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서구(李書九, 1754-1825)
조선, 19세기 전반, 비단에 색, 85.3× 55.2㎝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사모에 쌍학운문 흉배가 부착된 현록색 운문단 단령을 착용하고
정2품 삽금대를 띤 좌안칠분의 초상화이다.
유물카드에 의하면 1966년 홍순창(洪淳昌)에게서 구입하였다.
'척재 초상화'로 알려져 있으며
척재(惕齋)는 조선후기 문신 이서구의 호이다.
이서구(1754-1825)는 조선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전주. 자는 낙서(洛瑞),
호는 척재(惕齋), 강산(薑山), 석모산인(席帽山人), 소완정(素玩亭), 녹천관(綠天館) 등이다.
1774년 정시문과에 급제하였고, 지평과 교리를 거쳐 대사간, 이조판서, 대사헌, 우의정 등을 지냈다.
박지원(1737-1805)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실학자들과 교유하였다.
글씨와 시문에 뛰어나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와 함께 사가시인(四家詩人)으로 일컬어진다.
엷은 갈색으로 얼굴 윤곽과 이목구비, 인중, 주름살 등을 그리고
잔붓질과 훈염으로 얼굴의 굴곡과 입체감을 표현하였다.
양쪽 귀에서 광대뼈 아래쪽으로는 분홍색 잔선을 길게 연접하여 그어내리고 홍염을 주었다.
눈과 코 주위의 잔붓질은 독립적인 필획이 어느 정도 드러나 있으며,
훈염의 정도가 심하지 않다.
귀의 윤곽선을 따라 분홍색으로 잔붓질을 넣고 홍염하였으며,
귓볼의 도톰한 살집이 느껴지도록 섬세하게 음영을 넣었다.
눈은 윗눈꺼풀을 짙은 먹선으로 강조하고 음영을 살짝 넣었으며 속눈썹을 그렸다.
아래눈꺼풀은 짙은 갈색으로 그렸고, 눈시울에 홍염을 약간 주었다.
입은 갈색 윤곽선을 그리고 붉은 색으로 농담을 주어 채색하였으며,
입술이 맞닿은 부분을 담묵으로 그리고, 선을 따라 분홍색을 칠하여 또렷이 표현하였다.
인중과 입주위에 하이라이트를 주었다.
눈썹과 수염을 한 올씩 그리고 음영을 주었다.
사모는 검은 바탕에 질감이 다른 먹으로 세부 형태를 정의하였을 뿐 아니라
입체적으로 보이도록 양 옆을 칠하여 둥근 형태가 강조되었다.
탕건 테두리를 사모에 붙여 그리고, 왼쪽 끝부분에 격자선을 그려 탕건을 표현하고 금관자를 그렸다.
몸체는 배채한 후 윤곽선과 옷주름을 그리고 음영을 주었으며,
운문단을 정교하게 그려 넣었다.
어깨에서 소매로 꺾어지는 선을 약간 굴려서 표현했고,
길고 좁은 주름을 여러 겹으로 그려 손을 앞으로 모은 자세를 입체적으로 나타내고자 했다.
내의 직령의 깃 부분에도 주름을 넣어 편안하게 사실적인 느낌을 주었다.
주름은 곡선을 사용하여 풍성한 느낌을 표현하였는데,
둥근 주름 안쪽으로 음영을 넣고 가는 선으로 소매 등에 잡힌 주름선을 표현한 것,
길고 좁은 주름이 몸에 맞게 굽은 모습 등은 <이채 초상>의 옷주름 표현과 친연성이 있다.
쌍학흉배는 구름의 채색층이 명확하고 수놓은 질감을 흰 선을 점선처럼 짧게 그어 표현하는 등
도식적이다. 삽금대는 금채하여 표현하였다.
이서구가 처음 정2품직에 오른 것은 1802년 호조판서가 되던 해로,
卒하기 1년 전 우의정에 제수되었으나 바로 사직하기 전까지
대략 종2품에서 정2품 정도의 관직을 유지하였다.
1802년은 이서구의 나이 49세로
흰수염이 나면서 중년에서 초로로 넘어가는 초상화의 용모와 부합되는 때이다.
선조가 두드러지 않고 미세한 잔붓질과 훈염에 의한 입체감 표현 또한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로 넘어가는 시기의 것으로 보인다.
1802년에 그려진 <이채 초상>과 비교해 볼 때,
이서구 초상도 1800년을 몇 년 지나지 않은 시점의 작품으로 좁혀볼 수 있다.
- 조선시대 초상화 1, 국립중앙박물관, 2007, p146-149, 231, 장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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