속에서 바위에 걸터앉아 윗몸을 다 드러내놓고 바지가랑이를 걷어올려 허벅지 위의 이를 잡고있는 모습이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청량한 분위기가 감도는 이 그림에는 고송유수관도인(古松流水館道人)이란 그의 호가 암시하듯이 흐르는 물과 소나무를 화면 가득히 담았으며, 스님의 찡그린 얼굴과 신체묘사가 뛰어나다. 소나무 묘사에 있어서 뛰어난 솜씨를 보였던 이인문 답게 이 그림에서도 화면을 압도하는 소나무의 표현에서 그의 기량이 십분 발휘되었다. 화면 왼쪽 하단에는 '흰 눈썹과 흰 머리 어디에도 집착이 없어라(眉皓首無住着)'라고 쓰여 있다.
단원 김홍도(檀園 金弘道, 1745-1806경)는 조선후기의 화가들 가운데 심사정과 더불어 가장 많은 도석인물화를 남겼으며 그 가운데 한국적인 특색을 보이는 걸작들이 포함되어 있다. 간송미술관 소장의 김홍도의 <노승염송도(老僧念誦圖)>는 염불하면서 걷고 있는 노승과 육환장을 들고 뒤따르는 동자만을 배경을 생략한 채 크게 부각시킨 그림이다.
화면 상부에 쓰인 '입으로 겐지스강의 모래만큼 외우고 또다시 겐지스강의 모래만큼 외운다(口誦恒河沙復沙)'라는 제사(題辭)대로 풍성한 장삼자락을 끌면서 염불에 몰두해 있는 구도승의 진지한 옆모습과 동자의 천진한 얼굴, 선염과 필선이 대조를 이루며 펼쳐지는 의습선의 처리솜씨가 능란하다.
이와 똑같은 내용의 제문이 김홍도가 그린 선면(扇面) <승하도해도(乘蝦渡海圖)>에도 쓰여있다. 커다란 새우등 위에 올라타고 파도를 헤쳐 강을 건너는 노승이 주제인 이 그림에 보이는 새우의 거대한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다. 새우를 타고 도강하는 승려를 그린 작품의 예로 중국의 경우 명대의 오빈(吳彬)이 그린 타이베이 고궁박물원 소장의 <18 응진도(應眞圖)>가 있다.
김홍도의 <고승기호도(高僧騎虎圖)> 역시 나한도 계통의 영향을 받은 그림으로 호랑이 등에 올라 탄 스님을 묘사했다. 호랑이 등에 타고 있는 라한의 도상은 명대 정운붕(丁雲鵬)이 그린 백묘화풍의 <18 라한도>(臺北 古宮博物院 所藏)의 예가 있다. 김홍도의<염불서승도(念佛西僧圖)> (간송미술관 소장)는 연꽃 위에 가부좌하고 앉아서 참선삼매에 든 노승의 경건한 뒷모습을 그린 것이다.
김홍도의 <묘길상도(妙吉祥圖)>(간송미술관 소장)는 고깔 쓴 두 순례승이 금강산 마하연(摩菏衍) 위쪽에 있는 마애불에 절하고 있는 모습을 담백한 필치로 그린 것이다. 화면 오른쪽 상단에 '묘길상(妙吉祥)'이란 화제가 적혀 있어서 이 마애불은 문수보살임을 알 수 있다.
19세기에 활약한 김후신(金厚臣)도 이와 유사한 <묘길상도>를 남겼다. 주제와 구도에서 김홍도의 영향이 엿보이는 김후신의 <묘길상도>에서는 인물묘사에 치중하여 김홍도보다 더 꼼꼼하고 세심한 의습선을 사용하였다.
