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느끼며(시,서,화)

미륵하생경 변상도(고려, 1350년)

Gijuzzang Dream 2008. 4. 2. 22:00

 

 
 

 미륵하생경 변상도

 

 

고려 1350년, 178cm×90.3cm, 비단 채색, 일본 친왕원 소장.

 

 

삼국 이래 뿌리깊게 신앙되었던 미륵신앙은

미륵상생경에 의한 도솔천 왕생사상과

미륵하생경에 의한 용화수하성불의 이른바 메시아 사상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앞의 것은 극락왕생의 아미타 사상과 거의 흡사한 것이지만,

뒤의 것은 오랜 후세에 석가불이 미처 구제하지 못한 중생들을 미륵이 남김없이 구제한다는 것으로,

가령 후삼국 때 궁예가 세상을 구제하러 강림한 미륵으로 자칭하기도 하였다.

이 그림은 도솔천의 미륵이 하생하여 용화수 아래에서 성불하고

당시까지 구제되지 못한 모든 대중을 성불시킨다는 미륵하생경의 내용을 도해한 것이다.

일종의 교화용 경변상도이지만

본존 미륵불을 크게 클로즈업시켜 화면을 압도하도록 구성했기 때문에

예배용의 존상화적 성격에 가까운 그림이다.

크게 2등분되는 화면의 상부는

미륵불이 용화수 아래서 중생들을 성불시키기 위해 설법하는 장면으로 전체의 2/3를 차지한다.

상부 중앙에는 미륵불이 큼직하게 자리잡고 있으며

불상 무릎 좌우로 두 협시 보살이 좀 더 크게 묘사되었는데

이 삼존은 삼각형적인 구도를 보여주고 있다.

미륵불 주위에는 보살중 10대 제자들이 좀 더 작게 그려져 있으며

이 주위를 제석 범천, 사천왕, 팔부중 등이 둘러싸고 있다.

미륵불의 머리 보주 위에서

올라간 광선이 허공으로 올라가 맴을 돌아 좌우 두 가닥으로 퍼져 나가는 곳에

구름 속에 싸여 있는 2층의 화려한 건물은 성불하기 이전에 거주하던 도솔천 궁이 분명하며

이 주위로는 상서로운 별과 달이 하늘을 수놓고 있다.

이들 하늘 세계와 미륵불이 있는 지상세계를 흰 광선 모양의 둥근 광배가 분리시키고 있는데

불보살들이 발 아래의 청문대중과도 역시 구름으로 구획짓고 있는 점에서

당시 불화의 위계에 의한 계층적 구도를 실감할 수 있다.

청문대중은 바둑판 모양의 지상에 좌우 대칭되는 구도로 묘사되었는데

오른쪽에는 남성, 왼쪽에는 여성이 배치되었다.

이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인물은 서로 마주 바라보면서 꿇어앉은 남녀상과

머리를 깎고 있는 남녀상이다.

꿇어 앉은 인물들은 2용왕으로 알려져 있지만 용왕과 용녀일 것이며

삭발하고 있는 인물들은 전륜성왕과 왕비로 생각되고

기타는 신하들과 시녀들, 또는 미륵의 부모도 포함되었을 수 있다.

하여튼 이 장면에서는 삭발하고 있는 두 인물이 가장 크게 그려지고 있어서 주인공임이 분명하다.

이 장면은 미륵불이 용화수 아래에서 성도하고 난 후

전륜성왕 내외와 모든 신하 시녀 그리고 미륵의 부모를 위시한 일체 중생을

세 번에 걸쳐 설법하여 출가성불케 하는 내용을 도해한 것이다.

  

 

 미륵하생경 변상도 세부 / 고려 1350년, 90.3cm×178cm, 비단 채색, 일본 친왕원 소장.

 

그림의 하부에는

미륵불이 하생한 성안의 궁궐, 궁전 좌우의 성벽, 궁전 앞의 보수와 보당, 궁전 주위의 칠보 등이

장엄하게 표현되고 있다.

궁전 앞 방광하는 향로가 놓인 좌우에 3인이 서로 마주보고 있는 장면과

보거를 메고 가는 장면 등은 당시 고려의 왕궁 생활을 재현해 주는 듯하다.

이보다 아래쪽에는 다시 두 장면이 펼쳐지고 있다.