김홍도의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풍속화첩>중 <점괘도(占卦圖)>는 회색 장삼에 고깔을 쓴 스님과 흰 장삼에 삿갓을 쓴 노승이 함께 목탁을 두드리며 땅바닥에 부적을 펼쳐 놓고 시주자를 모으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시주돈을 꺼내기 위해 장옷을 머리에 얹어 놓고 치마 속의 주머니를 꺼내느라 속고쟁이가 드러난 앳띤 여인과 길게 땋아 늘어뜨린 긴 머리 위에 커다란 소쿠리를 이고 손에는 긴 장죽과 부채를 들고 서서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는 어린 소녀가 그려져 있다. 등장인물들의 얼굴표정에는 김홍도 특유의 재치와 정감이 잘 드러나 있다.
이러한 소재는 18세기 조선후기의 다른 화가들도 즐겨 그린 듯이 보이며 기곡 오명현(箕谷 吳命顯, 18세기)의 <점괘도>(서울 개인소장)(도 16) 와 국립박물관 소장의 인장을 판독 할 수 없는 화가가 그린 <점괘도>가 남아있다. 이 두 그림에 등장하는 스님들은 목탁 대신에 요령을 들고 소매 폭이 유난하 넓고 사치스러운 가사장삼과 독특한 고깔을 착용하고 있는 것이 김홍도가 그린 스님과 다르다.
특히 오명현의 <점괘도>의 스님은 요령을 흔드는 순간에도 한쪽 눈은 소나무 밑에 펼쳐진 부적 옆에 쭈구리고 앉아서 돈을 꺼내려고 벌리는 더벅머리 소년의 돈주머니에 관심을 갖고 쳐다보고 있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풍자해서 표현하였다.
이외에도 김홍도는 달밤에 사립문을 두드리고 서 있는 스님을 그린 <월하고문(月下敲門)>(간송미술관 소장), <기려문승(騏驢問僧)>(간송미술관 소장) 등을 남겼다. 그의 <기려문승>에는 나귀 탄 선비가 길을 지나갈 수 있게 길가에 비켜 서있는 스님이 묘사되어 있다. 간략한 묵점으로 표현된 등장인물들의 안면묘사에서 김홍도 특유의 양식적 특성이 보인다. 그밖에도 김홍도는 비구니나 여신도들도 그린 사실이 서유구(徐兪榘)의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의 샐활용품 및 취미와 골동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는 [이운지(怡雲志)]중에 나오는 예완감상(藝翫鑒賞)의 항목 가운데 부록으로 붙어 있는 <동국화첩(東國畵帖)> 부분에 적혀있다.
'김홍도는 민간마을의 통속적인 모습들을 그려내고 있는데, 무릇 시정의 유흥가 풍경,
길 떠나는 나그네의 행장, 땔나무를 팔고 오이를 파는 일상생활의 모습, 스님과 비구니 및
여신도들의 행색, 봇짐을 지고 구걸하는 걸인의 모습 등이 형형색색으로 각기 그 오묘함을
극진하게 드러내고 있다.'
위의 내용으로 미루어 김홍도는 스님들의 행색을 일반 서민들의 통속적인 모습들과 별다른 구별 없이 있는 그데로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으로 보여진다. 우리나라 회화사상 제일인자 로 손꼽히는 김홍도는 도화서 화원으로 세차레 어진도사(御眞圖寫)에 참여하였는데 1773년(영조 49) 영조어진(80세상), 1781년(정조 5) 정조어진(31세상) 및 1791년(정조 15) 정조어진(41세상) 도사(圖寫)의 동참화사(同參畵師)로 참여하였다. 그는 정조의 명을 받고 김응환(金應煥)과 더불어 금강산 등 강원도 일대를 기행하며 그 곳의 명승지를 그려 바쳤다.
조선후기 풍속화에 있어서 단원 김홍도와 더불어 쌍벽을 이룬 인물인 혜원 신윤복(惠園 申潤福) 역시 승려의 모습을 화폭에 담았다. 그의 간송미술관 소장의 <풍속화첩>중 <단오풍정(端午風情)>, <노상탁발(路上托鉢)>, <니승영기(尼僧迎妓)> 등에는 승려의 모습이 보인다.
신윤복의 <단오풍정>에는 단오날 시냇가에서 머리감고 목욕하는 여인들을 바위 뒤에 숨어서 몰래 훔쳐보는 두 동자승의 익살스러운 모습이 잘 표현되어 있다. 그의 <노상탁발>에는 큰 북을 치면서 노상에서 탁발하는 스님과 시주돈을 꺼내느라 치마를 걷어 올리고 서있는 여인을 뒤돌아서서 쳐다보는 선비를 신윤복 특유의 고운 설채(設彩)와 섬세하고 유려한 필치로 묘사한 그림이다.
신윤복의 <문종심사(聞鍾尋寺)>에는 흰 무명 바지 저고리에 고깔을 쓴 비구니 스님이 산문 밖까지 마중나와 나귀를 타고 산사를 찾은 젊은 여인 일행을 향해 합장을 한 체 절을 하며 맞이하는 장면이 실감나게 묘사되어 있다. 섶 짧은 회장저고리에 폭 넓은 치마를 입고 머리에는 쓰게치마를 두른 주인공은 여염집 규수와는 다른 신분의 여인임을 알 수 있다. 화면 인쪽 상단에는 '솔숲 우거져 절은 아득한데 찾는 이에겐 다만 종소리 들릴뿐(松多不見寺 人客但聞鍾)'이란 제사(題辭)가 쓰여 있다.
이외에도 쓰게치마와 장옷을 쓴 여인들이 산사(山寺)를 찾아가는 도중에 고깔 형태의 송라립(松蘿笠)을 쓴 두 젊은 승려에게 길을 묻는 장면을 그린 신윤복의 <노상문승(路上問僧)>(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이 있다. 이러한 일련의 신윤복이 그린 풍속화적 성격의 승려도들은 한결같이 한국적 정취를 발휘하고 있어서 다른 나라의 그림들과 구별되는 독특한 미감을 불러 일으킨다.
조선후기의 풍속화가로 김홍도의 화풍을 토대로 훌륭한 걸작들을 남긴 긍재 김득신(兢齋 金得臣, 1754-1822) 역시 <포대흠신도(布袋欠伸圖)>(간송미술관 소장)나 <송하기승도(松下棋僧圖)>와 같은 승려를 주제로 한 그림을 남겼다. 그의 <송하기승도>에는 커다란 소나무 그늘 아래에서 장기를 두고 있는 두 젊은 승려와 그 곁에서 훈수를 하고있는 노승이 그려져있다. 젊은 스님은 잠뱅이 차림에 맨발인데 반해 노승은 장삼을 차려입고 고깔을 썼으며 목에는 커다란 염주를 걸고 있다.
김득신은 화원 응리(應履)의 아들로 김응환(金應煥)의 조카이며, 동생인 석신(碩臣)과 양신(良臣), 그리고 아들인 건종(健鐘)과 하종(夏鐘)도 모두 화원이었으며, 벼슬은 첨사(僉使)를 지냈다. 그의 대표 작으로 간송미술관 소장의 <파적도(破寂圖)>가 있다.
그의 아들인 김건종이 그린 <취승도(醉僧圖)>가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나이 어린 동자승에게 두 선비가 술을 권해 취하게 만드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술 취한 동자승의 앳띤 얼굴과 장난을 즐기는 두 선비의 얼굴표정이 잘 드러나 있다. 중국에도 남송대(南宋代)의 유송년(劉松年)이 그린 <취승도>(타이베이 고궁박물원 소장)가 남아 있는데 술 취한 스님이 큰 소나무 아래 바위에 �아서 동자가 받쳐든 두루말이에 글씨를 쓰는 장면을 묘사한 것으로 왼쪽에 서있는 동자는 큼지막한 벼루에 먹을 갈고 있다.