왼쪽의 보거와 상대해서 두 마리의 소를 끌고 두 사람의 농부가 밭갈이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 장면은 중국 돈황 61굴의 미륵변상도에서는

한 사람의 농부가 멍에를 두 마리에 연결해 밭갈이를 하고 있다.

세속의 괴로움을 나타낸 그림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오른쪽 장면과 함께 성중 농경 생활의 풍성함을 보여주는 춘경 장면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와 대칭적으로 오른쪽에는 추수하는 이른바 추경 장면이 그려져 있다.

아랫쪽에서는 벼를 베고 위쪽에서는 도리깨로 타작하고

떨어진 낱알을 쓸고 하는 갖가지 모습이 묘사되고 있다.

 

바위굴 속에는 장자가 이를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는데 이는 미륵의 부모로 알려지고 있다.

하여튼 좌우 장면은 춘경과 추경의 풍성함, 이를 감독하는 장자들을 묘사하여

'비가 때맞추어 내려 곡식이 풍성하게 자라고 한 번 심어 7번이나 수확한다'는

하생경의 표현을 도상화시켰다고 생각된다.

돈황 61굴의 3부분으로 된 농사 장면을 좀 더 자유분방하게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불화에 등장하는 생활상들이

당시 고려 사회의 실상을 그대로 재현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지만,

(이들 불화가 중국 화첩에서 전형을 삼아 이를 닮게 그린 것으로 생각되기도 하기 때문에),

이를 통해 우회적으로 고려의 사회 구조, 사회상, 불교 사상의 역할 등을

미루어 짐작해 볼 수는 있을 것이다.

 

 

 미륵하생경 변상도(彌勒下生徑變相圖), 고려 14세기, 비단에채색, 178×90.3㎝

 

석가모니가 열반에 든 후 56억7천만년 후에

미륵불이 다시 세상에 나타나 3번의 설법으로 중생을 구한다고 한다.

이 그림은 56억7천만년을 기다릴 수 없던 사람들이

한시빨리 미륵부처가 오기를 바라는 그 염원으로 하염없이 공을 들여 제작하였다.

윗면에 미륵부처가 오시는 그 날의 모습을 크게,

아래에는 미륵부처가 다시 중생 곁에 나시고 성불하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윗 부분은 전형적인 예배도상으로, 가운데 본존인 미륵불이 다리를 아래로 내리고 앉아 있다.

(의상, 倚像)자세이고, 좌우 보살과 함께 삼존불의 형태를 이룬다.

미륵불은 붉은 가사와 가득 그려진 원문과 당초문으로 화려하다.

 

약간 위쪽으로 정면을 향하고 금니로 채색된 보관을 쓴 협시보살은 좌우에 하나씩 2명,

미륵불 발 아래 미륵불을 향하고 있는 2명의 또다른 금니로 채색된 보관을 쓴 하늘을 관장하는 천(天),

그리고 그 주변에 삭발스님(성문, 聲聞, 나한)들이 좌우로 5명씩 10명이 있다.

또 보살을 지나 양쪽 끄트머리에서 탑 등을 들고 있는 좌우의 2명씩인 사천왕(四天王),

그리고 그 위로 나머지 8부신중이 있다.

이렇게 가득채운 도상 위로 10명의 주악비천이 있고,

또 10명의 화불(化佛)이 나무구름 위에 배치되어 있다.

 

아랫부분은 미륵불이 마지막 생에 나셔서 출가하고 성불하는 모습을 담은 내용이다.

미륵불이 발밑에 용모습을 한 용왕 2명이 있고,

그 옆 화면상의 왼쪽편에는 전륜성왕 상거가 미륵불에게 감화를 받고

권속을 이끌고 출가하는 모습을 그렸다.

그 아래 전륜성왕 상거가 다스리던 시두말대성의 풍족한 모습이 그려있는데,

생활모습은 궁전과 연회의 모습, 수레와 가마 등 탈 것, 소를 몰아 논에 쟁기 가는 모습,

일년에 7번 수확하는 모습 등 경작하는 장면을 그렸으며,

가운데에는 부처님께 향로를 공양하는 모습이다.