그림에 보이는 어린 동자승은 두 선비들의 짖궂은 강압에 의해 술을 마심으로써 계율을 지키지 못하고 말았으나 그의 헤롱거리는 표정으로 보아 싫지않은 것이 역력하다.
조선말기의 혜산 유숙(蕙山 劉淑, 1827-1873)은 그의 <오수삼매도(午睡三昧圖)>(간송미술관 소장)에서 짚신을 신고 땅바닥에 웅크리고 앉아서 잠시 오수삼매에 든 노승을 그렸다. 주제와 자세에 있어서 김홍도의 영향이 엿보인다. 선미(禪味)가 짙게 풍기는 이 그림은 지물(持物)이나 배경없이 오직 인물만을 화면 가득히 포치한 간결한 구도와 자유자재한 필묵법으로 이루어진 거침없는 가사의 의습선으로 인해 삼매에 든 인물의 이미지가 강하게 느껴지며, 노승의 앉은 자세와 짚신의 묘사에서 김홍도의 영향을 엿 볼 수 있다.
유숙은 철종(哲宗)대의 화원으로 벼슬은 사과(司果)를 지냈으며 문인화풍의 산수화와 인물화를 잘 그렸다. 1852년과 1861년 철종어진제작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유숙의 산수화인 <세검정도(洗劍亭圖)>(국립중앙박물관 소장)에는 친지들과의 아집(雅集)을 위해 세검정에 있는 친지의 정자를 찾아가는 승려의 모습이 화면 중앙에 아주 작게 그려져있다. 이와 유사한 주제의 그림이 바로 신윤복이 그린 간송박물관 소장의 <산수도>이다. 비록 승려가 아주 작게 묘사되어 있으나 이들 그림을 통해서 당시 승려들이 아름다운 자연속 경치 좋은 곳에 위치한 정자에서 서로 만나 정겨운 아회(雅會)를 통해 풍류를 즐긴 것을 알 수 있다.
소치 허련(小癡 許鍊, 1809-1892)의 <관폭도(觀瀑圖)>(학고재 소장)에도 소나무 아래 바위위에 앉아서 구름을 바라보며 자연을 즐기는 젊은 승려의 옆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화면 오른쪽 상단에는 허련이 추사체로 쓴 다음과 같은 제시(題詩)가 쓰여 있다.
붓으로 절벽에서 샘물 쏟아지는 곳을 그려놓고 筆到斷厓泉落處
암석위엔 구름을 바라보는 스님을 앉혀 놓았지 石邊添箇看雲僧
청신한 풍격을 보여주는 이 <관폭도>는 담청(淡靑)과 담갈(淡褐)의 조화로운 설채(設彩)와 화면 중앙을 가로지르는 여백의 효과가 돋보이는 그림으로 심산유곡에서 청고(淸高)하고 담아(淡雅)한 생활을 영위하는 선승들의 고담청랭(枯淡淸冷)한 분위기를 잘 묘사하고 있다.
소치 허련은 <달마벽관도>와 같은 선종화(禪宗畵)도 남겼다. 그는 초의선사(草衣禪師, 1786-1866)나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의 지도를 받아 조선왕조 말기화단에 선미(禪味) 넘치는 남종문인화풍을 정착시킨 추사파의 대표적인 화가로 그의 화풍은 가전(家傳)되어 아들인 미산 허형(米山 許瀅)과 손자인 남농 허건(南農 許健)과 의재 허백련(毅齋 許百鍊) 등에게 계승되어 호남화단에 크게 영향을 미쳤으며 오는날까지 지속되고 있다.
조선말기 화단을 이끌어나간 천재화가였던 오원 장승업(吾園 張承業, 1843-1897)도 <송하노승도>를 비롯 몇폭의 승려를 주제로 한 그림을 남겼다. 그는 산수화 외에도 중국풍의 고사인물화나 <수기화상포대도(睡起和尙布袋圖)>와 같은 도석인물화를 남기기도 하였다.
장승업이 그린 서울대학교박물관의 <송하노승도(松下老僧圖)>는 커다란 소나무 아래에 앉아서 꿇어엎드린 호랑이를 쓰다듬고 있는 노승과 노승 뒤에 긴 석장을 들고 서있는 동자승이 그려져 있으며 『고씨화보』에 실려있는 장승요(張僧繇)의 <인물도>와 유사하여 화보류(畵譜流)를 참고한 것으로 보이며 커다란 소나무가 있는 자연 속에 인물을 배치하여 인물보다는 소나무 묘사에 주력한 점이 다르다 하겠다.
바위의 준법(皴法)과 수지법(樹枝法)은 절파(浙派)화풍에 가까우나 명대의 대진(戴進; 1388-1462)이 그린 <나한도>(타이베이 고궁박물원 소장)와 비교해 볼 때 장승업은 인물보다는 소나무와 자연의 묘사에 치중한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노승이 호랑이 머리를 쓰다듬고 있는 모습을 그린 예로 전 이상좌(傳 李上左)필의 <나한초고(羅漢草稿)>중 <제5 나한도>와 정선(鄭敾)의 <송암복호도(松岩伏虎圖)> 등이 있다. 장승업의 <송하노승도>와 양식적으로 유사한 작품이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의 <송하노승도>이며, 호랑이 대신에 원숭이가 노승에게 예물을 바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이외에도 장승업은 두 동자승과 용을 그린 <이승관룡도(二僧觀龍圖)>(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 및 폭포 아래의 사슴을 내려다 보는 나한을 그린 <나한간록도(羅漢看鹿圖)>(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 등을 남겼다.
장승업은 우리나라 근대 및 현대 회화와 관련하여 가장 주목되는 화가로 조석진(趙錫鎭, 1853-1920)과 안중식(安中植, 1861-1919)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고, 이 두 사람을 통하여 그 영향이 현대화단의 원로들에게까지 끼치게되었다.
3. 조선시대 이후의 승려도
한국에 있어서 근.현대(구한말-현대)는 그 어느 때보다도 다사다난했던 시대이다.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의 암흑시대에 살았던 화가들이 그린 승려도에는 선배화가들의 그림에서는 드러나지않던 우수와 고독감이 배어있다. 그 좋은 예로 이교익(李敎翼), 이형록(李亨祿), 지운영(池雲英), 고희동(高羲東) 등의 <승려도>를 들 수 있다. 송석 이교익(宋石 李敎翼, 1807년생)의 <노승소요도(老僧逍遙圖)>(국립중앙박물관 소장)에는 칠흙 같이 캄캄한 밤에 흰 가사를 입은 노승이 늙어 꼬부라진 몸을 석장에 의지한 채 홀로 걷고 있는 외로운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교익은 산수. 인물화를 잘 그리고, 특히 나비그림으로 유명했다.
이형록(李亨祿, 1808-?) 전칭의 <고승관수도(孤僧觀水圖)>에 보이는 소나무 아래 시냇가에서 걸망을 내려놓고 쉬고 앉아 있는 스님의 지치고 야윈 옆 얼굴에는 외로움이 깃들어 있다.비교적 치밀하게 묘사된 푸른 솔잎과 바위 사이로 흐르는 맑은 시냇물의 표현으로 인해 고적(孤寂)하고 청냉(淸冷)한 분위기가 잘 드러나 있다. 이형록(字 汝通 松石)은 화원으로 특히 진채로 그린 <책거리 그림>을 잘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운영(池雲英, 1852-1935)의 <송하노승도(松下老僧圖)>에도 세로로 긴 화면 가득히 곡선을 그리며 뻗어 올라간 커다란 소나무 밑둥에 몸을 기댄 채 자연을 응시하는 노스님의 고적한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활달한 필치와 선염으로 처리된 회색 가사표현과는 대조적으로 스님의 연륜을 암시하는 히끗히끗한 흰 수염과 흰 머리털 및 착가라앉은 듯 한 표정이 돋보이는 스님의 내면묘사가 일품이다.