 

이 불화는 고려불화의 화려함, 보다 세련되고 섬세한 필치, 틀에 잡힌 구성과 색채 등을

능히 볼 수 있는 작품이다. 이 불화의 화려함은 금분을 많이 쓴 까닭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면서도 분위기가 뜨지 않고 품격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채색을 적은 숫자로 썼고,

서로 멀지않은 색들을 썼기 때문인 듯하다.

 

미륵불의 가슴에는 역으로 된 만자(卍)자가 금니로 그려있고,

부처의 붉은 가사 전면에는 원문을 가득 그려 넣었다. 원문 안에는 가득한 금니의 문양들이 그려있다.

 

고려불화에서 재미있는 사실은 간혹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으나,

이 원문이 옷주름에 접히더라도 항상 원형을 유지한다는 것이다.

이 불화에는 부처님이 밟고 있는 연화대좌와 보살들의 연화대좌, 미륵불의 연화좌 사이 등

합하여 7개의 연꽃이 큼지막하고 탐스럽게 표현되었다.

 

한편, 고려불화는 우리나라에 10여 점이 소개되고 있으나 이 작품들도 일본에서 사온 것들이다.

고려불화가 일본에 전래된 것은 주로 배불정책의 조선 전기때이다.

조선의 배불 정책으로 인하여

고려 때까지 보호되던 막대한 사찰과 그에 딸린 경전, 조각, 회화, 기물 등이 오갈 데가 없어지게 된다.

많은 사찰들은 폐찰되고, 심지어는 유생들의 손에 의해 불태워지거나

서원 등으로 변해지고, 이런 와중에 여전히 불교를 숭상하던 일본에서 국가적인 입장으로

조선에 대장경을 요구하게 되자 조선은 대장경과 함께 범종, 불화들을 전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조선의 사찰 90%가 소실되고,

사원건축들과 함께 그동안 전해오던 불화, 불경, 불상 등도 모두 불타버려 사라졌으나

일본에 건너간 회화들은 대체적으로 잘 보존되어 우리가 지금 찾아볼 수 있게 된 까닭이다.

현재 전하는 고려불화는 모두 13세기 이후의 것들로, 14세기 작품이 주요이다.

고려문화의 가장 극성기인 11-12세기의 작품들이 남아있지 않아 아쉬울 따름이다.

고려의 무신정변, 몽고침략, 홍건적의 침입 등은 전국토를 황폐화시켰고,

따라서 고려의 예술품들은 보존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부처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

        

              

 

 

미륵하생경변상도(彌勒下生經變相圖). 고려, 14세기

비단에 채색, 178.0x91.0.3cm, 일본 지은원 소장.

 

석가모니께서 열반에 든 후 56억 7천만년 후에 미륵불이 다시 세상에 나타나

3번의 설법으로 중생을 남김없이 구한다고 합니다.

그 세월이 언제인지 저는 도저히 꼽아볼 수 없어 부처님을 만나뵈는 것은 틀린 것 같습니다.

 

하지만 부처님을 섬겼고 이 곳에 살던 고대인들은

미륵부처님께서 다시 오시기만을 손꼽아 기다린 듯 합니다.

이 땅 어디에 가든 미륵부처님을 뵈올 수 있을 뿐더러

지명들도 미륵부처님이 계시는 곳들로 가득합니다.

 

56억 7천만년을 기다릴 수 없던 사람들은 한시 빨리 부처님이 오시기만을 바랐을 것이고

그 넘치는 염원으로 이 땅을 미륵부처님이 상존해 계시는 곳으로 만든 것만 같습니다.

 

이 그림도 그 넘치는 염원으로 하염없이 공을 들인 그림입니다.

미륵부처님께서 오시는 그날의 모습을 윗면에 크게 그리고

아래에는 미륵부처님께서 다시 중생곁에 나시고 성불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림은 크게 두부분으로 나뉘게 됩니다.

 

위 부분은 전형적인 예배를 위한 도상입니다.

가운데 미륵불이 다리를 내리고 앉아 계십니다. 이런 자세는 의상이라고 합니다.

좌우로 보처 보살님이 큼지막하게 계셔서 삼존불을 이룹니다.

 

그 주변에 많은 분들이 계신데 하나하나 따져봅시다.

좌우 보처보살님 약간 위쪽으로

정면을 향하고 금니로 채색된 보관을 쓰신분은 또다른 보살님들로

좌우에 한분씩 2분이 계십니다.