화면 오른쪽 상단에 '소나무 뿌리 자태가 고요하고 뭇사람들 마음을 비운다(松根態寂 萬衆無心)'라는 제발에 이어 그의 호(號)인 백련(白蓮) 이란 관서(款署)가 있다.
충주 태생인 지운영의 또 다른 호는 설봉(雪峰)이며 유불선(儒佛仙)의 제반학문에 박통(博通)하고 시서화(詩書畵)에 능했다. 그는 갑신정변이후 일본으로 망명한 박영효(朴泳孝), 김옥균(金玉均) 등을 암살키 위한 친로정권(親露政權)의 자객으로 일본에 파견되었다. 이 일에 패한 뒤 본국에 압송되어 유배생활을 겪은 뒤 만년에는 그림과 시로 자오(自娛)하였다. 글씨는 해서(楷書)에 능하고 임웅(任熊)같은 상해화파의 영향이 보이는 달마도 <서래진의(西來眞意)>(金海根 소장)도 남겼다.
춘곡 고희동(春谷 高羲東, 1886-1965)의 <노승도>(학고재 소장)는 낙엽지는 바람부는 가을날 나무 아래 풀밭에 바랑을 내려놓고 앉아서 염주알을 굴리며 앉아있는 노승을 묘사한 그림이다. 건장한 체구와 큼직한 손가락과는 대조적으로 하늘로 쳐든 유난히 튀어나온 광대뼈가 인상적인 야윈 얼굴에 우수가 깃들어 있다. 화면 외쪽 하단에 다음과 같은 제시(題詩)가 적혀있다.
노승이 바랑을 베고 누워 老僧枕鉢襄
꿈결에 금강산 구경 夢路金剛路
우수수 낙엽소리에 蕭蕭落葉聲
놀라 깨어보니 저무는 가을산 驚起秋山暮
현대의 한국화가들은 산사(山寺)에서 은둔생활하는 승려의 모습을 즐겨 그렸는데 이는 복잡한 도시생활에서 탈피하여 순수한 자연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소망과 그 속에서 탈속한 삶을 영위하는 스님들에 대한 동경심이 그들의 작품에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부류의 작품으로 변관식의 <송광사의 가을>(학고재 소장), 김기창의 <산사(山寺)의 뜰>, 송수남의 <산사의 새해 아침> 등이 있다.
소정 변관식(小亭 卞寬植, 1899-1976)의 <송광사의 가을>에는 송광사 입구 돌다리 위에 서있는 스님의 모습이 보이며 노랗게 물든 나뭇잎이 산사에 찾아든 가을을 알려준다. 이 그림에서와 같은 짙은 먹색의 갈필(渴筆)과 적묵법(積墨法)을 사용한 묘사기법은 변관식 산수화의 두드러진 양식적 특색이다.
운보 김기창(雲甫 金基昌)의 1975년 작품인 <산사(山寺)의 뜰>에는 마당을 말끔히 빗자루로 쓸고 있는 붉은 가사를 입은 산사의 스님을 그린 것이다. 민화풍으로 그린 화면에는 나무가지 옆에 빨간 모란꽃 화분이 커다랗게 그려져 있고 절문과 탑 뒤로 뒷산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다. 소박하고 간략한 필치로 구사된 그림에도 불구하고 한국 절의 분위기가 잘 드러나 있다.
남천 송수남(南天 宋秀南)의 <산사의 새해아침>에는 붉은 태양이 떠오른 새해 아침에 법당에 결가부좌하고 앉아 참선(參禪)하는 스님이 묘사되어 있다. 풍경 매달린 법당 뒤로 보이는 병풍처럼 둘러쳐진 새까만 산속의 초록빛 나무들이 무지개 모양으로 띠를 두르고 있는데 햇빛을 받아 더욱 푸르다. 이 후에도 송수남은 산사의 법당 안에 결가부좌하고 앉아서 참선하는 인물상을 지속적으로 그려왔으며, 이 인물상은 현대의 물질문명에 찌든 인간의 갈등과 고뇌를 자연과의 합일과 명상 내지는 끈임없이 자기를 비우는 내면적 성찰을 통해서 치유하고자하는 화가 자신의 이미지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수행하는 승려상 또는 부처의 상을 암시하고 있어서 천지인(天地人) 합일의 경지 또는 부처와 내가 하나인 경지를 묘사하고 있다. 이 일련의 작업을 거쳐서 1990년대에는 지극히 절제된 추상에 가까운 수묵선염(水墨渲染)으로만 처리된 좌선하는 인물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지금까지 살펴본 한국의 유명화가들이 그린 승려도에는 시대적 정서와 함께 그들이 품고 있는 스님에 대한 성속(聖俗)을 넘나드는 양면적 성격의 다양한 이미지들이 투영되어 흥미로운 모습의 승려상이 구현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면 스님들 자신이 바라본 한국의 승려상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스님들이 수묵으로 직접 그린 <승려도>는 한국의 경우 매우 희귀한 편이며 석왕사의 주지를 지냈던 석옹 철유(石翁 喆侑)의 <자화상>과 범주(梵舟)스님의 <승려도>를 그 예로 들고자 한다.
석옹 철유(石翁 喆侑, 1851-1918)의 <수묵자화상(水墨自畵象)>은 현재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간결한 필치로 배경없이 좌선(坐禪)하는 노승의 차분한 모습만을 담은 그림이다. 적요한 분위기가 감도는 이 <자화상>은 자신의 평상시 모습을 자연스럽게 꾸밈없이 드러내 보이는 작품으로 탈속한 경지가 느껴진다. 금강산파의 대표적 화승(畵僧)이었던 석옹은 표훈사, 신계사, 유점사를 비롯한 금강산 강원지역 및 경기, 전남, 경북일부지역사찰들의 불화조성과 불상의 개금(改金)을 하였으며, 현재 그의 작품은 45건 가량 알려져 있다.
중국의 경우 선승(禪僧)이었던 석도(石濤, 1642-1707)가 그의 나이 32살 때인 1674년에 그린 그의 자화상인 <종송도(種松圖)>(羅家倫 소장)와 역시 승려였던 곤잔( 殘, 호는 石谿 ,1710-1793)이 그린 <자화상>이 남아 있다. 이들 <자화상>은 <라한도> 형식의 자연 가운데 유유자적하는 스님상을 보여준다. 석도가 그린 <산수인물권(山水人物卷)>가운데 <설암화상(雪菴和尙)>(北京古宮博物院 소장)은 강위에 배를 띄워놓고 배 안에 앉아서 책을 읽는 설암화상을 묘사했다.
현대화가인 제백석(齊白石,1863-1957)이 그린 <석도화상(石濤和尙)>에는 붓을 들고 그림을 그리고 있는 모습의 석도가 묘사되어 있다.
범주(梵舟, 1943년생)스님이 최근에 그린 <승려도>에는 스님들의 일상생활, 즉 삭발, 공양, 참선, 붓글씨 쓰기, 염불, 청소, 밭갈이, 북 두드리기, 종치기 등 스님들의 다양한 일상사가 진솔하게 표현되어 있다. 화면에 등장하는 스님들은 모두 자기일에 만족스러워 하는 즐거운 얼굴표정을 하고 있다. 일반 화가들의 작품에 보이는 그림의 수요자를 위한 흥미거리 위주의 제작동기가 아닌 수행자가 본 수행인의 진솔한 모습이 담백하게 그려져 있어서 통속적인 느낌이 전혀 나지않는 것이 일반인들이 그린 그림에서 보여지는 통속적인 느낌은 드러나지 않는다.