부처님의 발 곁으로 부처님을 향하고 있는 두 의 또 다른 금니로 채색된 보관을 쓰신 분이 계신데 이 분들은 하늘을 관장하는 천(天)입니다.

 

그리고 그 주변에 삭발하신 스님(성문)들이 좌우로 5분씩 10분이 계십니다.

그리고 보살님을 지나 끄트머리에 계시고 탑 등을 들고계신(좌우로 2분씩 4분) 사천왕,

그리고 그 위로 나머지 분들은 8부신중이십니다.

잘 알려진 아수라를 비롯해 천, 야차, 용 등이 팔부신중에 들어가죠.

 

이렇게 가득채운 도상 위로 10분의 주악비천이 계시고 또 10분의 화불이 계십니다.

이것으로 윗 부분의 예배도상은 다 분석한 것입니다.

 

 

아랫부분은 미륵부처님이 마지막 생에 나셔서 출가하고 성불하는 모습입니다.

하지만 경전을 읽지 않아서 저도 자세한 내용은 잘 모릅니다.

대충 들은바를 이야기하자면 미륵부처님의 발 밑에 용모습을 한 용왕 두분이 계십니다.

 

그리고 용왕 바로 옆 화면상의 왼쪽 편에

전륜성왕 상거가 미륵부처님께 감화를 받고 권속을 이끌고 출가하는 모습이 그려있습니다.

 

화면상의 오른쪽으로는 보녀사미파제가 그 권속을 이끌고 출가하는 모습입니다.

그 아래로는 전륜성왕 상거가 다스리던 시두말대성의 풍족한 생활 모습이 그려져있습니다.

생활모습은 궁전과 연회의 모습, 수레와 가마, 그리고 소를 몰아 논에 가는 모습,

일년에 일곱번이나 수확하는 모습 등을 그리고 있습니다.

가운데로는 부처님께 향로를 공양하는 모습입니다.

  

도상이 꽤 복잡한 그림이라 읽으시는 분도 설명하는 저만큼 지치셨을 겁니다.

 

고려불화를 보시면 일단은 그 화려함에 압도되실 것입니다.

보다보면 세련되고 섬세한 필치

그리고 틀에 잡힌 구성과 정말 잘썼다 싶은 색채에 황홀해질 것입니다.

너무 극찬 일색인 것 같지만 사실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요.

부처님을 일생에 뵙는 것만큼 일생에 볼 수 있다는 것이 감격스러운 그림같습니다.

 

일단 그림이 무척 화려해보이는 것은 금분을 많이 썼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분위기가 뜨지않고 품격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채색을 적은 숫자를 썼고

서로 멀지 않은 색들을 썼기 때문인 듯합니다. 아마도 고려인들만의 감각이었겠죠.

 

부처님의 가슴엔 역만자가 금니로 그려져 있고

주목해야할 것은 부처님께서 입으신 붉은 가사 전면에 가득한 원문입니다.

원문 안에는 가득한 금니의 문양들이 그려져있습니다.

고려불화에서 재밌는 것은 간혹 안그런 경우도 있지만

이 원문이 옷주름에 접히더라도 항상 원형을 유지한다는 것입니다. 재미난 발상이죠.

 

고려불화에서 가장 쏠쏠하게 감상할만한 것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연꽃입니다.

이 그림에는 부처님께서 밟고계신 연화대좌와 보살님들께서 발고 계신 연화대좌

그리고 부처님의 연화좌 사이에 연꽃 이렇게 7개의 연꽃이

큼지막하고 풍성하게 그려져있습니다.

고려불화의 연꽃은 언제 봐도 어느 그림을 봐도 탐스럽고 맛깔납니다.

 

이 그림은 고려에서 그려진 그림이지만 현재 일본 지은원이라는 절에 소장되어있습니다.

이 지은원이라는 절에는 이 외에도 몇점의 고려시대 불화가 더 있는데

아마도 무슨 연유가 있겠으나 정확하게는 알 수 없습니다.

 

고려의 불화가 일본에 전래된 것은 주로 조선 전기 때의 일로 보여집니다.

숭불하였던 고려와 달리 조선은 배불을 정책적으로 하였기 때문에

고려 때까지 보호되던 막대한 사찰과

그에 딸린 경전, 조각, 회화, 기물 등이 오갈 데가 없어집니다.

많은 절이 국가의 정책으로 폐찰되고 심지어는 유생들의 손에 불태워지기도 합니다.

이런 와중에 여전히 불교를 숭상하던 일본은

국가적인 입장에서 조선에 대장경을 요구합니다. 조선은 거의 거부하지 않고 보냅니다.

대장경과 함께 범종, 불화들도 전한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한국에 남겨진 불화도 많았을 겁니다.

하지만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조선에 있던 사찰의 90퍼센트가 모두 타버리고 

오래된 사원건축들과 함께 그 사찰에 내려오던 온갖 서적, 불상과 함께

이러한 회화들도 모두 타버립니다.

반면 일본에 건너갔던 회화들은 대체적으로 잘 보존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우리의 고려불화를 보려면 일본으로 가야하는 겁니다.

최근에 한국에서도 고려불화가 10여 점이 소개되었는데

이 작품들 역시 모두 일본에서 사온 것들입니다.

 

흔히 하는 오해 중에 현재 일본에 있는 130점 정도의 고려불화가

임진란 이후나 일제때 나간 것으로 생각하시는 분이 많은데 사실 그렇진 않습니다.

일제 때 일본으로 나간 것은 청자나, 고구려,백제,가야의 고분 유물들이죠.

  

한 가지 더 비극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현재 전하는 고려불화는 모조리 13세기 이후의 것이고 13세기 것조차 드문편입니다.

주로 14세기것이죠. 고려문화의 가장 극성기는 11세기와 12세기 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있어서 11세기와 12세기의 고려는 황폐 그 자체입니다.

고려가 기우는 13~14세기의 유물들이 이 정도 수준이라면

과연 그 극성기에는 어떠한 걸작들이 태어났을까요?

아쉽게도 풀 수 없는 수수께끼가 되어버린 겁니다.

 

이런식으로 고려의 반토막이 초토화 된것은

무신정변 등의 수도에서 일어난 난리도 난리지만

몽고의 침략이 무엇보다도 가장 큰 비극이었습니다.

몽고의 침략과 고려 무신정권의 안일한 방어는

강화도와 몇 개의 도서를 제외한 전국토를 황폐화시킵니다.

그리고 홍건적 등이 또 몇차례 개성을 황폐화 시키며

고려의 예술품들은 목숨을 부지하지 못합니다.

 

한국미술사를 공부하는데 있어서 가장 큰 고통과 비극은 지나치게 황폐해진 국토입니다.

우리에게 부여,고구려,백제 등의 진정한 역사책이 있고 그 수도를 볼 수 있었다면,

금성의 진정한 모습을 볼 수 있고

개경의 진정한 모습과 가득한 서책과 서화를 볼 수 있었다면

우리의 역사와 미술사는 10번도 더 고쳤어야 할 것입니다.

 

매우 잘 보존되어온 일본,

상대적으로 잘 보존되어온 중국과 견주어 너무도 아쉬운 점은

한국미술사의 질이 아니라 남아있는 양입니다.

 

걸작이 가득한 송시대의 중국회화를 보면서

7세기와 8세기 목조건축물 그리고 회화들이 존재하는 일본을 보면서

그 쓰라림과 부러움은 말할 수가 없습니다.

나라를 보존하는 것의 중요성을 미술사를 공부하면서 너무도 잘 배울 수 있었습니다.

 

본존인 미륵불, 좌우로 천과 나한이 보인다.

 

 

구름 위의 비천과 나무구름 위의 화불  

 

 

미륵불의 붉은 가사와 가득 그려진 원문과 당초문,

화면상의 오른편으로 천이 합장을 하고있다.

 

 

좌협시보살과 권속들

 

 

우협시보살의 전체모습


보녀사미파제의 권속들

 

향로와 공양인들

 

 

경작하는 백성들의 모습

 

 

전륜성왕 상거의 권속들


우협시 보살의 연화좌


미륵불의 연화좌와 연꽃

 

 

 

 

 

 

 

 

- 출처 : 이종영의 출한 한국미술사 산책길(Cyworld.com)

 

 

 

 

 

 

 

A Mirage on The Water / Yuhki Kuramo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