4. 맺음말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한국의 승려도에는 승려를 바라보는 가치관의 차이와 상이한 시대의 역사적 사회적 환경의 차이에 따른 시대적 정서가 반영되어 다양한 양상의 스님모습이 표현되어졌다.
고구려 고분벽화에 그려진 스님은 주인의 융숭한 대접을 받는 존경받는 모습인데 반해, 승려의 사회적 지위가 아주 낮았고 숭유억불정책에 따른 불교의 수난기라 할 수 있는 조선시대의 사대부화가나 화원들의 그림에서는 은연중에 스님을 천시하는 사고가 반영된 스님들의 일상사중 부정적인 타락한 면을 즐겨 주제로 다루었다.
예를 들면 부적을 펼쳐놓고 시주자를 모으는 장면, 술에 취한 모습, 부녀자를 몰래 훔쳐보는 모습, 이잡는 모습, 기생을 맞이하는 장면 등이다. 이러한 주제들은 수행승의 본연의 모습과는 거리가 먼 풍모이며, 그 당시 일부 타락한 스님들의 작태가 화가들의 흥미를 불러일으킨 것으로 보이며, 스님들을 무당, 판수, 기생, 광대와 같은 계층으로 낮추어 보고 속화(俗化)시켜 표현하는 것을 보면 조선왕조시대의 숭유배불정책과 같은 정치적·사회적 환경이 화가들의 의식구조 형성에 직접 간접으로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통속적인 성격의 승려상은 중국, 일본, 동남아등의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것이다. 조선후기 일반 서민들의 생활상을 그린 풍속화의 유행에 따라 스님들의 속태(俗態)가 풍속화가들의 흥미있는 소재로 부각되었으며, 회화적인 측면에서 보면 다른나라에서 볼 수 없는 재미있는 주제의 승려도가 다양하게 제작되었다고 하겠다.
조선말기 초의선사와 추사 김정희의 지도 아래 남종문인화풍의 산수화와 묵모란으로 이름을 떨쳤던 소치 허련은 그의 문인취향대로 자연과의 합일을 통해 사사무애(事事無碍)한 걸림이 없는 자유스러운 모습의 스님을 그렸으며 그의 그림에서는 맑고 그윽한 정취가 느껴진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어려운 삶을 영위했던 화가들이 그린 승려도에는 고독하고 쓸쓸한 정취(精趣)가 스며있음을 알 수 있었다.
김기창이나 송수남 같은 화가들이 1980년대에 그린 승려도는 도심지에서 멀리 떨어진 산사의 오염되지않은 풍경 속에 사는 스님의 모습을 담고 있으며 민화나 단청과 같은 한국적 미감이 두드러지게 강조되어 있어서 1980년대에 고조된 민족적 자긍심과 한국의 전통미에 대한 재인식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일반 화가들의 작품과는 달리 심산유곡의 산사에서 수행하는 스님 자신들이 직접 그린 승려도는 그들의 고담청냉(枯淡淸冷)한 생활이 투영되어 있어서 담백하고 탈속한 맛이잘 드러나 있다.
중국의 승려도는 주로 심산유곡의 경치 좋은 곳에서 친지들과 만나 청담(淸談)을 나누는 장면, 그림 그리는 모습, 강 위에 떠있는 배 안에서 독서하는 장면 등 풍류를 즐기는 스님들을 즐겨 그린데 반해 조선조의 승려도는 수행자 본연의 모습보다는 천시되고 속화(俗化)된 표현이 주류를 이루었고 조선말기부터 해방후에는 산속에서 수행하는 모습을 즐겨 그리고 있어서 한국승려도에 보이는 주제상의 특징은 성(聖)과 속(俗)의 양면성을 표현하는데서 찾을 수 있다.
- 제11차 역사문화강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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